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복음과 율법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2004-05-30 01:11:48
질문자
[율법] 복음과 율법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제목분류 : [~교리~계시론~성경론~율법~]
내용분류 : [-교리-계시론-성경론-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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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이 곳의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연구해서 답을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 도리가 되겠으나 나름대로 약간의 정리가 되는 것이 있어 방향이 맞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이렇게 질문을 드립니다.
주로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설명하면 느낌에 반대적인 개념으로 들려집니다.
율법은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한다는 개념으로, 복음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려한다는 개념으로 설명을 주로 하며 거기서 더 나아가 더이상 율법에 얽메이는 것은 틀렸다,복음적이지 않다는 논리로 나아가는 것을 종종 봅니다.
저는 결과적으로 구약에서의 모세의 율법은 폐하여진 것으로 전락시키고 은혜의 복음아래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해방감으로 나아가 오늘 기독교의 타락으로 나아갔다고 개인적으로 생각을 가져 봅니다.
1.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고 하셨고,율법의 강령이 사랑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 부분을 놓지고 설명들을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
2.구약의 율법은 오늘 우리에게 건설구원을 가르치고, 또 요구하는 법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것.
3.즉 율법과 복음이 하나가 되어야 하고 또 나뉠 수 없는 것이 아닌가요?(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의 개념을 전제하여서)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신약성경만 들고 다니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신약성경도 무거우면 요한복음3:16만 외우고 다니면 더이상 성경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우둔한 질문이나마 좋은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2004-05-30 07:27:46
yilee [ E-mail ]
정리를 잘 하셨습니다.
제목분류 : [~교리~계시론~성경론~율법~]
내용분류 : [-교리-계시론-성경론-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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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총공회 교인들은 주일을 지금도 엄하게 지키는데, 다른 교회에서
'총공회는 율법주의다'는 표현을 흔히 합니다. 심지어 총공회 소속 교수까지도 '행위를 강조하면 율법주의가 된다'고 경고하여 백목사님과 정면으로 맞선 적이 있습니다. 해외에서 10여년 정통 신학을 밟은 분으로 양심상 그렇게 발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본다면, 율법에 대한 정통 교리의 지나친 경계와 부정적 시각은 천주교에서 분리되어 나오던 형편을 가지고 이해를 해 주어야 합니다. 천주교는, 구약 이스라엘이 구약 성경을 대하듯 성경을 그렇게 대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열심히 살아야 그 행동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대속을 뺀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행동이 빠진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점이 들어갔기 때문에 이단입니다. 예수님의 대속만으로 얻는 구원, 전적 은혜의 구원을 부인한 것이 천주교입니다.
2.윗글로 정리한 것은 잘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1.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고 하셨고,율법의 강령이 사랑이라
>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 부분을 놓지고 설명들을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하나의 성경으로 연결시킨 교리나 가르침은 답변자로서 아직까지 접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신학자들이 무엇이라고 설명을 해도, 실제 교인들에게는 구약은 '고서'이거나 'B급 성경'이고 그대신 신약은 '현재 해당되는 성경'이며 'A급 성경'입니다.
율법의 강령을 사랑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풀어보면 신구약은 기록해 주신 연대만 차이가 있지, '성경'으로서 차별을 둘 수가 없습니다.
>2.구약의 율법은 오늘 우리에게 건설구원을 가르치고, 또 요구하는 법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것.
구약의 율법도 신약의 복음도 실제로는 전부가 '율법'이며 전부가 '복음'입니다. 구약의 율법도 예수님으로만 얻는 구원을 가르치고 있고 신약의 복음도 그 속에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기준으로 현실에서 순종해야 할 법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만 구약은 시작부분을 중심으로 기록했고 신약은 대문에서 안으로 들어가 속에 있는 것을 주로 기록했다는 정도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도 신약의 복음도, 다 같이 우리에게 건설구원을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안 믿던 사람이 천국을 가게 되는 기본구원은 그 사람이 그런 사정을 알고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죽은 상태이므로 듣지도 알지도 못하던 천국을 그냥 얻게 된 것입니다. 이후 자기가 노력하는 것은 전부 건설구원에 필요한 말씀으로 모시게 되는데 이런 점에서 구약의 율법도 신약 우리에게 믿은 이후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행동 그 마음 하나까지도 다 가르치고 있습니다.
