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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CCM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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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537
작성일
2022.04.18

2003-03-15 10:00:23
김현아

 

 

[찬송] ccm에 관해서 입니다.

 

 

제목분류 : [~교리~교회론~신앙생활~찬송~]
내용분류 : [-교리-교회론-신앙생활-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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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은 김현아입니다.저는 대구공회소속 교인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목사님께서 하신 귀한 말씀들중에 걸림이 있어서 이렇게 올립니다.

목사님, ccm자체가 우리에 믿음을 떨어뜨린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이 잘못되어서 그렇지 , 그 자체가 믿음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면 좀 위험할 것 같습니다. 물론 요즘에 좀 너무하다싶은 ccm이 많이 나오는것은 걱정이 됩니다.

찬송가에 있는건 좋고, 요즘나오는 ccm은 믿음만 떨어뜨린다고 말씀을 들었을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찬송가에 수록된 곡들도 영국에서 복음성가로 불려지던 것들이었습니다. 또한 268장 온세상 위하여"는 찬송가중에 가장 최근에 작곡된 것입니다. 그 찬송가 보다 더 전에 만들어져서 불려지고 있는 ccm들도 많습니다.

한 성령님께서 "온세상 위하여"의 때까지만 충만하게 역사하시고, 그 이후엔 음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역사하심을 조금만 하셨을까요? 그래서 영성을 떨어뜨리는 더러운 영이 그때부터 틈타게 된걸까요? 그시대와 그 후에도 한 성령님이실줄로 믿습니다.

요즘에 ccm중에서 세속에 물든 것들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최근 가스펠중에는 차라리 안듣는게 나을것같은 곡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찬송가책자에 수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건 찬송가가 아니라 믿음만 떨어뜨린다고 생각하긴 어려울것 같습니다. 너무나 좋은 곡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단지, 사용하는 방법이 점점 변질되고 있음이 잘못인것입니다.

사실 저는 선교단체에서 예배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섬기는 교회에서도 많은 찬양팀과 성가대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섬기는 선교단체의 집회 청중은 모두 구체적으로 선교에 헌신한 자들 입니다. 그들에겐 ccm을 통하여서도 성령님께서 강하게 기름부으십니다.
반면에 교회에서는 ccm이 모두에게 효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굉장히 다양한 층의 사람들이 있고, 신앙성숙도도 천차만별이니까요.

찬송가도 너무 귀하고, ccm도 너무 귀합니다. 제 생각엔 분별하는 것이 중요한것 같습니다. 점점 세속화되어가는 ccm을 올바르게 분별하여 청중에 맞게, 자리에 맞게 부르는 것이 올바른것 같습니다. 올바른 분별을 하기 위해서는 늘 말씀 가운데 서있고, 성도들을 배려하는 사랑 가운데 서있어야만 할 것 입니다.
언제까지나 200곡으로 한정하여 부르겠다고 하는것은 어떻게 보아야할지 고민입니다...

감사합니다. ^^

 


2003-03-15 15:48:30
yilee [ E-mail ]

 

 

1.'CCM'에 대한 자료를 먼저 소개합니다.

 

 

제목분류 : [~교리~교회론~신앙생활~찬송~]
내용분류 : [-교리-교회론-신앙생활-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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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번 질문 때문에 'CCM'이라는 말을 처음 찾아보고 살펴보았습니다.

신학은 무시해도 신학과 교계의 윤곽은 대충 둘러보고 있는 편인데, 'CCM'이라는 용어는 익어있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본 것은 이번 질문 때문에 처음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현대 기독교 음악'이라는 뜻이었습니다. Contemporary(현대, 당대) Christian(기독교) Music(음악)을 줄인 글자입니다.

그렇다면 '현대 기독교 음악'이란 그 내부는 들여다 보지 않아도 벌써 세상화된 교회 음악이라고 단정을 딱 지워버릴 수가 있겠다는 것이 이곳의 선입관입니다. 그러나 질문하신 분이 반론으로 들어오지 않으시고 질문으로 들어온 이상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일단 답변에 앞서 이곳 방문인들을 위해 'CCM'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올려보겠습니다.

이곳은 신학이나 교계의 전문 분야를 소개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성경과 신앙에 직접 관련된 것만 집중하고 있지만, 이곳에 질문이 있을 때는 이런 기회를 통해 한번쯤 살펴볼 기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찾는 분들 중에서 일반 교단에 계시거나 계셨던 분들은 이런 교계 용어에 익숙하지만 이곳을 찾는 분들 중에는 일반 교계의 평균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할 만큼 일반 소식을 모르는 분들이 계실 것이기 때문에 일단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하여 'CCM'이 무엇이며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CCM을 사랑하고 아끼는 전문 홈에서 CCM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겠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점에 대하여는 답변을 별도로 달겠습니다.

 

 

(인용: '한국대표CCM'- CC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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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새로운 대중음악 C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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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중음악 중에서 새로운 장르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컨템포러리 크리스천 뮤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줄여서 "CCM"으로도 불리는 컨템포러리 크리스천 뮤직이라는 용어는 80년대말부터 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CCM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지는 꽤 오래지만 그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셈이다. 그 이유는 용어상의 정리가 되지 않은채 쓰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말대신 "가스펠 송"이란 말과 이를 번역한 "복음성가"라는 말이 보편화 되어있다. 기독교 음악중에서 찬송가나 성가를 제외한 대중적 스타일의 음악은 "복음성가"로 뭉뚱그려져 불려왔던 것이다.

언어는 이를 쓰는 대중들이 규정지워가는 것이긴 하지만 이제 전세계에 걸쳐 공통적으로 쓰이는 말이라면 우리도 정확히 구분해서 써야한다. 이런 점에서 이제 "가스펠 뮤직" '컨템포러리 크리스천 뮤직','컨템포러리 가스펠'.'가스펠'이라는 용어를 명확히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1) 가스펠 뮤직

- 이는 복음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이다. 전통적인 찬송가와는 달리 주관적인 내용이 많고 사람들에게 권고하며 설득하는 수평적인 내용이 많다. 형식적으로는 전통찬송에 비해 보통 경쾌한 리듬과 단순한 화성으로 이뤄져 있다. 여기서 '가스펠 뮤직'이란 형식적으로 전통찬송가와 구분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반 대중 음악과는 형식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내용적으로 구분이 된다. '가스펠'이란 내용을 자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스펠 뮤직'은 복음적인 내용이 담긴 대중적인 노래를 모두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2)컨템포러리 크리스천 뮤직

-이는 크리스천 뮤직중에서 "컨템포러리"한 것을 뜻하는 말이다. CCM이란 말 그대로 같은 시대의 음악적 흐름을 따르고 있는 대중적 스타일의 기독교 음악이다. 그러므로 "컨템포러리"에비중을 두고 보아야 한다. '크리스천'이란 말은 내용을 규정하고 '컨템포러리'는 으악스타일을 규정한다. 이때'컨템포러리'라는 말은 흑인영가에 뿌리를 둔 흑인들의 음악 즉 전통가스펠과 구분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CCM계에서는 이를 단순히 음악적 스타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담고 있는 근본 사상이나 문화와 역사성이 동시대의 흐름과 같이해야 한다는 내용적 밑바탕에서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3)가스펠

- (1)번의 가스펠뮤직이 내용적인 분류로 복음적인 노래를 통틀어 말한 것이라면 이때의'가스펠'은 형식적인 분류로 특정음악 스타일을 지칭한다. 다시 말하면 스타일 면에서는 흑인들의 음악인 R&B와 소울 그리고 전통적 흑인 가스펠을 말한다. 가스펠은 '블랙 가스펠'과 '컨템포러리 가스펠'로 나뉠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해보면 대중적인 기독교음악은 모두'가스펠 뮤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가스펠 뮤직'은 스타일면에서 크게 컨템포러리 크리스천 뮤직과 '블랙가스펠(보통 가스펠이라 부르는)'로 나누어 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가스펠송(복음성가)의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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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최초의 찬송가집은 1892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의 선교사들이 편찬한 『찬미가』였다. 1905년에는 감리교, 장로교가 함께 모여 『찬송가』라는 이름으로 통일 찬송가를 만들었다. 모두 262곡이 들어 있었는데 155편은 미국 장로교 찬송가에서, 84편은 미국 부흥회용 노래집에서 뽑았다. 미국 부흥회용 노래집은 바로 가스펠 송을 담고 있었다. 그러니까 100년 전에 한국교회는 이미 미국의 가스펠 송을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6.25 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함께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이 가스펠 송들을 가져왔다. 미국의 캠프 집회에서 불리던 것들이거나, 미국 교회학교에서 젊은이들이 함께 부르던 포크 풍의 노래가 많아서 부르기 쉽고 친근한 노래들이었다. "내게 강 같은 평화",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속에", "내 등에 기름을 채우소서" 같은 노래가 이 때 들어 왔다. 이와 함께 미국에서 1950-60년대에 활발했던 서던 가스펠 스타일의 음악도 들어왔다. 미국에 다녀온 국내 목회자들도 가스펠 음악을 가져왔다. 테네시 어니 포드, 블랙우즈 브러더스, 조지 베버리 시같이 널리 알려진 가수들의 음반도 함께 들어왔다.

1963년 조직된 원주 청년관 음악사절단은 미국의 선교사가 도입한 미국의 여러 가지 스타일의 가스펠 음악을 잘 보여 주었다. 60년대에 나온 이들의 LP를 보면 현대저거인 스타일의 테너독창, 혼성3중창, 남성중창을 담고 있다. 빌리 그레이엄과 함께 집회에 다니던 조지 베버리시의 "How great thou art"는 당시 가스펠 스타일의 전형을 보여 주었고 이후 우리나라 가수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965년 극동방송은 '찬송교실'이라는 노래 배우기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의 가스펠 송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윤학원과 미국인 나진주 선교사, 신학생이던 홍설자가 가스펠 송을 번역하여 보급했다. 1972년엔 악보집 『우리들의 노래』를 냈다. 윤학원은 1971년에 뉴질랜드에서 가스펠 송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널리 불리고 있는 것을 보았고, 1972년에는 미국에서 커트 카이저를 만나면서 일찍부터 컨템퍼러리 음악에 눈을 떴다.

3.초창기의 컨템퍼러리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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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1월 2일 서울의 경동교회에서는 조영남, 최영희, 트윈폴리오(윤형주, 송창식)를 초청하여 음악 모임을 열었다. 교회 예배에서 대중가요 가수가 기타를 치며 찬송을 부른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고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이런 시도는 우리 나라에 컨템퍼러리의 물결이 시작되는 신호탄과 같았다. 경건과 은혜의 모습으로만 여겨지던 교회 음악이 젊은이들의 취향과 어울려 그들의 언어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경동교회는 이후 김문환을 중심으로 새로운 찬송공부모임을 열어서 이 물결을 이어갔다.

1971년 조영남은 "Just Closer Walk With Thee"를 "주님께 더 가까이" 라는 제목으로 직접 번안해 불렀고 이듬해부터 성가 앨범을 내기 시작했다. 1973년 서울 여의도에서는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가 열렸다. 연인원 3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이 참여한 이 대회에서 조영남은 기타 반주로 찬송을 불렀다. 당시로서 "저게 무슨 찬송가야.." 할 정도로 파격적인 창법으로 노래했다. 그의 노래를 두고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찬반 양론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대중적인 스타일로 기독교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정서가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1974년 카톨릭의 성바오로 여자 수도회 수녀들이 기타를 치며 부른 성가가 음반으로 나왔다. 수녀 15명 그리고 "애모의 노래","눈물의 웨딩드레스"로 인기를 얻었던 가수 한상일이 참여한 이 앨범의 타이틀은 <세상에 외치고 싶어>였다. 이들은 이듬해에 <기쁨은 빗줄기처럼> 이라는 앨범을 냈다. 김남조 시인이 번안한 외국 곡들이 주로 실린 이 앨범들은 "팝으로 엮은 성가" 라는 부제를 달아서 노래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었다. 그 노래 중에는 팝계에서 히트한 "Turn, Turn, Turn"도 있었는데 이렇게 기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팝 음악이 70년대 당시에는 자주 번안되어 불렸다.

