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

이단 대처는 교회 내부 개혁으로, 장로의 설교 필요

작성자
박익천
작성일
2019.07.07
이단에 대처하는 장로의 자세


박익천 장로 (경기북부노회, 온생명교회)

들어가며

이단의 발흥과 이단으로 인한 폐해는 마지막 때를 맞이하고 있는 세상의 표징이다. 이단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문제는 교회뿐만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를 어지럽게 하고 파탄에 이르게 할 정도로 심각한 양상과 결과를 가져옴에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단의 주된 관심과 전략은 교회 밖의 세상이 아니라 교회요 교회에 속한 신자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신자는 마땅히 무엇을 믿으며 어찌 살아야 하는지를, 즉 교회의 교회다움과 신자의 신행(信行)을 거듭 돌아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이며 급선무라 할 수 있다. 교회가 교회답고, 신자가 믿고 행하는 것에 굳게 서있다면 이단이 끊임없이 발흥하여 교회와 성도들을 유혹하고 넘어뜨리려고 해도 이를 분별하면서 이단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즉 참되고 거룩한 교회와 거기에 속하여 말씀과 성령으로 살아가는 신자는 마침내 이긴다는 말이다. 이것으로 아니하고, 이단을 이기며 이단에 대처하는 효과적이고 확실한 길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교회다움을 유지하고 신자의 신행을 돌아보는 일은 누구의 역할이며 책임일까? 그것은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에 천국 열쇠인 말씀을 맡기신 하나님께서 말씀의 직분자로 부르고 세우신 목사와 장로에게 부탁하신 일이다. 특별히 장로교회는 목사와 장로로 이루어진 장로의 회(會)가 참된 교회의 표지(標識)를 따라 하나님을 대행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가르치며 다스린다고 고백하므로, 목사와 장로에게 있어서 이 일은 직무의 전부라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소명)과 보내심(사명)에 대한 응답과 순종이 된다. 그러기에 목사와 장로가 이를 제대로 알고 맡은 직무를 잘 감당한다면 이단으로부터 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고 보전하는 일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넘칠 것이다.

그런데 작금 한국교회와 말씀의 직분자들의 모습은 그러한 기대와 소망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다. 정결함이나 믿음직함은 차치하고 최소한 상식적이라도 해야 할 교회는 그 수준만큼도 이르지 못하여 다양한 영역과 문제들에서 시비와 적폐 꺼리가 되어 사회로부터 냉소적이고 매몰찬 비판과 경고에 직면해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대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로 구별된 삶을 살고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할 직분자와 그리스도인은 전혀 그러하게 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생명에 이르는 회개라는 순수한 복음은 희소해지거나 거부당하고 천박한 기복주의 혼합주의 신앙만이 종교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세상과 함께 판을 치는 형국에 이르고 있다.

이단 규정과 이단 대처의 주체인 교회와 직분자들이 이렇게 헤매고 변질되다 보니, 포스트모더니즘에 근거한 종교적 다양성과 관용 그리고 사회적 공공성이 대두되는 작금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교회는 점점 모순과 자괴감에 빠져 왜소해지고 이단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버젓이 똬리를 틀고 있다. 종말론적 신앙과 삶의 자세를 견지하지 못하고 소유와 성공에만 집착해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헤매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이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면서 우리의 곁에뿐 아니라 우리의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온갖 문제와 폐해를 생산해 내고 있는 중이다.

‘이단대처’ 이전에 먼저 ‘교회개혁’부터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단’부터가 아니라 ‘교회’부터 그리고 ‘직분자’부터임이 백번 옳다. 이단의 양태나 교리를 알고 그들의 전략과 활동을 분석하여 이단임을 어떻게 규정하고 정죄와 분리를 할 것인가도 중요하고, 또 이단으로 인하여 입은 피해의 치유와 온전한 회복도 어떻게 할 것인가도 이단대책 혹은 이단대처에 현실적으로는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가 돌아보고 살펴야 할 것은 교회요 직분자이다. 교회와 직분자가 어떠해야 하느냐가 이단대책과 이단대처의 핵심이요 지름길이며, 예방과 경계를 잘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과 방법이 되는 일이다. 즉 교회가 교회답지 않고서는 이단은커녕 존재 자체가 의문이며, 직분자가 성경이 가르치는 직분자다운 행실과 책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목양은커녕 직분 자체가 타락함이요 방자함이다. 따라서 교회와 직분자가 하나님 앞에서 말씀과 성령으로 철저하게 계속적으로 개혁(Semper reformanda)되지 않고서는 이단의 문제와 그 대처에는 변죽만 울리고 시늉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개혁’이 먼저이며 필수라는 것이고, 개혁한 교회가 이단 문제의 가장 효과적이고 총체적인 답이 된다는 것이다.

