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자료

천국에도 차이가 있다 - 정훈택, 총신 신약교수

작성자
(총신)
작성일
2022.01.10


(정훈택 교수님 소개)

■ 정봉조 목사님의 아들
1912년생이며, 거창의 웅양초등학교를 함께 다녔고 5학년 때는 백 목사님과 한 반 친구가 되어 신앙의 좋은 모습을 보여 백 목사님이 신앙 생활을 하도록 도왔고 평생 설교에서 그 때를 회고했던 분이 정봉조 목사님입니다. 그는 한국교회 최대 교단이며 수백 개로 쪼개진 합동교파에서 71~81년에 은퇴할 때까지 10년간 교단 총무를 맡았던 교계 거물급 목사님입니다.

정봉조 목사님의 자녀는 11명이어서 목회자의 고생하던 시절을 설명할 때 늘 예화로 들었습니다. 1952년생인 9남이 총신에서 최초로 화란의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정훈택 신약학과 교수님입니다. 호박만 먹었던 어린 시절 때문에 호박 성분이 들어 간 음식도 어떤 음료조차 마시지 못한다고 회고할 정도입니다.

■ 대표논리 : 천국의 격차
정 교수님이 우리에게 특별한 것은 '성도의 충성은 천국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보상론'을 주장했습니다. 합동교단의 총신대 안에서 오랜 세월 많은 논문을 통해 믿는 사람은 천국을 들어 가지만 '보상'은 각각 다름을 총력적으로 전개했습니다. 비록 총공회의 건설구원과 백영희 목사님의 입장을 밝힌 기억은 없으나 따질 것 없이 반갑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홈이 백영희 신앙전기를 위해 그 부친 정봉조 목사님의 신상 자료를 부탁하자 백지 위임장을 맡겨 호적부터 초등학교에서 신학교까지 모든 성적 증명서를 다 발급 받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정 목사님은 총신대 부총장과 총장대행까지 역임했던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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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론 어떻게 볼 것인가 1~4 / 정훈택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글쓴이: MCDNA 유포자
조회수 : 1
2008.06.23 21:28
http://cafe.daum.net/mcdna/JRbL/12 목회와 신학에 연재된 상급론 어떻게 볼 것인가 1~4
정훈택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첨부파일은 A4 13쪽 한글 문서입니다.


상급론, 어떻게 볼 것인가?


정훈택



## 시작하며

기독교 신앙의 역사가 수천 년에 이르는 유럽에서 살다보면 신자들이 -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 누구보다도 양심적이고 도덕적이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모습들은 어려서부터 오직 생존경쟁에서 이기고 앞서기 위해 배우며 익히는 한국식 삶을 살아온 우리에게는 - 같은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 심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서구 교회가 쇠퇴 내지 몰락해 가고 있다는 일부 지적도 있지만, 간략하게 “양심적이고 성실하게 그리고 사회 선도적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적 삶”으로 분석하는 유럽형 신앙생활에 비해볼 때 한국형 신앙생활은 허황된 면이 적지 않다. 현세 기복적 사고와 생활이 신자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어서 과정과 방법을 중요시하지 않고 결과와 성과에만 치중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오래 지적되어 온 우리의 문제점이다. “꿩 잡는 것이 매다”는 속담은 개인의 삶에 만이 아니라, 전도와 목회에도 마치 진리인 것 마냥 통용되고 있다. 부정, 거짓, 술수, 모함 등을 마다않고 “하나님의 축복”인 출세와 성공과 부와 영광을 일궈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목회의 성공여부, 삶의 성공여부는 오직 결과가 말해줄 뿐이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적 삶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땅에 떨어져 썩어져 가는 한 알의 씨”나 “땅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 또는 “세상을 밝혀주는 빛”이 아니라 그 반대인 “맛을 잃은 소금”, “빛을 가린 등불”로 전락하고 있다. 진실과 성실이 아니라 모험과 대박의 꿈이 우리 기독교인의 삶과 사역을 지배하는 것이다.

성경을 근거로 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이렇게도 다르다. 한국에서 자라 예수님을 믿게 되고 성경을 배우고 신학을 공부한 후, 그리고 더 공부하면서 만난 유럽 기독교 사회는 필자에게 우리의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그 밑에 깔린 - 선배들이 배워주고 물려준 - 한국의 보수적 신앙과 보수적 신학 자체를 면밀히 검토해야 하겠다는 동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무엇이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지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와 과제를 안겨주었다.

하나님을 믿으며 한 사회의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한 우리는 겸손하게 서구 사회를 배워야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곳에도 지적하고 수정해야 할 문제점들이 적지 않지만 서구 기독교 사회와 그 사회에서의 삶은 우리가 배워야 할 많은 기독교적 요소들과 바람직한 삶의 모델들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적 삶을 한 방 대박으로 생각하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루하루 꾸준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 차이를 필자는 “성실한 삶”과 “허황된 삶”의 차이로 요약하고 싶다.

어디에서 이러한 차이가 왔을까? “성경을 잘 몰라서”나 “성경대로 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답은 피상적이다. 아니 틀린 답이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성경을 더 많이 읽고 더 열심히 공부하며 더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만큼 축자적으로까지 성경을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또 있을까? 성경에 대한 우리의 열심은 가히 세계 톱 수준이다. 따라서 “성경을 몰라서”나 “성경대로 하지 않아서”는 그 근본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

성경의 사용과 성경에 대한 사랑에 눈을 돌리면 오히려 정 반대의 답에 도달한다. 즉 성경을 더 사랑하고 더 애용하는 우리 한국 신자들이 성경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성실한 삶보다는 허황된 삶을 쌓아가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을 비평하고 고대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맞추어 분석하며 그 중에서 눈에 좋아 보이는 것만을 취사선택하여 현대적 삶에 적용하는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더 성실한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평가가 내려진다.