1960~1970년대에 친숙했던 기독교적 내용의 팝송들은 사람들에게 컨템퍼러리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전할 수 있었다. 1964년 미국에서는 "들에 핀 백합화" 라는 영화가 큰 히트를 했는데 그 주제가가 "Amen" 이었다. 이 노래는 곧 바로 우리 나라 노래 선교단의 주요 레퍼토리가 되었다.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Why Me(Lord)", 에밀루 해리스의 노래로 많이 알려진 "Wayfaring Stranger"(방황하는 나그네), 주디콜린스가 1970년에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려놓았던 "Amazing Grace", 자넷미드의 "주기도문" 같은 히트곡들도 우리 나라 주요 가수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합창단과 모임을 통한 가스펠 송 보급

1969년 서울 정신여고에는 "노래 선교단" 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노래 팀이 생겨났다. 노래로 선교를 하려는 목표를 가진 정신 노래 선교단은 현재 서울신대 교수인 최훈차를 주축으로 창단되었고 1972년 첫 앨범을 냈다. 성가, 흑인영가, 민요, 가곡 등과 가스펠 송을 함께 부른 정신 노래 선교단은 수많은 공연을 통해서 가스펠 송을 널리 알렸다. 숭실 남성 합창단 등 기독교계 학교의 합창단,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 예수병원 합창단 등 기독교 관련 합창단들도 공연에서 가스펠 송을 불렀다.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 출신들이 1973년에 결성한 조이 여성5중창단도 꾸준히 공연과 앨범을 통해 가스펠 송을 불렀다.

YMCA의 다함께 노래 부르기 모임에서도 번안 가스펠 송들이 보급되었다. 서울 YMCA는 1964년 "싱어롱 with Y" 라는 가창운동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싱어롱 Y"로 알려져서 다함께 노래부르기 운동으로 정착됐다. 여기에서도 가스펠 송이 함께 보급됐다. 전석환이 시작한 이 모임은 1971년부터 이요섭이 주도하면서 75년에는 가스펠 경연대회도 열 만큼 열기를 띠었다.

예수전도단의 화요 모임도 젊은이들에게 가스펠 송을 널리 보급했다. 예수전도단은 오대원 선교사에 의해 1973년에 설립됐다. 이 때부터 화요기도모임이 시작됐는데, 이 모임은 나중에 경배와 찬양 집회로 발전했다. 1977년 YWCA 강당에서 처음 찬양 모임이 열린 이래 지금까지 예수전도단은 우리 나라 경배와 찬양 집회의 원류로서 수많은 프레이즈 송들을 알렸다. 70년대에는 호주와 뉴질랜드의 『Scripture In Song』이라는 노래책, 미국 마라나타! 뮤직의 음악과 영국의 킹스웨이에서 나온 앨범에 있는 곡들을, 80년대 중반 이후엔 미국의 호산나 인테그리티의 음악을 번안해 불렀다. 미국이나 영국의 예수전도단 (Youth With A Mission) 이나 비니어드 펠로십의 노래도 같이 불렀다.

예수전도단은 자체에서도 많은 곡을 만들어 냈다. 초창기 화요찬양 모임을 이끌었던 현요한, 김진호, 박윤호 등은 "성령으로 선물 주시리",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우리에게 향하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수님때문에", "우리 여호와를 힘써 알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같은 곡들을 만들어 보급했다. 1975년 중앙대 기독 학생 서클인 SCM(Student Christian Movement) 도 노래 중심의 예배를 시작했다. 미국 유학 중에 음악의 중요성을 깨달은 최재선 교수가 이끈 SCM은 76년부터 노래집 『주찬양』을 발간했다. 1964년 부산 양정교회 산하 한국복음선교회에서 『복음 성가집』을 낸 이래 여러 군데에서 가스펠 송을 담아 낸 노래 책을 냈고 이를 중심으로 가스펠 송이 퍼져 나갔다. 정신여고 노래 선교단은 『노래할 이유 있네』같은 복음 성가집을 매년 냈고 예수전도단도 성서 유니온에서 『샛노래』를, 생명말씀사가 『우리들의 노래』를 . CCC는 『영감의 제창』을, 영락교회는 『만남의 성가』, 성도교회도 『복음성가』를 냈고, 여의도 순복음교회 역시 『복음성가』를 내서 예배와 집회에서 자주 사용하였다.

노래집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늘 찬송하면서』였다. 1972년 대학생이던 홍정표는 중고등부 수련회에 쓸 노래집을 만들었다. 미국에서 입수한 『Rejoice in the Lord』,『Sing`n`Celebration』을 토대로 편집을 했다. 『Sing`n`Celebration』은 미국 교회에서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널리 불리는 곡들을 워드 레코드사가 책과 음반으로 시리즈를 내서 보급하던 것이다. "나 자유 얻었네" ,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등을 실어서 냈는데 이것이 모태가 되어 1976년 정식으로 『늘 찬송하면서』 노래집이 출판됐다. 홍정표는 76년 연예인교회에서 잠시 가스펠 송을 지도했는데 이때 『늘 찬송하면서』에 있는 곡들을 가르쳤고, 연예인교회에 다니던 가수들은 그 노래를 음반에 담고 집회에서 불렀다. 그래서 이 노래집에 있는 노래들이 더욱 널리 퍼졌고 그로 말미암아 제각각 번안해 쓰던 곡들이 통일성을 이루게 되었다.

솔로, 그룹의 활동 시작

70년대부터 색소폰으로 성가 연주를 시작한 윤용섭은 1975년 연주 앨범을 냈다. 이 무렵 테너 이동범은 찬송가를 녹음해 독집 시리즈를 내서 찬송도 솔로 앨범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비슷한 시기에 복음성가 활동을 시작한 최귀라도 앨범을 냈으며, 방은미는 하용조 전도사와 함께 활동을 시작했다. 윤용섭은 오산리 기도원에서 할렐루야 음악 선교단이라는 악단을 조직해 활동하면서 복음성가의 작곡, 편곡, 제작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80년대 초 박정미, 전용대, 방주연, 이용복 등에게 성가 녹음을 권유하고 여러 가수들의 앨범 제작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면서 70년대 말, 80년대 초 복음성가 확산에 도움을 주었다. 1975년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는 갈릴리 중창단이 결성됐다.

갈릴리 중창단은 교회나 학교 안에서 선교단, 합창단의 이름으로 활동해 오던 이제까지의 방식과는 달리 개별 그룹의 형태로 학교나 교회 집회를 다니며 활동했다. 1978년 첫 테이프를 냈고, 1981년에는 주숙일의 첫 작곡 발표집 를 녹음했다. 1976년 부산에서는 늘노래선교단이 창단되었다. 대중음악을 하던 노문환, 이광무가 유의신의 인도로 제자훈련에 참여하면서 그 해 11월에 결정된 늘노래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그룹사운드 스타일로 창작곡과 번안 가스펠 송을 선보였다. 늘노래는 악기와 편곡에서 록 스타일을 시작한 거의 최초의 밴드였다. 1979년 노문환은 "잊으라시네"를 시작으로 창작곡들을 발표했고, 그 해 12월엔 국내 최초의 록 오라트리오 "삼십 삼십은 삼십"을 발표했다.

1975년부터 서울 YMCA에서 작곡 전도 발표회를 시작한 이인수는 1978년 빛소리라는 이름으로 보컬 그룹앨범을 냈다. 79년부터는 전국 순회공연을 시작했다. 빛소리도 드럼, 키보드, 기타를 써서 당시 인기를 얻던 대학가요제 밴드와 비슷한 스타일을 선보였다. 이인수의 곡 중 널리 가장 널리 알려지 곡은 "나의 기도"였다. 1978년 대구 CCC에서는 유명슬 간사를 중심으로 굿라이프 선교단이 창단됐다. 대학가요제에서 입상한 최미와 성악을 전공하던 최명자가 합류한 굿라이프 선교단은 기존의 가스펠 송들을 가지고 전국 대학을 돌며 공연 활동을 했다. 굿라이프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사운드를 내면서 컨템퍼러리 음악을 선보였다. 1979년 사실상 최미의 솔로 앨범이라고 할 수 있는 최미와 CCC 굿라이프 앨범이 나왔다. 노래집 『늘 찬송하면서』를 냈던 홍정표는 김요배와 함께 앨범<늘 찬송하면서>를 1978년부터 냈다. 김홍철과 쿨 시스터즈가 참여한 1집 앨범을 계기로 대중적인 스타일의 가스펠 음반이 70년대 말부터 연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4.복음성가 문화가 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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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교회와 여의도 순복음교회

1970년대 말부터 우리 나라에는 복음 성가 문화가 꽃피우기 시작했다. 그 주요한 밭은 연예인교회와 여의도 순복음교회였다. 1975년 봄 하용조 전도사는 코미디언 곽규석과 구봉서의 가정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이 모임에는 김희숙, 방은미가 합류했다. 방은미는 하용조 전도사가 외부 집회를 나갈 때 특송을 함께 했다."나 같은 죄인 살리신","죄짐맡은 우리 구주"등을 주로 부른 방은미의 외부활동은 간증 찬양의 시작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성경공부 모임이 커지자 1976년 3월 서대문에 있는 아세아연합신학교의 교실 하나를 빌려 연예인교회가 창립됐다.

코미디언 구봉서와 곽규석, 영화인 신영균과 곽정환 등이 교회에 기둥 역할을 하면서 연예인들이 속속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76년에는 윤복희, 남진, 이종용, 서수남, 쿨 시스터즈, 허림, 방은미, 유준(봉봉4중창단), 최성욱 등 가수들과 신영균, 이영후, 전아 등 대중문화인들이 주요 교인들이었다. 홍정표는 잠시 이들에게 노래를 지도했는데, 복음성가를 처음 접해 본 가수들은 그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늘 찬송하면서』에 나온 노래를 중심으로 음반을 냈다. 연예인 교회는 그해 12월 이화여대 강당에서 성극, 코미디, 복음성가등을 종합한 총체공연 "새롭게 하소서"를 열어서 우리나라에 대중적인 기독교 문화를 선보였다.

연예인교회에 다니던 최성찬은 70년대 후반부터 가스펠 송의 편곡, 제작에 관여하며 작곡도 시작했다. 80년대 초에 나온 가스펠 앨범 중 상당수가 그의 손을 거쳐 나올 만큼 큰 활약을 했다. 연예인 교회 출석 가수들의 앨범은 거의 그가 관여 했다. 최성찬은 복음성가를 대중적으로 편곡한 최초의 전문 편곡자였던 것이다. 그는 또 외국곡 번안이 주류를 이루던 한국의 복음성가계에 순수 국내 창작곡을 만들어 보급하기 시작했다. 최성찬은 84년 뮤지컬 "타오르게 하소서"를 작곡했고, 86년에는 『찬양의 광장』이라는 노래집도 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음악인들이 만든 곡만을 200곡 수록해서 한국 복음성가를 집대성한 것이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는 1970년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세계 오순절대회에 참석했는데 이 때 미국의 가스펠 음악을 접했다. 미국의 오순절 교회는 감정히 풍부히 드러나는 가스펠 송들을 불러왔는데 , 특히 흑인 영가의 전통을 이어 온 흑인교회가 오순절 계통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가스펠 송은 열정적인 것들이 많았다. 이런 분위기의 음악은 자연스럽게 한국의 오순절교회인 순복음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70년대 말 조용기 목사의 부인 김성혜는 미국에서 불리던 가스펠송들을 편집해 『복음성가』라는 노래집을 만들기도 하고 직접 노래도 만들어 보급하기 시작했다. 이 복음성가는 순복음 교회의 각종 집회를 통해 불리면서 한국 교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1979년에는 빌 게이서의 "알렐루야"도 공연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는 가요계의 활동하던 가수가 하나 둘씩 모여 들었다. 워낙 교회가 크다보니 탤런트, 성우, 영화배우들이 많아서 1982년에는 연예인선교회가 조직됐다. 이들은 군부대, 고아원, 양로원, 병원을 방문하면서 성극, 노래, 간증, 율동으로 선교를 했다. 연예인선교회에는 윤용섭, 유민성, 김수나, 민희라, 박정미, 방주연, 선우성, 이춘봉들의 가수들이 속해 있었다. 이들도 각종 집회를 통해 복음성가를 불렀다. 이들의 녹음 테이프는 한국 최초의 기독교 음반사인 은성음반을 통해 보급됐다. 은성음반의 대표도 순복음교회 교인이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한 복음성가 보급

1980년 9월 기독교 방송(CBS)에는 '새롭게 하소서' 라는 간증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이어 '찬양의 꽃다발'이라는 장애우와 환우를 위한 프로그램도 시작됐다. 이들 프로그램에는 복음성가가 함께 방송됐다. 그런데 당시에는 방송할 음원인 가스펠 음악 테이프나 LP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CBS의 프로듀서들은 방송사 스튜디오에서 가수들의 노래를 직접 녹음하여 음악 자료를 만들었다.

