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답

성구해석 - 사도행전2:15

일반질문용
작성자
교인
작성일
2022.07.14
사도행전 2:15-21
15. 때가 제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위 성구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까?
전체 11

  • 2022-07-14 05:35
    신약시대 성령이 부어졌을 때 나타나는 신앙의 다양한 모습을 말씀하신 성구입니다. 자녀들의 신앙과 남종, 여종들의 신앙은 서로 같아서 예언하는 신앙이다. 이는 죽은 자를 살리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신앙은 자녀들의 신앙, 종들의 신앙인, 성령이 원인되어 도출되는 예언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환상을 보는 젊은이 신앙도 구원을 이루는 신앙은 못 된다. 성령을 받았으나 육체로 그쳐 허황된 환상만을 찾아가는 신비주의 신앙 또는 시간 낭비만 하는 신앙을 여기서 젊은이 신앙, 환상만 보는 신앙이라 했다. 그리고 늙은이 신앙도 성령을 받았으나 꿈만 꾸는 신앙, 구원의 실상은 없고 내가 과거에 왕년에 신앙생활 이렇게 잘했는데 등등 꿈만 늘 꾸기만 하여 현재 현실에서 주님의 요구와 뜻은 버려 버린 채 과거와 미래에만 집착하는, 실상은 없고 허구와 허울뿐인 그저 늘 꿈만 꾸는 신앙이 바로 늙은이 신앙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받아도 또 성령을 받은 그 이후라도 도박 신앙처럼 환상만 보는 젊은이 신앙을 버리고 또 실상이 아닌 허황된 꿈만 꾸는 늙은이 신앙도 과감하게 탈피하여 오직 자녀들처럼 아이처럼 남종, 여종들처럼 예언하는 신앙이 되어 자타 전부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앙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성령 받기를 또 성령 받은 이후 성령을 소멸하거나 성령을 근심치 않도록 늘 깨어 성령 충만한 삶을 살라는 이치를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 2022-07-14 05:55
    공회인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한편으로 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위 성구를 바라보게 됩니다. 백목사님 설교 해석을 반대하거나 폐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살을 붙이고 보충하여 완전에 나아가기 위한 연구 자세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 두고 글을 적어 봅니다.

    위 성구 사도행전 2장은 120여명의 교인들에게 기다리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다락에 올라가서 성령 받기를 전혀 기도할 때 10일만인 주일날에 성령이 임한 유명한 사건으로 기록된 말씀이라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셨을 때 나타난 현상입니다. 말세라면 신약시대 전부를 통칭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그 범위를 조금 좁혀 다락방 그 당시 성령 받은 그 120명 정도로 국한해 봅니다. 방언을 들은 주변 이들은 조롱했지만 베드로는 이를 반박하기 위해 요엘서를 인용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녀 신앙, 아이 신앙, 남종 여종의 종들 신앙만 좋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늙은이 신앙, 젊은이 신앙까지 좋게 보이고 환상을 보는 신앙, 꿈꾸는 신앙까지도 선하게 복되게 좋게 보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보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 젊은이들은 환상과는 반대로 과학적이고 눈에 보여야만 믿고 자연 이치에 맞아야 하고 과거 전통에 맞아야만 믿는데 성령이 오심으로 이런 젊은이들의 그런 고정관념을 깨시고 좋은 의미의 환상을 보게 하고 믿게 하는 신앙으로 바꾸는 역사가 성령이 임했을 때 가능케 되었다.

    한 예로 뒤이어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가 베드로를 자기 집에 청했을 때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 주심으로 그의 고정된 생각을 깨십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만 있고 이방인에게는 없다고 하는, 그 당시 유대인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인 이 이치 하나를 깨뜨리기 위해 그렇게 하싱으로 베드로를 이방인 고넬료에게 보내기 위해 환상이라는 성령의 역사를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당시 베드로는 나이적으로만 보더라도 추측건대 40대 초중반의 젊은이 신앙이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베드로가 젊었을 그 때 환상을 봄으로 이방인 전도의 문이 열리는 역사, 첫 단추가 끼워지게 됩니다.

