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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군 당시 상황 인터뷰 기사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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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10.05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204100025

전남 영광군 피살자 중 열 살 이하 어린이가 2500여 명

김성동(월간조선)

6·25 때 좌익이 학살한 5만9964명 명부 발견

(월간조선2002년4월호)

영광 대학살 2만1225명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피살자 명단

6·25 납북자 8만여 명 명부(명부) 발견(월간조선 2002년 2월호)에 이어 6·25 전쟁 당시의 참상을 보여 주는 피살자 명단이 발견됐다. 6·25 피살자 명부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 이미일·이미일)가 납북자 명부를 찾는 과정에서 함께 발견됐다.

총 4권으로 이루어진 이 명부에는 5만9964명의 피살자 명단이 실려 있다. 이번에 발견된 피살자 명부는 국립중앙도서관, 정부기록보존소에도 동일한 문건이 소장돼 있으며 통계청도 피살자 명부의 일부인 서울시와 경기도 지역의 피살자 명단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표지에 적힌 이 명부의 정식 명칭은 「6·25 사변 피살자 명부」이며 작성 주체는 공보처 통계국으로 돼 있다. 작성일은 1952년 3월31일이다.

명부는 성명, 성별, 연령, 직업, 피해 연월일, 피해 장소, 본적, 주소 등 총 8개 항목으로 피살자들의 신원을 기록해 놓고 있다. 명부는 피살자들을 크게 각 시도별로 구분한 다음 군이나 구별로 세분화해 피해가 많은 성씨 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범렬(범례)에 『6·25 사변 중 공무원 및 일반인이 잔인무도한 괴뢰도당에 피살당한 상황을 조사 편찬하였다』면서, 대상을 『군경을 제외한 비전투자에 한하였다』고 밝혀, 인민군 등 좌익에 의해 피살된 사람들의 명단만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5만9964명의 피살자 가운데 전남 지역에서 피살된 사람이 4만3511명으로 전체의 72.6%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전라북도(5603명), 충청남도(3680명), 경기도(2536명), 서울시(1383명), 강원도(1216명) 순이었다. 그 외 경상남도 689명, 충청북도 633명, 경상북도 628명, 제주도 23명, 철도경찰 62명이 좌익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기록됐다. 전체 피해자 가운데 남자가 4만4008명, 여자가 1만5956명이었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영광군(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지역 여성 피살자는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다.

영광군 인근 지역의 피해도 컸다. 전북 지역 피살자 5603명 중 2364명이 피살된 고창은 행정구역은 전북에 속해 있지만 영광과 이웃해 있는 지역이다. 전남 지역에서도 영광과 이웃한 군인 나주(3596명), 장성(4306명), 함평(1954명) 등에서 피살자가 많았고 영암 지역에서도 7175명이 피살됐다.

대한민국통계년감의 기록은 피살자가 12만2799명

최근 발견된 6·25 사변 납북자 전국 명단의 예에 비추어 볼 때 이번에 발견된 6·25 피살자 5만9964명의 명단이 실린 명부 외에도 인원이 추가된 새로운 명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52년 10월에 발간된 「대한민국통계년감(대한민국통계연감)」에는 납북자 수를 8만2959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월간조선이 2002년 2월호에서 「납북자 명부 8만여 명 명부 발견」 제하 기사를 보도한 후 확인 작업에 나선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8만2959명의 납북자 명단이 적힌 총 5권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납북자 명부를 찾아냈다. 월간조선 보도시에는 전국적으로 납북자 명단이 작성됐다는 정황 증거와 함께 서울특별시 납북자 1만8330명의 명단만 제시됐지만, 이를 토대로 확인 작업에 나선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에 의해 전국 납북자 명단이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같은 해에 작성된「대한민국통계년감」은 피살자 수를 12만2799명으로 밝히고 있다. 통계연감과 납북자 명부의 수치가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12만2799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 피살자 명부가 존재할 개연성이 높다. 정부기록보존소 측은 『우리가 소장하고 있는 것은 5만9964명의 명단이 적힌 피살자 명부뿐』이라고 밝혔다.

부친(이석규·이석규)이 전주형무소에서 인민군에 피살된 이철승(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은 『그동안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전주교도소 등에 문의해 알아보려고 했지만 서류가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알 수 없었다』면서 『이렇게 아버님에 대한 한 줄의 기록이라도 볼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의장은 또 『요즘의 사회는 미군과 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는 공공연하게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조성돼 있다』면서 『이번 문서 발견을 계기로 공산당에 의한 학살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와 함께 공산당이 저지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광군 피살자 중 열 살 이하 어린이가 2500여 명

때늦은 겨울비, 아니면 때이른 봄비가 내리던 날인 3월5일, 기자는 「죽음의 기록」을 등에 지고 영광으로 향했다. 6·25 당시 영광군의 피살자 2만1225명의 명단은 A4 용지 772장 분량이었다. 피살자 명단을 꺼내 훑어보았다. 명단을 입수했을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점이 보였다. 한 살, 두 살, 세 살… 아이들의 죽음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많았다. 대략 수를 세어 보았다. 열 살 이하 어린이가 영광군 전체 피살자 2만1225명의 12%에 달하는 2500여 명이었다.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 이 지역 여성들이라는 사실과 아이들의 죽음. 그것은 일가족이 학살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영광을 찾기 전 호남지역 향토사학자인 김정호(김정호·65) 향토문화진흥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왜 유독 영광 지역의 민간인 피살자가 많은지를 물었다.

『6·25 사변 당시 인민군이 후퇴할 때 미처 지리산으로 못 들어간 빨치산들이 영광 지역에 많이 모여서 빨치산 활동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컸습니다. 특히 구수산(구수산·해발351m) 주변 백수면과 염산면에서 민간인 피살자가 많았습니다. 영광 지역의 또 다른 특성은 해방 후 사회주의 색채를 가진 인사들이 많았던 곳이라는 점입니다. 좌우 갈등이 심했던 곳이라는 뜻입니다. 좌익이나 우익 진영 모두 그로 인한 희생도 컸을 겁니다』

김원장의 설명은 기자가 품고 있던 또 하나의 의문, 즉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는데도 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해소해 주지 못했다. 영광 현지를 찾기 전 기초 취재를 위해 만났거나 전화로 통화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많이 죽었다』거나 『영암에서 제일 많이 죽었고 그 다음이 영광일 것』이라고 말할 뿐 그 수치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몇천 명은 되지 않을까』 하는 정도가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그나마의 수치였다.