그렇다면, 고전적 성경관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언제라도 인생의 황혼에서 신앙의 만루 홈런을 치는 그런 종류의 삶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기독교인들이 성실한 삶을 추구하려면, 따라서, 성경을 좀 덜 보며, 좀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성경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하면서도 적당히 얼버무리는 소위 자유주의적 태도를 익혀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원인은 우리가 성경을 너무 많이, 너무 철저하게 문자적으로 보는 것에 놓여 있지는 않다. 우선 이 점을 지적하고 싶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성인으로 성장한 다음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한국 교회가 성장해 왔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멋대로 살다가 삶을 마감하기 전에 극적으로 주님을 만나 갑자기 천국을 소유하는 그런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우리가 “허황된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경험하는 인생의 대 역전 드라마였다. 그래서 누구나 이러한 삶을 당연시했고 또 누구나 그렇게 변화되기를 기대해왔으며 그것을 정상적인 기독교적 삶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란 멋대로 살면서 실패를 경험하다가 복음을 듣고 갑자기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것이다.

교회 역사가 백 년 이상 이어져 오는 동안 한국교회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인생의 역전 드라마를 경험하는 바울식 회심보다는 믿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찬송을 익히고 기독교적 분위기를 좋아하며 아빠를 부르듯이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경을 자신의 사고와 존재의 틀로 가진 그런 신자들이 훨씬 더 많은 시대가 되었다. 이들은 신앙생활을 인생의 기막힌 역전 드라마로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적 삶은 이제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어머니의 태로부터 차곡차곡 배우고 익히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의 눈에는 멋대로 살다가 하루아침에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돈과 명예와 출세만을 꿈꾸다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늘의 영적 축복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어느 모로 보거나 “허황된 삶”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기독교적 분위기가 이렇게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기독교적 삶이 계속 대박을 손에 넣으려는 것처럼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것이 지금 우리가 던지는 질문의 핵심이다. 성실한 삶이 아니라 뜬 구름 잡는 것 같은 신앙생활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것.

성경을 곧이곧대로 읽고 외우고 공부하며 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경건한 자세로부터 바로 “우리의 허황된 기독교적 삶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바른 삶이 아니라는 것도 정확하게 옳은 말이다. 성실한 삶을 요구하는 성경에서 허황된 삶이 비롯되는 이 현상의 최 근저에 필자는 한국식 “상(賞)의 신학” 즉 “상급론(賞給論)”이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글 성경의 오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 성경은 “삯의 신학” 즉 보상론(報償論)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한글 성경에 오역된 부분들을 수정하고 이 수정에 필요한 신학적 과제를 떠안고, 즉 성경적, 개혁신학적 보상론을 정립하고 이에 맞추어 살아간다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을 성실한 삶으로 회복시키는 것은 - 유럽형 기독교인들에게만이 아니라 -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가능하다. 이 글은 왜 “상의 신학”/“상급론”이 잘못이며 “삯의 신학”/“보상론”으로 수정되어야 하는지를 밝히려는 것이다.






“상(賞)의 신학”



1. 그 진술

“상(賞)의 신학”은 흔히 “상급론(賞給論)”, 또는 “차등상급론(差等賞給論)이라 불린다. 한국교회에는 아주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어서 교인들 중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고 교리적 차원에서 신봉(信奉)되고 있다. 필자도 어릴 때 어떤 부흥회에서 이런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얼마나 감명이 컸던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면 대부분이 알고 있는 소위 천국의 개털 모자 이야기이다.

어떤 장로님이 꿈에 죽어서 천국에 갔다. 천국 문에서 천사가 개털 모자를 주기에 얼른 받아 머리에 쓰고 기쁘게 천국에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천국에는 개털 모자를 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금 면류관 아니면 은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장로님은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어 그를 안내하던 천사에게 “왜 나에게만 개털 모자를 주었느냐”고 항의했다. 천사가 그에게 “당신은 세상에서 믿기만 했을 뿐 상을 얻을 만한 어떤 일도 한 적이 없어서 금이나 은으로 만든 면류관은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예수를 잘 믿고 상을 얻을 일들을 많이 한 신자들은 화려한 면류관을 쓰지만 그렇지 않고 겨우 믿음만을 지킨 신자들은 영원히 개털 모자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끄러운 구원이며 겨우 자신의 영혼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 장로님은 그 다음날부터 열심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았고 교회에서도 헌신적으로 봉사했다는 이야기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이 개털 모자 이야기는 아직도 한국교회에 맹렬히 회자되고 있다. 여기 저기 조금씩 다르게 손질된 여러 버전들이 계속 확산되고 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청년들에게, 미래의 설교자나 목회자를 꿈꾸는 신학생들에게 교육용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이야기에 내포되어 있는 내용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천국(천당)에 간다. 한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게 되는 근거는 예수님을 믿음에 있다. 누구나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죄인을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의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이며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천국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인간의 공로는 크든지 작든지, 혹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구원을 얻음 혹은 의인으로 간주됨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구원(영생)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그의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대속하셨기 때문에 - 예수님의 대속은 구원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므로 - 어떻게 살아도 삶이나 행동 자체는 신자의 구원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현실적인 죄는 매일의 회개를 통하여 정리할 수 있다. 즉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신자들이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을 얻는 그의 신분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신자들은 자신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죄도 짓지 않는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신자들이 삶에 대한 어떤 경각심도 없이 아무렇게나 살고 마구 죄를 지어도 좋다는 자유나 방종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 삶은 구원 얻음에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천국에 들어가서의 상급과 관련되어 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성경이 교훈한 대로 산 신자들은 천국에서 큰 상급을 받는다. 금 면류관 내지 은 면류관을 쓰는 영광스러운 구원이다. 그렇지 않고 매일 죄나 짓고 또 회개하고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지 못한 신자들은 구원을 얻기는 하지만 마치 불에서 타다 남은 숯검정을 건져 올리는 것처럼 부끄러운 구원을 얻는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이 결정하지만 천국에서 어떤 상을 받을지 그 영광의 차등은 그의 삶, -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되는 - 인간의 일, 노력, 공로가 좌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천국에서의 영광스러운 상을 바라보며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 더 큰 상, 더 많은 상, 더 화려한 영광을 얻으려는 것은 이 땅에서 구원을 이미 얻은 사람들의 거룩한 삶을 감독하는 하나님이 주신 자극제, 즉 윤리적 동기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상급론을 다루면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를 읽어내려는 해석(exegesis)보다는 성경 구절들 안에 개인의 특수한 생각을 몰아넣는 자기 해석(eisegesis)의 위험이다. 그래서 종종 상급론을 긍정하는 글들을 보면 인간의 노력이 (차등)상급의 근거라고 말하면서도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공로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설명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써두었다. 그러나 이런 자기 해석은 헬라어와 히브리어 단어의 잘못된 번역에 근거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2. 논거

성경이 천국에서의 (차등)상급을 말한다고 인용되는 구절들은 상당히 많다.

