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노선] 예배와 관련, 일반교회와 공회교회의 다른 점?
2004-06-03 18:35:26
(개인메일)
[공회노선] 예배와 관련, 일반 교회와 공회 교회의 다른 점을 비교 설명해주시면
제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예배~]
내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예배-]/[-교리-교회론-교회운영-공회-공회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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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올린 새자료 중에서 공회 교회들의 예배 모습이 다른 교회들과 너무 달라서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다음 내용을 소개한 것이 있습니다. 시간나는 대로 천천히 설명해주셔도 되니까 하나씩 나누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자료는 /총공회/일반자료/ 229번 자료 (04/06/02)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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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녀 구별하여 않는 것.
(2)찬양대
(3)찬송가
(4)중간반도 장년예배에 같이 참여하는 것.
(5)예배시간
- (가)일이부등으로 나누지 않는 것.
- (나)오전예배가 11시가 아닌 것.
- (다)저녁예배가 아니고 오후예배로 드리는 것
(6)예배시간에 주기도문이 없을 수 있는 것.
(7)타교회와 다른 설교의 성격에 대하여(중요함)
이상.
2004-06-03 21:36:53
yilee [ E-mail ]
1.예배 때 남녀 좌석 분리
제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예배~]
내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예배-]/[-교리-교회론-교회운영-공회-공회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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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성관계에 대한 참고자료 소개
남녀문제에 대하여 일단 성경으로 살펴야 할 여러 문제를 이 곳 홈의 /초기화면/연구실/연경교재/주제연구(8)/'성경적이성관/으로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이 교재에서 백영희신앙노선의 이성관에 대한 면을 폭넓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2.예배 때 남녀 좌석의 분리
①이성문제의 위험성
말세 제일 대표적 죄악이며 말세를 통째로 삼킬 가장 위험한 죄악 중 하나가 이성문제입니다. 마24:37-39 이하에서 노아의 때를 예로 들고 재림도 그때와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모든 죄가 다 같지만 특히 그 죄악의 위험성에 있어 오늘 우리 시대는 구별의 거룩성을 파괴하는 '통일운동', 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기중심', 그리고 남녀이성에 관련된 '이성범죄'를 가장 주의해야 합니다.
②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이성문제는 소리없이 시작하고 표시없이 번져나가며 그것이 외부로 들어났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되고 공동묘지만 남았다고 할 정도입니다. 다른 죄는 네거리에 경고간판을 켜놓고 떠들며 막아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이 죄는 진압을 하기 위해 움직이면 천지가 불바다가 되어버리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두면 우후죽순 자라버립니다.
다른 죄는 대개 마음에서 뿌리를 박고 겉으로 나타나는 점에서는 이 죄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발견한 다음 뽑으려고 하면 다른 죄는 위쪽으로 돋아난 부분을 잡고 잘 뽑으면 뽑히는데 이 죄는 밖으로 드러났을 때는 밖에서 뽑으려고 해도 겉만 잘려나가지 뿌리는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③우리가 다 연약한 사람임을 고려한다면
이 죄는 잠깐의 생각만으로도 여지없이 이 죄가 원하는 모든 결과를 거의 다 확보하는 이런 은밀진행성, 전파용이성, 수습극난성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를 상대하는 우리는 다 같이 연약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연약성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이성에 대하여 위험할 수 있는 때가 되면 짝을 붙여서 그 둘 사이에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죄가 위험하기는 그지없으나 부부끼리 가정이라는 격리장소를 통해 조심스럽게 처리하도록 했으므로 자기 부부가 아닌 이성과는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조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은 위험한 바이러스가 발생했다고 보건당국에 보고가 있게 되면, 최선의 방법은 접촉 금지입니다.
이는 우리 몸이 강철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미생물 하나로 인하여서도 죽을 수 있는 연약한 상태이므로 걸린 다음에 치료약을 개발하고 수술을 하는 등 노력을 하는 것보다 접촉조심을 통해 아예 원인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③혹 자기는 초월한다 해도 신앙어린 사람을 배려한다면
어떤 분들은 예배당 의자 통로 50센티 안팎의 공간이 이 죄를 격리시킬 수 있겠느냐고 비판하고 또 어떤 분들은 막을수록 더 호기심을 자극해서 불을 지른다고 합니다.
이런 반론에 대하여 해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론입니다. 떼어놓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붙여놓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호기심을 자극하여 더 큰 문제가 발생되는 사람들도 많지만 떼어놓으면 분명히 통계적으로 잦아진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는 기초사실에 해당됩니다.
구체적으로 입증을 하란다면, 생명없는 유교가 분리시켰지만 어쨌든 공간확보를 많이 했던 조선시대와 우리 이전 날들이 이 죄에 관하여는 훨씬 관리가 잘 되었습니다. 만약에 조선시대와 우리 구시대에도 숨어서 짓는 죄가 있었다고 토를 다는 분이 있다면, 에덴동산 내에도 죄가 숨어들어와서 일을 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덴동산 안에서도 죄가 설쳤다고 해서 에덴동산 상태가 타락 이후인 오늘과 별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주장입니다.
이런 저런 경우를 다 고려해도, 나는 그런 수준을 벗어났다고 하는 분이 계신다면? 신앙어린 다른 분을 위해 조심해 주시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혹 우리 교회는 전 교인의 수준이 전부 지성인이어서 그런 우려가 없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주변에 수준낮은 교회들이 많은데 그들이 수준높은 교회를 흉내내려 할 것이니 어린 아이 보는 데서는 찬물도 마시지 않는 것이라는 세상 통계를 가지고 참으시라고 권하겠습니다.
④어쨌든 성도는 악4:12 말씀대로 잠근 동산입니다.
주님 한 분 외에는 어느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상태로 자기를 단속하고 외부 잡상인과 잡ㄴ 잡ㄴ 들의 출입을 막아야 옳습니다. 교회는 깨끗한 것이 본질이고 거룩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이는 그 사람 속을 말하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는 것에게 피동을 받기 때문에 환경의 청결도 일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불신자 볼 때에도 예배당을 '연애당'이라고 불리는 일만은 막아야 할 것 같습니다.
⑤지금 남녀 성도들이 예배당 안에서 손을 잡고 춤추는 것을 성도의 교제라 하는데
이는 회개할 가능성도 없는 죄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성도의 교제라는 것은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이 은혜로 다른 사람이 죄짓지 않게 하고 말씀대로 살게 하고 하나님께 붙들려 천국소망에 살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 사랑이고 성도의 교제의 향방입니다.
남녀가 손을 잡고 춤추는 사랑은 불신자들이 사용하는 사전에서 그렇게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불신자들의 언어와 단어 정의부터 다릅니다.
3.현재 남녀 좌석을 섞은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의 사고율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연애가 좋은 것이라면 남녀 좌석은 섞을수록 좋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쁜 것이라면 떨어질수록 좋습니다. 가운데 가족석을 차려놓으면 핑계를 대고 앉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결국 남녀좌석 구별이 폐지됩니다.