    또한 늙은이는 죽을 날만 기다리고 아무런 소망이 없는데 이런 늙은이가 꿈을 꾼다는 것은, 성령이 그런 신앙적으로 또 나이적으로 늙어서 꿈, 소망과는 거리가 먼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니까 늙어서도 열매를 맺게 하시고 잎이 청청하게 하신다는 말씀처럼 신약시대 육체적으로도 늙어 있고 신앙적으로도 늙어 있는 그들에게도 구약 요엘서의 예언 성취가 실상으로 다가온 말씀은 아닌가?

    또 한 예로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당시가 사도 요한이가 늙은 때이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이후 5년 안에 사도 요한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늙은이 요한에게 나타나신 주님이 그에게 보여주신 그 모든 계시의 비밀을 요한이 보고서 듣고서 기록한 것이 사도 요한인데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기 전과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이후, 노년의 사도 요한의 삶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밧모섬이라는 감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아무런 꿈 없고 소망없어 보이는 늙은이에게 주님이 찾아와 그에게 꿈을 주어 꿈꾸게 하시고 재림의 소망을 후세대에게 전하라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게 하셨다. 이 모든 것은 늙은이를  꿈꾸게 하는 성령의 그 모든 선한 역사이다.

    물론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역사도 있겠지만 여기 사도행전 2장에서 모인 사람들이 성령 받은 120명, 그들을 향해 저희가 새 술에 취했다 조롱하는 말에 대한 반박과 반론으로 베드로가 요엘서를 인용하며 설명한 내용이니 성령 역사의 좋은 면, 선한 면만 필자의 눈에는 보인다.  본인은 위 공회인의 설명보다는 일반인의 설명이 더 와 닿는다. 이 곳을 방문하시는 다른 독자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 2022-07-15 21:05
      댓글 다신 분의 요청으로, 원글 글쓴이 '교인'과 댓글 글쓴이 '교인'을 구분하기 위하여 '일반인'으로 변경함

  • 2022-07-14 11:38
    저도 늘 많이 궁금했던 질문입니다. 말씀 자체만 보면 아이 신앙, 젊은이 신앙, 늙은이 신앙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은 아이와 같은 신앙이라는 해석이 확신이 듭니다. 하지만 본문의 맥락으로 보았을 때는 어떻게 보면 좋을지 궁금합니다.

  • 2022-07-15 20:47
    참고로,
    본문의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고, 내용이 좀 길지만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본문 주해식으로 설명해 보았습니다.

    1. 본문의 배경

    위 내용은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오순절에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한 지방의 언어로 전하는 사도들의 전도를 듣는 많은 지방 사람들이 각각 자기 말로 들리는 방언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었습니다. 듣는 사람들이 다 이것이 어쩐 일이냐며 의문을 가지면서도 놀라고 있는 바로 그 자리, 그렇게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 한편에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들이 술 취한 것 아니냐’며 조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같은 시각, 같은 장소, 같은 사건의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놀라고, 어떤 사람들은 의혹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술 취한 것 아니냐며 조롱하는 망령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본 베드로가 구약의 요엘서를 인용한 말씀이 질문하신 내용입니다. 말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 주시는, 성령 충만의 역사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런 여러 모습이 나타나게 될 것을 구약에 요엘 선지를 통해서 미리 예언했다는 사실을 증거한 것입니다.


    2. 본문 해석

    15-16절

    술 취했다고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상황을 설명한 것입니다. 제3시는 오전 9시쯤이라고도 합니다. 그냥 한낮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른 아침 혹은 한낮이기 때문에 술 먹을 시간이 아니며, 따라서 술 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한 것입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고 술 취한 사람처럼 그렇게 보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조롱했고, 베드로는 이런 이른 아침에 술 취해서 저렇게 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지 않느냐고 반박을 하면서 요엘서를 인용하여 증거하는 것입니다.