한글 개역 성경에 “상급(賞給)”, “상(賞)”, “상주다(授賞)”, “상받다(受賞)” 등 상과 연관된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마흔 넷이다. 이 중 서른여덟 구절이 상의 신학/상급론을 지원하는 구절로 다루어진다. 면류관(冕旒冠), 관(冠), 화관(花冠) 등은 상징적 의미로 상을 지원하는 구절로 취급되는데 한글 개역 성경에 이 단어들은 모두 일흔 일곱 번 나온다. 그 중 상의 신학/상급론이 그 지원 구절로 취급할 수 있는 구절은 모두 열다섯이다. 이런 직․간접적인 증거 이외에도 아래와 같은 논거가 제시된다.

신약성경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언급된 곳은 모두 천당과 지옥, 영생과 영벌이 아니라 천국 안에서의 (차등)상급을 말하는 구절로 해석된다. 상급론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렇게 마태복음 12장 36-37절: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판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16장 27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고린도후서 5장 9-10절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받으려 함이라”를 차등 상급을 말하는 증거구절로 꼽았다. 또한 고린도전서 3장 10-15절은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터전 위에 금, 은, 나무, 풀, 짚으로 건물을 짓는데 마지막 날 나타날 불에 그 공력 즉 일이 남아 있으면 상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불 가운데서 건짐을 받는 것 같은 구원을 받는 것을 말하는 차등 상급론의 아주 강력한 증거구절이다. 마태복음 5장 10-12절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천국에서 누가 큰 지를 다루는 마 18:1-4; 눅 19:11-27의 므나 비유; “선지자의 상”, “의인의 상” 등이 언급된 마 10:40-42도 “차등 상급의 증거구절들”이다.

요약하면 상급론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한글 개역 성경에 “상”, “상급”이란 용어가 사용된 모든 구절들, 심판이 언급된 많은 구절들, 면류관이 상징적, 신학적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되는 모든 구절들을 천국 안에서의 상, 상급의 차등을 말하는 증거구절로 열거한다. 천국과 관련하여 “크다”나 “작다”는 형용사가 사용되면 이에 비교될 만한 다른 상태가 계단의 각 단계처럼, 상의 차등을 전제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심판, 벌 등을 구원, 천국의 반대어로 이해하지 않고 천국 안에서의 상급에 대한 반대어, 즉 작은 상급 내지 부끄러운 구원을 결정하기 위한 천국 안에서의 심판으로 분석한다. 가장 강력한 증거구절로 제시되는 것은 고후 3장 9-15절과 고전 9장 16-27절이다.



3. 무엇이 상(상급)인가?

상급론에서 주장하는 상은 다양한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핍박당한 자의 상, 선지자의 상, 의인의 상, 전도자의 상, 유업의 상, 큰 상, 일한 대로의 상,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 태의 열매,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적인 축복의 향유(enjoyment), 기도의 응답, 하나님의 칭찬, 생명과 의식주 등 다양하다. 그러나 대부분 명칭만을 구분하였을 뿐 무엇이 천국 안에서 주어지는 상인지 구체적으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 상급론이 신자들의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 다른 신학 주제와 결합하여 훨씬 더 다양해지고 풍부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구체적인 상급 항목의 확대나 다변화는 별 경각심 없이 교인들에게 감동을 불어넣으려는 설교자들이나 부흥사들을 통하여 더욱 강하게 자극된다.

예를 들어, 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현세적 상으로 구분된 “기도의 응답”, “생명과 의식주” 혹은 세상에서 누리는 “영적 축복” 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설명하려 할 경우, 더욱이 현세 기복적 축복관과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까지 잘 되는 삼박자 구원론’과 상급론을 결합할 경우, 물질, 건강, 장수(長壽), 가정의 행복, 사업의 성공, 출세와 명예 등 소위 번영신학이 선호하는 모든 개념들을 하나님의 상으로 정의(定意)하고 이런 것들을 기독교인의 삶에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선하고 거룩한 신앙생활을 더욱 강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구약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교훈을 통해 성취/완성된 것으로 읽지 않고 그 대부분의 내용을 신약시대에도 계속되고 있는 기독교적 삶의 원리로 읽으며 상급론과 결합할 경우 무엇이 상(상급)으로 고려되고 추구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답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대된다. 돈과 땅과 재물, 재산을 더 많이 소유하는 것, 권력을 쟁취하고 행사하는 것 등 행복한 삶의 모든 요소나 조건들이 상(상급)의 범주에 들어오고 신자들의 일상적인 삶에 그 영향력을 미치게 될 수밖에 없다.

신학 연구, 신학 토론, 혹은 후학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학적 세계에서 상급론은 그렇게 중요한 주제로 부상한 적은 아직 없다. 즉 상급론은 아직 신학적 인기를 얻어내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의 실생활의 세계에서 상급론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허황된 신앙생활”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았다. 기독교인들이 성실한 삶이 아니라 꿈을 따라가고, 뜬 구름을 잡으며, 한탕주의식 삶을 추구하게 되는 이유는 상급론이 보장하는 ‘상의 범위’가 거의 무한대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상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간의 나라로, 하늘의 나라에서 땅의 나라로, 미래의 세계에서 현재의 세상으로, 그리고 영적 축복의 영역에서 육적, 물질적 축복의 영역으로 마구 이동, 확대하고 다양화, 다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넓게 열려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할 경우 사람들에게 좋아 보이는 모든 것을 - 적당한 성경 구절을 근거로 하여 -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상급, 하나님에게 받은 상/상급으로 규정하고 추구할 수 있다. 흔히 기독교의 세속화라는 이름 하에 부정적이고 비평적으로 거론되는 현실적, 물질적, 사회적 영역의 모든 행복의 요소가 신학적 근거와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4. 상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상급론이 하나를 심어 하나를 가꾸는 성실한 삶이 아니라 하나를 심어 열을 거두려 하고 인생의 대박을 터뜨리려고 하는 허황된 삶을 만들어 낸다는 가정을 위에서 제시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단순한 가능성이나 기우가 아니라 우리가 현실 교회에서 만나는 실제 상황임을 서술한 바 있다. 그런데, 왜 그런가? 상급론이 어떻게 허황된 삶의 근거나 자극제가 될 수 있는가?

