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1

공회를 스친 노무현 정권의 동업자

구남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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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0.09
자유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체제에서 대통령의 가능성이 전혀 없던 인물이 당선 된 것은 노무현입니다. 다른 대통령들은 늘 1순위 후보로 차기를 노리고 있었으나 노무현의 경우는 본인과 주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김대중 정권 5년을 통과하며 후임을 통한 계속 집권의 환상이 깨졌고, 김 정권의 반대 측에 있던 영남과 보수 세력은 과거 내부 분열로 정권을 넘겨 준 경험 때문에 2002년의 선거는 분열 없이 선거를 준비하고 있어 김 정권의 계속 집권은 어려워 보였으며, 내부적으로는 대세를 보지 못한 김대중 정권의 실세들이 대선의 결과보다 당내 후보를 지명 받기 위해 대선의 경쟁력을 무시하고 내부 당권만을 목표로 경쟁을 벌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김대중 정권에게는 객이었던 노무현 후보의 당선 가능성은 전무하던 상황에서 당내 후보 선출을 위한 투표가 전국 광역시도를 순회하며 광주 순서가 되었을 때, 광주의 재야는 광주 YMCA를 대표하는 정찬용이라는 인물의 주도로 당선 가능성이 없던 노무현을 1위로 만들어 이후 당 후보로 대선에 나가게 합니다.

광주의 재야 세력이 경남 김해 출신 노무현을 몰표로 밀고 2002년 대선에서 정권을 잡습니다. 광주가 경남 출신을 후보로 밀고 대선에 나간 전략이 성공한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인사 수석에 정찬용을 임명하고 정찬용은 대통령만 빼고 모든 직책을 임명하며 두 사람은 공동 정부를 운영합니다. 정찬용의 이름은 일반인의 기억에서 사라 졌지만 조금 눈치 있는 사람은 노무현 정권을 정찬용 노무현의 공동 창업과 공동 운영으로 봅니다.

정찬용이라는 인물은 전남 영암 출신으로 광주일고와 서울대를 거쳤으며 서울대 시절에 유신반대 데모를 주동하다 정권에게 최초로 찍힌 몇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출옥 후 갈 곳이 없을 때 거창고교 이사장인 풀무원 원경선 씨가 경기의 자기 거처 근처에 거두었으나 오래 있을 곳이 아니어서 거창고교 교장에게 보냅니다. 거고 교장은 장기려 박사를 데리고 고신대 복음병원을 설립했고 고신의 SFC를 실제 만든 인물입니다. 한부선 한명동 이런 분들은 지도자 위치에서 이름을 가진 정도고 내부 기획 추진 창설자는 전영창입니다. 그가 유신 정권이 적대하는 인물을 거고의 교사로 임명했고 정찬용은 거고 교사를 거쳐 거창에서 YMCA를 조직하고 운영하며 농민운동을 합니다. 그 경력을 발판으로 삼고 광주 YMCA를 통해 2002년의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를 성사합니다. 그는 거창고교와 거창 고교와 거창의 YMCA 시절에 풀무원의 2세 원혜영, 김해의 노무현 의원 등과 친분을 쌓았고 이런 연고 때문에 2002년의 노무현 정권 출범 초기에 언론에서는 거고 인맥이라는 말이 지속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실제 정권을 잡은 뒤에는 거창고교 교장을 교육개혁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이 나라의 밑뿌리 출발부터 갈아 엎는 구상을 하게 되는데 원래 이들은 다 같은 성향이고 알고 지낸 이들이며 지역적으로는 경남의 거창이 활동 무대였습니다. 거창고교의 이사장이 풀무원 원경선 씨며, 거창고교 교장은 함석헌으로부터 재야 세력 거의 모두를 섭렵한 인물입니다.

