발언/연구

관점(觀點)

작성자
교인
작성일
2021.03.25
어떻게 보느냐? 관점,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 가정에서 교회에서 항상 두 길이 생긴다.


우리는 가끔 내가 죄인임을 잊어버릴 때가 간혹 있다. 망각처럼 말이다. 그러면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나 된 것처럼 율법적인 기질이나 바리새인 같은 자기 자책 또는 남 정죄의 고질병이 자주 나타난다. 이 좁은 마음에 일렁이는 작은 파도 물결 한번이 원인되어 자기를 망치고 가정을 파괴하여 결국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이 되는데 이는 마치 담을 허는 작은 여우의 출현에 비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반면 지속적인 고범죄에 파묻혀 허우적 대다가 사단의 거짓말에 속아 내가 주님의 피로 의인 되었음을 한순간 깜박 잊어 버리기 시작하면 의욕상실, 낙심낙망 하다가 결국 자포자기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다 실수를 하면서 자라 왔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남에게 알게 모르고... 좋게 말하면 도움 받고 신세지며 은혜라는 빚을 지며 살아 왔다. 나쁘게 말하면 민폐를 적잖게 끼치며 살아 왔다.


우리 속에는 늘 두 자기가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죄악의 근성을 가지고 있는 옛사람, 그리고 선의를 위해 살려는 새사람, 세계 3차 대전처럼 매 현실을 통과하며 우리 안에서는 이런 전쟁의 연속이 매일 아침밥 먹는 식탁의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다. 원수는 집안 식구라는 말씀처럼 말이다. 이 전투의 종말, 그 끝은 곧 개인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 같이 강한 것이 사랑이라 하셨는데 죽기 전까지는 새사람이 옛사람을 완전 정복하여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라는 열매를 따 먹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누구는 안된다 불가능하다 그러고 누구는 하나님 말씀은 일점 일획도 가감없이 틀림없이 다 이루어지니 가능하다 그러고, 개인적 결론은 죄인인 나는 안되지만 의인되게 하신 주님이 함께 하시어 능력 주시면 가능하다. 성경 기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일년 의인은 어려워도 하루 의인은 가능하며 개인차에 따라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 하루 의인은 힘들지 몰라도 성경 삼매경에 빠진 삼십분 내지나 한 시간 의인은 충분히 가능하다. 일년 365일 죄인에서 단 하루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364일로 형이 감해지는 사죄 노릇은 가능하다. 아무리 형편 없는 삶을 살았다 해도 이런 경험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다 있다.


마귀는 안된다는 생각으로만 자꾸 몰고 간다. 늘 우리의 실수와 죄악으로 인한 넘어진 잘못만 기억하게 하고 송사하여 정죄한다. 욥의 세 친구들처럼 말이다. 남이 말하기 전에 내 속에서부터 이런 말들이 들린다. 그러나 주님은 어제 100번 넘어졌으나 오늘은 70번 넘어졌으니 조만간 잘 걷겠구나 걸음마처럼 시행착오를 보며 소망을 넣어 주신다. 또 한 사람은 희망이 없다. 걱정된다. 어려울 것 같다. 안될 것 같다. 저러다 평생 못 걷고 발병신되는 것 아닌가 안타깝다. 가망 없다. 내 경험상 자기 중심이라는 강한 중독에서 헤어 나온 사람을 지금껏 못 봤다고 사형선고를 내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또 한쪽에서는 소망적으로 본다. 죄인과 의인, 옛사람과 새사람, 읽기와 쓰기, 그만 좀 쓰라. 망언이다. 여기가 무슨 너 네 집 안방인줄 아느냐 너 주제를 좀 알아라. 집안도 못 다스리는 사람이 무슨 글은 글이냐 중단해라 한편 계속 쓰라. 그래야 고치지.


아기가 엄마 아빠라는 말을 하기까지 수십번 수백번 머리 속으로 되뇌어 본다고 한다. 그걸 다 참아준 부모님인데 정작 부모님이 늙어 치매로 했던 말을 또 하고 물었던 말을 또 묻고 하면 내색은 못해도 속에서부터 화가 치민다. 내가 어릴 때는 부모님이 나의 말실수와 말반복을 보면서 자라고 있구나 하고 관점을 좋게 보셨는데 지금 부모님이 치매로 반복하는 것은 이제 주님 곁으로 가실 때가 되었구나 반복을 싫어하는 나의 약점을 일깨우는 교훈은 아닐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관점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도 될 수 있다. 벽에 똥칠을 해도 사랑스런 부모가 될 수도 있고 철천지 웬수가 될 수도 있다. 마귀가 왕이 되어 통치하고 있는 험난한 세월 그 속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진주는 만들어진다. 누구는 쓴뿌리라는 쓰레기더미를 쌓아 악취를 풍기지만 말이다. 현실이 문제가 아니라 현실을 대하는 내가 문제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상대하는 내가 문제라는 누군가의 말씀이 떠오른다.


알아도 모른 척 넘어가야 할 때도 있고 즉각 말해야 할 때도 있고 시간을 두고 충분한 대화를 하며 서로의 생각을 주고 받으며 교통해야 할 때도 있다. 자녀에게 비취진 스펙트럼을 거울 삼아 나를 바로 보게 되고 자녀를 통해 부모인 나를 고치게 되니 태의 열매인 자녀는 진정 보배가 맞는 것 같다. 부모에게 감사하고 자녀에게 고맙다. 가정이 건강해야 교회가 바로 선다고 누군가는 말했다.


나를 바로 보는데서 관계는 바로 된다. 나를 어떻게 보는가, 관점이라는 단어로 정리해 본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정답이 아닐 수는 있어도 참고사항으로 이보다 더 좋은 구원 재료는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특히 최측근 남편이면 아내의 말, 아내면 남편의 말, 부모면 자녀의 말, 자녀면 부모의 말, 그 속에 있는 말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나는 이를 건강한 가정, 건강한 교회라 정의하고 싶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무뚝뚝한 아버지가 어렵고 근엄해 보이는 목회자가 어렵지만 버릇없이 무례한 것은 문제지만 소신을 말할 수 있는 목회자와 교인간의 관계, 틀려도 소신을 말해야 고치지 않을까? 말하라고만 다그치지 말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면 자녀는, 교인은 말하지 말라 해도 말하고 싶어 마음에서부터 춤을 춘다.


자기 중심이라는 들보가 제거되기 전에는 가장 어려운 것이 짝을 찾는 것이고 이 들보만 제거되면 세상 속담에 식은죽 먹기보다 쉬운 것이 선보기와 결혼이라는 앞선 자의 훈계를 새겨 본다. 위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다. 다 아는 내용이지만 나의 부족도 이 글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감안하여 독자는 읽어 주셨으면 한다. 필자인 나는 글을 쓰면서 나를 고칠 수 있는 이 연구소가 있어 늘 감사한 마음이다. 독자에게는 늘 죄송한 마음이다. 부족함이 많지만 특별히 절제하고 조절하는 것이 내게는 아직 숙제로 남아 있다.


결혼 뿐 아니라 세상만사 자기를 부인하면 하나님의 뜻이 또렷하게 보이는데 자기가 강하다 보니 주님은 온데간데 없고 세상만 고집만 외모만 나만 너만 인본의 사람만 남아 판단하고 결정하니 답은 못 찾고 헤매는 것은 아닐까, 남 얘기가 아니라 필자 본인의 뼈아픈 실수담이다. 금지 표시판을 이 글에 표시해 두니 읽는 독자들 중에는 저 같은 미련함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적어 본다. 다음에는 잘한 것을 글로 적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처럼 타의 귀감이 되길 소원해 본다.


너무나도 잘 아는 내용 같은데 왜 현실만 만나면 너무나도 쉽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일까? 모른다는 반증일 것이다. 선 줄로 착각하니 매일 탄식이다. 이러면 늘 똑같은 반찬이라고 밥투정하는 유치원생처럼 설교를 나무라게 되어 있다. 남 얘기가 아니고 부끄럽지만 필자 본인의 이야기다. 마귀는 낙심케 하는 관점을 계속 보게 하고 집중케 하지만 주님의 대속이라는 관점으로 현실을 다시 보니 늘 기쁨과 감사할 일 뿐이다. 그래서 소망이 더욱 생긴다. 바로 보게 하는 관점은 안약이라. 관점이 보약이다. 옳고 바로 보게 하는 관점은 모든 악을 깨부수는 선한 양심의 망치라. 선한 관점을 가진 자가 복있는 자라고 생각한다.


살아 오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 하나, 가장 잘한 것 하나 찾아보고 말해 보라 하면 그 사람에 대한 관점의 건강도를 대충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까? 나는 죄인이다. 나는 의인이다. 옛사람과 새사람의 충돌 만큼이나 죄인과 의인의 길에서 고민하며 고만고만한 우리들 사는 교회 모습, 그 속에서 신앙 성장통이라는 진통은 계속되고 그런 진통 속에서 새생명은 탄생하고 자람과 죽음 또 다시 인생은 반복된다.


사람마다 배울 점과 고칠 점은 상존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나쁘게 보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아무리 나쁜 사람도 좋은 점을 보기 시작하면 배울 점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을 살펴 보는 것, 관점의 실전 테스트라 할 수 있는 선과 결혼, 선 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연계시를 살펴 본다. 새겨 본다. 선을 봐 보면 그 사람의 평소 관점이 다 드러난다. 속내가 다 드러난다. 신앙의 점수가 매겨진다. 중심이 다 드러난다. 가장 좋기는 상대가 어떠하든 나는 Yes라 하고 예정을 기다리는 것이 백점 신앙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차선적으로는 Yes라 말하고 후에 후회하여 깨어지는 것보다 No라 말하고 이후에 믿음 약함을 회개하고 결혼전에 미리 고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마태복음 21:28-31 말씀처럼)


사람마다 믿음의 정도가 다르니 뭐라 단편 일률적인 정답은 없겠지만 개인적 원칙을 말한다면 선보고 No라고 말한다고 해서 믿음 없다고 주홍글씨의 'A'처럼 낙인을 찍는 분위기는 지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필자의 소심한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너무 조급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느긋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이 각자에게 정해 놓으신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짝지어 놓으신 단 한 사람을 다 순리대로 다 순조롭게 만나게 하실 주님의 선하신 도움을 날마다 간구해 본다. 관점, 결혼, 항상두길, 오직한길 현재 남의 일이 미래에는 나의 일, 우리의 일이 될 수도 있기에 남을 비방하려는 비판 글이 아니라 주님이 걸어가신 좁은 오직 한 길을 다 함께 건설적으로 고민해 보고자 한다.

아래 말씀이 결혼이라는 관점과 상관없는 말씀이면 삭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마태복음 21:28-31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전체 32

  • 2021-03-26 12:00
    노선관 - 관점이 달라서 노선이 서로 나뉜다.
    결혼관 - 관점이 달라서 같이 살 수가 없다.


    거듭나기 전 우리는 모두 죄인이었다. 그러다가 주님의 피로 우리는 모두 구속받은 의인이 되었다. 믿은 이후에도 이 세상을 지배하는 마귀의 거짓말, 속이는 역사 때문에 발을 늘 깨끗하게 씻어야 하는 죄의 근성이 우리 속에는 항상 남아 있다.


    죄인이라는 관점을 잊어버리면 교만하기 쉽고 의인이라는 관점을 잊어버리면 낙심하기 쉽다. 반대로 말해서 죄인임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담대함이 결여되어 소심, 낙심하기 쉽고 의인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우쭐대기 쉽다. 물론 죄인임을 인정하면 더욱 겸손해지고 이 겸손함이 의인으로 자연스레 이어져 의인임을 인정하여 담대해지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데 여기서는 사람에 따라 좌로나 우로나 관점이 치우쳤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괴수 죄인임을 인정하면서도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담대함이라는 두 관점을 늘 가지고 살아야 마귀의 궤계에 속지 않고 사람의 말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을 바로 보는 신관, 예수관, 세상을 바로 보는 현실관, 사람을 바로 보게 하는 인관, 보이지 않는 적을 바로 보게 하는 대적관, 무엇이 성공이며 무엇이 실패인지 바로 보고 바로 아는 성패관, 빈부관 등등 관점이 바로 되어야 모든 관계, 일처리를 바로 상대하게 된다. 보는 관점이 항상 삐뚤어져 있어 신앙의 눈이 감긴 소경은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고 앞을 제대로 못 보니 길을 바로 걸어가는 것은 더 어렵다. 바른 판단과 결정도 마찬가지다. 항상 누구 도움을 받아야 살고 신세를 져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자라서 남을 가르치고 이끄는 선생이 되어야 할 터인데 젖만 먹고 있으면 주변이 근심하고 민폐가 된다. 이러다 천국을 가로 막으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로 볼 줄 아는 것을 세상에서는 '메타인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세상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이 이 메타인지 즉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로 본다는 것이다. 우리의 객관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를 넘어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평가하느냐 일 것이다. 사후 사심판 때 어떻게 되느냐를 미리 생각해 보는 것이 지혜라 배웠다.


    내가 위 글을 댓글로 다시 적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위 글은 지극히 주관적인 내용이 너무 많이 들어 있어서 독자가 읽을 때 공감이 안 가는 면이 많은 것 같다. 제 3자가 볼 때 누가 보더라도 객관의 관점이 이해할 수 있는 글이 되도록 객관화 작업을 거쳐 글을 재구성해 보고 있다. 위 글이 주님에게만 말해야 하는 방언이라면 아래 댓글은 교회에 덕을 끼치는 예언 정도로 비유해 본다. 방언은 주관적인 말이고 예언은 객관적인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주관과 객관이 있다. 주관이 없으면 줏대 없는 사람, 소신 없는 사람으로 비춰진다. 객관이 없으면 안하무인, 독단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반대로 주관이 너무 강해 객관을 참고하지 않으면 주권을 받은 선한 청지기가 아닌 악한 독재자가 되기 쉽고 객관이 너무 강해 귀가 얇으면 소신이 없어 작은 바람에도 쉽게 휘둘리는 사람이 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주관과 객관을 잘 참고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야 한다. 어떤 일을 결정함에 있어 최종은 주님과 직접 독대하여 물어봐야 하겠지만 때로는 주의 종, 선지자를 통해 내게 말씀하실 때도 있고 자연 만물을 통해 사건을 통과하며 내게 말씀하실 때도 있다. 진리와 영감, 현실에서 주님의 뜻인 인도를 살피듯 우리는 주관과 객관의 두 가지 관점이라는 잣대로 살필 때 하나님의 의중을 찾는데 더 유용하고 안전하다.


    관점의 실전은 결혼과 노선이다. 먼저 선과 결혼, 한 사람의 구원에 있어 결혼은 세상 말처럼 어찌 보면 큰 일이다. 부모, 지인들의 말도 참고하지만 본인이 가장 잘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선을 볼 때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내 베필 될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마음에 안드는 사람이 내 짝일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이삭과 야곱의 결혼처럼 말이다.


    마음의 감정과 마음의 결정은 지식을 전제한 선한 양심에서 출발하고 그것이 눈을 바로 보게 하는 관점으로 나타난다. 이에 더하여 입은 온량한 혀의 옳은 말을 하게 되고 손은 필객의 붓과 같이 많은 독자를 감동시키는 글을 남긴다. 관점이 바로 된 발은 움직이는 향방의 행동을 필두로 많은 구원 역사를 이루어 대목 가지로 거듭난 것이 발전하고 발전하여 지구에 필요한 산소를 뿜어내는 아마존 정글 같은 거대한 숲이라는 장관을 이룬다. 그러면 비로소 정처 없는 수많은 새들이 거기에 깃들어 모이고 그 숲의 혜택과 은혜를 입게 된다. 택자의 영광은 올바른 관점에서 시작된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관점은 자타의 생사화복과 존비귀천을 결정 짓는다.


    다시 결혼으로 돌아가서 처녀 총각이 결혼해서 살아 보면 상대가 마음에 안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상대가 틀린 경우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내 악습을 고치기 위해 상대를 만나게 하셨고 상대가 수고를 하는구나 하고 보면 부부관이라는 관점이 건강한 사람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원수가 집안 식구라는 말씀을 괜히 주신 것이 아니다. 상대가 원수인 면도 있겠으나 참 원수는 상대방을 거울삼아 내 안에 참된 원수를 보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이것이 깨달아질 때 그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말씀의 깊은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말라기 2장 말씀에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신다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도 헤아려 본다.


    선 볼 때도 주관과 객관은 함께 적용된다. 이삭은 결혼 상대를 고르지 않고 상대를 기다렸다. 반면 야곱은 자기가 골랐다. 라헬을 골랐으나 그 이후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계통은 레아 자녀들로 이어졌다. 우리 눈은 먼 미래까지 보기 어렵다. 영안, 관점이 밝은 사람은 몰라도 대부분은 근시안적 관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을 성경의 여러 다양한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신다.


    구별을 기르기 위해 하나님이 여러 사람을 보여 주실 수도 있다. 야곱 때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일부일처제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결혼의 법칙이다. 만약 지금 내가 야곱의 형편에 있다면 레아와 라헬 중에 골라야 한다면 레아는 No, 라헬은 Yes, 레아와 먼저 선을 봤다면 내 양심에 아닌데 Yes라고 한다면 자기 양심을 속이는 게 될 수도 있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십시요 나는 모르겠습니다 전적 하나님 뜻에 따르겠다는 순종적인 기도가 될 수도 있지만 나는 선택하지 않는 무책임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삭이 무능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삭에게는 아브라함의 종을 기다리는 그 자체가 본인에게는 선택이다. 반면 야곱의 경우처럼 예정이라면 내가 Yes해도 레아가 No하겠지 이런 관점은 성자 성녀의 믿음이든지 아니면 내게 주어진 선택권을 주님에게 떠넘기는 회피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정된 대로 된다는 말씀도 있지만 악을 행했든 선을 행했던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이, 내(주님) 귀에 들린대로 내가 그대로 해 주시겠다는 말씀도 예정에는 포함되어 있기에 더욱 매사가 조심스럽다.


