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1

한국의 병거와 마병이여!

구남단1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13.03.11
1. 하나님의 종과 시대의 안보
엘리야가 승천할 때 엘리사는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안보였다고 선언합니다.
왕하2:12,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엘리사가 죽을 때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엘리사야말로 이스라엘의 안보였음을 고백합니다.
왕하13:14,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2. 남한 사회의 국방이며 안보였던 백영희
저는 경남 거창에서 태어 났고 전영창 교장 선생님이 운영한 샛별초등학교와 거창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때 박정희 대통령의 삼선개헌이 있었고 거창고교 선배들은 거창 시내를 쓸고 다니며 데모를 했는데 전국에서 고교 데모는 최초며 전부였습니다. 이 일로 교장 선생님은 교장직에서 해임이 되고 제 초등학교 졸업장에는 교장 도장이 없고 교장 직무대리 이름만 남게 됩니다. 서슬퍼런 당시에 행정소송을 통해 해임 무효를 이끌어 냅니다. 거창고교는 교장의 반독재 민주화 사상 교육 때문에 졸업생들의 반정부 반골 기질은 아주 대단합니다. 정직이 정의며 정의는 승리하며 기독교와 기도는 이런 정의에 앞 장을 서야 한다 하여 교회의 천국 구원은 뒤로 물리고 반정부 반독재 민주화 인권이라는 사상으로 학생들을 흠뻑 적셔 놓았습니다. 저는 샛별초등학교 1회며 제 졸업장의 번호는 1번입니다.

이 쪽에서 9 년을 섭렵한 덕분에 이 나라 어떤 진보나 좌파를 만나도 말 몇 마디면 동지처럼 가까울 만큼 대화를 시작할 수 있고 그리고 좌파 진보의 모순을 뒤집어 놓고 비판할 수 있으며 상대방은 아무 소리도 할 수 없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 거창고교만큼 족벌에 독재에 인권유린에 성장개발유일주의에 광분한 곳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와 전영창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인물들입니다. 군대 3 년보다 학교 3 년의 매가 더 가혹했던 정도였습니다.

이 시기에 공회 소속인 창동교회의 목회자들은 조사님들이었고 그 분들은 매월 부산에 교역자 회의를 갔다 오면 노트에 필기를 해 와서 그 노트를 읽어 주는 정도로 설교를 했었습니다. 설교는 늘 언제 북한이 공격할지 모른다, 공산당이 쳐 내려 올 때를 대비해서 순교를 각오하고 신앙 준비를 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애국자며 실력자다 데모하는 야당과 학생들은 공산당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철이 없어 저 죽을 짓을 한다, 그들 뒤에는 간첩들이 있다, 이 번에 잡힌 간첩단을 봐라, 우리는 기도할 때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신앙이 들기 시작해서 은혜 생활을 할 때였는데 설교 중에 이런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저는 속으로 '박정희가 혼자 해 먹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하고 독재를 하고 간첩 사건은 전부 조작을 한 것인데 왜 우리 조사님은 저런 것을 모를까!' 탄식이 되어 여러 차례 조사님 사택으로 찾아 가서 직접 대 놓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조사님, 간첩 사건 그 것 전부 조작해서 국민에게 위기감을 조성한 다음에 박정희 혼자 해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순 거짓말입니다.' 이렇게 직언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고등학교 1, 2학년밖에 안 되는 좌익 학생이 공회의 최 중심에 계셨던 성자요 의인인 전성수 조사님께 대들었고 지도를 했고 반론을 했고 코치를 한 셈이었습니다. 요즘 제게 그 때 제 표현과 용감과 의지와 사랑과 지도를 그대로 갖춘 한 분이 실제 선배 입장에서 사랑하는 후배를 향해 간곡히 타이르고 설득을 하느라고 전력을 하고 계십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 가면서 공회에 대한 확신은 단정으로 바뀌었고 만사에 힘껏 뛰면서도 단 한 가지 공회의 설교에 늘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배경이 국가의 안보 문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공회의 극찬, 남북의 긴장 관계는 긴장 정도가 아니라 전쟁 발발의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남한의 데모는 철 없는 아이들의 불장난이거나 간첩들의 부추김이라는 한결같은 표현에 낙담에 절망에 분노가 묘하게 어울리며 늘 고통이었습니다. 하늘의 비췸과 제가 받은 실제 은혜는 하늘을 찌르겠고 단정이 되어 지는데 왜 이런 말씀의 능력을 가지고 저를 가르치는 저 목사님들은 한결 같이 박정희 사상 교육에 철 없이 맥 없이 세뇌교육이 되어 저런 식으로 생각할까? 특히 백영희 목사님까지. 실은 백 목사님이 그 모든 배경의 원인이었습니다. 1977년 5월경 저는 골수 좌파에서 전향을 합니다. 어느 날 설교 도중 한 말씀이 저를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고 그 이후 지금까지 저는 공회 내에서 제일 강경파입니다.