이렇게 거창 지역에서 제대로 활동을 했다면 공회와 접촉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거창고는 교육계에서 그 의미가 특별하지만 연혁적으로는 한국의 그 어느 기독교 학교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기독교 학교였고, 기독교 내에서는 극단적 진보나 자유주의 또는 좌파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창은 아다시피 경남의 제일 깊은 산중이고 보수 신앙의 중심지며 그 곳은 공회의 출발지며 중심지입니다. 정찬용이 거창에 있던 시기에 거창은 거창 곳곳에 중요 교회가 있었고 도평의 8월 집회는 거창 사회 전체가 가진 유일한 전국 단위 행사였으며 거창의 교회 관련인들은 공회 집회에 압도 당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거창고교에서 과거 제일 가까운 교회가 공회의 창동교회로서 거리가 4백 미터입니다. 거고 교감이 창동교회 교인이었고 거고 교장의 학창 시절부터 평생 친구들이 교회 중심 인물들입니다. 거고의 설립 교장이 백 목사님께 두 번이나 찾아와서 나인숙 집사님을 학교 재무 총책임자로 보내 달라고 했으며 백 목사님의 거창 집회 후에는 학교로 모시고 전교생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거고에서는 수 없는 연사 중에 하나라며 극구 그 의미를 축소하고 심지어 단순한 확인 질문에 학교 운영의 2세대에서는 괴성을 지르며 반응하는 정도지만 우리는 거고 교장이 그 곳에 가기 전 부산에서의 활동부터 알고 있기 때문에 그냥 우리대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했던 것은 거고 창설자며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 진 교장은 공회에 대해 나인숙 권사님 등 부산 시기의 백 목사님 접촉 때문에 열등감이 좀 심했습니다. 그는 사회나 교계 어디를 향해서도 큰 소리를 낼 수 있었으나 공회를 향해서는 앞이 꽉 막혔다는 말 외에 할 말은 없었습니다.


거창고교와 공회는 교육 철학과 방법론에서부터 신앙과 세상을 보는 시각도 정반대라 할 수 있고, 사회의 모든 현상을 읽는 눈도 정반대입니다. 양 쪽이 같은 점은 각각 자기 분야에서 절정의 위치와 역사와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창고교가 훗날 지명도를 가진 뒤에는 이름만 유명했지 내용은 아주 보잘 것이 없어 졌습니다. 그 학교가 유명하게 알려 졌던 시기의 전설은 그 학교가 알려 지지 않던 시기에 실존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없던 그 시기에 그 학교는 학생 교육에 있어 굉장한 실적을 올리고 있었으나 정작 학교가 학생을 확보하는 문제부터 경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극히 어려워 학교 운영조차 중단할 위기가 많았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그 학교는 거창 사회 내에서 인물과 지지와 기반을 가져야 했는데 거창에서의 공회 영향력은 객관적으로도 적지 않습니다. 신도관 장로님의 협조도 알게 모르게 많이 받았고, 공회에는 그 학교 출신이 많습니다.

정찬용이라는 인물이 거고 교사를 하다가 시내에서 YMCA를 하며 훗날의 발판을 닦아 나가던 초기 모습을 적은 글을 소개합니다. 이 글이 상기 여러 이야기를 잘 함축하거나 대변할 듯합니다. 거창 YMCA의 이사장이 되어 백지 어음을 끊어 주며 정찬용에게 무한 신뢰와 자금을 댄 인물이 대구공회 양성원 이사장을 지냈던 창동교회 장로님입니다. 약사로 표시 된 분은 1971년의 박정희 김대중의 대선 충돌 때 거창을 방문한 김대중 후보를 거창 백사장에서 직접 소개했떤 인물인데 그는 백 목사님의 거창 시절에 남 다른 분이었고 그 모친이 개인적으로 백 목사님께 금반지를 선물했으나 목사님께서 창동교회 목회자를 통해 되돌려 주게 됩니다. 더 구체적으로 거명하기는 곤란하지만 아래 적은 글에서 핵심 관련인들이 이 노선 교회나 핵심 인물과 어깨를 맞대며 살았습니다. 저와 개인 관계까지 설명하려면 너무 글이 길어 질 듯하나 이 글의 소개를 통해 공회와 이 홈은 이 나라의 현상이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 현실에 대해 이 노선은 전혀 모르거나 잘 알지 못하고 경거망동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해야 할 상황들이 있어 이 자료를 일반자료실에 올리려다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여 여기 올립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가 진행 되면 우리 사회의 좌우에 이 노선이 연관이나 있는 것처럼 될까 해서 글은 여기서 맺습니다. 이 글은 그냥 아는 사람은 짐작하고 모르는 분들은 잊으면 좋겠습니다. 이 나라는 너무 좁습니다. 이 노선은 숨어 살고 감추며 살아 왔으나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주목하는 세력은 이 홈을 찾는 분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곳곳에 산재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노선을 주시던 처음부터 이 시대에 맡길 사명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 노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 노선의 공회인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곳곳에 이 노선을 접촉 시킴으로 알아야 할 것과 해야 할 일들의 저변을 넓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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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정찬용의 도전 37 거창농민운동의 산파가 되어정찬용의 이야기/ 공식홈페이지

