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답

사울왕의 명령과 요나단의 처신.

일반질문용
작성자
교인
작성일
2022.07.19
사무엘상 14:23-40
23.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24.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이 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25. 그들이 다 수풀에 들어간즉 땅에 꿀이 있더라
26. 백성이 수풀로 들어갈 때에 꿀이 흐르는 것을 보고도 그들이 맹세를 두려워하여 손을 그 입에 대는 자가 없으나
27. 요나단은 그 아비가 맹세로 백성에게 명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꿀을 찍고 그 손을 돌이켜 입에 대매 눈이 밝아졌더라
28. 때에 백성 중 하나가 고하여 가로되 당신의 부친이 맹세로 백성에게 엄히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오늘날 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29. 요나단이 가로되 내 부친이 이 땅으로 곤란케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았거든
30.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
31. 그 날에 백성이 믹마스에서부터 아얄론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쳤으므로 그들이 심히 피곤한지라
32. 백성이 이에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취하고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 있는 채 먹었더니
33. 무리가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백성이 고기를 피채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가 무신하게 행하였도다 이제 큰 돌을 내게로 굴려오라 하고
34. 또 가로되 너희는 백성 중에 흩어져 다니며 이르기를 사람은 각기 소와 각기 양을 이리로 끌어다가 잡아 먹되 피 있는 채 먹어서 여호와께 범죄하지 말라 하매 그 밤에 모든 백성이 각각 자기의 소를 끌어다가 거기서 잡으니라
35.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단이었더라
36. 사울이 가로되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을 쫓아 내려가서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무리가 가로대 왕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할 때에 제사장이 가로되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하매
37. 사울이 하나님께 묻자오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쫓아 내려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하되 그 날에 대답지 아니하시는지라
38. 사울이 가로되 너희 백성의 어른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뉘게 있나 알아 보자
39.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지 아니하매
40. 이에 그가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너희는 저편에 있으라 나와 내 아들 요나단은 이편에 있으리라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왕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하니라


전쟁 때 사울왕이 금식을 선포합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금식할려면 자기 혼자 하든지 하지 왜 충분히 먹고 힘을 얻어 힘차게 싸워야 하는 전쟁통에 아무 식물도 먹지 말라 하는가? 왠 뚱단지? 왠 꼬장? 왠 꼰대. 식물을 먹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엄포까지 놓는가? 아들 요나단은 이 말을 듣지 못해 사울왕의 명령을 어기고 꿀을 찍어 먹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잘못이라 지적하니 사울왕이 백성들을 곤란케 했다며 자기가 옳음을 주장합니다. 사울왕의 결정이 선치 못하고 자기 중심적인 악한 결정임을 조금 뒤 그 결과가 증명합니다. 블레셋으로부터 탈취한 물건 중 양과 소, 송아지를 취하여 무리들이 피 있는 채로 먹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사울왕이 하나님께 전쟁 여부를 물어도 대답이 없자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제비를 뽑습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사울왕 자기가 전쟁통에 먹지 말라는 잘못된 지침을 정해 명령해서 자기가 잘못해 놓고 그 잘못을 요나단에 덮어 쒸웁니다. 사물왕이 자기가 회개하면 깔끔하게 끝날 일을 가지고, 똥 낀 놈이 성낸다고 잘못을 자기에게서 찾지 않고 타인에게서 찾는 사울의 행동은 전형적인 좌파, 불한당의 언행입니다.

여기서 질문드립니다. 부모가 잘못 인도했을 때 자식은 따라야만 하는 것일까? 반항은 안되지만 눈물로 호소해도 안된다 할 때는 어떻게 입장을 발표해야 할까요? 교인이 볼 때 사울처럼 목회자가 죄는 아닌데 사울왕처럼 비합리적이고도 비능률적인 명령을 강권할 때 이렇게 안하면 복이 없다. 등등 이렇게 저렇게 지도할 경우 교인으로서 아무리 눈물로 호소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순종해야 할까요? 심지어 부동산을 담보로 협박이 들어온다면 건물을 포기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할까요? 아니면 후일을 도모하고 주님이 일하실 때까지 묵묵히 기도하며 그냥 따라가야 할까요? 리더가 부당한 요구를 할 때 따르는 자의 처신을 두고 질문드립니다.

교인 100명 정도 되는 이제 갓 개척교회를 벗어난 지인인 목회자의 고민과 질문이 있어 대신 적어 봅니다. 이 원리와 이치는 부모와 자녀, 구역장과 교인, 목회자와 구역장, 총회 대표와 각 교회 목회자간 의견 충돌시 부모가, 구역장이, 목회자가, 총회 대표가 사울왕처럼 금령을 내리고 그렇게 행동하면 복없다 할 때 따르는 자로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 여쭙습니다. 내면 신앙 양심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모른척 불합리한 그 명령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털고 다 내 주고 다시 개척교회로 돌아가 새롭게 시작할 것인가? 인도자의 잘못된 판단과 결정 한번으로 인해 돈 손해, 땅 손해, 건물 담보로 압류 또는 협박, 자녀 교인들 상처받는 손해까지, 등등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며까지 참아야 합니까?

가정으로 예를 들면 게임 중독에 노름 중독에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그 모든 온갖 중독까지 다 손을 댔다면 그래도 아내는 자기 구원과 자녀들을 위해 회개하고 돌아올 기약없는 남편을 위해 탕자처럼 돌아오긴 돌아오는데 주님의 대속이라는 심정을 품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부부관계뿐 아니라 앞선 인도자와 따르는 자 사이에 부당한 명령과 요구가 있을 시 입장 표명이나 대처 요령을 두고 모든 인인관계에 적용해 보는 통합적인 질문입니다.
전체 9

  • 2022-07-19 02:01
    목회자든 교인이든 연구소 직원이든 아니든 담당이든 아니든 그 누구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 경험담과 주님이 함께 하신 역사인 개인 간증을 근거하여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 2022-07-19 20:49
    1. 사울의 맹세

    삼상 14장 사울의 맹세는 분명 신중하지 못하고 성급했습니다. 그 맹세 때문에 전쟁 중에 백성들이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적군을 치는데 많은 손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울의 맹세가 틀렸다거나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울은 실패한 사람이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사울이 한 것은 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울의 맹세가 신중하지 못하고 성급한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며, 따라서 죄는 아닙니다. 열심이 지나쳤을 뿐입니다.

    사울이 백성들을 맹세시킬 때, 안 할 수 없었겠지만 백성들은 다 맹세를 했습니다. 그들도 그 맹세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했다고 볼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그 맹세를 어기는 것이 될까 두려워서 전쟁 중에 피곤해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뒤에 요나단은 모르고 지팡이 끝으로 꿀을 찍어 먹었고, 요나단의 말을 듣고 난 다음에야 백성들도 짐승들을 피 있는 채로 잡아먹었습니다. 요나단의 말을 듣고 백성들이 먹은 것은, 그 책임이 요나단에게 있지만 백성들도 잘한 것이 아닙니다. 맹세를 어긴 것은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지하고 어린 백성들에게 그대로 갚지 않으셨고 요나단에게만 책임을 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의 맹세가 성급하고 신중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나 하나님 앞에 맹세한 것이므로 지켜야 하는 것이고, 백성들도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마지 못해서라도 지켰습니다. 요나단은 몰라서 지키지 못했고, 요나단도 알았다면, 맹세할 당시에 반대를 했거나 그러지 않고 맹세했다면 요나단도 지켰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맹세를 요나단은 모르고 어겼고, 그 때문에 블레셋을 추격하려고 하나님께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대답지 않으셨고, 그 원인을 찾을 때 사울이 한 맹세를 요나단이 모르고 그랬지만 어긴 것 때문이라는 것이 14:37-46절까지의 내용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여호수아 9장에,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을 정복해 들어갈 때 그들의 정복 소식을 들은 기브온 거민들이 먼 지방에 사는 사람들처럼 거짓으로 꾸며서 사신을 보내어 이스라엘에 항복한 일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족장들은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그들을 살려주겠다고 언약을 맺고 맹세를 했고, 며칠 뒤 그들은 그 근처에 사는, 이스라엘이 정복해야 할 대상인 줄 알았지만 여호수아와 족장들이 한 맹세 때문에, 백성들이 족장들을 원망했지만 그들을 치지 못하고 살려두었습니다.

