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백영희 설교권 - 연구소 입장 (대법원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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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작성일
2019.10.19
대법원은 2018년 10월 18일, 백영희 목사님의 자녀들이 '부친 설교는 자녀만의 사유재산인데 이영인이 백영희 설교를 남들에게 전달했다'며 고소한 사건을 두고 고소인 백영희 자녀들의 말은 전부 맞다고 판결했고 피고 이영인은 유죄이며 그 주장은 다 틀렸다고 결론을 내렸다. 2059년 8월 27일까지는 백영희 설교를 자녀 허락 없이 누구도 전하지 못한다는 것이 결론이다.

여기 첨부하는 자료는 '이영인의 입장'이다. 본 연구소는 과거에도 또 현재도 여전히 이영인의 주장이 옳다고 동의한다. 여기 이영인의 주장을 소개하는 이유는 '백영희 설교가 자녀들의 사유재산이 아니라'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이영인 식으로 생각하고 이영인이 제시한 자료를 근거로 하는데, 이제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기 때문에 만일 이영인처럼 백영희 설교를 전하면 이영인처럼 처벌을 받게 되니, 사전에 이영인의 주장과 근거는 세상이 범죄 행위라고 함을 알림으로 백영희 목사님의 자녀들에게는 그들의 사유재산이 더 이상 침해 당하지 않게 하고, 또 선의의 일반 사용자들은 불의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방어하는 차원이다. 이영인의 입장 외에 따로 논리와 근거가 있으면 알아서 하면 되고, 만일 이영인 입장과 같은 논리와 근거를 가진 분이 이영인처럼 백영희 설교를 전하려 한다면 이영인처럼 처벌을 각오해야 한다는 점을 최소한 알려야 할 책임감 때문에 이 곳에 이영인 피고의 '상고 이유서'를 올린다.

참고로 이 내용은 공회 교인도 아니며 기독교 교인도 아닌 변호인이 피고인이 제공한 자료만 가지고 변호인이 객관적으로 본 총공회와 백영희 그리고 대한민국의 법률 체계를 고려해서 적었다. 즉, 총공회와 전혀 무관한 인물의 총공회 논문이 된다. 입증은 그림 파일이어서 따로 첨부하겠으며, 백도영 고소인과 법원의 판결문도 준비 되는 대로 이 곳에 함께 제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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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고 이 유 서

사 건 2018도15093 저작권법위반 등
피고인 최순련, 이영인

위 사건에 관하여 피고인들의 변호인은 다음과 같이 상고이유서를 제출합니다.

1. 머리 말

이 사건은, 독립된 기독교 교단인 ‘예수교장로회 한국총공회’(이하 총공회라고 줄여 씁니다)를 설립한 백영희 목사의 사후에 교단의 주도권 내지 교권에 대한 그 자녀들 간의 다툼으로 총공회 교단이 분열 상태에 이르고 그 과정에서 백영희 목사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피고인 이영인도 뜻을 같이 하는 성도들과 함께 분리되어 독자노선을 걷게 되자 백영희 목사의 자녀들 중 한 사람인 고소인 백도영이 총공회 교권 장악의 수단으로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는 피고인 이영인을 고소함으로써 수사가 개시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고소인 백도영은 이 사건 고소를 시작으로 하여 피고인들 이외에도 피고인 이영인과 신앙노선을 같이 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상대로 저작권법위반, 상표법위반, 명예훼손 등의 죄명을 들먹이며 무차별적으로 고소를 제기하고 있고, 때로는 고소사실을 나누어 쪼개기식으로 고소를 제기하는 등으로 고소권을 남용하는 행태를 보이며 피고인 이영인을 계속해서 부당하게 압박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사건은 피고인들이 저작권법위반, 상표법위반, 기부금품의모집및사용에관한법률위반으로 기소된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저작권법위반 여부인바, 이를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총공회의 설립 및 발전 과정, 백영희 목사의 설교 내용과 평소 말씀, 설교록 발간 경위, 교단 분열 등에 관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유기적인 맥락 하에서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 번 상고이유서에도 위 쟁점에 대한 이해와 그 해결에 필요한 범위 내에서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먼저 언급하고, 이어서 원심에서 유죄로 인정된 범죄사실에 대한 법률적 주장을 정리하는 순으로 상고이유를 구성하고자 합니다.

한편 이 사건 항소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도중 우리 나라 기독교 교계 주요언론에서는 2018. 4. 경 ‘목사의 설교가 사유재산으로 상속되는가?’라는 제목 하에 이 사건에 관한 특집 기사를 싣기도 하였는데(변호인 제출 참고자료 참조),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위 주제에 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고, 특히 무소유원칙 및 법정소송반대원칙을 강조한 총공회 설립자인 백영희 목사의 설교에 관련된 이 사건이 법정으로 비화된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면서 한 목소리로 큰 걱정과 아쉬움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총공회 성도들도 이 사건 재판을 통하여 교권의 다툼에 관한 분쟁이 실정법에 의해서도 순리적으로 해결되어 총공회의 교단 내부질서가 종전처럼 평화롭게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상고심의 판단까지 받게되는 이 사건의 결말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 실정임을 특별히 말씀드립니다.

2. 부산 서부교회, 신풍교회, 백영희 목사, 총공회에 대하여

가. 부산 서구 동대신동 소재 서부교회는 1949년 경 개척되었고, 초대 목사는 저 유명한 손양원 목사의 동생인 손의원 목사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일제 시절에 드러내 놓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목숨을 걸고 목회를 이끌었고,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는 자신의 두 아들을 총살하고 계엄군에 의해 즉결 처형에 넘겨진 좌익 청년을 구명하여 양자로 삼아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였으며, 6.25 전쟁 초기에는 어린 양들을 피신시키고 교회를 지키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혀 끝내 처형장에서 순교함으로써 한국 교회사에서 길이 추앙을 받고 있는 분입니다(증제70호, 증제80호). 현재 피고인 이영인이 담임목회자로 시무하는 여수 신풍교회는 손양원 목사의 가족들이 1952년 경 손양원 목사가 목회하던 여수 애양원 마을 바로 앞에 개척한 교회로서 비록 그 규모는 작지만 손양원 목사와의 관계로 인하여 한국 교회사에서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교회이고, 그 위치도 손양원 목사 내외분과 총살 당한 그 두 아들의 묘소가 있는 애양원 동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습니다(증제70호).

나. 피고인 이영인의 부친과 동향(경남 거창군 고제면)인 백영희 목사도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믿음 하나로 신사참배 강요와 회유를 뿌리치고 경남 거창의 시골교회를 지켜낸 분으로서(증제2호, 증제3호) 그의 순교적 신앙은 손양원 목사의 영향을 받은 바 많았고(2017. 3. 28. 제출한 참고논문 9쪽 참조), 그래서 한 때 ‘여수에는 손양원, 거창에는 백영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름이 알려지기도 하였습니다. 백영희 목사 또한 손양원 목사와 마찬가지로 고집스러울 정도로 철저하게 성경 말씀을 실천한 분이었고(증제2호), 손양원 목사와는 돈독한 인연도 있었기에(위 참고논문 8쪽 참조) 초대 손의원 목사, 제2대 김창인 목사가 각 시무하였던 부산 서부교회의 청빙을 받아 1952. 7. 경부터 그 곳에서 제3대 목회자로 시무하였던 것입니다.