>3.즉 율법과 복음이 하나가 되어야 하고 또 나뉠 수 없는 것이 아닌가요?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의 개념을 전제하여서)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신약성경만 들고 다니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신약성경도 무거우면 요한복음3:16만 외우고 다니면 더이상 성경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잘 표현하셨습니다. 실제 일반 교회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는 신약만 가지고 다니면 된다는 정도의 인식이 있습니다. 읽는 것도 신약 중심이고 설교 내용도 그렇습니다. 구약은 고전으로 신약은 현재 사용해야 할 말씀으로 상대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그렇게 상대하다가 결국 구약이 말하는 하나님은 신약이 가르치는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초대교회 이단도 있었습니다. 역사에 한번 나타났던 이단은 그 후에도 항상 같은 분위기에 같은 내용을 가지고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이름은 달리 사용하고 얼굴 화장도 바꿔버리기 때문에 눈치 없는 사람은 같은 이단에게 한 자리에서 몇 번이고 속게 됩니다.
2004-06-01 11:28:42
(개인메일)
윗글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보충을 한다면
제목분류 : [~교리~계시론~성경론~율법~]
내용분류 : [-교리-계시론-성경론-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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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이라고도 하며 복음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말씀으로 명령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면 복이되고 어기면 사망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때의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즉 지키면 복이되고 어기면 사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말씀을 순종할 때는 하나님의 복으로 살았지만
말씀을 어기고 부터 사망이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망에서 생명으로 다시 회복(=구원)을 이루어 가는 길은 4가지 문제를 다 해결해야 합니다
이4가지 문제(죄, 의, 화목, 소망문제)를 땅에 있는 어떤 인생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생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 이 4가지 구원문제를 해결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없는 분인 예수님이 오셔서 사활의 대속으로 해결을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 단독으로 이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기본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으므로 논외로 하고 건설구원에 대하여 ...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있어 예수님의 대속없이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려고 하는 사상을 율법주의라 하고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있어 예수님의 대속을 힘입어 구원을 이루어 나가려하는 사상을 대속주의 혹은 복음주의라 합니다
율법주의든 복음주의든 구원을 이루려고 힘을 쓰는 외부모양은 같으나 어떻게 힘을 쓰느냐 하는 것은 다릅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다 지켜 내가 구원을 만들어가려고 힘을 쓰고
복음주의는 예수님이 사활의 대속으로 만들어 놓은 구원을 내가 감사히 받을려고 힘을 씁니다
즉 구원을 만드는 노력과 만들어 놓은 구원을 받는 노력의 차이일 뿐입니다(제품을 생산하는 노력과 완제품을 받는 노력의 차이)
이 때 대속없이 자기가 구원을 만들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힘을 씁니다 이때의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이 됩니다
그러나 이 율법으로 인해 지키지 못한 것이 점점 많아져서 점점 더 죄인만 되어 갈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만들어 놓은 대속의 구원을 받을려고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려고 힘을 씀니다 이때의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이 됩니다
똑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는데 한 사람은 점점 더 죄인이 되어 가고 한 사람은 점점 구원을 받아 의인이 되어 갑니다
이때의 받는 노력을 힘쓰라는 말씀으로 ("감사하라, 죽도록 충성하라, 다 하라, 믿음으로 살아라, 순종하라)
그래서 신구약 성경의 하나님 말씀은 어떤 자에게는 율법이 되고 어떤 자에게는 복음(감사.사랑)이 됩니다
구약시대를 보면 순종하면 축복받고 거역하면 망하게 되는 이치를 보게 됩니다
복음으로 받는 자는 대속의 구원을 받는 방편이 되고 율법으로 받는 자는 점점 더 죄만 가중될 뿐입니다
신약성도는 대속을 실상으로 입은 자요, 구약성도는 대속을 예약으로 입은 자이기 때문에
신약성도 구약성도, 신약시대 구약시대,신약성경 구약성경을 구별하지도 말고 제한 적용하지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신구약성경=율법(자기 힘으로는 다 지킬 수없는 법임을 알게하심--율법으로는 정죄게 하려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신구약성경=율법 + 대속(사랑)= 복음(예수님이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요 완전케하려 오셨다)
2004-06-01 11:52: 7
yilee [ E-mail ]
윗글 보충에 더하여, 조금 더 살펴보았습니다.
제목분류 : [~교리~계시론~성경론~율법~]
내용분류 : [-교리-계시론-성경론-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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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과 다른 면으로 '율법과 복음'을 전반적으로 요약하신 글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잘 보충하셨고, 특히 '복음주의적 행함'은 어떤 성격인지를 잘 설명하셨습니다.