영광 가는 길에 동행을 한 전영선(전영선·61) 안양 대동서적 사장에게 영광에서 얼마나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전사장은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 출신으로 만 아홉 살 때 6·25 전쟁을 겪었다. 6·25 때 큰아버지가 경찰에게 피살됐다.

『엄청 많이 죽었어요. 한 수천 명은 될걸요』

―2만 명이 넘던 데요.

『그렇게 많습니까. 많이 죽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열여덟 살에 고향을 떠나 자수성가한 전사장은 독실한 원불교 신자로 4년 전부터 6·25 전쟁 때 영광에서 죽은 무주고혼(무주고혼)을 위한 천도제(천도제:돌아가신 조상이나 부모님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제의식)를 올리고 있다. 무주고혼들의 이름이라도 제단에 놓고 천도제를 올리면 좋을 것 같아서 6·25 때 자신의 고향인 백수면에서 죽은 사람들의 명단을 찾았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전사장은 기자에게 취재가 끝나고 나면 영광지역 피살자 명부의 사본을 꼭 달라고 몇 번을 부탁했다.

영광군 피살자 명부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 사이의 전라남도 영광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는 가운데 기자가 가고 있는 곳은 2002년 3월의 영광군이 아니라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 사이의 영광군이었다.

야든이의 태극기 걸기

영광군 영광읍에는 해발 257m 높이의 물무산이 있다. 이 물무산에는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 사이의 영광군의 상황을 상징하는 하나의 죽음이 있다. 「야든이의 죽음」이 그것이다. 야든이는 그의 아버지가 여든 나이에 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물론 본명이 아닌 별명이다. 성이 양(양)씨인 것으로 전해질 뿐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8·15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 영광군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영광 군수의 이름은 몰라도 야든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그는 이 지역의 명물이었다. 힘이 셌던 그는 품을 팔아 생활했다고 한다. 장터에서 짐을 나르고 초상집이나 잔칫집에서 심부름한 대가로 받은 돈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바보」로 불릴 정도로 일을 할 때는 요령을 피우는 일이 없었던 야든이는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했다. 대신 그는 공짜밥을 절대로 먹지 않았다.

6·25 전쟁 때 인민군들이 물러간 후에도 영광군에는 빨치산들이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잔존해 있었다. 잔존해 있는 빨치산 때문에 영광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의 천하가 되는 상황이 타지역 수복 후에도 한동안 지속됐다. 영광읍에 있는 물무산도 마찬가지로 빨치산들이 숨어들어 영광읍내의 밤을 지배하고 있었다.

문제는 물무산 정상에 있는 국기 게양대였다. 낮에 태극기를 걸어 놓으면 빨치산들이 밤 사이에 인공기로 바꿔 놓았다. 빨치산이 숨어 있는 물무산 정상까지 가서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하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돈을 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야든이에게 아침마다 물무산 정상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일이 맡겨졌다. 야든이는 태극기를 안고 물무산에 올랐다가 인공기를 들고 내려오는 일을 아침마다 반복했다.

야든이에게는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든이는 물무산 빨치산의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둔다. 남북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단지 생존을 위한 「밥」이 절실했던 야든이에게 죽음을 선물한 것이다.

영광 출신인 정종(정종·86·철학박사) 전 원광대 교수는 『야든이가 살아 있을 때 이웃들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는 늘 유쾌했을 정도로 그는 선량한 국민이었다』면서 『야든이의 죽음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여 주는 상징』이라고 말했다.

시댁 식구의 목숨과 친정 아버지의 목숨을 선택해야 했던 여인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은 극단의 선택을 강요한다. 6·25 전쟁 당시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 살던 한금례(88)씨의 증언은 같은 마을에 살던 한 여인의, 친정 아버지의 목숨과 시댁 식구의 목숨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가슴 아픈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천정리에는 이웃 대전리에서 시집을 온 한 여인이 있었다. 한금례씨는 여인의 남편이 한모씨라는 것은 기억하지만 여인의 성과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여인의 친정은 경찰 가족이었다. 빨치산들에게 군경(군경) 가족은 학살 대상 1호다. 빨치산들은 여인의 친정 식구들을 모조리 죽였다. 마침 외출했던 여인의 친정 아버지는 학살을 모면하고 딸이 있는 천정리로 도망을 쳤다. 여인은 친정 아버지를 같은 마을 김근호씨 집에 숨겨 주었다.

여인이 친정 아버지를 숨겨 주었다는 사실은 첩보원 역할을 하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빨치산들에게 알려졌다. 빨치산들은 여인에게 친정 아버지를 내놓지 않으면 그녀의 시댁 식구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결국 여인은 친정 아버지를 김근호씨 집에 숨겨 주었다는 자백을 하고 말았다.

빨치산들이 김근호씨 집에 들이닥쳤을 때는 여인의 친정 아버지가 이미 몸을 피한 후였다. 빨치산들은 당장 친정 아버지를 찾아내지 않으면 여인의 시댁 식구들 뿐만 아니라 숨겨준 집 식구들까지 죽이겠다고 위협을 했다. 그때까지 빨치산들의 행태를 보아온 여인은 빨치산들의 위협이 단순한 위협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어느 쪽의 죽음이든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채 해산기도 가시지 않았던 여인의 선택은 친정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여인은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친정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 안도보다는 아득한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여인의 앞에 놓인 것은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갓난아이를 비롯한 가족과 이웃의 떼죽음이었다.