다. 그런데 백영희 목사는 서부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1959년 예배당 소송 건을 반대하고(소송금지 원칙 고수),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교단이 유엔군 철수반대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비성경적·비신앙적 행위에 가담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함과 아울러 교단 지도부가 진리 중심의 신앙노선에서 교권 중심의 정치노선으로 회귀하는 것을 지적하다가 상회불복종죄로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교단에서 제명당한 후부터는 독자적으로 서부교회를 이끌었고(위 참고논문 5~9쪽 및 증제3호, 증제4호, 증제9호, 증제86호 참조), 1966. 5. 26.에 이르러서는 서부교회에서 ‘예수교장로회 한국총공회’라는 교단을 설립하였으며, 1976년에는 목회자 양성원도 개설하였습니다. 백영희 목사의 교단 설립 후 총공회의 규모는 크게 확장되었는데, 특히 서부교회는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 교회로 성장·발전하여 주일학교 학생들이 많을 때는 13,000여 명에 이르렀고, 1980년대 세계 최대 교회였던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도 주일학교 만큼은 서부교회의 상대가 되지 못할 정도였으며,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서부교회가 신도수 3만 명을 넘는 초대형 교회로 성장·발전하였습니다(증제1호, 증제3호, 증제5호).

라. 한편 손양원 목사의 가족들이 개척한 신풍교회는 오랫 동안 어느 교단에도 소속되지 아니한 독립교회로 남아 있다가 1975년에 이르러 손양원 목사 가족들의 뜻에 따라 총공회에 가입하였는데(증제84호), 그 이유는 한국의 교회가 말로는 성경을 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손해를 보는 경우에도 성경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교단은 백영희 목사가 이끄는 총공회 뿐이었기 때문입니다(증제70호 참조).
피고인 이영인은 1989. 3. 18. 경 백영희 목사의 특별한 말씀에 따라 위와 같은 역사적 의미가 있고 총공회 교단에도 소속되어 있는 신풍교회에 담임목회자로 부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피고인 이영인의 신풍교회 부임 당시에는 미국에 살고 있어서 이러한 사실을 알지도 못하는 고소인 백도영이 법정에서 피고인 이영인은 옳지 못한 행위로 추방되는 입장에서 시골의 신풍교회로 내려가게 되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은 명백한 위증입니다(백도영에 대한 증인신문 녹취서 24쪽, 39~40쪽 참조). 만일 피고인 이영인이 그 당시 문책을 받았다면 그로서는 처음인 목회자의 중책을 보임받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도 위와 같은 역사적 상징성이 있는 신풍교회에 담임목회자로 부임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마. 백영희 목사가 피고인 이영인에게 강권하다시피 하여 피고인 이영인을 미국으로 유학 보낸 사실(증제87호, 1984. 8. 18. 설교 말씀 및 증제92호 편지 참조), 백영희 목사가 피고인 이영인을 가리켜 성도 다르고 배도 다르지만 ‘믿음의 아들’이라고 할 정도로 신임을 한 사실(증제89호, 1985. 5. 8. 설교 말씀), 백영희 목사가 피고인 이영인에게 백영희 목사의 설교에 기초한 조직신학(교리) 연구를 맡긴 사실(위 증제87호 및 증제91호, 1989. 5. 11. 설교 말씀) 등은 목회설교록에도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3. 총공회의 교회법에 대하여

총공회의 교회법은 교단 설립 당시부터 교회 헌법 등 성문법 규정을 두지 아니하고 오로지 성경과 이에 기초를 둔 백영희 목사의 설교와 말씀을 절대적인 규범으로 삼았고, 불문법 교단의 교리와 행정은 성경중심의 신학을 견지한 백영희 목사의 설교를 통하여 구체화되었으므로 백영희 목사의 설교가 바로 교단의 교리로 인정되어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 중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 특징적인 것 몇 가지를 살펴보면, 교회 운영은 각 지교회 중심으로 하고(개교회 원칙, 증제9호, 증제86호 참조), 담임 목회자에 대하여는 시무신임투표를 하고 청빙을 하도록 한다는 것 등입니다. 위 시무신임투표 제도와 청빙제는 목회자의 임기를 두지는 않지만 매 2년마다 11월 4째 주 마지막 주일에 담임목회자에 대한 신임투표를 실시하여 그가 교인 75% 이상의 신임을 받지 못하면 해당 교회를 떠나야 하고 후임 목회자는 해당 교회에서 청빙하도록 한다는 것인데(증제14호, 증제58호 참조), 이 시무신임투표 제도와 청빙제는 교회가 성경 중심, 진리 중심이 아니라 교권 중심으로 흐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제도적 장치입니다(증제58호 참조). 그리고 백영희 목사는 고신 교단에 속한 여러 교회의 분열로 소송이 제기되었을 때 고린도전서 제6장 제1절 이하를 근거로 소송을 반대하고 포기를 주장하면서 복음운동에만 전념하던 중 총공회를 설립하였으므로(증제86호 및 위 참고논문 9쪽 참조), 총공회에서는 교회 문제 또는 신앙 문제를 세상의 법정으로 끌고 가서 그 해결을 호소하는 것은 절대로 금하도록 되어 있습니다(소송금지의 원칙). 또한 백영희 목사는 성직자의 재산무소유 원칙을 주장하였고 이를 가혹하다고 할 정도로 철저히 실천하였으며, 1989. 8. 27. 04:50 경 서부교회에서 새벽기도를 인도하던 중 갑자기 뛰어든 괴한이 휘두른 칼에 맞아 현장에서 순교한 뒤에 유족에게 남긴 재산은 하나도 없었는바, 이는 백영희 목사의 평소 목회 말씀에도 잘 나타나 있고(증제65호, 증제72호 참조), 고소인 백도영도 종전의 성명사용금지에 관한 민사소송에서 인정하였던 사실입니다(증제55, 56, 57호 참조). 그런데도 고소인 백도영은 법정에서 백영희 목사가 성직자의 재산 무소유에 관하여는 말씀하신 사실조차 없다고 진술하였으니(제1심 증인 백도영에 대한 증인신문녹취서 46쪽 참조) 이는 고소인 스스로 부친인 백영희 목사를 모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손으로 하늘을 가렸다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것과 다름 없는 명백한 위증입니다.

4. 서부교회 편집실, 백영희 목회연구소, 백영희 목회연구회에 대하여

가. 총공회에서는 1981. 3. 9. 총회를 열어 교단의 교리가 구체화되어 있는 백영희 목사의 설교에 관한 설교록 출간을 총공회 사업으로 정하였고(증제7호), 백영희 목사의 설교에 대한 연구 및 설교록 출간을 전담시키기 위한 기관으로 1982. 3. 10. 서부교회 내에 ‘서부교회 편집실’을 설치하였습니다(증제17호, 증제71호).

나. 서부교회 편집실이 설치될 당시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총공회의 규모가 크게 확장되고 서부교회도 주일학교의 발전과 더불어 비약적으로 성장‧발전하던 시기인데, 많은 신도들은 백영희 목사의 설교를 녹음기로 녹음하고 또 이를 복사하여 듣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그 복사물을 팔아서 사복을 챙기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그러자 백영희 목사는 처음에는 위와 같은 녹음‧복사행위를 한동안 금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신도들이 설교 시간에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 녹음기로 녹음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영감과 권능에 있다’는 살아 있는 말씀을 잊은채 영감과 권능은 받지 아니하고, 또 못 들어도 뒤에 녹음해 둔 것을 들으면 된다는 안일한 마음으로 설교 시간에 조는 경우도 있으므로 ‘녹음이 지도자가 되고 완전히 하나님 대신에 우상이 되고 마는 마귀놀음’을 경계하였기 때문입니다(증제66호, 증제67호, 증제68호 참조).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복사를 원하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영감과 권능에 있다’는 이 중요한 한마디만큼은 꼭 기억해야 함을 권면하면서 복사는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말 장사, 상인들이 이를 얼마든지 팔아도 된다’고 허락하는 말씀도 하게 되었습니다(증제66호, 증제67호 참조). 또한 ‘녹음이 지도자가 되고 하나님 대신 우상이 되고 마는 마귀놀음’을 경계하려는 취지에서 신도들이 설교 시간에 녹음하려고 애쓰지 말고 복사기가 마련된 편집실에 요청하여 실비(테이프값과 약간의 인건비) 정도만 내고 복사된 녹음테이프를 얼마든지 제공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였고, 이를 설교에서 광고하였습니다(증제68호, 증제69 참조).