교회개혁은 말씀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진실로 고백하는 일이다. 이 본질이 무뎌지고 흐려지면 말씀과 교리와 거룩한 신행이 빈약해지고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며, 시류에 편승하여 복음을 변증하는 입을 열지 못하고 도리어 이 세대를 본받게 된다. 어떻게 하든지 살아남고(생존) 더 커지고(성장) 물려주어서(세습) 자랑하고 누릴 수 있는 범위와 자리가 더 확보되면 저절로 거룩해지고 축복인 줄 여기게 된다. 이로 인해 말씀에 순종하려는 저항과 순교의 고삐를 늦추는 징후는 말할 것도 없고, 도리어 복음을 상황에 맞추는 변질이 변화와 변혁으로 둔갑하여 타락의 길을 더욱 재촉하게 만든다.

따라서 교회가 먼저 교회다워지는 개혁으로 몸부림치지 않고서는 교회가 이단에 버금가는 타락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세상의 혹독한 비판을 불식시킬 수도 없으며, 동시대의 교회를 싸잡아 비판하며 자신을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는 이단을 향하여서도 제대로 된 대처가 나올리는 만무하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총체적인 불일치와 모순이 일치되고 거룩함으로 옷 입지 않고서는 이웃에게 칭송을 받으며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여져서 교회가 부흥하게 되는 역사(행2:47)는 도무지 기대 난망한 일이 될 것이며, 더군다나 진화하고 있는 이단들의 포교 전략에 대한 대처나 이단에서 돌아온 이들에 대한 상담과 회복의 일은 제대로 이루어지기가 심히 어려울 것이다.

참된 교회개혁은 ‘직분’과 ‘예배’의 개혁이다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교회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지금처럼 절박한 때가 있었을까 싶다. 교회 조롱시대, 교회 수난시대가 도래하여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과 사명을 상실하여 비틀거리고 있는 이 참담한 시대에 ‘교회개혁’, 즉 참된 교회로의 회복은 장로로서 저마다 속한 교회를 생각하며 개혁되기를 깊이 고뇌하고 있는 가장 시급하고 절절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며,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주님의 충만이 바로 교회(엡1:23)라고 말한다. 다소 신학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이보다 더 명시적인 교회의 정의가 있을까?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채워지고, 그리스도로 충분한 것이 바로 교회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리스도 말고 무엇으로 충만하게 채워져 있기에 지금의 한국교회는 중세교회의 타락의 모습보다 더하다고 혹자들은 아프게 비판하는 것일까? 따라서 지금껏 다른 무엇으로 충만하게 채워진 것들을 버리고 예수님으로 채워지는 것만이 회복이요 살 길임이 분명하고, 이것이 교회개혁의 방향이요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 간단 명료한 진리를 뚝심 있게 붙들면서 오직 예수로만 채우고 다른 것은 나누고 비우고 흘려보내어서 복음을 실천하고 증명해내어야만 교회가 진실로 교회다운 교회가 되고, 장로다운 장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혁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수납했을 뿐이므로 교회는 성경이 교회를 교회되게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개혁의 기준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다. ‘오직 성경’을 전체 성경’(Tota Scriptura) 안에서 그리고 올바른 성경해석과 신앙고백에 따라 교회는 개혁되어야하기에 장로는 철저하게 신학하면서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개혁자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 고민의 산물인 교리와 신앙고백을 따라 목숨을 걸고 교회를 개혁하며 세워나갔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는 교회를 참된 교회로 이해하였다. 그러한 참된 교회의 외적인 표지(標識, marks)는 순수한 복음의 설교와 올바른 성례의 시행과 신실한 권징이다. 장로가 다른 것은 좀 부족하여도 이것에 천착하여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장로가 마땅히 감당하여야 할 교회개혁의 바른 자태와 행보라 할 수 있겠다.