“상” 개념 자체가 그런 불씨를 품고 있다. 즉 심은 것 이상의 과다한 열매를 주는 것, 받는 것, 기대하는 것, 그리고 기대하게 하는 것이 “상”이다. 자연스러운 결과나 당연한 귀결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나 귀결에 붙어 오는 것, 더 주는 것이 “상”이다. 그래서 상급론을 추종하는 사람은 하나를 심어 열을 거둔다는 생각, 일종의 투자심리의 지배를 받게 된다. 작은 것을 뿌려 그 결과를 얻을 뿐만 아니라 더 큰 것을 덤으로 벌어들인다는 “상”의 기본 의미가 상급론에서는 유한을 들여 무한을 상으로 받는다는 식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상” 개념을 분석해 보자. 상이란 무엇인가? 어떤 일에 대한 보상(報償)으로 주어지는 칭찬, 물건, 돈 등 그 대가(代價)이다. 사전적 정의를 따르면 “잘한 일에 대하여 칭찬하는 표식, 뛰어난 업적이나 잘한 행위를 칭찬하기 위하여 주는 증서나 돈이나 값어치 있는 물건”이다. 돈으로 주는 것을 “상금(賞金)”, 물건으로 주는 것을 “상품(賞品)”, 증서를 주는 것을 “상장(賞狀)”이라고 부른다. “상급(賞給)”이란 무엇을 주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상으로 주는 돈이나 가치 있는 물건”을 뜻한다. 동사로 사용할 때 “상받다” 즉 “수상(受賞)”이나 “상주다” 즉 “수상(授賞)”이 된다. “상타다”, “포상(褒賞)”이라는 용어도 있다.

“상”은 어떤 원인을 전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좋은 일이거나 잘한 일이라는 가치 평가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상이 주어지거나 상을 탄다. 원인으로서의 잘한 일, 착한 일과 결과로서의 상 줌, 상 받음이 끊을 수 없는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설명해도 좋다. 원인이 될 아무런 일이 없으면 물론 상도 없다. 잘못한 일에는 벌이 따른다. 잘한 일에만 상이 있다. 상급론은, 따라서 “상선벌악(賞善罰惡)” 사상의 한 부분이다. 하늘이, 아니면 운명이나 무형의 힘이, 혹은 인생을 지배하는 어떤 신이 그렇게 한다는 한국식 전통 사고를 만물의 창조주요 예수를 보내어 우리의 죄를 대속케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기독교식 신학으로 표현하며, 그 부정적 부분 즉 “벌악” 부분을 살짝 떼어내고 그 긍정적 부분 즉 “상선”만을 남겨 놓은 것이 상급론이다.

원인과 결과, 잘한 일과 상의 인과관계는 일의 자연스런 진행에, 다른 한 외부적 요소가 개입하여 만들어진다. 그것이 잘 한 일임을 널리 알리고 모두에게 권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잘한 것임을 확신시키며, 계속 그렇게 잘 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또는 다른 사람들도 그런 일을 본받도록 권고하기 위하여 상을 준다. 칭찬, 권장이라는 미래를 향한 의도성이 없다면, 즉 과거에 잘한 일에 대한 단순한 보답일 뿐이라면 대체로 상은 주어지지 않거나 질이나 양에 있어서 훨씬 축소된다. 반대로 잘못한 일에 대해서도 그것이 잘못임을 알리려는 광고성,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경고성,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일을 본받지 않게 하려는 경계성이 개입하여 벌이 주어진다. 미래를 향한 이러한 의도가 없다면 즉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보상일 뿐이라면 대개 벌은 축소되거나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상급론은 “권선징악(勸善懲惡)” 사상의 한 부분이다. 하늘이, 아니면 운명이나 무형의 힘이, 혹은 인생을 지배하는 어떤 신이 그렇게 한다는 한국식 전통 사고를 만물의 창조주요 예수를 보내어 우리의 죄를 대속케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기독교식 신학으로 표현하며 그 부정적 부분 즉 “징악” 부분을 살짝 떼어내고 그 긍정적 부분 즉 “권선”만을 남겨 놓은 것이 상급론이다.

따라서 상은 앞 세대가 새로운 세대를 그들의 의도대로 키워나가는 수단의 하나다. 상선벌악과 권선징악에서 그 긍정적 부분만을 다루도록 변형하며, 앞 세대 대신에 창조주 하나님을, 새로운 세대 대신에 기독교 신자들을 대입한 것이 상급론이다. 상급론은 현실적 천국과 내세적 천국 이후의 문제만을 그 내용으로 삼음으로써 상선벌악과 권선징악이 (한 사회의) 모두를 대상으로 하던 것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도록 바꾸었고, 그렇게 기독교 신자들의 윤리적 동기가 되도록 변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원인의 자연스런 진행과 그 결과에 개입하는 외부적 요소 즉 미래와 다른 사람을 향한 교육적 의도나 사회 선도적 목적이 일과 상의 인과관계를 자연적인 가치 이상으로 끌어올렸다는 사실이다. 즉 좋은 일이 이루어낼 수 있는 자연적인 가치에 칭찬, 권고라는 인위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전혀 새로운 가치를 가진 “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나 잘한 일에 대한 보답 내지 보상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상”은 - 칭찬과 권고라는 사회적, 교육적 의도 때문에 - “더 주는 것”, “더 받는 것”이다. 이 때 미래를 향한 의도성의 강도(强度)나 고려되고 있는 사회의 범위에 따라 “상”에 첨가되는 가치나 상의 규모는 일정한 규칙을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유동적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상이 무엇인지를 경험으로 익혀왔다. 우유를 잘 마셨다고, 혹은 젖을 잘 빨았다고 엄마는 아기에게 칭찬을 하고 쓰다듬어 주거나 꼭 껴안아 준다. 아기가 음식을 먹는 것은 - 아기의 성장과 발육이라는 관점에서 - 잘한 일이다. 음식을 먹는 착한 일은 그 자체로 아이의 성장, 발육이라는 인과관계의 결과 혹은 보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엄마는 아이에게 그 이상의 것을 제공한다. 언제라도 우유를 잘 마셔야 하고 젖을 잘 빨아야 한다는 교육적 가치를 첨가한 결과이다. 엄마의 의도는 그 아기만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상은 아기가 감당할 만한 것으로 제한된다. 유치원, 초등학생이 되면서 상은 조금씩 커진다. 성인이 되면 과거에 상이라고 부르던 것은 더 이상 “상”의 가치를 가지기 어렵게 된다. 웬만한 상급으로는 착한 일, 잘하는 일이란