    그 후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에 대한 열심이 있어서 기브온 족속을 죽이려고 했던 그 죄 때문에, 사울 때는 죄를 묻지 않으셨지만 다윗이 왕이 되고 난 다음에 3년을 거듭하여 기근이 있었고,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대로 그들을 해하려고 꾀했던 사울의 족속 7명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줘서 그들을 목매어 달고 난 다음에야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해서 기도를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조금 다른 경우지만, 사사기 11장에는 입다의 신중하지 못한 서원이 나옵니다. 암몬 자손을 하나님께서 붙여주시면 승리 후 집에 돌아갔을 때 누구든지 가장 먼저 나와서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 앞에 번제로 바치겠다고 서원했고, 무남독녀 딸이 나와서 영접했을 때 입다는 눈물로 그 서원을 지켰습니다. 서원과 맹세는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넓은 범위에서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입다는 서원을 지켰고 입다의 딸은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입다의 딸은 순교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도서 5장에는, 일단 서원했으면 갚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했습니다. 서원을 안 했으면 몰라도, 실수로라도 서원했으면 갚으라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신약에는 아예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물론 여러 의미가 있지만 그만큼 서원이나 맹세는 조심해야 하는 것이고, 일단 했으면 손해가 갈지라도 지키라는 것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따라서, 사울의 맹세는 지키는 것이 맞습니다. 백성들은 지켰기 때문에 적군을 물리치는데 많은 손해가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죄는 되지 않았고, 요나단은 몰랐지만 어겼기 때문에 죄가 된 것이고, 그 때문에 사울이 추격해야 될지 물으실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고, 그러나 요나단은 모르고 한 것이기 때문에 백성들을 통해서 죽지 않도록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질문하신 내용에

    1) 원론적으로

    질문하신 내용과 사울의 맹세는 원칙적으로 같은 원리입니다. 사울의 맹세는 성급했고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곤란을 겪었고 적군을 물리치는데 많은 손해가 있었으며 요나단은 죽을뻔했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 드린 대로 일단 하나님 앞에 맹세한 것은 지켜야 합니다. 물론 죄가 되는 것이면 예외가 됩니다. 사울의 맹세는 죄가 아닙니다. 열심히 지나쳤고, 신중하지 못하고 치밀하지 못하고 성급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지도자의 무능이라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죄라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 맹세는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교회의 교역자가, 또는 가정을 책임진 가장이 잘못된 길을 가면서 잘못 인도할 때 교인들과 가족들은 무조건 따라가야 하는가? 무조건 따라가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구별을 해야 합니다. 교역자로, 가장으로 세웠으면 일단 순종하는 것이 기본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조건은 아닙니다. 구별을 해야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아직 못 박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못 박을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모세의 자리에 세우셨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되 말은 지키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입니다. 원수의 나라에서 뽑혀서 원수의 나라에 총리까지 올라갔습니다. 느부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고레스 왕까지 네 왕을 거쳤습니다. 네 왕을 거치는 동안 다니엘에게 환난은 한 번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환난이 없었습니다. 처음 등용될 때 왕의 진미와 포도주 문제는 환난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네 왕을 거치는 동안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고 신앙을 다 지켰고, 왕의 명령은, 다 기록되어 있지는 않으나 지킬 것은 지키고 지키지 않을 것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지 말라는 왕의 명령은 사자 굴에 들어가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다니엘을 구원했고 왕과 나라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 보이게 세우신 머리는 왕들이었습니다. 그 왕들이 타락하고 잘못했다고,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다니엘이 그들에게 피동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자기 관계를 바로 지키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갔을 뿐입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 간 애굽 나라도 하나님이 없는 나라입니다. 애굽에서의 보디발이나, 감옥의 간수장이나, 바로 왕은 요셉이 가는 곳곳의 하나님께서 세우신 요셉의 머리였습니다. 말하자면 지도자였습니다. 요셉은 그런 타락한, 아예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 밑에 있었지만 옳은 길 바른 길을 얼마든지 구별하여 걸었고 최종에는 그 환경을 다 변화시켜 버렸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에게 달렸다는 뜻입니다.


    목회자라고 하면 어지간히 타락한 목회자가 아니면 애굽의 보디발보다는, 바로보다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적어도 목회자라고 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잘 몰라서, 또는 명예, 위신, 교권… 여러 이유 때문에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을 뿐입니다. 불신자보다는 낫고, 천주교나 이단에 속한 사람들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밑에 교인으로, 그런 가장 밑에 가족으로 있으면 요셉보다는 낫고, 다니엘보다는 낫고, 아람 나라 나아만 대장의 집에 노예로 끌려갔던 계집종의 형편과 입장보다는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 할 일을 알았고 자기 길을 바르게 다 걸어갔고, 그럼으로 자기들도 승리했고 주변과 환경을 다 바꾸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빚을 지는 사람은 억만금을 안겨줘도 얼마 지나고 나면 또 빚쟁이가 된다고 합니다. 부자가 되는 사람은 있는 것을 다 빼앗아도 얼마 지나고 나면 또 부자가 된다고 합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항상 원망합니다. 시험에 드는 사람은 늘 시험에 듭니다. 이런 사람들은 본인들의 인식을 고치기 전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사람은 어찌하시지 못합니다. 자유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자기를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찾아 순종함으로 자기를 고치고 연습시키고 연단시켜서 자기라는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 하나님의 형상의 사람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 우리의 건설구원 성화구원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세상도 만드셨고 각자에게 필요한 별별의 모든 환경을 전지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꼭 필요하게 섭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인류 시조인 아담 하와에게 에덴동산에서부터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성경 전부이며 하나님의 말씀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현실적으로

    모든 것은 원론적으로 해결이 되어야 가장 좋습니다. 또 해결이 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원론이라, 원칙이라 합니다. 거기서 해결되지 않았으면 이미 시기가 많이 지났다는 말이고 기회를 많이 놓쳤다는 말입니다. 모르고 지나갔든지, 알면서도 여러 이유 때문에 그냥 넘어갔든지 어쨌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시기가 지나고 난 다음의 치료는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돈도 많이 들고 치료도 힘듭니다. 고생을 많이 해야 합니다. 대수술을 해서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거나 들어내는 수도 있습니다. 목숨을 살리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습니다.

    이미 목회자가 그 정도가 되어 있다면, 감당할 실력이 있으면 안에서 견디면서 목회자가 바뀌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것이 첫째 노력할 일입니다. 그것이 정 안 되면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동산을 담보로 협박이 들어온다고 하셨는데, 개인의 부동산을 목회자가 담보로 잡고 협박한다면, 그 정도라면 이미 신앙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고 교회 문제나 신앙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세상 법의 도움을 받아서 대응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가장이 가정을 팽개치고 막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면, 역시 같은 이치로 최대한 노력을 하되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면 가정과 아이들의 안전과 구원을 위해서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거처를 따로 할 수도 있고, 위해를 느낄 정도가 되면 이 역시 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상대를 치기 위해서가 아니고 상대방으로부터 위해를 받지 않기 위함인 동시에 상대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역시 이미 시기를 놓쳤기 때문에 많은 출혈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경우입니다.