우리 양심을 가장 깨끗하게 적용시켜 볼 수 있는 것은 자기 자녀들의 문제입니다. 지금 10대 초반까지 낮아진 이성문제를 두고 만일 귀하의 10대 초반 자녀들이 마음에 원하는 대로 남녀접촉을 하겠다고 한다면 마음껏 자유롭게 하라고 부추길 그런 포주같은 부모가 있겠습니까?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보다 풀어놓는 것이 낫다고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를 접촉하지 못하게 하면 호 기심이 자극된다 해서 그 이단 교리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교단들을 혹 보셨는지요?
4.목회자로서 한 가지 현장 문제는 알고 있습니다.
남녀 학생 청년들을 적당히 어울리게 풀어놓으면 교회에 붙들리는 식구들이 생기는 것은 분명합니다. 엄격히 구분해 놓으면 분명히 교인 손해를 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돈 된다고 제 자식을 몸파는 곳에 보낼 부모가 있습니까? 부모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막아야 하고, 막는 것보다는 막을 필요가 없도록 사전에 표시나지 않도록 조처를 해야 할 것입니다.
2004-06-03 21:37:10
yilee [ E-mail ]
2.찬양대 활동의 최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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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대 문제는 일반 교단들만큼 활성화 되어 있지 않다 해도 일단 시행하고 있기 때문에 왜 다른 교회와 비교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굳이 이 질문이 나온 배경이 있다면
1.공회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약 20여년 찬양대를 폐지한 적이 있습니다.
서부교회에서 찬양대 연습을 끝낸 다음 남자 한 사람이 여자를 따라 가는 일이 있어 이를 알게 된 백목사님이 찬양대를 아예 폐지해 버리고 이후로 공회 노선은 찬양대를 전혀 두지 않게 됩니다.
찬양대를 없앤 표면적 이유는 남녀 이성 문제의 소지가 많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총공회 신앙노선은 찬송보다는 말씀에 중심을 두고 단체 활동보다는 개인이 하나님을 직접 모시고 현실에서 말씀대로 사는 방향에 중심을 두기 때문에 일반 교회식 찬양대 운영에 대하여는 아주 비판적입니다.
2.찬양대를 좋게 보지 않는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짚어 본다면
①교회 내의 별도 조직의 활성화
교회는 소속 전 교인들이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이고 예배 후에는 각자 자기 생활과 현실로 돌아가서 예배 때 받은 은혜와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교회의 가장 기본 모습이며 가장 중요한 본질입니다. 그런데 교회 내에 여러 종류의 이익집단이 발생하고 여러 종류의 특기그룹들이 활동하게 되면, 우선 볼 때는 세상 사람들 보기에 실력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좋은 집단 같지만 교회의 본질이 흔들어지는 문제가 생깁니다.
어디까지 금해야 하고 얼마 만큼 활동해야 하는지 선을 정해놓을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초대교회의 모습과 오늘 교회의 모습은 같지 않습니다. 그때가 정상이고 지금이 변질입니다. 물론 오늘 교회 형태를 발전이라고 부르고 싶은 분들도 계시겠지만, 오늘 교회 형태는 초대교회가 발전한 형태가 아니고 초대교회가 변질되어 세상을 닮아버린 속화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②말씀의 은혜보다 유흥이나 감흥이 위주되는 것
교회는 말씀으로 존재하는 단체인데 모인 사람들의 유흥이나 감정을 중심으로 운영되면 필히 탈선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찬양대의 활성화는 한편으로는 음악적 기술 발달에 집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 찬양보다 인간들의 감흥 위주로 흐르게 됩니다.
요즘 아이들의 식사 형태가 건강식보다는 입맛식이 되어 하루 3끼 식사에 지장을 주거나, 식습관에 근본적인 변화를 주는 정도가 된 것처럼, 말씀을 배우고 실행하는 것은 어렵고 찬송은 쉽고 재미있고 즐길 수 있기 때문에 교회의 중심이 말씀을 향하는 대신 유흥과 감흥으로 가는데 찬양대의 운영이 그 선봉에 있습니다.
③교회 내 특수층의 재주 자랑
남달리 받은 것은 한 몸의 각 지체가 가진 특수한 장점이기 때문에 그 장점으로 온 몸이 혜택을 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한 교인의 자기 자랑이 되고 그를 위해 다른 사람들은 청중이 되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교회 내에서 남달리 가진 기술로 따로 모이는 모임은 처음 시작할 때는 희생과 봉사로 출발하지만 조금 지나가면 특수계층의 재주 자랑이 되어버립니다. 그리 되면 백해 무익이라 할 만한 문제점들이 뒤따릅니다.
④남녀문란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소지가 가장 많은 형태
찬양대는 그 구성과 운영 그리고 그 모임의 성격 자체가 남녀문제를 유발할 수 있는 가장 위험스런 경우입니다. 남녀가 음으로 화음을 맞추며 은혜와 말씀에 대한 감사로 나간다면 좋겠지만, 화음을 맞추다 보면 엉뚱한 데로 새나가버립니다.
너무 이런 문제에 닳고 닳은 세대가 되어 그렇게 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항변까지 해버리고 있지만, 이런 자세는 교회와 세상을 깜빡 혼동한 것입니다. 교회가 바다와 같은 죄악 세상 속에 있지만 교회 안으로 물이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1번 답변'인 윗글에서 살펴보았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3.어쨌든, 걱정되는 면들을 적어본 것입니다.
찬양대 자체가 죄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운영이 바로 되는 경우가 너무 희귀합니다. 그 운영 때문에 교회들이 말씀 중심에서 유흥 중심으로 바뀌게 되고 세상을 닮아 나가는 속화 현상이 심각해진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서 어느 정도로 어느 기준으로 찬양대를 운영할 것인지는 각 교회가 내부적으로 정할 문제입니다.
찬양대가 꼭 필요하다면 찬양대가 기술보다는 은혜 위주로 운영되게 하고
찬양대에 참여하는 이들이 '노래'만 부르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찬양대의 활동이 교회내 특수계층의 모임이 되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했으면 합니다.
좋기는 찬양대 좌석도 돌출되는 것보다는 숨는 것이 낫고
찬양 발표 순서는, 찬양대 준비한 자기들의 '발표'는 최대한 줄이고 대신 예배 흐름을 숨어 돕는 역할을 권합니다. 묵도송이나 폐회송 등을 주로 맡게 되면 예배 순서에서 찬양대 발표 순서를 굳이 넣을 것이 없습니다. 찬양대 준비한 것을 들어주고 그들은 발표하기 위해 예배 순서 하나를 잡는다는 것은 예배다운 예배를 진행 해 본 사람이면 1년에 한 두 번 이상 해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공회의 찬양대는 위에서 설명드린 이런 배경과 분위기 때문에 다른 교단들이 찬양대 활동의 극대화를 노력하는데 비하여 공회 교회는 최소화를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타교단 교인들이 공회 교회를 출석하면 꼭 짚어 말하기는 곤란하나 무엇인가 분위기가 다르다고 불평을 하게 됩니다. 설명하는데 시간은 걸리지만, 바로 이해를 시켜야 할 사안 중 하나입니다.
2004-06-03 21:37:36
yilee [ E-mail ]
3.공회 찬송가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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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문제'라고 한다면, 아마 공회 교회가 사용하는 찬송가는 일반 교단 전체가 통일시켜 사용하는 찬송가와 다르기 때문에 타 교단 출신 교인들이 공회 교회를 출석할 때 이상하게 느껴 문제가 되는 경우를 질문한 것 같습니다.