2011/03/08 12:34


http://blog.naver.com/ngojcy/10104646999





5장
낯설고 거친 땅, 거창을 누비다

거창농민운동의 산파가 되어

농민교육사업을 온전히 나의 책임 아래 진행해나가기로 했지만
당국의 압력을 혼자서 버텨내기란 쉽지 않았다. 다른‘보호 우산’이 필요했다. 나는 YMCA를 찾았고‘대한YMCA연맹 거창지역사회개발센터’
책임간사로 발령을 받았다. 1982년 6월 15일의 일이다. 거창읍에 사무실을 얻고, 경상도 서부지역 농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시작했다.
‘ 왜우리는못사는가?‘’어떻게해야 우리가 사람답게 살 것인가?’를 화두로 붙들고 농민들이 모일 만한 곳을 찾아 다녔다.
우리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적극성을 띠는 농민들은 따로 모아 1박 2일로 교육을 했다. 그다음 단계는 강원룡 목사님의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4박 5일 과정 위탁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참여도는 실망스런 수준이었다. 농민들은 감시의 눈길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분위기였다. 또 저녁을 먹고 나서 TV가 있는 집에 모여앉아 드라마 보는 재미에 빠져 교육참석자가 적었다. 감시하는 당국과 TV를 이기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농민들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유기농 쌀, 두 배 값으로 사주겠다.”
“쌀농사를 짓되 농약을 안 쓰는 유기농법 농사를 지으면 값을 두
배로 사주겠다.”

아끼바레 일반미 한 가마에 4만 6,000원 하던 때에 9만 5,000원씩에 사준 서울의 선후배들에게 이 글로 감사드린다. 이 쌀 배달 다니느라 함께
고생해준 풀무원식품 원혜영 사장(현 국회의원), 신동수 선배께도 감사드린다.
‘두 배’라는 말에 농민들이 긴가민가하면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이야 친환경이니 유기농이니 하는 것이 일반화된 세상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말 자체가 생소하던 때였다. 뜻을 같이하는 유기농 전문가들과
함께 농가를 돌면서 설명했다. 사람들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농정에 대한 불만도 터져나왔다.
따로 교육이랄 것도 없이 농민들이랑 놀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그들과 농촌과 나라를 위한 고민을 나누는 것이었다.

먼저‘농협 바로알기’사업을 벌이기로 해‘농협 정관’을 구해 읽어
보자고 제안했다. 당시만 해도 농협에 정관을 달라고 하면 주지도 않고
무슨 기밀문서나 되는 것처럼 굴었다. 성순근이라는 농민이 있었다.
아주 당찬 사람으로 농협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가 책임을 지고
농협 정관을 구해오기로 했다. 그는 어느 날 농협군지부에 가서
지부장에게 정관을 보여달라고 했다.

“자네가 이것이 왜 필요하나? 한자가 많은데 읽을 수나 있어?”

기회를 노리던 그는 정관 책자를 낚아채 문 밖으로 튀었다. 농협 직원들이
우르르 쫓아나오자 정관을 가슴에 꼭 품고는 차도에 들어가서는
책자를 빼앗아가면 차에 깔려 죽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정관을 복사한 뒤
농협에 돌려주기로 해 소동이 끝났다. 이런 과정을 통해 농민들은
스스로가 농협의 주인임을 알게 되었고, 결속을 다지고 용기를 얻어갔다.

