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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노선] 공회노선에 대한 보수 신학교의 발언이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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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5267
작성일
2024.03.06

2005. 6. 7. 총사모

 

[공회노선] 아직도...

제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본질~노선~공회노선~]
내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본질-노선-공회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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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선에 대해 총신이나 고신등 보수 신학계에서 최근의 발언이나 변화는
없었습니까? 백영희 조직신학이 나온지 벌써 2년가까이 되어 가는데

아무런 조짐이 없다면 그것이 이상한것 아닙니까?

진정 진리의 복음이라면 이제 한국 교회도 삼분론과 건설구원에 무릎을

꿇어야 되지 않을까요?

 


2005. 6. 8.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1.평생에 몇 손가락 꼽으며 조심할 것 중에 하나가 '교만죄'입니다.

이 고비 저 고비 다 넘어 겨우 숨돌릴 만하면, 그 앉은 자리 바로 뒤에 숨어있던 귀신이 교만죄로 낚아 채고 끝내버립니다. 다윗과 같은 특수한 신앙의 사람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왔으나 이 덫에 걸려서 살아나온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맞습니다.

교만죄는 그 성격 상 모든 죄를 다 넘어서고 제일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면, 아직도...자가 되려면 너무도 아득한 나같은 사람에게야 교만죄가 해당되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단계적으로 제일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교만죄이지만, 그 교만죄가 신앙 초기부터 늘 따라 다니며 작은 한 과정을 지날 때마다 그 자리에서 우리를 눌러 앉히려고 바로 따라 붙고 있음을 주시해야 합니다.

신사참배를 승리한 종들은 당시 한국교계 전체를 통해 우상죄를 떨쳐 버린 불과 몇 명 중에 들었지만, 해방 후 따라붙은 교만죄를 넘어서지는 못했습니다. 해방 후 5년만에 죽은 손양원 주남선목사님은 그 교만죄까지 초월하고 있었으나 일찍 불러갔고, 나머지 출옥성도들은 교만죄 덫에 걸려 남들이 볼 때는 2계명 승리자였고, 안에서 볼 때는 10계명에도 없는 교만죄에 걸려 그 끝이 이상하게 됩니다.

시대를 초월하고 능력으로 걸었던 그분들도 그러한데 그 수준 밑에 있는 우리들이야 말할 것이나 있겠습니까? 그런 교만죄가 기다리는 곳에 이르지도 못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대장 교만죄, 최후 고개에서 기다리는 그 교만죄와는 대면도 못해보고 그 중간 중간에 조그마한 쫄개들에게 걸려서 여기 저기서 허덕거리는 것이 우리 전부의 모습일 것입니다.

 

 

2.교만죄의 해결은 이론투쟁에서 결정됩니다. 인식에서 나옵니다. 아는 것에서 결정됩니다.

①대개 교만죄를 두고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교만을 문제삼고 있습니다.

교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행동에서 교만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교양이고 수양이지 교만죄를 해결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역사를 알거나 철이 들거나 아니면 최소한 교양이나 수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이 보는 행동에다 교만을 깔지는 않는 법입니다.

이제 막 돈을 벌어본 사람이 돈벌어 본 표시를 내 보지 못해서 발광하는 것은 이 단계입니다. 없는 집에서 대학생이 하나 나게되면 세상을 움켜진 듯 난리들입니다. 개척교회가 기성교회로 자리를 잡고나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내게 성취감을 느끼게 한 것은, 꼭 외부에다 교만한 행동으로 표시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라도, 교양과 수양과 상식과 역사로 다스릴 수 있는 일입니다.

②숨겨둔 교만이 활동을 할 때는, 남의 이름을 빌려입고 움직입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교회 내에서도 '겸손'이라는 말이 나올 때는 행동만을 기준으로 평가하지 그 교양 속에 가라앉아 숨어있는 교만에 대하여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행동에 나타나지 않도록 자제시켜 자기 마음 깊은 속에 숨겨둔 진짜 교만이 움직이는 것은, 교만한 행동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사명감'이나 '자존심'이라는 남의 이름을 가지고 활동을 하게 됩니다.