    믿음의 정도는 다양하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간섭도 달라진다. 그래서 목회는 참 어려운 것 같다. 정답이 없다. 사람에 따라 정답이 다양하다. 누구는 이삭처럼 Yes하고 상대방의 결정이 곧 주님의 뜻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구는 야곱처럼 외모만 보고 결혼하는 이도 있다. 세상에 결혼이 이삭과 야곱 경우만 있겠는가? 이것을 기준 삼아 길을 찾아보면 웬만한 난제는 다 풀릴 것 같다. 물론 원칙과 지도는 항상 따라가는 것이지만 선 볼 때 No라고 본인이 했다면 한번 정도 더 권하고 말아야 할지 이게 고민이다. 노선도 마찬가지다. 관점이 다르니 같이 갈 수 없다. 결혼도 관점이 다르니 말이 안 통하고 말이 안 통하니 속이 답답하고 지속되고 해결책은 안 보이니 같이 살 수 없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글이라는 것이 한쪽을 강조하다 보면 반대 면은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그렇다고 늘 양면을 적다 보면 지면의 한계에 봉착하기도 한다. 그동안 공회에서 배운 내용 중에서 나름 가장 감동 깊게 간직하고 있는 교훈을 한편의 글로 정리해 본 것이다. 글을 적어 봄으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고 받는 댓글을 통해 진정 알고 싶다. 주님을 의식해 자기표현의 조심이라는 점도 좋은데 글을 주고 받는 댓글의 활성화라는 점도 기대해 본다.

  • 2021-03-27 20:26
    글은 간단 명료하게 핵심이 읽혀져야 하고 글 쓴 이의 주장이 명확하게 드러나야 한다.

    목회자의 지도와 내 속에 양심의 결정이 대치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부모의 의견과 내 결정이 일치하지 않고 대립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남의 조언을 객관이라 하고 나의 결정을 주관이라 한다면 우리는 이 두 관점을 가지고 골방에 들어가 주님께 물어봐야 한다. 40일 지름길의 첩경보다 40년 시행착오가 구원에 더 필요하고 유익할 때도 있는가?

  • 2021-03-28 05:57
    자라갈수록 표현법은 깊어지고 보는 각도는 다양해진다. 총론의 글은 짧아지지만 각론의 글은 길어진다. 마치 뿌리의 큰 가지가 굵어지면 잔가지도 많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목회자의 지도와 부모님의 의견, 그리고 나의 결정과 주님의 뜻. 이 4가지가 매번 일치하면 얼마나 좋을까? 함께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도 보면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의견일치가 어려운데 주관과 객관의 전원일치가 안되고 이것이 장기간 지속되어 방치가 되니 이혼도 노선의 두 길도 생기는 법이다. 두 길 나뉨의 긍정적인 면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성경 깨달음의 지식을 근거하고 선한 양심에서 시작된 옳고 바른 관점은 전원일치라는 행정에 참으로 유용하게 쓰인다. 이럴까 저럴까 하루에도 수많은 결정을 하며 현실을 통과하는 우리들이다.


    과거 목회자의 가라는 지도가 옳았는가 가지 않겠다는 내 결정이 옳았는가 나의 분별력을 기르기 위해 똑같은 일이 내 현실에 또다시 발생한다면 나는 객관의 목회자 말을 들을 것인가 아니면 주관의 내 결정을 따를 것인가 주님의 뜻이 나의 주관과 목회자의 객관, 둘 중에 하나라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참으로 어렵다.


    과거 내가 옳았다고 판단한 나의 역사를 주님은 틀렸다고 평가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과거 일을 두고 나는 틀렸고 목회자의 지도가 옳았다고 나는 확신하는데 주님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 반대다. 곡해라. 너가 옳았다. 목회자의 지도는 반대지식이다.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관점 둘, 이 두 면을 인정 안하면 앞으로의 모든 결정은 흐려질 수 밖에 없다. 내 개인 역사의 자칭 왜곡처럼 말이다. 지나간 과거 역사를 어떻게 바라 보고 있는가? 역사관이다. 내 개인의 역사도 있고 부공3 역사도 있고 총공회 역사도 있어 왔다. 역사관의 해석이 달라지기 시작하면 필연 노선은 나누어지기 마련이다. 시간 문제지.


    그래도 나보다 믿음이 앞선 목회자 말씀이 옳지 않겠는가? 아니면 내 안에는 자기중심적인 양심도 있지만 기름부음을 받은 선한 양심도 있지 않은가? 물건 고르는 것처럼 손익의 결과가 그리 크지 않다면 40년 시행착오도 감수하겠는데 돌이킬 수 없는 평생 배필될 배우자를 고르는 문제라든지 영생이 걸린 노선과 지도자의 선택은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결혼과 노선은 한번 결정하면 번복을 할 수가 없다. 부모를 내가 선택할 수 없듯 영적 부모인 지도자도 내가 지정할 수가 없고 결혼 상대도 내가 고를 수는 없다. 하나님이 미리 짝지어 놓으신 사람을 내 양심에 근거하고(주관) 주변 지인들의 말을 참고하여(객관) 이 두 관점을 기준 삼고 잣대 삼아 최종은 내가 찾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실상적으로 나의 선택은 곧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고 순종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런고로 올바른 관점은 곧 후회없는 선택을 하게 하고 자기부인케 하는 자원함의 순종으로 이끄는 보배다.


    그래서 바로 보게 하는 '관점'은 망망대해를 누비는 항해사의 눈이라 할 수 있는 나침반과도 같다 하겠다.

  • 2021-03-29 05:59
    관점이라는 한 주제를 가지고 여러 면을 살펴 본다.


    신앙의 소경은 성경을 읽어도 설교를 들어도 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소경의 문제는 말씀을 모르는데서 그치지 않고 잘못 깨닫는데서 구원에 더 많은 손해를 끼친다. 잘못된 깨달음 하나가 온 산을 태우고도 남을 만큼 그 해악이 크다. 우리는 누구나 소경적인 면이 있다. 나는 다 안다 하면 아직 다 모르는 것이고 나는 안 보인다 나는 아직 소경이다 하면 주님이 우리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 주신다.


    교회 역사에 있어 깨달음이 달라 신앙의 두 길은 항상 생겨 왔다. 가정도 교회도 공회도 마찬가지다. 진리는 하나인데 깨달음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신앙의 정도나 급수, 믿음의 도수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틀린 깨달음을 가진 자를 억지로 돌려 세운다고 내 옳은 깨달음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좋지 못한 것 같다. 말은 해야 겠는데 스스로 자각하도록 살짝 언급만 하고 지나가야 할 때도 있다. 깊은 도를 다 드러내면 믿음 없는 자는 감당이 안된다.


    주님이 열 두제자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너희는 앞으로 복음 때문에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영광이다 그러면 다 도망갈 것이다.


    총공회 깨달음을 전할 때 서서히 상대방 신앙 상태를 살펴가며 전해줘야 하는데 속도조절을 못해 눈 뜨기전에 겁부터 먹고 도망간 이들은 없었던가? 지금껏 부공3을 거처간 수많은 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그들의 잘못이나 부족보다 나의 부족을 살피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유익하다. 비록 믿음이 없어 그들이 떠났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실이라도 우리는 나의 부족을 살피고 내가 믿음이 없어 지혜가 부족해 그들이 떠났다고 한다면 이는 발전이 있다. 이를 자책이라 말한다면 곤란하다. 정평정가라 말하고 싶다.


    자녀의 잘못은 곧 부모의 잘못이라는 말의 원리와 같은 것처럼 말이다. 교인의 잘못은 곧 목회자의 잘못처럼 말이다. 내게 붙여준 사람이 떠날 때는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는 것보다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내게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답을 찾는 데 더 빠르고 나의 소경됨을 치료하는데는 더 확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떠난 사람의 믿음 없음이나 소경됨은 때가 되면 그가 또 발견할 것이다. 지금 관점, 깨달음, 소경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기독자인 우리는 이런 과오를 많이 범하는 것 같다.


    주님은 진흙에 침을 뱉어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주님의 침은 뭐며 진흙은 무엇이고 이것을 소경의 눈에 바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설교록이나 주의 종 설교를 통해 정답 듣기에만 길들여지지 말고 그 전에 먼저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내 안에 잠자고 있는 깨달음을 찾아 보자. 깨워 보자. 주의 종을 통한 객관의 깨달음과 내 안에 주관의 깨달음이 같은 경우도 있고 다른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목회자의 깨달음과 교인의 깨달음 사이에는 수많은 믿음의 간격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면 설교를 듣고 질문이 없을 수가 없다.


    예배 후에 목사님을 찾아가 설교에 대한 질문 횟수가 한달에 몇번 정도 되는가? 설교에 대한 질문은 그 사람의 깨닫는 정도와도 연관성이 깊다. 그리고 주일날 들은 말씀을 가지고 정리하여 저녁에 내가 다시 식구들에게 가르쳐 보고 월요일 새벽예배를 인도해야 한다는,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는 진정 주관과 객관에 눈을 뜬 사람일 것이다. 듣기만 하는 사람과 들은 말씀을 가지고 내가 다시 설교해 보는 것에는 아는정도나 깨달음에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요즘 학교 교육에서도 피드백을 강조한다. 들은 것을 내 입으로 내 말과 내 표현법으로 다시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 모르는 것이라는 어느 일선에 서 있는 교사의 경험담처럼 우리도 우리 신앙에 소경된 면을 찾고 관점을 바로 가지거나 숨겨진 깨달음을 찾는데 주력했으면 한다. 누구는 필자보다 더 주력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주제 넘는 발언일지 모르겠다.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 생전 베드로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대답에서 부활 후 주는 하나님이시라는 도마의 대답처럼 깨달음이라는 것도 일취월장 발전하고 성장한다. 단어 사용도 표현의 각도도 깊어진다.


    주님 재림 전까지 깨달음의 완성은 없다. 아직 숨겨진 깨달음이 있다면 제자된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심지어 사죄, 칭의, 화친, 영생의 소망이라는 사활 대속도 더 깊어져야 한다. 스승이 발표한 만큼 다 깨닫지 못해서라도 더욱 완전케 되어야 한다. 주님이 오셔서 구약의 율법에 신약의 사랑법을 이어 붙여 율법을 완성케 하려 하셨으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온 이단의 괴수로 바라 보았다. 이처럼 관점은 무섭다. 틀린 관점을 가진 사도 바울은 수많은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핍박했다. 심지어 스데반 순교에 가담한 악한 공범자가 되었다. 관점, 깨달음 하나가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는 말씀이 우리 신앙 생명에 근원임을 잠언은 지혜로 가르치고 있다.


    설교록에 살을 붙이는 것이 선생의 깨달음을 반대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틀렸다고 했으나 선생은 그 때는 내가 어렸고 지금은 자랐으니 바로 보고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스승과 제자가 바라보는 깨달음의 관점 차이가 이렇게 크니 표현법도 극과 극의 차이를 보인다. 제자는 틀렸다 그러고 스승은 어렸다 그러신다. 유대인들은 구약을 폐하려느냐 그러고 주님은 구약을 완전케 하려고 그런다 말씀하신다.


    생전에 이은 새로운 주일학교 공과 편찬도 그렇고 교리 연구나 완성도 그렇고 설교록을 참고로 이제는 새 길을 걸어간 것이 열매로 뚜렷하게 그 결과물이 출판이든 어떤 형태로든 손에 잡혀 후손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하는 공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안약이 빨리 개발되어 죽기 전에 소경을 치료하여 나을 수 있다면 우리 삶도 허송세월이나 시행착오가 지금보다는 확연하게 줄어들 것이고 더욱 윤택하여져서 규모가 있어 도성인신하신 주님처럼 풍성해지지 않을까? 요한복음10:10절 말씀처럼 말이다.

  • 2021-03-30 05:57
    사람은 누구나, 우리는 누구나 실수를 하며 살아간다. 객관이 다 말하는데도 정작 본인은 실수를 인정 안하고 자기가 옳다고 고집을 부릴 수도 있다. 뭐 눈에 씌면 뭐만 보인다고 그랬던가? 그런데 그 실수 한번이 평생을 반신불구로 살게 만든다면 이는 개인적으로 크나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3,4살 어린 아이가 생각없이 난간에 기대어 논다면 부모가 볼 때는 아찔할 것이다. 그것을 보고 기겁하여 멀리서 큰소리 한번 치면 그 소리에 놀라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럴 땐 시선을 딴 곳에 두게 했다가 조용히 가서 재빨리 낚아 채는 것이 상책이다. 야단 치기 쉬운데 살리는 것이 먼저다. 교훈도 책망도 바르게 함이나 의로 교육하는 것 어느 것 하나 쉬운게 없다. 시기적절하게.


    문제는 이 실수가 자기만 다치면 그래도 그만인데 다른 사람까지 영향을 주고 모방 범죄처럼 더 어린, 이제 갓 걸음마를 시작하는 유아까지 따라하게 만들어 자기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게 더 큰 문제다.


    왜 착각, 실수, 오판하는가? 왜 바로 보지 못하고 삐뚤어지게 보이는가? 하나님의 지식을 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고정된 관념, 선입관의 마귀 지식 때문인가?


    전라도는 과거 광주사태 때 수많은 시민들이 군인들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또 그렇게 어릴 때부터 학교 교육을 받아 왔다. 그래서 투표 때 동성애를 주장하는 민주당을 지지하는가? 전라도에 사는 기독교인들은 왜 민주당을 거의 몰표로 지지하는가? 반기독교, 적기독교적인 민주당의 정책을 전라도에 사는 교인들, 그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궁금하다. 모순인데 세례 요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질문에 대답 못하고 말문이 막힌 유대인들처럼 말이다. 수십년 좌파 교육 때문에 거짓 지식에 선동되어 속은 것이다. 잘못된 사상 교육이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어릴 때부터 시작되면 그 막강한 힘은 배가 된다.

    마치 예수님 부활 후에 군인들을 시켜 제자들이 그 시체를 훔쳐 갔다 해라는 그 소문을, 그 거짓된 정보를, 그 거짓된 지식을 듣고 믿게 되니 지금도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일이 벌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피아노를 배울 때 처음 배우는 사람보다 대충 잘못 배운 사람이 피아노 실력이 더 느리다는 통계가 있다. 처음 배우는 사람은 백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술술 잘도 배우는 데 대충 배운 사람은 틀린 것을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맨 땅에 신축은 참 쉬운데 상대적으로 있는 건물을 두고 리모델링 하는 것은 몇배 더 수고와 어려움이 뛰따르는 것처럼 말이다.


    공회에서 자란 사람은 선입관 면에서는 적고 외부에서 공회로 들어온 사람은 기존 교회에서 배운 물을 빼기가 쉽지 않다. 물론 좋은 면은 빼지 말고 잘 간직했다가 공회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누구나 단점은 있고 어느 교회나 단체나 배울 점은 있기 마련이다.

    반면 공회인들은 기존의 길을 고수하는 경향성이 강하고 대체적으로 공회에 들어온 이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데 강한 것 같다. 이는 전적 상대적인 견해다. 사람마다 다르고 직분이나 위치마다 다르다. 그래서 서로 보고 배우라고 만나게 하신 것 같다.


    내 기준에서 상대방을 한번 보고 상대방 기준에서 나를 한번 보는 것이다. 이를 영어에서는 언더스텐드 즉 상대방 밑에 서 본단다 는 '이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왜 그렇게만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지 이해가 가면 그 사람의 연약한 면을, 잘못 깨닫고 있는 면을 지적하기 보다는 물론 말해 줘야 할 때도 있겠지만 우선은 그를 위해 충분히 기도하고 말을 해야 한다면 조심조심 상대방의 믿음 상태를 살펴가며 직언을 삼가하며 말할 것이다.


    유대인들 전도를 위해 부름 받은 베드로와 이방인 전도를 위해 부름 받은 사도 바울, 이들의 목적은, 천국 건설과 확장이라는 목적은 같은데 두 교회를 탐방해 보면 그 교회 분위기나 사역 방편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거룩의 구별에는 옳다 틀리다도 있지만 같다 다르다는 관점도 필요하다. 믿음이 있다 없다는 표현도 있지만 믿음이 연약하다 믿음이 장성하다는 표현도 있다.


    왜 보는 눈이 다른가? 남자가 보는눈과 여자가 보는 눈은 다르다. 남자는 밖에서 땀 흘려 일하는데 특성화 되어 있고 여자는 가정에서 자녀를 낳아 기르는데 눈이 발달되어 있다. 하나님이 선천적으로 그리 주셨다. 물론 대장부 같은 여자도 있고 여자 같은 남자도 있지만 여기서는 보편적인 면을 두고 말한다.


    결론은 기존 지식 때문에 마귀의 거짓말에 속고 있어 전원일치가 안 되는 면이 강하고 또 한편으로 다양성이 있으니 그러하다. 자유의지라는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하나가 되는 것이 참으로 어렵지만 남과 여 전혀 다른 두 존재가 만나 티격태격 하면서 세월 속에 하나되게 하시는 것이 불신 세상은 모르는 부부제도의 비밀인 것처럼 부부싸움을 통해 내 안에 두 자기도 주님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남녀가 다르니까 그 속에서 생명이 탄생하듯 부딪힘 속에서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대립과 의견 충돌 속에서 서로를 빛나게 하고 상대의 장단점을 통해 자기를 보며 배우며 자라게 하신 것이다. 일부러 충돌할 필요는 없지만 의견이 일치가 안 될 때 힘들다고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하며 토론을 회피하거나 속에 있는 할 말을 안하고 있다가 나중에 폭탄이 터지면 신앙 어린 자녀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말투나 표현법, 무엇보다도 마귀 지식에 감염되고 선동된 선입관을 깨고 신앙의 소경됨을 벗어나 바로 보고 바로 깨닫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 2021-03-30 10:20
    사람은 대체로 자기 잘못에는 후하고 남 잘못에는 박한 것 같다. 자기 잘못은 잘 못 보고 남 잘못은 잘 본다. 자기 중심 때문일 것이다. 늘 깨어 자각하고 조심하는 데도 현실에서 성공할 때 보다 실수할 때가 많은 것 같다. 나는 되는데 너는 왜 안 돼? 이런 관점보다는 너가 안되는 것을 보니 나도 안되는 때가 있더라. 이렇게 이해하면 관용이 되는데 다들 마음의 여유, 온유가 없어 그런 것 같다. 특히 부모는 자녀의 반복되는 실수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가고 조금 강하게 야단을 치면 자녀는 불만이 쌓이고 부모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마음문을 닫아 버린다.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르니 완급 조절도 대화의 필요성도 때로는 무용지물일 때가 있다. 오해를 푼다고 인간의 의지나 작심, 계획 같은 인적 요소로는 불가능하니 결국에는 성령의 감동이라는 신적 요소의 은혜를 구해 본다. 노인의 경험담을 들어 본다. 법과 역사를 공부해 본다. 난제의 답은 의외로 쉽게 주변에 널려 있다. 지인의 말 속에, 사건 속에, 매일 듣는 설교 속에, 매일 보는 성경 속에, 기도 중에, 현실 속에 보화가 가득가득 꼭꼭 눌러져 철철 넘치도록 담겨 있는데 보배를 보는 눈이 없어 소경이라 깨달음이 없고 속아서 다 흘려 보내는 경우가 많다. 시간도 물질도 자본도 천하보다 귀한 사람도.