    가장 좋기는, 위에서 설명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 바로 하는 것입니다. 대개 모든 일이 처음부터 나쁘지는 않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처음에는 괜찮았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조짐이 보였다면 애초에 함께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대개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때는 이미 시기가 많이 지나갔을 때입니다. 조금이라도 조짐이 보이면 그때라도 바로 잡도록 했어야 합니다. 질문하신 상황은 이미 중증이기 때문에 상당한 출혈이 없이는 해결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3) 정리하면

    첫째,
    애굽의 요셉처럼, 나아만 대장 집의 계집종처럼, 바벨론 나라의 다니엘처럼 본인들이 바로 살아서 하나님께서 주변을 해결해 주시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고 질문하신 내용처럼 교회가 그렇게 되었다면 목회자는 물론이고 그렇게 되기까지 함께 있었던 교인들 모두에게 다 책임이 있습니다.

    둘째,
    목회자가 시킨다고, 가장이 하라 한다고 무조건 하는 것은 맹종입니다. 맹종은 무책임이며 책임 회피이고, 그것은 곧 죄가 됩니다. 무조건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를 구별해서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그랬어야 하고, 지금도 그래야 합니다. 마찰이 있어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만 언행이나 대하는 자세는 조심해야 합니다.

    셋째,
    질문하신 상황은 이미 많이 늦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감당할 수 있으면 계속 그 자리에서 감당하면서 내부를 바꾸는 것이 원칙이고 우선적으로 할 일이며 가장 좋습니다. 계속 그런 상황으로 있다가는 신앙이 다 죽을 것 같으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법으로 할 것은 법으로 하고, 도움을 받을 것은 도움 받아야 합니다.

    넷째,
    진정으로 신앙 중심으로 나가려고 하면 물질이나 사람까지도 손해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정말 바른 길이면 당장은 손해인 것처럼 보여도 멀리 보면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십니다. 진정 바른 노선으로 나가는 공회, 교회, 개인들은 거의 이런 경우와 결과를 다 보고 있습니다.

  • 2022-07-20 09:24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두 가지 의문이 듭니다.



    첫째는 사울 혼자 금식하고 맹세하면 되는데 굳이 자기가 한 맹세에 모든 사람을 동참시키고 강요하여 일정 기간 식물을 먹지 말라는 이 맹세를 따르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까지 한 사울의 이 발언은 각자 믿음의 자유성을 침해하고 믿음 분량의 개별성을 무시한 결정은 아닌가요? 개인 일이 아니고 아무리 전체 일, 우리 일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가정에서 예를 들면 아버지가 직장에서 짤릴 위기, 전세금을 주인이 돌려 주지 않겠다는 위기,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는 상황 등등의 상황에서 본인이 회개하고자 삼일 금식과 철야를 작정, 맹세, 서원을 했다고 가정할 때 자녀들에게도 자기 맹세와 똑같이 맹세 동참을 강요할 수 있는가? 권유나 물어보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 가정이 해체 위기로 심각하니 자녀인 너희들도 동참해라. 너희들도 책임이 있다.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 전체의 문제다. 너희들도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 의견을 묻는 정도가 아니라 선택을 해야만 하는 지금 상황이다. 결정은 반드시 해야 하며 나중에 그에 대한 책임은 각자 자기가 지는 것이다. 어떡 할래? 선택의 자유는 충분히 보장한다. 아버지의 결정에 안 따라 주면 또는 각자 자유로 결정해라. 다만 잘못 결정하면 너희도 복없고 저주 받아 최악의 경우 고아원에 갈 수도 있다 등등 엄포를 놓는다면 어린 자녀들이 그래도 못한다 하겠습니까? 억지로 아버지 따라 금식하겠지요?

    이 방법이 과연 옳고 선하냐는 것입니다. 가정이 해체될 만큼 그런 심각한 상황이라면 아버지가 먼저 지난 과거 자기가 잘못 살아 온 인생 걸음을 단호하게 인정하고 철저히 금식함으로 모본을 보인다면 자녀들도 아버지가 말 안하고 모름지기 금식과 철야를 은밀하게 지속하면 아버지의 그런 절박한 심정을 느끼게 되고 주님이 전달시키게 하시어 감동 받아 스스로 자원하여 동참하는 방법이 모든 면에서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담당 4님의 표현을 빌자면 이것이 진정 원론적인 방법이며 순리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혼자 할 수 없고 전체에 알려 전체의 의견과 동참을 이끌어내야 하는 사안도 있겠지요? 맹세나 분명 옳다고 하는 가정, 교회, 공회 결정에 어떻게 동참시키느냐는 방법론에 따라 교회가 건설되기도 하고 와해 또는 파괴되기도 하겠지만 말입니다.


    교회로 범위를 넓히면 어떤 문제를 두고 목회자가 주님 앞에 맹세하고 서원을 했는데 교회 일이고 공회 전체 사활이 걸린 문제라 교인들 전부 이 맹세에 동참을 독려해야 하거나 일부 중심 교인들에게 동참을 권유해야 하거나 정도를 넘어 선택의 자유성을 침해한다면, 목회자는 자기 착각에 이만하면 충분히 자유를 줬다고 확신하지만 듣는 교인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는 없구나 무조건 따라야 하는구나 교인 본인의 착각이나 자격지심도 작용하겠지만 원론적, 일반적으로 위 사울왕과 같은 경우라면 그래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 담당 4님의 입장인지 여쭙습니다. 당연 어떤 사안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교인 입장에서 목회자가 강요 안해도 권유나 묻는 정도, 목회자인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거나 목회자 자기 뜻, 자기 방향에 대한 언지만 살짝 줘도 교인들은 그 이상의 압박을 받는 것이 보통의 일반입니다.

    공회는 보통 신중하니 강요가 아닌 목회자가 묻는 정도만 해도 그 문제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고 목회자가 숨기고 금식하며 혼자 맹세하면 목회자의 그 절박함과 간절함이 말 안해도 시간 문제지 사택 식구, 사모님, 중심 교인들에게 다 전달되리라, 그래서 주님이 만 천하에 다 드러내어 공론화 시키게 하시리라 생각됩니다만, 어떤 경우는 말해야만 하고 사안에 따라 선택이나 전체 여론을 수렴해야 하는 경우도 많겠습니다.





    또 한가지, 둘째는 사울의 맹세가 죄가 아니라 하신 것 같은데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그 맹세가 주님이 시켜서 한 것이면 당연 죄가 아니겠지만 자기 중심인 악에서 발원되었거나 마귀 말에 피동되어 시작된 맹세라면 분명 죄라 판단됩니다. 전쟁 중에 굶겨 놓으니까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나중에는 양과 소를 피채 먹습니다. 이는 당시 율법으로는 분명 죄된 행위입니다. 결과가 죄라면 원인 동기가 되는 맹세도 죄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입다의 경우는 지혜롭지 못했지만 죄된 서원, 맹세는 아니라 저도 판단되지만 위와 같은 사울왕의 맹세와 같이 동참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고 하는 엄포와 그 결과인 백성들을 굶겨 놓으니까 배가 하도 고파서 동물을 피채 먹은 일련의 과정을 비추어 볼 때 맹세도 죄가 안되는 그러나 미련하고 무지한 맹세도 있겠지만 위와 같은 전 교인을 죄 짓게 만든 사울의 맹세는 죄가 원인된 자기 맹세, 서원, 맹세 자체가 죄라고 할 수는 없을까요?