'새롭게하소서'에는 간증 사이사이에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고, '찬양의 꽃다발' 은 매주 병원이나 복지시설을 찾아가 공개방송을 하면서 가수들이 노래를 했다. 이 때는 복음 성가 가수뿐만 아니라 기타로 반주를 할 수 있던 일반 대중가수들도 많이 참여했다. 남궁옥분, 어니언스, 김세환, 이연실등 기타하나만 있으면 노래를 할 수 있는 포크 가수들이 자주 참여해서 복음성가를 자주 불렀다. 이 프로그램들을 통해 한국의 복음성가가 전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청취자의 반응에 따라서 히트곡도 등장했다.

최성욱·최안순이 부른 "사랑"도 그렇게 해서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1976년 정두영이 만든 이 곡은 1981년 최성욱·최안순의 첫 앨범에 수록되었고, 청취자의 폭발적인 반응 속에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등장하여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사랑"은 당시 가요계에서도 드물던 10만 단위 이상의 판매로를 올렸고 가요차트에도 오르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사랑"은 말 그대로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한 최초의 순수 복음성가였다. "사랑"이 히트를 하자 레코드사들은 복음 성가 앨범을 많이 만들어 냈다. 특히 기존의 가요 가수들에게 복음성가를 부르게 해서 옴니버스 형태로 앨범을 만들었다. 80년대 초반엔 한국 복음성가가 일반 레코드 업계의 주목을 받을 만큼 외적인 성장을 이뤘던 것이다.

일반 대중음악인들의 복음성가 활동

70년대 말, 80년대 초에는 가요계에서 활동하던 가수들이 복음성가를 불러서 복음성가가 일반화 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트윈폴리오를 결성해서 한국 포크 음악을 열었던 윤형주는 1975년 대마초 사건을 계기로 가스펠 앨범을 냈다. 그는 1979년 10·26으로 활동 금지가 풀리면서 CBS의 '찬양의 꽃다발'을 진행했다. 김세환은 1975년 무렵 오순절 계통의 미국 목사가 기획한 예수 페스티벌에 참여하면서 복음성가와 연관을 맺었다. 그는 가스펠 앨범도 6장이나 냈다. "너"를 부른 이종용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됐다가 교회로 다시 돌아가 복음성가 앨범을 냈고, 록 뮤지컬 "예수 그리스도 슈퍼스타"에서 예수역을 맡아 활약을 했다.

윤향기는 1976년 연예인교회가 출범하자 동생 윤복희의 권유로 연예인교회에 다녔는데 1979년 동생의 아픈 마음을 달래고 용기를 주기 위해 "여러분" 이라는 곡을 썼다. 그 곡은 그 해 열린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여러분"은 기독교적인 내용을 자연스럽게 풀어 낸 복음성가였다. 윤향기는 1982년에도 주님을 따르겠다는 내용을 담은 "나는 당신을 따르리라"라는 노래로 하와이 국제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윤향기는 복음을 담았어도 일반가요계에서 히트한 곡들을 발표하면서 한국 복음성가 역사에 발을 내딛었다. 그 밖에도 현미, 봉봉4중창단, 블루벨스, 별셋, 이용복, 방주연, 윤희정, 바니걸스, 쿨 시스터즈, 이영화 등이 복음성가 앨범을 냈다. 복음성가계가 뚜렷하게 형성되지 않았던 70년대 후반에는 대중가요 출신인 유준의 "가난한 마음"과 이영화의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가요제 차트 상위권을 장식하는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CBS는 1981년 '복음성가의 밤' 이라는 행사를 열었고 행사 실황을 앨범으로 냈는데 여기엔 이종용, 윤형주, 김세환, 박경애, 현미, 어니언스, 조이 여성5중창단, 이용복, 남궁옥분, 최성욱·최안순 등이 참여 했다. 1983년에는 CBS를 위한 헌정앨범 가 나왔다. 윤형주, 윤복희, 양희은, 최성욱·최안순, 허림, 한사랑듀엣, 김지현, 방완, 김세환, 김도향, 임희숙이 '노래하는 어부들' 이란 이름으로 참여한 이 앨범에는 모두 창작곡이 수록되었고 편곡과 연주가 제대로 갖춰진 녹음이었다. CBS는 이 앨범 외에도 여러개의 복음성가집을 냈다. 그 앨범들에는 강경화, 서수남, 노두옥, 전용대, 이준용, 선우성, 민희라, 방은미, 김세환, 송영길, 나애심 등이 참여해 방송을 통한 한국 복음성가의 전파가 확산됐다.

주류가 된 은혜와 간증의 노래들

80년대 초에 부흥한 복음성가는 '은혜와 간증','회개와 구원'에 밀접하게 연관된 곡이 많았다. 이 밖에 내용이나 스타일은 은혜스럽지 못하다는 저항에 부딪혀야 했다. 이는 복음성가의 다양한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가스펠 송이 처음 도입될 때에는 캠프송을 비롯해 흥겹고 즉러운 노래들이 많았었는데, 70년대 말 80년대 초의 부흥기에는 회개, 구원, 은혜등 고백과 간증이 주종을 이룬 노래들이 아주 많았다. 복음성가를 부르기 시작한 이들은 회심한 연예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주요 활동무대가 부흥회나 기도원 집회였기 때문에 그런 성격에 맞는 노래가 많은 것은 당연했다. 또 그㎟沮痔?가요계의 주류가 트로트였고, 트로트 가요의 대부분은 애절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대중가요에서 복음성가로 전향한 가수들의 노래 또한 그런 분위기를 띄웠다. 연예인교회에 다니던 가수들도 노래와 간증을 같이 했다. 하용조 전도사가 집회를 다니면서 가수들과 함께했고, 짧은 간증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1976년에 열었던 총체극 '새롭게 하소서'의 공연 홍보를 위해 연예인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자기 소개를 한 것이 간증집회의 원형이 되었다. 그 무렵 성령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면서 기도원 집회가 많아진 것도 이런 경향을 심화시켰다.

1980년에 시작된 CBS의 간증 프로그램 '새롭게 하소서'도 복음성가가 간증 성향의 분위기를 띠게 하는 데 일조를 했다. 초창기엔 가수가 간증자와 함께 와서 직접 노래를 했는데 간증 내용과 어울리는 노래를 주로 했고 청취자들도 그런 노래에 익숙해졌다. 이 때는 대중문화 자체가 정식 논의의 대상도 되지 않을 때였다. 대중음악, 나아가 대중적인 기독교 음악은 목회자나 신학자의 연구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복음성가에 대한 바람직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신학적, 문화적 바탕 위에 선 복음성가 문화가 체계적으로 형성될 수 없었다. 그저 '이러이러한 악기는 된다, 안된다…'라는 단순한 얘기들이 제기된 논의라면 논의였다. 복음성가를 천박한 가요 스타일이라고 여기는 일이 많았고, 유명한 가수들이 회심하여 복음성가를 부르는 모습을 대견해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70~80년대의 한국복음성가는 체계적인 바탕이 없이 나름대로 제각각 뿌리를 내렸고, 음악성을 내세운 음반활동 위주가 아닌 현장 간증을 동반한 집회 활동 위주의 환경 때문에 음악문화로서의 정체성을 세우기가 힘들었다.

자생적인 움직임도 드물었다. 외국곡을 번안하거나 기존의 가요 스타일에서 가사를 대치하는 성격으로 음악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처음부터 제대로 방향성을 세우고 기획된 음악은 아직 나오기 힘들었다. 간증과 연결된 노래와 가수들이 주류를 이룬 80년대 초반의 복음성가 문화는 교회 안팎으로 꽃을 피웠지만 음악을 위주로 하는 음반 판매는 갈수록 저조해졌다. 결국 복음성가 문화는 교회집회를 중심으로 영역이 줄어들에 되었다. 자연히 일반 레코드사는 가스펠 앨범 출반을 중단했고 80년대 후반까지 일반 레코드점을 대상으로 하는 LP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기독교 서점이나 집회에서 팔리는 테이프 많이 주로 만들어졌을 뿐이다.

창작복음성가의 시작

80년대 들어서면서 창작곡들이 서서히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전엔 노문환, 최성찬, 윤용섭, 이인수, 김영기 김진호등의 노래가 선보였지만 80년대가 되어서도 본격적인 창작집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1981년이 되어서야 온전한 창작곡과 녹음이 담긴 앨범이 나왔다. 주숙일 작곡집 제1집 가 그것이었다. 주숙일은 곧이어 작곡집을 여러 장 내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80년에 를 내면서 본격적으로 복음성가 활동을 시작한 김민식도 창작곡을 선보이면서 우리 손으로 작곡된 우리 스타일의 80년대 한국 복음성가 시대를 열어 갔다. 1977년 "아름다운 나의 사람아" 로 가요계의 화려하게 등장했던 그는 80년에 "영원한 사랑"이 담긴 앨범을 내면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80년대 초부터 복음성가를 작곡하고 꾸준히 작곡발표회를 통해 활동한 김석균도 많은 곡들 써냈다. "사랑의 종소리","예수믿으세요","주를 처음 만난 날" 등 웬만한 복음성가 가수들은 그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 이가 없을 만큼 김석균은 많은 곡을 썼다. 역시 이 무렵 첫 앨범을 등장해서 80년대 초 CBS 선교합창단에서 활동하던 전용대는 83년 "주여 이 죄인이"를 발표해서 엄청난 반응을 얻었다. 80년대 초중반의 은혜와 간증이라는 집회 중심의 복음성가 문화에서 전용대의 노래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테이프는 백만 단위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최용덕도 85년부터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가서 제자 삼으라","나의 등 뒤에서"를 작곡하기 시작했고 그의 노래 역시 한국 교회에서 널리 불리게 되었다. 이들의 노래는 창작곡이 그리 많지 않던 시기에 곧바로 널리 알려졌고, 한국인의 정서에 맞닿아 80년대 이후 교회를 중심으로 대표적인 복음성가로 자리잡았다.

5.본격 CCM과 아티스트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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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2월14일 극동방송이 주최하는 복음성가 경연대회가 처음 으로 열렸다. 1회에는 조호선·조호영, 주찬양선교단, 유지연이 입상했고 2회에는 손영진, 4회에는 다윗과 요나단, 6회에는 박종호, 8회에는 송정미, 옹기장이선교단 등이 등장하여 80년대 중반 이후를 이끌어간 대표적인 CCM아티스트들로 성장했다. 80년대 중반 이후 활발한 활동을 한 본격 컨템퍼러리 아티스트들은 대부분 복음성가 경연대회에서 배출되었다. 그러니까 새로운 세대들은 복음성가 경연대회의 관문을 거쳐 음악을 발표하고 활동의 발판으로 삼았던 것이다. 복음성가 경연대회는 복음성가 가수들이 교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점차 80년대 중반 이전과는 다른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80년대 이후 한국의 대중문화는 그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띄었다. 컬러 텔레비전이 들어왔고, 프로야구가 시작되었으며 미국의 소비지향적인 대중문화가 계속 유입되었다. 트로트 위주의 대중가요게도 서서히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발라드풍의 음악에 자리를 내 주었다. 젊은 크리스천들은 중고등부 시절부터 이런 문화를 접했고, 교회 안에서는 70년대 말부터 활성화된 가스펠 송들을 들으며 자라났다. 이런 토양에서 자라난 젊은 크리스천들이 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컨템퍼러리 음악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가스펠 음악을 시작했고, 작곡, 편곡, 연주, 레코딩 모두를 스스로 해결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음악은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자연스럽게 수용되어 교회 안에서 새 스타일의 음악이 연주되고 불려졌다. 이제 한국의 본격 CCM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80년대 주반 이후엔 기독교 음악 산업도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국의 가스펠 음악이 발흥하던 70년대 말 80년대 초에는 제대로 된 음반사나 유통망이 없었다. 80년대 중반이 지나서야 나름대로 기획을 통한 음반 제작도 시작되었고, 체계없이 시작된 유통시장도 제도권으로 정착되었다. 한국의 가스펠 음악은 음악의 작곡, 편곡, 연주 그리고 앨범의 기획, 제작, 홍보, 유통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의 체계를 갖추지 시작한 것이다.