  • 2021-03-31 06:05
    똑같은 설교록을 보고 읽어도 강단에 누가 섰느냐에 따라 듣는 사람이 느끼는 감동은 달라질 수 있다. 글을 쓰는 자가 누구인지 알고 글을 읽는 것과 글 쓰는 이가 누구인지 모르고 글을 읽는 것에는 독자가 필자의 뜻을 받아 들이는 데, 지식 전달에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실명, 필명도 좋으나 우리가 다 어떤 사람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나 선입견, 기존 지식, 그 사람을 나쁘게 평가하는 면 때문에 익명을 쓰거나 누구를 통해 돌려서 말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평소 나의 인상, 내 이미지를 좋게 가져 가는 것이 좋다. 나는 왜 글을 적고 있는가?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 나도 뭔가 글을 적어 흉내라도 내 보고 싶다. 처음에는 낙서처럼 형편 없는 주관의 글이라도 적다 보면 고치다 보면 차차 차츰 내 삶도 나아지지 않을까? 언제까지 젖만 먹고 있을 수는 없다. 때가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을 해서 내 집을 세우고 내 가정을 마련해야 하는 것처럼 나도 나중에는 선생처럼 해 봐야 한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제자는 선생을 따라 처음에는 모방하다가 나중에는 선생 같이 되는 것이 우리들이다. 내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힘쓰면 나의 일을 저도 할 것이고 이 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니 소망을 가져 본다. 나 같은 사람이 뭘 하겠나 너 같은 사람이 뭐 한다고 나서냐 나는 못하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 영생의 소망 교리라 배웠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또 사람은 한순간 쉽게 바뀔 수 있다. 성령이 오면 가능하다. 과거의 사울만 기억하지 말고 변화된 사도 바울도 있으니 다른 사람에 대해 포기하지 말고 변화에 대한 소망을 가져 보자. 이는 곧 내 속에 있는 악습을 고치고 싶은 욕망으로 전이가 된다. 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바뀔거야 저 노름, 도박, 저런 주색잡기는 안 돼, 죽기 전에는 못 고쳐 이 웬수야 그러면 이 말을 듣고 있던 주님은 내 귀에다 대고 너도 구제불능이다 너도 못 고친다 그러실 것 같다.


    대접 받고 싶으면 대접하고 나를 고치고 싶거든 다른 사람도 주님이 성령으로 역사하시면 고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져라 저 사람은 안돼 내가 지금껏 그렇게 기도하고 노력했는데도 안 돼 이제는 포기야 자살할 가룟 유다로 예정된 자가 아닐까 이 말은 곧 나도 안 돼 나의 이 악습은 절대 못 고쳐 이 말이 된다.

  • 2021-03-31 10:40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내용, 인내가 없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열매를 맺어도 실할 수가 없다. 봄에 씨를 뿌린 농부가 여름 가뭄과 홍수에 벼가 어찌 될까 애간장을 녹이며 수고하고 병충해가 못 들도록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가을에 우여곡절 끝에 추수를 한다. 인내가 없으면 추수는 꿈도 못 꾸는 것이 농사판의 현실이다. 나는 인내에 강한가? 인내에 약한가? 치매 노인을 상대해 보면 대충 나의 인내 점수를 파악할 수가 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물어본다. 내가 볼 때 일의 능률이 안 오르는 일인데, 했던 일을 확인 차원에서 시키고 또 시키고 계속 반복해서 시키면 머리에 쥐가 난다.


    베드로도 그랬을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3번이나 물으실 때 3번째에는 베드로가 근심했다고 했다. 인내의 한계를 느꼈을 것이고 주님이 내 말 뜻을 못 알아 듣고 있나? 왜 계속 묻지? 베드로는 베드로 대로 근심이 되었고 주님은 주님대로 뜻이 있어 3번이나 물으셨다. 우리가 교회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해서 시키면 기쁨으로 하기 보다 베드로처럼 근심하기가 쉽다. 설교도 똑같은 말의 반복처럼 들려도 인내를 갖고 들어보면 달리 들릴 때가 있다. 나는 천성적으로 인내가 강한 편이다. 그러면 주님이 철저하게 그 인내를 무너뜨리신다. 십자가에서 인내하신 주님의 사활 대속 때문에 우리가 계속 인내할 수 있는 것이지 인도의 무슨 요가처럼 사람 안에 있는 인내는 바람 앞에 등불에 지나지 않는다.


    인내가 강한 사람은 작정이 어렵고 작정이 강한 사람은 인내가 어렵다고들 말한다. 마음의 작정과 몸을 계속 움직이는 인내는 하나다. 심신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는 먼저된 자가 인내고 나중된 자가 작정이며 누구는 먼저된 자가 작정이고 나중된 자가 인내다. 작심+삼일 2021년 올해도 3달이 다 가고 있고 1년의 4분의 1인 1분기가 지나고 있다. 연초에 세웠던 많은 계획들을 얼마나 잘 실행하고 있는지 돌아볼 때가 된 것 같다. 세월은 점검하는 자의 것이다. 살피고 체크하는 사람 앞에는 못 당한다. 식구들의 신앙도 구역장이 신경쓰며 살피는 정도와 마음에 품는 인내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하루의 시작은 계획과 작정으로 새벽을 깨우고 하루의 마침은 인내와 평가라면 그 사람의 신앙 톱니바퀴는 녹슬 틈이 없을 것이다. 인생관은 목적관을 시작으로 존재관을 거쳐 인내관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 2021-03-31 12:42
    설교를 듣고 내 언어의 표현법을 가미해서 글로 다시 정리해 본다.

    참으로 기이하다. 초등 교육 6년이면 세상 살아가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는데 마귀는 어찌나 교묘한지 중, 고등 교육까지 3년에 3년을 더해 합이 12년, 또 대학 4년 대학원 2년도 모자란단다. 박사 6년에 또 12년, 둘을 합해서 총 24년, 초등 6년의 4배로 고무줄처럼 쭈욱 늘리는 것이 마귀인데 참 괘씸하고 반발이 일어나야 하는데 왜 화 낼 일에는 얌전하고 조용해야 할 일에는 엉뚱한 사람 붙잡고 화풀이 하는가?


    무엇이 위험한가? 내 안에 잠복되어 있는 것, 어릴 때 교육된 것이 문제다. 세상 교육도 필요는 한데 주객이 전도되다 보니 세상 책은 재미 있다고 푹 파져 있고 성경은 1년에 고작해야 3독 미만이면 하루 1시간도 들일 정성이 없다. 시간이 없다고 한다. 우리는 무엇이 누구에게 가장 많이 속고 있는가?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지금 어떻게 보고 있는가?
    나는 나늘 지금 어떻게 보고 있는가?
    주님은 나를 지금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 2021-04-01 05:59
    대전에서 동시간대에 서울과 부산을 한꺼번에 갈 수는 없다. 둘 중 하나를 '결정'하고 '선택'해야 한다. 노선도 둘 중 하나지 이도 저도 아닌 경우는 없다. 결혼도 나의 배우자는 한 명이지 동일한 현실에 양다리는 있을 수가 없다. 노선, 결혼의 경우와는 달리 둘중 택일이 아닌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경우도 있다. 기호에 따른 메뉴 선택처럼 말이다. 에덴 동산 같은 우리 현실에는 둘 중 하나인 선악과도 있고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임의의 과실도 있다.


    문답의 경우도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 여럿일 수도 있고 하나일 수도 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질문에 주님은 둘중 택일의 답을 말씀하시지 않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답하셨다. 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는데 질문한 너희들이 선택하라는 것처럼 필자는 들린다.


    학교에서 시험 문제에 진화론이 맞느냐 창조론이 맞느냐 시험 문제가 나왔다 치자. 어떻게 답을 적어야 할까? 창조론을 적으면 답은 틀리지만 믿음은 지켰다 할 수도 있다. 진화론을 적으면 답은 맞지만 내 속에 양심과는 대립된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반사는 주일학생에게 어떻게 답을 해 줘야 할까? 어떤 설명과 지도가 필요할까? 아니면 어떤 답변들이 나올 수 있을까? 즉답보다는 다양한 답을 주일학생에게 들어보고 나누는 게 더 유익할 것 같다.


    창조론 진화론 둘 중에 하나를 적어도 상관 없을까? 아니면 둘 중에 하나가 답일까? 아니면 어떻게 적는게 더 지혜로울까? 국기배례처럼 싸울 일은 아닌 것 같다. 세상지식과 하나님의 지식은 늘 배치가 되어 왔다. 우리가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선생님 질문에 답을 말할 때 교회 주일학교 공과처럼 다 답을 달 수는 없다.


    사도바울도 사도행전에 이런 종류 때문에 가이사 법정에 서게 되었다. 세례 요한도 왕과 왕비의 치부를 말하여 죽음을 당했다. 당시 선지자로서 할 말인가, 안해야 할 말인가? 순교인가? 개죽음인가? 경우가 다른가? 같은가? 전혀 별개의 문제인가? 그래도 연관성이 좀 있는가? 세례요한의 죽음을 두고도 관점이 서로 달라 의견이 분분하다. 사람마다 믿음의 정도가 다르고 생각하는 정도가 다르니 뭐라 꼭 집어 말하기는 애매한 면도 있지만 세상은 세상식으로 상대해야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질문이 그런 경우인지는 모르겠다. 이런 형식이 유대인들의 탈무드 같은 문답일까?


    필자의 의견은 창조론을 적어도 되겠지만 그보다는 문제 출제자가 요구한 답은 진화론이니 진화론을 적으며 반대지식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수업시간에 질문이면 가만 있는 게 좋을까? 선생님이 내게 직접 질문한다면? 친구들과 싸우지 않으면서도 조리있게 설명하려면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표현법에서부터 조심하며 답변하는 데 있어 많은 고민과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초등학교로 다시 돌아가 필자에게 위 시험지에 대한 답변을 요구한다면 답만 요구하고 다양성은 인정하지 않아 불신 친구들과 말다툼하다가 위 시험에서 탈락, 불합격 했을 것 같다. 그런데 만약 답변을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최초 질문자에게 되물어본다면? 이 질문을 답할 때 주님처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처럼 답을 한다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독자의 다양한 답변이 궁금하다. 소신 있는 답변도 듣고 싶다.

  • 2021-04-01 10:31
    장사를 간접으로 옆에서 지켜보면 일단 물건을 싸게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물건을 판 다음에는 미수금에 대한 수금을 잘해야 한다. 아무리 물건을 잘 샀다 하더라고 수금을 못하면 말짱 헛장사를 한 것이다. 또한 수금을 잘해도 물건을 비싸게 샀으면 이 또한 별 재미 없는 장사다. 요즘 코로나로 시장의 판도가 바뀌고 있다. 외상, 월 결재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여기에서 교훈을 하나 배운다.


    원사장은 철저하게 수금을 받아야 하고 외상거래는 이제 안된다는 입장이다. 부사장은 다른 곳도 다 외상 거래하는데 너무 수금을 칼같이 하면 거래처가 다 떨어져 나간다고 한다. 두 입장이 서로 싸우는데 원사장 말을 들어보면 나름 일리가 있고 부사장 말도 나름 일리가 있다. 문제는 중간 절충이 안되고 서로 자기 주장만 고집한다는 것이다. 원사장은 그동안의 경험을 비추어 볼때 수금을 느슨하게 하면 나중에 한번은 돈을 크게 떼이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그러면 매장관리가 방만하게 되어 나중에는 부도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고 부사장은 너무 수금을 닥달하고 심하게 쪼면 손님이 다 떨어져 나간다는 입장이다. 중간에서 직원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항상 두 입장, 두 관점, 두 길을 목격한다. 계속 한 차원 높게 숙제가 주어지고 풀었다 싶으면 더 깊은 난위도의 문제가 현실에서 출제된다. 반복의 연속이다.


    진리에 중간이 있는가? 진리에 다양성이 존재하는가?
    한편으로 의견이 많아야 모사가 성립한다는 말씀도 생각난다.
    다양한 의견 속에서 일치를 이끌어 내듯 전원일치와 다양성 사이에 충돌을 배운다.
    장사를 해 보면 유도리, 간격도 있어야 하고 사기꾼 같은 사람은 칼같이 잘라내야 할 때도 있다.
    신앙에 있어 유도리는 언제 사용해야 하며 칼같이 냉정해야 할 때는 언제일까?
    유도리로 너무 치우치면 여호사밧처럼 아합과 연혼하는 흐리멍덩한 사람되고
    냉정으로 너무 치우치면 회개가 늦는 사람을 한순간 잃기도 한다.
    구별이 강하면 상대적으로 다양성이 약해지기 쉽고 다양성이 강하면 상대적으로 구별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어디까지나 둘을 놓고 비교해 본 상대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견해라는 오차 범위는 감안해서 읽어 주셨으면...

  • 2021-04-02 06:03
    회개와 용서


    파괴는 너무나도 쉽고 건설은 이에 비하면 더 어렵다. 건설은 시간도 더 많이 걸리고 파괴는 금방 끝이 난다. 기초공사 터파기를 시작으로 아무리 H빔으로 심플하게 골자를 넣고 갖은 인테리어에 뒷마무리까지 간단한 조립식 집을 짓더라도 한 며칠 적어도 제대로 꼼꼼하게 지으려면 일주일은 걸린다. 주변에 5층 집 빌라를 허무는데 보니까 반나절이면 집의 형체가 없어지고 하루면 기초까지 싹 다 거덜나는 것을 구경한 적이 있다. 과연 건설은 어렵고 파괴나 철거는 건설에 비해 너무나도 쉽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신앙에 건설은 왠만한 의지로는 안되는 것 같다. 인간의 의지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아예 불가능이라는 말이 맞을 듯하다. 대속이 원인된 의지나 눈물이 아니고는 지속이 어렵고 나는 했다 할지라도 자손, 자자손 대를 이어 믿음의 가문으로 이어가고 건설해 나가는 것이 아예 안된다는사실을 우리는 열왕들, 성경 연대기를 공부해 보고 주변을 둘러보면 너무나도 쉽게 알 수가 있다.


    50년 우정을 쌓기까지는 많은 공을 들여야 하지만 그 친구의 우정에 금이 가는 것은 하루의 시간도 너무 길다. 말 한마디에 사건 하나에 틀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한 때는 나와 길을 같이 했는데 지금은 나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을 만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도 흔하게 본다. 헤어질 때 나쁘게 헤어진 경우라면 어떤 계기가 아니면 다시 만나기가 어렵다. 사람 앞날은 모르는 것이니 좋게 갈라지는 것이 좋다 생각한다. 부부도 어떤 이유에서건 갈라 섰는데 나중에 두 집안이 2대, 3대를 거쳐 사돈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안된다 해도 손주의 결정을 막는 것은 주님의 결정에 반기를 드는 것일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자식도 내 맘대로 안 되는데 손주야 더 할 것이다.


    지난 날의 원수가 내일에는 심복이 될 수도 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처럼 말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오늘의 측근이 내일에는 원수가 될 수도 있다. 오늘 적고 싶은 것은 회개와 용서라는 단어다. 용서가 그리 쉬운가? 누구는 십자가 사랑 붙들면 너무 쉽고 간단한 것이라 하지만 용서가 그리 호록호락한 상대는 아닌 것 같다. 20년 넘게 몸을 맞대고 같은 이부자리에서 둘만 아는 은밀한 대화를 주고 받은, 그렇게 친밀했던 부부사이라도 한 쪽이 바람을 피우면서도 용서할 기미가 안 보인다면 여자가 한을 품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했다. 노년에 신앙 동지가 다 떠나고 쓸쓸하게 로마 감옥을 지켰던 사도 바울처럼 신앙의 마지막 절정은 고독이다. 둘도 같이 걸어갈 수 없는 이 길,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 온전한 99%의 한사람을 남겼다면 인덕을 겸비한 사람이다.


    신앙의 배신에 설교를 이어가지 못하고 찬송 도중 통곡한 이도 있다. 주님의 대속 때문에 흘리는 눈물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리라. 왜 용서가 안되는가? 요한복음 13장처럼 먼저 찾아가서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신 주님처럼 어머니의 넖은 품으로 품을 수는 없는가? 용서! 야곱의 얍복강 나루터를 한번 걸어가 본다. 죽이려는 에서를 앞에 두고 야곱은 처음에 인간적인 꾀를 썼다. 그러나 천사와 씨름하면서도 복을 구하고 다리가 절고 난 이후에는 새사람이 되어 담대하게 형 에서에게로 나아갔다.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내가 잘못해서 용서를 구하기가 어렵겠는가? 아니면 상대방 잘못을 용서해 주기가 더 어렵겠는가? 둘다 어렵겠지만 내 자존심을 꺽고 나의 잘못을 인정하기가 더 어려울 것 같다. 회개와 용서, 내가 고집스럽게 버티면 주님은 날 사랑하사 나의 가장 아끼는 갈비뼈를 부러 뜨리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손주들에게 죄얼의 악영향을 미친다. 이는 저주가 아니라 선지자적 예언이라는 설교 말씀에 전적 아멘이 된다.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내 눈에는 피눈물이 난다고 했다. 나를 소송으로 생매장한 그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어떤 눈으로 바라봐야 할까? 회개 없는 용서는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미움이다. 용서는 그 사람이 두번 다시는 잘못을 안하도록 도와주는 마음이다. 원수에 대한 용서가 가능이나 한 걸까? 배우자가 다른 남자와 놀아나면, 함께 했던 동지가 나를 친다면 나는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야곱의 요셉 편애처럼 자녀를 차별할 때 부모를 향해 그 안 좋은 감정이 씻겨질 수 있을까?