    17-18절

    요엘서를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세에 성령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부어 주신다는 말씀은 아주 충만하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예수님 부활 승천 이후 그 첫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물 붓듯이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일어날 모습들을 요엘서에는 미리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남종과 여종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도 예언할 것이라 했습니다.

    주의할 것은, 연령대로 기록은 했으나 연령대를 말함이 아니고 말세에 나타날 믿음의 상태, 신앙의 여러 모습을 가르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말세가 되면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있게 되고, 그럴 때 그 성령의 충만한 그 가운데서 믿는 사람들의 믿음의 모습, 신앙의 상태가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 같은 믿음, 어떤 사람은 젊은이 같은 믿음, 또 어떤 사람은 늙은이 같은 믿음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드물겠지만 연령대로 어린아이도 젊은이나 늙은이 같은 신앙이 있을 수 있고, 젊은이도 늙은이 신앙도 될 수 있고 어린아이 같은 신앙도 될 수 있으면, 나이 많은 사람이라도 어린아이 신앙도 될 수 있고 젊은이 신앙도 될 수 있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연령대가 중점이 아니라 신앙의 상태가 중점이라는 말씀입니다.

    ‘자녀’는 자라가는 어린아이들이고, ‘젊은이’는 다 자라서 한창 힘이 넘칠 때이고, ‘늙은이’는 더 이상 자라지도 않고 힘도 없는, 좀 과하게 표현하자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모습의 믿음들이 말세에 나타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언’이라는 것은, 세상이 모르는, 아직 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고 세상에 알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하는 사람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린아이처럼 순전하고 깨끗하며 순종해야 알 수 있습니다.

    ‘환상’은 말 그대로 환상입니다. 실상이 아닌 허상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헛된 것을 보는 것을 환상이라 합니다. 뭔가 보이기는 보이는데 실체는 없는, 그래서 결과는 허무하게 되는 것을 환상이라고 합니다.

    ‘꿈’은 말 그대로 꿈입니다. 꿈에서 공중을 날아다녀도 그냥 꿈일 뿐입니다. 꿈에 재벌이 되어도, 대통령이 되어도 꿈은 꿈일 뿐입니다.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 꿈입니다.


    자녀들은 예언한다고 했습니다. 남종과 여종도 예언한다고 했습니다. 말세는 신약시대 전부이고, 오늘 우리 시대가 말세입니다. 말세지 말이라고 합니다.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 주시는 때입니다. 성령은 진리를 통해서 역사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말은 진리가 있다는 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참된 진리가 있고 그 진리를 통한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게 임할 때 그 진리와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어떤 사람은 신앙이 어린아이가 자라가듯이 날마다, 현실마다, 사건마다 자라가는 신앙의 사람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에게 대한, 자기 현실에 대한, 주신 범위에 따라 자기 교회에 대한, 자기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 뜻을 전하여 예언하는 사람이 됩니다. 아주 희귀하겠지만 이런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평생 변치 않고 가져야 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젊은이는 환상을 본다고 했습니다. 젊은이는 다 자라서 힘은 넘치지만 더 이상의 성장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체의 연령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있는 그런 곳에 몸담고 있어도 그 사람의 신앙이, 신앙의 인식이 젊은이가 되어 있으면 그때는 힘이 넘치게 신앙생활 하는 것처럼 보여도 성장은 없고, 따라서 그는 늘 환상만 봅니다.

    열심도 있고 충성도 있으니까 뭔가 보이기는 보입니다. 하나님도, 천국도, 구원의 길도 뭔가 보이기는 보이는데 손에 잡히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로서 확실하게 잡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말하자면 환상뿐입니다. 실체가 보이지 않으니까 열심히 하다가 점점 힘이 빠집니다. 점점 식어지게 됩니다. 가면 갈수록 신앙이 식어지고 열심도 점점 식어집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을 때 이런 신앙의 모습이 됩니다.