예수전도단은 화요찬양모임을 중심으로 한 내용의 1집 앨범 (1981년),2집 과 3집 <때가차매>(85년)를 냈다. 87년에 나온 4집은 최인혁, 박종호 두명이 함께한 <박종호, 최인혁 찬양모음>이었다. 여기서부터 서서히 컨템퍼러리 음악의 흐름이 퍼져 나갔다. 한국의 본격 CCM의 흐름이 시작된 것은 1986년 최덕신의 앨범이 등장하면서부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성악을 전공하고 작곡 능력까지 갖춘 최덕신은 1981년에 창단된 주찬양 선교단을 이끌면서 본격적인 컨템퍼러리 음악을 만들고 보급했다. 그는 번역과 모방을 벗어나 최덕신류라고 할 만한 음악을 만들어 냈다. 주찬양의 첫 앨범 <그이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앨범이 등장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청소년들은 우리 손으로 만든 본격 컨템퍼러리 음악을 부를 수 있게 됐다. 최덕신은 박종호, 최인혁, 송정미의 첫 앨범을 편곡, 제작함으로써 이들의 음악적 방향에도 영향을 주었다. 최덕신은 처음부터 컨템퍼러리한 크리스천음악을 시작한 새로운 세대의 출발점이었다.

예수전도단에서 리더로 활동하던 최인혁도 1988년 첫 솔로 앨범 <어두워지는 세상>을 냈다. 최덕신의 음악이 한국적인 프레이즈 송 스타일이었다면 최인혁의 음암은 본격적인 팝 스타일을 띠었다. 한국의 CCM은 최인혁의 앨범으로 본격적인 컨템퍼러리 시대에 접어들었다. 1987년 첫 앨범을 낸 남성 듀엣 다윗과 요나단은 어른들도 따라부르기 쉬운 친숙한 곡들을 불러서 이들의 노래는 전국적으로 널리 불려졌다. 이어 최덕신과 함께 성악을 전공한 박종호가 1988년 인스피레이셔널 스타일의 앨범 <살아계신 하나님>을 냈다. 이 앨범은 전통적인 찬송가와 컨템퍼러리한 스타일을 조화있게 꾸며서 컨템퍼러리 스타일에 거부감을 갖고 있던 기성세대와 컨템퍼러리에 개방적인 젊은 층 사이에 가교가 되었다. 최덕신과 박종호의 노래는 곧 교회학교에서 빠른 속도로 받아들여졌고 박종호의 노래는 주일예배에 사용되기도 했다. 역시 성악을 전공한 송정미도 대형가수로 등장해 CCM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축복송"은 젊은 크리스천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한국 CCM의 가장 큰 히트곡이 되었다. 80년대 초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한 이성균도 87년 "골목길 걸을 때" 로 복음성가 경연대회에서 입상하면서 본격 CCM아티스트의 길을 걸었다.

1989년 새롬의 첫 앨범은 80년대의 흐름을 바꾸는 신호탄과도 같은 것이었다. 김현철, 채한성, 김지형 손진태, 장필순 등이 참여한 이 앨범을 계기로 이후의 CCM에는 록, 퓨전재즈 등의 스타일이 들어오게 되었다. 1987년 복음성가 가수들의 조직체인 한국복음성가협회가 창립되었다. 복음성가 가수들이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면서 교류하고 서로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이 협회의 초대 회장에 김석균이 선출되었고, 이후 이준용, 곽기종, 김민식, 전용대, 주숙일, 유태종, 최수동, 박정미, 장욱조, 차영선, 이광희, 최미, 박종윤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을 해나갔다. 한국복음성가협회에는 80년대 중반 이후에 활동을 시작한 젊은 층들도 참여 했지만 70년대 말, 80년대 초에 복음성가 문화를 열어 간 이들이 주축이 되었다. 1989년 젊은 크리스천 음악인들이 모여 찬양사역자 연합모임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찬양과 경배사역을 하는 예배사역자, 전문적인 음악인, 음악산업 관련자들이 참여했따. 이 모임이 점차 확대 되면서 찬양사역자연합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80년대 중반 이후에 등장한 젊은 크리스천 음악인들을 중심으로 교류와 활동을 하고있다.

6.프레이즈 앤 워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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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도단은 1977년 YWCA강당에서 첫 찬양모임을 가진 후 지금까지 쉬지 않고 한국에 새로운 경배와 찬양의 노래를 소개해 왔다. 한국 땅에 경배찬양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처음 일으킨 것이다. 예수전도단의 화요모임은 당시 젊은이들에게는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젊은 이들이 매주 수천명씩 찬양예배를 위해 모인 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고, 한 시간씩 쉬지 않고 찬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예수전도단은 미국과 영국의 프레이즈 앤 워십의 흐름을 계속 받아 들였고 스스로 새로운 곡을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예수전도단의 초기 찬양모임 리더는 현요한이었고, 이후엔 김영기, 박윤호, 김진호, 임바나바, 조성한, 김대영, 김혜경으로 이어졌으며,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지금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형원, 최인혁이 활동했다.

1987년 2월 두란노 목요찬양모임이 시작되었다. 예수전도단에서 찬양모임 리더로도 활동했던 하용인은 영국 유학중에 '프레이즈 앤 워십'을 피부로 절감하고 이를 한국 교회에 접목시키고자 모임을 시작했다. 이 모임엔 대한생명 노래 선교단, 두란노서원 연극팀, 할렐루야 축구단, 온누리교회 대학부 등이 참여했다. 두란노 경배찬양은 곧 서너 달 만에 100명이 모여들면서 '경배와 찬양'은 단순한 싱얼롱이 아닌 예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듬해엔 이화여대 강당을 메울 정도로 커졌고, 지역 집회를 가지게 되자 경배와 찬양의 붐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991년 이후에는 '경배와 찬양 큰잔치'(All Nations Celebration)라는 대규모 경배와 찬양집회를 열고 있다. 대구에서보 1987년 3월 최용덕의 인도로 찬미찬양집회가 시작되었다.

대구 CCC 회관에서 월요 정기 찬양집회로 출발한 이 모임은 얼마 후 찬미 음악 선교단이 조직되어서 팀으로 활동을 했고, 1989년에는 1,000명이 넘는 모임으로 성장했다. 1987년 10월부터는 서울 충신교회에서도 목요 찬양이 시작되었다. 이 모임은 박정관 목사(당시 전도사)의 인도로 다드림 선교단이 주도했다. 충신교회에 이어서 전국 각지의 수많은 교회에서 경배와 찬양모임이 열렸다. 주찬양 선교단, 임마누엘 선교단, 에클레시아, 옹기장이 선교단, 한국컨티넨탈 싱어즈 등 노래 선교단도 프레이즈 앤 워십을 꾸준히 만들어 내고 보급했다.

7.민중복음성가/기독노래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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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의 피복 노동자 전태일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는 절규를 외치며 분신자살을 했다.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소외된 인간의 권리를 처절하게 부르짖은 외침이었다. 1972년 유신체제의 등장, 1974년 민청학련사건 그리고 일련의 긴급조치들이 잇따르면서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이 민주화 운동에는 기독교도 함께했다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고 정의를 외치는 운동은 기독교의 진리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자연스럽게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다. 그런 의지는 노래를 통해 표현되기도 했다. 한국의 복음성가는 민주화운동 속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는 "뜻 없이 무릎꿇는" 같은 찬송가를 비롯해서 "가라 모세", "오 자유" 같은 흑인영가 그리고 미국의 흑인민권 운동에서 불리던 "우리 승리하리라" 같은 기독교 노래들이 불려졌다.

70년대 당시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민권운동의 노래가 드물었다. 민주화 운동에서 문화적인 움직임, 특히 음악적인 움직임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 노래가 자연스럽게 시위 현장에 등장했다. 이렇게 초창기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기독교 노래들이 자주 불리면서 일반인들도 이런 노래에 익숙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60년대부터 파격적인 문화 형태를 예배에 도입한 경동교회에서는 김문환을 중심으로 외국의 기독교 노래를 번안해 소개했다. 70년대 중반 이후 경동교회를 비롯한 진보적인 교회를 통해 알려진 "외딴 섬과 같이","형제가 쓰러져가네" , "미칠 것 같은 이세상" 등의 노래들은 현실을 반영하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려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 동안 미국에서 들어오던 가스펠 송과를 다른 양상을 띠었다. 이러 움직임은 이후 기독노래 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나타난 노래운동의 시발점은 김민기라도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노래는 70년대와 80년대 시위 현장에서 가장 많이 불렀는데 그 중엔 교회에서도 복음성가로 널리 불리던 것이 있었다. 바로 "금관의 예수" 였다. 이 노래는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 였다. 이 노래는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 도입부에 나오는 시를 토대로 1973년에 작곡되었다. 제목에 '예수'가 들어 있어서인지 복음성가 가수들이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 70년대 후반 심의문제로 "주여 이제는 그곳에" 로 양희은이 발표했던 "금관의 예수"는 나중에 김민기가 "주여 이제는 여기에" 로 원래 제목을 찾아 다시 발표했다. 김민기는 친구들과 함께 서울 신정동에 야학을 열어서 노동자도 가르쳤고,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에도 참여해 노동자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어 공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김민기의 노래는 자연스럽게 기독교계에 스며들었다.

복음성가를 사회 운동의 차원으로 이끌기 위한 시도는 7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점차 확산되어 갔다. 진보적인 기독청년회인 EYC의 문화부에서는 『젊은 예수』와 『노래하는 예수』라는 노래집을 내는데 거기에는 기존의 번안곡들과 함께 운동가요도 꽤 들어있었다. 70년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은 합법적인 공간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민주화 세력들은 교회 안으로 많이 들어왔고 교회를 통해서 운동권 음악이 나왔다. 1978년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는 김민기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테이프로 만들어 냈다. "공장의 불빛"은 70년대 노동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노래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렇게 교회와 연관을 맺은 김민기 노래는 뒤에 나온 『민중복음성가』,『평화의 아침을 여는이』같은 노래집에 실려서 진보적인 교회를 중심으로 불렀다. 여기에 실린 김민기의 노래는 "금관의 예수", "상록수", "아침이슬", "늙은 군인의 노래 ", "이 세상 어딘가에" 등이었다. 한편 민족성을 찾고자 하는 국앙풍의 노래들도 나왔다. 소설 『어둠속의 자식들』,『꼬방동네 사람들』의 배경이 된 달동네의 빈민공동체 운동을 주도했던 서울 동월교회에서는 이성재가 국악 찬송을 만들어 예배를 드리기도 했고, 그가 만든 "우리의 고난을 주께서 아시네"라는 곡은 젊은이들의 모임에서 자주 벌렸다. 이성재는 후에 전교조 활동을 하다가 해직되기도 했다. 광주에서 우리소리연구회라는 모임을 이끌었던 정세연도 80년대 초반 국악찬송과 민중복음성가를 만들었다. "가시버시 맺음날"(결혼 축하 노래), " 사랑과 평화를 위한 노래 ", "마침찬양" 등의 기독교 음악이 있었고 "꽃아 꽃아", "광주출정가", "통일은 언제일까" 같은 민중가요도 있었다. 그의 노래는 주로 민요에 바탕을 둔 것들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이건용도 기독교적인 정서와 국악어법을 충실히 담아 낸 곡을 많이 만들었다. 그는 여러 국악성가 외에도 합창곡 "황색예수" 같은 곡을 만들어 냈다. 농민들의 정서를 잘 담아 온 채일손 목사는 "십자가(윤동주)", "정의를 심어라", "부활의 몸으로" 등을 작곡했다. 마산에서 활동하던 감리교인 고승하는 "고백", " 자랑스런 노동자", "여공일기", "편드시는 주님" 등 다수의 곡을 내놓았다. 1983년부터 감리교 청년회 노래선교단에서 활동하던 고상미도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문화 간사로 일하면서 노래를 만들어 냈다. 목사인 김용수도 1980년대 초중반에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살아온 이야기",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 ", "노동의 새벽" 등의 노동자의 삶과 정서가 담긴 노래를 창작항 교회와 민요연구회를 통해 발표하였다.