    주님이 날 용서하신 것처럼 나도 용서하면 되고 내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말씀 하시지만 머리로는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가슴은 아직 냉골이다. 다시 마음이 따뜻해지려면 신앙의 성숙이라는 세월이 더 흘러야만 이해가 되고 진정한 용서가 가능할까? 부모도 돌아가셔야 잘 한 효도보다 잘못 해 드린 불효가 더 생각나듯(양심가라면 말이다) 나의 원수를 주님이 데려가시면 그때사 원수가 아니라 내 악습을 고치기 위해 붙여주신 고마운 사람이구나 내 생명의 은인이다 그럴까?


    관점 한번에 일순간 원수가 되기도 하고 깨달음 한번에 용서를 구할 수도 있다. 상대가 회개를 안했는데도 내가 먼저 그를 찾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그가 틀렸는데 그가 옳다는 것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어 아주 몹쓸 사람을 만들까 봐?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 할 일만 하면 나머지는 주님이 알아서 다 처리하신다. 욥과 세 친구들처럼 말이다.


    오해가 있어 자꾸만 사족을 붙인다. 지금까지의 글은 다 내 이야기고 내 삶의 간증이자 뼈아픈 과거이다. 남 얘기로 들렸다면 내가 말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그에게 말씀하셨고 생각나게 하셨다고 읽어 주셨으면 좋겠다. 어릴 때 하도 시달려 불목에는 이력이 난 사람이라 나는 그럴 여력도 없을 뿐더러 그럴만한 위인도 못 된다. 내가 특별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성장 과정에 이런 부모의 갈등 그로 인한 고민은 해 봤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50보 100보 다. 오해가 생긴다면 내 표현법에 문제가 많음을 인정한다. 에스더의 모르드개의 말처럼 이 때를 위해 하나님이 훈련시키고 단련시켰는지 모르겠다. 말주변이 없어 중재는 엄두도 못내나 숨어서 글로나마 남기니 안타까운 마음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남일이 아니고 내 일로 느껴진다. 부모의 이혼할 뻔한 경험을 두번 다시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또 있을까?


    철없는 사람이나 그러지 6.25전쟁을 겪어본 사람은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신앙에 전투와 싸움은 피할 길이 없다. 신앙 걸음에는 필연 싸움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안 싸워도 될 싸움, 싸우더라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느냐 선을 넘은 경우가 내 인생에는 너무나도 많다. 나의 사례를 통해 객관을 살펴 본다. 다른 사람은 원수에 대한 용서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많은 공부가 된다.


    책으로 배울 때가 있고 직접 와서 배울 때가 있다. 날 좀 보소처럼 굳이 나를 드러낼 필요도 없겠지만 굳이 나를 숨길 필요도 없다. 방어기재를 내려 놓고 자연스럽게 적은 글이 오히려 읽는 독자들에게는 더 쉽게 와 닿고 이해될 때도 많다. 이전 교회를 다 청산하고 공회로 들어온 이들, 사연도 많고 우여곡절도 많았을 것이다. 새롭게 공회로 유입되는 가정들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애뜻함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공회 경험담을 들려 주고 싶다. 득보다 실, 유익보다는 손해가 더 많을 것 같아 그만 둔다. 정든 고향을 등지고 야반도주, 몸뚱이 하나 달랑 부여 잡고 돌베개를 벗삼아 외삼촌 라반에게로 갔던 야곱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글을 적을 때는 가급적 객관의 설교나 공문, 논문 형식이 바람직하고 좋으나 아직은 일기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독자들이 알아서 번역하고 편집하여 객관의 글로 고쳐 읽어 주시거나 자기 주관의 삶을 연상하며 자기 글로 읽어 주길 바래 본다. 남 고치라 말고 내가 고치면 만사가 쉽고 빠른데 사투리, 억앙처럼 내 힘으로 안되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 그것이 이에 해당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노력하지 않은 변명처럼 말이다.


    글을 짧게 간결하게 적어야 하는데 요약이 잘 안된다. 담당님의 글처럼 차차 나아지길 소원해 본다.

  • 2021-04-02 11:32
    오해(해석관)와 편견(신인관)


    얘야! 가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세상 말이 있단다. 그런데 얘야! 나팔을 불어야 할 때 안 나서면 그 피 값이 내게 돌아온다는 두려운 말씀도 있단다. 그러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철없는 딸 애가 어리둥절 나를 쳐다 본다. 내로남불이라 그러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 때 그 때 다른 법도 있다. 나도 혼동하여 실수할 때가 더 많다. 지금 글도 그 연장 선상에 있다. 낄 때와 안 낄 때를 분간 못하는 것이 화를 부른다. 선지자는 이런 넘어짐의 과정을 거치며 깍이며 닳고 닳아 사람이 만들어진다. 나는, 우리는 지금 어디쯤 서 있는가?


    스승은 설교 도중 71장 찬송가 가사에 목이 메어 설교를 못하셨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다. 나는 그 수준이 못 되어 감히 절절한 그 마음을 글로 표현할 길이 없다. 짐작만 할 뿐이다. 꿀은 찍어 먹어 봐야 알 수 있다. 체험이 없으면 설명을 못한다. 같은 순교의 현장에 있었어도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달라진다. 현장에 있었다고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요 그 당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모르는 것도 아니다. 신앙 세계는 성령의 역사이니 모세가 존재하기 전에 창세기를 기록한 것을 보면 이해가 간다. 필자는 감이 안 온다. 그래서 스승의 그 감동을 느끼고 싶어 찬송가71장을 자주 불러 본다. 고신 수내부의 제명과 그 이후 계속된 따돌림 그리고 삭발. 그 일련의 과정을 묵상하며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주님의 심정을 생각하니 본인의 처지가 동감되어 우셨을까? 고신의 악한 인간상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또한 어제까지 함께 했던 동지들의 등돌림과 손가락질에 마음 아프기도 하고 한편으로 감사해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를 제물 삼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감사의 눈물이었을까? 훗날 총공회라는 새 길을 걷게 하신 역사였던가? 이사야 선지자처럼 너무 강하게 외쳐 돌아올 길까지 막아 버린 것은 아닌가 설교록에 적힌 대로 회개의 눈물도 있었던가? 그들을 중심으로 용서는 다 했으나 가는 길이 달라 화목할 수는 없지만 잘못된 길을 가는 그들을 보며 성전 밖마당 같이 불쌍한 마음에 흘리신 눈물이셨을까? 어떤 만감의 교차였을까?


    부공3 예배의 공석에서는 찬송가 71장(낙심마라)이 금기시하는 것 비춰지는 것 같은데(이는 내 착각일 수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과거 스승의 그 심정을 느끼고 싶어 찬송가 71장을 자주 불러보곤 한다. 공예배 찬송 인도 때 부르고 싶어도 들은 말씀이 있어 주저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부공3에도 따뜻한 봄날이 와서 예배 시간에 찬송가 71장을 가끔 또는 아주 가끔은, 일주일 11번 예배라면 1, 2달에 한번 정도는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분위기 파악 못하고 설교 말씀과 영 생뚱 맞게 시도 때도 없이 계속 부르는 것은 안 되겠지만 말이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 깊은 속내가 있겠지 스승의 무슨 깊은 뜻이 있겠지 하면서도 현재 마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스승 만큼 높은 산에 올라 정상에 우뚝 서서 산 아래를 훤히 다 내려다 보면 비로소 내가 오해했고 내가 편견을 가졌었구나 그럴 것 같다. 다만 스승 때문에 못 부르는 것이 아니라 스승을 넘어 십자가상에서 우리 죄 때문에 벌거벗고 피 흘리신 주님 때문에 날 사랑하사 그 수치를 다 견디신 주님의 은혜가 감격되고 감사해서 공예배 때 더 자주 부를 수 있는 찬송가 71장이 되길 소망해 본다. 영안실에 부모님의 시신은 자식들만 본다. 이런 접근이라면 내가 잘못 본 것이다.


    유대인들의 구약 말씀에 대한 오해(말씀에 대한 해석관)와 메시야에 대한 편견(신+인+관)이 주님을 못 박았다.
    스승의 삶과 내 삶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부모님이 잘못하신 것은 본인 입으로 자녀들에게 잘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다. 나만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 독일군에 의한 대학살을 기념관까지 만들어 가며 두고두고 기억을 한다. 나의 실수를 자녀들에게 말하지 않으면 자녀들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잘못한 것은 자꾸 들추어 내어 고쳐야 하는데 숨기는 게 문제다. 숨길려고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말 안한다면 그거나 그거나 결과는 같다고 본다. 일제 시대와 6.25라는 치욕을 겪으며 한국의 민족성은 숨기는 게 미덕처럼 여겨져 왔다. 유대인이 말하는 선민사상은 유대민족이라는 특정 인종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택자 전부를 주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처럼 말이다. 부화하는 병아리처럼 우월한 민족성을 깨고 나와서 자랑스러운 과거는 뒤로 하고 잘못한 것, 과오, 우리의 인간적인 실수담이 더 자주 회자된다면 이 숲에 더 많은, 더 다양한 새들이 모여들 것 같다. 각도를 달리 하여 정화조를 들추지 말고 깨끗한 새 물을 계속 넣어주라는 설교 말씀도 새겨 본다.

  • 2021-04-02 12:59
    잘한다고 칭찬하면 고래도 춤춘다고 합니다. 잘못한 것을 꺼내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잘한 것을 강조하다 보면 잘못한 것이 고쳐지지 않을까도 생각합니다. 잘못한 것을 회초리 들어야 할 때도 있지만 잘한 것을 칭찬하다 보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스스로 고치는 때도 있더군요.

  • 2021-04-03 10:00
    소경과 간절의 연관성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그런데 병의 원인을 모르면 치료가 어렵다. 완치가 안된다. 수많은 강력 범죄가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최초 원인자를 알 수 없으니 수사를 종결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원인은 분명 있는데 그 원인을 알려면 우리는 주권자시요 원인자이신 하나님께 물어봐야 한다. 너무나도 쉬운 이야기인데 우리는 가끔 이 사실을 깜빡 잊고 사람을 붙잡고 해결하려 할 때가 종종 있다. 물론 사람을 통해 해결을 하실 때도 있지만 시작은 기도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무리 쉬워 보이는 일도 원인자이신 하나님이 움직이지 않으시면 해결이 안된다. 인간으로서는 끝장 났다. 하는 일도 하나님 뜻이면 그 속에서 다시 생명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원인은 무엇인가? 사람의 생명과 사망은 어디에서 결정되는가?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 불신 시절 우리는 전부 눈 뜬 장님 즉 소경이었다. 믿은 이후에도 우리는 소경된 요소 때문에 자기도 괴롭고 주변 사람도 힘들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많지만 가장 먼저 구할 것은 자신의 소경됨을 인정하고 신앙의 눈 뜨기를 구해야 한다. 신앙의 소경된 삶은 그 자체가 비참이고 신세지는 것이고 구걸이다. 사람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구해서 받아 가질 줄을 모른다. 교회만 위탁하고 학교, 학원만 의지하고 나는 내 치장에만 집중한다. 보지 못하는데서 무정함이 싹튼다.


    타조는 시력이 별로란다. 자기 새끼를 돌보지 않고 자기가 낳은 알도 모래 속에 덮어 뒀다가 밟아 버리는 조심성이 없다. 타조의 예가 남 들으라고 욥기에 그렇게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불쌍하다. 원인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볼수만 있다면 구차하게 거지 노릇도 안했을 것이다.


    지금 남 얘기인가? 타조가 불신자를 두고 한 말인가? 교리 신조에 어둡다고 자칭하는 타 교단을 두고 한 말인가? 아니다 내 이야기며 우리 이야기이다. 내가 타조며 내가 소경 거지 바디매오며 우리가 타조며 우리가 소경 거지 바디매오다.


    죄의 원인, 불의의 원인, 불목의 원인, 소망 대신 낙망하는 원인, 지속하지 못하고 중단해 버리는 원인은 무엇인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바로 알지 못하고 바로 깨닫지 못하는데서 모든 원인을 찾아 본다. 구해도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고 복을 받아도 눈이 삐뚤어져 있으니 선물이 우상되어 악용된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눈을 뜰 수 있을까? 진리, 영감, 대속이면 해결된다고 우리는 수도 없이 들어 왔다. 그 전에 먼저 전제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 나는 보지 못한다. 나는 아직 소경이다. 나는 아직 알아야 할 것이 많고 성경에 깨닫지 못하는 난해 구절이 많고 깨달았다 해도 더 깊이 깨달아야 할 성구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늘 주님 앞에서는 소경이요 날마다 눈 뜨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가 소경임을 알고 그 불편함, 소경인 채로 계속 살면 영원이 어찌되겠는가? 실제 믿어지고 느껴지는 사람은 열 일을 제쳐 놓고 주님께 매달려 가장 먼저는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구하게 된다. 배가 고프면 젖달라고 우는 아기처럼 응아 했으면 기저기 갈아달라고 칭얼대는 것처럼 이건 필연이다. 주위의 조용하라는 지적에도 영향받지 않고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일이 해결될 때까지 아기는 우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생사가 걸렸음을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반응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은 솔직담백하고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의 것인가 보다. 이중이 없고 외식이 없다. 혹자는 순진, 순수라는 단어를 무지하다와 연관시키는데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이가 모르는 것은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이고 아는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내가 안 먹으면 내가 먼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이 어찌 되느냐 보다 내가 어찌 되느냐가 먼저다. 이기주의가 아니라 내가 살아야 남도 살릴 수 있는 이타주의를 지금 말하는 것이다. 이 간단한 사실을 몰라 베드로는 요한복음 21장에서 사도 요한은 어찌 되겠는가 하고 어찌 보면 쓸데 없고 어찌 보면 본인이 몰라도 되는 엉뚱한 질문을 한다. 주님의 대답은 그가 어찌 되든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오지랖 넓게 남 일은 그만 신경 쓰고 너 일만 집중해라 남 교회는 그만 하고 네 교회만 잘 다스려라. 공회 지도자 입장에서는 이 논리가 해당되지 않는다. 교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필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과거 실수를 만회하고자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과오의 반복이 아니라 필자의 참회록이다. 스승을 닮고 싶다. 실수를 그만하고 싶다. 모세처럼 광야에서 죽고 싶지 않다. 나도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앞으로도 부공3과 함께 계속 가나안 입성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댓글의 연속이다.

    7년 흉년은 너무 잔인하고 가혹한 현실로 보인다. 그러나 요셉을 애굽 총리로 우뚝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노선 선택과 이혼으로 누구는 소경이라 오판하여 잘못된 선택을 하지만 뒤에 갔을 때 선을 이루는 하나님 역사로 인해 다음과 다다음 세대에서는 다시 동역자로 합력해질 수 있을까? 훗날 사도바울과 그의 사역에 꼭 필요했던 마가처럼 말이다.


    소경과 간절함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돌아와서 소경이 해결 안되면 차라리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기 때문에 간절한 기도가 절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인물에서 유별나게 그들은 잠잠할 수가 없었다. 평생 소경으로 살 거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살아서 무엇하랴? 이런 각오를 4글자로 줄이면 사생결단이라 말한다.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났을 때의 다급한 감정처럼 죽기 살기로 구하는 것을 간절성의 기도라 한다. 대표적으로 구약의 한나가 그랬고 신약의 바디매오가 그랬다.


    내일은 주일이고 오늘은 주일을 준비하는 날이다.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내일 주일의 은혜를 잘 받기를 식구들이 내일 주일을 잘 보내기를 구하는 중심으로 말씀도 보고 기도도 하고 전도, 심방도 할 것이다.


    이 모든 간구의 중심에는 눈 뜨는 소원이 숨어 있다. 눈만 뜨면 사람에게 받아 가지려는 노력, 구걸이 필요가 없다. 어릴 때는 부모의 도움을 받지만 커갈수록 독립을 꿈꾼다. 캥거루족처럼 어른이 되어도 부모님에게 손을 벌린다면 아직 소경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나는 어찌 살아야 하는가? 남편을, 아내를 먼저 데려가시면 나 홀로 자식들을 키울 수 있는가? 주의 종을 올해 안에 주님이 데려가시면 나는 신앙 생활을 어찌 할 것인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내가 소경인지 아닌지 구걸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스스로 평가해 볼 수가 있다.


    등 따시고 배 부르면 사람은 잘 안 움직인다. 발 등에 불이 떨어져야 그때사 펄쩍 뛴다. 코로나를 통과하며 개인적으로 배운 교훈 중에 하나는 잠자는 우리의 신앙을 깨우는 환경으로 필자는 깨닫고 있다.


    젖만 먹는 신앙, 어릴 때는 물론 젖만 먹어야 하겠지만 수 십년 신앙 생활을 했는데도 변화는 싫어하고 기존을 답습하려는 기질, 물론 과거에 좋은 전통은 유지하는 게 맞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유치원생이 초등학교 긴 수업시간이 싫어 여기가 좋사오니 만년 유치원생으로 눌러 안고 싶은 현실의 안주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 필자는 소경된 요소로, 소경의 원인 인자로 정의하는 것이다.