    요나단이 이 맹세를 모르고 꿀을 찍어 먹었다면 하나님이 먹게 하심으로 사울왕은 틀렸고 아들인 요나단은 옳았음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드러내신 것은 아닐까요? 이후 사울왕이 하나님께 물어도 답변이 없는 것은 맹세를 어긴 요나단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부당한 비합리적인 무지한 억지인 맹세, 일정기간 식물을 먹지 말라고 한 사울의 잘못된 결정, 피채 먹게 된 죄의 결과를 가져 온 사울왕의 잘못된 틀린 맹세 때문에 사울왕의 그 잘못을 알려 주시려고 하나님이 침묵하신 것은 아닐까요?

    바리새인들의 말은 맞다. 다만 행위는 틀렸다. 그런고로 말은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사울왕, 가정교회 가장이나 교회, 공회 인도자의 말이나 판단, 결정이 틀렸을 경우에는 교인들의 입장 표명이나 상황에 대한 대처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를 문의드리는 것입니다. 저도 가정교회 목회의 인도자인 한사람으로서 제가 잘못 판단하고 결정하여 가족을 힘들게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회개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적습니다. 비판이나 정죄가 아님을 밝힙니다. 어떻게 하면 지난 과오를 씻고 내가 또한 우리가 더 잘할 수 있을까?

    지난 과거 잘못에 대한 뚜렷한 공개적인 공식적인 인정과 주님의 피에 고할 뿐 아니라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고 한발 더 나아가 피해를 준 상대방에게 직접 용서를 구하는 처절한 몸부림의 회개 없이 구원 건설은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구를 가르치려 들거나 비판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 제 잘못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논하겠습니까? 제 코가 석자입니다. 저도 그러한데 우리가 다 부족하니 다 함께 주님의 뜻을 모아보고 지난 과오가 있는지 살펴보고 왜곡되고 혹시나 잘못 해석된 자타 공회 역사가 만에 하나라도 있다면 바로 잡자는 취지의 질문입니다.

    공회 역사에서도 보면 전체 공회 일에 동참하지 않고 발을 빼면 복이 없다. 그 마지막은 비참하게 된다. 무리에서 나뉘는 자는 끝이 안 좋다고 하나 실상은 인도자의 오판을 바로 잡지 않고 안 따라 준다고 교인 탓만 하여 교인들에게 강요한 경우는 없었는지 살펴 봅니다. 윗선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자아 비판입니다. 잘못 비춰졌다면 죄송합니다. 내가 우리고 우리가 나 입니다. 자아를 통해 타를 보고 타를 통해 자아를 비춰 보는 것이 신앙이라고 배웁니다.


    사울 같은 이런 맹세와 전체 동참을 요구한다면 회의가 뭐가 필요 있으며 전원 일치 제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중차대하고 급한 결정이고 목회자나 공회 인도자가 볼 때 이건 사활을 걸고 목숨을 걸어 사수해야 된다고 확신이 섰다고 할지라도 인도자는 충분히 시간을 줬고 선택의 자유성을 보장했으며 강요하지 않았다. 그냥 애가 탄 마음을 필역했을 뿐이다. 변명 아닌 변명을 말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천하보다 귀한 교인 한명이 마음문을 닫아 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교인이 못나서 삐져서 교인 자존심에 교인이 어려서 시험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러시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틀렸고 제 질문은 할 필요가 없는 불필요한 쓸데 없는 질문일 뿐입니다.


    물론 어떤 사안이냐에 따라 언제까지 마냥 기다려줄 수는 없겠지만 전 교인들까지 동참시키려면 그만큼 감동과 교인들 스스로 자원함의 동참을 이끌어 내기 위해 많은 고심과 연구, 조심스런 제안이 따라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데 위 사울왕의 맹세와 일처리 과정이 가정, 교회, 공회에 재현된다면 이는 불행이요 왕의 소견대로 행하소서 목사님이 우리보다 믿음 좋으시고 법도 전공했으니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아시고 어련히 알아서 잘 처리하실까 하고 무조건 따를 게 아니라 교인들이 볼 때 아닌건 아니라고 무릎 꿇고 예의를 갖춰 간곡한 간청의 심정을 갖고 주님을 상대하듯 교인 입장에서는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교인이 이해가 안되고 틀렸다면 고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이고 그 반대면 또 고치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아내가 못 살겠다고 하면 이혼하자는 말이 아니고 잘해 보자 나 너무 힘들다 좀 천천히 가자 당신 너무 독단적이다 왜 나랑 상의도 안하고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통보식으로 끝내 버리고, 매번 이런 식이니 같이 못 살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 실제는 좀 아내인 제 말도 들어 주시고 조금만 페이스 조절해서 천천히 가 주라. 너무 힘들다. 교인들의 목회자에 대한 바램도 이런 면이 없지 않아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해가 있을까 하여 사족을 붙입니다. 감정적으로 무조건 반대급부적으로 반항적으로 반기를 들거나 버릇없이 따지는 것이 아니라 건설적으로 저는 달리 생각되어 진다. 나름 안타까운 마음에 제 의견을 자유롭게 필역한 것이니 이 점은 참고해 주셨으면 하고 재차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답답함을 적다 보니 글 정리가 깔끔하지 못하고 무례하게 읽혔다면 죄송합니다. 제 중심의 본 뜻은 아닙니다. 제 글의 중심은 파괴가 아니라 건설입니다. 오해는 마셨으면 진정 부탁드립니다. 똑같은 사족의 말 반복이라고 해서 이중부정은 강한 긍정도 아니요 주님이 말씀하신 진실로 진실로 두 번 강조하신 딱 그 정도의 간절성과 간청일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 2022-07-20 20:43
    1. 실무적으로 의견을 드리면,

    첫째,
    현재 형편에서 할 수 있는 일과 그 선을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무엇을, 어디까지 해야 하며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정하는 것입니다. 대화로 가능하면 대화를 하고, 법적으로 해결할 것은 법으로 하고, 주변 도움을 받을 것은 도움을 받고…

    둘째,
    이것도 저것도 방법이 없으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것입니다. 정말 안 될 때 마지막으로 해야 하는 최후의 선택입니다. 사람도 물질도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는 포기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붙들 수 없는 것을 붙들려고 하면 더 큰 것을 손해 볼 수 있습니다. 포기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면 포기하면 하나님께서 다 보충해 주십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길이며, 교회 분쟁에 그런 경우는 참 많습니다. 답변자도 실제 여러 번 경험한 일입니다.

    셋째,
    질문하신 사안에 대한 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은 이곳 ‘담당’님께 직접 문의하시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공개가 어려우시면 이곳에 문의하시되 비번을 걸어서 ‘담당’님의 답변으로 지정해서 부탁하시거나 ‘담당’님의 개인 이메일로 문의하시면 됩니다.