여인의 가족들이 체념 상태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비보(비보)」라고도 「낭보(낭보)」라고도 할 수 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전리로 돌아가 숨어 있던 아버지가 결국 빨치산에 붙잡혀 처형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친정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여인의 시댁에 짙게 드리웠던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불행 중 다행이란 말을 이런 상황을 묘사하는 말로 쓰기에는 여인에게 부닥친 상황이 너무 잔인하다. 여인에게 닥친 당시의 현실은 불행 중 불행이라는 말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갓봉과 수리봉

한금례씨의 또 다른 증언은 경찰에 의한 사살이다.

백수면 구수산에는 갓봉(344m)과 수리봉(351m)이 있다. 갓봉은 빨치산 본부가 있던 곳이고, 수리봉은 대한민국 군경이 빨치산 토벌 전진기지로 사용하던 곳이다. 갓봉과 수리봉은 직선거리로 2㎞ 떨어져 있다. 두 봉우리 사이에는 입석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피아(피아) 간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곳이다. 한씨의 고향 천정리는 입석골 골짜기에서 3㎞쯤 내려오는 곳에 위치해 있다. 경찰이 갓봉에 있는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천정리를 지나야 했다.

1950년 11월경에 벌어진 일이다. 빨치산 토벌 작전에 나섰던 경찰병력이 천정리에 들어왔다. 경찰은 갓봉에 있는 빨치산 토벌에 애를 먹고 있었다. 산의 높이는 낮지만 깎아지른 듯한 절벽 등으로 둘러싸인 갓봉을 정복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날도 경찰은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

한씨는 빨치산과 전투를 하기 전이었는지 후였는지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천정리에 들어온 경찰이 빨치산과 내통한 사람들에 대한 색출작업을 벌인 것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경찰들이 그날 빨치산과 내통했다며 어린아이 두 명을 포함해 일곱 명의 천정리 사람들을 총살시키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한씨가 지금도 안타까워하는 것은 갓난아이의 죽음이다. 빨치산인 남편을 대신해서 끌려나온 한 여인의 등에는 아기가 업혀 있었다. 경찰은 여인을 향해서 총을 발사했고, 여인을 관통한 총알은 등에 업혀 있던 아이까지 관통했다.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에구… 쯧쯧』

말을 마친 한씨는 52년 전 벌어졌던 그 사건이 바로 당장 목전에서 벌어진 일인양 안타까워하며 혀를 찼다. 한참 혀를 차던 한씨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공산당이 더 나쁜 짓을 많이 했어. 잘못 걸리면 온 가족을 전부 죽였으니까. 운이 있으면 살고 운 없으면 죽고, 그 사람들 기분 내키는 대로 죽이고 살리고 했어』

현재 백수면 길용리에 사는 전계선(62)씨도 경찰에게 아버지를 잃었다. 「밤손님」(영광 사람들은 빨치산을 밤손님이라고 불렀다)에게 밥을 주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전씨의 나이는 만 10세였다. 당시에도 그는 백수면에 살았다. 경찰에게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전씨는 좌익에 대한 적개심이 더 강해 보였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한 죽음에 대한 목격 때문이다.

좌익 스승이 「반동」 제자를 죽이다

인민군이 영광을 점령한 한참 후의 일이다. 백수 동초등학교에는 김모라는 교사가 있었다. 김교사는 음악을 잘해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인민군이 영광에 들어온 후 김교사는 본색을 드러냈다. 좌익이었던 것이다.

전씨가 동네 어귀 고구마밭 부근에서 마을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다. 김교사가 한 아이를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길용리에 사는 2학년 아니면 3학년에 재학 중인 아이였다. 전씨와 함께 놀던 아이들은 김교사가 끌고 오는 아이가 「반동」의 가족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전씨는 그때 끌려오던 아이의 표정이 어땠는지, 몸짓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전씨가 눈을 떴을 때 김교사는 자신이 끌고 온 아이를 칼로 찌른 후 고구마밭 고랑 사이에 처박고 있었다. 전씨는 다리를 후드득 떨었다. 김교사의 목소리가, 6·25 전쟁 전에 학교에서 노래를 부를 때는 그토록 멋지게 들렸던 목소리가 귀신의 음성처럼 웅웅 울렸다.

김교사는 그곳에 있던 아이들을 향해 칼에 찔려 밭고랑에 처박혀 있는 아이에게 돌을 던지라고 외쳤다. 그 아이는 이미 죽어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돌을 들었고 전씨도 돌을 들었다. 전씨는 그때 자신이 들었던 돌의 무게가 천근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차마 던질 수는 없었다. 전씨가 던진 돌은 힘없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자신의 발 앞으로 떨어졌다. 도망을 갈 수도 없었다.

『도망을 가면 경찰의 앞잡이로 몰려서 가족들을 죽일 텐데 도망을 갈 수 있겠습니까. 당시 우리 백수면 사람들은 피란을 가면 밤손님들한테 반동으로 몰리고, 피란을 안 가면 경찰들에게 빨치산 앞잡이로 몰리던 상황이었어요. 운명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6·25를 겪은 영광 사람들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단어가 있다. 「숙청」이라는 말과 빨치산을 지칭하는 「밤손님」이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특히 지금은 북한 관련 보도에서나 들을 수 있는 「숙청」이라는 말을, 그들은 일상 용어처럼 사용했다. 강한 자극을 받은 언어는 오래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영광 사람들이 말하는 「숙청」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6·25 전쟁 중 영광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영광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의 특징은 대상자 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일가 친척을 모두 학살했다는 점이다.

무기가 없으니까 죽창이나 칼로 죽였다

6·25 전쟁 당시 열세 살로 빨치산 소년단으로 활동했던 김서용(김서용·가명)씨의 증언. 당시 김씨는 백수면 대전리에 살았다.

『인민군이 패퇴한 후 빨치산들에게는 무기가 별로 없었어요. 갓봉에 있는 빨치산 본부에도 따발총하고 소련제 장총 몇 자루 그게 전부였어요. 정확히 몇 명인지 기억은 못 하지만 잔존 빨치산의 숫자도 별로 안 됐어요. 경찰이 우리가 있던 갓봉을 공격해 오면 우리 소년단들이 돌을 굴려서 못 올라오게 하는 역할도 했죠. 처음에 인민군이 진주했을 때는 형식적이지만 인민재판을 통해 처형을 했어요. 나중에는 막무가내로 죽였어요. 주로 군경 가족들이 희생됐죠.