한 교단을 이 몸에게 맡겨 주면 책임져 보겠다고 후보로 나서고 투표로 지지해 달라고 연설하는 모습이 없는 교단이 있는지요? 그분들을 소개할 때 겸손한 분들이라는 설명이 사진 옆에 있습니다. 오늘 교계와 교회 내에는, 승진하면 앉게 될 수많은 직책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개척이나 선교라는 사역들이 있습니다. 교만이 대거 숨어 있는 곳입니다. 믿는 사람이 조심할 교만은, 드러난 행동보다 자기 속 깊이 숨어 있는 '자아 인식'입니다.

③교만이란, 십자가에 못박아 죽어버린 '자기'가 아직도...아있는 상태입니다.

원래, 믿는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자기'라는 자체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지금까지 살아 움직인 자기는 자기를 위해 앞서 죽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선포하신 계약의 내용이 그렇습니다. 또한 실제가 그러합니다. 해방 된 한반도에는 일본 통치가 물러갔고 사라졌습니다. 이제 한국사람에 의한 새국가가 출발된 상태입니다.

땅은 1945.8.15. 이전과 이후가 다르지 않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 사람들입니다. 그 하늘이며 그 공기며 그 집입니다. 달라진 것은 한반도를 움직인 주권입니다. 일제 통치라는 주권은 사망선고를 받았고, 한국인의 자주 통치라는 주권이 부활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 믿기 전, 예수님 없이 살던, 말씀과 상관없이 먹고 살았던, 하나님 없이 존재했던 바로 이 '자기'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사망선고를 받았고 이것을 사형집행까지 시켜 관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대신 이제는 예수님 모신, 말씀대로만 먹고 사는,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는 이 '자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문제는,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살렸지만 법적으로만 그렇게 처리하였고 실제로는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도록 맡긴 것입니다.

일본이 패망한 뒤, 우리 손에 넘어온 우리 주권을 가지고, 우리가 다시 일본 문화와 일본 제품과 일본 사상을 되살려 사용하거나 아니면 자진해서 일본에게 우리나라를 대신 운영해 달라고 맡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결정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제는 우리가 거절하려 한다면 국제사회의 이목 때문에 일본이 현재로는 우리를 자기들 마음대로 먹을 수는 없습니다.

교만이란, 예수님 없이도 살아왔던 그 자기를 죽여서 없애버려 주었는데, 그 자기를 다시 되살려 예수님 없이 살 수 있는 자기에게 자기를 맡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서, 자기가 자원해서, 자기가 예수님 없이 살던 이전 그 자기를 필요해서 불러서 자기 속에 자기로 인정하고 살려놓고 그에게 자신을 맡긴 것입니다. 죽여버린 자신을 살려놓은 상태, 죽어 송장 상태로 존재해야 할 그 자기에게 산소를 공급시켜 아직도...을 쉬도록 하게 되면, 이 자기라는 존재는 순식간에 벌떡 일어서고, 순식간에 좌우앞뒤를 살펴 번개처럼 이전 모습을 되찾아 활동을 개시합니다.

죽은 자기가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가르쳐 '교만'이라고 합니다. 깊은 속 자신을 면밀하게 살피고, 현재 의식하고 있는 이 자기는 예수님을 모신 자기인지 아니면 예수님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죽일 그 자기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④예수님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자기는, 존재하는 순간부터 교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다리 밑에 거지도 제 잘난 맛에 삽니다. 남 보기에는 못났지만 제 보기에는 그만해도 쓸만한 장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교만죄라는 것은 객관에서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고, 진리로 자기를 비추어 보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제가 저를 보고 판단한 것입니다. 따라서 남 보기에는 아무리 못나고 몹쓸 인간이라도 교만을 위해서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남이 알아 주지를 않아서 문제이지 제가 자기에게 취하는 데에는 부족해서 그러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만일 최소한의 자기 만족이 없어진다면, 그 순간 그 사람은 자살을 하든지 아니면 생의 애착이 사라지면서 급격하게 생존력을 잃어버리고 급사하게 됩니다. 따라서 건강에 큰 문제 없이 일단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그 인간의 깊은 속에는 '교만'이란 가장 근본 바탕에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고 보시면 맞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교만은, 이미 죽어 없어진 자기가 없어졌다는 이 인식, 이 사실을 잊어버리는 데에서 나옵니다. 이러므로 교만죄와 싸우는 싸움은 끝없는 사상전이며 끝없는 사색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바로 그 인간입니다. 중생이란 바로 그 인간을 십자가에 다시 못박아 죽이는 생활로 평생 살겠다는 시작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믿는 사람이 예수님 없이 살던 자기를 자기로 의식하고 자기로 인정한다면, 비록 교양과 수양으로 교만하게 행동하는 모습은 없도록 할지 모르지만 그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교만은 없어질 수도 없고 없앨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교만을 진정 없애려고 한다면, 다른 면으로 연구하는 것보다 이 면으로 깊이 새겨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자기를 자기 속에 두고서는 어떤 약이나 어떤 교리나 어떤 기도로도 교만이라는 뿌리는 없애지 못합니다. 예수님 없는 자기라는 존재는 예수님을 죽인 원수로 알고 그 자기라는 원수와는 오로지 싸워서 죽이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것을 죽이는 것을 '자기 부인'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⑤예수님 없이 존재하는 자기, 예수님을 죽인 그 자기는 수없는 면으로 나타납니다.