다. 백영희 목사의 설교에 대한 연구 및 설교록 출간을 전담하는 서부교회 편집실은 1987년 그 명칭이 ‘목회연구소‘로 변경되었고(증제94호), 1988. 3. 10.에는 ‘백영희 목회연구소 규칙’이 제정되었는데(증제16호), 이로써 백영희 목회연구소(이하 부산연구소라고 줄여 씀)는 특정 교단(총공회) 및 특정 교회(서부교회) 또는 어느 개인에게도 소속되지 않고, 교권을 행사하는 사람의 방해도 받지 않으며, 아무런 조건 없이 백영희 목사의 설교를 사후에까지 널리 전파할 수 있는 독립된 비법인 종교단체로서의 실체를 갖추게 되었습니다(증제16호). 위 규칙의 개정으로 마련된 백영희 목회연구소 규약(증제17호) 중 이 사건에서 눈여겨 볼만한 규정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처음에 제정된 규칙(증제16호)의 주요 내용도 거의 동일합니다.

제2조(사무소)
본 연구소는 부산시 서구 동대신 1가 370번지에 사무소를 두며 필요시 위원회의 결의로 타처에 분사무소를 설치할 수 있다.
제3조(목적)
본 연구소는 백영희 목사의 교훈과 목회를 연구함에 그 목적을 둔다.
제4조(노선)
본 연구소는 특정 교단, 교회 또는 개인에게 소속되지 않는 독립기관으로 존속한다.
제5조(사업)
본 연구소는 설립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업을 행한다.
(1) 백영희 목사의 교훈과 목회에 대한 자료의 수집, 보관
(2) 상기 자료에 대한 조직적, 체계적 연구, 분석, 정리
(3) 상기 연구 정리의 반포
제19조(자산의 종류)
본 연구소의 재산은 백영희 목사에 대한 목회 자료와 부동산 및 동산으로 나누어 운영위원회에서 작성하는 ‘백영희 목회연구소 재산목록’에 기입한다.
제20조(자산운영)
(1) 백영희 목사의 목회에 관한 자료는 영구 보존한다.
(2) 모든 자산은 반드시 연구소 설립의 목적을 위하여만 운용한다.
(3) 부동산 및 100만 원 이상에 해당하는 동산은 운영위원회 전원 결의로써 변동하며 100만 원 이하에 해당하는 동산은 관리위원의 권한에 둔다.
제24조(규약 개정의 금지사항)
본 규약은 위원 전원의 찬성으로 개정할 수 있으나, 제1조, 제3조, 제4조, 제5조는 이를 개정할 수 없다.

라. 백영희 목사는 1988. 11. 13.(일요일) 주일 오전 예배에서도 “~~이래서 그래 내가 비리로 이래 여러분들이 오해해서 송사를 할라 하면 송사할 끄내끼가 둘이 있어. 둘이 있는데, 뭐이 둘이 있는고 하니, 미리 내가 광고해. 하나는 여기 편집실이라고 하는 이거 집 짓는 것. 대지도 집 짓는 건물도 우리 교회에서 지었습니다. ~~우리 교회 돈으로 지었는데, 편집실, 목회연구소 이렇게 말했고, 연구기관으로 했는데 그것을 모두 다 말해 가지고 백 목사가 교훈한 그 교훈을 잘 그대로 전달하고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는 데에는 편집실이 있어야 된다 이래 가지고서 그 모두 기계를 갖춰서 어떤 사람들은 천만 원도 내고 오백만 원도 내고 몇십만 원도 내 가지고서 그래 가지고 그 지금 기계를 모두 다 구비하게 됐고, 나는 그거 돈을 나는 내 손에 쥐지는 안해. ~~(중략)~~ 인제 그것을 만들기를, 이 것은 백 목사 것도 아니고 백 목사 자손들 것도 아니고 서부교회 것도 아니고 이 것은 복음운동을 위해서 내놓은 것이기 때문에 이 것은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다 하는 것으로 정관을 꾸며 가지고서 그것을 편집실이라 그래 가지고 이름을 가졌고 주인이 없습니다. 그래 가지고 거게다가 법조문을 하기를 요것은 아무도 차지하지 못고, 뭐 총공회도 차지 못하고 양성원도 차지하지 못하고 서부교회도 차지하지 못하고 백 목사 가족이나 그런 사람도 차지하지 못하고 여게 직원들도 차지하지 못하고 꼭 이 백 목사 교훈만 이렇게 출판해 가지고 복음을 널리 전하도록 이렇게 하는데, 나중에 이 재산은 마지막에는 어데로 가느냐? 마지막은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복음운동을 위해서 다 쓰도록 그렇게 마지막은 다 없어지고 거게 쓰지 개인은 손대지 못한다 요렇게 해 놨어요. 요렇게 해 놨는데도 마귀가 오면 그거 편집실은 그 서부교회 재산인데 백 목사 독단으로 그와 같이 지금 편집실을 그래 가지고서 암만 차지 안한다 하지만 편집실이란 그런 한 독립기관을 만들어 가지고 그렇게 해 놨다. 그렇게 헐뜯을 그런 사람들이 혹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지금 말해요. 그래서 모두 다 생각하기를 ‘암만 개척교회를 세우는 것 그거 가지고도 소용 없고 이 교훈이 나가야 된다. ~~(중략)~~ 그 테이프를 중공에도 보내고 미국에도 보내고 일본에도 보내고 안나가는 데가 별로 없어요. ~~(중략)~~ 저 먼저께도 보니까 뭐 삼십만 원씩, 몇십만 원씩 주면서 설교록 있는대로 다 보내 달라고 자꾸 그렇게 온다 하니까 이래서 복음운동 하는 것이니 복음운동 하는 데에는 이 교회 세우는 것보다 이 편집실이 필요하다 이래 가지고서 그 편집실을 그것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알아서, 나는 늙어 죽을지 모르니까 여러분 젊은 사람들이 있다가 이거 증거를 바로 하지 못하면 큰 일 나.”라는 말씀을 하였고(증제11호, 목회설교록 172호), 또한 1989. 1. 8. 총회에서도 부산연구소는 독립된 기관임을 강조하면서 개척교회를 세우는 것보다 백영희 목사의 설교에 나타난 기독교 교리해석 및 목회운영 등에 관한 교훈을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알려서 전파할 의무와 책임이 교인들에게 있음을 설파하였고, 그 사명을 위해 부산연구소가 맡은 소임을 다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백 목사가 죽고 나면 그 뒤에 별별 사람들이 나올 터이니 나중에 가서는 이 교훈을 보수해서 세계에 전파할 그런 기관이 유지 못되겠다 해서 생각하다가 이 것은 독립기관으로 세우자 독립기관으로 하자 하여 그 부동산이나 그런 것을 개인의 명의로 하지 않고 연구소라 하는 법인의 것으로 제정했습니다. ~~ 이 것은 아무 것의 소유도 아니다. 아무도 취할 수 없다. 이 것은 이 교훈을 보수하다가 주님 재림하시면 그대로 불타버리고 말지, 이 것은 끝까지 보수하고 이 교훈에만 하다가 못하게 되면 그대로 썩어 내버리지, 아무도 연구소를 소유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놨습니다”라는 말씀까지 하였습니다(증제12호, 증제13호 참조).