빨치산들은 보복을 막으려면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일가친척들까지 모조리 잡아다가 죽였어요. 나도 네댓 번 우익 쪽 사람들을 죽이는 곳에 있었는데 무기가 없으니까 죽창이나 칼로 죽였어요. 학살 후 구덩이에 묻기도 했지만 개울에 버린 시체도 많았어요. 갓난애들은 자루에 담아서 그냥 던져버렸구요. 빨치산들에 의해 처형 명령이 내려진 사람들을 처형하기 위해 개울가로 데려가다 보면 이미 80%쯤은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이 나요. 공포에 정신이 혼미해졌던 거죠.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지만 그때는 무덤덤하게 죽이라면 죽였어요. 우리 가족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지금도 생생한 기억이 하나 있는데, 백수면에서 우익 인사를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이 최모라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칼을 사용했어요. 한번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데서 우익 쪽 사람들을 처형하는데 그날도 최모씨는 칼을 사용했어요. 그리고 나서는 사람들 앞에서 칼에 묻은 피를 빨아먹는 거예요. 너무나 많은 죽음을 봤기 때문에 죽음에 무감각했던 우리들도 전율을 느낄 정도의 섬뜩한 광경이었어요. 빨치산에서 도망을 칠 수도 없었어요. 내가 도망치면 우리 식구가 몽땅 죽을 테니까요』

김씨는 빨치산과 전투 중이던 경찰에 의해 주민들이 희생당했던 목격담도 털어놓았다. 김씨는 날짜에 대한 기억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하면서 그날을 1950년 12월24일로 기억했다.

『나는 그날을 12월24일로 기억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기억하게 되었는지는 몰라요. 그 무렵에 팔로군이 온다는 소식이 빨치산에게 전해졌어요. 나는 다른 소년단원들과 함께 척후병으로 선발돼 대전리 묘동 부락으로 내려갔어요. 팔로군이 정말로 오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간 거죠. 그런데 팔로군이 아니라 경찰이 오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때 군경을 「개새끼」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개새끼들이 온다」고 소리치면서 도망을 쳤지요. 우리들의 고함을 들은 마을 사람들도 함께 산으로 도망을 쳤죠. 산속에 피신할 곳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작정 도망들을 간 거죠. 그때 경찰이 무차별 사격을 가했어요. 도망가는 사람들을 모두 빨치산 편이라고 판단한 거겠죠. 나도 갓봉을 향해서 도망을 쳤는데, 도망을 치면서 내 눈으로 본 시체만도 50∼60구는 됐을 거예요. 여자들도 있었고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9·28 수복 후 더 많이 죽어

김씨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천우신조(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당시 백전무는 세 살이었고, 형 종인씨는 일곱 살이었다. 백전무의 아버지(백덕기·백덕기)는 6·25 전쟁 당시 백수면 부면장으로 있었다. 미처 피란을 가지 못했던 백전무의 아버지는 비밀리에 우익 단체인 영광지역 대한청년단을 관리했다.

사단은 9·28 서울 수복 후에 벌어졌다. 후퇴했던 유엔군과 국군이 영광읍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백전무의 아버지는 청년단원들과 함께 몰래 태극기를 만들면서 유엔군과 국군을 맞을 준비를 해 왔다. 1950년 9월29일, 소문대로 지프를 탄 미군 소속 흑인병사들과 국군이 영광에 들어왔다.

백전무의 아버지와 청년단원들, 공산치하에서 숨죽이고 있던 영광군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환영에 나섰다. 흑인 병사들과 국군은 영광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증언자마다 그냥 스쳐지나갔다는 주장과 하룻밤을 묵고 떠났다는 증언이 엇갈린다. 중요한 것은 서울이 수복된 이후에도 국군이든 유엔군이든 영광에 주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엔군과 국군이 잠깐 스쳐지나간 영광은 비록 인민군은 떠났지만 여전히 빨치산이 지배하는 인민공화국 치하였다. 좌익 세력에 의한 우익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과 학살이 시작됐다. 유엔군 환영에 나섰던 우익 쪽 민간인들이 좌익들에게 완전히 노출된 것이다.

기자와 만난 대부분의 증언자들은 이 유엔군 환영식으로 인해 영광지역의 피살자 수가 크게 늘었다고 말하고 있다. 「6·25 피살자 명부」에도 9·28 서울 수복 이후의 피살자 수가 이전의 피살자 수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빨치산 소년단 출신 김서용씨의 증언을 통해서도 그같은 사실은 입증이 된다.

『유엔군 환영식이 있은 다음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빨치산들은 유엔군이 온다는 소문이 알려지면서 앞잡이들에게 주민들의 행동거지를 잘 살펴보도록 지시해 놓고 있었어요. 그때부터 더 많이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참혹한 광경에 눈이 멀어버리다

백전무의 가족 전체는 유엔군 환영대회 직후 좌익들에게 끌려갔다. 손위 형 종인씨는 마침 가족들이 끌려갈 때 밖으로 놀러갔다가 화(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다가 이웃집에서 『집으로 가면 큰일 난다』며 숨겨 주었다고 한다. 이웃집에 숨었다는 사실을 안 빨치산들은 죽창을 들고 와 종인씨를 찾았다. 김서용씨의 표현을 빌면 『씨를 말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변기통에 몸을 숨겼던 종인씨는 그곳을 무사히 탈출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백전무가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이웃 아주머니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백전무는 가족이 좌익들에게 끌려갈 때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었다. 감옥으로 개조한 면사무소의 창고에 종인씨를 제외한 가족들이 전부 갇히게 되었는데, 백전무가 심하게 울었다고 한다. 마침 그곳에는 좌익 활동을 하던 백전무의 외가 쪽 먼 친척이 있었다. 백전무가 심하게 울자 그 친척은 할머니에게 백전무를 데리고 나가 있으라고 했다.