그렇게 전향은 했지만 여전히 숙제가 하나 남아 있긴 했습니다. 위기의 실체가 있기는 했던가, 아니면 좀 강조가 지나쳤는가? 이런 숙제들이 1978년 3월 이후 북한 내부를 실제 볼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고 1986년 이후 소위 6.29선언을 이끌어 낸 학생회의 실세들을 직업 환경에서 만나며 제대로 더욱 눈이 밝아 졌습니다. 그리고 백 목사님은 순교하셨고 소련의 몰락과 함께 북한 관련 중요 자료들이 속속 해제가 되면서 총공회 출신의 좌파 학생이 고통을 받았던 과거 시대 상황이 눈 앞에 환해 졌습니다.


저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다음 왕하2:12 말씀을 부르 짖습니다.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백영희, 그 이름은 제게는 이 땅 위에 사람으로서는 신앙의 아버님입니다. 신앙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과 지혜와 실력까지 제게 있는 좀 괜찮은 부분이 있다면 이는 제가 타고 난 것이 아니라 백 목사님께 배우며 모두 바꾸어 가져서 생긴 것입니다.

백영희, 그는 제가 사는 이 사회 이 여건을 이렇게 안보하여 지켜 낸 제 오늘까지의 시대의 병거와 마병이었습니다. 김일성 김정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 낸 국방은 미국의 안보 공약이 아니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사생결단 노력과 애국과 국가 발전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미국과 박 대통령의 역할은 눈에 보이는 현상들이었고 그 배후에는 이 시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종으로 충실했던 백영희 목사님이 남한 사회의 병거와 마병이 되어 이 사회를 북으로부터 지켜 낸 것입니다.

오랫동안 세상 소식을 전혀 보지 않다가 최근 조금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글이 하나 눈에 띄어 소개합니다. 1970년대 이 나라는 오늘의 북한 땅처럼 될 위기가 실제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총공회 교훈의 국가 안보관에 대해 좌파로서 철저히 극단적으로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누가 차분히 시간을 갖고 설득을 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합니다만 그런 시절 때문에 오늘 철이 들되 저 같은 사람을 잘 설득할 수 있는 역량을 좀 갖춘 사람으로 철이 들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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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핵개발 좌절! [박정희 코드]의 비밀은?

朴정희의 [10월 유신]-[비밀 독자 핵개발 추진] 수수깨끼..한 꺼풀 베일 벗다!
최종편집 2013.03.10 19:18:42

전경웅 기자




[박정희 코드]의 양대 기둥은 무엇일까?


[10월 유신]과 [비밀 독자 핵개발 추진].

그렇다!!!

[박정희 코드]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박정희는 비밀리에 독자적 핵개발을 추진했다.
그러다, 미국의 제지를 받았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중국의 사실상 묵인 아래 독자적 핵개발에 나섰다.
그리고 성공했다.
동시에 지금, 우리를 겁나게 겁박하고 있다.





▲마오쩌둥과 만난 닉슨 美대통령. 이들은 공식적으로 수교하기 전에도 만남을 가졌다.



[1971년 7월], [197년 10월], 그리고 [1972년 2월].
미국의 키신저와 닉슨, 중국의 주은래와 모택동은 박정희의 머리 위를 넘나들었다.