    생명은 계속해서 활동하면서 자라가는 것인데, 자라가면 새로운 것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며 갈수록 더 힘이 넘치고 더 또렷하게 보이게 되는데, 젊은이는 다 자라서 현재는 힘이 넘치지만 더 이상의 성장이 없으니까, 생명의 새로운 작용이 없고 현재 가지고 있는 것만 붙들고 있으니까 새로운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현재까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지식, 깨달음, 경험과 체험이 전부이고 앞으로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이 젊은이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의 상태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고, 오늘날 제대로 된 교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신앙에 머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늙은이는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늙은이는 어린아이도, 젊은이도 아닌, 인생을 다 산 마지막에 선 사람입니다. 더 이상은 성장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신앙의 상태를 말합니다. 한쪽에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날마다, 사건마다 신앙이 어린아이처럼 자라고 있는데, 또 어떤 사람은 자라지는 못해도 힘이 넘치니까 힘 있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어떤 사람은 늙은이처럼 과거 신앙만 팔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꿈속에 사는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어린아이들, 젊은 사람들을 보면서 속으로, ‘나도 과거에는 저렇게 열심히 했지, 한때는 다 저렇게 하는 것이지, 저들도 세월 지나면 나처럼 다 식어지겠지, 철이 없을 때는 멋모르고 저렇게 열심히 하는 것이지…’ 말은 안 해도 이런 꿈만 꾸고 있는 사람의 신앙을 늙은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북쪽 이스라엘 여로보암 왕 때 하나님의 역사로 이적을 일으켜 여로보암 왕을 책망했던 젊은 선지자를 미혹하여 죽게 만든 것이 벧엘에 살고 있던 늙은 선지자였습니다.


    19절

    ‘하늘’은 교회를 말하고, ‘땅’은 세상을 말합니다. ‘기사’는 기이한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적의 역사, 표적의 역사를 말합니다. ‘징조’란 뭔가를 알리는 표시라는 뜻입니다. 조짐이며, 전조증상이라고도 합니다.

    말세가 될수록,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있는 교회일수록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가 있게 되어 있습니다. 초기 어릴 때는 보이는 역사가 많았고, 말세지 말 지금은 눈 어두운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내적인 신비한 역사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는 이것을 가리켜서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진리가 있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있는 곳, 그런 공회, 그런 교회는 오늘도 기사가 넘칩니다. 신비한 역사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공회적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신비한 것은 말 그대로 신비한 것입니다. 말로 형언하기가 어렵습니다. 꿀 먹은 벙어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는 사람은 보고 아는 사람은 아는데, 안 보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며, 아무리 말해줘도 알지도 못하고 느끼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이런 역사가 있을 것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징조가 있습니다. 말세지 말 지금 세상은 주님 재림의 징조가 수없이 보이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모든 세대가 다 보이고 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되어 있습니다. 개나 고양이를 반려견, 반려묘라고 하는 시대입니다. 반려라는 말은 짝이라는 말입니다. 아내나 남편을 일컫는 말입니다.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그렇게 표현하는 시대이고 실제 그렇게 상대를 하고 있는 때입니다. 망령도 이런 망령이 없는데 이것이 당연시되고 있는 것이 지금 시대입니다. 말세의 징조입니다. 이런 징조는 수도 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피’는 생명이며 죽음입니다. 말세지 말 성령이 충만할 때 교회 안에서 한편으로는 주님의 대속의 생명 역사가 충만하여 요나의 표적으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도 있고, 또 한편에서는 신앙이 마구 죽어 나가는 역사도 있을 것을 ‘피’라고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은 태우며 뜨거운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은 뜨거운 신앙의 사람이 되어 더욱 뜨겁게 천국을 향하여 달려갈 것이고, 이 불을 견디지 못하는 신앙들은 다 속화되고 타락하여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연기’는 불이 나서 주변이 보이지 않게 가려지는 것입니다. 교회도 세상도 주님의 피의 역사와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속의 수많은 세상 욕심으로 눈이 어두워지고 심령이 어두워져서 갈 길을 알지 못하게 헤매다가 다 실패하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20절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을 말합니다. 주님 재림의 날이 오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진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해’는 하나님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이 어두워질 수는 없습니다. 낮에 해가 떠 있어도 땅이 어두운 것은 구름이 가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함없이 역사하시지만 인간들이 어두워지니 교회에도 세상에도 가려져서 그 역사가 나타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말세가 될수록 이런 현상은 더 심화됩니다.