5. 분석과 논평

한국식 상의 신학/상급론은 다른 어느 기독교 세계에서도 그 발생과 흥왕의 유래를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어디에서도 기독교적 삶을 위해 선풍적 인기를 누린 적이 없었다. 상의 신학/상급론은 성경이 한국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며 탄생시킨 한국의 순수 토속적 신학 주제이다. 로마 캐토맄 교회 즉 천주교의 공로 사상에 반기를 들며 개혁자들이 종교개혁 시기에 몰두했던 주제는 상의 신학/상급론이 아니라 삯의 신학 즉 보상론(報償論)이었다.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공로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이 한 사람을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는 조건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상의 신학/상급론은 인간의 노력을 구원의 공로로는 제시하지 않지만 천국에서의 더 큰 영광, 더 큰 상급과 연결하여 인간의 삶을 자극하려 하는 것으로 천주교 신학의 공로주의와 개신교 신학의 은혜주의를 교묘하게 절충한 것이다. 인간의 구원과 그 영광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하는 개신교 신학처럼 상의 신학/상급론은 구원에 있어서 만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인정한다. 이 점에서는 분명 개신교 신학의 냄새를 풍긴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영광스러운 상태를 상이나 상의 차등과 결합함으로써 인간의 노력을 - 개신교가 전적으로 은혜의 영역으로 돌리던 것과는 달리 - 신적 무엇의 조건으로 내세움에 있어서는 천주교 신학에 동조하고 있다.

천국에서의 화려한 영광을 말함으로 상급론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축복을 강조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천국에도 부끄러움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공로가 될 만한 일들, 즉 상급을 받을 일들을 일구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 믿음이 지시하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십자가에서 흘린 그리스도의 피, 그 하나님의 일을 믿는 것이 가져올 수 있는 것은 - 물론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영광이지만 - 천국의 부끄러움뿐이다! 한 편으로는 예수님이 하신 일, 그리스도의 생애에 성취된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영광의 차등 그리고 겨우 불타다 남은 숯검정과 같은 구원이라고 그리스도의 일과 믿음을 고의적으로 평가절하하고 있다.

앞에서 잠시 논한 것처럼 상의 신학/상급론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인간의 노력을 절대로 공로로 내세우려는 것이 아님을 목 놓아 변증한다. 이러한 인간의 노력조차도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개인에게 부어주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항변은 궤변에 가깝다. 상급론으로 그들이 자극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선한 삶, 순종의 삶”이기 때문이다. 상급론을 거룩한 삶/깨끗한 윤리/모범적 행위의 동기를 유발하기 위한 근거로 본 것이다. 기독교인의 삶을 전적으로 성령에 이끌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하는 개신교의 신학이 바람직한 삶을 자극하지 못한다고, 그래서 상의 신학/상급론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상급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 스스로가 개신교의 신학을 떠나고 있음을, 그리고 신자들의 삶을 더 강하게 실제적으로 자극할 필요를 느껴서 상급론에 -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로주의와 같은 - 동기유발의 기능을 부여함을 고백하는 것이나 같다. “상급동기가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억망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경고 속에 ‘거룩한 삶의 동기를 유발하려는’ 공로주의가 이미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순전한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정말 공로성 없는 행위, 은혜에 사로잡힌 인간의 노력을 말하고 그것으로 선한 삶을 자극하려 한다면 상급론이 유별나게 강조되어야 할 필요나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개신교 신학이 오랫동안 말해 온 삯의 신학/보상론으로 충분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상의 신학/상급론이 중요하고 기독교적 삶을 위한 자극제로 꼭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 어떤 변증에도 불구하고 - 공로주의 사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 즉 인간의 노력을 자극하여 삶을 바르게 이끌어 보겠다고 하는 윤리적 동기 유발의 족쇄를 교묘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상의 신학/상급론은 천주교의 이중윤리관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 로마 가톨릭신학은 예수님의 교훈을 구원적 명령과 복음적 권고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구원적 명령은 죄인이 구원을 얻는데 없어서는 안 될 절대 필요 요구로, 복음적 권고는 구원과는 관련이 없지만 완전한 순종을 위한 보충적 권고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산상설교는 모든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그런 명령이 아니라 완전한 삶을 위해 특별히 하나님께 헌신을 약속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이중윤리관은 말한다. 물론 이 권고를 따르는 것 혹은 따르지 못하는 것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 상급론이 이 이중윤리관과 비슷한 면은 구원 이후 혹은 천국에 이미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더 나은 것을 위해 자유롭게 지켜야 할 그런 특수한 규칙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에 있다. 같은 구조 안에서 완전한 순종(천주교), 혹은 상급을 위한 순종(상급론)으로 이름 붙인 것만 다를 뿐이다.