이때 또 한 명의 위대한 평민이 등장한다. 바로 표만수, 그는 나와 동갑내기다.
집이 가난해 겨우 초등학교를 다니는데 주변 친구들에게 항상 무시당했다.
옆 짝꿍은 책상에 금을 그어놓고 선을 넘지 못하게 했다.
책 끝이 조금이라도 넘어가면 면도칼로 자르기도 했단다.
도대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신세였다.
국민학교도 채 못 마쳤고 집안도 어지러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는 동생과 함께 산골짝 끝자리 흙집에서 천수답 몇 마지기를
소작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애써 설득한 농민 한 사람이
크리스천아카데미 교육에 참석키로 해서 차표까지 끊어놓고
차부에서 기다리는데 오질 않았다. 알고보니 표만수씨 때문이었다.
가난한 소작농이지만 경우가 바르고 생각이 깊어 친구들 신임을 얻은
표만수씨가 그 농민에게
“너 거기 가면 빨갱이 된다, 그놈들은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다”라고
만류했다는 것이다. 나는 표만수부터 설득해야겠기에 그를 찾아갔다.
논에서 물을 대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다 허물어져가는 그의 집에 들어가자
그는 고구마 바구니를 내놓았다. 가족들의 저녁식사인 줄도 모르고
맛있게 남김없이 먹어버렸다. 우리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고 교육 내용이
어떠한지 차근차근 설명했더니 그래도 그는 진심을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그에게“빨갱이인지 아닌지 직접 교육에 참여해보라”고 말했다.
우리 센터의 농민교육에 와본 뒤 그는 달라졌다. 친구까지 데리고 왔다.
우리들이 빨갱이가 아니고 우리가 하는 일이‘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임을 깨달은 그의 열성과 흡수속도가 놀라웠다.
이듬해 교회를 빌려 2박 3일간 농민기초교육을 했다.
첫 강의를 표만수씨가 맡았다. 농지세 해설 강의였다.
물론 강의 사전 연습도 했다.

첫 강의 시간, 산골짝 농사꾼이 강사로 데뷔하는 날이다.
그는 세금 종류부터 설명을 잘 해나갔다. 그러다가 누진세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그만‘시동’이 꺼지고 말았다. 잠시 당황스러워하던 그가 갑자기
교탁 밑의 한 사람을 가리켰다.

“이 누진세 부분만 따로 내 계산담당 비서가 설명해줄 겁니다.
서울대 나온 사람이라 여러분이 쉽게 알아들을 겁니다.”

그가 지목한 계산담당 비서는 나였다. 자기 강의를 끝내고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천연덕스럽게도“계산담당 비서 나와서 설명하세요”라고 했다.
졸지에 서울대 출신이 초등학교 중퇴자의 비서가 된 것이다.
그의 기지에 솔직히 놀랐다. 그는 바탕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매우 영민하고 성실했으며 집중력이 탁월했다.
강의가 끝나고 마당에 나와 쉬고 있는데 교육참가자 한 사람이 표씨를
끌다시피 데리고 나갔다. 알고보니 국민학교 때 책상에 금 긋고 공책이
넘어오면 잘라버리겠다고 괴롭히던 그 친구였다. 표만수씨의 변화와 발전에
놀랐고 표씨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달라져 있었다.

“초등학교 때 나한테 놀림감이었던 네가 무슨 조화를 부려 강사가
되고, 나는 네 강의를 듣는 상황이 되었냐?”
“사람 사는 세상이 무엇인지 알게 된 덕분이다. 다른 말로 하면 농
민운동을 한 덕이다.”

표씨는 나중에 농민연합회 경남도의장, 거창군 평통위원장도 지내는
인물이 되었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아니겠는가. 지금도 이 재미있는 친구와
오고 가고 가끔 통화를 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 사람은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생기면 운명의 주체로서
투철하게 행동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교육은 공감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빈부, 학력, 신분과 상관없이 마음 뿐 아니라 몸으로까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게 될 때 교육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솔선수범의 리더십도 그러기에 필요한 것이다.
이 농민교육은 이렇게 결실을 이뤄나갔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힘겨운 삶이
무능력과 게으름 탓이 아니라 정책의 잘못임을 깨우치게 되자 놀라울 만큼
빨리 눈을 뜨기 시작했다. 바른 성품으로 함께했던 변환영씨(작고),
짓는 농사 말고 보는 농사도 해야 한다던 최용환씨, 교회전도사로 거창에 부임해
줄기차게 함께했던 유성일 목사가 이 당시 어렵고 힘든 농민운동을 함께한
동지들이었다.

