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 사람 사귀는 것을 신중히 하라?
2004-05-20 00:05:31
주교반사
[공과] 궁금합니다... (주교공과, 신앙노정에 대하여 - 관)
제목분류 : [~설교록~공과~]
내용분류 : [-설교록-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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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노정이란 공과를 배우고 있습니다...
1.사람 사귀는 것을 신중히 하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신중히 사귀는 것이며...
사람을 어떻게 상대하여야 하나요?
2.다른 사람들에게 평안을 빌어주라고 하는데
잘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평안을 빌어 주는 사람이될까요?
2004-05-20 12:20:14
yilee [ E-mail ]
한번 접촉한 사람과 있었던 일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셨으면
제목분류 : [~설교록~공과~]
내용분류 : [-설교록-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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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번 질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만 참고로
2003년도 초반에 이곳 홈 질문을 통해 군생활하는 분이 주일학교 공과가 어렵다며 공과 전체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여 지금까지 매주 한 개씩 40주째 빠지지 않고 설명을 올리고 있습니다. 아마 그분의 부탁 때문에 전체 공과를 상대로 끝까지 작업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현재 /초기화면/활용자료/주교공과/에 들어가시면 첫 화면에서 뒤로 가며 현재 40개째 설명을 붙였고, 매주 설명을 붙이는 공과는 게시판 제일 첫 페이지 상단에 작업 진도를 표시하고 또 해당 공과에도 제목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공과는 그 내용이 주일 오전 오후 설교 전체를 단 몇 줄로 요약하였기 때문에 항상 해당 공과가 나오게 된 주일 설교들을 참고하셔야 자세히 알 수 있고 또 해당 공과를 수요일 밤예배나 주일 새벽예배 때 반사선생님들을 위해 다시 한번 설명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해당 설교를 보셔야 제일 정확합니다. 현재 답변자가 /주교공과/에 설명을 붙이는 것은 해당 설교를 보지 않고, 백목사님 전체 설교의 방향을 평소 알기 때문에 약간 상식적 차원 정도에서 설명을 드리고 있습니다.
2.이번 질문에서
①관련 공과의 전문에 대하여 제목을 붙여 소개합니다.
/초기화면/활용자료/주교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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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7.4. 27공과 마10:11∼20 제목:신앙노정 요절:마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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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을 사귀기는 신중히 하고 천천히 할 것이며 나누어지지는 아니하도록 노력하라. 사람사귐은 금생과 내세에 연관된 책임을 가지고 사귀어야 하고 일시의 감정이나 욕심이나 흥미나 환경에 휩쓸려 사귀어서는 안 된다. 진리대로 사귀고 또 진리로 행동하고 진리로 사귐의 법칙을 삼아야 한다. 임시 일시의 사귐또는 이중적의 사귐은 안 된다. 그 사람과 나와 배후에 주님이 같이 계심을 기억하여야 한다.
(2)누구든지 사람을 만날 때에는 상대방에게 행복을 원하고 행복을 빌고 불행이나 자기 유익을 도모하는 습성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사람을 복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가 그 사람에게 대한 자기의 소원과 자기의 행동을 주 하나님이 보실 때에 감동되어 그 사람에게 축복하실 수 있도록 하면 자기가 못 한 축복을 하나님께서 연대 책임을 지시고 복되게 하신다.
이 마음이 곧 자기를 위한 것이 되어지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신다. 그런고로 타인을 복빌고 복되게 하고 복되기를 원하는 이것이 곧 하나님으로 자기에게 모든 것을 복되게 해 주시도록 한 것이 된다. 정반대로 다른 사람의 복됨을 시기하거나 복되지 못하기를 원하거나 복되지 못하게 한 모든 행동은 사람의 임자인 주님이 이 모든 잘못된 것을 그 자신에게 임하게 하고 타인에게는 임하지 않게 하신다.
(3)복음을 전하는 자는 순전히 복음만 전하고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여야 복음의 능력이 역사한다. 전하는 자가 복음의 내용의 가치성과 권위성을 알고 믿는 것만치 전할 때에 효력은 나타난다. 복음보다 이 세상의 것이 그에게 가치 있게 권위 있게 인정되는 것은 복음을 부끄럽게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은 역사하지 못한다. 이것을 가리켜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묻혀 오지 말아야 한다고 속화됨을 주의하셨다.