개신교 특히 장로교의 부동성, 정체성, 이지적 교리는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자주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다. 공격의 주 목표는 장로교 신자들에게 삶의 활력소와 교회 생활의 활기를 불어넣거나 되찾게 하는 데 맞추어졌다. 그 중 하나가 성령 충만 혹은 성령 세례를 제 이의 은혜로 제시하는 순복음 신학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하더라도 능력 있는 삶, 활기찬 증거의 삶을 위하여 중생/믿음/칭의와는 종류가 다른 은혜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상급론은 성령의 두 번째 은혜를 강조하는 이 순복음 신학과도 대동소이하다.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는 상급을 노려 이 세상에서의 풍성한 삶과 사후의 더 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상을 두 번째 은혜로 설정하고 이 기준에 따라 모든 신자들을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 구분하기 때문이다.


정말 상급론을 성경에서 증명하려면 상의 신학/상급론을 말하는 사람들이 찾아내야 할 구절들은 다음과 같은 범주의 내용이어야 한다.

첫째, 상, 상급, 면류관 등이 천국이나 지옥과 직접 연결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상급이란 천국 이후의 논제이기 때문이다. 상과 벌은 - 성경과는 달리 - 상급론에서는 서로 반대개념으로 연결될 수 없다. 상급론에서 “상”은 천국이 전제된 순 긍정적 개념이요, “벌”은 천국이 배제된 순 부정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즉 상급론은 하나님의 벌을 “상”이 아니라 천국이나 구원의 반대어인 “심판”에 첨가되는 “어떤 것”으로 내세워야 한다. 또 “상”을 벌이 아니라 지옥의 반대어인 “천국”에 첨가되는 “무엇”으로 내 세워야 한다. 상 혹은 벌을 말한다는 구절이 - 이들이 제시한 구절이 보여주듯이 -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나타나 때로는 천국과 때로는 지옥과 결합되어 있다면 상을 천국 안에서 만의 문제로 설명하거나, 벌을 지옥 안에서 만의 문제로 설명할 수는 없다. 또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모순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위 첫 번째 규칙을 위반하면서 상급론이 상과 벌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파악하려 한다면 - 앞에서 인용한 상급론이 실제로 이렇게 설명하는 것처럼 - 상과 벌은 모두 천국 안에서의 얘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성경에서 순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하나님의 “벌”, “심판”이 “천국 안에서의 무엇” 즉 긍정 안에서 따지는 부정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작은 상급”이나 “상급 없음”을 하나님의 벌, 하나님의 심판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상급론이 성립하려면 하나님의 “벌”, “심판”이라는 용어가 “천국의 허용, 그러나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의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벌”, “심판”, “밖에 쫓아냄”, “울며 이를 갊”은 절대적 부정을 말하는 것 아닐까? 개혁신학은 오래 동안 이 개념들을 순 부정으로 파악해 왔다. 그런데 상급론은 이 개념들을 긍정(즉 천국의 허용) 중에 들어 있는 부정(그러나 부끄러움)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말씀이 성경에 들어있지 않다면, 상급론은 순전히 궤변적인 신학 이론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다.

세째, 상급론의 구조 안에서라면, 믿음으로 구원을 보장받았다는 신자들에게 더 이상 벌, 심판, 지옥 등의 개념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구원을 조금도 말할 수 없는 불신자들에게 상급 개념이 결합되어 나타나서는 안 된다. 천국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에게는 (차등)상급만 거론될 수 있고, 지옥의 불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차등)벌만 거론될 수 있다. 그런데 상급론자/상의 신학자들이 제시하는 구절에는 대부분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상을 말하는 구절이 동시에 여전히 벌을 말하고 지옥의 심판을 말한다. 벌을 말하는 구절에 동시에 여전히 하나님의 상급이 등장한다. 즉 상급론은 성경의 구원론적 구조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구원론적 어투, 즉 성경의 표현법을 바르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상급론을 말하는 사람들은 정말 상급을 말한다는 구절은 어느 것이나 신자들과만의 관계에서, 또 벌을 말하는 구절들은 어느 것이나 불신자들과만의 관계에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불가능하다.

상급론자들이 상급론의 근거 내지 증거 구절로 제시한 모든 구절들은 위의 세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급론은 성경적 주장이 아니라고 잘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상급론이 유독 한국 풍토에서만 발생하였고 따라서 이 천 년 기독교 역사상 어떤 유래도 찾아볼 수 없다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상급론자들이 제시하는 증거구절들이 논리적으로 제시한 위의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는데 기초한 것만은 아니다. 더 큰 이유는 상급론자들/상의 신학자들이 제시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절들에 포함된 “상”, “상급”, “상주다”, “상받다”가 전적으로 오역이라는 데 있다. 이 구절들을 모두 제외하고, 즉 “면류관”이라는 상징적 표현과 심판 등과 관련된 간접적 지원 구절들만으로 상급론을 주장할 수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 그 대답은 “아니다”일 수밖에 없다.



출처 : 목회와 신학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전체 3

  • 2022-01-10 15:30
    [신학] 정훈택교수는 행위구원론자인가? - 칭의와 성화 논쟁


    2005/04/15 08:44
    http://blog.naver.com/givenzone/80011953211
    주재일(jeree) baram@newsnjoy.co.kr [조회수 : 351]


    [157호 표지] 행위는 구원의 조건인가

    칭의와 성화를 둘러싼 변종길 대 정훈택 논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도래했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럼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는 구원받은 것인가, 구원받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삶과 구원은 어떤 관계가 있나. 하나님나라, 구원, 칭의, 믿음, 행위를 둘러싼 논쟁은 초대교회의 바울이나 야고보, 종교개혁 시대의 루터를 지나 지금 한국 장로교회 학자들에게도 중요한 주제이며 때에 따라 첨예한 대립을 낳는 대상이다.

    지난 3월7일 남포교회(목사 박영선)에서 열린 학술 축제에서 변종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는 '이신칭의의 행위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을 주제로 발표하면서, 박윤선 박사의 산상수훈 해석을 비판한 정훈택 교수(총신대)의 논문을 다시 비판했다.