마. 그리고 총공회에서는 1989. 3. 19. 총공회(교단본부) 사무실에서 총공회위원회를 개최하여 부산연구소에서만 백영희 목사의 설교에 대한 연구와 그 설교록 출간을 독점해서는 안된다는 백영희 목사의 독점금지 및 분사무소 개설 지시에 관한 말씀을 받들어 연구소를 2원화함에 따라(증거기록 2437쪽, 피고인 이영인의 검찰 진술 참조) 위 신풍교회에 신풍분사무소(이하 신풍연구소라고 함)를 개설하였는바(증제17호 개정 규약 제2조에도 포괄적인 분사무소 설치 근거가 마련되었음), 이는 백영희 목사 사후 부산연구소가 백영희 목사의 설교에 대한 연구와 그 설교록 출간을 독점할 경우 그 세속적인 독점권한과 관련하여 정상적인 운영이 저해될 소지가 있고 선의의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아 교훈이 막힐 우려도 있었기 때문인데(제1심 증인 문익섭에 대한 증인신문녹취서 4쪽, 원심 증인 이종규에 대한 증인신문녹취서 5~6쪽, 증제72호 참조), 이러한 조치는 결국 교회가 교권 중심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한 것과 비슷한 차원에서 취해진 것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2원화된 부산연구소와 신풍연구소는 서로 긴밀한 협조는 하였지만(증제15호 참조) 상하관계에 있지 않았고 독립적이고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제1심 증인 문익섭에 대한 증인신문녹취서 4쪽, 증제72호 참조).

앞에서 피고인 이영인이 여수 신풍교회의 목회자로 부임한 것은 1989. 3. 18. 경이라고 말씀드렸는데, 바로 그 무렵부터 부산연구소 연구부장으로 있던 피고인 이영인은 부산연구소 연구부장과 신풍연구소 책임자를 겸하게 되어 부산과 여수를 오가며 부산연구소와 신풍연구소의 일을 함께 담당하였습니다(제1심 증인 문익섭에 대한 증인신문녹취서 5쪽 참조). 당시 설교 테이프 등 모든 자료는 2부씩 작성되어 부산연구소와 신풍연구소에 1부씩 보관하였고(증제43호, 피고인 이영인의 검찰진술 증거기록 2439쪽 참조), 설교록의 인쇄 및 출판은 1993년까지 주로 부산에서 하였습니다.

바. 한편 신풍연구소는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은 총공회의 분열과정에서 부산공회 1이 부산공회 1과 부산공회 3으로 다시 분열되었을 무렵인 1997. 10. 17. 명칭을 ‘백영희목회연구회’로 하여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017-13 번지에 사무소를 설치함과 아울러 독자적인 규약(증제19호)을 정비하여 명실 공히 독립된 비법인 종교단체로서의 실체를 갖추게 되었고, 2000. 11. 11.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028-5 대 199㎡ 및 그 지상의 시멘트 블록조 스레이트지붕 단층주택 54.59㎡에 관하여 ‘백영희목회연구회’명의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쳤습니다(증제20호, 증제21호).

5. 백영희 목사 순교 후의 총공회 분열 및 서부교회 분열에 대하여

가. 백영희 목사는 1989. 8. 27. 04:50 경 부산 서부교회에서 새벽기도를 인도하던 중 갑자기 뛰어든 괴한이 휘두른 칼에 맞아 현장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80세였습니다(증제2호). 백영희 목사의 자녀는 모두 7남매인데, 나이 순으로는 백도광(장남), 백순희(장녀), 백은희(차녀), 백도진(차남), 백도충(3남), 백도영(4남), 백명희(3녀)입니다. 백영희 목사는 그 분이 평소에 바라던 대로 ‘설교 중에 순교’하였고, 그 때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예감하던 1989. 3. 19. 경에는 신풍교회에 신풍연구소를 설립하여 이를 피고인 이영인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나. 총공회와 서부교회에서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던 백영희 목사의 갑작스런 사망 후 그 자녀들 간에는 백영희 목사가 생전에 교회는 혈육정실 및 지역정실을 떠나야 한다며(증제88호, 1984. 10. 31. 설교 말씀 참조) 그토록 염려하였던 어지러운 교권 다툼(주도권 다툼)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총공회가 둘로 분열되어 1990. 3. 5. 백도광(장남)을 중심으로 한 대구공회와 백순희(장녀)를 중심으로 한 부산공회가 따로 따로 총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즉 대구공회는 대구 비원교회에서, 부산공회는 부산 서부교회에서 각각 그들만의 총회를 열었던 것입니다(증제37호). 위와 같은 분열의 가장 큰 명분상의 이유는 백영희 목사의 설교를 녹화한 영상녹화물(또는 녹음테이프)에 의한 예배가 허용될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하여 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인데, 부산공회는 영상녹화물 등에 의한 예배(이른바 재독 설교)가 허용된다는 입장이었고, 대구공회는 그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면서 목회자의 실제 설교에 의한 예배만 허용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제1심 증인 문익섭에 대한 증인신문녹취서 6쪽 참조).

다. 한편 서부교회 내에서는 백순희(장녀) 측이 백영희 목사의 사무공간이던 교회건물 5층을 장악(점거)하고, 백명희(3녀) 측이 교회건물 4층을 장악(점거)한 상태에서 백영희 목사의 후임으로 이재순 목사를 청빙하였는데, 백순희(장녀)와 백명희(3녀)가 이재순 목사에게 백영희 목사의 생전 영상테이프에 의한 예배를 요구함으로써 매주 11회의 예배 중 8~9회 정도는 백영희 목사의 생전 영상테이프에 의한 예배를 보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이재순 목사는 나머지 2~3회의 예배에서만 자신의 설교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제1심 증인 문익섭에 대한 증인신문녹취서 7쪽 참조).

그런데 1992. 11. 29. 서부교회에서 이재순 목사의 후임목회자였던 서영호 목사에 대한 시무신임투표에서 백순희(장녀), 백명희(3녀)가 서부교회 교인들 중 상당수를 규합하여 반대를 유도한 탓으로 75%에 미달하는 69.8%의 투표결과가 나오게 되자 총공회 교회법에 따라 서부교회를 떠나야 하는 서영호 목사 측에서 투표 자체의 무효를 선언하며 불복하는 바람에 서부교회도 분열되었고, 그에 따라 부산공회도 부산공회 1(백순희, 백명희 측), 부산공회 2(서영호 목사 측)로 분열되었습니다(제1심 증인 문익섭에 대한 증인신문녹취서 8쪽 참조). 위와 같은 부산공회의 분열 후 백순희, 백명희 측(부산공회 1)에서는 서영호 목사와 그 지지 신도들이 사용하는 서부교회 건물 1~3 층을 빼앗으려는 시도도 하게 되었는데, 서부교회 건물의 2층은 서부교회의 본당으로서 백영희 목사가 순교한 곳이었으므로 그 의미가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 백순희(장녀)는 피고인 이영인에게 부산연구소 직원들을 동원해서라도 서부교회 1~3 층을 빼앗으라는 지시를 하였는데, 피고인 이영인은 잘못된 교권 싸움에 휘말리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에 그 지시를 거절하였고, 그 일로 인해 백순희(장녀)와 피고인 이영인의 사이도 벌어지게 되자, 백순희(장녀)는 백영희 목사의 설교록 출간에 관하여 실질적인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있던 피고인 이영인에게 1993년부터 백영희 목사의 설교록 출간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라. 그러나 백영희 목사의 설교록 출간은 백영희 목사의 교훈에 따른 것이고, 따라서 설교록의 출간이 장기간 중단되는 것은 백영희 목사의 교훈에도 어긋나고 연구소 사명에도 어긋나는 것이므로 피고인 이영인은 백순희(장녀)의 설교록 출간 중단에 대하여 반대의견을 피력하였던바, 백순희(장녀)는 1997. 8. 경 자신의 뜻에 동조하지 아니하는 피고인 이영인 등을 배척하고, 1997. 12. 26. 경 백순희(장녀) 자신의 측근인 이민영으로 하여금 피고인 이영인이 부산연구소에 보관된 백영희 목사 관련 자료를 임의로 가져가서 되돌려 놓지 않는다는 점 등을 내세워 피고인 이영인을 업무상횡령 및 배임 등으로 고소하게 하였는데(부산지방검찰청 1997년 형제95574호 사건, 증제47호 참조), 백순희(장녀) 측으로부터 배척된 피고인 이영인 및 장천룡, 이치영, 이신영 등은 그 무렵 독립하여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되었고, 이에 부산공회 1은 부산공회 1 및 부산공회 3으로 다시 분열되었습니다.