1.'통일찬송가' 문제는 이미 한국교회사에서 결판이 난 문제입니다.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고 아주 개판이 되어 버린 것이 '통일찬송가'입니다. 맨 정신을 가지고 조금이라고 찬송가의 의미와 통일찬송가 제작 과정과 현 상황 그리고 지금 추진되는 새로운 찬송가 문제 등을 알게 된다면, 총공회 신앙노선의 자랑 중에 '통일찬송가'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분명히 하나가 될 것입니다.
현재 이곳 홈의 /초기화면/연구실/일반자료/안에 찬송가와 성경 개정 등에 관련된 몇 가지 눈여겨 볼 소식들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통일찬송가'라는 명분과 이름은 거창하고 좋지만 그 실상은 정치판에서 버무려 놓은 잡탕입니다. 이미 이 '통일찬송가' 문제를 가지고 그 장점을 설명한다면 평양 정권이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하는 수준일 것입니다.
2.공회찬송가는, 완본판은 아니지만 완본판으로 사용하기에 부족이 없습니다.
더 좋은 것이 나올 수가 없다는 논리는 거부합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을 만들 힘이 없고 실력이 없어 만들지 못하겠다는 고백은 양심의 표현일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가진 200곡 찬송은 손을 봐야 할 곳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 찬송을 보강한다고 손을 대어서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게 할 인물이 현재 이곳 답변자가 아는 대로는 없습니다.
찬송가 출간은 그 형태도 바꿀 수 있고 찬송가의 숫자도 가감할 수 있고 찬송가 가사나 곡을 수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꾸어야 한다면,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꼭 필요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회찬송가'는 아마 이 상태로 말세 끝까지 가게 되지 않겠느냐는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
3.공회 교회로 출석하는 교인들에게 설명할 내용이 필요하다면
①집집마다 대문 색깔이 꼭 같고, 집집마다 반찬이 꼭 같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요?
천주교처럼 교단은 오직 하나라야 한다면 몰라도, 사람마다 깨달음이 다르고 장단점이 다르며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모습이 다르다면 그들이 좋아하는 찬송도 다르고 교리에 따라 가사도 달라야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교단분열을 두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지만, 인간 욕심 때문에 분열한 것은 잘못이지만 교단 분열 자체는 깨달음이 달라서 자연스럽게 분화한 것이니 깨달음이 다르지 않고 무조건 같아야 한다면 이는 사람들이 아니고 기계들의 집합소일 것입니다.
가정마다 체질이 다르고 경제가 다르고 입맛이 다르면 반찬의 양과 질과 종류가 다른 것이 정상입니다. 지금 현대 사회가 개성사회이고 개인가치관을 강조하는 때여서 국가정책이든 사회유행이든 군국주의식 강제통합을 거부하고 있는데 왜 유독 교회를 향해서는 붕어빵이 되라고 시민운동하는 사람들과 진보주의 신학자라는 인간들은 그렇게 몰아붙이는지 도무지 모를 일입니다.
따라서 공회 교회는 세상 인간들이 요즘 좋아하는 말로, 또 어린 교인들이 흔히 입에 잘 담는 표현을 가지고 말한다면, 인간이기 때문에 남과 다른 것이 있고 그래서 찬송가도 공회찬송가를 따로 가지고 있고, 다른 교단들은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무시하고 그대신 기계적이고 강압적이고 독재체제하의 상명하복에만 익숙해져서 예배에 사용하는 찬송가까지도 원칙없이 지조없이 개성없이 하나로 만들었으며 그 찬송가 통일과정이 너무 졸속이고 정치적 나눠먹기고 기득권에게 이권보장을 했기 때문에 지금 20여년도 사용하지 못하고 또 다시 전면 개편에 들어가 있다고 그들 스스로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런 논리라면 공회 찬송가 문제에 관하여는 훔쳐 먹다 들킨 사람처럼 엉거주춤할 것이 아니고 아주 펴놓고 자랑스럽게 발언할 수 있으며 이렇게 소신있는 교단이 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에 아직도 살아있는 교회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큰소리를 쳐야 옳을 것입니다.
②공회찬송가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합니다.
세상 노래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태극기'노래, '옹달샘'노래도 30년 50년이 지나가도 아직 그 가사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가면서 옷을 바꿔입듯 교회가 발전을 하고 시간이 흘러가면 예배당 벽돌은 새로 고칠 수 있고 집사는 새로 뽑을 수 있는데 찬송가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 대는 것은 역사도 모르고 노랫말의 의미도 모르는 무식의 소치입니다.
50년이 지나도록 찬송을 바꾸지 않고 이전 것을 사용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모범되는 일이고 20년도 사용하지 못한 찬송가를 모조리 바꾼다고 또 가사를 손대는 것은 변덕이고 상술이며 졸속입니다.
③공회 찬송가는 그 내용이 찬송가입니다. 다른 찬송가는 그 내용이 찬송가가 아닙니다.
이 주장은 자신있게 설명할 분들이 많지 않을 듯 합니다. 공회 찬송가를 불러보면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꼼짝할 수 없도록 붙들리고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런데 통일찬송가를 불러보면 마음 속에 붙들어 놓았던 은혜가 날개를 달고 전부 도망을 가버립니다. 공회찬송가를 양복이라고 한다면 일반 찬송가는 반소매 티샤쓰에 반바지라 하겠습니다.
일반찬송가를 선정한 분들은 믿음이 없는 분들이 곡을 선정해서 믿음 없는 곡들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믿음 있는 곡들은 김을 빼놓아서 김빠진 사이다가 된 느낌입니다. 공회찬송가는 불러보면 찬송가입니다. 너무 주관적 표현이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은 인용치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2004-06-04 17:39:33
yilee [ E-mail ]
4.학생들의 장년반 예배참석 (예배 1)
제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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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대교회'의 오늘날 의미는?
초대교회에는 주일학교가 없었습니다. 청년회 전도회도 없었습니다. 모이면 함께 예배 드렸고 흩어지면 받은 말씀대로 자기 현실에서 살고 안 믿는 사람을 만나면 전도하고 믿는 형제를 만나면 더 잘 믿도록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교회론' 문제가 나오면 항상 '초대교회'를 들고 나옵니다. 어떤 분은 이런 답변자 태도에 화가 나서 '2천 년 전 초대교회와 오늘 교회가 예배당 건축 자재도 같아야 하느냐?'고 논박을 합니다.
예수님을 닮자는 말은 2천 년 예수님 거주하던 곳으로 모여들어 그곳에서 그때처럼 살자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고난의 원인을 알아 그 고난을 본받자는 뜻입니다. 아버지 뜻으로만 움직인 그 행동을 본받자는 것입니다. 외형 보이는 모습을 흉내내자는 말은 아닙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근거는? 성경에 나타나는 신약초기 초대교회들 중에서 이스라엘 밖에 있던 교회들을 이스라엘 안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던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다닌 곳에서 예수님 입은 옷을 입고 예수님과 꼭같은 흉내를 내는 것이 옳았다면 아시아에 있는 7교회나 고린도교회 로마교회 등 교회를 모두 이스라엘 안으로 불러 들였을 것입니다. 근거 성구는 많이 들 수 있지만 간단하게 말씀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초대교회 예배 모습 중에, 오늘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예배 모임의 단순화입니다. 오늘 교회가 시간 중에 가장 귀한 시간이며 모든 시간들의 종자가 되는 '예배시간'을 너무도 많이 풀어헤쳐 놓았다고 하고 싶습니다.