백전무를 업고 창고 감옥에서 나온 할머니는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백전무를 맡겼다. 백전무가 창고에서 나온 직후 좌익들은 백전무의 가족들을 처형했다. 좌익들은 백전무의 할머니를 찾아와 백전무를 내놓으라고 했다. 백전무의 할머니는 백전무가 하도 심하게 울어서 속이 상해 집에 오는 길에 버렸다고 했다. 『내 자식이 죽을지도 모르는 판에 손주가 뭐 그리 대수냐』며. 좌익들이 돌아간 후 할머니는 그 길로 친정으로 피했다. 나중에 백전무의 할머니가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백전무를 맡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좌익들이 그 아주머니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 아주머니는 이미 백전무를 다른 곳으로 피신시켜 놓고 있었다. 좌익들은 백전무 대신 그 아주머니를 살해했다.

이웃집 아주머니의 희생으로 백전무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지만 좌익들은 백전무의 가족을 학살한 후 백전무의 고모 부부 등 친척들까지 찾아내 학살을 했다. 그렇게 해서 백전무의 4촌 이내 친척 26명이 살해된 것이다. 백전무의 가족들이 학살된 곳은 현재의 백수 중초등학교 옆에 있는 대절산 기슭이다. 백전무의 가족들이 학살된 날은 음력 8월20일이다. 양력으로는 10월1일이다. 9·28 수복 직후인 것이다.

백전무의 가족이 학살됐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은 먼 친척 할아버지가 몰래 백전무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백수면을 찾았다. 그 할아버지는 몇몇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대절산 기슭에 버려진 백전무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곳에는 백전무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친척 할아버지는 우선 어른 시신 13구만 찾아서 소달구지에 싣고 백전무의 집이 있는 백수면 논산리로 돌아왔다. 논산리로 돌아온 그 할아버지는 눈이 멀고 말았다. 참혹한 학살 현장을 본 충격 때문이었다고 한다.

백전무가 아버지의 시신을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이 끝난 지 8년여가 지나서였다. 1961년에 아버지의 묘소를 이장할 때였다. 백전무는 그때 아버지의 시신을 보고 가슴속으로 치미는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두개골이 깨져 있었습니다. 몽둥이로 두들겨서 죽인 것이 분명했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당시 어린 나이였던 형님이나 누님들이 맞아서 죽을 때의 고통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습니다』

6촌 이내 친척 300여 명이 떼죽음당하다

백수면 논산리는 인동 장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6·25 당시 23세로 초등학교 교사였던 장맹룡(장맹룡·75)씨에게 6·25 당시의 상황에 대한 증언을 부탁했다. 장씨는 『별로 할 말도 없고 기억나는 일도 없다』며 기자의 방문을 거절했다. 『6·25 전쟁 때의 일은 기억하기도 싫다』는 장씨를 설득한 끝에 방문을 허락받았다.

장씨에게 기자가 가져간 「6·25 피살자 명부」 가운데 영광군 명단을 보여 주었다. 피살자 명부는 성씨 별로 기록돼 있다. 명부를 넘기던 장씨의 시선이 장씨 성을 가진 피살자들의 명단에 오래 머물렀다. 침묵이 흘렀다. 장씨와 함께 명부를 들여다보며 숫자를 헤아리던 전영선 사장이 입을 열었다.

『대충 세어봐도 백수면 일대에서만 피살자가 300여 명이네…』

장씨의 입이 달싹였다. 깊은 과거를 헤집어 꺼내는 표정으로 그는 기억의 실타래를 풀기 시작했다.

『300명이여, 300명… 우리 장씨가 백수면 상사리하고 여기 대전리에 많이 살았지. 논산리에도 장씨가 있었어. 지씨도 많이 살았어』

―대전리는 지씨, 장씨 집성촌이었습니까.

『그렇지. 지금도 많이 살아』

―대전리는 군경에 의해 죽은 분은 없나요.

『군경이 직접적으로 죽인 것은 없어. 대전리에서는 군인이나 경찰을 6·25 사변 중에는 만날 수 없었으니까. 다 여수 쪽으로 피란 가 버렸지』

―전남 영광 지방에는 7월23일 인민군이 들어왔는데 이때부터 영광이 완전히 수복된 다음해 2월20일까지 인민군이 일부라도 남아 있었습니까.

『아니지. 9·28 수복 후에 다 나가 버렸지. 그러고는 빨치산 세상이 된 거지』

―명부에 적힌 피살자들이 죽은 날짜를 보면 9·28 이후에도 많이 죽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9·28 수복 이전에는 학살이 별로 없었어. 인민군이 가면서 방송이 나왔다지. 내가 직접 듣지는 못했는데 무자비하게 숙청을 하라는 방송이 있었다더군. 생산유격대나 빨치산들이 그 이야기를 하더라니까. 국군이 오고 미군이 오고 하면 당시 우익 유가족들이 다 보복을 한다 이거야. 그러니까 다 죽이라는 거였지. 그런데 또 유엔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환영을 서두른 것도 화근이 됐어. 빨치산 앞잡이들이 다 고해 바쳤거든. 그리고 나서는 선착순으로 죽였어』

지주-머슴 갈등은 없었다

―생산유격대가 뭔가요.

『인민군들이 자연 부락마다 다 조직해놨어. 생산유격대라는 조직은 인민공화국 조직이야. 그것이 말하자면 후방에서 군인의 역할을 하는 거야. 빨치산은 무기가 있었고 생산유격대는 대창을 들고 다녔어. 무기가 없었어』

―좌익들이 양민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은 있습니까.

『직접은 못 봤지』

―대전리에 제삿날이 같은 집이 많습니까.

『많아』

―가까운 친척 중에는 누가 희생당한 겁니까.

『작은집 식구들이 죽었고… 아까 그게(피살자 명부에 기록된 장씨 300여 명) 다요. 다 장서방네 식구들이니까. 그 명단에 나와 있는 장씨들의 대부분이 나와는 6촌 이내예요. 8촌도 몇 가구가 있고…』

―영광에서 왜 이렇게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한 것 같습니까.