마. 위 형사 고소사건은 1998. 2. 25. ‘혐의없음(증거불충분)’ 처분으로 종결되었지만(증제47호 참조) 그 과정에서 백도광(장남)의 중재로 1998. 2. 11. 합의가 성립되어 백순희(장녀)는 모든 책임을 지고 부산연구소 업무를 백도광(장남)에게 위임하였고(증제43호), 백도광(장남)은 1998. 2. 17. 백도광(장남) 자신을 대표로 하는 출판사(백영희 성경연구소) 등록도 하게 되었는데(증제44호 참조), 그 당시에도 설교록 출간에 관한 실질적인 업무 등은 모두 피고인 이영인이 맡아서 처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출간된 설교록이 수십 호가 되는데다가 가진 사람들도 제법 많아 새로 출간되는 책은 거의 나가지 않고 그대로 보관만 되는 상태에서 설교록 출간도 점차 느려지고 책 판매대금 역시 미미하게 되자 설교록 출판으로 상당한 돈을 벌어 보려고 기대했던 백도광(장남)은 설교록의 출간이 백영희 목사의 교훈에 대한 철저한 사명감 없이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닫고 약 2년 후에는 설교록 출간에 관한 모든 업무를 백영희 목사가 가장 아꼈고 백영희 목사의 설교 연구에 평생을 바치기로 작정하고 있던 피고인 이영인에게 넘겼습니다(증거기록 2500쪽 피고인 이영인의 검찰진술, 제1심 증인 문익섭에 대한 증인신문녹취서 12쪽, 증제89호 등 참조).

바. 교단과 교회가 위와 같이 분열되자 대부분의 교인들은 백영희 목사가 종교사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후 혈친에 의한 다툼을 예측하여 이를 방지하고 미리 대처하도록 하기 위하여 앞에서 본 바와 같은 독립된 종교단체인 연구소의 설립 및 설교록 출간에 관한 교훈을 내리신 것으로 믿고 있고, 또 혈육정실을 떠나야 한다는 교훈을 생전에 수도 없이 강조한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증제88호 및 원심 증인 이종규의 진술 등 참조).

6. 설교록의 출간에 대하여

가. 백영희 목사의 설교록은 서부교회 편집실 운영 당시인 1984. 3. 5. 101호, 1984. 4. 15. 100호가 출간된 것을 시작으로 백영희 목사의 생존시에 총 53권이 출간되었는데(100호~140호, 161호~172호), 100호와 101호의 출간은 각각 다른 교인들에게 맡겨 동시에 추진한 것이었으나 이러한 선의의 경쟁방식에서 101호가 먼저 출간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백영희 목사 사망 후에는 1992. 6. 경부터 부산연구소에서 총 41권의 설교록이 출간되었고(173호~182호, 141호~160호, 99호~89호), 이로써 89호부터 182호까지의 설교록이 발간되었는데, 앞서 본 바와 같은 백순희(장녀)의 출간 중단지시로 1993년부터 1997년까지 5년 간은 출간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백순희(장녀)가 출간 중단을 요구한 것은 백순희(장녀)와 피고인 이영인 간의 사이가 벌어진 탓도 있었지만 단기간에 많은 설교록이 출판되면 목회자가 아닌 백순희(장녀)의 교단장악에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었기 때문인데, 사실은 이것이 출간 중단의 더 큰 이유였습니다(증거기록 2497쪽, 피고인 이영인의 검찰진술 참조). 다시 말하자면 목회자가 아닌 본인이 직접 설교를 할 수 없어 영상테이프 또는 녹음테이프에 의한 예배를 올릴 수밖에 없는 백순희(장녀)의 입장에서 볼 때, 설교록이 계속 발간되면 백영희 목사의 설교를 녹음한 영상테이프 등의 의미와 희소가치는 현저하게 떨어지게 되고, 그에 따라 백순희(장녀)의 교권장악 수단이 없어지게 되므로 스스로의 영향력도 점차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매우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나. 피고인 이영인 등이 상당 기간 동안 중단된 설교록 88호를 순서에 따라 출간한 것은 부산공회 1이 부산공회 1과 부산공회 3으로 분열되고 ‘백영희 목회연구회’가 위와 같이 독립된 비법인 종교단체로 설립된 후인 1997. 12. 15. 경이었습니다. 피고인 이영인은 인터넷이 점차 활성화됨에 따라 1998. 12. 경에는 ’백영희 성경연구소‘(www.pkist.net)라는 인터넷 사이트도 개설하였습니다. 또한 피고인 이영인 등은 2000. 10. 경 백도광(장남)과 상의하여 위 홈페이지의 명칭을 위 종교단체의 명칭과 동일하게 ’백영희 목회연구회‘로 개칭하였고, 2000. 11. 18. 경에는 부산에서 출판사의 명칭을 ’백영희 목회연구회‘로 하고 그 출판사 대표자를 피고인 최순련으로 하는 출판사 등록을 함으로써 그 무렵부터는 주로 부산에서 설교록을 출간하였습니다(증제22호 참조). 백도광(장남)이 1998. 2. 17. 자신을 대표로 하는 출판사(백영희 성경연구소) 등록을 하고, 피고인 이영인이 신풍연구소에서 설교록 출간에 관한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하던 약 2년 간은 87호부터 역순으로 79호까지 발간되었고, 그 후부터는 2015. 12. 24.까지는 신풍연구소(백영희목회연구회)에서 63호까지 발간되었습니다(증거기록 2439쪽, 2482쪽, 피고인 이영인의 검찰진술 참조. 그 후에는 재판 때문에 설교록 발간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피고인 이영인이 이끄는 ‘백영희 목회연구회’에서 설교록의 출간을 재개한 것은 오로지 백영희 목사의 생전 교훈에 따른 것이었고, 그것은 처음부터 총공회 차원의 사업이었습니다.

7. 피고인 이영인의 저작권법위반의 점에 대하여

가. 원심이 유지한 제1심 판결의 범죄사실에 의하면, ‘피고인 이영인은 2014. 1. 9.부터 계속하여(즉 제1심 판결 선고시점까지) 자신이 운영하는 백영희목회연구회 홈페이지에 위와 같은 설교록 등의 서적(목회설교록, 조직신학, 시집, 석의본, 성경강해, 성경언어론, 전기 등의 서적을 지칭함)을 판매‧교부하는 글을 게재하였고, 또 이미 서점에 배부된 위 서적들에 대한 회수절차를 진행하지 아니하였으며, 위 홈페이지에 여전히 원본설교 및 검토본을 게재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 위 범죄사실에 기재된 서적들 중 조직신학의 정식명칭은 ‘백영희 조직신학’이고, 전기의 정식명칭은 ‘하나님의 사람 백영희’입니다. 교리를 대개 조직신학이라고 하는데, 위 ‘백영희 조직신학’의 내용은 성경 전체에 흩어져 있는 가르침 전부를 인체의 수많은 부분이 하나의 몸으로 연결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체계화한 것입니다(증제95호, 백영희 조직신학 31쪽 참조).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백영희’는 수 많은 관계자들의 면담내용을 정리하여 백영희 목사의 신앙 생애를 기록한 일종의 전기입니다(증제96호). 그런데 ‘백영희 조직신학’ 및 ‘하나님의 사람 백영희’는 이 사건에서 저작물이라고 하는 백영희 목사의 설교내용이 그대로 기재된 것이 없으므로 피고인 이영인이 이미 서점에 배부된 ‘백영희 조직신학’ 및 ‘하나님의 사람 백영희’에 대한 회수절차를 취하지 아니한 것이 저작재산권 침해로 되지는 않는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한 두 군데에서 백영희 목사님 설교 내용의 일부 요지를 기재한 것이 있다 하여도 이는 교육·연구 등을 위해 정당한 범위 안에서 공정한 관행에 합치되게 인용한 것이고, 통상적인 이용방법과 충돌하지 아니하고 저작자의 정당한 이익을 해치지도 아니하는 경우이므로 저작권법 제28조, 제35조의 3에 따라 허용된다고 할 것입니다.