2.예배모임은 단순할수록 좋습니다. 모임의 구성원의 경우 특히 그렇습니다.
누구 누구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것인가? 행10:24에서 베드로가 고넬료 집으로 심방예배를 왔을 때 고넬료는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만 불러놓고 있었습니다. 소위 자기 측근들만 모아놓고 당대 최고 선생님을 모시고 가정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성구를 근거해서 '가정으로 찾아가는 심방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심방예배에는 그 집 식구들을 기준으로 그 집 식구들과 가까운 사람을 모아놓고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심방 예배가 있을 때는 함께 가겠다는 사람 중에서 그 집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은 빠져 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심방예배를 두고 누구는 부르고 누구는 뺐다고 해서 '차별대우'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빠진 사람을 위해 그 가족들을 위해 또 다시 별도 심방예배를 가면 됩니다.
문제는, 교회가 교회적 행사로 모이는 예배의 경우입니다. 교회는 그 교회 소속한 교인 전체가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 예배는 그 교회 소속 교인 전부의 출석이 원칙입니다. 모든 교인들이 참석할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정해놓고 그 모든 교인들이 참석하는 예배로 진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물론 초신자들만 한 자리 앉혀놓고 특별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죄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배를 고정적으로 정해놓고 예배의 한 종류로 만들어버린다면, 심각하게 생각할 문제가 됩니다. 그 교회의 부흥기간에 어느 특별한 기간 잠깐 그렇게 한다면 몰라도 아예 그 교회의 고정 예배 중의 하나가 된다면 예배의 본질 문제를 놓고 고민할 사안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것은 젖먹이 초등학생 중고교생 대학생 청년 노년 할 것 없이, 교회 예배는 그 교회 소속 전 교인이 함께 한 자리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가장 옳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교회일수록 교회의 건전성과 본질성에 충실한 것이고 교회의 역량이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고넬료 가정예배에서 보듯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를 심방예배로 보고 특별한 사람들만 모아놓고 예배를 봐도 되느냐고 논란이 일어나면 구체적으로 선을 긋기가 어렵습니다. 바울이 행20:17에서는 에베소교회 장로님들만 청하여 설교를 한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논쟁을 위해 논쟁을 하는 사람들이 시비를 한다면 그냥 대충 원칙으로만 듣고 실제로는 네 좋은 대로 알아서 하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얼마만큼 공부를 해야 좋은 학생인지를 놓고 대충의 원칙은 정할 수 있지만 분단위나 초단위로 공부하는 시간과 모습을 정해놓고 일률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핑계를 대도 공부하기 싫어서 말하는 학생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형편 가정경제 수준 자기 건강 등 여러 면을 고려해서 각자 공부시간은 알아서 정하겠지만, 공부시간이 많을수록 좋고 친구는 사귀지 않을수록 좋고 .... 이런 원칙은 틀림없이 공부하는데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3.총공회 교회들은 원칙적으로 모든 교인이 단 한번의 예배로 함께 모이고 있습니다.
총공회 교회들도 주일학교는 분리해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워낙 유명하고 알려진 교회이므로 자연스럽게 반론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주일학교 시간이 따로 있지만 한 주간에 가장 중요한 주일 오전예배를 놓고 본다면, 신앙이 없어 빠지는 아이들과 부모들이나 교회 거리 때문에 빠지는 아이들은 빠지지만 원칙적으로는 젖먹이나 초등학생 중고생 청장년 노년 어린교인 할 것 없이 전부가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타교회에서는 주일오전 대예배에 젖먹이는 어린 학생들이나 중고생이 보이면 그 가정에 일이 있어 특별히 부모를 따라 나온 것으로 생각하여 학생이나 어린아이들의 예배 참석은 예외적인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회 교회들은 젖먹이나 어린 학생들이 장년반 예배에 빠지면 부모가 신앙이 없거나 아니면 가정에 특별한 일이 있어 예외적으로 빠진 경우라고 보게 됩니다. 이렇게 시각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공회 교회는 주일오전 오후 예배 뿐 아니라 밤예배까지 모든 예배에는 모든 소속 교인들이 신앙이 어려서 빠지면 빠지지 예배체제와 운영이 장년반만 모이기 때문에 그 외 교인들이 빠지는 그런 경우가 없습니다.
4.그렇다면 '주일학교'의 성격은?
교회의 예배를 둘로 나누어 장년반 예배가 따로 있고 초등학생 예배가 따로 있는 식이 아니라, 대예배는 나이 신앙에 관계없이 전부 다 함께 예배드리는 가장 중요한 예배이고, 주일학교는 안 믿는 가정의 학생들을 전도하기 위한 특수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주일학교 예배는 과도기로 운영하는 일시 기구라야 할 것인데 왜 상설기관이 되어 있는가? 일반 교단에 비하여 공회 교회는 초대교회로 돌아간 형태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전도와 복음에 꼭 유익하면서도 동시에 죄되지 않는 범위에서 일반교회들과 너무 이색진 것을 최대한 줄여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세례를 침례로 바꾸고 싶지만 장로교에서 출발했고 세례와 침례의 차이점과 단어의 의미를 전부 파악한 상태에서 마음에는 침례를 더 선호해도 우리에게 주신 현실에서 그렇게까지 하여 또 다른 분란의 원인을 제공할 만큼 그렇게 요긴한 것이냐는 문제로 생각하여 세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또 초대교회를 닮는 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을 외형적으로 무조건 닮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복음중심을 닮는 것이므로, 각 교단들의 신앙수준에 따라 그 모습이 각각 다르겠지만 공회 교회로서는 예배 모임의 구성원 문제에 관하여는 주일학교 하나 정도는 오랜 세월 속에 지켜봐도 예배모임으로 운영하는 운영만 조심하면 필요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5.'중간반'의 경우는
주일학교에서 장년반으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신앙을 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들을 바로 잡아 변화가 많은 민감한 나이의 학생들을 주일학교에서 가진 신앙 그대로 장년반에 이어지게 하고 평생 자기 신앙이 되도록 하기 위해 '중간반'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세 교회들이 한 대형교회 안에 수십개의 예배 모임을 가지는 경우가, 조금 크다 하면 10여개,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4-5개는 예사로 가지게 된 이유가 바로 공회 교회가 '주일학교'나 '중간반'의 별도 예배가 필요한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따라서 몇 개라야 하느냐는 문제는 각 교회의 내부 문제이므로 이는 개교회자유주의 원칙으로 결정할 일이지만, 만일 총공회 내 서부교회라는 초대형교회를 기준으로 실례를 든다면, 젖먹이까지 참석하는 대예배 외에 초등학생과 그 이하가 특별히 한번 더 모이는 '주일학교', 중고교생들이 중심으로 모이는 '중간반' 등 2개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50여 년 역사를 통해, 대예배 외에는 딱 2개의 예배모임이 있습니다. 이 정도라면 일반 다른 교단의 경우 개척한 지 1년이 안 되고 교인의 숫자가 30명만 되어도 이 정도 예배는 드릴 정도일 것입니다.