박정희와 대한민국 국민은,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미국과 중국은, 대한민국을 자기들 발 톱속 때만큼도 취급하지 않았다.


닉슨은, 박정희와 대한민국을 [개무시] 했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김일성을 [대우] 했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미·중 간 협의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김일성에게 주었다.
의견도 들었다.

이게 그 당시 긴박하게 돌아갔던 [국제정세]였다.
당시 박정희 입장에선, 뒤통수를 해머로 강타 당한 듯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10월유신]을 단행했다.

1973년에는 베트남도 미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20년간의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뺀 파리협정도 닉슨·키신저 작품이었다.

[10월유신]과 [비밀 독자 핵개발 추진].
[박정희 코드]를 추적할만한 단서가 나타났다.

이번에 비밀해제된 미국 국무부 문서에 그 단초가 숨어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이야기 중인 키신저. 키신저는 닉슨과 함께 중국과의 수교에 열심이었다.




“1953년 나는 부통령으로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승만(한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다.
당시 이승만은 북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더 이상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유쾌한 말을 했다.
내가 그 말을 전달했을 때 이승만은 나에게 소리를 질렀던(cry out)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1972년 2월 21일 오후 2시40분].
중국 베이징의 공산당 고위간부 거주지인 중남해(中南海)의 마오쩌둥(毛澤東) 거주지 풍택원(豊澤園).

리처드 닉슨 美대통령,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모였을 때 닉슨이 한 이야기라고 한다.

닉슨은 사흘 뒤 조어대(釣魚臺) 국빈관에서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하며 “한국인들은 충동적인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조선일보>가 10일 보도한 美정부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에 보관된 비밀해제 문서 내용 중 일부다.

당시 미국과 중국 정부 사이에 오고 간 이야기 속에 朴대통령이 핵개발을 추진하게 된 배경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1971년 7월 인민대회당에서 있었던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의 대화], 같은 해 즉 [1971년 10월] 2차 대화, [1972년 2월]의 닉슨과 마오쩌둥의 미·중 정상회담에서 중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했다.
미국은 여기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북한 김일성 부탁!!!

그대로 전하는 중국,


그걸 믿은 미국 대통령!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먼저 꺼낸 건, 김일성의 부탁을 받은 중국 쪽이었다.
미국은 중국 수뇌부의 요구에 “우리 우방을 괴뢰정부로 부르는 쪽과 대화하기 어렵다”는 정도의 ‘저항(?)만 있었을 뿐, 줄곧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중국이 미국에게 전달한 8개의 요구사항은, 사실 김일성으로부터 전달받은 것이었다.




주한 미군 완전 철수
미국의 핵우산 제공 중단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정찰 활동 중단
한·미·일 합동 군사훈련 중단
일본 군사력의 한반도 진출 반대
미국의 남북한 협상 개입 중지
유엔에서 남북한 동등 대우
등등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이 저우언라이와 함께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김일성은 저우언라이, 마오쩌둥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었다.


이때 미국 수뇌부는 대한민국을 향해 ‘배신에 가까운 행동’을 했다.
중국과의 회담 내용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알려주기는커녕 철저히 배제했다고 한다.
심지어 사후통보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과 '긴밀하게 협의'를 한 닉슨 대통령은 주한미군 감축 등의 움직임을 보이며, 중국 수뇌부로부터 “감사하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이때 중국은 미국과 회담을 하면서 있었던 일을, 낱낱이 김일성에게 알려줬다.





▲닉슨 대통령은 국내 여론에 밀려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뺀다. 이를 위해 키신저를 보내 파리협정을 맺는다. 키신저는 이 협정으로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당시 닉슨 대통령은 중국과의 수교관계 물꼬를 튼 여파를 몰아, [1973년]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이의 ‘평화협정’인 파리협정을 이끌어 내 20년 동안 치렀던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버렸다.

닉슨이 자국 내 여론에 밀려 베트남에 이어 한반도에서도 ‘발을 빼려’ 했던 정황이 이 대화록에 생생히 수록돼 있다.