한 가지 주제를 놓고 한 사람이 종합적으로 가장 원만하게 또 균형있게 또 정확하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잘 이해하도록 가장 간결하게 표현하게 된다면 이상적입니다. 그렇게 이상적인 인물들은 역사를 통해 볼 때 하나님께서 잘 주시지 않는다고 보입니다. 특히 오늘처럼 어두운 시대에는 각자 작은 호롱불 하나를 들고 주변을 살피며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발을 디딜 때입니다.
윗글 첫 질문에서 한 분이 율법과 복음을 살펴보셨습니다. 비록 질문 형식으로 말씀하셨으나 짧은 질문 내용 속에 '율법과 복음'의 핵심을 이해하고 계셨기 때문에 달리 설명드리지 않아도 그 질문 내용의 표현만 가지고도 정답은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답변을 길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개인메일)'로 윗글 첫 질문에 대하여 답변 겸 보충 말씀이 계셨습니다. '율법과 복음'에 대하여 중요한 말씀이 거의 다 나온 것 같습니다. 이왕 이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에 윗글을 보며 생각나는 몇 가지를 덧붙여 보았습니다.
윗글에서 1차 보충한 내용을 참고하시고, 또 덧붙여 달리 살펴본 글이라고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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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
1.’율법’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3가지 범위
①‘율법’은 하나님의 법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신 모든 법이 율법입니다. 이때 율법이라는 단어는 법률 또는 법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신 모든 법은 생명의 법이며 구원의 법입니다. 이 법 안에는 만물이 살아가는 자연의 법도 있고 사람이 살아야 하는 인생의 법도 있습니다. 또 타락 전 아담이 살아가야 하는 법도 있고 타락 후 아담과 그 후손이 지켜 다시 구원을 얻는 법도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개나 소는 이 율법 중에서 개나 소에게 해당된 법만 지켜 그들 수준에서 살 뿐이고 불택자들은 이 법을 전혀 알지 못하여 늘 이 법의 범법자로만 살기 때문에 이 법의 좋은 면은 그들에게 그림의 떡이며 택자들은 이 법을 지킬 수 있고 이 법으로 생명을 얻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②’율법’은 구약백성에게 주신 구원의 법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구약 성경을 통해 구약 백성이 살아가야 할 법을 알려 주셨으니 그 전부를 통칭해서 율법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 기록하신 모든 법은 구약백성에게 그 법 때문에 망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그 법을 지켜 생명과 구원을 얻도록 주셨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이 법을 바로 알고 바로 지켜 이 법이 주는 복과 생명과 구원을 얻은 사람은 희귀하고 구약 백성 대부분은 이 법의 껍데기만 지키다가 이 법의 혜택을 볼 수 없는 경우였습니다.
③’율법’은 특히 모세를 통해 기록한 법만을 율법이라고 부를 때도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 하는 길을 정해주시고 알렸으니 이를 율법이라고 합니다.
2.’율법’이라는 단어 때문에 발생하는 안타까움
‘율법’ 때문에 구약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상식입니다. 그러나 ‘율법’ 때문에 구약 성도들이 망했다는 것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구약 성도들의 실패를 제대로 파악하는 경우는 또한 희귀합니다. 밥을 먹다가 배탈이 난 사람을 두고 ‘조심해서 먹어야 한다’거나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한다’는 등으로 바르게 교훈을 삼은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은 ‘밥을 먹다가 배탈이 났으니 밥이라는 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거나 ‘입으로 먹으면 탈이 나니까 입에는 어떤 것도 넣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아주 엉뚱하게 해석을 하여 구약 백성이 율법을 잘못 지켜 망한 경우가 많았듯이 신약 백성들은 구약 백성의 잘못을 ‘잘못 해석’하여 그들 못지 않게 단체 멸망을 받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요약하면 율법이라는 단어는 오늘 모든 사람들에게 나쁜 단어로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율법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상대한 구약 교회의 잘못이 잘못입니다. 구약 교회의 구원은 ‘율법’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구약 교회가 ‘율법’이라는 단어를 통해 구원을 얻은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율법’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주 고약하고 흉측한 죄인이 되어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같은 논리로 말한다면 오늘 신약의 구원은 ‘복음’ 또는 ‘은혜’를 통해 전달되는데, 오늘 신약교회가 복음과 은혜를 누리는 시대지만 복음을 복음으로 은혜를 은혜로 바로 받아 자기의 구원을 이루고 복을 받아가지는 경우는 희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이라는 단어를 비판하거나 은혜라는 단어를 욕한다면 이는 무지의 결과이며 철이 없어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구약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복으로 주셨고 생명으로 주셨습니다. 신약이 성경이듯이 구약도 성경입니다. 우리 신앙의 출발은 신구약 66권입니다.