설교는 목사 개인의 자격이나 능력에 달린 영역이나 문제가 아니라 장로도 설교를 감독하며 강단을 보호하는 위치에서 함께 만들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장로는 보이는 말씀인 성례도 표(sign)와 인(seal)으로써 그리스도의 은덕을 받아 누리고 언약을 확신시켜 주도록 거룩하고 올바르게 시행되기를 보호해야 한다. 그래서 믿음을 일으키는 설교와 그 믿음을 굳세게 만드는 성례가 항상 같이 가는 예배가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말씀의 직분자에게 주신 천국 열쇠인 권징이 신실하게 이루어져서 말씀을 파수하며 연약한 성도들을 권위하고 보호하며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넘치는 일에 교회개혁의 모든 초점이 맞추어지도록 장로는 목사와 함께 힘써야 한다. 그리하여 교회가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로서 이 세상에 우뚝 서가도록 장로는 직분자로서 교회를 아름답게 개혁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장로의 ‘직분개혁’이다. 개혁된 직분자인 장로야말로 교회는 신앙고백적인 공교회이어야 한다는 소신과 이에 대한 사명감이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기에 이단에 가장 잘 대처할 수 있는 교회의 보배로운 청지기 나아가 수호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든 일은 사역이나 회의에서가 아니라 ‘예배에서’ 이루어지고 ‘예배로부터’ 시작된다. 교회개혁이 곧 ‘예배개혁’인 이유이다. 그러기에 장로는 예배에 대해서 깊이 잘 알고 자신이 누구보다도 먼저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예배는 교회가 교회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자리이므로 예배가 곧 교회의 얼굴이며 정체성이다. 예배에 의해서 교회는 교회다움이, 신자는 신자다움이 결정된다. 예배는 교회의 한 부분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것이다. 예배에서 교회의 모든 조직과 사역과 활동들 그리고 성도의 교제가 파생되어 나온다. 예배는 단순히 개인적인 경건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서 ‘의인의 회중’(시1:5)으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나아가는 공적이요 공동체적인 활동이다. 은혜의 방편(말씀과 성례)이 베풀어지는 자리, 언약이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자리, 교회가 하나님의 회중으로 계속해서 남아있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자리이다. 또한 예배를 위해 부름 받은 직분자들의 직분사역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 즉 삼위 하나님의 복이 예배하는 자에게 충만하게 베풀어진다. 예배하는 그 자리가 곧 교회가 되어, 예배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며(성경), 하나님을 알고 말하며(신학), 하나님을 높이며(고백), 하나님과 사귀는(교제) 일들을 경험한다. 다시 말하면 예배는 언약적이고, 삼위 하나님 중심적이며, 송영적이고, 또한 공교회로 나아가는 고백과 실천의 자리라는 말이다. 따라서 예배공동체 언약공동체인 교회의 예배에는 성경과 신학과 고백이 고스란히 녹아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예배를 보면 그 교회를 알 수가 있게 된다.

예배는 ‘직분’과도 연결된다. 직분은 예배에서 나오고, 예배를 통해서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배개혁은 곧 직분개혁으로 이어진다. 예배는 예배자의 자발성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찾아오심이 우선이고, 예배자의 열심과 정성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라고 하시면서 예배하는 방식을 알려 주시고, 타락한 인생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가운데 끼워서 예배하는 이를 찾아와 만나 주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는 방식이 직분을 통한 찾아오심이다. 그러기에 모든 직분은 일차적으로 예배를 위해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자기 백성을 만나주시기 위한 방편으로 교회에 직분을 허락하셨다. 그러기에 직분 없이는 예배도 없고, 말씀도 없다. 예배에서 자신의 부름을 확인하지 못하는 직분자는 예배 밖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예배는 모든 직분자들이 총동원되어 그 직분 사역을 수행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직분개혁과 예배개혁은 교회개혁의 요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장로는 이러한 예배를 위해서 말씀과 교리에 정통해야 하고, 예배와 삶이 유리되지 않고 통합되도록 경건과 생활에 있어서도 신실해야 한다. 그래야만 믿음의 비밀과 경건의 비밀을 가지고 예배를 선도하여 섬기며, 예배를 온전하게 개혁할 수 있는 영적인 지혜와 능력이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해 장로는 예배만 잘 해도 이미 이단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고, 이단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가 명확해진다. 예배가 예배되고, 장로가 거룩한 보편적 교회에 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영생을 위하여 선택하신 교회를 참된 믿음으로 하나가 되도록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을 위하여 불러 모으고 보호하고 보존하심을 믿습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4문)’라는 고백을 하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직분 사역으로 충성하며 섬기면, 교회와 성도는 ‘그리스도의 증거’로 견고하게 되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책망할 것이 없이 끝까지 견고하게 된다(고전1:6-8). 이 복을 누리는 견고한 교회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9)” 고백하며 찬송하게 된다. 이 고백과 찬송은 이단으로부터의 유혹과 공격에 흔들리지 않게 하고, 또 이단으로 인하여 파생되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으로써 이단으로 인해 주눅이 들어있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된다.