현재 부산공회(3)과 같은 경우는 중간반 예배의 필요성이 이미 그 중간반 제도를 세울 때의 이유가 없어졌다고 생각하여 대부분 따로 예배보지 않고 주일학교 예배만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이 좋다 나쁘다고 단정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부산공회(3)교회들의 규모나 현재 교인 구성이 중간반 예배를 따로 드리는 것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현재 공회 교회들 대부분도 실제로는 이렇게 되어야 할 현실적 상황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교회들이 있다면, 그 원인은 대개 교회의 예배 모임 구성원은 어떻게 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고 혹시 안다 해도 현실적 손익계산 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단기간으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듯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교회가 속화되지 않을 수 없는 방향으로 나가느냐 아니면 아직도 생명이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방향으로 버티고 있느냐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내면 요인이 됩니다.
6.한 때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고급 식당 어른들 모인 자리에 애들은 집에 두는 식.
어른들이 세미나를 가든지 공회당에 모여 마을 회의를 하든지 오페라를 보러 가든지 아니면 학부형 협의회를 하든지 또는 고급 식당에 파티가 있든지... 이런 경우가 되면 애들은 번잡스런 존재요 분위기를 흐리는 방해물로 인식이 됩니다. 이런 경우 아이들을 맡기고 부부가 점잖게 옷을 입고 참석하면 교양과 예절을 갖춘 지성인이 되고 이런 모임에 애들을 데려와서 분위기를 흐려버리면 미개인 야만인이 됩니다.
교회가 초기 생사를 걸고 믿고 나갈 때는 젖먹이 하나까지 둘러업고 와서 교인 숫자에 포함을 시키며 사람처럼 생긴 것은 무엇이든지 천하보다 보배롭게 보여 거지든지 원수든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데려다 놓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때가 하나님께서 기쁘하실 때이고 그런 초기를 보고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교파에 상관없이 모든 교회들의 초창기 설립 기록들을 보면 이런 분위기와 실제 상황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기준으로 소위 발전을 거듭하고 자리를 잡게 되면 그 마을 그 도시 제일 중심에 손꼽는 건물을 보유하게 되고 그때쯤이면 교회 내부의 조직과 운영이 세상에 거창한 기관들처럼 그렇게 멋지게 정비가 됩니다. 이런 단계가 되면 권위있는 설교가를 초빙하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제공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모임에는 수준급 교인들이 자기 취향과 정도에 맡도록 배정이 됩니다.
서양교회들은 오랜 옛날에 있었던 일이고 우리나라 교회들은 불과 수십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그렇게 되는 경우들이 많고 더러 그 이상의 역사도 가진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 예배 모임을 점잖은 어른들의 모임으로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모인 자리를 두려워 한다는 자세에서 비롯되었다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 두려운 하나님 앞에 어른들이 찍 소리도 하지 않고 떨고 있는 것만 하나님께서 기쁘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는 모든 죄인들이 다 함께 나와서 함께 벌을 받아야 하고 책망을 들어야 하고 은혜를 받아야 할 바로 그 시간입니다.
아이들을 세상 어른들 모임에 빼놓듯이 예배를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는 그 예배에 하나님의 안면과 취향은 배제해버리고 마치 천주교가 장엄하게 폼만 잡다가 예배를 미사라는 제사로 바꾼 것처럼 그런 죽은 예배가 되어버립니다.
7.결론적으로 말하면
예배는 최대한 그 교회 소속한 생명은 소속과 입장과 연령과 신앙수준 어떤 것에도 차별없이 꼭같이 하나님 앞에 한 생명을 가진 같은 하나님 자녀 자격으로 나와서 함께 앉아야 합니다.
혹 전도나 기타 교육 목적에서 따로 나누는 경우도 있겠지만, 공회 신앙수준의 경험과 판단으로는 주일학교나 중간반 정도를 분리해서 운영하는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경우라 해도 주일학교나 중간반에 참석한 것은 과외교습을 한번 더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 교회 교인이면 젖먹이라도 원칙적으로는 모든 교인이 예배드리는 '대예배'에 함께 참석하는 것이 옳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따라서 공회 교회들이 아직도 젖먹이까지 중고등학생까지 일반 예배에 당연하게 참석하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교회들은 여전히 초대교회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살아있는 교회들입니다. 혹시 집회처럼 어른들도 힘든 정도의 오랜 예배시간에도 그렇게 된다면 더욱 신앙이 있는 교회일 것입니다. 총공회 교회는 한번 예배에 설교만 2-4시간, 하루 3번 예배로 진행되는 11번 집회기간에 젖먹이부터 모든 학생과 어른들이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가능했고, 그것이 교회 복음운동에 크게 도움이 되었고, 그런 현상은 초대교회에 일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오늘 21세기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재림때까지 가야 할 신약교회의 자연스런 모습이며 정상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a
2004-06-04 17:40:43
yilee [ E-mail ]
5.예배 시간의 형태 (예배 2)
제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예배~]
내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예배-]/[-교리-교회론-교회운영-공회-공회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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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교회의 예배 모임에 대하여 여러 면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예배시간의 형태'문제는 연장선이므로 앞에서 드린 원칙을 근거로 추가해서 이번 질문 내용에만 집중하겠습니다.
1.주일 예배를 몇 부로 나누는 문제
①예배시간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주일에 한번 예배를 보면 1학년 수준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일에 전교인들이 두번 예배를 본다면 더 좋은 교회입니다. 복이 더 많습니다.
주일에 전교인들이 젖먹이까지 3번 4번을 예배드릴 수 있다면 참으로 복입니다.
총공회 교회들은 주일날 전교인을 기준으로는 2회 예배가 기본입니다. 그러나 열심있는 교인들은 주일날 하루에 4번을 예배 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학교 오전예배, 오전대예배, 오후대예배, 주일학교 오후예배 이렇게 4번을 드리는 것은, 좀 열심히 믿는 가정이면 그 가정의 젖먹이나 주일학생이나 그 가정의 부부까지도 기본적입니다.
백목사님 생전 1989년을 기준으로 말씀드린다면, 전교인의 약 4분의 1정도가 주일마다 4번씩 예배를 참석한 정도입니다. 이곳은 이런 구체적인 통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백목사님이 목회했던 서부교회는 단순하게 예배당 크기와 출석교인 등록숫자만으로 한국내 유명교회와 비교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질적으로 비교가 될 교회가 없었습니다.
②현재 일반 교회들이 주일예배 숫자를 많게 하는 것은 타락의 정도입니다.
예배 시간을 둘로 나누어 개인 일정과 취향에 따라 한번만 오라는 식입니다.
예배 시간을 다섯개로 나누어 자기 가족들의 개인 사정에 따라 골라잡으라는 식입니다.