당시 YMCA는 뛰어난 지도자 강문규 사무총장을 모시고, 안팎의 압력과 불만을
잘 정돈한 이창식 부장을 중심으로 농민과 노동자교육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내 인생에 큰 전환점 중 하나가 YMCA 운동, 곧 시민운동 참여다.
YMCA 운동에서 이창식, 조희부 선배를 만났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노동운동 쪽으로는 황주석(작고) 부천 YMCA 총무, 이상점 대구 YMCA 간사,
농촌운동 쪽으로는 민인기 해남 YMCA 총무, 유희영 간사, 권태욱 간사 등이 맹활약했다.

내가 농민운동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농민들이 고생은 가장 많이
하면서도 가장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느끼면서였다.
더구나 농민들은 그들의 처지를 자신들의 숙명처럼 받아 들이고
정권으로부터 길들여져 있었다. 그러한 부당한 현실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바로잡아야 할 현실이었다. 가장 빠른 길은 농민들이 왜 그들이 고생을
할 수밖에 없는지, 그러면서도 왜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지,
또 왜 그 가난이 대물림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교육이 필요했던 것이다.
농민들은 내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서울대학교를 나왔다는 것 때문에
처음에는“네가 말로는 그럴 듯하게 떠든다마는 얼마나 가겠느냐”는 마음으로
나를 경원시했으나 점차 나를 이해하게 됐다.
무학의 농민들과도 스스럼없이 친구로, 가까운 동지로 지냈다.
그렇게 하니 문은 저절로 열렸다.

나는 명문학교 고학력 지식인들의 어줍잖은 엘리트 의식이나 허위의식을
매우 싫어한다. 거창의 서울대 동문들과도 그런 점 때문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농민을 2, 3류의 사람, 불가촉천민이나 되는 것처럼 취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농민들과 다를 바 없는 처지에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나를 만날수록 나를 더 진지하게 대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거창에서 농민교육기관을 최초로 설립해서 성공적으로 운영했고,
거창농민운동의 산파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농민교육기관인‘지역사회개발센터’를 세운 뒤 2년쯤 지난
1984년 거창 YMCA를 창설하는 데 힘을 쏟았다. 농민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을 위한 교육을 해달라는 요구가 많았다. 재정도 문제였다.
나는 YMCA로 독립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래서 거창고 전성은 교장, 김영수 장로,
허진철 거창적십자병원 원장, 이상모 보건약국 약사, 서예가 박노하 선생,
좀 뒤에 장세철 사장도 합류해 거창 YMCA를 설립하고 다지는 일에 주력했다.

1984년 4월 21일 거창 YMCA가 창립대회를 갖고 출범했다.
김영수 장로가 이사장이었고 내가 총무를 맡았다. 든든한 배경이 생겼으므로
이제 나는 제대로 된 시민교육기관을 만들고 싶은 의욕이 솟구쳤다.
청소년 클럽, 어린이 스포츠단, 시민중계실, 십대의 전화 등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나갔다.
한대수라는 청년이 참으로 열심히 일을 도왔다. 수시로 음식을 만들어
굶주린 우리들을 배불리 대접해주었다. 84년 겨울에는 서울의 터울림
도움을 받아 서울농대생 이인형을 초빙해 당시로는 금기였던 풍물을 열심히 배웠다.
대보름 지신밟기에 읍내 대부분 가게들이 호응해줬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반정부 데모대 소리라며 매우 싫어해
고유의 우리 문화가 움추러들던 상황에서 읍내와 가지리 살목을 중심으로
시작된 풍물교육은 여러 초중고등학교와 마을에 풍물 붐을 일으켰다.
살목의 신중성, 윤현수, 그리고 읍내 거창 유기상회 이기홍 사장도
큰 몫을 담당했다. 이 힘을 모아 한대수는 우리문화연구회를 만들었고,
이는 거창 삼봉산 아래 자리한 사단법인 생명두레문화교육원의 바탕이 되었다.
이들은 곳곳의 농촌 마을과 초등학교를 찾아 풍물강습을 했다.