    ‘달’은 태양 빛을 받아서 반사 시켜 빛을 비추는 역할이니 곧 교회를 의미합니다. 달이 변하여 피가 된다는 말은 교회가 다 속화되어서 죽는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속화는 교인의 속화이고, 교인의 속화는 목회자의 속화이며, 목회자의 속화는 신학교의 속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세지 말이 오늘은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희귀하고, 성도다운 성도가 희귀한 오늘입니다. 찬송가를 수도 없이 바꾸고 성경까지 바꾸는 시대입니다. 요엘 선지를 통해서, 앞선 종들을 통해서 예언한 수많은 예언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 말세지 말입니다.


    21절

    이런 어두운 시대, 암울한 시대이지만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도 아직은 소망이 있으니, 지금도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 사활의 대속을 깨달아 대속 입은 사람으로 살며 그 대속을 전하는 생활에 전력하는 사람은 더욱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건설구원, 성화구원, 기능구원을 이루어 가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세가 될수록 악한 자는 더욱 악해지고 속이는 자들은 더 속이지만, 반대로 선한 사람, 의로운 사람, 진실한 사람은 더 진실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 2022-07-16 02:59
    상세하고도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젊은이 신앙, 늙은이 신앙이 육체적인 나이를 말하기 보다 신앙적인 나이와 성숙 정도를 중점적으로 말하는 것이라는 설명에 전적 동의합니다.

    한편으로 거듭 드리고 싶은 말씀은 환상과 꿈을 좋게 볼 수는 없을까? 입니다.
    다락방에 모인 120명 중에는 나이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아이신앙, 젊은이 신앙, 늙은이 신앙이 각각 있었을 테고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을 때 방언과 함께, 동시에 베드로에게 나타났던 고넬료 이방인은 더러운 것이 아리라고 교훈하신 환상, 육체적으로 그렇고 신앙적으로도 노숙한 노년의 사도 요한과 같이 요한계시록의 꿈과 소망을 본 자들도 있을 수도 있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물론 실상이 아닌 헛된 환상도 있고 요셉의 꿈꾸는 자와는 반대로 소망이 아닌 헛된 꿈도 분명 존재하지만 여기 요엘서 인용과 함께 베드로의 설교는 120명 저희가 새술에 취했다 할 때 아니다 그들은 낮술로 인해 제 정신이 아니다 고 한 말에 대한 반박으로 그들은 성령의 술에 취해 지금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젊은이에게 성령이 들어가니까 환상을 통해 젊은이 신앙의 한계(고착화된 신념, 기존지식의 인식전환 불가)를 뛰어 넘게 하시고 또한 늙은이에게 성령이 들어가니까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 신앙의 한계(새로운 도전 없고 현실 안주, 이만하면 되었다)를 극복하게 하신다.

    성령을 잘못 상대하여 잘못 받으면 분명 안 좋은 면의 환상, 꿈도 엄연히 존재하지만 여기 요엘서 인용과 함께 사도행전 2장의 기록은 긍정의 성령 역사를 중점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너무 과장된 억지 해석, 확대 해석일까요?

  • 2022-07-16 14:33
    성경은 수많은 진리가 함축된 요약입니다. 당연히 해석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성경 말씀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원을 향한 절대 진리의 말씀입니다. 너무 깊고 넓으며 높은 도의 말씀이기 때문에 아주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 해석에 ‘정답’이란 정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얼마만큼 성경 진리의 본뜻에 가깝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입니다.

    같은 성경, 같은 성구를, 같은 사람이 해석해도 그 사람의 신앙 성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성경입니다. 깊이가 다르고 넓이와 높이가 달라지며 세밀성이 다르고 체계가 달라지는 것이 성경 해석입니다.

