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연구

큐티와 새벽예배 (새벽시간 두 행정에 대한 비교)

작성자
교인
작성일
2022.09.21
큐티와 새벽예배


(새벽시간에 대한 교회 행정의 두 길)
새벽에 일어나서 주님과의 교제를 어떻게 가질 것인가? 큐티는 혼자 성경 읽고 기도하며 주님이 주시는 깨달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고 또한 받은 은혜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는 방식이고 새벽 예배는 여러 사람이 모여 주의 종을 통해 통일된 말씀인 설교를 다함께 듣고 혼자 새김질하는 방식이다.


(큐티의 성경적 근거)
큐티의 성경적 근거는 마가복음1:35절이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주님이 혼자 기도하셨으니 우리도 주님처럼 혼자 기도해서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자는 논리다. 우리 안에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으니 혼자 성경을 보고 기도해도 깨달음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원리다.


(새벽예배의 성경적 근거)
반면 새벽 예배의 근거는 누가복음 21:37-38절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일곱별의 비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전해졌고 구약의 역사에서 십계명을 받거나 말씀 속에 숨어 있는 뜻을 전하는데는 모세나 선지자를 통해 전달되어져 왔다. 주님은 매일 새벽 혼자 기도도 하셨고 이른 아침마다 중생의 교인들을 향해 말씀도 전하셨다. 목회자가 아닌 일반 교인도 위 두가지를 병행하라고 주님이 친히 본을 보이신 것은 아닐까?


(큐티의 기원과 출발)
그렇다면 왜 큐티를 시작하게 되었는가? 목회자가 타락하면 그 설교가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엉뚱한 길로 갈 수 있으니 각자 깨닫자. 천주교로 타락한 것은 교리가 약한 면도 있지만 특정 계층만 성경 읽고 해석을 하니 문제다. 개인 경건 신앙의 유익을 위해 일리는 있으나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목회자와 교인 중에서 목회자 폐단을 너무 크게 보아 교인 중심, 각 개인 경건 신앙에 너무 치중하다 보니 공예배를 통한, 주의 종을 통한 일용할 양식인 매일의 말씀 전달이라는 질서가 무시되고 말았다.


(큐티의 강점과 약점)
큐티의 좋은 점은 무엇이고 보완해야 할 약점은 무엇인가? 큐티는 한 개인이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실행하는 면에는 좋지만 자칫 잘못된 해석과 교회내 깨달음이 제각각 따로 놀 수가 있다. 물론 다양한 해석이 있어야 또한 전원일치를 도출해낼 수 있는 점도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잘못된 성경 해석이 난무하여 교회가 둘로 나뉘는 위험성도 엄연히 존재한다.


(새벽예배의 한계점을 극복하는 방편)
우리는 새벽예배를 지향하는 교회이니 새벽예배를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잘 드릴 수 있을까? 그렇다면 주일예배 기준으로 200명 참석하는 교회에 새벽 예배 참석 숫자가 몇명이면 정상일까? 단정은 못하지만 수치로 교회 건강 상태를 윤곽적으로 대략 점검해 본다 보고 20%인 40명이면 최소치고 35%인 70명이면 평균, 보통치이고 50%인 100명이면 최대치일까? 새벽예배의 약점을 큐티에서 찾아볼 수는 없을까? 새벽예배를 강조하지만 참석 숫자적으로 제자리 걸음을 탈피, 발전시킬만한 열쇠는 없을까? 큐티와 새벽예배, 타를 보고 지혜를 얻어 나를 돌아보고 고친다는 원리가 여기서도 통할까?