피고인들의 변호인은 위와 같은 사실 및 법률적 관점에 대하여 원심에서 주장하였지만 원심 재판부는 이에 관하여 눈 길도 주지 아니한채 판단을 유탈하였는바, 상고심에서는 먼저 이 점에 관한 명시적인 판단을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 쟁점은 피고인의 이영인의 향후 연구활동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 다음으로 이 사건에 있어서 피고인들의 진술과 관련 증거에 의하여 인정되는 총공회 교회법의 내용이나 백영희 목사의 반복된 말씀, 설교록 발간에 관한 총공회 차원의 결정, 부산연구소(백영희목회연구소)와 신풍연구소(백영희목회연구회)의 설립경위, 그리고 설교록의 실제 발간 과정 등을 종합하면, 백영희 목사의 설교를 비롯한 백영희 목사의 각종 저작물에 관한 복제권, 전시권, 배포권 등의 저작재산권은 저작권자인 백영희 목사에 의하여 명시적·묵시적으로 포기되었거나 총공회, 서부교회 또는 위 각 연구소에 양도(기증)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위 저작물에 대하여 적어도 피고인 이영인에게는 그 이용허락이 있었다고 보아야 마땅합니다.

⑴ 백영희 목사는 성령의 말씀이자 복음인 자신의 설교 내용이 총공회는 물론 이 세상 끝까지 널리 전파되도록 모든 성도들이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씀하였고, 이를 위해 자신은 모든 것을 다 내어 놓고 평생 무서울 정도로 고집스럽게 성직자 무소유 원칙을 몸으로 실천하였으며, 설교록 발간은 바로 위와 같은 백영희 목사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백영희 목사의 주도에 의한 총공회 차원의 결정에 따라 총공회의 사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백영희 목사의 설교 내용과 관련한 독점적인 저작재산권이 백영희 목사의 평소 말씀과 한결 같은 행동에 의하여 포기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은 총공회 내부에서는 공지의 사실이기도 하거니와 해당 증거들을 인용하여 정리한 사실관계를 통해서도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증제70호~증제77호 참조).

⑵ 백영희 목사의 저작재산권이 본인에 의해 포기된 것이 아니라면, 이는 (장래에 발생할 저작재산권까지 포함하여) 백영희 목사 생전에 백영희 목사에 의하여 독립된 비법인 종교단체인 부산연구소 및 신풍연구소에게 양도(기증)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산연구소와 신풍연구소는 모두 백영희 목사의 말씀과 총공회 결의로 만들어진 독립된 연구기관으로서 선의의 경쟁관계에 있었고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백영희 목사의 교훈과 목회 연구를 목적으로 하여 ① 백영희 목사의 교훈과 목회에 대한 자료의 수집 및 보관, ② 이들 자료에 대한 조직적‧체계적 연구·분석·정리, ③ 상기 연구·정리의 반포 등의 사업을 행하였으며, 백영희 목사의 목회에 관한 자료는 연구소 자산으로서 영구 보존한다고 되어 있고, 더욱이 백영희 목사는 평생 아무런 재산을 보유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였고, 실제로 무소유의 원칙을 고집스러울 정도로 실천하였으며, 총공회 성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가진 것 모두를 교단과 교회에 바쳐 아무 것도 남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소인 백도영의 주장에 의하면, 다른 것은 몰라도 설교 내용에 대한 저작재산권만큼은 백영희 목사의 유산으로 남았다는 취지이나, 이는 백영희 목사의 평소 말씀과 교훈, 연구소의 규약 등에 명백히 배치되는 것이고, 모든 성도들이 백도영의 억지 주장은 거짓이라고 밝혀주고 있으므로(증제70호~증제77호 참조)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백영희 목사의 목회에 관한 자료는 연구소 자산으로 귀속되어 영구 보존된다는 취지의 위 규약의 조항은 피고인 이영인의 위 쟁점사항에 관한 주장을 뚜렷하게 뒷받침하는 자료입니다.

⑶ 만일 앞서 본 바와 같은 저작재산권의 양도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면, 최소한 설교 내용 등에 대한 포괄적인 이용허락은 있었다고 보아야 마땅합니다. 백영희 목사는 평소의 목회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의 설교 테이프 복사를 얼마든지 허용하였고, 한동안 금했던 ‘생명이 없는 말만 전달해서 말 팔아 사복을 차리는 말 판매자, 말 장사, 말 상인’에게도 복사를 허락하였습니다(증제66호 참조). 또한 부산연구소와 신풍연구소에서 백영희 목사의 교훈과 목회에 대한 자료의 수집 및 보관, 이들 자료에 대한 조직적‧체계적 연구·분석·정리, 그 내용의 반포 등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배려를 하였으며, 연구소가 없어질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위와 같은 영구적인 사업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백영희 목사의 위와 같은 포괄적인 이용허락은 사후 상속인들에 의하여 철회될 수도 없는 것이고, 저작재산권이 상속되었다 하더라도 그 이용허락은 상속인들이 줄곧 수인의무를 부담하는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위 이용허락의 경위, 그에 관하여 추정되는 백영희 목사의 생전 의사 등에 비추어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보를 양보하여 유족들이 위 이용허락의 법률관계를 해지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유족은 고소인 백도영 혼자가 아니라 다수인데, 당사자의 일방 또는 쌍방이 수인인 경우의 법률관계 해제나 해지는 그 전원으로부터 또는 전원에 대하여 하여야 하는 것이므로(민법 제547조, 해지‧해제권의 불가분성) 고소인 백도영 혼자서는 위 이용허락의 법률관계를 해지할 수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