    같은 성경을 가지고 천주교가 되기도 하고, 같은 성경을 가지고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 심지어 신천지가 되기도 합니다. 정통이라고 하는 큰 교파 안에서도 장로교, 침례교, 성결교, 감리교 등으로 갈라지며, 같은 장로교 안에서도 수많은 교파로 나눠진 것은 성경 해석의 차이 때문입니다.


    정말 잘못된 해석이 아니면 이단이라거나 틀렸다고 정죄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의 해석을 쉽게 틀렸다고 단정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아주 극히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 잣대로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을 정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일반인’께서 해석하시는 그 해석을 틀렸다거나 확대해석이나 과장된 억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렇게나 한다는 뜻이 아님은 당연합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그 한 진리를 찾아서 가는 과정의 방편을 이렇게 저렇게 사용해 보는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소망인 건설구원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 아주 틀린 해석이 아니면 각자 자기 깨달음대로, 자기가 걸어가는 신앙에 유익된 방향으로 찾아서 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동시에, 그 해석과 그에 따른 본인의 생애와 타인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최종 결과의 책임 역시 본인이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운 것이고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조금 보충하여,
    성경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꿈이나 환상도 당연히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두고, 또는 실제 신앙생활을 해 보면 꿈이나 환상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도, 개인이 받는 것도 아주 제한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특별한 경우에 특별하게 역사하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특별하게 역사하시는 특별한 경우를 일반적인 성경 해석으로 적용하는 것은 좀 신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보편성으로 주신 성경이니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도록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2022-07-16 15:47
    특수한 경우를 일반화 하는데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보니 생각에 잠기게 되네요. 담당 4님은 산 정상에 서 계신데 저는 아직 산 중턱에서 헉헉대며 정상을 바라보니 성구가 달리 보이고 왜곡하는 면도 있을 수 있으니 좀 더 연구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2-07-16 17:42
    고넬료 사건 때 베드로가 본 환상이 특수한 경우고 사도 요한이 꿈꾼 요한계시록이 특수한 경우라면 요엘서의 예언 성취가 그대로 실현된 것이 사도행전 2장의 120명 그들에게 나타났는데 이 또한 특수한 경우라고 한다면 이런 성경 속 사건들을 읽는 우리에게 있어 특수한 경우와 일반 보편적인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고민해 봅니다.

  • 2022-07-16 21:43
    환상도, 꿈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도, 요셉이 꾼 꿈도, 심지어 이방인 애굽의 바로 왕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도 하나님께서 하신 역사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역사가 꿈이나 환상으로 하시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이는 특별한 경우에 특별하게 하시는 역사이지 일반적,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역사하시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강림 역사는, 시대가 특별했고 그들에게 맡긴 사명이 특별해서 아주 강하게, 충만히 역사하여 특별하게 보이지만 그들에게 역사하신 성령 역사의 방법은 일반적인 역사입니다. 말하자면 누구에게나 성령은 그렇게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4-5)

    예수님이 못 박혀 죽으신 예루살렘, 사도들과 그 문도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서슬이 시퍼런 환경이 되어 있는 그곳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이 주님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역사하시는 일반적인 역사입니다.

    주님이 주신 현실에서, 주님이 명하시는 말씀을, 어떤 경우라도 버리지 말고 빼앗기지 말고 순종하면 바로 그 자리, 그 속에서 성령은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반적인 역사, 보편적인 역사입니다.


    베드로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변화산 상에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대속 역사를 의논하시는 것을 봤고, 너무 좋아서 거기서 초막 셋을 지어서 함께 살자고 한 일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 선명하게 봤습니다. 예수님은 실제였지만 모세와 엘리야는 환상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벧후1:19에 말씀하시면서 그보다 더 확실한 것은 말씀이며 그 말씀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1:16-19)