3.’율법’이라는 표현
성경에 ‘율법’이라는 단어는 나쁘게 쓰인 것과 좋게 쓰인 것 2가지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구약에 사용된 ‘율법’이라는 단어는 좋게 쓰인 것입니다. 구원을 향한 길로 주신 것입니다.
신약에 사용된 ‘율법’이라는 단어는 주로 나쁘게 쓰인 것입니다.
구약에 사용된 ‘율법’이 좋게 사용된 이유는 이 율법을 주신 이유가 구약 교회에게 생명과 복을 주시기 위해서 내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약에 사용된 ‘율법’이라는 단어가 거의 나쁘게만 사용된 것은 구약교회가 그 율법을 잘못 알고 잘못 상대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므로 구약교회를 거울로 삼아 가르칠 때 율법을 잘못 사용한 경우를 더욱 책망을 많이 한 것입니다.
4.’율법주의’라는 표현
①잘못 사용되는 ‘율법주의’
여기서 우리는 ‘율법주의’라는 단어를 조심해서 상대했으면 합니다. 율법주의는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조어’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로 내놓으신 율법을 구약 이스라엘이 잘못 상대하여 그 율법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고 그 율법 때문에 망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 ‘율법을 잘못 상대하여 실패하게 된 구약교회의 신앙’을 한 마디로 표현할 때 ‘율법주의’라는 단어를 붙였습니다. 그 단어의 뜻은 율법만이면 다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껍데기 행동만 지키면 전부라는 식이 구약교회의 잘못된 인식인데 그런 행태를 신학적으로 ‘율법주의’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주의’라는 표현은 율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율법을 지킨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율법의 명령을 외부 껍데기 행동으로 발라 맞추어 지키기만 하면 다 된다는 바로 그 인식 그 사상 그 신앙을 비판한 표현입니다. 말하자면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기만 하면 율법을 지킨 줄 알았고 짐승을 잡아 제사만 드리면 그것으로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율법이 요구한 것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과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행동을 우선 하도록 명령한 다음 그런 행동 뒤에, 그런 행동 속에 추가해서 지켜야 할 내용이 있고 알맹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백성들이 가장 외부로 나타난 명령만 지키면 그것이 율법의 전부인 줄 알았기 때문에 그 율법을 지키지 않으므로 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주의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비판하고 탄식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율법주의’란 율법 자체를 부인하거나 비판하거나 율법 자체를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율법주의’라는 단어를 써먹는 이들 대부분은, 왜 주일을 그렇게 열심히 지키려고 하느냐고 불평을 할 때마다 ‘율법주의’를 쉽게 끄집어 내고 있습니다. 이는 망발이며 망언입니다. 이는 불신자급 발언입니다. 주일을 열심히 지키도록 명령한 것은 성경이니 열심히 지키려는 그 노력을 비판할 것이 아니고 왜 열심히 지키려는 행동에만 치중을 하다가 그 행동을 명령한 그 주일 계명 속에 더 중요하고 더 깊이 묻혀 있는 다른 면은 보지 않느냐고 비판을 해야 합니다.
②’율법주의’란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행동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신앙을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반대로 ‘복음주의’란 구원은 하나님 명령을 지키든 어기든 상관이 없고, 우리가 알지도 못할 때 예수님의 대속이 완성되어 이 대속이 무조건 주어지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무조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 ‘복음주의’입니다. ‘복음’주의라는 단어가 붙게 된 것은 아무 노력 아무 수고도 없이 예수님 대속으로 무조건 천국에 가게 된다는 이 소식은 복된 소식이니 ‘복음’이며 복음주의란 은혜로 무조건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을 표현한 것입니다.
5.오늘 ‘율법’과 ‘복음’을 논한다면
우선 율법과 복음은 다 같은 하나님 말씀임을 한번 더 확정지워 놓아야 합니다. 신약과 구약교회는 신앙이 어리고 장성한 차이가 있고, 또 예수님의 대속이 이루어진 상태와 앞으로 이루어질 미래를 둔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가르쳤을 뿐이지 실은 내용은 동일합니다.