(칼빈은 알미니안을 통해 기능구원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대화 내용을 살짝 돌려 칼빈교리와 알미니안 교리의 구원론을 언급해 본다. 칼빈은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 내지는 전적 은혜로 천국 간다는 구원론이고 알미니안은 행위로 구원 얻는다 내지는 아무리 하나님이 은혜줘도 인간의 노력이 있어야만 천국 간다는 구원론이다. 이 때 칼빈주의자들이 자기 구원론만 강조하지 말고 알미니안 교리를 듣고서 무조건 틀렸다는 것만 비판할 것이 아니라 각도와 방향만 조금 틀었다면 인간의 영과 육의 형체는 은혜로 천국 가지만 인간의 마음과 몸이 움직여 만들어진 행위의 산물인 기능은 노력이 있어야 천국 가고 인간의 노력 또한 은혜가 있어야 한다. 믿은 후 지은 죄는 사함과 회개로, 깨끗해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사심판의 둘째사망이라는 해가 반드시 기다리고 있다. 고 하는 건설구원과 기능구원이 칼빈 직계 후예들에게서 나왔을 것이고 루터의 개혁 이후 400년이라는 신앙의 잠을 자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 세월만큼 건설구원을 이룰 수 있는 시간적 기회를 단축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새벽예배의 약점과 보완책)
이제 새벽예배의 약점을 생각해 본다. 얼러 키운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준다는 말이다.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어른이 될 때까지 설겆이 하나 안 시키고 집안일은 힘드니 너는 공부만 해라 그래서 결혼하면 손주도 키워 주고 결혼해도 딸 사위 밑반찬까지 신경 써주며 너는 직장만 잘 다녀라. 아들이 태어나도 너는 공부만 잘해라 땀 흘려 일하는 것은 이 아버지 몫이다. 너는 이런 고생하지 말고 펜때 굴리는 화이트 칼라가 되라는 식, 신앙이나 교회 행정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새벽 예배에서도 얼러 키우는 이 면을 되짚어 본다.


(새벽예배가 앞으로 추구할 방향성)
목회자가 설교 말씀을 다 준비하고 전하니 교인들은 그저 차려준 밥만 떠 먹으면 된다. 물론 신앙이 어릴 때는 들어야 자라지만 장성할수록 나도 목사님처럼 한번 전해야겠다. 삭개오처럼 나도 직접 주님께 말씀을 들어봐야겠다. 내지는 목사님이 얼마나 힘들게 설교를 하시는지 나도 설교 준비 차원에서라도 새벽 예배 전에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 큐티의 좋은 점이라면 벤치 마킹해 볼 수는 없을까? 일주일에 한번 돌아오는 교인 설교 때만 긴장하여 설교 준비하는데서 그치지 말고 평소 매일의 일상에서 설교 준비한다거나 나도 주님께 직접 말씀의 은혜를 받고 싶다고 하는 새벽 예배 참석전 준비된 마음, 단지 목회 준비생만 가질 수 있는 마음이 아니라 모든 교인이 이런 마음이고 교회 분위기면 교인의 새벽 예배 인도에도 그렇고 새벽예배 참석 숫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 본다.


(큐티와 새벽예배의 병행 또는 접목)
분명 큐티는 각자 깨달으니 모세나 바울이라는 선지자를 통한 매일의 양식을 공급받는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큐티만 하는 교회는 주의 종을 통해 매일마다 설교 메세지를 들을 수 있는 새벽예배의 좋은 점을 도입해 보면 좋겠고 새벽예배만 드리는 교회는 새벽예배를 드리기 전 30분 전에 일어나 성경 읽고 기도하는 큐티의 모습을 부모가 보여주거나 보이지 않더라도 부모의 그런 삶이 자녀에게 자연스레 녹아져 설교 준비나 새벽 예배 준비, 목회자 준비생들의 저변이 더욱 튼튼해짐으로 교회 분위기나 공회의 역량이 한층 강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큐티의 다양성이 새벽예배의 약점을 보완하다)
큐티의 시작은 무교회주의의 산물, 초교파주의의 시작이라도 그 속에서 공회병이라 할 수 있는 앉은뱅이 신앙, 백목사님은 시대적인 환란을 겪으셨으니 가능한데 우리는 안된다고 하는 말, 하나님이 한 시대를 감당하도록 쓰시기 위해 특별한 연단을 거치게 하신 것은 맞지만 위대한 백목사님과 초라하다고 하는 자기를 과대과소 평가하거나 잘못 비교하여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부어 주실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큐티의 단점은 배제하고 풀무불 연단의 과정을 거쳐 큐티의 장점만 추출해 본다. 큐티의 다양성이 새벽예배의 통일성과 만나면 날개를 단다. 백목사님 설교라는 정답을 모른채 또는 각 교회 목사님의 새벽 설교 말씀의 깨달음을 듣기 전에 내가 먼저 새벽에 일어나 문제를 풀어보고 그리고 비교해 보는 방식을 시도해 봄으로 평소 다양한 깨달음을 표현하는데도 유익이 많을 것이다.