이 같은 미국과 중국 간의 미묘한 변화를 박정희는 알아챘다.
닉슨 대통령 측에 수 차례 한미 정상회담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결국 ‘미국’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비밀리에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실제 박정희는 닉슨 대통령에 대해 불편한 심정을 유재흥 당시 국방장관에게 털어놓았다.


국제정치학자 조철호 교수가 쓴 「한국 핵정책의 이상과 현실」이라는 책에 나온 유재흥 장관의 증언이다.




“...‘닉슨이 미군 뺀다, 그놈 자식...’


이렇게 말이야.


아주 욕도 하시고 괘씸하게 생각...”





▲TOW 대전차 미사일을 살펴보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닉슨 행정부'의 배신을 눈치채고 자주국방에 나선다.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은?


결국!!! '생존을 위한 투쟁'



박정희는 닉슨 정권이 베트남에 이어 한반도에서도 철수를 계획하자 [자주국방]에 나섰다.

닉슨 정권이 '도망치려 한다'는 느낌을 받은 건 이미 몇 년 전이었다.
아시아에서 발을 빼려던 닉슨은, [1969년]에 美7사단 철수를 시작한 상태였다.
키신저의 '립서비스'가 있었지만, 주한미군의 추가 철수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줄을 이었다.


美7사단의 철수는 [1972년]에 마무리 됐다.
주한미군은 6만여 명에서 4만여 명으로 줄었다.





▲1971년 3월 당시 美7사단은 한창 철수 중이었다. 美7사단의 사단가가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아리랑'이라는 걸 아는 이는 드물다.



박정희는 이런 닉슨과 키신저를 믿을 수 없었다.
박정희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당시 국민투표에 부쳐진 [10월 유신]은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박정희는 美7사단이 철수를 시작한 직후인 1970년, 국방과학연구소를 창설했다.
국방과학연구소에는 독자적으로 탄도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사이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고, 1974년 포드 행정부가 들어섰다.
포드 행정부는 태도를 바꿔 '한미동맹 강화'를 내세웠지만 박 대통령의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카터-박근혜 회담' 당시의 모습. 이때 박근혜 現대통령은 카터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고 한다.



1977년 들어선 카터 행정부는 닉슨을 뛰어넘었다.


'도덕성'을 내세운 카터는 '독재자'라고 박 대통령을 비난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강력 추진했다.
그는 심지어 박정희에 대해 "골치아픈 사람"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비난했다.


카터가 방한해 주한미군을 모두 철수시키려 할 때 당시 영애였던 박근혜 현(現)대통령이 이를 설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카터 행정부는 '국가안보'에 있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무능력 정권이었다.


하기야 카터는 냉전이 최고조였던 70년대 말 CIA 직원들을 대거 숙청해 미국의 정보기능을 망가뜨린 장본인.
이때 숙청된 CIA 요원 일부가 남미 마약카르텔로 가면서 문제가 더욱 커졌다.





▲해외 네티즌이 만든 1979년 혁명 전 이란군과 2009년 이란군의 비교사진. 이렇게 될 중동 최대의 우방국을 잃을 때 카터 정권은 무능력의 극치를 보여줬다. 그런 카터 행정부는 주한미군도 모두 철수시키려 했다.



카터는 1979년 아야툴라(종교 최고 지도자) 호메이니를 따르는 과격 이슬람 세력이 중동 최대의 우방국 정권인 이란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릴 때도 그저 무기력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이란 시위대에 잡힌 자기 국민조차 제대로 구하지 못하고 애꿎은 미군만 죽었다.

당시 카터 행정부는 자국내 좌파세력들의 여론에 휘둘려, 아시아의 동맹국을 구하겠다는 의지를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미국 행정부를 보면서 박정희는 "미국에게 우리의 안보를 모두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리고 장거리 탄도탄과 핵무기 개발을 차근차근 진행시켜 나갔다.


그 첫 성과는?

[1978년] 최초로 자체개발한 탄도탄 ‘백곰’ 미사일이다.