②질문 말씀에서 '어떻게 사귀는 것이 '신중하게 사귀는 것'인지에 대하여
공과 '1번'에서 사람을 사귈 때 어떻게 해야 신중하게 사귀는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신중하게 사귀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신중하게 사귀는 것이 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면을 조심할 것인가?
남편이 아내에게 뱉은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그냥 없어지는 수가 없고 반드시 그 말이 씨앗이 되고 자라게 되고 훗날 자기에게 열매로 돌아옵니다. 아내를 험하게 다룬 남자들이 늙어서 평생의 값을 받는 것은 불신자도 구경을 하고 있는 자연이치입니다. 옆집에 못사는 사람에게 함부로 했다가 혁명이 일어날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맞아죽는 부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수십년 또는 수백년만에 한번 일어나는 일인 줄 알지만, 자세히 세상을 분석하고 살펴보면 다른 사람에게 행한 말과 행동과 생활과 모든 관계에 따라 뒷날 그 값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친하다고 그냥 어울려 놀았고 훗날 모두들 제 인생 제가 살며 서로 잊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라 해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친구들과 철없이 놀고 지냈던 세월 속에 비록 돈을 떼먹지 않았다 해도 또 친구의 이빨을 부지러뜨린 일이 없다 해도 함께 놀았다면 어떤 영향이든지 보이든 보이지 않든 상대방에게 영향을 끼치고 또 나는 상대방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손님과 잠깐 주고 받은 대화에서도 그렇습니다. 이웃과도 그렇고 또 사업의 동지로 지낸 사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로 만들지 않고 둘로 만들어 놓았으며 이 둘을 가지고 오늘까지 세상을 만들어 오셨습니다. 하나님 만든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혼자는 살 수도 없고 살 리도 없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반드시 인간이 인간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이런 관계를 주신 다음,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다른 사람과 맺은 관계에서 말이나 행동까지 어느 하나라도 그냥 지나가는 일은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반드시 그 값이 오게 되어 있고, 죽은 뒤에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그 행한 대로 갚습니다.
이런 면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사귈 수 없습니다. 군사독재 때 잘 나가는 사람이라 해서 그 옆에 서 있다가 맞아 죽거나 억울하게 신세를 망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민주사회가 되었다 해서 실컷 민주주의를 외쳤다가 그 발언 때문에 자기 신세를 망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남들이 고함 지른다고 같이 고함 지르고, 남들이 깃발 든다고 함께 깃발 들며 세상의 대세와 유행과 사상과 행동을 따라 생각없이 휩쓸리는 사람들이 유사 이래 인간들의 평균 수준입니다. 세상에서도 훗날을 생각하는 사람은 오늘 세상이 떠든다고 해서 그런 분위기에 함께 넘어가지 않습니다. 믿는 우리로서는 세상에서도 오늘이 문제가 아니라 내일이 문제고 뒷날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일을 두고 계산을 해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입회 하에 훗날과 죽을 때와 죽은 뒤와 영원 후까지를 생각하고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사람 하나를 만나는 것과 그와 맺는 관계를 고려해야 합니다.
지금 교계가 교파끼리 자주 만나서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하며 세상 돌아가는 정치 문제를 두고 이런 저런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철없는 일이고 부뚜막에 올려놓은 아이꼴입니다. 입이 찢어졌다고 아무 소리나 나오는 대로 하고 있지만, 그 뱉은 말 한 마디 한 마디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하고 내 가슴을 찢어야 하며 죽은 뒤에는 후회를 해도 회복도 되지 않는 무서운 영원이 있습니다. 이런 면들을 냉정히 생각해 보았다면 우리는 사람을 사귀는 일에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몇 말씀 더 올리고 싶은 것이 있지만, 나머지 내용은 이런 식으로 추가하여 질문자께서 스스로 묵상을 좀더 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③다른 사람들에게 평안을 빌라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는 말씀에 대하여
이 공과에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면 그것이 자기를 복되게 한 결과가 되고 다른 사람을 망하도록 가진 마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려 자기를 망하게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또 경험이고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대로 실제 실행을 해보려고 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됩니다. 사촌이 논을 샀는데 내 배가 아프지 않겠습니까? 친구는 일류대학을 붙고 나는 삼류대학도 떨어졌는데 어찌 내 마음에서 나오는 본능을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믿는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성령님이 계셔서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을 보시고 우리 마음을 완전히 돌이켜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그냥 그런 마음을 가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데 알고 있어야 하는 진리 지식을 우리가 먼저 가지고 노력해야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바꾸는 일이 빨라집니다.