    참고로,
    병의 치료는 세부적인 사항을 자세히 정확하게 아는 만큼 정확한 처방이 나올 수 있습니다. 빠진 만큼 처방은 본의 아니게 정확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안에 대한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을 알아야 자세하고 정확한 답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2. 사울의 맹세에 대한 해석

    먼저, 성경 해석은 정답이 있기 어렵습니다. 구원에 가장 유익한 도리를 찾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로 정답을 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해도 할 수 있으며, 해석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사울의 맹세에 대한 해석 역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습니다. 이곳 답변자의 한 사람으로서 답변자의 해석은, 사울의 맹세는 신중하지 못했고 성급했고, 그래서 많은 손해가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 앞에 사울이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고 잘못을 회개하고 다짐하고 혼자 맹세하고 그렇게 했으면 가장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었지만 그만한 신앙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죄라고 하면 곤란합니다. 무지했고 무능했고 성급했고 신중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 당시 하나님과 멀어진 사울이라는 사람의 신앙과 성품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에게 왜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느냐고 비판하면 참으로 곤란합니다. 여호수아와 족장들은 사울보다 훨씬 밝고 깨어 있는 상태였지만 기브온 거민들을 두고 하나님께 묻지 않고 맹세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사울의 맹세는 기브온 거민을 두고 하나님께 묻지 않고 맹세했던 여호수아와 족장들의 맹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넓은 범위에서, 지도자로서 신중하지 못하고 성급한 것도 죄며 무능도 무지도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죄를 기준으로 한다면 사울의 맹세는 죄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이 급했고 열심히 지나쳤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맹세는 지키는 것이 옳다는 것을 여러 성경을 인용해서 설명드렸습니다.


    자유성에 대해서,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백성들은 왕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왕을 세워 달라고 구한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왕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너희들이 구한 왕이 앞으로 너희들에게 어떻게 할 것이라는 것을 다 설명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상관없다 하고 왕을 구했습니다. 그들 스스로 구한 왕이며, 그에 따라 가장 좋은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세우셨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왕을 구할 때부터, 하나님께서 경고하셨는데도 그들이 상관없다고 할 때부터, 적어도 그들은 왕에게 순종하는 것만큼은 자유성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왕을 세워주시면 왕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겠다고 그들 스스로, 그들의 자유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자유성으로 선택했는데 자기들에게 맞지 않고 힘들다고 배척하는 것은 자기들의 자유성을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범죄며 타락이며 방종으로 가는 길입니다. 백성들은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맹세를 거부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키려고 했고, 요나단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지켰습니다. 교인과 교역자의 관계도 이런 면이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달리 해석하실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신앙 건설에 유익이 되면, 그리고 성경 전체에 틀리지 않으면 됩니다. 질문자께서 해석하시는 대로 그렇게 해석하실 수도 있습니다.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답변자의 깨달음과 다를 뿐이며, 과연 그게 실제 신앙생활에 맞을까 하는 의문을 답변자로서는 가지게 됩니다.


    3. 질문에 대한 답변의 방향

    질문하신 내용에 대해서 원론적인 설명을 드린 것은, ‘질문하신 분의 입장’에 대한 답변이며 설명입니다. 질문하신 분께서 지적하신 목회자나 가장이 같은 질문을 했다면, 그분들에게도 역시 같은 설명을 했을 것입니다. 누가 질문을 하셔도 같은 내용이면 같은 내용으로 답변을 드렸을 것입니다. 각자의 입장이 다를 뿐 근본 원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답변자가 아는 해결의 가장 좋은 길이며 근본적인 해결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일이 있고 상대방이 할 일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할 일을 하면 됩니다. 상대방의 할 일을 내가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은 하나님 앞에 나를 돌아보며 나를 고치는 일입니다. 그 안에는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도 포함됩니다.

    서로가 상대방을 탓하고 상대방을 고치려 하면 그곳을 지옥이라 합니다. 천국은 반대입니다. 상대방의 장점을 살피며 배우려 하고, 상대방의 단점은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겨두고, 자기에게는 단점만 찾아서 고치려 하는 곳이 천국을 향한 지상의 참된 교회입니다. 참된 교회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런 개인이 있으면 그 주변은 천국이 되고, 그런 사람이 모이면 그 가정도 그 교회도 천국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주변을 천국을 만든 사람이 요셉이고 다니엘이고 나아만 집의 계집종입니다. 반대가 되면 그곳은 어디를 가든지 지옥이 됩니다.

    천국이 천국인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떠나면 천국이 지옥이 됩니다. 지옥이 지옥인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하나님이 계시면 지옥이 천국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있는 그곳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질문자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면 그곳이 천국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하지 않고 상대방에게서 원인을 찾으면 해결의 길은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자유성을 말씀하셨는데, 상대방이 그렇게 하는 것 역시 상대방의 자유성입니다. 그에 대하여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것도 꼭 같은 자유성의 침해가 됩니다. 상대방은 죄를 지을 자유가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 대신 그에 대한 영원한 심판 역시 자기가 받아야 합니다. 그 자유성을 내가 침해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대신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고 받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의 범위는 자기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 살짜리 아이도 제대로의 생각이 있고 판단이 있습니다. 다만 그 생각과 판단이 세 살이라는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할 뿐입니다. 정저지와라는 말이 있습니다. 답변자 역시 답변자 지식의 범위 안에서만 답변드리는 것입니다. 답변자보다 더 넓고 깊고 높은 지식을 가진 분이 보면 답변자의 설명이 부족할 수 있고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답변자의 현재 정도로서는 최선의 설명을 드리고 있습니다.

    욥을 비판한 세 친구들은 욥을 맹렬하게 비판합니다. 하나님은 권선징악의 하나님이신데, 욥의 자녀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고 욥이 그렇게까지 큰 재앙을 받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욥의 자녀들과 욥이 큰 죄를 지었다고 단정을 짓고 욥을 비판했습니다.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가장 기초적인 지식의 시각으로 욥을 봤고 하나님을 그렇게 알았습니다. 욥은 자기가 자기를 알기 때문에 그들의 비판을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나는 이렇게까지 큰 재앙을 받을 죄를 짓지 않았다고. 그러다 지나쳐서 하나님을 불의하게 만든 것이 욥의 죄였습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판단은, 세 친구가 틀렸다고 하셨습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을 편들었는데 그들은 무지했습니다.


    질문하신 분께서 그렇게 생각하시고 판단하시듯이, 질문자께서 비판하시는 목회자나 가장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도 자기대로 할 말이 태산같이 많을 것입니다. 잠언 18장에,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피고가 와서 밝힌다고 했습니다. 절대적이라 할 수는 없으나 거의 대부분의 문제의 원인은 쌍방에게 비슷하게 있다는 것이 통계입니다. 잠언 18장 말씀도 그것을 기본으로 하신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 살짜리 아이도 부모가 마음대로 못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다 큰 자녀들이 부모 말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해도 대책 없이 지켜만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관계입니다. 하물며, 목회자가 교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며 시대도 아닙니다. 목회자의 말에 진정 순종하는 교인이 얼마나 될까? 있기는 있을까? 목회자가 강요한다고 따라간다고 생각하고 순종했다고 생각하시면 큰 착각이며 오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순종하며 따라갈 때는 나름대로 입장과 형편과 처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고, 따라가기 힘들고 거부할 때는 그 나름대로 또 다른 입장과 형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입장과 형편은 전부 자기 입장입니다. 자기 입장, 자기 형편에 따라 순종하고 거역하지, 진정 옳고 바른 것을 구별하고 찾아서 순종하고 거부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답변자의 경험입니다.

    정말 교인이 목회자를 목회자라고 진정 순종하고 따라가면 하나님께서 그 목회자를 옳게 복되게 인도하도록 변화시켜 주시거나, 아니면 그 교인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복된 길을 찾게 하고 복된 목회자를 만나게 해 주신다는 것이 답변자의 깨달음이고 경험입니다.