    소경, 보기를 원합니다. 눈 뜨게 해 달라. 이 소경 거지의 비참함을 불쌍히 여겨 달라, 과거 바디매오의 기도가 우리 기도가 되기를, 눈 뜨기를 소원하는 그 간절함이 우리 기도제목의 제 1순위가 되어 불법, 불의, 불목, 낙망이 사라지고 진실로 사활의 대속이 완전히 깨달아졌으면 좋겠다. 앞서 갔던 스승처럼 말이다. 그래서 더 이상 병신 노릇, 사람 의지하고 나는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남에게 자녀 신앙 교육을 위탁하는 구걸 생활은 이제 그만하고 오늘부터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 나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바램일 것이다.


    자녀가 어릴 때는 부모로부터 사랑의 빚을 지지만 결혼하여 독립할 때가 되면 그동안 벌어 놓은 돈도 없고 스스로 살 실력이 없어 잠깐 고민을 한다. 받기는 쉽고 봉양은 어렵다. 그러나 감겼던 눈이 뜨여 실상이 보이면 그동안 키워주신 부모의 노고가 생각나 이제는 받고 싶지는 않고 주고만 싶을 것이다. 부모로부터 도움은 그만 받고 싶고 빨리 자립해서 봉양하고 싶을 것이다. 이런 간절함이 독립을 가속화시키고 손벌림에서 봉양으로 이어지는 시간을 단축시킬 것이다.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 자서전에서 배운 내용임을 밝힌다. 특히 결혼을 준비하는 처녀 총각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권장 도서 같다. 담당님이 추천해서 필자도 열심히 읽고 지인들과 나누고 있다. 카네기는 어렸을 때 집안이 아주 가난했지만 부모가 못해 준 것을 기억하여 원망하지 않았고 부모로부터 받은 것을 더 크게 보는 눈, 복된 관점이 있어 어느 회사를 들어 가든지 승승장구,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부모로부터 돈은 물려받지 못했지만 아무리 힘든 상황에 놓였다 할지라도 잘 될 것이라는 성경적 소망적인 사고방식, 거거에서 기인되어 뭐든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삶의 태도와 자세,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남에게 도움 주고 베푸는 친절이 몸에 베어 있는 것 등등,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모습 속에서 어깨 너머로 체득한 그는, 삶의 위기 때마다 부모로부터 받은 이 유산들이 현실 속에 잘 드러나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갔다.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하는 예를 하나 들자면 회사 파업의 위기 속에 있을 때 과거 카네기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 그를 찾아와 파업 주동자를 밀고하여 파업을 무산시키고 일을 해결해 나간 대목에서는 공짜밥 얻어 먹고 그냥 입싹 닫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나그네를 잘 대접하고 고아와 과부를 항상 돌아보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자는 다 고아요 주님을 남편으로 모시지 않는 자는 다 과부라는 설교가 생각났다. 앤드류 카네기, 그는 실로 자기를 바로 볼 줄 알았고 사람을 바로 볼 줄 알았다. 자기에게 없는 것보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더 크게 여겼다. 자기에게 없는 것은 타인의 삶을 보며 자기 것으로 가져 오는 재능이 탁월한 소유자였다. 세상을 예리하게 관찰하며 사람을 보는 눈이 남달랐다.


    부모에게 못 받은 것보다 17살 때부터는 부모에게 못 해 드린 것을 더 마음 아파했다. 그래서 20살도 되기 전, 첫 월급을 받던 날, 동생과 함께 앞으로 언젠가 부모님께 마차를 사 드리고 호강시켜 드려야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는 실로 부모님께 무얼 받을까 보다 부모님께 무얼 좀 해 드릴 수 있을까를 어려서부터 먼저 생각했다. 자기의 앞날보다 부모의 노년이 먼저였다. 그는 어떻게 해서 그런 보배로운 눈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필자는 그 해답을 할아버지의 낙천적인 성격과 그 집안의 가풍, 그리고 그 부모 두 분의 성품에서 찾아 본다. 가정의 분위기가 교회의 분위기가 공회의 분위기가 한 사람의 평생을 좌우한다. 그 사람의 집안과 부모 세대를 연구해 보면 그 사람이 왜 그렇게까지 시대를 감당할 수 밖에 없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남 구원을 위해 힘쓰면 하나님은 내 구원을 책임지신다는 설교록의 깨달음을 그는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자서전이다 보니 미화나 자화자찬은 감안해서 읽었다.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의 삶, 그 이면에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가 있었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 2021-04-04 06:45
    두 집 살림은 어렵고 고단하다. 양쪽 비위를 맞추기 보다 차라리 움막을 짓고 혼자 사는 게 속은 편할 것이다. 내 안에 두 여자가 있다. 하나는 슬기 있고 또 하나는 미련하다. 나는 현모양처와 살고 싶으나 가끔 악처가 나타나 나를 어두움의 터널로 끌고 간다. 곤고함이 이런 것인가? 싸움에 끝이 없다. 넘어지고 또 다시 일어난다. 회개하고 다시 시작한다. 어디까지 올라갔다 싶어도 시선 한번에 생각 한번에 판단 한번에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신앙이다. 삼가 조심하며 주일의 은혜를 구해 본다. 주일에 사활이 생사가 걸려 있다. 지난 한 주 잘못 산 것을 청산하고 새출발할 수 있는 기회가 7일마다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 주일성수의 개념을 다시금 묵상해 본다.

  • 2021-04-05 00:54
    모든 것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해도 자기 주관 곧 고정관념, 쓴뿌리 라는 것에 얽메이면 이런소리 저런소리 해봐도 영원히 불가운데 가야하는 것만 가지는 결과 뿐..

    관점이란 지식이 바탕이 되어 이성과 양심으로 판단하고 비판, 평가의 결과를 가지게 되니 내가 가지고 있는 잣대는 무엇인가 찾아보고 오직 하나님의 지식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결과를 찾기위해 처음사랑을 가지고 은혜를 구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2021-04-05 05:59
    저도 천국소망님의 주장에 전적 동의합니다. 한편으로 '오판'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무리 내가 옳은 참 하나를, 내 나름대로는 찾았다 할지라도, 신앙노선을 바로 걸어가고 있다 확신할지라도,


    열왕기상 22장의 미가야 선지자의 경고처럼 거짓말하는 영이 내 마음에 들어와 내 속에 옛사람의 악을 죽이기로 하나님이 작정하셨다면, 사무엘하 24장의 다윗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인구조사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키는 역사라면 그 진노의 화를, 피할 길은 없어 보입니다.


    사울 왕처럼 아예 버리는 경우도 있고 사도 바울처럼 재활용하여 이방인 전도를 위해 다시 귀한 그릇으로 재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여 우둔한 저희들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만 할 뿐입니다.


    애굽왕이 강퍅해야 출애굽이 가능하듯 요셉의 10형제가 똘똘 뭉쳐 악하게 동생 요셉을 돈 몇 푼에 팔아야 나중에 애굽총리가 되어 형들을 포함, 야곱 가족을 흉년으로부터 구할 수 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형들의 강퍅이 본인들도 모르게 자기 자신들을 살렸으니, 잘했다고 칭찬할 수는 없으나 '오판을 통한 강퍅'을 생각해 봅니다. 필자도 이 주제에 자유로울 수 없음을 밝힙니다.


    소송이 일어나야 앉은뱅이 신앙을 벗어날 수 있으니 원수의 소송장이 감사할 일이라는 담당님의 글에 전적 동감합니다. 남편의 강퍅이 아내의 신앙을 깨우고 아내의 강퍅이 남편을 깨우고 자녀의 강퍅이 부모의 신앙을 깨우고 부모의 강퍅이 자녀의 신앙을 깨우고 교인의 강퍅이 목회자의 잠자는 신앙을 깨우고 목회자의 강퍅이 교인의 신앙을 깨운다는 사실처럼,


    오판과 강퍅이 나를 죽이고 나를 살린다. 나는 아무리 바로 판단했다 장담할지라도 하나님이 내 속에 나도 모르게, 은밀하게 뿌리잡고 있는 자기 중심의 악을 뽑기 위해 오판과 강퍅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신다면 누구도 그 화를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요나처럼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죄인들 소굴인 니느웨, 그들은 가망 없다. 그들은 회개 안한다. 그들은 회개 못한다. 그들은 회개하면 안된다. 하나님이 사람되어 예수님이 갔어도 변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 그들처럼 말이다. 그러면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환도뼈 침을 당해야 회개했던 야곱처럼, 공회를 알아야만 오판과 강퍅이 깨어지는 필자처럼, 바울과 바나바 사이 중간에서 한번 더 주님이 묻고 계신다. 주님의 관심은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할지 보다 내 속에 오판과 강퍅이 그 동안의 세월동안 얼마나 벗어졌는가? 여기에 더 마음이 가 계신것 같다. 필자의 개인사, 개인 푸념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우리 이야기라 판단되어 필자는 적어 본다.


    누가 오판하고 있는가? 누가 강퍅을 부리고 있는가? 나, 너, 우리 오판과 강퍅에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을 듯 하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다윗이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다. 하물며 우리들이랴? 오판과 강퍅은 우리들 일상의 모습이다.

  • 2021-04-06 05:57
    오판과 강퍅


    원인을 남에게서 찾으려 하면 답이 없다. 원인은 내게 있고 원인자이신 하나님께 물어 봐야 한다. 만사 나를 고치기 위한 현실이다. 오판을 정판으로 바꾸고 강퍅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면 내가 걸어가야 할 길(노선)이 훤히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학실하게 옳다 믿고 있는, 이 마음의 결정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이다. 찬송가 61장 돌같은 내 마음이라는 가사처럼,


    내 속의 생각, 번민, 명상, 주관의 역사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객관의 역사,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지 않고서는 안될 때가 아주 드물게 또는 간혹 있다. 이는 신앙이 어려서라기보다는 본인은 너무 확신하는데 어느 누구도 설득, 지도, 사람의 말로는 세상 말로 씨도 안 먹힐 만큼 고집을 부리고 있고, 확신하고 있으니 그 견고한 인본의 진을 깨려면 더 강력한 역사가 와야만 한다. 눈이 어두워 우둔하니 하나님의 직접 역사로 나타나야만 한다. 이를 신앙이 어리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너무 장성해서 오판과 강퍅을 부린다고 할 수도 있겠다. 기사와 표적은 못 믿는 자를 믿게 하는 경우도 있으나 믿고 나서 믿음이 장성한 이후에 오판과 강퍅을 깨기 위해 기적을 보일 때도 있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주님 승천 이후에 베드로는 당시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은 짐승이며 상종 못할 사람들로서 전도할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주님은 환상을 통해 철저히 그 잘못된 확신을, 생각을 깨신다. 본인은 이방인 전도가 더럽다 했으나 주님은 내가 피로 깨끗케 한 것을 네가 더럽다 하지 말라고 책망하시며 그를 이방인인 고넬료 집으로 보내 이방인 전도의 문을 여신다.


    베드로가 본 환상은 사도행전 2장과 선지자 요엘의 예언처럼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여기 젊은이들이 보는 환상에서 젊은이가 베드로고, 환상은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보내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로 해석할 수는 없을까?


    한 사람은 젊은이와 환상을 안 좋게 인간의 부정 역사로 해석하고 또 한 사람은 젊은이와 환상을 베드로의 오판과 강퍅을 깨기 위한 하나님의 긍정 역사로 보고 해석한다. 누구 해석이 오판이고 곡해인가? 아직도 연구과제이다. 필자의 눈이 틀렸으면 모든 성구를 이런 식으로 삐뚤어지게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경우의 예로 사도행전 2장을 접근할 수도 있겠으나 필자는 쉽게 매치가 안되고 납득이 가질 않는다. 필자의 신앙이 어려 오판과 강퍅이라는 모드가 아직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누가복음 16장의 불택자에서 택자로 해석을 수정하신 스승의 재현일지도 모를 일이다.


    성경을 보는 눈, 안목은 신앙이 자라갈수록 넓어지고 깊어진다. 성경 해석도 마찬가지다. 성경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가 목회에 일어난 사건, 행정, 교인 지도와 직결된다. 부부간 간등, 교인간 대립, 부모와 자녀의 갈등, 둘 중에 한쪽은 오판하고 있다면, 설득도 지나치면 일을 거르친다. 자녀가 아니라 했는데 부모가 계속 밀어 부치고 감정에 호소해서 자녀가 설득 당해도 이후에 원치 않는 현실은 더욱 강하게 부정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오판은 결혼처럼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더 치명적이다. 부모가 오판하면 자녀는 따라갈 수 밖에 없다. 이긴다 진다 표현이 좀 그렇지만 자녀 이기는 부모는 없다지만 부모의 소신이 너무 강하고 주변에서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지원하면 자신의 소신을 강하게 주장하며 부모를 이길 자녀는 거의 없다. 이처럼 교인이 목회자를 이길 수는 없다. 교인이 떼쓰면 지는 척 한발 물러설 수는 있어도 노선은 절대 양보가 없다. 오판이라는 전제하에서 지금 글을 쓰고 있다.


    그 오판이 이런 중요한 위치면 더욱 그 피해는 크다. 이에 비례하여 하나님이 묻는 책임도 막중하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서 먹어 봐야만 알 수 있는가? 자기중심 때문에 사람은 참 어리석다. 말로 할 때 고치면 참 좋겠는데 이게 안되니 회초리를 들고 징계가 거듭되니 회개, 항복을 한다. 그러나 이미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다. 뒤늦게 후회하고 열매를 구하나 망령 부린 것에 대한 댓가는 컷고 한번 떠난 축복은 돌아올 줄을 모른다. 에서의 팥죽 한그릇처럼, 필자의 인생처럼 말이다.


    그래도 필자의 글들이 전부 다 도매금으로 오판과 강퍅으로 읽혀지기를 원치는 않는다. 일부 필자의 오판과 강퍅이라면 누구에게는 반면교사가 될 것이고 일부 정판이면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정녕 출몰꾼이 되고 싶지는 않다.

  • 2021-04-06 20:59
    하루를 살고 나면 주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기 마련이다. 그 감사를 기록이란 산물로 남겨 본다. 매일 일어났던 일들을 짧게나마 글로 적어 보는 것은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 공간이 허락되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수고와 기도가 있어 감사하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도움 주는 나무가 되고 싶은데 그릇이 작아 한계를 느낀다. 오늘 강의 내용처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을까? 성령을 받으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고 하나님의 그 깊은 현실의 역사를 바로 해석할 수 있을까? 그러면 부부가 하나되듯 내 안에 신성과 인성도 혼연일체가 가능할까? 역사 성령을 받은 자가 몇 명이나 될까? 받기 전과 후는 분명 다르다. 나타나는 능력의 차이가 이를 증명한다.

  • 2021-04-07 06:01
    한계와 무한


    살면서 내 능력 밖의 일을 우리는 많이 경험한다. 그럴 때마다 내겐 그런 재능을 주님이 주지 않았어 라며 일축해 버리기 쉬운데 한계는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다. 넘어져 허우적대라고 웅덩이를 파 놓으신 것이 아니다. 그 한계를 뛰어 넘어 무한으로 나아가라고 한계라는 중간 지점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충만, 누구나 한계는 있고 누구나 잘 안되는 것이 있다. 상대와 비교했을 때 너무나 보잘것 없고 남에게 내어 놓기 민망한 경우도 있다. 전도와 설교를 예로 들어 보자.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전도 잘하는 사람, 전도 잘 못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잘한다 잘 못한다 보다 안한다 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매일 예수를 외치며 우리는 얼마든지 주변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다. 내 속에 불이 일어나면 외치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다.


    설교도 처음해 보면 한계를 느낄 때가 많다. 그러나 계속 하다 보면 자란다. 한계를 느껴야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고 성령의 권능을 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무한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처음 설교를 시켰는데 듣는 청중들에게 덕이 안 된다고 설교가 형편 없다고 그 다음부터 안 시키고 잘하는 사람만 시키면 사람이 길러지질 않는다. 대충 하면 설교 안 시키겠지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설교를 더 자주 시켜야 한다. 그 속에 악을 뿌리뽑을 때까지... 설교를 아무나 시킬 수는 없지만 처음에 설교를 못하는 사람이 저것이 사람 되겠나 싶어도 나중에 의외로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는 사람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들 접하게 된다.


    밥맛이 없을 때가 있다. 기운이 없을 때가 있다. 매너리즘, 슬럼프 라는 단어처럼 전도와 설교에 힘이 빠질 때가 있다. 원인을 성령의 충만에서 찾아 본다. 성령은 진리를 타고 온다고 배웠다. 새벽 설교 전 충만하게 성경을 읽어 설교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새벽 설교를 듣는 자의 마음은 이미 설교자와 말씀 듣는 준비 자세부터 이미 하나가 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배울 점이 있고 고칠 점이 있다. 교단도 교파도 마찬가지이다. 공회 특히 우리가 몸담고 있는 부공3의 한계는 무엇일까? 무한으로 자라가야 할 점은 무엇일까? 깍아 내리려는 중심이 아니라 건설적인 생각을 적어 본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새 교인들의 관찰된 의견을 참고해 본다. 외부에 안테나를 세워 공회에는 주지 않았는데 우리가 참고할 만한 신앙의 유익들이 주변에는 참 많은 것 같다. 주변을 주목해 본다. 수직적인 관계가 강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수평적인 관계가 약할 수 있다. 성경보고 기도하고 연구하고 골방에 집중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질 수 있다. 구역장 제도의 범위와 재편, 발전도 모색해 본다. 함께 나누고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데 눈치를 보는 분위기 속에서 자칫 속마음을 안 드러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삼삼오오, 둘씩 둘씩 토론해 보는 debate, 주일 들은 설교를 가지고 짝을 지어 함께 문답 형식으로 나눠 보는 방식 등 집사님은 전도를 어떻게 해 보고 계시는지? 설교 필기, 자신만의 경험담 공유라든지 담당님 흉내를 내 보는 것 어떻게 하면 새벽 설교 교인이 늘어날 것인가 등 한계를 무한으로 바꾸는 길을 찾아 본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가능한데 갑절의 영감을 받는 것은 어려운 것을 구하는 것이라 엘리야가 말했다.