    정리하면,
    환상도 꿈도 성령의 역사이지만 특별한 경우에 하시는 것이지 일반적인 역사는 아니며, 오순절의 성령 강림 역사는 시대와 사명이 특별했고 그 정도가 강하여 특별하게 보일 뿐 일반적인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일반인’께서 말씀하신 바로 위 댓글에 대해서는,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 고만고만하고 비슷하다는 뜻이겠습니다. 어떤 부분은 답변자가 나을 수 있고, 어떤 부분은 ‘일반인’께서 나은 것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정말 특별한 분이 아니면 대개는 아는 것도, 실행도, 성화의 정도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함께 연구하며 함께 배워가며 함께 자라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 2022-07-17 03:56
    우선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특별 역사와 보편 역사에 대한 말씀, 설교 시간에 많이 듣긴 했지만 담당 4님의 댓글을 재차 읽고 보니 새롭게 묵상하게 되어 감사가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창세기 1장의 창조 역사는 다시 일어나지 않지만 몇년 전 집회 말씀처럼 오늘 하루 새출발의 재창조 역사는 지금도 가능하다. 주님의 십자가 대속이 다시 일어날 수는 없지만 지금도 나 자신과 타인의 영혼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이고 다시 살리는 사활의 역사는 계속 일어나고 있다. 성경을 기록하는 역사는 끝이 났지만 지금도 하나님이 현실에서 각자 깨닫게 하시는 간증 역사를 기록하게 하신다. 비록 성경 만큼은 아니더라도 주관, 객관이 모두 알 수 있도록 말이다. 지금 주님께 직접 배운 사도는 없지만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뜨겁게 만나 사도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주의 종들은 간혹 드물게 존재한다.

    사도행전 2장도 지금 다시 재현이 가능한가? 보편 역사인가? 과거 생전 주님을 따랐던 수 천, 수 만의 사람들 중에서 단지 120명처럼 그들만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면 이는 특수한 경우인가? 지금도 역사하시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 능력있는 사역을 하는 목회자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힘없는 목회자가 더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는  특수한 경우인가? 보편의 역사인가?

    내가 고집 부리고 내가 옳다고 주장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환상을 통해 자기를 부인케 하시는가? 과거 부산 서부교회  청빙이 들어 왔을 때 가기를 거부했으나 주님이 상한 떡이라는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젊은이 신앙의 그 목회자의 고집을 꺽으시고 부산으로 가게 하신 그 환상이 지금 내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가? 이것이 특정한 이에게만 일어나는 성령의 특수성인가? 성령의 보편성인가? 6.25전쟁 예언과 대한민국 중립국이라는 꿈과 소망은 단지 노련하고 노숙한 신앙, 신앙의 절정기 때 그에게만 주신 특수성인가? 아니면 지금도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미리 알려 주시는 보편의 역사인가?

    담당 4님의 답변을 듣고 보니 환상과 꿈이 보편성의 역사가 아니고 특수한 역사이니 요엘서 인용에서 젊은이가 환상을 보고 늙은이가 꿈꾸는 것은 보편적인 원리에 따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고넬료 사건 때 베드로에게 보여 주신 환상이 지금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성령의 역사이고 사도 요한이 본 꿈과 계시가 과거 6.25와 중립국 예언처럼 지금도 어떤 이에게는 가능하다면 물론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방언하는 자겠느냐 말씀하신 것처럼 환상도 꿈도 모든 사람에게 다 주시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지금도 그같은 역사가 일반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보편성의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고 한다면 요엘서의 젊은이 환상도 늙은이의 꿈도 좋게 해석할 수는 있을까요? 담당 4님께  재차 질문 드립니다.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다만 설교하는 입장에서 백목사님의 설교와 제 설교는 도토리 키재기에 비유할 만큼 별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지금까지는 따라갈 수 없고 범접할 수 없는 능력, 주님이 함께 하신 그 신의 경지에 감탄할 뿐입니다. 그만큼 차이가 많이 나고 도토리 키재기 할 수 없는 설교 실력의 차이를 절감합니다. 나도 그리 되기를 소망하고 바래 보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마음 만큼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백목사님 같은 목회를 해 보고 싶고 어찌 보면 백목사님보다 더 큰 것도 더 능력있는 목회도 해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한데 가정 목회 하나도 못해 아내와 자녀들의 마음을 못 얻고 있으니 이 또한 탄식입니다.