진보적인 기독교 운동에서 움튼 기독노래운동은 80년대 중반 기독청년들을 중심으로 발전해나가서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장청노래선교단과 감리교의 감청노래선교단이 생겨났다. 1986년 장청의 초대 단장이었던 주현신은 "한반도의 십자가를 어깨에 지고 "를 발표했다. 주현신은 "부활의 노래", "새날에 선 겨레여"를 만들어 내면서 기독노래운동이 구체적으로 우리 현실과 역사의실을 나타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8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의 차원에서 기독교 진영에 몸담았던 이들이 교회를 빠져나가면서 기독노래운동은 주춤했다. 그러자 순수한 기독교 기반을 가지고 있던 이들만 남았고 이들은 1990년 노래집 『민중복음성가』1991년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를 내면서 기독노래운동의 방향을 다시 세웠다.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 민중찬송가 편찬위원회가 펴낸 『민중복음성가』는 민중교회를 중심으로 널리 쓰여졌다.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 는 장빈, 백창우, 고상미, 전희안, 주현신, 류형선, 정서영 등 기독노래운동에 꾸준히 관여해오던 이들이 엮어 낸 것으로 자문위원에 문익환, 장기천, 조화순 목사, 그리고 노동은, 이건용 등이 참여했다. 이들 노래집에는 기존의 복음성가뿐만 아니라 운동권에서 불리던 기독교적인 노래와 민중가요가 두루 실려 있었다. 1992년 가을 앨범 가 나왔다. 백창우, 주현신, 류형선 세 명의 작품집인 이 앨범은 90년대 기독노래운동을 새롭게 열어간 이정표가 되었다. 80년대 초반부터 복음성가계에 관여했던 백창우는 노래패 '노래마을'을 이끌면서 복음성가, 어린이 노래, 창작민요를 발표해왔고, 장청에서 활동하던 주현신은 전교조 해직교사로 참교육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민족음악연구회에서 활동하던 류형선은 이들을 만나 기독노래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류형선의 "그대 오르는 언덕", 주현신의 "새날에 선 겨레여", 백창우의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 등이 수록된 이 앨범은 90년대의 기독노래운동의 역사의식을 잘 보여주었다.

1992년 4월 기독교 장로회는 희년을 위하 노래 모임을 만들자는 뜻을 논의했고 그 결과 정의, 평화, 생명, 창조질서의 보전을 뜻하는 JPIC 노래패가 탄생했다. JPIC 노래패는 1993년에 '새하늘 새땅' 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1994년 가을 첫 앨범을 냈다. 희년복음노래1집으로 나온 이 앨범의 타이틀은 이었다. 한편, 진보 진영이 아닌 복음주의적인 기반 위에서 노래운동을 이어간 모임이 등장했다. 1991년에 창단된 노래운동모임 '뜨인돌'이었다. 1990년 가을 서울대학교 안에서 기독교 연합모임이 생겨났고, 그 모임에 속한 91년 6월에 창단한 것이다. 함께 사는 삶, 민족, 역사 등의 진실을 담아 내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구원을 드러낼 노래를 뜨거운 심장으로 찾는 것이 뜨인돌의 목적이었다. 이들은 대학가에서 기독 청년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을 발표해 나갔고, '새하늘의 찬양 새땅의 노래', '이제 우리 역사의 휘장 속으로 ', '말씀이 노래가 되어 찬양은 육신이 되어' 등의 주제로 공연을 열면서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 본 현실을 노래했다. 뜨인돌은 악보집도 함께 내면서 기독노래운동의 이론을 함께 전개해 나갔다.

8.용어와 개념의 혼란과 CCM비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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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우리 나라에 미국의 가스펠 송이 들어올 때는 '복음가'로 번역되었다. '찬양가'라는 말도 눈에 뜨인다. 그 당시에 교회 안에서 불리던 노래는 대부분 내용이 찬양이었기 때문에 찬양의 노래라는 뜻의 찬양가라는 용어가 쓰였다. 그런데 60년대부터 들어온 미국의 가스펠 송들은 '복음성가' 라는 말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복음가로 충분한 말을 '복음성가' 라는 말로 번역함으로써 복음성가는 좀더 거룩하고 은혜스러워야 한다는 선입견이 들어가게 되었다. 사실 복음가는 그 내용을 지칭하는 것이었지 음악 스타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그 내용과 음악 스타일을 동일시하거나 혼동하여 '가스펠 음악'을 둘러싼 용어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70년대에 시작된 찬양모임에서는 그 자체가 예배의 하나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에 노래를 '찬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는 70년대 말 복음성가 문화가 일어날 때에도 적용되었다. 회개와 구원, 은혜와 간증을 주 내용으로 한 복음성가는 주로 교회나 기도원의 집회 위주로 불려졌기 때문에 바깥으로 나가기 힘들었고, 그 결과 예배나 교회와 밀접한 연관을 맺어야 했기 때문에 객관적인 용어인 '노래'나 '음악'이 쓰이지 않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통용되는 찬양이란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80년대 들어사는 두란노 경배찬양모임을 비롯한 경배찬양운동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찬양이란 말은 더욱 확고하게 노래나 음악을 대치해 버렸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에게는 자연스럽게 '기독교적인 노래는 찬양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내재 되었다.

기독교 음악에는 위로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의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닌데, 진리의 선포, 기독교적 도덕이나 가치를 전파하는 내용도 모두 찬양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노래를 찬양으로 획일화해서 지칭하는 바람에 전통적인 교회음악의 흐름을 벗어난 음악은 금세 저항에 부딪히고 세속화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야 했다. 가스펠 음악을 둘러싼 내용과 형식의 혼동은 계속됐다. 가수는 사역자로, 공연은 사역이나 집회로 불렸기 때문에 음악으로 사역을 한다는 본래의 목적이 퇴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음악이 먼저냐 사역이 먼저냐'라는 다른 범주의 논란도 일어났다. 80년대 말 CCM이란 말이 도입되면서 이런 혼란이 가중되었다. CCM의 개념이 충분이 이해되지 않아서 한동안 CCM은 대중가수들이 부르는 크리스천 뮤직, 진보적인 사운드를 구사하는 크리스천 뮤직, 기존의 가스펠 송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등으로 잘못 인식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흐름과는 다르다고 여기는 이들은 '우리 음악은 CCM이 아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90년대 중반이 되서야 이런 혼란은 제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9.가요계에서의 크로스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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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도 일반 팝계에서 크리스천 음악으로 크로스오버한 이들이 CCM을 발전시키는데 큰 힘이 됐듯이 한국에서도 가요계에서 크로스오버한 가수들이 한국 CCM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한국 CCM계로 크로스오버한 가수들은 다음과 같이 나눠 볼 수 있다.

(1) 60~70년대 가요계에서 활동하던 가수들

1960~70년대 일반 가요계에서 활동하면서 회심한 이들이다. 윤형주, 장욱조, 김세환, 박재란, 김민식, 윤희정, 정훈희, 이성애, 권태수, 윤항기, 윤복희, 민희라, 나애심 등이 있었다. 이들 중 윤형주, 장욱조 등은 가요활동 당시의 스타일로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불렀고 다른 이들은 기존의 가스펠 송을 불렀다. 이들은 기존 가요계에서 큰 히트를 기록한 가수들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히트곡도 같이 불렀고 각종 집회에서 간증으로 선교활동을 해 나갔다.

(2) 80년대 이후의 세대들

1960~70년대에 활동하던 가수들의 뒷세대들은 앞세대와는 다른 음악 스타일을 가지고 등장했다. 조동진, 들국화, 김현식등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손꼽히던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는 1988년 CCM앨범으로 <숲>을 냈다. 유지연도 <사랑과 평화>를 냈다. 정태춘 등과 함께 민중가요활동을 하던 이무하도 CCM앨범 이라고 할 수 있는 <고향>을 냈다. 가요계에 많은 히트곡을 가지고 있던 김성호도 <그 사랑, 그 사랑 어디서 오는 걸까>를 냈다. 이들의 앨범은 음악성이 뛰어나고 메시지가 뚜렷하여 한국의 CCM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3) 1990년대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많은 가수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밝히게 되었다. 정상급 가수들은 자신의 노래가 차트 1위에 오를때에 크리스천임을 공개적으로 밝혀서 많은 크리스천 가수들이 힘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요활동을 하는 동시에 가스펠 앨범을 정식으로 내는 가수들이 등장했다. 이런 흐름은 CCM이 특수한 분야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고 일반 대중음악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조하문, 015B, 빛과 소금 등이 별도의 가스펠 앨범을 만들었다. 김선경의 앨범 <슬픔이 없는 시간속으로>는 일반 방송에서도 방송되었다. 박학기도 옴니버스 가스펠 앨범에 참여했다. 이정란, 강문수는 '뜻밖의 손님' 이라는 밴드를 조직해 활동을 시작했다. 하덕규는 본격 CCM앨범인 <쉼> <광야>를 냈지만 자신의 가요베스트 앨범을 내서 가요계에서의 영향력도 계속 유지하였다.

(4) 2000년대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강인원, 박강성, 한스밴드등이 일반 앨범 활동과 본격적인 교회내에서 과거와 달리 자연스럽게 교회 문화속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97년의 save our people의 일반에서 제작한 앨범이 반응에 힘입어 H.O.T의 인기로 거대 가요 엔터테인먼트인 SM에서 컴필레이션 열풍에 리메이크 앨범 "GIFT"앨범등 일반에서도 CCM 시장에 넓은 관심을 보일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를 이루고 있다.

10.새로운 대중음악으로 등장한 C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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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M 용어의 등장

1989년 4월 CBS에서는 주일 밤 12시부터 '가스펠 아워'라는 1시간 짜리 음악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하덕규가 진행을 맡은 '가스펠 아워' 는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외국의 컨템퍼러리 음악의 흐름을 소개했다. 마이클 W.스미스, 에이미 그랜트, 페트라 등의 음악이 바로바로 '가스펠 아워'를 통해 들려 지면서 새로운 크리스천 뮤직에 목말라 하던 젊은 크리스천들은 엄청난 반응을 보였다. '가스펠 아워'는 최신 CCM을 들려주고 CCM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이론적 바탕을 제공하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CCM이라는 새로운 대중 음악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젊은이들은 이 새로운 문화를 중심으로 음악관과 세계관을 넓히기 시작했다.

1991년 2월에 처음 열림 '가스펠 아워' 공개 감상회는 그 동안 새로운 문화에 목말라 있던 젊은이들의 모습을 확인시켜 주었다. '가스펠 아워' 는 소식지를 발간하면서 음악 정보 교류에 나섰고 이럴 전해들은 젊은이들을 이 새로운 문화를 교회 안에 전하고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 '가스펠 아워'를 들은 수많은 한국의 젊은 크리스천들은 CCM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가지고 한국의 CCM을 발전시키는 첨병으로 등장하였다. '가스펠 아워'를 통해 한국에서는 비로소 CCM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CCM의 첫 머리인 '컨템퍼러리'라는 말은 90년대 젊은이들의 화두가 되었다. 곧 PC통신에 CCM동호회가 만들어졌고 CCM마니아들이 생겨났다. '가스펠 아워'를 통해 크리스천 록이나 메탈, 랩까지 다양한 음악을 들은 젊은 그룹들 중에는 새로운 스타일로 자기들의 음악을 시작한 이들도 생겨났다.

90년대 들어서면서 미국이나 유럽의 CCM이 여러 경로를 통해 소개되었다. 미국에서 열리는 크리스천 아티스트 뮤직 세미나에 목회자와 아티스트 방송인들이 참가하면서 본 고장의 컨템퍼러리 음악과 음악인들을 직접 접하고 컨템퍼러리 음악에 대한 안목을 넓혔다. 최인혁이 진행을 시작한 CBS의 '사랑의 노래 평화의 노래'는 국내 CCM보급과 확산에 큰 기여를 했다. '다함께 복음성가를' 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공개방송을 통해서 새로 만들어지는 한국의 CCM을 꾸준히 보급했다. 극동방송 에서도 '참 기쁜 노래를', '윤형주와 함께 ', '밤을 찾는 당신에게' 등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외 CCM을 방송했다. 카톨릭 방송인 평화방송에서도 생활성가라는 이름으로 CCM을 방송했다. 평화 방송을 부족한 생활성가 외에도 개신교의 복음성가 즉 CCM을 방송했다.