장로는 말씀과 기도와 심방의 자리에 있어야

예배와 직분이 바르게 개혁되어 실천되면 교회는 직분자의 봉사로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게 된다. 칼빈은 ‘직분자는 곧 말씀의 직분자’라고 하였다. 목사는 말씀과 성례로써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재현하고, 장로는 선포된 말씀이 가르치고 해명하여 주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받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돌아보는 직분자이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를 돌아보며 다스리는 장로의 직분은 그저 사사로운 경험이나 세상적인 지식이나 자체 발광하는 권위로써가 아니라 성령님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권위로써만 전체 교회를 향한 영적 지도와 감독이 가능한 것임을 한시라도 잊지 말고, 항상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이며 무엇으로 봉사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 주시기를 간절히 구해야 할 것이다.

첫째, 장로가 있어야 할 자리는 ‘말씀’의 자리이다.
말씀은 신학과 신앙을 이끌어 순종과 실천으로 나아가게 한다. 신학(神學)은 하나님을 알고 말하는 것이며, 신앙(信仰)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며, 순종과 실천은 믿음으로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말하는 신학에서 바른 신앙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선물로 주어지게 되고, 바른 신학과 신앙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직분자답게 하는 핵심이 된다. 이를 모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직분이 장로이다. 자신이 먼저 참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온전히 누리면서 말씀을 잘 받고, 말씀으로 기도하며,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와 성도를 말씀으로 살피고 돌아보는 일이 진짜가 된다. 그러기 위해서 장로는 말씀으로부터 나온 개혁주의 교리와 신조와 고백으로 무장하여, 장로치리가 성경적이라는 확신 속에서 설교단의 순수성 그리고 세례단과 성찬상의 정결성을 지키며, 신실한 권징으로 예방과 경계를 삼아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우뚝 세워지게 하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와 성도를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고 보전하며, 이단에 대처해야 하는 장로가 반드시 견지해야 할 가장 믿음직하고 장로다운 모습이다.

둘째, 장로가 있어야 할 자리는 ‘기도’의 자리이다.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가 가지는 권세는 천국 문을 열고 닫는 영광스러운 권세이다(마 16:19). 이 권세를 주님께서는 말씀의 직분자를 통하여 사용하시기에 직분자는 이를 받들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장로는 목사와 더불어 이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에 충성하며 깨어 일해야 한다. 영적인 일이요, 교회를 세우는 일이므로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의탁하는 일이다. 기도로써 하나님의 뜻을 묻고 성령님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한량없는 자비와 긍휼을 기다리는 것이 장로가 해야 할 최우선의 직무요, 그 직무를 관통하며 가능케 하는 길이 된다. 기도하는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하며 하나님 그분의 말씀에 참여한다. 말씀에 참여함으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고, 그 겸손으로 성도의 발을 씻기며 돌아보기에 주님이 주시는 권위를 입는다. 이 권위로 직무 하니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해진다. 그러므로 결단코 기도는 너무 많이 한다 할 수 없고, 기도는 언제나 부족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장로가 기도 없이 교회를 돌아보며 이단에 대처한다는 것은 허사요 순전히 가짜다.