    변종길, "인간 공로 의지하는 꼴"

    ▲ 고려신학대학원 변종길 교수는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형식적인 믿음과 참 믿음을 가르는 기준으로 행위를 제시한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변 교수는 "(정 교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 (미래의) 천국에 들어갈 조건이 아니라 행위가 전제 조건이라고 주장한다"며 정 교수가 '행위 구원론자'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정 교수가 1991년부터 1996년까지 <신학지남>과 <신약의 도약>이라는 책에서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를 주제로 다룬 여섯 편의 논문에 나타난 '행위'에 대해 언급한 것이 문제였다.

    이 논문에서 정 교수가 박윤선 박사를 비판한 이유는 '축자영감설을 믿으며 성경을 설명하려던 그가 유독 인간의 삶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성경 의미를 바꾸려고 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인 인간의 삶이 크게 약화된 것 같다는 점'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이미 온 천국과 아직 오지 않은 천국을 구분하면서 '천국의 현재성과 관련하여 행위는 이미 얻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결과, 열매, 증거, 표식 혹은 하나님 통치의 자연스러운 발로'라고 보았다. 그러나 미래의 천국과 관련하여 행위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며 삶에 대해 적극 해석했다.

    이에 대해 변 교수는 "정 교수가 앞으로 들어갈 천국과 관련해서는 행위가 구원의 전제 조건이라고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 "현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의 십자가 공로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미래 천국에 들어가는 전제 조건이 인간의 행위라면, 결국 (구원은) 인간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이 되고 만다"라고 비판했다.

    변 교수는 또한 미래의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는 정 교수의 주장을 제시하며,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근본 이유는 자기 행위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행위를 미래의 천국에 들어갈 전제 조건으로 삼기 때문에 결국 미래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밝혔다.

    정훈택, "천국, 좁은 의미의 구원으로 한정"


    ▲ 총신대 정훈택 교수는 변종길 교수가 천국을 좁은 의미의 구원으로 제한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뉴스앤조이 자료사진


    그러나 정훈택 교수는 3월18일 본지에 보낸 반론문에서 변 교수가 고의적으로 오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인간 행위를 칭의 또는 구원의 근거, 공로나 전제 조건으로 말하거나 쓴 적이 없는데도 변 교수는 자기가 그렇게 주장한 것처럼 말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인간 행위를 칭의나 구원의 전제 조건이라고 말했다면 심각한 문제임이 틀림없다"라고 말했다. 이어 정 교수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를 해석하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혹은 행하는 것을 인간의 삶이나 행위로 보고, 이것을 천국의 전제 조건이라고 요약하는 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살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변 교수가 천국을 칭의나 아주 좁은 의미의 구원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주장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 교수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정 교수와 다른 각도에서 해석했다. 그는 "이 말은 우리가 행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는 믿음과 행함이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형식적인 믿음'과 '참 믿음'이 대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변 교수는 형식적인 믿음과 참 믿음을 무엇으로 구별할까.

    변 교수는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을 '행함'에서 찾았다. 그는 "참 믿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뒤따라야 한다. 야고보의 표현을 빌리자면 행함이 있는 믿음 곧 '산 믿음'을 가진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러한 변 교수의 주장은 행위의 가치를 인정한 것으로 볼 여지가 많다. 게다가 믿음이 진실한 행위를 낳는다는 정 교수의 주장과 거의 일치한다. 그럼에도 그는 행위를 구원 또는 믿음과 연결시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한다.

    변종길, "칭의·선행의 관계 잘못 이해"

    변 교수는 정 교수의 논문 제목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가 이상하게 보인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행위가 어떻게 구원론적 의미를 가진단 말인가? 물론 전통적 조직신학에서는 구원론이라는 제목 하에 칭의와 성화, 영화를 함께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화가 구원론적 의미를 가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구원의 서정' 차원에서 성화를 다룰 뿐이다."

    나아가 그는 다음과 같이 정 교수를 비판했다. "(정 교수는) 구원론적이라는 용어를 아주 넓은 의미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여태까지의 일반적인 의미와는 다른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칭의에 뒤따라오며 칭의와 밀집한 관련이 있다는 맥락에서 선행을 말하고 있는 부분이 발견되면 곧장 그것을 구원론적 의의와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구원론이라는 용어를 임의로 쓰고 있거나 아니면 칭의와 선행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에 반해 정 교수는 변 교수가 성경에 나오는 구원, 천국이라는 말을 모두 칭의 혹은 아주 좁은 의미의 구원이라는 뜻으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자기를 몰아붙인다고 반박했다.

    "예수는 천국이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너희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거나 천국으로 비유된 그물에서 못된 고기들을 밖에 버린다고도 말씀하셨다. 내가 인간 행위를 전제 조건이라고 표현한 것은 행위가 칭의나 구원의 (전제 혹은 필수) 조건이 되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이 인간 행위(아버지의 뜻대로 행함-편집자 주)를 천국의 조건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변 교수는 이것을 자기의 좁은 개념인 칭의나 구원의 전제 조건으로 바꾸었다."

    정훈택, "예수도 행위를 천국 조건으로 표현"

    또 정 교수는 변 교수가 성화가 구원론적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성화를 '구원의 서정' 차원에서만 다루는 것은 모순이라고 주장한다.

    "구원의 서정에 성화가 포함된다면, 성화는 칭의라는 의미의 구원 다음에 오는 것으로 변 교수가 칭의로 이해하는 구원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진다."

    변 교수는 정 교수가 행위를 천국의 조건으로 본다고 비판한다. 반면 정 교수는 변 교수가 구원을 칭의만으로 좁혀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 교수는 삶을 천국의 조건이라고 표현했고, 또 다른 교수는 삶(행함)을 산 믿음과 형식적인 믿음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로 인정했다. 문제는 칭의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다.

    2005년 04월 13일

  • 2022-01-10 15:32
    정암신학강좌 참석 소감


    변종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정암신학강좌는 11월에 합신개교기념주간에 개최되는 합신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이다. 합신의 정체성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데, 이번에는 30주년을 맞이하여 고신의 허순길 교수와 변종길 교수가 주강사로 발표를 하여 양 교단의 하나됨을 더욱 풍성히 나누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앞으로 고신의 지도자들이 이 대회에 참석을 많이 하여, 잃어버린 우리의 신학 전통을 회복하기를 소망해 본다.