CBS는 1990년부터 창작복음성가제를 열어서 새로운 복음성가 가수를 배출했다. 이 복음성가제에서는 이혜정,소리엘,박주동, 에이멘, 선물 등이 등장했다. 그 밖에도 전국 대학생 복음성가 경연대회(1994년), 장로회 신학대학의 복음성가 경연대회, 십대선교회(YFC)의 청소년 복음성가 경연대회(1988년 옹기장이 선교단이 1회 대회 은상을 받았다.) 전국대학 명지 복음성가제(1992년 안성진이 1회 대회 대상), 순신 창작복음성가제 (1992년 김수지가 이 대회 출신), CCM BIG 축제(1995년 얼터, 위드, 은구 등이 등장)가 이어졌다. 이들 복음성가 대회는 나름대로 많은 가수들을 배출하는 공을 세우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국적 컨템퍼러리 운동이 다양하게 발전하는 것을 더디게 했다. 대부분의 대회에서 프레이즈 스타일이나 인스피레이셔널 스타일 또는 MOR 스타일만이 입상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스타일은 시도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는 음악인들은 독자적인 활동을 통해 CCM계에 들어와야만 했다.

크리스천 전문 레코드사들

1980년대 초 은성음반은 컨템퍼러리 음악을 제작, 보급하기 시작했다. 5공 정권하이던 80년대 초에는 레코드사를 설립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그런 시대에 설립된 은성음반은 한국의 복음성가와 미국의 CCM을 조금씩이나마 보급했다. 그러나 그 제품 수준이나 음악 수준은 일반 음악 계에 비해 현저히 낮아서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은성음반은 미국의 워드, 스패로우와 보금 계약을 맺고 미국의 아티스트들을 소개했다. 이때 소개된 아티스트는 에이미 그랜트 샌디 패티, 스티브 그린, 존 마이클 탈보트, 스캇 웨슬리 브라운, 스티브 프라이 등으로 한국의 크리스천들에게 거부감이 적은 스타일의 음악이었다. 클리프 리처드 , B.J. 토마스, 팻 분 등 팝계의 널리 알려진 스타들의 CCM앨범도 소개 하였다. 아울러 마라나타의 프레이즈 시리즈를 꾸준히 소개했다. 그러나 영세한 여건 때문에 제품의 수준이 떨어진데다가 홍보활동 또한 미미해서 젊은 크리스천들은 이들 앨범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은성음반은 80년대 말까지 80년대 초의 수준을 벗지 못하다가 1990년대에 들어와서 그 영역을 넓혀 나갔다. 90년대에는 이미 미국의 컨템퍼러리 음악이 상당수 소개되었고 국내의 CCM도 성장하여 새로운 음악에 대한 요구가 많았다. 은성음반은 이런 요구에 부웅하지 못하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야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까지도 워드와 스패로우의 보급권을 갖고 있던 은성음반은 새로운 컨템퍼러리 음박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마이클 W.스미스, 페트라, 화이트 하트 등 크리스천 팝/록을 처음으로 냈고, 마이클 카드, 글래드, 킴보이스, 스티브 캠프 등 새로운 아티스트도 소개했으며 나아가 인테그리티의 프레이즈 앤 워십 시리즈를 공급했다. 한편 한국의 컨템퍼러리 음악이 발전하면서 이를 수용할 레코드사와 보급망도 늘어났다. 금성레코드와 효성음향이 주요한 복음성가 가수를 수용했으며 인피니스도 복음성가와 미국의 브렌우드 레코드를 보급했다.

인피니스는 후에 스패로우, 워드, 벤슨 등 미국의 주요 크리스천 레이블의 라이센스 음반을 보급했다. 그 뒤로 참빛 미디어가 영국 워드와 독일의 핸슬러 뮤직과 계약하고 유럽의 CCM을 보급했으며 미성레코드는 미국의 릴레나 음악을 보급했다. 휫셔뮤직과 에버그린(후에 라이트 하우스로 이름이 바뀜)도 독자적인 CCM 제작에 나섰다. 휫셔뮤직은 가요계에서 작곡, 편곡, 기타 연주가로 많은 활악을 했던 유지연이 이끌었고, 에버그린은 서울음반에서 A&R(가수와 선곡)을 담당하던 강인중이 이끌었다. 유지연은 두란노 경배찬양 앨범 제작에도 참여했고 자신이 편곡, 연주한 앨범을 내기도 했다. 휫셔뮤직은 비니어드의 음악을 보급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프레이즈 앤 워십 레이블로 자리잡았고 영국의 킹스웨이, 호주의 힐송을 비롯한 세계의 프레이즈 엔 워십 앨범들을 냈다. 바실뮤직은 두란노의 시리즈를 내면서 호산나 인테그리티의 앨범을 라이센스해서 냈다. 삼성뮤직도 90년대 후반 잠시 국내외 크리스천 음악을 보급했다가 2000년 미국 크리스천 음악계에 대형 지각 변동이후 미국EMI가 많은 CCM의 판권을 인수한 후 한국에서는 한국EMI를 통해 J&J뮤직이 라이센스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새로운 대중음악 CCM

1990년대에는 다양한 음악과 아티스트가 등장하면서 한국의 CCM이 기독교 안에서 뿐만 아니라 대중암악 안에서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우선 아티스트들의 저변이 확대되었다. 집회와 간증으로 노래를 하는 전도자의 입장에서 음악으로 진리를 전하려 하는 음악인의 입장으로 서서히 변모해갔다. 음반제작이나 공연에서도 일반 대중음악계와의 간극을 좁히는 노력이 계속됐다. 1990년 홍순관은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 낸 <새의 날개>를 냈다. 대전에서 활동하던 드림고 1991년 을 냈다. 발자국도 데뷔앨범을 냈다. 같은 해 역시 남성 듀엣 소리엘이 데뷔했다. 이들은 90년대의 한국 CCM계를 이끌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음악 스타일도 등장했다. 한국 교회에 여전히 거부감이 깊었던 록 스타일의 음악도 하나 둘씩 나왔다. 1993년 크리스천인 대중가수들이 모여 라는 앨범을 냈다. 록, 레게, 블루스 등 여러 가지 음악 스타일이 담긴 이 앨범은 한국의 CCM도 스타일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1994년 아브라조는 에서 록 사운드를, 1996년 예레미는 드디어 크리스천 메탈을 본격적으로 들려 주었다. 믿음의 유산은 블랙 가스펠 스타일을 선보였다. 천민찬 밴드도 록을, 아가파오는 댄스 음악을 얼터와 은구는 모던 록을 선보였고 이들의 음악은 일반 음악 계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이삼열, 신상우, 정동윤, 조현주 등 CCM계의 주요한 연주자들의 연주 앨범이나 연주 시리즈 앨범도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한국의 CCM계는 발라드와 팝 계열의 인스피레이셔널 스타일이 주도했다.

송정미, 박종호, 김명식, 최덕신, 좋은씨앗, 이성균, 최인혁, 소리엘, 아침, 사랑이야기, 창문, 꿈이 있는 자유, 조효성, 안성진 등이 음반게의 주요 아티스트였다. 90년대 후반에는 신인들도 많이 등장했다 신인들이 여러 가지 스타일의 음악을 선보였다 리듬 앤 블루스, 모던 록, 랩 등 일반 대중 음악계의 흐름과 같은 스타일을 들려주었다. 프레이즈 앤 워십도 꾸준했다. 시리즈는 10여년 동안 꾸준한 판매고를 유지했고, 97년에 나온 예수전도단의 앨범과 소리엘 5집 <새벽이슬 같은...>은 90년대 후반 최대의 판매고를 올렸다.

1995년 12월에 개국한 CBS FM은 'CCM 캠프' 라는 CCM전문 음악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는 한국 CCM의 질적인 단계 도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첫 방송의 첫곡인 페트라의 "Creed" 는 바로 새로운 음악으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의미있는 곡이었다.

'CCM 캠프'를 필두로 한국 CCM의 역사는 새로운 단계의 변화로 이어졌다. 전문기획사들이 생겨났고 프로듀서 시스템이 도입됐다. 음반 제작에 투자하는 비용도 크게 늘어났다. 1996년엔 CCM전문잡지 ≪CCM룩≫이 창간됐다. 하이텔에 이어서 나우누리, 천리안, 유니텔 등 PC통신에 크리스천 뮤직 동호회가 생겨났다. 이제야 한국의 CCM계는 정기적으로 제대로 된 정보와 음악을 얻을 수 있는 창구가 생긴 것이었다. 'CCM 캠프'의 시작은 90년대 중반의 한국 CCM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세계의 크리스천 음악의 흐름을 매일 직접 전해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정보를 매달 얻게 된 음악인들과 수용자들은 그 동안의 음악적 태도를 많이 바꾸었다. 90년대 중반 이후 일반화된 인터넷은 이런 경향을 가속화 시켰다. 음반과 음악정보에 메말라하던 수용자들은 국내외 CCM을 가까운 곳에서 보고 들을 수 있게 됐고 CCM에 관련된 여러 가지 것들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다. 1997년 숭실대학교 음악원 안의 교회음악과에는 실용음악 과정이 생겨났다. 송정미, 최덕신, 백승남, 박정관이 가르치기 시작한 이 과정은 사실상 CCM학과라고 해도 좋았다. 이 밖에도 컨템퍼러리 음악을 가르치는 신학교가 등장해서 CCM을 실용음악 측면에서 가르쳤다.

CCM전문 기획사들도 90년대 후반들어서 급증했다. 80년대 후반 예문기획(88년), 싱코이노니아(88) 정도였던 전문기획사들은 이후 룩뮤직(91년), 푸른사람들(94),다솔기획(95),솔트기획(95),제이월드(96),예컴기획(96),엘기획(97),쉴기획(97),시편미디어(97),칼라기획(97),로드뮤직그룹(97),작스미디어(98),조인기획(98),비 컴퍼니(98),하늘기획(98),아트엘(98),빔(99),리치프로덕션(99),P&W(99) 등 다양한 기획사들이 생겨났다. 97년 8월 찬양사역자연합회와 CBS FM의 'CCM 캠프' 가 함께 하는 'CCM 컨퍼런스' 가 열렸다. 이는 기독교 안에서 문화로, 또 산업으로 태동된 CCM에 대해 아티스트들과 업계 그리고 수용자가 함께 본격적으로 토론을 한 첫 모임이었다. 저녁엔 콘서트가, 낮에는 세미나와 전문강의, 토론이 열렸다.

이듬해에는 찬양사역자연합회 주최로 'CCM 전문인 컨퍼런스'가 열렸다. 여기에서는 음악인들과 업계 관련자들의 CCM에 대한 인식확대가 논의되었다. 90년대에는 외국 아티스트들의 내한공연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80년대 말 크리스천 메탈 그룹 스트라이퍼가 국내 팝계의 인기를 바탕으로 내한공연을 가졌다. 퍼스트 콜, 샌디 페티, 다렐 맨스필드, 라넬 해리스, 컨티넨탈 싱어즈가 90년대 초반에 내한공연을 가졌다. 두란노 경배찬양의 대규모 모임에는 프레이즈 앤 워십 리더들인 밥피츠와 데이빗 펠링험 등이 참여했다. 프레이즈 엔 워십 단체의 공연은 90년대 후반에도 계속 이어졌다. 비니어드 워십 컨퍼런스와 세미나, 마라나타싱어즈, 인테그리디의 론 케놀리, 돈 모엔, 폴 월버의 내한공연이 이어졌고, 1999년에는 팀이 대거 내한하여 통일워십 콘서트를 열었다.

1997년 초에는 크리스천 록 밴드의 대명사 페트라가 공연을 가졌고, 스티브 그린, 마이클 카드, 케니 막스, 폴 카일 등도 공연을 가졌다.

99년 "Kiss Me"로 세계 팝 음악계를 강타했던 식스펜스 난 더 리처는 한국에 들러서 CCM 캠프를 비롯한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일반 미디어들도 CCM을 소개했다. 박종호 등의 공연소식이 일반 신문에 실렸고, CCM을 소개했다. 박종호 등의 공연소식이 일반 신문에 실렸고, CCM을 새로운 장르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기사들도 나왔다. 음악전문잡지인 《음악동아》,《레코드포럼》에서 CCM 특집을, 월간 《자구촌 영상음악》은 정규 시리즈로 CCM을 소개했다. 기독교 케이블 켈레비젼, 한미위성방송 등 영상매체들도 CCM을 소개하면서 CCM은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외국의 CCM이 빌보드 팝 챠트에 등장하고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자 그 시장성을 깨달은 국내 직배음반사들은 일반시장에 미국의 CCM을 라이센스하여 발매했다.