    무조건적인 순종은 옳지 않은 것이며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드렸습니다. 필요하면 법의 도움도 받아야 하고 주변에 도움을 청해야 된다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질 수 없는 짐, 감당할 수 없는 범위를 감당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전체적으로 원론적인 것을 말씀드린 것이고, 실제 구체적인 사안은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야 아는 대로 답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은 원론적이며 기본적인 답변만 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질문하신 분의 심정을, 세부적으로 다 실감할 수는 없으나 적으신 내용으로 충분히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정을 이해하고 느끼는 것과 옳고 바른 것을 찾는 것은 다른 경우이기 때문에, 답변자로서는 최대한 옳고 바른, 가장 좋은, 답변자가 아는 대로는 가장 성경적이며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2022-07-21 03:05
    담당 4님의 답변을 통해 여러 면을 배우게 되고 특히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니 더욱 감사가 됩니다.


    1-0.  왕에게 순종하는 것만큼은 자유성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왕을 세워주시면 왕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겠다고 그들 스스로, 그들의 자유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자유성으로 선택했는데 자기들에게 맞지 않고 힘들다고 배척하는 것은 자기들의 자유성을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범죄며 타락이며 방종으로 가는 길입니다. 백성들은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맹세를 거부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키려고 했고, 요나단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지켰습니다. 교인과 교역자의 관계도 이런 면이 있습니다.


    1-1.  그럼 목회자가 어떠한 경우에 교인은 순종할 자유성 대신 순종 거부권을 내세워 시무투표 때 부표를 행사할 수 있을까요? 목회자의 경제 부정? 돈 문제! 이성 부정? 여자 문제! 노선 이탈? 일반 교단으로의 회귀! 일반적으로 교인으로서 부표를 낼 만한 경우는 거의 없어 보입니다. 아무리 살인죄, 음행죄를 저질렀어도 회개할 기회를 줄 수 있는 것이 성경이니 교인이 부표를 내는 데는 많은 고심이 예상되고 최종은 부표를 내는 반대보다도 주님께 맡기고 포기쪽으로 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2-0.  잠언 18장에,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피고가 와서 밝힌다고 했습니다. 절대적이라 할 수는 없으나 거의 대부분의 문제의 원인은 쌍방에게 비슷하게 있다는 것이 통계입니다. 잠언 18장 말씀도 그것을 기본으로 하신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2-1.  인인관계에서 불목의 원인은 거의 대부분 쌍방과실에 있는 것이 맞습니까? 손바닥도 마추져야 소리가 나듯 부부가 싸웠다면 일방과실은 없는 것이 맞습니까? 예외적인 경우도 드물게는 있겠지요. 그럴 때 원인을 상대방에게서 찾지 말고 자기에게서 찾으라고 하신 말씀에 동의합니다. 상대방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상대방 잘못은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신다는 것이 성경이라는 말씀도 공감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대부분 쌍방과실을 부정하고 일방과실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사야처럼 바벨론 포로를 반대하고 끝까지 결사항전을 외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눈물로 호소했던 예레미야처럼 앞선 인도자의 위치에서 상대방의 일방과실을 주장할 수는 있으나 이런 경우는 가뭄에 콩나듯 아주 희귀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공회 역사에는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3-0.  자녀가 삐뚤어지고 엇 나가면 부모의 책임이 절반은 넘고 교인이 소속 교회를 탈퇴하면 그 책임은 목회자에게 있고 그렇겠지요. 물론 자기 책임도 상당할 것이며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자 잘못된 결과의 원인을 부모에게 목회자에게 전가시키는 것 또한 자기 책임 회피에 대한 일방과실이겠지요.


    자녀가 이혼을 했습니다. 전적 자기 결정이니 본인의 전적 일방과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을 파고 들어가보면 쉽게 단정짓기 어려운 면도 공존할 것 같습니다. 선을 본 당사자가 싫다 No라고 여러번 의사표시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선을 주선한 사람 포함 2번 3번 4번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붙잡고 돌아가며 거듭 권면하고 설득하고 부모가 눈물로 호소한다면 한번만 더 생각해 봐라 이만한 사람 없다. 이번 기회 놓치면 언제 또 걸혼 기회가 올지 모른다. 내가 먼저 No하면 복 없다. 상대방이 No할 때까지 기다려 보자. 하나님이 짝을 안 지어주신 예정에 없는 사람이라면 내가 Yes해도 하나님이 나서서 결혼이 안되게 해 주실 것이다. 우리 절대주권을 믿고 한번 기다려 보자.


    머리 싸매고 병저 누워 있는 부모가 그래도 부모인 내가 볼 땐 이 사람이 네 베필된 짝이 맞는 것 같다. 다시 한번만 더 고려해 봐라. 자꾸 그러시면 어지간한 강심장과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까지 감안하고 현실 인도에서 그 모든 심리, 환경을 주권하신 주님이 그 모든 현실 사정을 몰아가 결혼 당사자 두 명이 오케이 해서 결혼식을 올렸다면 결혼 서약했으니 하나님이 짝지어 줬으니 음행의 연고 외에 이혼은 안된다는 것이 자기 결정에 대한 책임이겠습니다. 결혼 케이스가 다양하지만 이 또한 선을 주선한 사람들을 포함한 제3자인 객관과 결혼 당사자 주관의 결정, 둘 다인 쌍방과실로 봐야 하는지요? 아니면 결정한 두 청년만의 선택 잘못인 주관적인 일방과실로 봐야 하는지요? 목회자의 잘못, 부모의 잘못, 자기 결정의 잘못, 쌍방과실을 인정한다면 상대방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말은 쉽게 못할 것 같고 결혼 당사자간 상대방의 전적 일방과실이라면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말을 자신있게 외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3-1.  이해를 돕기 위해 와 닿는 예를 하나 들자면 현재 진행 중인 집회장소의 집회 장소 분할과 소유권 주장에 대한 내계 소송은 쌍방과실입니까? 일방과실입니까? 전적 원고의 오판과 잘못입니까? 피고의 잘못을 고치기 위한 주님의 사랑의 역사입니까?


    이스라엘이 잘못하면 주변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서 회개시킨 것처럼 엄연히 공회 연보를 다같이 모아 구입한 총유재산인 집회 장소를 두고 내가 계약했으니 내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원고의 주장, 지금의 사태는 억지를 쓰는 그 사람 고치기 위한 것입니까? 우리를 고치기 위해 주님이 그 사람을 악하게 만드신 것입니까? 아니면 둘다 입니까? 담당 4님의 말씀처럼 무슨 일이 터지면 상대방 잘못보다 자기 잘못을 먼저 찾아 보고 고치라고 하신 것처럼 집회 장소 소송을 통해 대법원 갈것도 없이 피고인 우리가 모르는, 그렇지만 우리가 반드시 고쳐야만 소송이 해결되는 점이 있다고 보십니까? 쌍방과실입니까? 소장을 접수하고 소송을 진행시킨 원고의 일방적인 과실입니까? 부부싸움도 제 경험상 싸움이라는 동일한 조건과 공통 분모인 점을 감안할 때 지난 수차례 소송 건도 일방과실보다는 쌍방과실로 무게가 실리는 것은 왜일까요? 여기가 좋사오니 주님 재림 때까지 또는 앞으로 적어도 20년 동안은 재독 집회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백목사님 설교가 더 은혜롭습니다. (2013년 집회 설교 중 언급하신 내용 중에서)


    이런 집회 설교에 대한 인도자의 앉은뱅이 신앙과 잘못된 인식과 고정된 관념으로 가득찬 우리를 고치기 위해 부산연구소가 아버지 것은 자녀 것이라며 말도 안되는 주장으로 소송을 시작하게 하신 분이 절대주권의 주님이 맞습니까?  저만의 착각입니까? 제 오판일까요? 아님 그 반대일까요?