『그 원인을 규명하자면 여순반란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여순반란 사건이 진압되자 반란군에 가담했던 군인들이 어디 갈 데가 없으니까 각 부락으로 잠적해서 빨치산이 된 거니까. 백수면에도 여순반란 사건에 가담했던 군인들이 있었어. 그 사람들이 몰래 돌아와서 세력을 규합해가지고 구수산에 진지를 구축해서 밤이면 습격을 하고 다녔어. 그때는 밤손님이라고 했지. 누구를 죽였냐 하면 주로 군경 가족과 유지들이었어』

―6·25 전쟁 발생 전에 죽은 지역 유지가 있습니까.

『있지. 당장 기억나는 사람으로는 지동현씨라고, 일제 때 보성전문 나온 양반이 있었는데 부농이었지. 그분이 빨치산들에게 피살됐어. 그렇게 빨치산들이 밤에 돌아다니면서 우익 인사들을 죽이고 하니까 좌우 간에 반목이 생길 거 아녀. 또 경찰은 6·25 전에도 사상이 수상한 사람은 3·1절 같은 행사가 열릴 때는 미리 예비 검거를 해가지고 끌고 가서 죽도록 때리고 하니까 좌익들도 감정이 생겼지. 그러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들어오고 나니까 그 사람들이 군경가족 등 우익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한 거야』

―영광의 농토가 꽤 넓던데 지주와 머슴 간의 갈등은 없었습니까.

『여기는 지주와 머슴들의 갈등은 없었어. 지주들이 덕을 쌓은 분들이 많았어. 남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들이었지』

―순전히 이념 갈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말씀인가요.

『넓게 보면 그렇지. 이념 갈등이라고 볼 수 있지. 거기에 감정이 개입된 거고』

장씨는 더 이상의 대화를 원치 않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 기자 일행에게 장씨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내 외가가 염산면 야월리야. 김해 김씨 집성촌인데 피란 온 사람을 하룻밤 재워주었어.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내 외가를 나가다가 빨치산에 잡힌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알아? 외가 식구 15명이 은닉죄로 몽땅 죽었어. 6·25는 정말 기억하기가 싫은 일이야. 기억 자체만으로도 고통을 주니까 말야』

사적인 감정으로 일가족 32명 학살

영광읍 홍곡리에 사는 박남도(박남도·81)씨는 매년 32명의 영령(영령)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 양친 부모, 형님 내외와 조카들 두 명, 큰집 식구들 등 27명이 6·25 때 피살당했고, 작은아버지의 가족 다섯 명은 1949년 초가을 빨치산들에게 학살됐다. 박씨는 이들 영령들을 위해 매년 음력 8월25일에 합동제사를 올리고 있다.

가족들이 학살당할 당시 박씨는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참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박씨는 가족들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이유를 『순전히 개인 감정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일제 때 사촌형이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죽었어. 사촌형을 징용 보낸 게 그 마을에 P씨 성을 가진 구장(이장)이었다나 봐. 큰집에서는 구장에 대한 감정이 쌓였겠지. 해방 후에 큰집 4촌형들이 6형제였는데 죽은 형을 빼고 5형제가 구장네로 몰려가서 항의도 하고 행패를 부렸다나 봐. 「너희 때문에 우리 형제가 죽었다」고 말야. 어느 정도로 심하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쪽에서도 감정이 상했겠지. 그런데 그 구장 아들이 6·25 전부터 공산당 활동을 했었어. 구장 아들로서는 우리 사촌형들의 행패를 가슴에 새겨 두었겠지. 그러다가 6·25 동란이 터진 거야. 해방 후 친일파로 몰려 몰락했던 구장네 집안이 다시 재기를 하게 됐지. 그리고는 큰집 식구들을 반동으로 몰아 죽이고 우리 식구들까지 죽여버린 거야. 우리 가족이 죽을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어』

박남도씨는 가족들의 정확한 피살일자를 모르고 있었다. 피살자 명부에는 박씨 가족들이 1950년 9월19일에 처형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박씨는 그해 10월에 광주에서 대한청년단 영광지부를 조직하면서 단장으로서 경찰과 함께 영광에 들어왔다. 박씨가 대한청년단 단장으로 영광에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고향 마을 사람들은 학살당한 박씨 일가들의 시체를 찾아다가 마을 앞에 진열해 놓았다. 베로 시신을 감아 놓기는 했지만 시신들이 너무 부패해 누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시신이 아버지 시신이고, 저 시신이 어머니 시신이다』고 가르쳐 주는 대로 절을 올렸다.

『그날 산천초목이 떠나가라 하고 울었어. 울어도 울어도 피맺힌 한이 풀어지지 않더군. 가족들과 함께 죽지 못하고 살아 있다는 게 원망스럽기만 했지』

『내 대에서 악연의 고리 끊어야…』

그때의 충격으로 심장병을 얻은 박씨는 지금도 말을 할 때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한다. 맺힌 한을 생각하면 복수를 하고 싶었고, 대한청년단 단장이라는 당시의 지위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자리였지만 박씨는 보복을 단념했다. 자신의 대에서 모든 악연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대한청년단원들 중에 가족의 복수를 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박씨는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고 한다.

실제로 박씨는 멋모르고 부역에 나섰거나 빨치산을 도왔던 영광군 군남면민 2000명을 설득해 자수를 시키는 등 좌익에 가담했던 인사들의 구제에 앞장섰다.

전쟁이 끝난 후 전남도의원을 지낸 박씨는 미군과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 문제가 크게 거론되는 데 불만이 많았다.

『어떻게 미군이나 국군한테 죽은 것만 양민학살인가 말야. 저쪽(공산당) 놈들한테 민간인이 죽은 건 양민학살이 아니냔 말야. 좌익이 양민을 더 죽였지 우익이 더 많이 죽였느냐 말야. 가족이 죽창에 찔려 죽고 몽둥이에 맞아죽지 않은 사람들은 그 유족들의 고통을 몰라.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 같아』

박씨의 불만은 현 정부의 대북정책으로까지 이어졌다.