1989년에는 독립건물을 신축했다. 보수교회 장로였던
김영수 초대 거창 YMCA 이사장의 백지어음을 받아서 땅을 샀다.
내가 청소년대상 시민활동을 열심히 하는 이유와 함께 회관을 지으면
얼마나더 효과적으로 거창의 앞날을 위해 일할 수 있는지 설명하고 정중히
요청드린 결과다. 그날 김 장로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전라도 사람이, 서울대학교 나와서, 월급도 안 받고, 왜 타향인
거창에서 정부가 싫어하는 활동을 할까? 틀림없는 빨갱이다. 가까
이하다가는 언젠가 내가 저 사람 때문에 경을 칠 것이다’라고 선입견을
가지고 경계했는데, 1년 남짓 지내보니 오해였음을 알았다는 것
이었다. 김 장로는 나에 대한 오해를 풀고 땅 살 돈도 지원했고,
YMCA 활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했다. 단단하게 지역 일을 할 분이었는데
지병으로 일찍 소천하셨다. 당시 YMCA 이사가 10여 명이었는데 나중에는
가족끼리도 친해져 어떤 오해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들과 함께한 YMCA 운동은
참으로 즐겁고 유쾌한 일이었다. 또 도재원 교장과 이형원 선생을 비롯한
거창고 샛별초중학교의 많은 선생님들은 언제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경희한의원 강대성 원장도 당당하게 우리와 함께했다.
많은 분들 성원에 힘입어 영호강 강가에 대지 100여 평, 건평 150여 평의
빨간 벽돌집을 지어 신바람 내며 청소년을 키우고 시민의식을 고양하는 일을 했다.
거창 YMCA 홈페이지에는 창립 당시‘총무 정찬용’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올라 있다.
맨몸으로 간 경상도 땅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스스로
대견스러울 때가 많다. 전라도 출신이라는 것이 무슨 상관이랴.
그들은 나의 진심과 추진력을 믿어주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면 어떤 어려움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반드시 성공을 시키는 일이 반복되자
그들은 나를 신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창 사람들은 나에게‘참 대단하데이,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 땅을 뒤집고
다니는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오노?’묻곤 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했다. 내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점이 나를 더욱 분발시켰다.
전라도 출신이기 때문에 나는 더욱 조심해야 했고, 정직하고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 처신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창의 초창기 농민운동과 시민운동의 개척자로서 나를 기억해주는 이들이
많아서 행복하다. 청와대 인사수석이 되었을 때 거창의 지역 신문사가
나를 심층 인터뷰하기도 했다.