구약에는 예수님의 대속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제사제도 등 몇 가지 명령을 주셔서 그 명령을 법으로 삼아 지키면 일단계 신앙이 되었고 그 일단계 신앙에서 좀더 자라게 되면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지키게 하신 그 법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제사제도 속에 장차 오실 예수님의 대속이 들어 있고, 안식일 속에 대속으로 가질 참 안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차로 껍데기 율법을 지키고 이차로 그 율법을 지키면서 그 속에 있는 미래의 대속을 발견하고 그 대속을 바라보게 되면 구약의 백성도 겉으로는 율법을 지켰으나 속으로는 예수님의 대속을 발견하여 그 대속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는 전적 은혜요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구원이 아닙니다.
따라서 구약은 겉으로는 행동으로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는 것 같지만 속으로 살펴보면 실은 예수님 대속을 은혜로 받아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받은 사람이 율법을 지키느라고 행동한 모든 행동은 그 사람의 심신의 성화에 관련된 것입니다.
신약에는 예수님의 대속이 이미 완성된 상태에서 나누어지는 때입니다. 그래서 구약처럼 장차 올 예수님을 알려 주시려고 이런 저런 제도와 명령을 만들어야 했던 구약과 달리 그냥 예수님만 전하면 그것으로 전부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대속하셨으니 이 대속을 받으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 대속을 받는 수고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조차도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전적 은혜로 건네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신약교회는 어떤 행동도 어떤 성경도 어떤 말씀도 지킬 것 없이 구원은 바로 전해지고 주어집니다. 이것이 복음이니, 이렇게 믿는 것이 복음주의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천국갈 구원을 받아가진 이미 믿는 사람들은 왜 말씀을 지키는가? 이미 믿은 사람이 말씀을 지키는 것은 자기 속의 심신의 더러움은 각자 믿는 사람의 자기 노력에 따라 깨끗해지는 정도가 다를 것이니 각자가 천국에서 영원히 얼마나 깨끗한 사람으로 실력있는 사람으로 사느냐는 그 양의 차이를 결정하는 것이지,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것은 아니라는 신앙이 복음주의입니다. 그렇다 해도 자기 신앙건설은 우리 행동에 달려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신앙건설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우리 의지로 노력하도록 성경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조차도 다시 더 깊이 살펴보면 ‘복음’주의로만 가능하게 됩니다.
그 신앙건설이 가능하게 된 원인이 ‘기본구원’의 전적 은혜였으니, 신앙건설의 노력의 씨앗 자체가 전적 은혜요 예수님의 대속으로만 100%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건설을 하고자 노력하려고 마음먹은 그 동기도 그 발동도 성령이 감동시켜 그리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 움직인 것도 알고보면 하나님께서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셨고, 순종하도록 환경과 현실을 조절해 주셨고 순종이 되도록 결과까지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지도했고 인도했습니다.
마치 기본구원이, 겉으로는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수고는 한 것 같아도 실제로는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지도록 한 것까지 은혜였듯이
이제 건설구원도, 겉으로는 우리가 노력을 하고 행동을 하므로 건설이 되는 것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전부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관련된 모든 것은, 그 시작도 진행도 마지막 결과도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속의 내용물은 완전히 예수님의 대속뿐이라는 것이 복음주의이고
‘율법주의’는 이 모든 진행 중에 어느 한 부분이라도 인간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간의 필요성, 인간 행동의 필수성을 강조하면 그것이 ‘율법주의’입니다.
6.우리 현실 신앙에서 적용한다면
오늘 주일 교회로 나오는 것은 오늘 주일에 받을 은혜가 있고 성화될 부분이 있어 교회를 출석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주일날 내가 교회를 나온 것은 나의 결정이며 나의 자랑이며 나의 수고였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주일을 이렇게 어려운 중에 나오도록 마음을 먹게 하신 분도 주님이요 교회로 나올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하고 안보한 분도 주님이요 이 주일에 말씀 은혜를 받게 한 분도 주님의 전적 은혜였다, 주님 아니면 나는 주일날 예배 보러 가고 싶은 마음도 생길 수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깨닫는 분이 복음주의입니다.