그냥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린 신앙의 단계에서 가능한 일이고 또 그런 기도만을 가지고도 성령님이 그렇게 해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가운데 자라가라는 말씀처럼 예를 들어 주일을 바로 지키면 복을 주신다는 말씀을 기억해서 복을 받기 위해 열심히 주일을 지키면 그 말씀에 담아놓은 약속 때문에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키면 복이 되도록 해 놓은 진리 때문에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켜 복을 받으려는 그 사람을 성령님이 보시고 기뻐하셔서 복을 주셔서 복을 더 많이 받게 됩니다. 신앙은 그렇게 자라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평안을 비는 것도, 빌어라 하니까 속으로는 미운데도 억지로 비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그렇게라도 하는 사람이 낫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보다는 왜 빌어라고 했는지, 빌 때 어떤 면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배워서 말씀에 따라 비는 사람이 되면 그 마음 속에서 상대방을 위해 빌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 행복을 위해 비는 사람이 되는 것도 쉽고 저절로 되고 또 남의 행복을 빌어서 자기까지 복을 받으니까 자기도 복을 받아 좋게 됩니다. 좋은 사람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지는 길이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빌어야 하는 이유는, 또 다른 사람을 위해 평안을 빌려면 다른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몇 가지만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그 사람과 나는 한 몸에 팔과 다리처럼 넓은 면으로는 나뉠 수 없는 하나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팔이 다리를 위해 가시를 뽑아주고, 팔이 자기 다리가 튼튼하기를 하나님께 빈다면, 마땅한 일입니다. 팔이 다리가 괘씸하다고 생각한 것부터 팔과 다리의 관계를 잘못 알아서 발생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한 몸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정말 느끼고 알았다면 상대의 행복을 위해 빌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한 몸이라는 이 사실을 모르거나 실감하지를 못해서 일이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믿는 사람은 모두가 한 몸이요 한 몸에 붙은 다른 지체라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발이 고장나면 팔이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눈이 어두우면 발이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자기를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의 평안과 행복과 건강을 빌어야 합니다.
만일 불신자라면, 그가 죽는 날까지 불택자로 살면서 믿지 않을지 아니면 어거스틴처럼 회개하여 교회의 아버지 노릇을 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가 택자인지 불택자인지는 감추어두시고 우리에게 명령한 것은 모든 사람을 택자로 생각하여 복음을 전하고 또 한 몸으로 생각하여 사람을 아끼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현재 죄를 짓자고 붙들지 않는 이상 우리는 상대방과 대적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가 평생 불택자로 살 사람이라고 단정을 할 수 있다 해도 일단 내가 접촉하고 나의 생활권에서 마주치는 사람이라면 그는 지옥으로 나는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는 나뉠지라도 죽는 그 순간 이전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세상 자연환경과 여건 속에서 그와 반드시 연관을 가지고 살고 그를 통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야 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라도 그를 위해 복을 빌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식민지 통치 시절, 그들이 자기 나라를 점령한 나쁜 사람들이라 해도 그 나쁜 사람이라는 기준은 한반도 주민 기준에서 그들의 정치면과 그들의 감정면 등으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인데, 그런 문제와 상관없이 일단 한반도를 통치하고 있다면 비록 점령군이라 해도 그들이 복을 받아 잘 되어야 우리도 그들로 인하여 혜택을 누릴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복을 받아 일본의 국력이 강해져서 우리는 영구히 그 밑에 살게 된다면? 그런 앞날과 미래는 하나님께서 결정합니다. 인간이 중요하다고 계산한 대로 세상이 그렇게 공식으로 인간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물며 한 나라 안에서 야당이 여당 망하기를 기도하고 여당이 야당 망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철이 없고 경험이 없으며 관찰력이 없어 그렇습니다.