    신약에서는 120명만 받았다. 당시 주님을 따랐던 무리들을 적게 잡아도 10,000명에서 수만명이라 치고 1%만 역사 성령을 받았다. 받았다 해도 성령 충만을 유지, 발전시켜 성령의 열매를 맺기까지는 더 어렵다. 집회 참석이 1,000명이라 해도 역사 성령을 받아 한계에서 무한의 눈을 뜬 자는 열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 물론 통계를 다 믿을 건 안되지만 대충 짐작이 그렇다는 것이다.


    산고의 고통이 임박하면 그렇게 기다리던 아기가 조만간 태어나겠구나 처럼 한계에 봉착하면 무한의 문이 조만간 내 앞에 열리겠구나 도박신앙처럼 한번 구한다고 받은 성령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부여 잡고 죽기까지 매달려 성령이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는 절박한 심정의, 전심으로 구할 때 성령의 충만은 계속된다. 내가 성령 받는 것보다 성령 못 받은 자를 받게 하는 것은 더 어렵다. 성령이 오면 내가 죄인인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의인도 필요하나 죄인이 먼저다. 죄인임을을 먼저 인정할 때 그 다음 비로소 바로된 의인이 탄생한다. 한계와 무한 사이에 역사 성령이라는 열쇠가 잠긴 자물통을 연다. 마음 닫힌 자녀의 울분을 풀 수 있다. 배우자의 답답함이 해소된다. 성령은 둘을 하나되게 한다. 신인양성일위의 주님 형상이 내 속에서부터 만들어지고 건설된다.


    하라 그러면 되리라. input 하라 그러면 output 되리라. 아침밥을 먹으면 장 속에 쌓였던 노폐물이 밀려나 뒤로 버려지듯 성경 말씀 속 진리라는 젖을 자꾸 캐내고 캐내어 받아 먹으면 역사 성령이 온다. 성령이 오면 내 안에서부터 그 역사가 나타난다. 기쁨, 감사, 충성, 소망, 담대, 충만...


    내 밖에서는 받은 성령을 써 먹고 싶어진다. 불신자에게는 전도하게 되고 신자에게는 설교하게 된다. 날마다 전도하고 설교하는 자에게는 신앙의 권태가 없고 오직 성령 충만이라는 탄탄대로 한 길만 보일 것이다. 걸어갈 것이다. 성령을 소멸치 않고 갈수록 번창할 것이다. 전도나 설교는 특수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거듭난 자의 자연스러운 생명 역사이다. 조금 강하게 강조한다면 주님 앞에는 잘하고 못하고는 없다. 하느냐 안하느냐만 있다. 성령의 열매를 따 먹기까지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애로나 환란이 닥쳐도 믿어지니 내 목숨과 맞바꾸어도 아깝지 않다는 담대함이 나오는 것이다. 무모함이 아닌 담대함, 고린도전서 13장이 말하는, 무례함이 아닌 사랑이라는 겸손함 말이다.

  • 2021-04-07 09:44
    교리, 신조, 행정 그리고 노선


    요리를 만들어 손님에게 음식 대접을 하려면 재료가 있어야 한다. 식재료 말이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구원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구원은 이루어 가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식재료처럼 구원을 이루는 데도 재료가 필요하다. 수많은 재료들 중에서 몇 개만 정해 본다면, 바로 알고 바로 깨닫게 하는 교리라는 안약, 바로 믿게 하는 흰옷이라는 사활 대속의 은혜, 믿은 신조대로 행하게 하는 행정, 이 세가지가 합쳐진 좁고 바른 길이라는 노선, 노선은 최종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 길이라고 나름 정의해 보았다.


    공회에서는 너도나도 너무나도 잘 아는 단어들, 교리, 신조, 행정, 노선이다. 그런데 동음이의어처럼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데 뜻은 달리 해석하니 수많은 길이 생기는 것 같다. 남과 북, 같은 한국말을 사용하는데 분단 70년만에 사용하는 단어도 뜻도 생소하다. 의사소통이 안된다. 자연스레 두 나라가 되는 것이다. 너무나 잘 아는데 너무나 잘 모른다. 모순, 아이러니다. 필자가 그렇다는 말이다.


    어른이 되어 초등학교 교정을 가 보면 운동장도 작고 놀이터의 철봉도 아주 낮다. 학교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 눈, 시야가 변한 것이다. 그러나 수 십년 전 초등학교 다닐 때는 철봉이 왜 그리 높게 느껴졌는지, 턱걸이 한번이 그리 힘들었고 운동장이 참 넓게 느껴졌었다. 자라보니 보는 눈, 안목이 넓어졌다는 증거다. 교리, 신조, 행정, 노선 이 4단어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령 받은 도수가 다를 것이다. 주일학생에게 설명해 보라면 다를 것이고 순복음 계열에게 설명해 보라 하면 또 다를 것이고 선교사에게 설명해 보라면 또 다를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 같은 큰 그릇도 있고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도 있다. 사람마다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쓰임새에 따라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혜도 다른 것 같다.


    이를 너는 받았다 못 받았다로 접근하면 무리수가 생긴다. 때로는 그런 기준도 필요하나 신앙 연륜이 오래 되어도 믿음이 연약한 자는 많다. 믿음이 연약한 자가 의심하는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하다. 윽박을 지르면 자녀는, 아내는, 교인은, 상대방은 그 다음부터 질문을 안하게 된다. 소리를 크게 지른다고 윽박이 아니다. 좋게 친절하게 말해도 말문을 닫게 만들 수 있다.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윽박은 곧 산성 문빗장을 지르는 결과를 낳는다. 필자를 포함하여 우리의 지난 과오를 살펴 본다.

  • 2021-04-08 05:56
    성령론과 간절성


    우리는 인간의 한계에 봉착했을 때 '안된다'와 '된다'를 반복하며 이를 극복해 나간다. 인적요소인 내 힘으로는 안된다. 그러나 신적요소인 주권의 하나님이 해 주시면 된다는 이 간단한 원리에서 무한한 간절성이 나온다. 이것이 깨달아지려면 먼저는 내가 어떤 존재라는 사실을, 본인이 직접 본인 눈으로 실제 자기 내면의 실상을 직시하며 자기가 어떤 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확실하게 인정되어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주님의 피로 의인된 '나'지만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나는 갓 태어난 피덩이 신생아와 같으니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간절한 마음이 생길 때 비로소 성령의 충만을 바로 구하는 기도가 시작된다.


    어떤 자가 성령을 구하는가? 어떤 자가 성령을 간절하게 구하게 되는가? 어떤 자가 성령을, 성령충만을 받는가? 받은 성령을 계속 충만하게 유지할 수 있는가? 마지막 노년에는 결국 성령의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는가? 세대를 이어가며 이런 믿음의 유산-전수가 가능한 자는 과연 누구인가? 성령 아니고는 답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때, 성령이 아니고는 인간의 본성, 인성의 한계를 벗고 신성의 하나님 형상을 입을 수 없다는 결론. 내 안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 이 죄성, 악성을 박멸하려면 그 죄악을 살찌우는 먹이를 안 줘야 하는데 이 원초적인 쾌락의 본능을 이길 자 그 누구인가? 아무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면 비로소 돕는 은혜인 보혜사 성령을 구하게 된다. 구하되 간절히 구하게 된다. 인적 요소인 마음의 간절성이라는 그릇에 기도를 담아 하늘로 올리우면 그 향을 흠향하시고 흡족히 여기사 신적요소인 성령을, 충만을 주시니 찬송가 141장 가사처럼 성령의 교통 받아 대속해 주신 인애를 바로 깨달아 알게 되고 바로 보게 된다. 바로 믿게 되고 바로 행하게 되어 바른 길을 걸어가게 된다. 주관이 객관이 된다. 주관과 객관이 비로소 하나가 된다.


    어느 정도까지 간절히 구하게 되는가? 먹는 것, 자는 것, 활동하는 것 모두 잊어 가며 돌아가던 공장 가동을 올스톱하듯 바쁘게 살아가던 만사를 잠시 일시 멈춰 중단해 놓고 먼저는 성령 받기를 구하게 된다. 과거 성령을 받았는데 살다보니 한눈 팔아 성령을 소멸해 버렸으면 다시 성령 충만을 간구하게 된다. 성령 아니고서는 이 구제불능, 불치명, 시간 지나면 말짱 헛일, 옛날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보며 원수에 대한 원한과 속은 자신의 무지무능을 한탄하며, 성령을 안 주실려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이런 중심과 소원과 강도를 가지고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런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충만을 구할 때 그 간절성은 배가 된다. 날마다 새벽마다 때마다 일마다 무시로 성령충만한 자는 헛일을 안하게 된다. 시간 사용을 잘하게 된다. 사람에게 속지 않고 마귀에게 속지 않는다. 면역력이 강해 악성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되지 않는다. 필요악처럼 필자의 댓글도 헛일이 될 수 있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마찬가지라 고민이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 2021-04-08 10:24
    6과 7, 한끝 차이


    마귀의 수는 하나님 수에서 1을 빠진 6이다. 뱀과 같은 마귀의 지혜는 그 도수가 깊고도 은밀하다. 그래서 끝장을 볼 때까지 집요하다. 가장 좋은 것을 등뒤로 응큼하게 숨기고 좋은 것을 척 내 놓고는 아주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섞어 가면서 미끼를 휙 던진다. 예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금에다가 똥칠을 해 놓고 코를 막으며 더럽다고 연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똥이라는 그 소리만 듣고 기겁을 하다가 한 술 더떠 똥 냄새만 맡고는 거룩, 구별이 작동 불능 상태로 고장나 줄행랑을 치기 쉽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특이한 일이 현실에 벌어질수록 허둥대지 말고 눈을 감고 고요하게 생각부터 먼저 해 봐야 한다. 땅을 살 때도 그렇고 직분을 세울 때도 그렇고 아들, 딸을 시집 보낼 때도 그러하다. 이 결정이 멀리 볼 것도 없이 10년 뒤에 어떤 결과를 맺을까? 그러면 후회는 천만다행으로 바뀐다.


    도고일장 마고일장이라 했던가!
    성령이 오면 마귀의 역사도 한층 강해진다. 그래서 주님이 성령 주시기를 미루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되기 전에 성령의 불을 받으면 3살짜리 아이에게 성냥을 쥐어준 격이 된다. 역사 성령을 받은 후 교만해지기 쉽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 1950년대 6.25가 끝난 이후 믿음의 선진들의 기록을 보면 쉽게 알 수가 있다. 스승도 이 점을 조심하라 설교록에 여러 차례 누차 강조하셨다. 산상 집회를 통과하며 받은 교훈, 이제부터는 말씀 연구에 집중하겠다는 결심을 하시게 된다.


    성령은 같지만 성령을 통해 받은 은사는 여러가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누구는 방언의 모습으로 누구는 예언으로 누구는 깨달음으로 누구는 이렇게 저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4월 한달의 주제가 성령론이다. 집회를 준비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주제는 없는 것 같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는 질문처럼 성령을 어떻게 받았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받았는지 성령 받은 후 교만하여 넘어진 경험이 있었는지? 어떻게 성령충만을 유지할 수 있는지 그 비결은 무엇인지 전달식의 강의와 강의 이후 문답과 함께 교인간 주고 받는 체험적 토론의 장도 좋겠다. 유대인의 회당처럼 어느 누구의 실수담이 또다른 누구에게는 자기를 고치는 귀한 약재료가 된다. 내게 없는 것을 남에게서 간접으로 배운다면 그것이 진정으로 성도간 교통이라 교제라 생각한다. 구역제도가 좋긴 하나 너무 강하게 묶어 버리면 장점도 많지만 치명적인 단점도 생각해 본다. 시간이 부족하고 평소 가족간 대화의 부족, 주고 받는 토론 실력의 부족으로 인해 힘은 들겠지만 시작이 반이니 새로운 시도가 늘 감사하다.

  • 2021-04-09 06:02
    예배,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남녀가 부부로 만나 가정교회를 출발하면 모든 것이 새롭다. 하지만 10여년 20년 가까이 되면 새로움은 없어지는 것이 보통의 일반이다. 그래서 이런 처음 사랑의 것들이 식을 만하면 하나님이 자녀를 주셔서 여자에게 새로운 환경을 허락하신다. 첫 아이는 애틋하나 상대적으로 셋, 넷으로 갈수록 그런 첫것에 대한 감격은 약해지고 달라진다. 남자도 첫 직장, 첫 사업을 시작할 때는 각오나 결의가 충만하지만 세월 속에 다니는 직장이 만만해지고 숙달되면 새로움을 잃어 버려 나태해지기 쉽다. 가정목회도 교회목회도 오래 되면 타성에 젖기 쉬운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스승 생전에는 사람을 길러가는 코스로 목회지 로테이션이 필수였다. 지금은 하고 싶어도 여건이 안되고 그만한 실력을 못 받춰 주니 못하고 안하는 것 같다. 차선은 없는 것인가?


    신앙도 새로움, 변화하지 않으면 하나님 뜻보다 내 뜻, 인간 뜻이 하나님 뜻인양 착각하기 쉽다. 윗선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표시다. 그래서 스승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 모른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모든 걸 내가 알아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 기도해 주시는 노모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인지 모를 일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첫 설교에 마음 졸이던 것이 오래토록 강단에 서다 보면 그 긴장감, 하나님 앞에 조심성은 떨어지기가 쉽다. 원숙미는 무거워져도 처음 사랑은 가벼워지기 쉬운 것이 사람의 보편적 망각성이다.


    새로운 변화, 미리 알고 스스로 바꾸면 좋은데 무지하고 새로운 시도 대신 기존에 해 왔던대로 하는 것이 편하게 느껴져 변화를 싫어하는 세대가 되었다. 그러나 주님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하려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선명하게 보인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남편과 자녀들, 영육의 건강은 아내의 손끝, 식탁에서 시작된다. 늘 같은 반찬 그 속에서 새로운 메뉴, 별미를 하나 만들어 보면 만들어 보지 못한 음식을 만들면서 주부는 새로움을 발견한다. 쓰지 않던 뇌가 활성화된다. 이 작은 시도가 신앙전반, 생활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매일이면 더 좋겠지만 주중에 한번이라도 새로운 음식 만들기 시도가 가정 분위기에 칙칙함, 권태남 대신 산뜻함,화사함을 전달한다. 설교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직장에서 변화는 쉽지 않다. 늘 같은 일로 식상하기 쉽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이 오면 외부 환경은 그대로인데 내가 바뀌니 현실이 새롭게 보인다. 내가 바뀌니 아내가 남편이 신혼때보다 더 사랑스럽고 퇴근이 기다려질만큼 설레기도 한다. 갓 태어난 첫아이 때문에 퇴근 1시간 전부터 느꼈던 그 설렘을 중년에 다시 경험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작은 변화 하나에 제품의 불량율이 거의 제로가 될 때도 있다.


    변화, 새로운 변화의 시작은 역사 성령을 받는데서부터 출발한다.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안 먹어도 배부르고 안 자도 피곤하지가 않다. 날마다 마음 속은 잔치의 연속이다. 희노애락 감정을 초월하여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입에는 찬송이 넘치고 미운 사람이 없고 힘든 일도 쉽게 느껴진다 이처럼 성령의 외부 폭발이라는 역사 성령과의 동행은 삶의 새로운 전환기, 변화를 불러 일으킨다.


    코로나로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2019년과 비교하면 급변하고 있다. 필자도 그 변화를 보면서 내 신앙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수시로 점검하고 있다. 2018년부터 필자가 느끼는 공회의 변화는 실로 놀랍다. 소경이 눈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느낌이다. 중생 이후 생명성은 자라가는 변화, 새로움이 있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 속에서 늘 새로운 변화와 시도를 추구하는 공회에서 주님을 따르고 있음에 감사하다.


    성령의 충만은 새로운 변화라는 결과를 맺는다. 자녀는 자립신앙을 꿈꾸게 되고 아내는 가정을 지상낙원으로 꾸며 남편이 퇴근하면 아늑한 쉼터를 제공한다. 교회는 목회자를 꿈꾸는 주일학생들이 늘어가고 새로운 개척지가 생기기 시작하며 외부에서 여기저기서 내부로 사람들이 유입된다. 가물면 물있는 웅덩이로 물고들이 모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인적 요소, 인간의 의지나 계획, 상상을 초월하여 나타난다.


    자세 하나, 설교 듣는 태도 하나, 목회자를, 교인을 상대하는 그 마음 자세 하나 바꾸면 어제의 원수는 내일의 신앙 동지가 된다. 나를 바꾸면 하나님이 감동하사 남을 바꾸신다. 나를 바꾸는 그 시작점에 성령이 계신다. 오직 성령 받기를 소원하면 몸의 태가 열려 90세에도 자녀를 얻게 된다. 성령 받으면 노년에도 전도에 불이 붙어 주일학생을 낳게 된다. 말세라 전도 안된다는 그 말이 무색하게 세상 일반 상식 통계를 깨 버리는 역사가 일어난다.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배가 달라지면 다 달라진다. 목회자처럼 새벽예배를 준비해 보자. 좀 더 일찍 일어나 매일 새벽 예배 설교를 준비하고 인도한다는 그 긴장감으로, 그 기대감, 그 기다림으로 말씀을 듣는다면 그의 직장은 달라질 것이고 그녀의 식탁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며 불만 가득했던 자녀들은 어떻게 하면 부모님에게 하나라도 더 잘 해 드릴까 안달하는 효자 효녀들이 날 것이다. 작은 변화에서 큰 능력이 나타난다.


    새벽 예배와 성경 읽기, 어떻게 점검하느냐에 따라 그의 신앙 색깔, 성향이 결정된다. 이 두가지에 변화만 계속 줘도 신앙의 권태는 없다. 매일 새벽 예배 설교자라는 심정으로 새벽 예배를 준비하고 참석해 보자. 성경 읽기, 통째로 성경을 마음에 가지고 달달 읽어보자. 성경만 읽어보자. 최소 한달에 1독을 목표로 틈만 나면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해 보자. 1독이라는 양적 변화보다는 질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식사량과 메뉴 취향은 다르다. 어떤 자는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는다는 말씀처럼 변화의 필요성을 지금 언급하고 있다. 공회가 지금 변화 안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새로운 변화를 주저하는 필자의 삶을 본 시각으로 전체를 한번 바라본다.