마이클 W. 스미스, 에이미 그래트,자스오브 클레이,스티븐 커티스 채프먼,디시 토크,비비 앤 시시 와이넌스,테이크 식스,키크 플랭클린과 갓즈 프라퍼티, 플레밍 앤 존,케시 트로콜리,밥 카알라일, 올 스타 유나이티드,식스펜스 난 더 리처 등의 앨범이 일반시장에 나왔다. 일반 대중음악계에서도 외국의 CCM뿐만 아니라 국내의 CCM에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우선 예레미,얼터 등은 록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록 음악시장이 크지 않은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서는 상대적으로 크리스천 록이나 메탈이 두드러져 보였다. 이들의 음악은 일반 라디오에서 자주 등장했다. 미국에서 재즈와 리듬 앤 블루스로 가창력을 쌓았던 리나 박은 국내 가요계에서 박정현이라는 이름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대중음악계의 스타들도 CCM을 자주 부르면서 CCM의 영향력이 넓어져 갔다. 북한 돕기 앨범 엔 조관우, 변진섭, 김원 준 등이 참여했고, 솔리드의 김조한,DJ DOC의 김창렬,손지창,최이안도 자기 앨범에 CCM을 넣었다. 신형원, 인순이, 송시현, 유리상자 등도 CCM 앨범을 냈다. 착한노래만들기 공연 북한에 산양보내기 운동 공연 등에도 일반 가수들과 크리스천 가수들이 같이 참여하면서 한국의 CCM은 점점 영역이 확대되어 갔다. 안성진,송정미,큰바위얼굴은 일반시장에 음반을 내놓았다. 이런 노력으로 CCM은 기독교 시장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일반 매장에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한국CCM의 앞날

21세기를 맞으면서 한국의 CCM은 점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의 CCM시장은 외형적으로는 다지 성장하지 못했다. 기획과 제작비 투입으로 음악의 수준이나 상품의 품질은 높아졌지만 시장 규모는 90년대 초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시장은 여전히 체계적인 구조를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음악과 녹음 제작의 향상에 따라 홍보와 마케팅이 함께 받쳐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장이 작아서 일반 음악 계에 비해 영세성을 면치 못하던 CCM업계는 과감한 투자와 마케팅 전략을 세우기가 힘들었다.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집회가 여전히 CCM 아티스트의 주요 활동무대인 것도 그 이유였다. 음반과 공연을 통해 수용자를 만나는 것이 한정되다보니 CCM시장을 구성하는 요소의 상당부분이 집회 시장으로 들어가 눈에 보이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당연히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음반시장은 성장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집회에 비중이 크다보니 음악적 내용 또한 기독교인들에게 충실한 것을 담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한국의 CCM은 대부분 크리스천이 크리스천들을 위해 만든 음악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한국의 CCM이 더 넓은 영역의 세계관을 표현하기란 힘들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외국의 CCM이 제한 없이 들어오면서 미국CCM을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대한 물음도 제기되었다. 이 물음은 외국의 시장에 비해 취약한 우리 CCM의 시장문제, 음악적 정서문제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에따라 과연 '한국적 CCM은 무엇인가? 한국의 CCM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이어졌다. 세계의 음악 흐름이나 국내 가요계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을 경계하면서 우리의 믿음과 현실을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라는 것이 이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젊은 계층을 중심으로 기독교 문화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문화선교에 대한 논의도 시작되었고 CCM을 둘러싼 현상을 연구하는 신학자들, 대중문화 학자들이 늘어났다. 이들의 논의와 연구가 세미나, 문화학교 그리고 기독교 매체를 통해 한국 교회에 알려지자 컨템퍼러리 음악의 의미와 방향이 조금씩 정립되어 갔다.

한국의 기독교 대중문화가 이제야 주체적인 입장에서 얘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CCM과 관련한 컨템퍼러리 운동은 한국 교회의 젊은이들의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려는 운동으로 어렴풋이 그 실체를 형성했다. 이런 움직임을 통해 단순히 음악적이던 컨템퍼러리 운동이 내용을 포함한 총체적인 컨템퍼러리 운동으로 변모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 CCM의 앞길은 험난하다. CCM계의 영적 지도자가 드믈고 CCM음악인 자체의 자원과 역량 또한 부족하다. 컨템퍼러리 운동을 지원해 주어야 할 교회에서는 아직도 CCM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저항감도 크다. CCM을 튼튼하게 키워나갈 만한 경제적 토대도 허약하다, 이 때문에 한국의 CCM계를 힘겹게 이끌어오던 이들도 좌절에 빠지는 일이 허다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CCM의 계속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젊은 크리스천들이 CCM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확장해가고 있고, 선교의 영역을 문화적으로 넓혀가는 노력도 더해지고 있다. 또 많은젊은이들이 영적인 성장과 더불어 음악의 기술적인 면에서도 성장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CCM은 풍부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CCM을 둘러싼 물적 토대나 주변환경이 점차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컨템퍼러리 운동은 그 뿌리가 더욱 확고해질 것이다. 한국 CCM의 과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국에는 "정보화 시대, 문화의 시대, 지구촌 시대...복잡다양한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주님의 주권이 온 천하에 그리고 모든 분야에 걸쳐 속속 미치지 않는 부분이 없다는 것을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예술의 아름다움으로 그리고 우리의 상황을 반영한 정서를 담아 폭넓은 대중성이 깃든 음악으로 답해주는 것이다. 한국의 CCM은 한국 사람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아름답게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3-03-15 17:55:18
yilee [ E-mail ]

 

2.위에 소개한 자료가 사실이라면, 'CCM'은 신앙인으로서는 명확히 단절하셔야겠습니다.

 

 

제목분류 : [~교리~교회론~신앙생활~찬송~]
내용분류 : [-교리-교회론-신앙생활-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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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선 글을 읽는 분들의 편리를 위해 'CCM'을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CCM'은 현대(Contemporary) 기독교(Christian) 음악(Music)의 약자입니다. 말하자면 '현대화' 된 찬송 또는 복음성가라는 뜻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현대 음악에 맞춘 기독교식 음악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드럼, 율동, 화음, 발음, 음의 처리 등 모든 음악 내적 외적 요소를 요즘 현대 사회에서 사용되는 기법으로 처리한 교회 음악이라는 뜻입니다.

 

 

2.질문자께서 받은 증거가 있는데 그것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에 참 어렵습니다.

지금 질문자께서 눈으로 본 것을 말씀하는데 답변자는 그것을 잘못 보셨다고 말을 해야 합니다. 어렵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질문자께서 손으로 만져 보고 느낀 대로 말씀하는데 근처에 가 보지도 않은 답변자는 잘못 만졌고 잘못 느꼈다고 설명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일단 서로의 시각과 서 있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해 해 주셨으면 합니다.

질문자를 가차없이 비판하는 듯 들릴 수밖에 없는 내용이지만, 그냥 이론적으로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CCM'을 두고 이곳에서 드릴 수 있는 입장입니다. 어떤 분이 말씀하셔도 방향은 같을 것입니다.

장님이 만져본 코끼리는 분명 코끼리인데 장님은 코끼리를 만진 것이 아니고 뱀을 만졌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런 토론이 벌어질 때는 서로 한 마디씩 발언 한 다음 서로가 신중하게 상대방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장님과 눈 뜬 사람이 계속 말로만 주고 받는다면 토론의 방향은 옳은 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토론을 위한 토론으로 변질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3.위에 올린 CCM 자료는 CCM 전문가 애호가들의 주장입니다.

CCM 전문가 애호가들이 가장 객관적으로 설명을 하되 최대한 CCM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마치 이곳에서 백영희신앙노선을 소개하듯 소개한 자료입니다. 이 자료들이 사실이라면, CCM은 완전히 세상 속 깊은 곳으로 나간 타락한 음악입니다. 세상을 닮아버렸다는 말을 세속화라고 합니다. 그런 음악이라고 단정하겠습니다.

그러나 반론하시는 분들은 그 CCM을 통해 받은 은혜가 있다고 간증하시겠지만, 천주교와 같은 이단에서 만든 마리아 승천가라는 찬양도 있고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성곡도 있습니다. 이런 곡들은 수백년씩 듣는 이들에게 깊은 신앙심과 종교성을 심었다고 세계가 평가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착각은 자유인데....'라고 웃고 넘어가 버리고 말아버립니다.

지금 윗글에서 소개한 바에 의하면, CCM은 '현대'와 '기독교'와 '음악'이라는 3글자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기독교'라는 단어가 '현대'와 '음악'을 붙든 것이 아니고, '현대'가 '기독교'와 '음악'을 붙든 형태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현대'와 '음악'이 '기독교'를 삼켜 이용하고 있는 형태입니다.

 

 

4.지금까지 요즘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교회 음악을 비판했지만, 알고보니 더 비판해야겠습니다.

이번 자료를 보지 않고 그냥 잠깐씩 찬송한다는 소식과 그 가사들 또 그 찬송을 하는 형태 등만을 듣고도 이곳은 듣는 분들이 그냥 듣고 지나치기에는 민망할 만큼 비판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질문 때문에 CCM측의 자료를 읽게 되었고 그 결과, CCM의 실상은 너무도 탈선이 심하고 그 부패가 끝이 없는 정도이기 때문에 이곳이 힘만 있다면 어떻게 하든지 그런 음악을 손대는 이들을 붙들어 내어 구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넘칩니다.

이미 그 음악의 단점과 관련 폐단은 이곳 문답방 여러곳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말씀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자세하게 분석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곳이 이곳의 진심을 다해 CCM음악을 믿는 사람이 예배당이나 신앙모임에서 손에 대거나 음에 대는 것은 단호하게 금하시라고 권고하겠습니다.

담배가 처음 나올 때는 약인 줄 알았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재미거리 정도인 줄 알았습니다. 멋이라고 생각한 때도 있었습니다. 100여년 전 한국교회는 건강이나 다른 병폐는 없지만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종이불에 태워없애는 취미는 낭비라는 뜻으로 반대하고 금했습니다. 최근에는 불신사회에서도 만인의 적이 되었고 천하의 원수가 되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최근까지 CCM을 만들고 전파하고 주도한 교회들 신앙가들 그 자유주의노선 쪽에서는 목사가 담배 피우지 말라는 법이 있어? 라고 비웃고 있었습니다.

 

 

5.질문하시는 분이 공회 소속 교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단절하셨으면 합니다.

지금 CCM 문제를 두고, 공회 내에서 신앙의 지도급 인물치고 이를 지지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있다면, 목회 차원에서 교회 내 소란이나 분란을 피하기 위한 몸조심일 것입니다. 만약 진정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하시는 분이 있다면 자기 과거 목회는 거짓말로 한 것이라고 스스로 확인하는 일입니다.

일반 교계 교인들이라면 설명 드리고 토론해야 할 부분이 엄청나게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회 노선의 교인이라면, 사실 그것이 대단히 문제가 많다는 것은 이미 감지하고 계실 듯 합니다. 아무리 대구공회가 속화와 타락의 정도가 심하다고 해도 그 깊은 속에 최소한의 양심이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찝찝하기 그지 없을 것입니다.

대구공회에 소속된 교인들은 대구공회를 주도하고 대구공회를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고 소속 교인을 인도하는 목회자들, 공회 지도자들을 따르는 분들 아닙니까? 자기를 인도하는 목회자, 자기 목회자의 선생 목회자, 자기 목회자의 지도급 목회자들이 CCM에 대하여는 가차없이 교회법으로 치리를 하실 것입니다. 그분들은 대구공회를 오늘의 공회로 발전시키고 확립시키기 위해 그분들의 신앙소신에 틀린 것은 가차없이 제명 제적 처리를 하되 주저함이 없었던 분들입니다.

 

 

6.질문하신 내용들을 세분하여 설명하겠습니다.

>목사님, ccm자체가 우리에 믿음을 떨어뜨린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이 잘못되어서 그렇지 , 그 자체가 믿음을 떨어뜨린다

>고 생각하면 좀 위험할 것 같습니다. 물론 요즘에 좀 너무하다싶은 ccm이

>많이 나오는것은 걱정이 됩니다.

- 일반적으로 세상 모든 것은 바로 사용하면 복이 되고 잘못 사용하면 저주가 되는 것이지 세상 것 그 자체가 죄되고 복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돈이나 지식이나 자식 등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나 간혹 그 자체가 죄되는 것이 있으니 무당 불상 미신은 그 자체를 버려야 할 것이고 단절할 것이지 불상을 집에 놓고 바로 이용하면 복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이 아니고 신앙 내부로 들어오면 사용에 따라 은혜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것도 있으나 대개는 그 자체를 버려야 할 것이 있고 그 자체는 일단 붙들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일단 붙들고 봐야 할 교리입니다. 이해와 은혜는 붙든 다음에 생각할 일입니다. 성경도 그렇습니다. 예배도 그렇습니다.