백곰 미사일은 당시 미국으로부터 받은 나이키 허큘리스 대공 미사일의 몸체를 활용한 것이었다.





▲육군 탄도탄 사령부에 있는 현무 미사일. 현무 미사일은 전두환 정권 당시 모두 사라졌다 아웅산 테러 이후 다시 재개발, 개량을 거듭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백곰' 미사일에 이어 사정거리 180km의 '현무' 미사일도 만들어냈다.
사정거리 180km이면 전방에서 평양 인근까지 타격할 수 있었다.


'현무' 미사일 개발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박정희는, 핵무기 독자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박정희는1981년 10월 1일 국군의 날에 핵무기 개발성공을 공개한 뒤 하야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측근들에게 귀뜸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흉탄이 [박정희의 꿈]과 [박정희 코드]를 무참하게 꺽어 버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선우연 의원에게 했다는 말을 한 네티즌이 그림과 함께 정리했다.


박정희는 서거 전 “현재 핵개발 진척도가 88%”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확인할 수 없게 돼버린다.
전두환 정권이 모든 자료를 미국에 넘겼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 서거 후 이렇게 우리나라 자체적인 탄도탄 개발과 핵무기 개발은 백지화됐다.
국방과학연구소도 해체됐다.





[깡통진보]가 욕하는 '10월 유신'


그 시작은 닉슨!!!


닉슨은 왜 욕 안하나?



[10월 유신]과 [비밀 독자 핵개발 추진].
[깡통진보]들이 박정희를 비난하는 핵심코드다.


그러나 [10월 유신]과 [비밀 독자 핵개발 추진]은, 박정희가 더 오래 집권하기 위한 게 아닌 듯하다.

이것이 [박정희 코드]의 수수께끼인가?

우리는 이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그러려면, 그 역사적 배경이 되는 닉슨-키신저와 마오쩌둥-저우언라이 간의 대화록을 한자한자 새겨 읽어여 한다.


이 대화록은 [1971년부터 1972년까지] 닉슨-키신저와 마오쩌둥-저우언라이 사이에 있었던 세 차례의 대화록을 담고 있다.

2001년 4월, 비밀해제 후 美정부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보관 중이다.

온라인으로는 존스홉킨스大 내셔널 시큐리티 아카이브에서도 PDF 파일로 찾아볼 수 있다.

http://www.gwu.edu/~nsarchiv/NSAEBB/NSAEBB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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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33
53회의 '과거사 회개' 운동을 감사하며
6033 | 서기 | 2013.07.04
서기 2013.07.04 0 369
6034
노선과 소속은 생명보다 귀한 것
6034 | 서기 | 2013.07.03
서기 2013.07.03 0 282
6035
매일 기도 제목 중에서
6035 | 서기 | 2013.06.28
서기 2013.06.28 0 269
6036
모두, 여호수아가 되라!
6036 | 서기 | 2013.06.23
서기 2013.06.23 0 271
6037
다른 준비는 좀 되었는데
6037 | 서기 | 2013.06.21
서기 2013.06.21 0 271
6038
남정교회 서정교회는 서부교회로 합했으면
6038 | 서기 | 2013.06.12
서기 2013.06.12 0 353
6384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6384 | 반론자 | 2013.06.17
반론자 2013.06.17 0 295
6039
오늘 장례식 순서 맡은 분들께
6039 | 서기 | 2013.06.06
서기 2013.06.06 0 365
6385
이 노선의 3 대 기관
6385 | 서기 | 2013.06.07
서기 2013.06.07 0 259
6040
소수 정예
6040 | 서기 | 2013.05.22
서기 2013.05.22 0 293
6041
이 노선의 내면과 외면
6041 | 서기 | 2013.05.19
서기 2013.05.19 0 290
6042
설교록 - 성경을 위한, 성경 때문에
6042 | 서기 | 2013.05.03
서기 2013.05.03 0 286
6043
최전선 지휘관은 앞이 아니라 뒤의 적이 두렵다.
6043 | 서기 | 2013.04.30
서기 2013.04.30 0 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