이는 일반교회들이 신학교 교과서를 인용하여 공회의 재독예배를 비판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런 표현에 정면 위배되는 일입니다. 네 형편 따라 네 사정 따라 네 개인 일정 따라 교회가 여러 형태로 상품을 개발해서 서비스를 해 주겠다는 자세입니다. 물건을 파는 장사가 손님을 상대로는 이런 아이디어와 시스템을 개발했다면 사업에 성공할 훌륭한 비지니스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이런 자세와 방법으로 상대한다면 이는 불경죄입니다. 예배를 손님을 호객하는 영업수준으로 변질시킨 큰 죄가 됩니다. 물론 교인 대부분이 전부 참석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서 혹 신앙어린 교인 한 두 사람이 자기 수준으로서는 전체 예배시간을 맞추지 못하니까 그 어린 신앙의 사람을 기르기 위해 일시적으로 그런 사람 몇 명을 위해 초대형교회가 정규예배 시간 외에 몇 부 예배를 더 설치하여 담임목회자가 하루에 5번 6번 설교를 한다고 하면, 공회 교회보다 더 충성한 순생 순교의 목회자라 하겠습니다. 아마 그렇게 충성하고는 우리 경험에 오래살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하다가 꼭 그 일 때문에만 무리해서 죽는다면 이곳은 서슴치 않고 순교라는 이름도 붙이겠습니다.
문제는, 신앙이 있든 없든 소속 교인 전체를 상대로 우리 교회는 주일날 예배 시간을 몇 개로 진열해 놓았으니까 뷔페 골라 먹듯 알아서 챙겨가시라는 자세로 예배 숫자를 많게 해놓았다면 예배라는 개념 자체를 전혀 모른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여러개의 예배 중에 한 개를 교회가 전략적으로 육성하여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주일대예배를 여러번 보는 교회들치고 바른 중심에서 나누었다는 경우는 아직 이곳이 아는 대로는 없습니다.
아마 공회 교회가 예배 갯수를 그런 자세로 여러개로 나누고 일반 교회들이 예배 본질을 근거로 그것을 거부했다면 일반교회들은 서슴치 않고 공회 교회를 나누어서 예배보는 죄 하나만으로도 이단으로 정죄했을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이단에 해당할 죄가 적용될 때는 자기를 그렇게 비판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습니다.
③공회 교회의 예배시간 숫자가 전교인 참석 단일 예배로 운영되는 것은 자랑할 일입니다.
공회 노선에서는 자랑하고 상받을 것이 많으나 공회 노선 자체가 자기 광고나 선전이나 프래카드를 내거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특별히 거론할 사안이 있어야 한번씩 이런 표현을 하게 됩니다.
예배숫자가 하나로 운영되는 총공회 예배는 오늘 모든 교회들에게 모범감입니다. 그리고 지금 가장 보수적으로 운영되는 교단들까지 몇 부 예배로 나누어 보는 것은 일반화 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2.주일 오전 예배시간의 시각 문제
①주일오전 예배는 일찍 드릴수록 좋은 교회입니다.
서부교회는 주일오전 예배를 10시에 보고 있습니다. 한 때 10시 30분으로 드린 적도 있었으나 하나님 앞에 너무 성의가 없다는 느낌이 있어 10시 예배로 고정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앞당기면 더 좋겠지만 항상 새로 들어오는 어린 교인들과 아직까지 자기 생활 환경을 주일 중심으로 바꾸지 못한 사람들을 폭넓게 고려해서 10시로 정한 것입니다.
다른 교회들의 주일오전 예배는 대개 11시입니다. 더 늦으면 점심시간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더 앞당기면 주일날 아침 실컷 잠을 자야 하는데 교인들을 일찍 깨우게 되면 화가 나서 다른 교회로 가버릴까 해서 눈치를 보게 된 것입니다.
②주일예배시간의 시각에 대한 원칙은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 고려할 것은 사람이 자기 생활 편리를 따라 자주 변동하거나 자기 게으름 때문에 늦추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중심이고 우리는 하나님 눈치를 살피며 그분 중심으로 그분 좋아하는 방법대로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가는 시간부터 내가 불편하고 귀찮고 어려워도 그런 나를 꺾어 끌어다가 놓을 수 있어야 예배의 기본 자세가 바를 것입니다.
교회가 타락하면 예배시간이 뒤로 늦추어집니다. 그리고 예배의 숫자가 줄어듭니다. 그리고 예배시간 안에 말씀 증거 시간은 줄어들고 교인들이 흥미롭게 생각하는 찬송과 간증이 많아집니다. 사람 속에 생명력이 줄어들면 손발이 차가워지는 것처럼 교회가 생명을 잃어가는 가장 외부의 표시 중에 하나는 예배의 횟수와 설교시간과 예배시간이 개인 일정에 맞게끔 고무줄이 되어 축 늘어지는 현상을 보이게 됩니다.
③현재 우리 사회의 일반적 상황에서 적당한 예배 시간을 정해본다면
회사출근이 몇 시인가요? 아이들 학교 대문에 도착해야 하는 시간은 몇 시인가요? 세상일에 대하여는 이렇게 두 눈을 부릅뜨고 아침잠을 설쳐가며 눈을 비벼가며 넥타이를 졸라매고 바가지가 깨지도록 밀고 들어가고, 하나님께 나오는 시간은, 1주일 동안 세상일 하다가 지친 몸을 충분히 재우고 이불 속에서 뒤척이다가 더이상 자고 싶어도 세상이 밝아져서 잠을 잘 수 없는 아침 9시 10시에 눈을 뜨서 그때 준비해서 가면 꼭 맞는 시간이 11시입니다.
현재 급격하게 예배당과 주거환경의 거리가 멀어져서 일찍 서두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도 예배당 근처로 집을 옮겼어야 했기 때문에 그분들이 주일예배를 위해 평일보다 일찍 서두시는 것은 복이며 이 글에서 비판하는 것에는 해당이 없지만 교회 부근으로 집을 옮기지 않은 면은 더 크게 회개할 점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상황을 가지고 예배시간을 정해 본다면 주일 오전예배는 11시보다 더 당겨져야 합니다. 다만 주일학교 때문에 더 이상 당기면 지장이 있어 10시 또는 10시 30분으로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일학교 예배시간을 학교 가는 시간보다 더 앞당기게 되면 믿는 집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안 믿는 집 아이들과, 주일학교 반사선생님들의 심방 활동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모든 면을 고려해서, 서부교회는 10시에 예배를 드리고, 주일학교는 8시 30분에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시간이 지켜지고 있다면 아직도 살아 있는 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예배시간이 흔들린다면 누구의 결정에 의한 것이든 후퇴요 타락일 것입니다.
3.예배시각을 두고 생각할 문제
①한번 정한 시간은 최대한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농사짓는 시골의 경우는 봄과 겨울을 따라 시간이 바뀔 수 있습니다. 시골의 시간은 태양의 각도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조량에 따라 생활과 모든 환경이 자연상태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어두워지는 정도가 기준입니다. 어떤 경우든 예배 시간은 고정적이어야 합니다. 한번 정할 때는 모든 면을 고려하되 한번 정한 뒤에는 이런 저런 환경에 따라 수시로 바뀔수록 좋지 않습니다.
②예배시간을 정할 때는 어린 교인도 고려해야 하지만 그들의 훗날도 고려해야 합니다.