  • 2022-07-21 18:07
    1. 문답과 토론

    질문자께서 질문하셨고, 그 질문에 대해서 이곳 답변자의 한 사람으로서 답변을 드렸습니다. 원론적인 답변과 실무적인 답변까지 아는 대로 설명을 드렸고, 제 답변이 부족하면 더 세밀하고 정확한 답변을 들으실 수 있는 방법까지 설명을 드렸습니다. 논쟁을 위한 논쟁은 끝이 없습니다. 연구를 위한 것이면 주제 토론방으로 옮겨서 모두가 함께 토론하면 좋겠습니다.


    2. 다시, 답변의 방향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며, 이곳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연구하는 곳입니다. 답변의 방향에 대해서 앞글에서 설명드렸습니다. 목회자가 질문했으면 목회자에게 자신을 돌아보라고 했을 것입니다. 원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의 방향이며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인간 계산으로 계산하면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각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같은 성경을 가지고 천주교는 천주교를 만들었고 루터와 칼빈은 개혁을 했습니다. 같은 성경을 가지고 침례교도 나오고 장로교도 나오고 통합도 나오고 총공회도 나왔습니다. 같은 백 목사님의 설교록을 가지고 공회가 몇 개로 따로 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중심으로 어떻게 깨닫고 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자기 선택이며, 책임과 심판도 자기가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의 신앙은 궁극의 도이기 때문에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 면이 있습니다. 전부를 다 내주고도 포기할 때는 포기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전부를 다 내놓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몰라서, 바보라서 롯에게 양보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길로 가면 최종에는 복이 됩니다. 세상에서도 복되고, 세상에서 복을 주지 않으시면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토록 복이 됩니다. 지금 답변은 그 면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근본과 궁극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현실적인 방법도 아는 대로 답변을 드렸습니다.


    3. 반론하신 내용에 대해서

    교인은 순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는 것도 자유입니다. 순종하면 복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멀리 보면 불행입니다. 목회자가 막가면, 위해서 기도하고 눈물로 호소하고 또 호소하고, 옳은 것은 순종하고 틀린 것은 순종하지 않는 것이 또한 교인의 할 일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바로 가져야 합니다. 자기중심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잘못할 때, 공회로 말하면 시무 투표 때 부표를 내면 됩니다. 인정 때문에, 안면 때문에, 입장 때문에, 무엇 때문에… 부표를 내야 되는데 내지 않는 것도 인본입니다. 자기 자유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제도를 만들어 둔 것입니다. 목사도 꼭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미워서,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자기 편을 안 들어 준다고 부표를 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명백하게 잘못된 길을 가면 부표를 내서 잘못을 깨우쳐 주라고 교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를 준 것이 공회의 시무 투표 제도입니다.

    백성들이 사울에게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은, 사울의 맹세를 틀렸다고 보지 않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시키면 당연히 순종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간 것이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결혼 중매를 해 보면, 자기 마음에 들면 ‘순종’한다고 합니다. 마음에 안 들면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되었다’고 합니다. 결혼을 미루는 남녀 거의 모두가 이런 경우입니다. 좋을 때는 순종하고, 자기에게 손해 가거나 맞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예외가 없지 않으나 대다수는 이러합니다.


    반강제로 하다시피 된 결혼을 예로 드셨습니다. 정말 결혼을 그렇게 순종해서 했으면 복입니다. 그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신앙은 영원을 향합니다. 멀리 보고 길게 봐야 합니다. 이런 이치를 합리화라고 반론하면 대화는 어렵습니다. 사실을 부정하면 억지가 됩니다.

    성경에 리브가는 아브라함이 보낸 종의 설명을 듣고 하나님의 뜻이라 판단하고 남편 될 사람 얼굴도 보지 않고 그 먼 곳까지 가서 결혼했습니다. 결과는 만고에 그 이름을 아름답게 길이 남긴, 영원토록 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굴 보고 따졌던 야곱은 평생 고생했습니다. 룻은 자기 민족을 버리고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고 전에 알지 못하던 민족에게 갔고, 나이 많은 보아스와 결혼했습니다. 그 결과로 구주 메시야 계통 다윗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고 그대로 순종할 때 나타납니다. 표적이라고 합니다. 표적은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그래서 신비한 역사입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자기 주관이 강하며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심지어 나타난 표적까지도 부정합니다. 부러 잊으려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복되게만 봅니다. 복입니다. 옳은 순종을 하다가 사람이 볼 때는 다 망했다고 해도 복 있는 사람은 그것을 복이라 합니다. 억만금을 갖다 안기고 금 방석에 앉혀놔도 복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사람에게는 방법이 없습니다. 자유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냥 세월에 맡겨두고 스스로 경험하고 체험해서 깨닫는 수밖에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그 반대가 되는 것도 모든 것은 스스로의 판단이며 결정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과 심판 역시 스스로 지고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행복도 자기가 만들고 자기 불행도 자기가 만듭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줄 수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습니다.

    역사에 홍포 입은 부자의 대문에 누웠던 나사로만큼 비참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영원히 복된 사람이었고, 역사에 홍포 입은 부자만큼 사람 보기에 복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영원한 불행이었습니다. 역사에 욥만큼 사람 보기에 억울하게 고난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알고 보니 그만큼 귀하게 아름답게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였습니다.

    이런 일들이, 이런 이치들이 이해되지 않으면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의 방향이 틀리는 것입니다. 어린 것과 방향이 틀리는 것은 다릅니다. 어린 사람은 어리기 때문에 순전하고, 옳고 그른 것을 나름대로 따져서 옳은 것은 받아들이는 면이 있습니다. 복 없는 사람은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 주장만 반복합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말꼬리를 잡고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주님 재림을 부러 잊으려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신앙의 가정에 태어나서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한 자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으로 갚으시려고 어른들을 통해서 복된 길을 권면합니다. 장성한 복 없는 그 사람은 기어코 자기가 보고 판단하는 인간 계산으로 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복 속에 묻혀 있는데도 복을 복인 줄 모릅니다. 받은 복을 발로 차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방법이 없습니다. 탕자처럼 낭패와 실망을 스스로 당하고 난 다음에, 그때라도 돌아서면 그나마 다행이고, 어떤 경우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는 복을 다 팽개치고 평생 허비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자기 발등을 스스로 찍는 사람은 생각 이상으로 세상에 아주 많습니다.