반대로,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은 그 안에 있으면서도 잘 이용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논리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신앙에 삐뚤어지게 만들어진 것은 타락이고 탈선입니다. 이런 것은 흉내도 내지 말고 듣고 보지도 말아야 복된 것들입니다. CCM으로 이름 붙는 찬송 중에도 그 찬송 자체가 은혜로운 것이 있다면 은혜로운 것입니다. 비록 찬송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세상 유행가식으로 만들어 신앙의 탈선을 조장하는 것이라면 그 찬송을 입에 부르며 탈선치 않으려고 할 것이 아니고 입에서 떼내 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현대식'으로 예수를 믿고 '현대식'으로 찬송을 하고 '현대식'으로 예배당을 운영한다고 할 때 그 '현대식'이라는 개념과 그 개념에서 비롯된 모든 조처는 암과 같은 것입니다. 그냥 떼내버리면 될 것이지 그것을 붙들고 있을 대상이 아닙니다.

>찬송가에 있는건 좋고, 요즘나오는 ccm은 믿음만 떨어뜨린다고 말씀을 들었을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찬송가에 수록된 곡들도 영국에서 복음성가로 불려지

>던 것들이었습니다. 또한 268장 온세상 위하여"는 찬송가중에 가장 최근에 작

>곡된 것입니다. 그 찬송가 보다 더 전에 만들어져서 불려지고 있는 ccm들도

>많습니다.

- 답변자는 찬송이나 음악에는 조예가 없지만, 한국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적 집단이라는 곳에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1964년도 초등학교 1학년 때 성탄절 찬송을 영어로만 배우고 발표했던 기억도 있으며, 선교사들의 톱날 찬송 바이올린 찬양, 1970년대 CCC의 4영리 전도법 초기 개발시 교육훈련과정 등, 현재 이곳과 정반대로 나가는 곳에서 평상 생활 전부를 통과해야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 현재 총공회 목회자 중에서만 말한다면 이곳 답변자 이상으로 자유주의 신앙, 현대주의 신앙에 깊은 곳을 다 통과해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별별 현대주의적 예배형태라 하여 공회 내에서 시도되고 있는 것은, 이미 40여년 전에 미국 교회를 휩쓸고 30여년 전에 한국교회에 상륙하여 1-20년씩 쓸고 갔던 그런 형태들입니다. 새로울 것도 없고 오히려 캐캐묵은 낡은 것입니다. 미국에서 사용하고 하다가 닳고 닳아서 쓰레기통에 쳐박아 놓은 것이 한국으로 수입이 되고 나면 'Made in USA'가 되어 대단한 첨단이 되고 신사고가 되며 발상의 전환이라는 용어가 붙고 있습니다. 참 무식이 탈이라는 개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에 설명한 찬송의 여러 형태를 말씀하셨으나, 그런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비판한 것이 아니고 그런 내용을 적어도 40여년 이상 파악하고 쭉 지켜보며 변형되어 온 내력까지를 대충 알고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짠 음식이 맛있는 사람은 짜게 먹는 것입니다. 입맛은 분명히 좋을 것이나 짠 음식이 건강에 해롭다는 원리와 원칙만은 이곳에서 소리높혀 외치고 싶습니다. 마약에 취한 듯 입술이 우물거리며 무슨 가사를 읊조리는지도 모를 정도의 속도로 주를 찬양하는 요즘 유행가식 찬송으로 은혜를 받는 분이 있다면, 그 분의 감정과 주관과 그 느낌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백해무익이라는 표현은 서슴없이 사용하겠습니다.

>한 성령님께서 "온세상 위하여"의 때까지만 충만하게 역사하시고, 그 이후엔
>음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역사하심을 조금만 하셨을까요? 그래서 영성을 떨

>어뜨리는 더러운 영이 그때부터 틈타게 된걸까요? 그시대와 그 후에도 한 성

>령님이실줄로 믿습니다.

- 찬송가들이 은혜 있던 시절까지는 성령의 역사가 충만했습니다. 그 이후 찬송가들이 급격하게 세속화될 때에도 성령의 역사는 충만했습니다. 문제는 그 이전에는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분들이 더러 있었고, 그 이후에는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분들이 없는 시대입니다. 믿는 자를 보겠느냐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말세가 되어갈수록 믿음을 배반하고 전부 자기 중심으로 악한 사람이 되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까지 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이 맞기 위해서라도 오늘 일반적 교회의 형편은 극심한 타락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일부러 끼워맞추기 위해서가 아니고 실상이 그렇습니다.

 

 

오늘 예배가 있습니까?
오늘 찬송이 있습니까?

오늘 기도가 있습니까?

오늘 목사가 있습니까?

오늘 교회가 있습니까?

 

있다면 몇 개 있을 것이고 있다면 몇 명 있을 것입니다. 그 몇 명 중에 끼이기 위해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주장하고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 속에 끼이지를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물며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있다면? 수에 칠 가치도 없을 것입니다.

 

 

>요즘에 ccm중에서 세속에 물든 것들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최근 가스펠중에는 차라리 안듣는게 나을것같은 곡들도 많습니다.

>

>그러나, 찬송가책자에 수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건 찬송가가 아니라 믿음만 떨어뜨린다고 생각하긴 어려울것 같습니다. 너무나 좋은 곡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단지, 사용하는 방법이 점점 변질되고 있음이 잘못인것입니다.

- 찬송가에 포함되고 되지 않았다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찬송가는 신앙있던 분들이 많던 시대에 신앙있던 분들에 의하여 찬송가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곡이 많지는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누락된 부분들이 더러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은 찬송가일 뿐입니다. 그러나 찬송가가 바로 되었다면 마치 제2의 성경이나 되는 것처럼 우리 신앙에 사용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찬송을 그렇게 중요하게 보는 것입니다.

현재까지 우리가 겪고 사용해 온 경험으로만 본다면, 신편찬송가 새찬송가 공회찬송가는 아쉬운 면들이 더러 있어도 그래도 찬송가라고 하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새찬송가를 부르던 시절도 신앙있는 분들은 그 안에서 일부만 주로 불렀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통일찬송가 정도라면, 아예 찬송가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사실 저는 선교단체에서 예배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섬기는 교회에서도 많은 찬양팀과 성가대를 하고 있습니다.

>

>제가 섬기는 선교단체의 집회 청중은 모두 구체적으로 선교에 헌신한 자들

>입니다. 그들에겐 ccm을 통하여서도 성령님께서 강하게 기름부으십니다.

>반면에 교회에서는 ccm이 모두에게 효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

>면 굉장히 다양한 층의 사람들이 있고, 신앙성숙도도 천차만별이니까요.

- 현재 활동하시는 곳을 두고 말씀한다면 다른 이의나 반론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분들의 현 신앙상태가 CCM 찬송에라도 은혜를 받아야 할 수준에 있을 수 있고 그런 신앙형편에 계신 분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남선목사님이 처음 예수를 믿고 예배 볼 때는 3-4명이 둘러 앉아 찬송 한번 부르고 담배 한 대 피워가며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만일 해방 후 평양감옥에서 출옥한 뒤에도 담배를 한 대 입에 물었다면 이곳은 그의 신앙을 독립운동가로 보지 신앙가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 예수 믿을 때 담배를 피웠다는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은혜가 됩니다. 그 위대한 신앙가가 담배를 물고 예배를 보며 출발했으니, 나는 그분보다 좀더 나은 신앙가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등의 소망입니다.

지금 선교단체에서 활동하고 계신다면, 선교라는 것은 그 단어에서부터 가장 복음에 멀리 있는 이들을 접촉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그곳 분들의 현 신앙형편을 기준으로 그들에게 몰랐던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알리는 과정에서 시도되는 형태는 이곳에서 전혀 비판하거나 언급할 문제가 아님을 꼭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공회 교회들도 1960년대까지는 여름성경학교 때 주일학교 예배 시간에 '손씻고 밥먹기'와 같은 세상 위생지도를 했고, 세상 노래인 '곰 세 마리'도 가르쳤습니다. 체조도 시킨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때와 지금을 비교할 때 겉에서 안으로, 어린 데에서 장성한 데로, 세상에서 신앙으로 자꾸 나아지고 좁아지느냐, 아니면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 세상으로 가까워지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이곳 답변은 주로 일반론적인 문제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CCM은 아주 나쁜 것이라는 것이 이곳의 단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쁜 것을 선교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느냐고 되묻는 분이 계신다면,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는 흉내도 내지 말아야 할 것이지만 CCM의 찬송 중에 어느 찬송이 처음 믿는 분들에게 어떤 효과가 있는지를 일일이 비판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기는 전하시는 분이 전도 뿐 아니라 선교의 현장에서까지 이 복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가장 높은 것으로 전했으면 할 뿐입니다.

>찬송가도 너무 귀하고, ccm도 너무 귀합니다. 제 생각엔 분별하는 것이 중요
>한것 같습니다. 점점 세속화되어가는 ccm을 올바르게 분별하여 청중에 맞게,

>자리에 맞게 부르는 것이 올바른것 같습니다. 올바른 분별을 하기 위해서는

>늘 말씀 가운데 서있고, 성도들을 배려하는 사랑 가운데 서있어야만 할 것

>입니다.

- CCM과 관련해서는 현재 질문자께서 이 문제를 보다 넓은 눈으로 보다 근본적인 신앙시각을 먼저 정립한 다음 새로 보셨으면 합니다. 새로 보면 새로 보일 수 있는 신앙의 귀한 장점과 요소들을 다 갖추고 계신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바로 분별한다면 이 시대 모든 분들에게 그분들이 좋아하는 취향을 따라가서 '현대 취향'의 예배를 드릴 것이 아니고, 그분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하나님의 취향에 그분들이 따라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를 배려하는 것은 그들의 다리 불편을 이해하여 의자 조절을 하는 것이 배려이며 사랑입니다. 불교에서 개종한 분들을 배려한다 하여 석가는 구원에 포함되었을지 모르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교인들을 배려한다 하여 애양원 내 병원의 벽화에는 한복입은 예수님이 한복입은 나환자들을 고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배려가 아니고 천국을 해체하여 세상을 건설하는 매국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곳은 답변자 스스로 젊은 사람들의 욕정 발산과 막가는 현재 사회 구조와 자기 중심의 극단적 상황에서 자란 배경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런 과정을 답변자에게는 주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면도칼을 달라는 젖먹이에게 면도칼을 쥐어주는 배려는 선을 긋고 있습니다. CCM 찬송은 면도칼 정도로 섬뜩하게 보이고 또 그렇게 파악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이 그 면을 조심하라고 알리는 것은 목청껏 외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200곡으로 한정하여 부르겠다고 하는것은 어떻게 보아야할지
>고민입니다...

200곡도 좀 많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200곡으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분들도 계십니다. 200곡으로는 부족을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다. 공회의 신앙노선은 예배찬송은 200곡 정도를 넘어서는 곤란하겠다고 제시한 것입니다. 성탄 발표, 찬양대 연습곡 등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곡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준은, 공회의 예배 찬송을 200곡으로 정한 것을 고려한다면, 그 외의 찬송을 택한다고 해도 어떤 기준으로 어떤 면을 중심으로 정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찬송가 200곡을 두고 말씀드릴 때마다 늘 아쉬운 것은 200곡만 사용해야 하느냐, 그 외 많은 찬송들은 왜 사용하면 안되느냐는 내용으로 의견들이 오고가는 것입니다.

200곡도 다 사용해야 하느냐? 200곡으로 공회 찬송을 정한 것은 공회 내의 신앙 어린 사람들을 고려해서 가장 넓게 수용한 외곽선이 200곡이니, 그 200곡 안에서도 실은 은혜가 되기 때문에 자주 부르는 찬송은 100여곡으로 줄어들어야 신앙이 발전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신앙이 더 발전하게 되면 50여곡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세상 것은 이것 저것 곡이 많아야 다양해서 좋은 것인데, 신앙은 은혜되는 한 두가지에 붙들려 부른 찬송을 또 부르고 또 부르고, 밤새도록 불러도 2곡 3곡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되어야 자라가는 신앙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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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18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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