(자고하지 말라고 공회 외부에서 배울만한 점)
큐티가 정녕, 영, 아니라면 지금 새벽예배 숫자를 보통 평균치인 70명 이상으로 끌어 올리는데 어떤 면이 외부에서나 자체적으로 도입되면 좋을까? 하나님이 한사람에게만 한 교회, 한 교파에만 좋은 걸 다 주지 않았고 각자 필요와 수준에 맞게 나눠 주셨다면 서로서로 상대를 보면서 배우라는 관점에서 접근해 볼 때 상대방 교파의 약점이나 장점이 내게는 보완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공회에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깊은 교리를 주셨다면 교리 반대 영역은 상대적으로 주지 않으심으로 이는 다른 개혁교회에서 배워 자고하지 말라는 뜻은 없을까? 공회에는 안 주셨는데 타를 보고 본받으라고 다른 개혁교회에 주신 것은 무엇이 있을까? 나 개인의 세월 속에 쌓인 신앙병 또는 공회병의 치료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질문하다가 큐티와 새벽예배(외부 개혁교회와 내부 공회의 교리와 행정을 비교)라는 주제를 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전체 2

  • 2022-09-22 12:42
    윗 글 전체를 동의하면서, 좀 다른 시각에서 살펴 보았습니다.

    (큐티라는 표현)
    저도 QT 큐티라는 말을 들은 것은 세월이 많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공회 외부를 모르는 분들도 오시는 곳이어서 일단 'QT, 큐티'라는 표현을 먼저 설명합니다. 단어의 원래 뜻과 실제 사용 되는 면을 포함해 봤습니다. '말씀으로 자기 내면을 고요하게 생각'하는 개인 기도, 개인의 말씀 명상 시간을 말합니다.

    (큐티의 등장 배경)
    교회는 처음부터 '말씀'을 떠난 예배도 교회도 개인의 생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육체의 고된 일정에 바빴고 조금이라도 시간이 날 때 좀 믿는 사람이라면 말씀으로 묵상하는 것은 모두가 자연스러웠습니다. 세월이 흘러 가면서 생활은 바빠졌고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과거 생존을 위해 옆을 돌아 볼 수 없던 인류가, 일은 쉬워 지면서 남는 것은 많아 짐으로 생존 걱정을 일단 줄어 들었으며 그 대신 머리는 더 많이 또 빠르게 회전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통해 육체는 편해 졌으나 심령은 말씀으로부터 흐려 졌습니다. 세상 사는 지식과 육체는 강해 졌으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심령은 너무 버려 졌고 약해 졌고 피폐해 졌습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중생 된 사람은 신앙의 본능이 있기 때문에 세상 생활 때문에 신앙의 분위기가 흐려 지고 상실이 되어 지면 자연스럽게 회복력이 생깁니다. 조금씩 흐려 질 때는 영안이 밝은 분들이 애를 태웠으나 전체가 함께 느낄 정도는 아니었고 사태가 심각하게 되자 교파를 초월하여 심령의 가난을 느꼈고 그 자리를 채우는 방식은 오순절 쪽의 광란, 신앙 지성인들의 성경 연구, 감성파의 각종 찬양, 사회 봉사나 선교 등으로 나타 났습니다. 각각의 모습도 천차만별이고 몇몇 모습을 함께 섞는 방식도 나왔습니다. 공회로서는 이런 방법론적 대처는 아예 생각을 하지 않으나 그래도 말씀으로 자기 내면을 살피는 성경 연구, 성경 공부가 아니라 말씀으로 자기를 돌아 보는 묵상의 방식을 가장 가깝게 생각합니다. 공회는 이런 면을 '묵상기도, 묵도'의 의미를 담아 명상이라 합니다. 교계적으로 너무 겉돌면서 세상을 향해 달려 가던 교회를 말씀과 기도를 통해 붙들어 보게 되는데 그런 노력이 '큐티'라는 표현이 제일 건전하고 좋게 자리를 잡았다고 보입니다. 겉보기는 비슷해도 공회는 신앙의 형태를 새로 만드는 것을 어떤 경우에도 최소화를 합니다. 실제로는 큐티를 할지라도 입에 '큐티'를 한다고 담으면 공회인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냥 공회의 본류가 체질적으로 그렇습니다.


    (교계적 평가)
    교회가 모든 면으로 기본을 다 잊어 버리고 버리는 상황에서 '말씀으로 자기를 돌아 본다'는 운동은 어느 교파 어느 교인이 어떤 식으로 전개해도 일반 '교계를 기준'으로 보면 감사할 뿐이고 응원할 뿐이고 반가울 따름입니다. 마치 어떤 목적이든 전도를 하는 것은 마음으로 응원할 뿐입니다.