    공회의 현실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작권을 주장해서 공회의 많은 사람을 전과자로 만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집회 장소를 고발해서 엄청난 연보를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에 고소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하여 공회의 대처는 하나하나 세밀하게 살피며 아는 대로는 성경적으로 상대했습니다. 사람의 일인지라 부족함과 실수는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아는 대로는 옳게 바르게만 상대했습니다.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았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신 현실을 살피며 신앙의 바른 길로만 대처했습니다. 웃으실지 모르겠으나 지금도 고소한 상대방들을 위해서 복된 길로 돌아오도록 진정한 마음으로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 복되게 되고 있습니다. 집회는 백 목사님 다음 세대를 이어가는 방향으로 은혜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백 목사님 생전 백 목사님께 배우지 못했던 성경을 지금 얼마나 많이 배우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작권 고소로 재독을 못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집회 장소는 모든 것에 불법이 없도록 다 바로 잡아서 안심하고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저작권 고소자가 고소해서 얻은 것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집회 장소를 고발한 사람이 무엇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고소당해서 전과자들이 많이 발생한 공회는 표현하기 어려운 귀하고 크고 소중한 것을 너무도 많이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건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실지 두고 보면 됩니다. 과정이기 때문에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죄 되지 않는, 모두의 구원에 손해되지 않는 최대한의 노력을 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가져가시면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며, 그래서 이름을 특별하게 ‘공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팔아먹을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배척하지도 않았고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가룟유다 스스로 자기 길을 갔을 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룟유다가 아니었으면 예수님의 대속은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가룟유다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 대속을 완성하실 수 있었습니다. 뱀이 하와를 미혹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어 범죄했고,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이 필요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절대 예정이며 절대 주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핵심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 역사입니다. 이번 질문에 대한 답변의 방향은 이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신앙의 세계를 아는 사람이고, 이것을 모르면 신앙이 무엇인지, 기독교가 어떤 도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믿는 사람이고, 이것을 안 믿으면 결국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결과가 필연적인 논리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게 됩니다.

  • 2022-07-21 20:31
    영육의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는 말씀처럼 진정을 토하시어 질문자의 우둔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강퍅함을 깨우치시는 담당 4님의 답변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합니다. 한편으로 제 아집과 말꼬리에 트집 잡는 쓸데 없는 변론과 자기 주장만 옳다고 계속 관철하는 최근에 일련의 악한 글들을 다시금 재독하며 버릇 없고 무례하며 배은망덕한 제 잘못을 인정하며 자복합니다.

    말로서 잘못을 인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단번에 단칼에 끝낼 수도 없는 사안이지만 그래도 사활 대속의 은혜 부여 잡고 간구하옵기는, 현실에서 두 번 다시는 이 같은 실수, 반복이 없도록 피 흘리기까지 싸워 수십년 심신에 배어 든 악성과 뼈 속까지 깊이 사무친 제 악습을 회개하고 실제 현실에서 하나라도 고칠 수 있는 제 자신이 되도록 기도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 2022-07-22 08:31
    1. 교역자의 책임

    교회의 모든 일은 대소, 경중에 상관없이 전부 교역자의 책임입니다. 무조건입니다. 교인 가정의 어린아이가 놀다가 살짝 다쳐도 교역자는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교인 중에 부부가 서로 안 맞아서 부부 싸움을 해도 교역자는 책임이 있습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내가 목회하는 교회에 생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내 범위 안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인식이라도 이렇게 가져야 공회 목회자라는 이름이라도 붙일 수 있습니다. 시무 투표에 25% 이상 반대가 되면 조건 없이 이동하거나 물러나야 한다는 제도는 이런 무한대의 책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역자라는 사람이 공회 노선을 이탈하고, 노선을 떠나니 설교에 은혜는 없고, 교인들과의 관계는 갈등이 생겨서 못 볼 사이가 되어 있고, 설교 시간에는 공회의 옳은 노선을 비판이나 하고, 시무 투표에서 부표가 나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이동도 하지 않고 물러나지도 않고, 자기 구멍가게처럼 눌러앉아 있는, 이렇게 막가는 경우는 차마 목사라는 이름조차 붙이기 어려운 경우인데, 이런 경우가 공회 안에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세상 직장 같으면 몇 번을 명퇴가 아닌 해고당하고도 남을 상황인데도 그냥 버티고 앉아 있습니다.

    어린 교인들은 다 떠나버리고, 어떤 교인들은 시험에 들어 있고, 그나마 교회를 지키고자 하는 교인들은 억장이 무너지고 죽을 지경이며, 예배 시간이 고통의 시간이 되고 있는 경우가 공회 안에도 버젓이 있습니다. 양 도적을 넘어서 양떼를 잡아서 삶아 먹고 있는 상황인데, 문제는 그런 목사(?)는 그런 줄을 도무지 느끼지를 못합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말을 해도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자기 말만 쏟아냅니다. 자기가 양들을 삶아 먹고 있는 줄을 지식적으로도 모르고 도무지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경우입니다.

    가정의 가장이 가족을 돌보지 않고 팽개치고 그냥 막가는 식으로 혼자 살고 있으면 가족들은 억장이 무너지고 죽을 지경이며 하루하루가 고통 속에 지옥 같은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면 사람인가? 사람이라야 사람이지!’ 하는 말씀이 설교록에 나옵니다. ‘목사면 다 목사인가? 목사 같아야 목사이지!’라는 말로 응용해 봅니다. 이런 목사, 이런 가장을 ‘목사’라고,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

    문제는, 이런 목회자(?), 이런 가장들에 대해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이라야 사람의 말이 통하고, 목사라야 목사에게 해당되는 말이 통하고 대화가 되는데,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고 정상적인 목사가 아니니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냥 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아닌 것은 아니라 하고 자기 할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때를 주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 직장은 나이가 들면 은퇴라도 하는데, 공회는 은퇴 제도가 없습니다. 그러니 악용하여 나이가 들어서 노망을 한다고 할 정도가 되어도 버티고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강단을 지키며 은혜를 끼쳐서 교인들이 은혜를 사모하여 은퇴를 못 하는 경우가 가장 성경적이며 가장 좋은 것이고, 그게 안 되어 나이 들어 은혜를 끼치지 못하면 스스로 은퇴해서 교회도 교인들도 살길을 열어 줘야 되는데, 그냥 욕심을 부리고 버티고 앉아 있으니, 교인들은 목사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당사자는 그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2. 우리가 할 일, 하나님께 맡길 일

    질문자께 여러 설명과 함께 답변의 방향을 말씀드렸습니다. 질문하신 분의 입장과 형편을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나 위의 내용 같은 상황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그럼에도 그런 방향으로 답변을 안내한 것은 질문자와 답변자가 한 깨달음을 가지고 한 노선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질문자와 답변자는 ‘우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이 할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방임하는 것도 안 될 것입니다. 쉽지 않지만 세밀하게 잘 살펴서 할 말은 계속 해야 하고 할 일은 계속해야 합니다. 교회는 지켜야 하고 가정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악인의 악한 행위가 끝없이 계속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울의 천하에서 사울은 다윗을 잡아서 죽이려고 전력을 다했으나 다윗은 그런 상황 속에서 도망을 다니면서도,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기회를 주셨지만 사울에게 대해서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라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때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처리하셨습니다.


    서로가 대화를 하다 보면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하고 표현이 격해지기도 합니다. 서로가 선을 넘지 않으면 됩니다. 질문자께서 ‘죄송’이라는 표현까지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답변자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표현한다고 노력은 하지만 본의 아니게 과한 표현을 사용했을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재질문을 해 주시고, 과한 부분이 있으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 2022-07-22 12:23
    신앙고민, 인생고민 주님께 다 털어 놓고 기도로 다 해결할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만한 믿음도 신앙의 실력도 안되다 보니 다들 목회자에게 문의 드리고 싶은 것이겠지요. 물론 혼자 해결할 수만 있다면야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지요. 컵라면 두 개, 김밥 두줄, 스틱 커피 두 개 들고 말 동무 겸 문이 닳도록 목회자를 찾아가고 싶으나 나이가 들수록 이마저도 어렵네요. 아마도 미약하나마 철이 들었다는 뜻도 될 것이고 세상 떼가 많이 묻었다는 의미도 있겠지요. 많은 시간 할애해 주셔서 섬겨 주신 긴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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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대구에 사는 어린 신앙의 교회 안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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