『나는 대통령이 지금처럼 북한을 돕는 거 못마땅해. 우리 경제가 성장해서 이북을 관리할 수 있는 여건이 됐을 때 도와야지. 우리 남한만 해도 결식학생이 얼마나 많아. 이북에 줄 돈으로 그 아이들을 도우란 말야, 내 얘기는』

기자는 박씨와의 인터뷰 중에 영광지역에서의 민간인 학살이 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기자는 백종옥 전무의 도움을 받아 박씨의 집을 찾아갔다. 박씨와의 인터뷰에는 백전무도 자연스럽게 동석을 하게 됐다. 박씨와 백전무는 6·25 전쟁 때 가족이 입은 피해의 정도를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서로 알게 되었다. 박씨의 말.

『백전무와 내가 서로 알고 지낸 지 오래됐고, 둘 다 지역유지라면 유지인데 지금까지 이렇게 서로의 피해를 모르고 살았어. 빨리 잊기 위해서 말을 않고 살았던 거지. 우리뿐만 아니라 다들 그래』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에 사는 안희주(안희주·76)씨는 스물네 살에 6·25를 맞았다. 당시의 주소는 염산면 상계리. 안씨 집성촌으로 영광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숙청이 심했던 곳』이다. 안씨는 6·25 때 어머니와 네 형제 등 20명의 가족을 잃었다. 아버지는 안씨가 초등학교에 재학 중일 때 사망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안씨 형제들의 경우는 한 집에 한 명씩은 조카들이 학살을 모면해 대를 잇게 됐다는 점이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안씨는 광주사범학교 졸업반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농사를 짓고 있었고, 바로 위의 형이 면서기를 했다. 좌익들에게 크게 꼬투리를 잡힐 환경은 아니었다. 안씨는 인민군들이 광주에 들어오기 직전에 광주를 탈출해 학도병으로 입대했다. 경찰이 영광지역의 치안을 회복한 1951년 2월에 학도병으로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염산면과 백수면에서는 빨치산 토벌작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고향에서 그가 만난 것은 가족들의 처참한 죽음이었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한 번 무너졌던 안씨의 가슴은 또 한 번 무너졌다. 자신이 학도병으로 입대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좌익들이 안씨의 가족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노인이든 애든 가릴 것 없이 같은 성씨면 한 구덩이에 몰아넣고 죽였다는 거야. 누구 하나를 죽여야 한다면 그 가족 전체를 죽인 거지.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이 있잖아. 가족들이 학살당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그랬어』

부인과 아들, 손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목사를 참살

안씨는 위안을 삼으려는 듯 염산면 축동리 동산부락의 박씨들, 같은 축동리 축장 마을의 김해 金씨들, 염산면 반암리(현재는 군남면)의 한씨들도 멸문지화(멸문지화)에 가까운 학살을 당했다는 말도 곁들였다.

염산면에는 이웃 함평군까지 이어지는 월암산(338m)이 있다. 염산지역 빨치산의 본거지가 됐던 곳이다. 월암산 밑에 오동리는 남조선 노동당 지하총책이었던 김삼룡의 고향으로 그를 추종하는 지역 빨치산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염산면은 이곳 사람들이 6·25 전쟁 때 염산면 사람들의 절반은 죽었을 것이라고 증언을 할 정도로 좌익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백수면의 빨치산들이 칼이나 죽창으로 양민을 학살한 반면 이곳의 빨치산들은 설도항에다 산 채로 수장(수장)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목에 돌을 매달아 바다로 던져버린 것이다. 일가족이 몰살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염산면에서는 특히 기독교인들에 대한 집단 학살이 많았다.

영광군내에서 신도들이 가장 많이 학살된 교회는 염산면에 있는 염산교회다. 염산교회는 전교인의 3분의 2가 넘는 77명이 학살당했다. 염산교회 학살 사건도 9·28 수복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염산교회 김태균(47) 담임 목사가 전하는 당시의 이야기다.

서울 수복 이후 영광에도 국군과 유엔군이 곧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익청년들은 9월29일, 이들을 환영하는 대회를 열었다. 이때부터 좌익들의 보복이 시작됐다. 그해 10월7일 좌익들은 염산교회에 불을 지르고 기삼도씨를 비롯한 청년 신도들 다섯 명을 잡아갔다. 기삼도씨는 좌익들의 죽창에 찔려 죽었고, 나머지 청년들은 새끼줄에 서로 얽혀 매인 채 바다 속으로 던져졌다.

10월8일에는 이 교회 집사였던 노병재씨 일가족 아홉 명, 동생인 노병인씨의 일곱 식구, 역시 동생인 노병규씨의 식구 일곱 명이 설도 수문에 수장된다. 노씨 일가만 23명이 같은 날 학살당한 것이다. 노씨 일가 외에도 김동곤 장로의 일가족 등 수많은 염산교회 신도들이 바닷물에 던져졌다. 그 가운데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1950년 3월에 염산교회 3대 목사로 부임한 김방호 목사 일가의 죽음은 끔찍함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교회가 소실되고 신도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김목사는 한 신도의 집에 지하교회를 만들어 예배를 드렸다.

10월26일 좌익들이 지하교회를 덮쳤다. 그들은 김목사의 부인, 아들, 손자 등 여덟 명의 가족을 한 줄로 세워 놓고 김목사의 아들들에게 몽둥이를 주면서 김목사를 치라고 했다고 한다. 김목사의 아들들은 차마 아버지를 몽둥이로 치지 못하고 『함께 죽여 달라』며 애원을 했다. 좌익들은 김목사의 아들들을 발로 차버린 후 직접 몽둥이와 죽창을 들었다. 그들은 김목사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패서 김목사를 살해했다. 그 뒤를 이어 김목사의 부인, 아들, 여덟 살과 다섯 살이었던 손자들이 차례로 그들의 몽둥이에 맞고 죽창에 찔려 죽었다.