이 자기를 부인했고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금방 자리만 옮기고 나면 언제 다시 살아 나왔는지 내 속에서 활동하는 자기는 내나 그 자기입니다. 현재 질문하신 분의 탄식은 여기까지 와 있다고 보입니다. 여기까지는 노력하고 있는데 이 자기가 죽어 끝나주지를 않으니까 고민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아실 것은, 이 자기는 죽인다고 죽어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순간에 죽인 것은 그 순간에 해당된 자기만 죽지 그 다음 순간에 해당되는 자기는 그 다음 순간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또 나오게 됩니다. 즉, 자기라는 존재는 외부에서 볼 때는 단일 존재이지만, 그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껍데기 하나 속에 수도 없는 자기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매 현실을 만날 때마다 그 현실에 해당된 자기가 따로 있어 그 현실에 해당된 바로 그 자기가 제 순서가 되면 자기라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한번 죽였다고 다 죽인 것이 아니고, 한번 죽였다고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되,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은 교만이라는 것이 다시 나타났다고 하여 그 이전에 교만을 죽인 자기 행동이 실패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 해당된 교만은 잘 죽였고, 또 이번에 나타난 교만은 이번에 새로 죽일 교만인 것입니다. 물론 앞에 교만을 회개한다는 것이 회개가 덜 된 경우도 있겠지만, 철저하게 바로 회개를 했다 하더라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른 종류가 또 나타난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로 범한 죄는 7계명이지만 그보다 앞서 다윗이 삼하11:2에서 한가하게 왕궁 지붕 위를 거닐었다는 말씀은, 이미 다윗 속에 하나님 없이도 왕노릇을 하고 있는 자신으로 방치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후 다윗은 철저하게 회개를 하게 되지만, 역상21장에서 그 노년에 또 한번 이스라엘의 숫자를 계수하면서 교만죄로 치리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자기 속에 뽑을 자기를 완전히 뽑지 못하고 살게 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에게 주시는 평생이란 그 자기를 뽑는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살아 있다는 의미는 아직도...에게 죽을 자기가 죽지 않고 살아보려고 설치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죽여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속의 것을 많이 죽이고 많이 뽑은 양이 바로 하늘나라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기 성화'의 양입니다.

 

 

3.따라서 질문자를 포함, 우리 모두는 늘 혼자만 아는 자기 속에 딴 세계를 가져야 합니다.

①다른 사람은 알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자신 혼자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믿기 전 자기는 부인해 버리고, 예수님 믿고 난 후 예수님을 모시고만 살 수 있는 자기로 살아야 하는 이 자기 속의 세계는 남들이 알 수가 없습니다. 혼자만 갈 수 있는 세계요 혼자만 아는 세계입니다. 이 자기 내부 문제가 해결 되지 않고도 교계적으로 신학계로 활동하는 분들이 많지만 우리는 그런 분들을 교인 숫자에 아예 넣지를 않고 있습니다.

남들이 알 수 없고 자기 혼자 투쟁해야 하는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그 투쟁이 있는 사람이라면 외부에서 그 내부 사정을 다 알지는 못해도 대충 짐작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크게 없을 것입니다. 일부러 표시를 내지 않아도 저절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고난이 바로 자기 몫에 태인 자기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지옥갈 죄를 천국가는 해결까지 해 두셨고, 천국 가게 된 우리가 자기 성화를 위해 스스로 자기를 죽이는 매일의 십자가는 각자의 십자가로 남겨놓았습니다.

②죽일 자기를 보시면서, 예수님으로만 살아야 할 살릴 자기도 늘 함께 보셨으면 합니다.