어린 교인들의 형편도 고려해야 하지만, 그 어린 교인들이 항상 어린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라가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서 일반 교인들의 가장 일반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좀더 어린 교인, 좀더 불편한 교인, 좀더 약한 사람들을 배려하되 그들 때문에 전체 교인들이 나태해질 때 발생할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③하나님 앞에 성의 있는 결정이 되어야 합니다.
새해 첫날 세배를 드리러 가는 사람처럼, 새색시 첫인사처럼, 첫 출근하는 회사원이 출근시간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시험날 학생의 그런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주일 아침이 성의있게 되고, 또 일반 예배시간도 정성을 기울일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적당할 것인가? 이는 교회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원칙은 같아야 할 것입니다.
4.주일저녁예배 대신에 오후예배를 드리는 것
우리 나라 교회들은 주일날 2회 예배가 거의 원칙처럼 되어 있습니다. 주일날 2회 예배를 본다면, 오전과 오후가 제일 적당합니다. 주일 하루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로만 상대한다면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이 적당하다는 것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일날을 불신자들처럼 쉬는 날로 공휴일로 밀렸던 일도 하고 시내 구경도 하고 바람도 쐬는 날로 상대를 한다면 주일 오후시간을 비워두어야 개인 일정에 따라 자유시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후에 예배를 드리게 되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주일을 주일로 상대한다면, 주일은 예배 보는 것 외에 개인 일정을 따라 움직이면 안 되니까 당연히 오전과 오후 한번씩이 좋고, 저녁예배까지 있으면 더 좋겠지만 교회가 전 교인이 모이는 예배를 결정할 때는 전체 교인들의 신앙을 고려해야 하고 또 경험으로 2회 예배 정도면 충분히 은혜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가 건전할 때는 오전 오후로 2회 예배를 드리게 되고 오전과 저녁으로 드리지 않지만, 교회가 점점 세상으로 속화되고 주일을 개인의 밀려던 여러 세상 용무를 보거나 개인 휴식의 날로 오해를 하게 되면 오후예배를 저녁으로 미루고 그 시간에 예배시간처럼 요긴한 복음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죄짓는 일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일저녁예배 대신에 주일오후예배를 보는 것은 교회가 건전하고 살아있고 아직도 바로 운영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손양원목사님께 직접 배웠던 교회들은 주일저녁예배 대신에 지금도 주일오전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소속이 통합측이어서 넓게 믿는 교단인데도 손양원목사님이 생전 예배를 어떻게 대하고 가르쳤는지를 기억하여 지금도 예배시간 운영이 일반교회와 판이하게 다릅니다.
2004-06-04 17:41:10
yilee [ E-mail ]
6.예배시간의 주기도문 순서
제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예배~]
내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예배-]/[-교리-교회론-교회운영-공회-공회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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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관련된 답변을 통해서 언제 한번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예배 중에 암송하는 문제를 설명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관련자료를 찾으면 다시 소개드리겠고, 우선 간단히 안내드린다면
1.예배 순서는 성경에 따로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현재 신학교에서 예배 순서를 20개 30개씩 정해놓고 모델로 외우게 하는 등 예배의 형식 발전은 하늘을 찌를 듯 진행하고 있지만, 천주교를 너무 닮아간다는 생각 뿐입니다. 예배의 형식과 외형과 절차가 발전하면 인간 눈에는 거창하고 장엄하여 보기가 좋고 또 하나님께 좀더 잘 바쳐지는 예배라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외형이 복잡해지고 많아지고 화려해질수록 내용은 꼭 빈깡통이 되어버린다는 점을 유심히 보셨으면 합니다. 그냥 행복해 하는 두 부부가 아무 차린 것이나 격식이 없어도 진정한 사랑 하나로 하나된 경우가 있고, 황실의 결혼식처럼 웅장하게 거창하게 치밀하게 준비하고 절차를 밟아 하나가 되는 결혼은 너무도 완벽하게 하나되는 부부 같은데 실은 '연출'인 경우가 많고 실제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경우라 해도 이런 연출이 지나치면 둘 사이에 고장을 일으켜 떼놓게 됩니다.
2.예배 시간 도중에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은
이 예배에 모인 우리 전부는 사도신경의 내용을 의심않고 믿는다는 확인입니다. 또 주기도문은 주님이 가르친 기도문이니까 그 중요성과 가치성은 이루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주기도문 암송을 예배의 필수 순서라고 정해버리면 그 순간부터 주기도문이 주기도문이어서 잘못된 것이 아니고 주기도문이 성경에도 없는 예배형식에 차출이 되어 악용되는 위험성을 우려할 수 있습니다.
일반교회 교인들이 이런 문제로 질문을 하거나 지적을 한다면, 우리는 늘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표현, 즉 '개혁주의 신앙'을 들고 막으면 됩니다. 일반 교단들 중에서 넓은 교회들은 무엇이든 네 멋대로 하라는 식입니다. 그러니 그런 넓은 교단, 예를 들면 감리교나 통합측 장로교나 기장측이나 순복음교회 등에서는 지적을 할 리도 없지만 그런 곳에서 지적을 하면 성경도 부인하는 사람들이 무슨 성경에 기록된 주기도문을 암송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슬쩍 쏘아붙이면 금방 불을 잡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합동측이나 고신처럼 정통과 보수와 역사를 들먹이는 교단 출신들이 그런 표현을 한다면, 그들의 가장 가까운 족보는 '칼빈의 개혁주의 신앙노선'입니다. 천주교에서 교회를 살려나올 때 정신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존립 이유정도가 되는데, 개혁주의 신앙노선은 천주교가 예배를 형식화 고착화 시켜 미사라는 우상예배를 만들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칼빈은 묘단장도 하지 말라고 한 정도여서 칼빈주의 신학자인 박윤서목사님 묘는 버려진 무묘처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성자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자랑을 하는 정도입니다.
그런 개혁교회의 정신에서는 예배 순서를 형식으로 짜맞추고 진행하는 것을 배척합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으로 조용히 가르치는 것으로 전부를 삼을 뿐입니다. 그런데 개혁주의 신앙으로 교회가 부흥을 하고 발전을 하게 되자 갑자기 예배 순서가 늘어나가고 화려해지고 그리고 그런 것이 원래 그리 되어야 하는 공식행사 순서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찬송가도 예배시작에 부를 찬송이 따로 있는 식인데, 이는 오늘 교회가 천주교화 된 큰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2004-06-04 17:41:46
yilee [ E-mail ]
7.타교회와 다른 설교
제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예배~]
내용분류 : [-교리-교회론-교회운영-예배-]/[-교리-교회론-교회운영-공회-공회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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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공회 교회들의 설교는 일반 교회에 비하여 이런 점에서 특별한 차이를 보입니다.
1.우선, 설교 내용이 거의 백목사님 설교집을 원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총공회 목회자들은 설교는 잘하는데 전부 백목사님 설교를 배껴서 옮기니까 자기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을 많이 듣습니다. 반론을 위해서 반론을 하는 식으로 반론한다면, 일반 교회 목회자들은 칼빈이나 박윤선과 같은 신학자들의 책들을 보고 배껴서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수백년 전부터 항상 써먹는 것이니까 최신 설교 자료인 백목사님의 설교를 많이 인용한다면 오히려 최신식이어서 새롭다고 평가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보고 배끼고 싶어도 배껴서 은혜되는 설교들이 없어 배낄 것도 없는 오늘 시대에 배껴서 설교해도 훌륭한 설교가 되고 교인들이 은혜를 받는 설교가 있다면 이 설교는 이 시대 설교자들이 반드시 살펴보고 그 차원을 섭렵해서 그 이상으로 발전하기 위해 눈여겨 봐야 할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설명드린 이 내용은 말싸움에 상대방 이기기 식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실은 공회 목회자들의 설교에 관한 핵심 신앙노선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곳 홈에서 '재독설교'라는 제목으로 많은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에서 이 문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있으므로 간단하게 줄이겠습니다.