같은 염산면의 야월교회도 좌익들에 의한 집단학살이 벌어진 곳이다. 교인 65명이 학살당했다. 염산교회의 피살자 77명보다 숫자는 적지만 학살당한 65명은 당시 야월교회의 신도 전부였다. 전교인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야월교회에서 학살이 발생하게 된 배경은 염산교회와 같다. 청년 신도들이 국군과 유엔군 환영대회에 참석을 한 것이다.

살해하는 방법은 달랐는데 야월리에 난입한 빨치산들이 전교인을 교회에 모아 놓고 석유를 뿌린 후 교회당과 함께 불태워 죽였다고 한다.

현재 염산교회는 이 교회의 신도로서 좌익에 학살된 77명의 영혼을 기리는 기독교 성지(성지)로 꾸며지고 있다.

영광경찰서에서 보도연맹원 186명 처형

영광 사람들 중에는 영광군에 피살자가 많은 이유를 좌익들의 무자비한 살육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보도연맹 처형 사건과 관련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도연맹은 광복 후 좌익 운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된 단체로서 1949년에 조직됐다. 1949년 말 현재 전국적으로 30만여 명이 가입해 있었다. 6·25 발발 후 정부와 경찰은 이들이 인민군에 동조할 것을 우려해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했다. 이른바 보도연맹 처형이다.

이 보도연맹 처형사건은 영광군에서도 일어났다. 영광군 군서면에 사는 조영표씨는 영광읍에서 보도연맹 처형이 일어난 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조장현)가 보도연맹원이었고, 그날이 부친의 제삿날이기 때문이다. 음력으로는 1950년 5월24일이고 양력으로는 7월9일이다. 인민군이 영광에 들어오기 14일 전이다.

조씨는 『아버지는 공산주의자 밑에서는 살 수 없는 자유주의자였다』면서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이 나를 너무 아프게 한다』고 말했다. 조씨는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한 보도연맹원들이 영광에서만 200여 명쯤 될 것』이라면서 『보도연맹원들이 희생당함으로써 그 가족에 의해 보복이 있었고, 또 그 보복에 대한 보복이 이어지면서 영광군민의 희생이 더 커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영광군 번영회 서단(서단·74) 회장도 조씨의 생각과 비슷했다. 서회장은 『영광에서 학살당한 보도연맹원의 친척이 되는 백수면 출신의 정황삼이라는 사람이 「삼각산 유격대」라는 부대를 끌고 와서 「반동」이라고 죽인 사람이 꽤 된다』면서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함으로써 먼저 민간인 학살의 동기를 부여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서회장은 또 『영광경찰서에서만 186명의 보도연맹원이 처형됐고, 백수면 등에서도 보도연맹원 처형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희생된 보도연맹 숫자는 그보다 더 많을 것』이라면서 『좌익보다는 우익에 의한 민간인 피살자가 더 많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회장이 추정하는 좌우 민간인 피살자는 3만8000여 명이었다.

조남식(조남식·71) 영광문화원장의 생각은 달랐다. 조원장은 영광군의 민간인 피살자가 많이 발생한 원인을 다른 지역에 비해서 늦은 수복에서 찾았다.

『영광은 다른 지역보다 수복이 한 달 정도 늦었습니다. 지리산으로 못 들어간 빨치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끊긴 인민군 잔당들이 모여든 곳이 영광입니다. 바닷가치고는 제법 높은 산도 있고 유사시에는 바다를 통해 북으로 갈 수도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1951년 2월20일에 우리 아군에 의해 구수산 갓봉이 점령될 때까지 영광의 낮과 밤을 경찰과 번갈아 가며 지배할 수 있었던 겁니다. 유엔군 환영대회 등 여러 가지 다른 요인도 있겠지만 적들의 침략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진 만큼 민간인들의 희생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요』

『좌우익 합쳐서 3만여 명 죽었다』

조원장의 영광군 민간인 피살자 추정치는 좌우익을 모두 합쳐 3만명이었다.

영광군 순교자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펴낸 문건 「한국전쟁(6·25 동란)과 영광지방 순교자 현황」에는 영광군의 당시 피해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국군들이 영광읍내에 진주한 1950년 10월30일경에는 영광읍 전체가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사망자 수만 하더라도 군민 13만 중 3만여 명을 헤아렸는데, 그 중에서도 염산면 일대는 1만여 면민 중 목숨을 잃은 자만 5000여 명이 넘었으니 그 당시 영광군 일대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피살자를 3만여 명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수치는 정확한 통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황 등 추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조남식 원장은 『지금까지는 영광지역에서 6·25 전쟁 때 발생한 민간인 피해 상황이 통계 등으로 정리된 것이 없으며 피살자의 명단이 공개된 적은 더더욱 없다』고 말했다.

영광신문 이근철(36) 문화팀장은 『그동안 많은 사람이 전쟁 중에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우리 영광에서만 2만명이 넘는 민간인이 죽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면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는 『해방 이후 내려오던 좌우익 갈등이 전쟁으로 더 심화될 수 있었고 그런 것들이 좌우 상호간의 살육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팀장은 영광의 지역적 특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영광은 개화기에 유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선진화한 곳이었습니다. 1920년에 이 벽지에 영광중학교 설립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을 정도로 깨어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1921년에는 영광유치원이 개설되기도 했습니다. 광주하고 가깝게 있지만 독자적인 문화행태를 가진 곳이기도 합니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그로 인해서 남을 배척하는 심리가 강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군민 내에 갈등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영광은 좌우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되지 못한 곳입니다』

기자는 충심으로 이 기사가 영광군민들의 새로운 반목을 낳는 불씨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픈 상처를 드러내어 서로를 치유해 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다. 영광군민들의 화합을 위해 서단 회장은 이런 제안을 하고 있다.

『영광군민의 총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6·25 때 입은 상호간의 피해 때문입니다. 마음의 앙금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거죠. 이제는 피아간에 앙금을 푸는 군 차원의 행사가 필요합니다. 희생자들을 위한 천도제를 합동으로 드린다거나 종교 합동으로 위령제를 지내는 것도 한 방법일 겁니다』●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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