    ▲ 변종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이번 정암신학강좌 분위기는 그야말로 은혜 그 자체였다. 큰 교회당을 가득 채운 가운데 시종일관 은혜가 지배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합신 동문들의 박윤선 박사와 진리를 사랑하는 열기를 보고 놀랍고 부러웠다.

    개회예배 후에 정암 박윤선 박사의 육성 설교를 테이프로 듣는 시간이 있었다. 또박 또박 있는 힘을 다해 호소하는 박윤선 박사의 설교에 우리 모두 숨을 죽이고 들었다. 진리의 음성,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었다. "성결함을 이루기 위해 죽도록 힘쓰자"는 말씀 앞에 모두 큰 도전을 받았다.


    이어서 허순길 박사의 박윤선 박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있었다. 허순길 박사는 박윤선 박사 가정에 가정교사로 있었고, 또 3년 동안 박윤선 박사의 조교로 지내면서 가까이서 박윤선 박사를 지켜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었으며 큰 은혜가 되었다.

    잠시 동안 휴식 시간을 가진 후 두 번째 강의가 시작되었다. 필자는 이렇게 강의를 시작하였다. "박윤선 박사의 육성 설교를 듣고 나니 저 자신이 한없이 작아 보이고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박윤선 박사의 신학을 제가 논한다는 것이 주제넘은 것 같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에 박윤선 박사의 복음 이해에 대해 오해와 곡해가 많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의 시간 내내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도와주심을 느낄 수 있었고, 모든 청중이 1시간 가량 진행된 강의를 숨죽여 듣고 있었다. 뿌듯한 은혜의 시간이었다. 한 10분 정도 시간이 지체되어 미안한 마음으로 강의를 마치고 내려왔다.


    세 번째 마지막 강의는 합신의 김병훈 교수가 맡아서 했다. 시간이 계속 밀려서 예정된 시간보다 한 30분 늦게 시작하였지만 청중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또 자리를 뜨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원래 6시 30분에 끝나기로 되어 있었지만 7시에 끝났다. 하지만 김병훈 교수의 강의는 정훈택 교수의 견해에 대해 조직신학적으로 확실하게 점검하고 평가하는 귀한 강의였다. 현재 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가지만 미래 천국은 행함으로 들어간다는 견해는 중세 후기에 있었던 세미-펠라기안의 견해로서 칼빈이 강하게 비판하였다는 것을 들으면서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필자의 강의와 김 교수의 강의의 결론이 일치하는 데서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고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두 사람이 사전에 의논하였느냐고 웃으면서 물어보기도 했다. 필자는 성령의 역사라고 말했다.

    7시에 모든 순서를 마치고 나오는데 참석자들 모두 다 얼굴에 은혜의 표정이 역력했다. 마치고 나서 그 교회당에서 저녁 식사를 제공해 주는데, 모두들 자리를 뜰 줄 모르고 수백 명이 줄을 서서 교회에서 정성껏 준비한 저녁 식사를 하면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허순길 박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박윤선 박사는 1960년에 고신을 떠났기 때문에 박윤선 박사에게서 배운 사람들은 지금 다 은퇴했거나 천국에 가셨다. 그래서 지금 고신은 박윤선 박사를 잘 모르지만, 합신은 1988년에 박윤선 박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배우고 함께 했기 때문에 박윤선 박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래서 그 영향이 지금도 미치고 있다고 하셨는데, 정말 이 말씀이 참임을 실감하였다.


    하여튼 오후 내내 은혜로운 시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마음이 뿌듯하고 기분이 좋다. 오늘 이 강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다 이런 은혜를 가득 받고 돌아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옛날에 한국 교회가 부흥사경회를 할 때 참석한 성도들도 이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멀리서 짐을 싸서 와서 며칠간 집회에 참석하고, 돌아갈 때는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은 확실히 합신 교단에 은혜와 진리가 남아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교단이 크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 진실한 신앙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다.


    2011년 12월 26일

  • 2022-01-10 15:32
    [외부] 정훈택 교수님 소천 - 백 목사님 전도한 가정


    출처: 합동 교단 기관지
    제목: 총신 정훈택 교수 소천
    일시: 2013년 09월 03일 (화)

    ▲ 정훈택 교수

    총신대학교 전 부총장 정훈택 교수가 8월 29일 오전 8시 45분 62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고 정훈택 교수는 총신에서 최초로 화란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24년 동안 목회자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평생을 총신에 바친 정 교수의 뜻을 기려 장례는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장으로 진행된다. 장례예배는 9월 4일 오전 9시 30분 경기도 양지 총신신대원 100주년기념예배당에서 드린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 반포동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은 고 정훈택 교수가 가르친 수많은 목회자와 후배 교수들이 찾았다.

    고 정훈택 교수는 작년 6월 췌장암을 발견해 1년 휴직신청을 하고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정 교수는 지난 3월 학교에 복귀했고, 뒤이어 암이 재발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암 재발 진단을 받은 정 교수는 학교와 학생에게 걱정을 끼쳐서는 안된다며 조기은퇴를 하고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4개월 동안 병마와 싸웠다. 고 정훈택 교수의 갑작스런 은퇴를 안타까워하던 총신 교수들은 지난 6월 21일 조촐하게 ‘정훈택 교수 은퇴기념예배’를 드리고, 퇴임기념논총 <열매로 알리라>를 헌정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 은퇴기념예배가 정 교수의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

    유족 대표 한천설 교수(총신신대원)는 “정 교수는 소천을 앞두고 자녀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했다.

    고 정훈택 교수 입관예배는 9월 2일 부총회장 안명환 목사의 집례로 진행됐다. 안 부총회장은 ‘우리들의 믿음 그리고 소망’(살전 4:13~18)이란 말씀에서 “총신을 위해 헌신한 정 교수의 뜻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1952년 삼천포에서 태어난 고 정훈택 교수는 총신대 신학과와 신대원을 졸업하고 화란 깜뻔신학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부터 총신신대원에서 신약신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총신신대원장과 부총장 및 총장직무대행을 역임했다. 유족은 한혜신 사모와 자녀 정은모 정가영 정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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