⑷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할 대목은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자의 이용허락은 당해 저작권 침해의 성립요건(범죄 구성요건) 충족 내지 그 위법성을 조각시키는 사유이므로 형사판결에서는 이에 관한 당사자 주장의 당부에 관하여 형사소송법 제323조 제2항에 따라 명시적인 판단을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제1심 판결은 물론 원심 판결에도 이 부분에 관한 판단은 없습니다. 변호인은 항소이유서를 통해서도 제1심 판결의 위와 같은 판단유탈의 위법사유를 지적하였으나 원심 역시 그냥 지나침으로써 판단을 유탈하였습니다. 저적물 이용허락에 관한 법리는 저작권법 분야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인데도 제1심 및 원심이 위와 같은 판단유탈의 잘못을 범한 것을 보면 그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나머지 피고인 및 변호인과의 소통을 너무나 소홀히 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특히 원심에서는 채택된 피고인 측 증인 이춘일이 증인신문기일에 출석하였지만 신분증을 지참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바로 증인채택결정을 취소하고 당황한 피고인들이나 변호인의 속행요청도 거부한채 변론을 종결하였는데, 이러한 법정 모습은 앞으로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라. 한편 원심이 유지한 제1심 판결 범죄사실에는 피고인 이영인이 2014. 1. 9. 성명 사용금지 소송의 제1심에서 패소하여 적어도 그 때부터는 저작물인 백영희 목사의 설교를 서적이나 녹음파일 형태로 복제‧전시‧배포하는데 유족들의 동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이 사건 저작재산권의 포기, 양도, 이용허락 등은 백영희 목사의 생전에 있었던 일이고 백영희 목사 사후에 그 유족들과의 관계에서 발생된 일이 아니며, 위 성명 사용금지 소송의 승패가 논리적으로 이 사건 저작재산권 침해 여부를 가리는 직접적인 선결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므로 위 판결 설시는 적절치 않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명 사용금지 소송은 당사자 간에 다툼이 많았던 것이므로 유족들의 동의 여부에 대한 인식의 기준 시점을 성명 사용금지 소송에 관한 대법원 판결 선고시(2017. 5. 17.)가 아니라 그 제1심 판결의 선고시로 본 것도 매우 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마. 따라서 피고인 이영인이 위 설교록 등을 발간‧배포‧전시한 것이 고소인 등 백영희 목사의 유족들의 저작재산권을 침해하였다고 볼 수 없습니다. 원심이 피고인 이영인의 저작권법위반의 점을 유죄로 인정한 것은 채증법칙을 위반하여 사실관계를 오인하였거나 저작권법의 관련 법리를 오해한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사건 저작재산권이 백영희 목사의 유족들에게 상속되지 않았다고 보는 경우(포기, 양도)에는 고소인 백도영이 제기한 이 사건 고소는 피해자의 적법한 고소로 볼 수 없고, 나아가 위 고소가 적법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저작권법 제136조 제1항 제1호 위반에 관한 이 사건 공소제기는 친고죄에 관한 저작권법 제140조 소정의 공소제기 요건을 흠결하여 적법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점도 상고이유로 주장하는 바입니다.

8. 피고인 이영인의 상표법위반의 점에 대하여

가. 피고인 이영인이 백영희 목사의 설교록을 발간·배포하면서 그 책자 이름으로 ‘牧會說敎錄 白永僖’라는 제호를 사용한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원심이 유지한 제1심 판결과 같이 백영희 신앙연구, 백영희 조직신학, 백영희 목회자 양성원 등의 상표를 종교와 관련된 단체 명의로 사용한 적은 없고, 또 ‘백영희 신앙연구’, ‘백영희 조직신학’, ‘백영희 목회자 양성원’ 등은 서비스표등록이 된 ‘백영희 목회연구소’ 또는 상표등록이 된 ‘목회설교록 백영희’와 유사하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원심이 ‘백영희 신앙연구’, ‘백영희 조직신학’, ‘백영희 목회자 양성원’ 등의 사용까지도 상표권 침해로 본 것은 사실관계 및 동일 또는 유사상표의 사용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 다음 피고인 이영인이 발간한 ‘책의 제호’로 사용된 ‘牧會說敎錄 白永僖’는 등록상표의 지정상품과 동일·유사한 상품의 보통명칭·산지·품질‧원재료‧효능‧용도‧생산방법·가공방법·사용방법 등을 보통으로 사용하는 방법으로 표시하는 것이고, 이는 그 책의 내용을 함축성 있게 보통으로 기재한 것에 불과한 이른바 기술적 상표에 불과하여(1986. 10. 28. 선고 85후75 판결 참조) 서적의 내용을 안내‧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어서 상품 출처표시로 사용된 것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2003. 10. 10. 선고 2002다63640 판결, 2011. 1. 13. 선고 2010도5994 판결 등 참조) 상표법 제90조 제1항 제2호, 제3항에 따라 여기에는 부정경쟁의 목적이 없는 한 위 등록상표(등록서비스표)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는 위와 같은 책의 제호 사용에 있어서 부정경쟁의 목적이 있었는지 여부가 주요 쟁점이라 할 것인데, 판례는 상표법 제90조 제3항에 규정된 부정경쟁의 목적이란 상표권자의 신용을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얻을 목적을 말하는 것이고, 단지 등록된 상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와 같은 목적이 있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며, 침해자 측의 상표 선정의 동기, 피침해상표를 알고 있었는지 여부 등 주관적 사정과 상표의 유사성, 피침해상표의 신용상태, 영업목적의 유사성, 영업활동의 지역적 인접성, 상표권 침해자 측의 현실적 사용상태 등 객관적 사정을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1984. 1. 24. 선고 83후69 판결, 2012. 5. 10. 선고 2010후3387 판결 등 참조).

그런데 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백영희 목사의 설교록 발간은 백영희 목사의 말씀과 총공회 차원의 결정에 의하여 총공회의 사업으로 진행된 것이므로 비록 총공회가 분열되었다 하더라도 설교록 발간에 관한 사업만큼은 뿌리가 같은 분열 후의 각 공회에도 그대로 계승되어야 하고, 이는 분열 후의 어느 공회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교회법의 내용으로 되어 있는 점, ② 피고인 이영인은 이 사건 상표등록 이전인 서부교회 편집실 시절부터 ‘목회설교록 백영희’라는 제호가 붙은 설교록 발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총공회 및 서부교회가 분열된 후인 1997년부터는 신풍연구소를 이끌며 독자적으로 위 설교록을 발간한 점, ③ 신풍연구소의 소재지는 여수이고 부산연구소의 소재지는 부산이어서 양자의 활동영역 상 지역적 근접성이 전혀 없으며, 양자가 별개임은 ‘백영희 목회연구회’ 홈페이지에도 밝혀 놓고 있는 점, ④ 비록 부산연구소에서 발간한 설교록과 신풍연구소에서 발간한 설교록의 명칭이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피고인 이영인이 사용한 책의 제호는 앞서 본 바와 같이 지극히 평범한 한자 글씨체로 되어 있고 눈에 띄는 색채를 사용하지도 아니하고 도안화된 특수한 모양이 아니어서 특별한 ‘자타 상품의 식별력’도 없는 점, ⑤ 백순희가 등록한 상표는 상표권자가 백순희 개인 이름으로 되어 있고 비법인 종교단체인 부산연구소(백영희 목회연구소) 명의로 등록되어 있지는 않은 점, ⑥ 백영희 목사의 녹음된 육성 설교를 토씨 하나, 음절 하나도 빠짐 없이 소리 나는 그대로 문자로 옮겨 적은 다음 책으로 엮어내는 참으로 힘든 작업은 백영희 목사의 신앙노선을 굳건히 따르고 실천하며 백영희 목사의 설교 연구와 설교록 발간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는 피고인 이영인만이 꾸준히 계속해 온 점, ⑦ 피고인 이영인이 설교록을 서점을 통해 배부하였지만 이는 종전에 편집실에서 녹음테이프를 제공할 때와 마찬가지로 실비 정도의 비용만을 받았던 것이고, 시장성은 전혀 없으며(피고인 이영인의 검찰진술 증거기록 2441~2442쪽, 제1심 증인 문익섭에 대한 증인신문녹취서 12쪽, 증제85호 등 참조), 그럼에도 설교록 발간을 이어온 것은 총공회 교회법의 법리에 따라 오로지 성령 하나님이 백영희 목사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주신 복음을 널리 전파하려는데 근본 뜻이 있는 점, ⑧ 반세기에 걸친 총공회 역사에서 가장 추앙을 받는 백영희 목사의 녹음된 육성 설교를 소리 나는 그대로 문자로 옮겨 적어서 만든 책에 대하여 그 책의 내용을 함축성 있게 보통으로 표시하는 방법으로 그 제호를 붙이려고 할 경우에는 누구라도 손쉽게 설교를 하신 백영희 목사 이름이 들어가는 ‘목회설교록 백영희’라는 제호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점, ⑨ 백순희(장녀) 측의 옳지 못한 주장(고집)에 의하여 1993년부터 5년 간 설교록의 발간이 중단되었다가 피고인 이영인이 1997. 12. 15. 설교록 88호를 순서(역순)에 따라 출간한 이후부터는 피고인 이영인(신풍연구소)의 설교록 발간 작업은 그 설교록을 뒤에 그대로 베껴서 같은 설교록을 발간한 것에 불과한 부산연구소의 발간 작업보다 훨씬 앞서고 있는 점, ⑩ 따라서 피고인 이영인이 비법인 종교단체인 부산연구소는 물론이고 백순희 개인의 신용을 이용하고 있다고 볼만한 사정은 전혀 없고, 앞서 본 설교록 출간의 실적을 살펴보면 오히려 부산연구소 측에서 피고인 이영인에게 큰 빚을 지고 있거나 그의 노력, 역량, 신용 등에 의지하는 바가 크다고 보아야 하고, 더욱이 백순희 개인으로서는 설교록을 발간한 사실 조차 전혀 없는 점, ⑪ 총공회 및 서부교회 분열 이후의 역사적 사실관계에 의하면, 백순희(장녀)의 이 사건 상표등록은 백순희 개인이 설교록을 발간하고자 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총공회에서 추앙을 받는 백영희 목사의 장녀라는 혈육정실을 내세워 한 지붕 2교회로 분열된 서부교회나 총공회에서 교권장악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대단히 불순한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고, 이는 혈육정실 및 교권 중심 교회를 늘 경계해 온 백영희 목사의 교훈 및 총공회 교회법에도 명백히 반하는 점, ⑫ 고소인 측에서는 피고인 이영인이 ‘백영희 목회연구회’ 명의로 후원금을 모집하기 위한 수단으로 ‘목회설교록 백영희’를 발간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비법인 종교단체인 ‘백영희 목회연구회’에서는 백영희 목사의 설교록 발간을 비롯하여 백영희 목사에 대한 연구 및 그 연구결과의 정리, 반포 등의 순수한 종교활동을 위하여 후원금을 모집하고 있으므로 위 주장은 오히려 본말을 전도한 것이고, 이는 피고인 이영인이 백영희 목사의 청빈하고 올곧은 생활태도를 본받아 경제가 어려운 시골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아들 4명을 모두 초등학교만 보내고 독학을 시킨 사실에 의하여도 뒷받침이 되는 점(증제70호 참조) 등의 제반 주관적 및 객관적 사정에 비추어 보면, 피고인 이영인이 백영희 목사의 설교록을 발간함에 있어서 ‘牧會說敎錄 白永僖’를 책의 이름으로 사용한 데에 부정경쟁의 목적은 결코 없었다고 할 것입니다.