    (공회적 시각)
    공회는 말씀 중심으로 예배를 구성합니다. 예배의 절차와 시간 분배가 복잡해 질수록 공회와는 거리가 멀어 집니다. 실은 초대교회의 특징이 단순성입니다. 교단도 교회도 그 운영과 만사를 최소한으로 간단히 합니다. 각자 말씀 앞에 자기와 자기 교회를 놓고 생각해 보면 잘못한 것을 회개할 것만 보여야 하고 새로 해야 할 미래의 건설은 인간이 알기도 어렵지만 과거 잘못을 느껴 가며 반성하다 보면 미래 문제는 그냥 한 마디로 줄여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정도로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공회는 초대교회와 오늘까지 바로 나가는 모든 교회나 교인들처럼 하루를 시작하기 전, 하루를 마치고 잠에 들기 전, 또는 일정에 따라 각각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이런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모이면 '예배'가 되고, 혼자 있으면 '경건 시간' '묵상 기도' '말씀 명상'이 됩니다.

    정상적인 공회 생활로 말하면 일찍 결혼하고 자녀를 책임 지고 그리고 교회 전체가 최소한으로 모여야 하는 11 회의 예배를 참석하려다 보면 개인적으로 신앙의 고요한 시간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연세가 많은 분, 신앙이 특별한 분, 직업이나 생활 환경이 특별한 분은 상관이 없으나 공회의 구성 계층과 생활 수준이 낮기 때문에 11 회 예배를 다 참석하면서 개인의 생활에 충실하려면 따로 큐티를 할 시간은 없다 할 정도입니다. 실은 예배의 11 회 횟수보다 11 회 예배의 내용이 큐티와 겹치기 때문에 예배를 정상적으로 드리는 분들은 공회의 모든 예배가 바로 큐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신앙이 자발적이 아닌 분들은 혼자 큐티를 시켜도 하기는 어렵지만 함께 하는 시간에도 별 생각 없이 그냥 보내는 수가 많습니다. 교계의 큐티를 조금 살펴 보면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마음의 자세 하나만 바꾸거나 새롭게 가지거나 기억만 한다 해도 괜찮은 큐티를 예배 때 가질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좀 강조하는 교회들은 보통 '진리와 영감'이라는 표현을 잘 하지 않습니다. '영감'이란 성경을 기록한 선지와 사도의 영감만으로 국한하는 교리 때문인데, 공회는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이 오늘도 그 말씀을 접하는 우리 마음을 감동 시켜 각자 깨달을 것을 알린다는 의미로 '영감'을 사용합니다. 영감의 범위가 폭이 넓습니다. 보통의 큐티 인도자나 큐티 교재가 공통적인 성구 하나를 던지며 각자 생각을 해 보라고 개인 과제로 넘깁니다. 공회의 제대로 된 예배와 설교는 혼자 있으면 그렇게 하기 어려운 교인들을 감안하여 매일 새벽 4시 30분과 주일 오전과 오후와 수금요일 저녁 7시에 함께 합니다. 겉 보기는 함께 하기 때문에 교계의 표현으로 말하면 '공예배'가 되지만 내용적으로는 주 11 회의 큐티가 됩니다. 말씀을 인도하는 분이 던진 내용은 그 어떤 내용이라도 함께 주제로 삼을 과제입니다. 그 과제를 가지고 자기 신앙과 형편과 과거와 마음과 생활을 가지고 자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입니다. 공회의 1989년 이전 설교 자료 10만 페이지의 내용이 늘 그렇고, 1989년 이후 나뉜 공회들의 설교가 만일 개개인에게 개별적으로 자기를 돌아 봐야 할 기회를 주지 않은 예배가 있다면 예배 인도자의 잘못이고, 기회를 줬는데도 기회를 가지지 않았다면 마치 학교에 앉았으나 공부에 관심 없는 학생이 많은 것처럼 그런 현상입니다.


    (일단 결론을 적어 본다면)
    공회 것이라고 무조건 다 좋은 것이 아닌데, 공회의 한두 가지 또는 몇몇 가지에 크게 감동이 된 사람은 마치 공회가 다 옳은 것처럼 또는 공회에 속해서 공회를 좋아 하는 자기는 거의 다 옳은 것처럼 착각하는 수가 많습니다. 좋게 말하면 자존감이나 이 것은 늘 교만을 달고 다닙니다. 모든 교파와 모든 복음 운동은 모두가 그 얼마인지는 다르지만 좋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공회에 조금 불만스러우면 공회는 무조건 잊어야 할 대상인 것처럼 10대의 반발처럼 반응하는 경우가 있는데 공회에도 좋은 점은 있습니다.