    이런 작은 변화 하나가 모이고 쌓이면 무시로 기도는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자신만의 경건노트, 신앙의 경험, ,노하우 잘한 것 못한 것, 실수도 나누고 공유하자. 모든 것을 질서대로 목회자의 지도 아래 시작해 보자. 공회에는 없는 좋은 팁을 외부에서 배우자.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온 교인의 말에 귀 기울여 보자. 주변 현실로 유학을 가 보자. 배워 오자. 벤치 마킹처럼 내게 없는 것이 주변에 널려 있다. 보석처럼.


    공회의 순수성을 유지하면서도... 사자의 강한 턱과 날카로운 발톱에 독수리의 날개와 부리를 달아 보자. 이 세상에는 없지만 요한계시록 말씀처럼 신앙 세계에서는 실제로 존재한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요소가, 죄악으로 퇴색되고 숨겨진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는 충분히 잠재되어 있다. 말세 환란을 감당하려면 날마다 새로움, 날마다 변화, 날마다 자라가는 성장성이 내 삶 속에 나타나야 한다. 나를 다 드러내라. 나를 다 드러내지 말라. 새로운 변화는 나의 수십년 불치병을 고친다.


    가르치려는 자세가 아니라 이렇게 기도하는 방법도 있더라 저런 방식으로 전도하는 사람도 있더라 요런식의 설교도 있더라 처럼 밤예배 후에 좀 더 기도, 주일예배 후 인사 먼저 처럼 잘 안되는 것을 되게 하는, 좀 더 낫게 좀 더 바로 좀 더 제대로 믿어 보자 좀 더 발전처럼 무한을 향한 또 하나의 제안이고 의견입니다.

  • 2021-04-09 11:31
    신속 정확, 일사천리에 탁월까지, 두 마리 토끼를 잡다.


    같이 살아 보면 10년 세월 속에, 서로서로 속에 있는 것이 왠만큼 다 드러난다. 같이 일을 해 보면 사람을 대중 알 수 있다. 속도 면만 기준해 볼 때 일을 신속하게 빨리 처리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 느리지만 꼼꼼하게 처리하는 사람도 있다. 일처리 속도가 빠른 사람은 대체적으로 정확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반면 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사람은 대체로 속도가 느리다. 그래서 일처리가 빠른 사람과 일처리가 늦은 사람이 서로 손발을 잘 맞춰 가며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 환상의 콤비를 이룰 수 있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안 보는, 죽어서도 풀 수 없고 장례식에도 서로 오갈 수 없는 원수가 될 수도 있다. 이런 면은 어디서나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나타난다.
    서로 다르면 서로에게서 배우면 좋은데 대부분 일처리를 신속하게 하는 사람이 꼼꼼하게 일하는 사람을 보면 답답해서 속이 터진다. 반면 정확하게 일처리하는 사람이 볼 때 속도가 빠른 사람은 대충대충 건성으로 하는 것처럼 보여 마음에 안 들게 되어 있다. 이런 시각 차이가 집회 준비 기간 동안 불목의 요소로 등장하는 경우가 흔하다. 텐트를 같이 치면서 부자간, 교인간에 티격태격이 생긴다. 나는 스타일이 빨리 빨리 하는 편인데 속도를 좀 줄이라고 내 옆에 저런 꼼꼼한 사람을 붙여 주셨구나 생각하면 좋은데 저 사람은 왜 속도가 저렇게 느려 터져서 일을 같이 못 하겠다고 언사가 불평이다.


    꼼꼼한 사람은 내가 워낙 느림보니 내 옆에 저런 빠른 사람을 붙여 주셔서 나의 단점을 고치게 하시는구나 하면 서로가 좋은데 일을 저리 대충하니 불량이 나고 일을 다시 해야 하는 두벌 일이 되지 참 답답하다 그런다. 그러면 서로가 답답하다. Win-Win 하라고 서로 짝지어 주셨는데 눈이 삐뚤어져 있어 실수 한번에, 딱 한번 삐걱해서 쓴뿌리가 생기면 둘 다 실패다. 부부의 이 원리를 모든 사람간에 적용해 본다. 남의 단점을 고쳐 주려 하기 보다는 남의 장점을 배우려는 게 더 쉽고 속성으로 더 빠르게 자라 나중까지 계산해 보면 남는 장사에 뒷탈도 없다. 말은 쉬운데 참 어려운 숙제다. 집회를 준비하며 가족간 교인간 의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늘 강조해서 광고를 듣지만 속 좁은 자기 때문에 잘 안 고쳐진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불목 원인의 1순위를 진리로 보는데 진리 안에 이런 속도 차이에서 오는 불만, 시차 적응을 못하는 성격이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집회가 한 달도 채 안 남았다. 누구는 벌써부터 노래를 부른다. 5월, 8월 집회는 공회의 좋은 전통이다. 집회를 준비하면서 많은 마찰이 있을 수 있다. 싸우면서 철 든다는 말이 어른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시간이 남아 돌면 남자든 여자든 죄 짓기 쉽다. 바쁘게 살아야 하는데 집회가, 바쁘게 살 수 있는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하니 이보다 더한 특별식도 없다. 집회를 사모하는 자는 다투면서도 그 속에서 자타를 보며 부딪치고 깨지면서 집회를 준비하는 그 속에서 집회 설교 못지 않은 보물을 캐내 보너스 덤의 수확을 얻는다. 직장에 매인 몸은 입맛만 다신다. 자유업을 하게 되면 내 맘대로는 되지만 직장에 매여 마음 졸이며 주님을 의뢰하는 면은 약할 수 있다. 사람마다 형편이 다양하니 그 모든 사람을 접하며 비위를 맞추다 보면 완전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목회직은 하늘이 내려준 천직 같다. 천리 길도 가정목회직 한 걸음부터, 가정 목회를 시작하는 청년들이 집회를 준비하니 부공3도 어느새 2세대를 넘어 3세대를 바라보고 있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신속과 정확, 일사천리에 탁월까지 겸비한 5월, 8월 집회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신속 정확, 일사천리에 탁월까지, 두 마리 토끼를 잡다.


    같이 살아 보면 10년 세월 속에, 서로서로 속에 있는 것이 왠만큼 다 드러난다. 같이 일을 해 보면 사람을 대중 알 수 있다. 속도 면만 기준해 볼 때 일을 신속하게 빨리 처리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 느리지만 꼼꼼하게 처리하는 사람도 있다. 일처리 속도가 빠른 사람은 대체적으로 정확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반면 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사람은 대체로 속도가 느리다. 그래서 일처리가 빠른 사람과 일처리가 늦은 사람이 서로 손발을 잘 맞춰 가며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 환상의 콤비를 이룰 수 있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안 보는, 죽어서도 풀 수 없고 장례식에도 서로 오갈 수 없는 원수가 될 수도 있다. 이런 면은 어디서나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나타난다.
    서로 다르면 서로에게서 배우면 좋은데 대부분 일처리를 신속하게 하는 사람이 꼼꼼하게 일하는 사람을 보면 답답해서 속이 터진다. 반면 정확하게 일처리하는 사람이 볼 때 속도가 빠른 사람은 대충대충 건성으로 하는 것처럼 보여 마음에 안 들게 되어 있다. 이런 시각 차이가 집회 준비 기간 동안 불목의 요소로 등장하는 경우가 흔하다. 텐트를 같이 치면서 부자간, 교인간에 티격태격이 생긴다. 나는 스타일이 빨리 빨리 하는 편인데 속도를 좀 줄이라고 내 옆에 저런 꼼꼼한 사람을 붙여 주셨구나 생각하면 좋은데 저 사람은 왜 속도가 저렇게 느려 터져서 일을 같이 못 하겠다고 언사가 불평이다.


    꼼꼼한 사람은 내가 워낙 느림보니 내 옆에 저런 빠른 사람을 붙여 주셔서 나의 단점을 고치게 하시는구나 하면 서로가 좋은데 일을 저리 대충하니 불량이 나고 일을 다시 해야 하는 두벌 일이 되지 참 답답하다 그런다. 그러면 서로가 답답하다. Win-Win 하라고 서로 짝지어 주셨는데 눈이 삐뚤어져 있어 실수 한번에, 딱 한번 삐걱해서 쓴뿌리가 생기면 둘 다 실패다. 부부의 이 원리를 모든 사람간에 적용해 본다. 남의 단점을 고쳐 주려 하기 보다는 남의 장점을 배우려는 게 더 쉽고 속성으로 더 빠르게 자라 나중까지 계산해 보면 남는 장사에 뒷탈도 없다. 말은 쉬운데 참 어려운 숙제다. 집회를 준비하며 가족간 교인간 의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늘 강조해서 광고를 듣지만 속 좁은 자기 때문에 잘 안 고쳐진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불목 원인의 1순위를 진리로 보는데 진리 안에 이런 속도 차이에서 오는 불만, 시차 적응을 못하는 성격이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집회가 한 달도 채 안 남았다. 누구는 벌써부터 노래를 부른다. 5월, 8월 집회는 공회의 좋은 전통이다. 집회를 준비하면서 많은 마찰이 있을 수 있다. 싸우면서 철 든다는 말이 어른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시간이 남아 돌면 남자든 여자든 죄 짓기 쉽다. 바쁘게 살아야 하는데 집회가, 바쁘게 살 수 있는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하니 이보다 더한 특별식도 없다. 집회를 사모하는 자는 다투면서도 그 속에서 자타를 보며 부딪치고 깨지면서 집회를 준비하는 그 속에서 집회 설교 못지 않은 보물을 캐내 보너스 덤의 수확을 얻는다. 직장에 매인 몸은 입맛만 다신다. 자유업을 하게 되면 내 맘대로는 되지만 직장에 매여 마음 졸이며 주님을 의뢰하는 면은 약할 수 있다. 사람마다 형편이 다양하니 그 모든 사람을 접하며 비위를 맞추다 보면 완전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목회직은 하늘이 내려준 천직 같다. 천리 길도 가정목회직 한 걸음부터, 가정 목회를 시작하는 청년들이 집회를 준비하니 부공3도 어느새 2세대를 넘어 3세대를 바라보고 있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신속과 정확, 일사천리에 탁월까지 겸비한 5월, 8월 집회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신속 정확, 일사천리에 탁월까지, 두 마리 토끼를 잡다.


    같이 살아 보면 10년 세월 속에, 서로서로 속에 있는 것이 왠만큼 다 드러난다. 같이 일을 해 보면 사람을 대중 알 수 있다. 속도 면만 기준해 볼 때 일을 신속하게 빨리 처리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 느리지만 꼼꼼하게 처리하는 사람도 있다. 일처리 속도가 빠른 사람은 대체적으로 정확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반면 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사람은 대체로 속도가 느리다. 그래서 일처리가 빠른 사람과 일처리가 늦은 사람이 서로 손발을 잘 맞춰 가며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 환상의 콤비를 이룰 수 있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안 보는, 죽어서도 풀 수 없고 장례식에도 서로 오갈 수 없는 원수가 될 수도 있다. 이런 면은 어디서나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나타난다.
    서로 다르면 서로에게서 배우면 좋은데 대부분 일처리를 신속하게 하는 사람이 꼼꼼하게 일하는 사람을 보면 답답해서 속이 터진다. 반면 정확하게 일처리하는 사람이 볼 때 속도가 빠른 사람은 대충대충 건성으로 하는 것처럼 보여 마음에 안 들게 되어 있다. 이런 시각 차이가 집회 준비 기간 동안 불목의 요소로 등장하는 경우가 흔하다. 텐트를 같이 치면서 부자간, 교인간에 티격태격이 생긴다. 나는 스타일이 빨리 빨리 하는 편인데 속도를 좀 줄이라고 내 옆에 저런 꼼꼼한 사람을 붙여 주셨구나 생각하면 좋은데 저 사람은 왜 속도가 저렇게 느려 터져서 일을 같이 못 하겠다고 언사가 불평이다.


    꼼꼼한 사람은 내가 워낙 느림보니 내 옆에 저런 빠른 사람을 붙여 주셔서 나의 단점을 고치게 하시는구나 하면 서로가 좋은데 일을 저리 대충하니 불량이 나고 일을 다시 해야 하는 두벌 일이 되지 참 답답하다 그런다. 그러면 서로가 답답하다. Win-Win 하라고 서로 짝지어 주셨는데 눈이 삐뚤어져 있어 실수 한번에, 딱 한번 삐걱해서 쓴뿌리가 생기면 둘 다 실패다. 부부의 이 원리를 모든 사람간에 적용해 본다. 남의 단점을 고쳐 주려 하기 보다는 남의 장점을 배우려는 게 더 쉽고 속성으로 더 빠르게 자라 나중까지 계산해 보면 남는 장사에 뒷탈도 없다. 말은 쉬운데 참 어려운 숙제다. 집회를 준비하며 가족간 교인간 의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늘 강조해서 광고를 듣지만 속 좁은 자기 때문에 잘 안 고쳐진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불목 원인의 1순위를 진리로 보는데 진리 안에 이런 속도 차이에서 오는 불만, 시차 적응을 못하는 성격이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집회가 한 달도 채 안 남았다. 누구는 벌써부터 노래를 부른다. 5월, 8월 집회는 공회의 좋은 전통이다. 집회를 준비하면서 많은 마찰이 있을 수 있다. 싸우면서 철 든다는 말이 어른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시간이 남아 돌면 남자든 여자든 죄 짓기 쉽다. 바쁘게 살아야 하는데 집회가, 바쁘게 살 수 있는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하니 이보다 더한 특별식도 없다. 집회를 사모하는 자는 다투면서도 그 속에서 자타를 보며 부딪치고 깨지면서 집회를 준비하는 그 속에서 집회 설교 못지 않은 보물을 캐내 보너스 덤의 수확을 얻는다. 직장에 매인 몸은 입맛만 다신다. 자유업을 하게 되면 내 맘대로는 되지만 직장에 매여 마음 졸이며 주님을 의뢰하는 면은 약할 수 있다. 사람마다 형편이 다양하니 그 모든 사람을 접하며 비위를 맞추다 보면 완전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목회직은 하늘이 내려준 천직 같다. 천리 길도 가정목회직 한 걸음부터, 가정 목회를 시작하는 청년들이 집회를 준비하니 부공3도 어느새 2세대를 넘어 3세대를 바라보고 있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신속과 정확, 일사천리에 탁월까지 겸비한 5월, 8월 집회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 2021-04-09 11:35
    실수로 글이 중복으로 올려졌습니다. 수정요함.

  • 2021-04-10 10:57
    이것까지 참으라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검으로 잘라 버린 베드로를 향해 주님이 하신 말씀은, '이것까지 참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였다. 여기에서 두가지가 생각난다.


    첫째 사람이 내게 잘못하면 우리는 기회를 몇번 주는가? 삼 세번? 아니면 열번? 주님은 살아 생전 평생이라는 기간을 우리에게 고칠 기회로 주신다. 자녀가 실수하거나 잘못을 알고도 계속 하면 보통 기회가 열번을 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부모인 내가 잘못했을 때는 주님이 나를 어떻게 상대하실까? 얼마나 기다려 주실까? 이것까지 참아가며 기다려 주신다.


    둘째 사람이 내게 잘못하면 우리는 보통 피해를 입힌 그 사람을 주시하게 된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이라며 고난을 주신 하나님을 주목하신다. 무엇이 다른가? 불의, 부당함까지 참으셨다. 말세 환란이 들이닥치면 상식이 안 통하고 불법이 자행되는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속에서 불의에 대한 정의감이 발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님은 억울한 누명에 대한 해명의 입을 열지 않으시고 그 모든 부당한 대우와 조롱을 거부하지 않고 몸소 다 받으셨다.


    이것까지 참으라.


    실수에 관대한 사람이 있다. 반면 잘못한 것에 대한 잣대의 기준이 엄격한 사람이 있다. 두번 다시 이런 잘못을 계속 하면 그땐 회초리 맞을 각오해 라며 엄포를 놓는 부모도 있다. 자라갈수록 회초리는 훈계로, 훈육법도 변모해 가야 한다. 한국 사람들의 민족성은 잘못한 것에 대한 관대함보다 엄격한 쪽인 것 같다. 잘해도 교만해진다고 칭찬에 인색하다. 더 잘하라고 상위 1%로 내몬다. 적절한 예가 있어 소개한다.


    다음은 현서네 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퍼온 글이다.


    1. 우리 아이들이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할 때가 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항상 옳은 행동과 판단을 하지 못한다. 하물며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은 아이들은 어떨까?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잘못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잘한 것에 대한 칭찬이다. 설사 잘못하더라도 지적은 짧게 하고 더 잘할 수 있다는 칭찬과 기대감을 표현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는 정말 엄마, 아빠가 기대하고 믿는 만큼 자라는 것 같다. 물론 몇 번 말했다고 아이들이 그대로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부모가 나를 믿고 지지해 준다는 것을 알면 아이들도 본능적으로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엄마, 아빠한테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것이 아이들의 기본적인 욕구이다.


    2. 하지만 아이 안의 또 다른 욕구는 자꾸 잘못된 행동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아이들도 그것과 매순간 싸우고 있는 것이다. 잘하고 싶어도 잘 안 되는데 엄마한테 혼까지 나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엄마가 안 믿어 주면 누가 우리 아이들이 잘할 수 있다고 믿어줄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그리 잘못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엄마의 기대가 커서 그럴 수도 있다. 우리가 잊고 있을 뿐이지 우리도 어릴 때는 분명 다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니 아이가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해도 지적보다는 칭찬해 주고 또 믿어 주자. 아이들은 자기로 인해 엄마와 아빠를 행복하게 할 때 자존감이 향상된다.