2.설교 내용에 신학적 이론이나 원어 등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신학 이론이나 원어가 성경 깨달음에 필요하고 교인들이 은혜가 되는 방향으로 사용된다면 좋습니다. 그러나 대개 신학적 이론이나 원어 소개가, 마치 의사들이 영어로 처방전을 휘갈겨서 무슨 특별한 것을 아는 것처럼 권위를 유지하여 장사를 하는데, 목회자들이 그런 신학내용이나 원어를 그 설교에서 왜 인용했는지를 모를 부분에서 공연히 한번씩 끄집어내는 것은 설교자의 유식과 교인들과 다른 차원의 무엇을 안다는 그런 과시용인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총공회 신앙노선에서는, 성경으로 교인을 가르칠 목회자가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혹시 뒤져봐야 할 부분들이 있을지 몰라도, 일반 교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그들에게 그들 현실에서 말씀으로 살게하는 일에는 신학설이나 원어가 필요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판단입니다. 그래서 필요없는 것은 제거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공회 목회자의 설교에는 신학지식이나 원어가 거의 들어 있지 않습니다.
말씀은 누구든지 쉽게 간단하게 그리고 자기 현실에 적용되고 기준이 되는 내용으로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3.설교들이 성경 본문에 집중하다 보니까 설교가 어렵습니다.
일반 교단 설교에는 정치 이야기가 많고 사회 사업 내용도 많으나 공회 목회자들의 설교는 성경 본문을 간단히 읽고 한 말씀 한 말씀을 세밀하게 깊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단은 한 시간 설교에 성경 한 장을 훑어가며 설교를 하는데, 그것은 성경상식을 가르치는 성경공부는 될지라도 교인이 먹고 생활 속에서 살아야 할 양식이 되기는 너무 부족합니다.
말씀은 그 양을 많이 알아야 하는 면도 중요하지만, 한 말씀 한 말씀 속에 나의 현실에서 내가 죽기를 각오하고 실행해야 할 나의 현실에 실제 일어날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한 시간 설교에 한 두 절 이상을 설교하는 것은 경험상 무리입니다. 실제로는 한 단어 두 단어를 가지고 한 주간을 살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의 신앙깊이에 따라 점점 더 축소되고 좁아집니다.
성경의 전반적 파악은 평소 성경읽기와 연경공부를 통해서 해야 하고, 설교시간에는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원하는 뜻을 찾아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말씀의 내용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깊어지는 만큼 본문은 조금밖에 설교하지 못하는데, 이렇게 깊이 들어가보면 그 속에서 성경 전부로 통하는 지하통로가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좁게 깊게 들어가면 성경 전체를 파악하는 사람이 되고, 깊이는 들어가지 않고 외형만 자꾸 훑게 되면 평생 수박의 겉만 핥다가 끝나는 경우가 전부입니다.
공회설교자들이 현재로서는 가장 중요하게 참고하는 설교자료집인 백목사님의 설교세계는 그 깊이로는 비교할 설교자료가 이곳이 아는 대로는 아직 없습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계속 그 설교집을 참고하여 어떻게 해서 성경을 이렇게 깊이 깨닫고 파악하게 되었는지 연구하고 그렇게 파악하기 전까지는 그 설교를 잘 전달해서 일반 교인들이 먹어봐야 배가 부르지 않는 나의 설교보다 먹고서 힘을 얻는 더 좋은 설교를 옮기는 일을 주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다보면 설교를 전달하는 사람이 제일 앞서 설교세계를 알게 될 것입니다. 참고로, 진리는 개성으로 분화되는 것이 아니고 단일성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사실은 내가 알지 못했는데 만일 다른 설교자가 그런 놀라운 내용을 설교했다면 성경으로 그 설교 내용의 진위를 확인한 다음 옳은 내용이라고 파악이 되면 얼른 배껴서 따라 해야되지,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독창적인 설교를 하겠다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새학설을 내놓으면 세상 대학교에서는 참신한 학설이라고 평가할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대마귀라고 할 것입니다. 누가 발견했던 좋은 것 옳은 것 유익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 받아 말한 것입니다. 따라 하는 것이 좋습니다.
4.설교 내용에 목회자의 개인사나 간증형식이 배제됩니다.
일반 교회의 설교에서는 흔히 설교자의 가정사나 개인사가 많이 소개되어 쉽고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설교가 많습니다. 또 설교자 대신 특별하게 경험을 가진 교인을 강단에 세워 간증을 많이 듣습니다.
설교는 나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각을 찾아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웅변이나 강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자 개인사를 소개하지 않고는 안 되는 부분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설교자 개인은 강단 위에서 마치 죽은 짐승처럼 아무 개인적인 것이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간증 형식을 삼가하는 것은, 우선 듣기는 은혜로운 것 같으나 간증자 자신이 교만죄로 시험드는 경우가 많고 또 남의 간증을 재미있게 듣다보면 설교처럼 자기가 살아야 할 자기에게 주어지는 명령은 따분하고 어려워서 자꾸 듣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간증은 신앙어린 사람들에게 한번씩 아주 직효를 나타내는데 멀리 두고 넓게 계산해 보면 거의 대부분 밑지는 장사로 결말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전부가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금지할 수는 없으나 이런 위험성 때문에 공회 교회는 간증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5.설교 시간이 너무 깁니다.
목회자가 은혜도 끼치지 못하면서 혼자 취하여 설교를 오래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짧게 한다고 해서 은혜가 더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없는 설교가 길게 나온다고 생각되면 연단의 시간이라고 생각하시고 자신의 몸을 훈련하듯 앉혀놓으시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설교자에게 말씀의 은혜와 능력을 더해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반드시 들어 주실 것입니다.
은혜로운 설교인데 내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고 있었다면 나를 밝게 해 주실 것이고, 은혜가 없는 설교여서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은혜가 없는 설교인데도 은혜롭게 들리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아니면 내가 밀어내지 않아도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있게 설교하는 분을 교체해 주실 것입니다. 어쨌든 은혜가 되지 않는데 설교를 길게 한다고 생각이 들면,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일 정상적인 경우라고 한다면, 설교는 일반교회처럼 그렇게 짧게 해서는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 라면을 끓여 먹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곰탕을 끓이는 주방에서 5분만에 식사거리를 들고 나온다면 무슨 고장이 난 것입니다. 밥을 익히는 데에는 적어도 3-40분 시간이 필요합니다.
공회 신앙노선의 경험과 시각에서는 설교는 적어도 4-50분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대예배 순수 설교 시간이 30분 정도라 한다면 문제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어서 객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참고만 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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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72023-06-14 08:48구 게시판 자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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