나는 거창에서 신문사도 운영해보았다. 거창의 옛 지명이‘아림’이어서
「아림신문」이라고 했다. 농민운동과 YMCA 활동을 하면서 언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아무리 목청껏 외쳐도
메아리가 없으니 답답했다. 우리 나름으로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을 해도
중앙지는 두말할 것도 없었고 진주 창원의 지방지도 다뤄주지 않았다.
지금도 그런 것처럼 지방 뉴스라는 한계 때문이다. 한겨레신문 거창 지사장을
하는 친구와 독자적인 신문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최찬도라는 친구다. 거창 출신으로 서울 용산고와 서울농대를 졸업했다.
글 솜씨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와 의기투합해 타블로이드 4면
주간신문을 시작했다. 나중에 8면으로 증면했지만 기자 2 3명을 데리고
그 면을 채운다는 게 그렇게 어려웠다. 그 친구가 사장을 했는데
말이 사장이지 봉급이 있는 것도 아니요, 박봉이나마 기자들 월급 주고
신문 만들 돈을 만드는 일뿐만 아니라 기사를 직접 쓰고
배달하는 일까지 혼자서 온갖 일을 해냈다. 물론 나도 기사를 쓰고
광고를 모으고 독자 찾는 일에 열심을 냈다.
그때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의 아들 은수도 직접 신문배달을 했다.
영호남 화합에 힘쓰는 백신종(경남 도의원), 오인태 선생 같은 분들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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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된 세계문화유산 - 백년 전의 불국사 모습
6016 | 서기 | 2013.12.24
서기 2013.12.24 0 314
6017
송종섭 목사님의 경제 생활
6017 | 서기 | 2013.12.22
서기 2013.12.22 0 336
6018
공회의 소송금지원칙보다 더 새끼양 원칙도 있습니다.
6018 | 서기 | 2013.12.12
서기 2013.12.12 0 319
6019
갈수록 감사, 살필수록 감사
6019 | 서기 | 2013.12.04
서기 2013.12.04 0 271
6020
백 목사님께 그 이름 사용을 감사하며
6020 | 서기 | 2013.11.13
서기 2013.11.13 0 289
6021
공회 가입과 탈퇴 자료
6021 | 서기 | 2013.11.07
서기 2013.11.07 0 288
6382
자료를 올린거 같으면 확실하게 올리시든지
6382 | | 2013.11.09
2013.11.09 0 372
6383
'관련 내용의 전부가 아니며'라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6383 | 서기 | 2013.11.09
서기 2013.11.09 0 278
6380
공회 가입과 탈퇴 자료
6380 | | 2013.11.14
2013.11.14 0 330
6381
오타입니다.
6381 | 서기 | 2013.11.15
서기 2013.11.15 0 307
6022
감출 과거였던가?
6022 | 서기 | 2013.11.02
서기 2013.11.02 0 317
6023
왜 신앙의 자손과 혈육의 자손은 한 몸에 받지 못할까?
6023 | 서기 | 2013.10.11
서기 2013.10.11 0 297
6024
공회를 스친 노무현 정권의 동업자
6024 | 서기 | 2013.10.09
서기 2013.10.09 0 352
6025
감격스런 날 - 백영희 전기서를 손에 쥐고
6025 | 서기 | 2013.09.28
서기 2013.09.28 0 277
6026
1990년 11월 19일, 그 긴박했던 순간
6026 | 서기 | 2013.09.15
서기 2013.09.15 0 341
6027
서울대 출신 목회자
6027 | 서기 | 2013.09.08
서기 2013.09.08 0 648
6028
'합정동교회'
6028 | 서기 | 2013.08.31
서기 2013.08.31 0 323
6029
신앙의 지분과 대가
6029 | 서기 | 2013.08.15
서기 2013.08.15 0 250
6030
2013년, 목사님 사후 집회 24년 차를 맞아
6030 | 서기 | 2013.08.14
서기 2013.08.14 0 263
6031
공회의 예배 전부 시간
6031 | 서기 | 2013.07.27
서기 2013.07.27 0 313
6032
바른 길인가, 엉뚱한 길인가
6032 | 서기 | 2013.07.20
서기 2013.07.20 0 253
6033
53회의 '과거사 회개' 운동을 감사하며
6033 | 서기 | 2013.07.04
서기 2013.07.04 0 369
6034
노선과 소속은 생명보다 귀한 것
6034 | 서기 | 2013.07.03
서기 2013.07.03 0 282
6035
매일 기도 제목 중에서
6035 | 서기 | 2013.06.28
서기 2013.06.28 0 270
6036
모두, 여호수아가 되라!
6036 | 서기 | 2013.06.23
서기 2013.06.23 0 271
6037
다른 준비는 좀 되었는데
6037 | 서기 | 2013.06.21
서기 2013.06.21 0 271
6038
남정교회 서정교회는 서부교회로 합했으면
6038 | 서기 | 2013.06.12
서기 2013.06.12 0 353
6384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6384 | 반론자 | 2013.06.17
반론자 2013.06.17 0 295
6039
오늘 장례식 순서 맡은 분들께
6039 | 서기 | 2013.06.06
서기 2013.06.06 0 365
6385
이 노선의 3 대 기관
6385 | 서기 | 2013.06.07
서기 2013.06.07 0 259
6040
소수 정예
6040 | 서기 | 2013.05.22
서기 2013.05.22 0 293
6041
이 노선의 내면과 외면
6041 | 서기 | 2013.05.19
서기 2013.05.19 0 290
6042
설교록 - 성경을 위한, 성경 때문에
6042 | 서기 | 2013.05.03
서기 2013.05.03 0 286
6043
최전선 지휘관은 앞이 아니라 뒤의 적이 두렵다.
6043 | 서기 | 2013.04.30
서기 2013.04.30 0 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