야당이 여당 잘 되기를 바란다고 해도 자기 때문에 여당이 망할 요소가 있는데도 잘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옳습니다. 나는 잘 되기를 바랐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로서 하나님께 해야 할 청탁은 원수 입장에 있는 상대방을 위해서라도 그가 잘 되도록 봐 주시라고 청해야 합니다. 그런 나의 청을 듣고 만일 하나님께서 그 원수를 복 주셨다면, 우리가 알 것은 그런 기도와 마음 가짐을 가진 나를 그 원수가 받은 복으로 나를 해하도록 하지는 않습니다. 혹 그렇게 보일찌라도 우리 할 일은 해야 합니다.
또 내가 다른 사람 비록 원수라도 그를 위해 복을 빌어야 하는 이유는, 요셉이 형 10명을 철천지 원수로 상대하지 않고 진정 그들이 회개하고 좋게 되어 복받는 사람이 되도록 끝까지 있는 노력을 다했는데, 요셉 당대만을 가지고 계산하면 요셉은 형들에게 당하기만 했고 형들의 행복을 진정으로 원해서 노력만 하고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400년 뒤 출애굽 때 보니까 요셉의 자손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안간 힘을 다 썼던 형들 중에 하나인 레위지파 후손인 모세와 아론에 의하여 구출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4백여년이 더 흐르고 왕정국가가 된 이후에 보니까 과거 요셉을 죽이는데 일조를 했던 유다의 자손 중에서 다윗이 나타나서 요셉의 후손들을 메시야가 올 때까지 먹여 살리고 인도하고 구원하는 일에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오늘 한 순간만 보면 나는 억울하고 너는 나쁜 놈이고, 나는 살아야겠고 너는 나를 위해 꼭 죽어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범위를 넓혀보고 시각을 안팎으로 돌려보고 세월을 놓고 훗날과 또 훗날을 따져보면 오늘 나와 경쟁하고 나를 미워하는 그 원수를 놓고 하나님 앞에 복을 비는 것이 장사꾼 돈벌이 차원에서 계산을 해도 남는 장사가 되지 밑지는 장사가 되지 않습니다.
날 구원하신 주님의 부탁이니 그리 해야겠고
하나님께서 만든 세상 인간 간의 관계가 그리 되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리 해야겠고
그가 잘 되어야 나중에 크게 덕 볼 일이 있을 것이므로 그리 해야겠고
그를 위해 복을 빈 것이 내 것이 된다니까 날 위해서 그리 해야겠고
그를 위해 빈 복이 그가 그 복을 받을 그릇이 아니면 나에게 되돌아오니 더욱 빌어야겠습니다.
유대인 옛 이야기에 미운 놈 눈 하나 빼기 위해 나의 눈 두 개를 빼달라고 기도했다는 예가 있습니다. 이것이 멸망에 멸망을 거듭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속에 진짜 원수입니다. 이 원수가 내 속에서 나를 완전히 들어먹으려고 상대방의 행복이나 경쟁자가 잘 되는 것을 빌려고 하면 손사래를 치고 펄펄 뛰고 반대를 하고 난리를 부립니다. 바로 내 속에 남의 행복을 위해 빌려 할 때 빌지 못하게 막고 나서는 그 마음이 숨어있는 내 인격의 암병입니다. 바로 찍어 내어 제거해 버려야 합니다.
실제로 해 보셔야 알 수 있는 세계입니다. 걸어보지 않고는 남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꺽고 그를 위해 빌고 그가 잘 되었을 때 나의 행복으로 느껴보는 그 세계를 체험한 사람이라야 이제 본격적으로 이 말씀 이 진리에서 걸어가야 할 광야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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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72023-06-08 11:19구 게시판 자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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