다. 그러므로 피고인 이영인에 대한 상표법위반의 공소사실을 그대로 유죄로 인정한 제1심 판결 및 이를 유지한 원심판결에는 일부 사실관계를 오인하거나 범죄사실의 특정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고(백영희 신앙연구, 백영희 조직신학, 백영희 목회자 양성원에 관한 부분), 또 상표권 침해행위에 관한 법리, 상표법에 규정된 ‘부정경쟁의 목적’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 결과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9. 피고인 이영인의 기부금품의모집및사용에관한법률위반의 점에 대하여

피고인 이영인이 금품을 모금함에 있어서 등록관청에 등록하지 아니한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백영희 목회연구회’에서는 이 사건 공소제기 후 2차례에 걸쳐 기부금품 모집 등록을 위하여 등록청인 전라남도에 등록신청을 하였으나, 전라남도에서는 번번이 ‘백영희 목회연구회’가 신청한 기부금품 모집 신청서의 기부금품 모집계획에 의한 사업은 백영희 신앙노선에 관한 자료 수집, 연구, 출판, 배포 등의 사업 지원 등 종교활동에 관한 사업이어서 위 법률 제4조 소정의 기부금품 모집 등록 대상사업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집등록이 불가하다는 회신을 함으로써 등록거부처분을 하였습니다(증제78호, 증제79호). 그러므로 등록이 불가한 사항에 관하여 등록을 받지 않았다고 하여 피고인 이영인을 유죄로 인정한 제1심 판결 및 원심 판결의 판시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습니다.

법원으로서는 이 부분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하기 위해 선결문제로 된 ‘백영희 목회연구회’의 사업이 종교활동에 관한 사업인지 여부에 관하여 판단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점에 관한 항소이유의 주장에 대하여 판단을 유탈하였고, 이는 결국 기부금품의모집및사용에관한법률 제4조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것으로 보아도 옳을 것입니다.

또한 ‘백영희 목회연구회’는 위 법률 제2조 제1호 나목 소정의 종교단체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가 많으므로 이 점에서도 피고인 이영인의 같은 법 위반의 점은 유죄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10. 피고인 최순련의 방조 여부에 대하여

피고인 최순련은 현재 부산 동천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는 이치영 목사의 처로서 2000. 11. 18. ‘백영희 목회연구회’라는 출판사 등록을 할 때 편의상 그 출판사의 대표 명의자가 되어 달라는 피고인 이영인의 부탁을 남편 이치영을 통하여 전해 듣고 승낙해 준 사실이 있고, 위 출판사 이름으로 책(백영희 목사님의 설교록)이 출간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조범이 성립하려면 최소한 본범의 범죄실행을 인식하고 이를 돕는다는 내심의 의사(이른바 방조의 범의)만큼은 있어야 할 터인데 출판사 등록시 형식상 대표자 명의를 빌려준 것만으로는 본범에 해당하는 피고인 이영인이 원심 판시 각 행위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이를 돕는다는 의사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출판사 등록이 다른 단체(백영희 목회연구회)의 기부금품 모집을 돕는 행위가 되는 것으로 평가하기는 어렵고, 피고인 최순련에게 그러한 내심의 의도도 없었으므로 피고인 이영인의 기부금품의모집및사용에관한법률위반의 점에 대하여서까지 방조의 죄책을 인정한 원심 판단은 도저히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별첨 불기소결정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피고인 최순련과 비슷한 입장에 있던 장천룡, 이치영, 오은정에 대하여는 이들이 피고인 이영인의 위반행위에 대하여 공모하였다거나 방조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모두 혐의없음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피고인 최순련은 고소인 백도영과 피고인 이영인 사이에 벌어졌던 성명사용금지 소송의 진행상황을 지켜 본 것도 아니고 상세한 내막을 잘 알지도 못하므로 피고인 이영인의 저작권법위반 및 상표법위반의 범행을 2014. 1. 9.부터 방조하였다는 것도 수긍할 수 없고 이 부분은 뚜렷한 증거도 없으므로 이 부분에 관한 원심판결도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11. 결론

그러므로 위와 같은 사실오인 및 법리오해의 위법이 있는 원심판결을 파기하여
이 사건을 원심법원으로 환송하여 주시고, 부디 피고인들이 폭주한 대법원의 수 많은 사건 속에서 떠내려가는 일이 없도록 기록을 세심하게 살펴 주시기를 거듭하여 간곡히 호소합니다.

<참고자료 제출 및 그 요지>
1. 불기소결정서(피의자 장천룡, 2018. 10. 5.)
- 2008년 경부터 백영희 목회연구회의 형식상 대표자였던 장천룡이 피고인 이 영인의 위반행위에 대해 공모하였다거나 방조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음
- 목회설교록 65호, 66호 편집인으로 기재된 이치영에 대한 고소사건도 2018. 8. 31. 혐의없음 처분 되었음

1. 불기소결정서(피의자 오은정, 2018. 10. 5.)
- 백영희 목회연구회에서 발행한 책자의 형식상 발행인으로 되어 있던 오은정 이 피고인 이영인의 위반행위에 대해 공모하였다거나 방조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음

1. 판결(피고인 장천룡, 순천지원 2018. 10. 1. 선고 2017고정605 판결)
- 고소인 백도영이 장천룡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한 사건에 대하여 무죄 선고함

2018. 10. 18.

피고인들의 변호인 법무법인 국제
담당변호사 최 진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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