    물론 담당4님이 말씀하신 도토리 키재기 뜻과 인용하신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며 백목사님 수준은 시대를 감당하신 종이니 특수한 경우고 우리 수준은 다 보편적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임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도 저는 백목사님을 뛰어 넘어 주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고 싶습니다. 원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고 부르심의 사명이라는 택함으로 되는 것이지만 소원을 먼저 주시고 이루어 가게 하신다는 말씀처럼 소망만큼은 원대하게 최고의 수준, 최고의 위치까지 도달해 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주님의 완전한 수준까지 말입니다. OO에서 목회하시는 담당 4님의 100분의 1도 아직 흉내 내지 못하고 있지만 마음만큼은 소망만큼은 신풍목사님을 뛰어 넘고 백목사님을 뛰어 넘어 음란하고 악독이 가득찬 이 시대, 이 말세를 감당하는 시대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요엘서 예언이 성취된 사도행전 2장이 보편의 역사면 담당 4님의 말씀처럼 환상과 꿈은 허황된 것으로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 같고 그렇지 않고 특수한 성령의 역사이면 젊은이 환상도 늙은이 꿈도 베드로 환상처럼 사도 요한의 요한게시록처럼 요셉의 꿈꾸는 자처럼 7년 풍년, 7년 흉년처럼 지금도 재현이 가능하다면 선하고 복되게 좋게 해석해 볼 수 있는 여지도 있지는 않을까? 하고 성령의 특수성과 보편성의 양면을 생각해 보게 되네요.

    댓글 답변을 통해 여러 다양한 각도로 살펴 보게 하심에 감사가 됩니다.

전체 3,325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공지
'문답방 이용 - ①기존문답보관실 ②비공개질문 ③비실명진행
공지 | 직원 | 2018.02.21 | 추천 0 | 조회 10388
직원 2018.02.21 0 10388
12048
New UP [설교록] 목회설교록 구입 방법 문의 (1)
12048 | #2200 | 2022.08.15
#2200 2022.08.15 0 11
12047
New UP [기타] 이복음님, 마음을 넓히시길 부탁 (1)
12047 | #2194 | 2022.08.15
#2194 2022.08.15 0 9
12046
New UP [공과] 하나님의 축복 공과 설명 부탁 (1)
12046 | #2191 | 2022.08.15
#2191 2022.08.15 0 6
12044
New UP 비밀글 요한계시록 질문 (1)
12044 | . | 2022.08.14
. 2022.08.14 0 13
12040
조언이 필요합니다. (3)
12040 | 일반인 | 2022.08.07
일반인 2022.08.07 0 225
12034
[회개] 자신의 죄로 주변이 고통당하는 현실 (1)
12034 | #2175 | 2022.08.02
#2175 2022.08.02 0 110
12033
[목회] 목사님의 하루 일과 궁금 (1)
12033 | #2176 | 2022.08.02
#2176 2022.08.02 0 63
12032
[진화설] 진화론에 대해서 (1)
12032 | #2174 | 2022.08.02
#2174 2022.08.02 0 38
12030
[양성원] 총공회 목회자 양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1)
12030 | #2172 | 2022.08.01
#2172 2022.08.01 0 94
12029
[양육] 세상에 대해 여과해서 가르쳐야 하는지? (1)
12029 | #2165 | 2022.08.01
#2165 2022.08.01 0 32
12028
[설교록] 언행심사를 바로 한다는 것? (1)
12028 | #2164 | 2022.08.01
#2164 2022.08.01 0 18
12019
[신앙자세] 미운 마음이 너무 심할 때 (1)
12019 | #2154 | 2022.07.27
#2154 2022.07.27 0 67
12018
[방언] 방언에 대해 (1)
12018 | #2153 | 2022.07.27
#2153 2022.07.27 0 43
12017
[전도] 대구에 사는 어린 신앙의 교회 안내 (1)
12017 | #2152 | 2022.07.27
#2152 2022.07.27 0 45
12016
죄로 인한 가족의 불행 인식의 고통 (2)
12016 | 질문 | 2022.07.27
질문 2022.07.27 0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