예수님 없는 자기는 죽일 자기지만, 우리의 노력은 동시에 늘 예수님으로만 살아야 할 자신을 발견하고 그 자신을 찾아 그 자기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동시에 있어야 합니다. 죽일 자기를 다 죽이고 나서 살아야 할 자기를 찾겠다는 것은 이론으로만 가능합니다. 죽일 자기만 죽이겠다고 나서면 평생 가도 끝이 없다는 것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죽일 자기를 죽이는 노력을 하는 동시에, 예수님으로만 살아야 하고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자기라는 것을 알아 예수님 대속이 있으니 오늘도 살고, 예수님 은혜를 구하여 오늘도 숨쉬고, 말씀의 인도가 있으니 오늘도 먹기도 하고 이 일 저 일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움직이는 자기가 바로 살릴 자기입니다. 한편으로는 죽일 자기를 찾아 죽는 날까지 노력하시되,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으로 살아야 할 자신을 끊임없이 찾아 그 자기로 살려고 노력을 하시면 한 가지만을 노력한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것입니다.

③늘 자기를 예수님과 묶어 놓고 보셨으면 합니다. 묶인 끈이 끊어지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자기는 예수님 모신 자기라고 구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활로 죽은 예수님을 붙여놓고 함께 묶어놓은 자기라는 존재는 교만해질래야 교만해 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떼놓고 단독으로도 존재하는 자기라는 존재는, 교만해지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자꾸 생각하는 데에서, 죽일 자기는 저절로 죽습니다.
그분이 어떤 희생으로 날 위해 그 고통 그 고초 다 겪었는지 생각하는데에서, 교만은 생길 틈조차도 없어집니다. 그분을 그렇게 죽인 자기는 그분이 당한 그 고통을 생각하는 그 생각에 비추는 빛 때문에 숨어들 틈조차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처했던 현재와 우리의 영원한 모습을 자꾸 생각하다보면, 그 비참한 자기를 되살리기 위해 그 고난 당한 주님을 다시 떼내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 주님께 붙들린 자기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영의 지금과 영원
우리 마음의 지금과 영원

우리 몸의 지금과 영원

우리 일의 지금과 영원

우리 소유의 지금과 영원

그 실상과 그 현황을 살펴보되, 주님 없었더라면 이 5가지 면으로 어찌 되었을지를 자꾸 범위를 넓혀 가며 더듬어 보시고, 반대로 이제 주님이 살려놓았으므로 주님 모신 자기로 살면 어떤 오늘과 영원이 있겠는지를 자꾸 범위를 넓혀 찾아보셨으면 합니다.

 

 

4.이제, 새로운 면으로 교만과 겸손을 찾기를 노력했으면 합니다.

이곳은, 백영희신앙노선에서 교만과 겸손을 배우기 전에는 세상이 아는 교만이 교만이고 세상이 아는 겸손이 겸손인 줄 알았습니다. 백영희신앙노선에서 이제 새로 알게 된 교만의 원인, 겸손할 수 있는 내면을 배우게 된 것은 너무 딴 세계를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얼마나 깊이 얼마나 자세하게 얼마나 많은 범위로 연구해 보았느냐는 그 교훈과 교리의 깊이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진정 교만을 뽑을 수 있는 깊이였고 겸손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깊이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두고, 역사상 백영희목사님의 교리와 교훈만큼 철저하게 심도있게 전면적으로 살펴본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 교리와 교훈을 배운 후 전면 부인하거나 실행치 않았다면 그 교리와 교훈을 가지지 못한 분들과 교만에 관한 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그 속에 지식이 들어가게 되면 언젠가 그 지식이 양심을 통해 돌이킬 수라도 있게 하지만 그 지식조차도 없는 사람은 돌이킬 가능성도 없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이곳은 이곳에서 제공하는 모든 설교 자료 등을 가지고 이곳을 찾는 분들이 예수님의 대속을 평생 새기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조직신학에 잠깐 나오는 예수님의 희생의 종류 몇 가지와 설교 시간에 감상적으로 예수님의 고난을 표현하는 정도만으로는 교만을 벗을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수박 겉이나 핥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백목사님의 설교는 이런 면에서 이곳에서 제공하는 1만 수천여개 설교를 통해 직접 확인 할 수 있는 대로, 그 전부가 예수님의 대속을 실제 연구해 보았고 그 대속으로 살아본 분이 그렇게 살 수 있는 교인이 되도록 평생을 걸어간 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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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06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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