    3. 유럽이나 남미에서 온 학생들은 문법적으로 틀리거나 말거나 자신의 의견을, 되지도 않는 단어들을 조합해 마구 쏟아 낸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다 말했으니 알아서 이해해"라는 듯 당당한 자세다. 이런 친구들이 서너 마디를 하는 동안 한국 학생들은 겨우 한마디를 말한다. 아마도 완벽한 표현으로 말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수십 번은 문장을 수정한 후 겨우 내뱉은 한마디일 것이다.


    4. 틀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영어 말하기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된 것이다. 거기에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경향도 있어 말을 덜 하게 되고, 말을 덜 하니 영어 실력도 다른 나라 학생들에 비해 빠르게 늘지 않는 것이다. 원인은 단 한 문장을 말하더라도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을 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일 것이다. 그런 태도가 아예 필요 없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영어를 더 유창하게 하는 친구들을 보면, 되든 안 되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최대한 말을 많이 하고, 가능한 한 오랜 시간 스스로를 영어 환경에 노출시키는 친구들이었다.

    - 현서네 유튜브 영어 학습법 p.19 인용


    위 말이 다 옳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아이의 속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 있으니 말해 주고 말로 안되면 회초리도 때에 따라 필요하다. 지적도 필요하다. 필자가 위 글을 읽고 강하게 느낀 것은 야단도 치고 지적도 해야 하지만 부모가 분에 못 이겨 감정에 호소하듯 말함으로 자녀가 잘못한 것을 너무 강하게 인식해 버리면 잘할 수 있다는 마음문까지 닫아 버린다는 게 문제다. 하라는 말보다 하지 말라는 것이 더 중독성이 강해 아이 머리 속에는 하지 말라는 것만 또렷히 남아 각인되기가 더 쉽다. 한국말인 모국어를 처음 배울 때, 아이가 첫 옹알이 할 때 그냥 잘한다 그러지 발음 교정해 주려 진지하게 노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면에서 우리를 이런 실수를 자주 범한다.


    자녀가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먼저는 부모 자신의 삶을 돌아보거나 자신의 어릴 적 혼나면서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며 어떻게 자녀의 잘못을 상대할 것인가 많은 연구와 고민, 또한 공부가 필요할 것 같다. 이는 잘못을 반복하는 교인을 상대하는 목회자, 노부모님의 실수를 대하는 자세, 아내를 남편을, 배우자의 잘못을 상대하는 나의 태도,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 밑에 직원의 실수를 상대하는 마음가짐에 이르기까지 널리 적용되는 이치다.


    '이것까지 참으라'
    세상이 말하는 무저항주의가 아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저항주의다. 구원을 손해케 하는 아말렉은 하나님이 끝까지 싸워 끝장을 보신다. 우리는 다만 싸우는 무기와 방식이 다를 뿐이다. 위 짧은 말씀에서 앞으로 곧 들이 닥칠 말세 환란을 이길 비법을 강구해 보고 간구해 본다. 그러면 평소 일상 속에서 검과 몽치로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그들보다 더 무지막지하고 고집 센 연습 상대를 여기 저기서 많이 만나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자녀의 잘못은 곧 부모가 잘못한 것을 드러낸 거울이다. 어떤 교인인, 상대가 내게 손해를 입힌 잘못은 내 속에 있는 악습 하나를 보여준 표시일 뿐이다. 자녀에게 회초리를 때리며 부모는 하나님으로부터 회초리를 맞는다. 부모에게 매워 주신 십자가가 곧 자녀다. 자녀가 현실마다 맞닥 들이는 고난의 잔은 부모가 먼저 마시게 되어 있다.


    자비와 긍휼이 없어 삶이 궁핍한 우리들에게 주님은 무엇을 주고 싶어 하시는가? 그것을 찾아 보자. 그것을 구해 보자.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 주시네

  • 2021-04-11 05:27
    주인과 손님, 주객전도.


    주인은 대접한다. 손님은 대접받는다. 천국에서 큰 자는 섬기는 자다. 집회 때 손님의 신분으로 참석하는 자도 있고 주인의식으로 참석하는 자도 있다. 주인은 집회전부터 먼저 와서 집회를 준비하고 집회가 끝나도 남아 뒷정리를 다하고 마지막에 자리를 뜬다. 손님은 다 된 밥에 수저만 올려 놓으면 된다. 우리는 다 손님에서 시작해서 주인으로 자라가는 게 정상이다. 너희가 선생이 되어야 마땅한데 세월이 많이 흘러도 아직 젖밖에 못 먹는 신앙이 되었다는 말씀은 누구를 향한 말씀인가? 필자에게 해당된다. 주인은 손님이 되어 이제는 대접 좀 받고 과거 손님이 주인 되어 대접하는 세상, 그런 집회를 꿈꿔 본다. 나, 내 가정, 내 교회에서 '우리'를 생각하며 늦게나마 할 일을 찾아 본다.


    주객이 전도되면 세상은 더욱 불평, 불만이 가속되지만 천국은 더욱 은혜스러워진다. 세상에서 죽기 살기로 1등을 하려는 목적은 좀 편하게 쉬면서 대접받기 위함이나 천국은 대접하고 섬기기 위해 큰 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천국에서의 진정한 주인은 열심히 일하고도 무익한 종으로 할 일이 더 없나 하고 열심히 땀흘려가며 집회를 준비하는 그들에게 있다. 어제는 손님이었으나 내일은 주인으로서 집회 책임의 한 몫을 담당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 있는 자는 더 있게 되고 없는 자는 더 가난하게 된다는 원리,


    천국은 부익부 빈익빈이 더욱 가속화되는 나라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 세상은 고통의 결과만 남기지만 천국은 나눠주는 사랑의 결과만 남긴다. 가정에서부터 실천해 보자. 남편을 위해 퇴근하면 집안 일 신경 안쓰게 하려는 아내, 아내를 위해 퇴근해도 집안 일을 넘치도록 돕고 싶은 남편, 서로 챙겨 주지 못해 안달이다. 그러면 힘들지만 힘든 그 속에서 상대를 위한다는 그 기쁨이 있어 모든 환란을 능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노출시키는 그 자체가 자녀 교육이다. 살아 있는 산교육이다. 별개 아니라. 그런데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고, 어렵고 하는 사람도 희귀하니 별것도 아닌 것이 별개, 별종이 되어 버렸다. 쉽지만 어렵고 어렵지만 참 쉽다. 신성과 인성이 하나되는 것, 결혼하는 이유다. 자녀를 낳아 키우는 목적이다. 부부가 싸우더라도 신인양성일위를 생각한다면 주일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못 풀 문제는 없고 용서 못할 원수는 없다. 후일을 도모해 본다.

  • 2021-04-11 07:03
    큰 구원


    서론 : 주일 새벽을 깨운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 편리함이 누구에게는 죄를 더 짓게 만드는 독이 되기도 하고 또 누구에게는 썩을 것을 영생의 것으로 바뀌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본론 1 :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염려는 무엇인가? 설교를 들었는데 예배를 다 참석했는데 왜 대속의 사랑이 갈수록 뜨거워지지 않고 만년 말단 공무원처럼 신앙이 식어 밋밋한가? 그 원인은, 다 떠내려 버리고 구원을 등한히 여기기 때문이다. 지극히 큰 구원보다 더 중한 것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왜 흘러가 버렸는가? 무엇이 결핍되었는가? 등한, 왜 전심전력이 안되는가? 인생 계산기가 왜 고장이 났는가? 소속은 안 바꾸면서 왜 애굽은 부러워 하는가?


    주일, 집회 면역성이 생겨 귀찮다. 우습게 보는 마음이 생겼다면 예사로 느껴진다면 등한으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어떻게 하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않고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되는가? 구원의 가치를 깨닫고 크게 여기는 사람이 되는가? 간절한 마음,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내게는 주일과 집회에 대한 간절이 있는가? 기다려지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가? 어떻게 하면 새벽 예배 때마다 밤 예배 때마다 주일 예배 때마다 듣는 설교 말씀이 내 심금을 울려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않고 존귀히 여겨 유지, 발전, 전수해 줄 수 있는가? 등한히 여기는 그 원인은 무엇인가? 답은 큰 구원의 가치를 깨닫는 간절이다.


    서로 화답하며,


    본론 2 : 고전 10장,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홍해를 건너며 다 세례를 받고 숱한 기적을 목도했으며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는데 왜 다수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했는가? 원인은 악을 즐겨한 것이다. 어떻게 악을 뿌리 뽑고 내 안을 선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까? 주일 설교 말씀을 들어도 악을 뿌리 뽑는 말씀이 아니면 나를 더욱 악하게 만드는데 말씀을 이용만 할 뿐이다. 고쳤다 싶으면 어느새 또 스물스물 기어 나오는 악, 내가 산 세월만큼 악을 즐긴 결과를 우리는 몸소 체험하고 있다. 후회라는 단어로 말이다.


    후회가 강할수록 개혁이 단행된다. 후회는 회개케 한다. 예배를 등한시 하면 말씀은 잘 듣는 데 말씀이 마음판에 남아 있지 않는다면 이런 현상이 계속 방치되면, 살아 생전 노년에 사후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결과를 예상해 본다. 임신 때 먹은 약 하나가 미치는 결과처럼 미리 아는 것, 미리 깨닫고 뉘우치는 것. 지혜! 지혜는 성령을 타고서 온다. 지혜가 부족할 때 구하면 꾸짖지 아니하시고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잠을 내 힘으로 이길 수 없으니 수십 년 쌓인 악을 내 힘과 의지로 꺽을 수 없으니 지혜를 구한다.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요 배우는 것이 곧 가르치는 것이다. 자기가 설교를 해 보면 졸 수가 없다. 매일 새벽, 매일 주일 설교를 준비한다는 마음 자세로, 설교를 들어 본다. 오늘 주일 말씀을 가지고 내일 월요일 새벽 예배를 인도해야 한다는 자세로 오늘 주일 예배를 준비해 보자.


    결론 : 내일 월요일 새벽 예배를 누가 인도할지 모른다. 갑자가 설교 자리가 공석이 될 때도 있다. 내가 그 자리를 채워야 할 수도 있다. 러시아 룰렛은 사람을 죽이는 게임이지만 매달 한번 정도, 월새나 토새 사람을 지정하지 않고 모든 교인들에게 설교 준비를 해 달라 모두가 설교 준비자가 된다면 설교자의 심정을 헤아려 평소 목회자를 위해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교인이 된다.


    러시아 룰렛처럼, 평소 준비와 무작위 지정, 그러면 내 속에 무엇이 죽어지며 무엇이 살아 나는가? 설교를 잘 들으려면 내가 설교를 해 보면, 설교를 준비하며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먼저 가장 선명하게 가장 확실하게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말씀을 받을 수 있다. 구약, 십계명 돌판을 받았던 모세처럼 우리는 누구나 가정에서 모세와 같은 설교자, 가르치는 지도자 입장과 위치에 서 있다.


    공회의 저력은 여기에 있다. 예배 30분 전에 어느 누구에게나 설교를 시켜도 교인이 단상에 설 수 있는 교회, 공회는 가능하다 필자는 확신한다. 그 가능성을 주일 학생들에게서 찾아 본다. 발견해 본다. 평소 늘 설교가 준비된 교인, 설교를 듣고 글로 정리하며 주일 말씀을 새김질시키는 부모, 가정 구성원들이 돌아가며 주일저녁 산기도, 새김질을 인도하는 풍경, 자녀들을 예배자로 세우느냐 못 하느냐 자녀들을 설교자로 세우느냐 못 하느냐 전적 부모의 몫이다. 전적 부모에게 달려 있다. 전적 가정 목회자인 아버지에게 달려 있고 하루 종일 자녀들과 씨름하는 어머니에게 달려 있다.


    설교를 잘 들으려면 다양한 방법이 제시되지만 가능만 하다면 너무나도 쉽고 빠르고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설교를 내가 해 보는 것이다. 교회에서 할 만한 실력이 못 되면 가정에서 자녀인 교인 하나 앉혀 놓고 3분 설교를 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실력이 늘어 단상에 서게 하실 날도 올 것이다. 1등 교인이 1등 반사가 되고 1등 반사가 목회자 1순위가 되듯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설교를 돌아가며 계속 시키면 누구나 자기 수준에서는 설교자가 될 수 있다. 물론 은혜를 끼치는 면도 충분히 고려해야 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주일학교 오전, 오후 예배 설교 인도가 더욱 귀한 것 같다. 지금 공회 행정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더욱 발전해 가길 기대해 본다. 기도하게 된다. 필자는 나의 개인사를 비롯하여 만사, 못 될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잘 될 것이라 믿는다. 지금은 형편 없어도 내일은 형편 있을 것이라. 나아질 것이라. 내게 직언을 해 주는 사람, 내 주변 가까이에 항상 그가, 그녀가 있기에 오늘도 내 신앙 톱니바퀴는 녹슬지 않고 계속 돌아가고 있다. 아내 말고 남편 말고 부모 자녀 말고 내게 직언을 해 주는 사람이, 지인이 적어도 3명 이상 있다는 것은 대단히 감사한 일이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고 이런 자는 복을 많이 받은 참 행운아다. 조부모와 부모가 그를 위해 많이 기도한 결과일지도 모를 일이다,


    적용 : 돌아와 돌아와 돌아오라 형제여 자매여 그대는 원수가 아니라 나의 친구일다. 내 신앙의 동지여, 내 생명의 은인이여, 내 눈이 삐엇소. 나의 어리석음을 용서하고 이제는 돌아오라. 돌아와. 딱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 형제여. 주님, 딱 한번만 더 기회를 주옵소서. 90세 할머니의 닫힌 태를 여셨듯 사람은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되게 하시는 주님은 어떠하십니까?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어찌 예정되어 있습니까? 미리 알면 대처도 바로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헛수고도 할 필요 없고, 세월이 유한하니 시간을 흘려 보내는 일이 없도록 미리 아는 지혜를 주옵소서. 귀한 설교 말씀은 붙잡고 쓸데 없는 악은 떠내려 보내게 하옵소서. 오늘 주일 받을 은혜를 사모하며...

  • 2021-04-12 20:24
    New 노출과 스파링


    사지에 몰리면 생존 본능의 스위치가 켜진다. 식사를 중단하면 살기 위해 내 안에 노폐물과 지방부터 태우며 에너지원으로 사용된다. 다이어트의 원리다. 코로나로 하나님은, 믿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믿음이 어느 정도인가? 환란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는가? 진단 키트처럼 자가 진단의 기회를 주고 계신 듯 하다. 앞으로 7년 흉년이 올 것이니 단단히 준비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적화 직전이라 예민하게 경각심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이 둔하여 통일이 눈 앞이라며 천하태평인 사람도 의외로 많다. 천국에서의 영광 차이 만큼이나 지금 돌아가는 어수선한 시국을 바라보는 눈도 제각각이다.


    누구나 믿음을 위한 시련에 노출되면 평소 실력이 드러난다. 홍수가 와서 홍수에 노출되어 봐야 신앙의 진가가 드러난다. 가치 평가 판단도 180도 달라질 수 있다. 평소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은 좋은 스파링 상대였다. 나를 강하게 훈련시켜 준 고마운 사람이다. 스파링 상대가 강할수록 나의 실력을 키워 준 상대에게 더욱 고마와 해야 한다. 불시험이 닥치면 가장 생각나는 사람은 평소 나를 괴롭혔던 원수다. 평화의 때는 원수처럼 보였는데 막상 7년 환난에 노출되면 원수가 원수가 아니라 내게 가장 필요했고 이 환난을 이기도록 해 준 일등공신으로 기억될 것이다. 가장 감사한 스파링 상대로서 주님이 붙여 주셨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원수는 사랑할 수 밖에 없다.

  • 2021-04-12 20:53
    New 변화는 자라고 있다는 증거.


    변화는 여유를 준다. 직장에서 아침과 점심 식사시간을 반납하고 대신 그 시간에 많은 생각을 하며 성경 말씀과 설교를 묵상하기도 한다. 현실을 접하며 깨달아진 자기 진리를 이렇게 글로 정리할 수 있어 감사하다. 보잘 것 없으나 목표가 생기니 삶의 의욕이나 활기가 생기고 존재 의미와 목적의식이 되살아난다.


    작은 변화가 큰 결과를 가져 올 때가 있다. 앉아서 일하다가 하루종일 서서 일한지 100일째, 시선 처리가 높아졌다. 자세가 달라졌다. 어깨 결림이 사라졌다. 자세 하나 교정이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다. 목회자를 대하는 교인의 자세, 설교를 듣는 마음의 태도, 직장 동료, 주변인에게 인사를 먼저하는 여유, 단골 고객에게 물건을 팔며 예수 믿으시라 복음도 덤으로 얹어 파는 담대함. 신혼때처럼 아내를 남편을 대하는 조심성, 첫 설교에 마음 졸이며 떨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변화의 시작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된다.


    2018년을 기점으로 부공3은 급변하고 있다. 누가 빠져도 그 자리를 채워가고 있다. 설교자가 자리를 비워도 대기자가 줄을 잇고 있다. 대타가 길러지고 있다. 변화는 생명력이다. 변화에 이은 불변의 항상성은 뭐든 지속케 한다. 이것이 신앙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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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과 공회신앙 - 중생, 회심, 성화를 중심으로 - 1
9468 | (신학) | 2021.02.21
(신학) 2021.02.21 0 129
9396
시대 변화의 조류, 성도의 견집 할 것
9396 | 공회 | 2021.02.18
공회 2021.02.18 0 138
9287
한 몸의 지체, 그 가치와 중요성
9287 | 공회 | 2021.02.15
공회 2021.02.15 0 125
9270
나의 할일 (제-관)
9270 | 반사 | 2021.02.09
반사 2021.02.09 0 216
9261
OO 연구실 직원지도
9261 | 연구실 | 2021.02.04
연구실 2021.02.04 0 233
5501
비밀글 기독교는....(본인 요청으로 비번화)
5501 | 묵상 | 2021.01.15
묵상 2021.01.15 0 171
5489
구원의 기회를 날려버린 빌라도
5489 | 회원 | 2021.01.12
회원 2021.01.12 0 182
5467
비밀글 소처럼 (본인 요청으로 비번화)
5467 | 회원 | 2021.01.09
회원 2021.01.09 0 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