셋째, 장로가 있어야 할 자리는 ‘심방’의 자리이다.
장로의 직무가 무어냐 할 때, 통틀어 ‘심방’이라 해도 지나친 것이 아닐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심방하지 않는 장로는 장로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교회법에서 장로의 여러 직무는 모두 심방과 관련한 사항이요, 심방으로써 수행이 가능한 직무들이다. 이것을 제대로 하자면 장로가 심방하지 않고서는 결코 돌봄과 감독의 목양적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장로가 심방하려면 먼저 자신도 예배에서 삼위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제로 충만해야 한다. 그러할 때 그 일을 실효 있게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목사가 말씀의 강단에서 말씀을 바르고 깊고 풍부하게 전파하지 않으면 목사 직분의 타락이듯이, 장로도 심방의 자리에서 말씀을 ‘지키는 것’을 보며 구원과 심판을 위하여 신령한 다스림이 없다면 다른 무엇으로 대체한들 장로 직분의 타락이라 하여도 족히 무방할 것이다. 특히 이단 문제로 가장 큰 고통을 겪는 것이 가정이며 이로 인해 가정의 상실과 파괴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장로가 하는 말씀의 방문인 심방은 교회와 성도를 이단으로부터 지키는 파수꾼의 생생한 역할 현장이고, 치유와 회복을 위해 도움을 내미는 따뜻한 손길이며,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히 여기심을 함께 구하는 중보의 자리이기도 하다.

개혁신앙으로 직무하는 장로

이처럼 장로는 말씀과 기도와 심방으로 교회를 세우고, 성도를 온전케 하는 직분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명심하고 충성스럽게 그 직무를 잘 감당해야 한다. 이는 직분에 의해 교회가 구원의 기관으로 설 수 있고, 교인이 온전하게 세워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혁한 교회의 장로인 우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훈련되고 준비되어야 이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그것은 개혁한 교회가 마땅히 붙잡아야 할 ‘개혁신앙’이다. 교회 역사를 통하여 믿음의 선진들이 그리고 개혁자들이 말씀과 성령에 붙잡혀서 그 말씀이 가리키는 대로 믿으며 고백한 신앙이요, 또 삶에서 고난 중에서 인내로써 실천적으로 살아낸 신앙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믿어야 할 바가 무엇이며 어떻게 예배하고 살며 교회를 세워가야 할지를 오직 성경에서 찾아 배워서, 오직 예수와 오직 믿음으로만이 구원을 얻으며, 오직 은혜에 기대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음을 예배하는 신앙이다. 하나님의 약속인 언약을 기억하며 구원의 기관인 교회에 속하여 믿음을 파수하고 전수하기를 성령님께 간구하는 신앙이다.

따라서 개혁신앙의 강조점은 삼위일체 신앙, 언약 신앙, 교회의 신앙이다. 개혁신앙의 생활원리는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이다. 개혁신앙의 실질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는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으로 가르치며 배우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복음을 땅 끝까지 주님 오시는 날까지 증거함이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Soli Deo Gloria)를 송영함이다. 그러기에 이 신앙과 생활원리는 삶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개혁신앙은 개인의 경건생활과 종교적 활동을 넘어 신앙과 삶을 제대로 통합해주는 체계이다. 따라서 개혁 신앙인은 교회 안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떠나 피하지 않고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변혁시키며 살아가기를 힘쓴다.

그러므로 개혁신앙과 삶은 이처럼 구별되고 확실하여 이단의 교리와 신앙 그리고 삶으로써는 도무지 포섭되고 장악되지 않을 뿐더러, 이단으로 인하여 생기는 모든 문제와 폐해로부터도 단호하고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 더불어 이단 대처에도 자신부터 말씀과 기도로 돌아보는 경향성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무엇을 궁구할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교회와 성도를 살리고 개혁하는 길은 ‘오래된 새 것’인 개혁신앙이 답이요, 그것으로 직무 하는 장로가 장로다움이라는 것을 굳게 확신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힘듦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개혁신앙으로 재무장하여,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장로의 직분을 신실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계속 전진해야 할 것이다.