    첫 글은 양면을 잘 말씀했습니다. 공회를 모르는 분이면 공회의 장점만 참고하면 좋고, 공회만 아는 분이면 공회 밖에서 시도 된 큐티라는 것이 공회만 모르지 교계 전체 중에 큐티를 모르거나 시행하지 않는 곳이 없다 할 정도인데, 다른 시도와는 달리 큐티는 대부분은 좋은 점입니다. 다만 공회 내만 알고 오신 분들은 큐티를 한 번 들여다 보신 뒤에 자기 교회의 정규 예배를 참석할 때 그런 자세로 참석하면 가장 좋게 해결 되는 방법입니다. 여러 형편 때문에 예배 참석이 곤란하면 큐티 교재보다 자기 교회 새벽 설교의 내용을 다시 듣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는 자기 집의 밥을 먹는 것이 원칙입니다. 원칙이란 말은 불가피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뜻입니다. 설교 분량이 길어서 곤란하면 본문만 찾아서 묵상해도 되고, 수준이 되지 않는다면 자기 교회 설교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1 분, 또는 5 분을 떼어 참고한 다음 그 말씀을 가지고 자기를 돌아 보면 좋겠습니다.


    공회의 연경 교재도 이름을 꼭 붙이자면 큐티가 됩니다. 아무리 좋아도 복잡해 지거나 이름을 바꾸거나 내용을 자꾸 변경하다 보면 더 좋은 것을 가지려다 모두를 잃을 수 있기 때문에 공회는 아주 특별하지 않으면 그 이름 그 모양이라도 신앙의 선배들이 한 번 시도한 것은 최대한 살려 가며 지켜 내고 있습니다. 공회 출발 이전에 있던 것도 공회는 거의 다 가지고 있습니다.

  • 2022-09-23 13:08
    노방전도와 관계전도.

    과거 서부교회 생전에는 집집마다 호별 전도를 많이 했다 들었다. 사후 지금은 노방전도보다 관계전도가 주가 되어 있다. 요즘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선을 딱 잘라 그을 순 없지만 둘다 하겠지만 교회 권장사항으로 공회식 전도법은 위 둘중 어느 전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오늘 출근하다가 목격한 일상을 적어 봅니다. 지하철에서 전도하는 70대 할머니, 내가 내리는 역에 어김없이 내리면서 예수를 전하십니다. 크게 전하지는 않고 나지막하게 전하시는데 짧게 5분 정도 전하시고 갈길을 가십니다. 일주일에 한 2번 정도 보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출근 시간이 10분 정도 빨라서 역에 내려 화장실을 갔다가 와서 잠시 자리에 앉아 있는데 어김없이 그 할머니가 지하철 게이트를 나와 출구 쪽으로 가면서 전도를 하시는데 지하철 보완관이라는 청년이 전도를 막으면서 신상을 묻고 벌금 딱지를 끊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청년이 말하길 이름을 말하세요 이런 공공 장소에서 전도하면 안됩니다. 밖에서는 괜찮아도 여기는 모든 시민이 이용하는 공공 장소인데 그렇게 전도하면 민원이 들어와서 벌금을 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할머니가 완강하게 나 벌금내도 좋으니까 나는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나는 벌금을 내도 중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교회를 다니는데 할머니 같은 사람이 이렇게 전도하니까 욕을 먹는 것입니다. 다음부터는 지하철내에서 전도하지 마시고 지하철 밖에서 전도하세요. 그러니까 할머니는 나는 벌금내도 지금처럼 어디서나 전도할 것입니다. 보아 하니 벌금을 한두번 내신 것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신강이를 하다 두 분이 헤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 청년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 청년에게 말하길 교회를 다니시나 보죠. 아니요. 제가 과거에 교회를 다녔는데 저런 식으로 전도하니까 사람들이 더욱 안 믿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정작 중요한 것은 본인이니까 예수님 믿고 구원 받으시라 하고 왔다. 발걸음을 옮기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전도하면 벌금, 더 나아가서는 구금, 할머니가 크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전하니까 주위에서 민원이 들어간 것이라 했다. 전도할 수 없는 시대, 어떻게 지혜롭게 전도할 것인가? 전도가 약해진 시대에 전도하는 할머니가 반갑기도 했고 한편으로 공공장소에서 이제 전도하면 법이 금지하는 일명 '차별금지법' 시대가 되었다. 어떻게 전하는 것이 덕스럽게 복음을 전할지 그 경계선을 나름 잡아 보라는 현실 인도에 감사가 되었다.일상을 객관의 글로 다시 정리해서 전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부족하나마 간증식 주관의 글로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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