만일 누가 생각하기를 오늘 교회를 나가지 않고 놀다가 혹시 사고가 나서 죽기라도 하면 지옥 갈 것이 아닌가, 내가 주일을 잘 지켜야 천국을 갈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주일을 지켰다면 율법주의입니다. 오늘 내가 놀러 가도 지옥은 가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했다면 복음주의입니다. 오늘 내가 말씀을 전부 부인하고 하나님을 욕하다가 죽어도 나는 이미 중생된 사람이라서 천국은 간다고 생각한다면 복음주의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죄를 짓다가 회개도 못하고 고치지도 못하고 죽게 되면 천국에 갈 때 평생 살았던 나의 인생 중에 지옥에 버리고 갈 요소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라고 생각했다면 복음주의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열심히 살려고 죽도록 노력하는 이유가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갈까 해서가 아니고 천국의 성화의 양과 실력의 양을 생각해서 노력했다면 그의 노력은 강할수록 많을수록 뜨거울수록 좋고 그 노력 전부는 율법주의가 아니고 은혜주의이며 복음주의입니다.
또 하나 더하여 만일 그의 그런 노력 속에 들어 있는 사상이, 이렇게 죽도록 말씀을 지켜 나의 심신을 깨끗하게 만들려는 노력이 나오게 되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좀 낫고 선천 후천의 장점이 있어 그러하다고 느꼈다면 이는 율법주의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마음조차도 주님이 주지 않았으면 어찌 내가 가질 수 있는 마음이냐고 생각했다면 그 사람이 죽도록 노력해서 말씀을 지키려고 한 것까지 전부 복음주의며 은혜주의입니다.
따라서 말씀대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면 옆에서 율법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무식해서 그렇습니다. 성경으로 기록하여 죽도록 충성하고 피를 흘리기까지 싸워 투쟁하며 말씀을 지키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하고 자기 마음에 편한 대로 죄짓고 나태 방종으로 살면서 복음주의와 율법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분들은 복음과 율법의 단어 자체를 오해했습니다. 사실은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알지 못하는 분들은 ‘복음’과 ‘율법’을 제대로 논할 수 있는 기본이 없습니다. 어느 한 쪽만 말할 수 있지 전체를 두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복음주의를 강조하는 분들에게는 왜 우리가 말씀대로 살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달라고 하면 말이 막히게 됩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죽기로 투쟁한 사람들은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일반 교인들로서는 복음주의와 은혜주의를 강조하게 되면 교회를 가기 싫을 때 굳이 가려고 노력할 것 없다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가 극도로 나태해지고 어떤 죄든지 별로 가책없이 짓게 된 원인입니다. 주일날 놀러나 다니면서 핑계를 댈 때는 나는 복음주의고 신약은 은혜의 시대라고 말하는 교인들에게 목사가 그런 교인을 무슨 근거로 무슨 말로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혹 열심 있는 분들은 어려운 교리는 몰라도 자기가 말씀대로 살지 않고는 못 견디겠고 말씀대로 사는 생활은 죽기를 각오하고 그렇게 해야겠다는 본능이 나와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그대로 살기를 노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말씀대로 열심히 사는 것은 분명히 큰 복이고 크게 신앙이 자라가는 일인데, 그 마음 속에 내가 이렇게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인식이 깊이 박히게 됩니다.
자기의 모든 노력이 알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었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노력을 했을지라도 예수님의 대속이 없었다면 말씀을 아무리 잘 지켜도 구원과는 상관없는 헛일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탈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사는 만큼 점점 자기 속에 예수님과 맞서는 엉뚱한 세력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사람은 결국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의지와 노력과 수양과 희생을 가지고 자기 구원을 건설하는 사람이 되니 복음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집니다.
7.건설구원과 삼분론과 중생교리의 중요성
이제 설명드린 모든 것은 건설구원론을 알지 못하면 이해조차 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삼분론의 영과 마음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면 끊겨진 도로에서 차를 세우고 이정표만 보고 있는 운전자와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중생교리의 본질을 알지 못하면, 전체가 하나로 깨달아 연결되지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 신앙노선의 중요성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신앙노선의 교리체계가 아니면 ‘율법과 은혜’라는 제목으로 어떤 글을 적든지 그 글은 방향을 바로 잡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 교인들에게 죄를 마음대로 짓도록 조장하여 말세 교회의 타락에 가속도를 주든지 아니면 바리새인들을 양산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혹 어떤 분들은 방종도 막고 바리새인의 잘못도 막는 글을 적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분들의 주장은 횡설수설이 되어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서 저 말하는 제멋대로의 글이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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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72023-06-13 08:49구 게시판 자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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