나오며

개혁은 무엇을 고치고 바꾸는 것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찾는 것이고,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고, 계속적인 것이다. 개혁은 가난해지고 작아지는 것이며, 애통해하고 긍휼히 여기는 것이며, 온유하고 청결하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다. 부흥에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약함 중에서도 약속의 말씀에 기대하는 것이다. 지금 길을 잃어 절망과 위기 가운데 처한 한국교회, 아니 한국교회를 그렇게 만드는데 혁혁한 기여(?)를 한 장로는 하나님 앞에서 지금까지의 신앙과 삶을 냉정하게 진단하여, 무엇으로 참되게 돌아가고 어떻게 개혁되어야 교회가 살아나 회복되고 이방의 빛이 되어 주님의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할지를(사49:6) 목하 처절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단대처’라 함은 교파주의적 관점이기는 하지만 속한 교단이 결정해놓은 이단 규정의 현황과 그 이단들에 대한 역사와 교리의 분석과 포교 전략 등과 같은 이미 소개된 내용들을 잘 숙지하는 일부터인데 이는 기본이다. 거기에서 나아가 이단을 경계하면서 방어하고, 이단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문제와 폐해에 대하여 상담하고 치유하며 회복시키는 일을 위하여 전문상담소와 같은 기관과의 연결 체계를 구축하는 일은 지금 당면한 실제이다. 더불어 이단대책을 위하여 함께 노력하는 교계 단체들과의 연합을 도모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은 대단히 실효적인 일이 된다. 장로는 이와 같은 이단대처의 기본과 실제와 실효를 무관심하거나 무시하거나 놓쳐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러한 이단대처의 내용과 범위와 현실을 민감하게 직시하면서, 이보다 더욱 중요하고 긴급한 이단대처의 길은 장로가 복음을 유능하게 붙잡고, 깨어 기도하고, 교회와 성도를 말씀으로 잘 돌아보는 일임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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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 부공3 내계 집회 진행 건의 (1)
회원 | 2019.07.13 | 추천 0 | 조회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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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손양원의 '6.25 전쟁 시국 설교' - 1950.7.13.
담당 | 2019.07.10 | 추천 0 | 조회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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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른 공회인, 철없는 아이 소리
회원 | 2019.06.23 | 추천 0 | 조회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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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서부교회 공식 입장 "총공회는 나뉜적 없고, 본부는 서부교회" (1)
방청객 | 2019.06.02 | 추천 0 | 조회 303
방청객 2019.06.02 0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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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언어' (2)
교인 | 2019.05.30 | 추천 0 | 조회 284
교인 2019.05.30 0 284
46
전국 모든총공회교인분들의 소망 (1)
지켜보다 | 2019.05.26 | 추천 0 | 조회 260
지켜보다 2019.05.26 0 260
45
고신의 인재 보관 능력, 공회의 인재 매장 초능력
회원 | 2019.05.21 | 추천 0 | 조회 156
회원 2019.05.21 0 156
44
백도영목사님이 고소 사건을 종결하는 제안을 올립니다. (5)
총공회사랑 | 2019.05.20 | 추천 0 | 조회 375
총공회사랑 2019.05.20 0 375
윗글 댓글에 대한 답변 (양이 많아 댓글로 처리하지않고 별도 항목으로 처리함) (44)
총공회사랑 | 2019.05.22 | 추천 0 | 조회 563
총공회사랑 2019.05.22 0 563
43
백영희 목사님의 설교가 자녀재산이라고 주장함을 비꼬는 시각에 대해 (5)
생명 | 2019.05.16 | 추천 0 | 조회 351
생명 2019.05.16 0 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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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와 관련한 소견과 부공3의 제언 첨부파일
평신도 | 2019.05.11 | 추천 0 | 조회 232
평신도 2019.05.11 0 232
41
생명없는 이 사이트 폐쇄하시라 (9)
생명 | 2019.05.10 | 추천 0 | 조회 397
생명 2019.05.10 0 397
40
중앙지법 '불신자를 서울교회 당회장'에 임명 (2)
목회자 | 2019.04.23 | 추천 0 | 조회 211
목회자 2019.04.23 0 211
39
가룟 유다의 구원 - 자살을 중심으로 이미지 (3)
회원 | 2019.04.13 | 추천 0 | 조회 288
회원 2019.04.13 0 288
38
합동보수측 세미나에서 나온 발언
합동 | 2019.03.27 | 추천 0 | 조회 275
합동 2019.03.27 0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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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저작권 문제 - 기독교신앙의 절체절명의 문제 (3)
신학생 | 2019.01.20 | 추천 0 | 조회 444
신학생 2019.01.20 0 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