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목회자 - 목회자의 자기 통제와 교인의 목회자 상대
구남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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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2.09
/초기화면/총공회/내부문답/695 질문/에 대한 '/697 답변/' 인용입니다.
목회자가 눈으로 보는 죄를 두고 문답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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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목회자
①목회자 자체는
과거 교인출신입니다.
그가 목회자로 나섰다고 과거 그 교인 시절 그 사람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 자신은 현재도 목회하는 그 교회 여러 교인 중 한 명입니다.
이 사실을 목회자가 망각하면
목회자의 자기착각으로 인해 교만 횡포 단계를 거쳐 교회파멸로 몰아갑니다.
이 사실을 교인들이 망각하면
좋을 때는 목회자를 지나치게 우대하여 모래 위의 집을 건축하게 되고
나쁠 때는 지나친 적대감으로 자기 신앙과 교회 전체를 파멸로 몰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목회자 자체는
그 교회 많은 교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목회자와 교인이 함께 인식하되
교회 안에 목회자 한 사람이 필요하여 교인 중 한 사람이 직책을 맡은 것이며
모두 자기 생업에 바빠서 그 일을 맡지 못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그 일을 맡았으니
목회자는 교인 생활을 하다가 전체를 위해 한 가지 수고를 더하게 된 교인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이 한 가지만 잊지 않는다 해도 교회가 교회 안에서 목회자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순과 문제는 거의 다 해결이 될 것입니다.
②목회자가 가진 직책
목회자 자체는 교인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목회자가 맡게 된 그 직책은 출애굽 이스라엘에게 모세처럼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상대할 때는 그 교회 전체를 생각하고 상대하시고
교인들도 목회자의 설교나 결정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해야 옳고
목회자 자신은 날선 칼을 손에 쥔 줄 알고 그 사용에 극도로 조심을 해야 합니다.
③목회자의 범위
대개 목사나 조사님만 목회자라고 하지만
주일학생을 가르치는 반사나 일반 교인들을 지도하는 구역장도
그 범위가 좀 작고 좁아서 그렇지 목회자와 같은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번 '목회자' 관련 글은 교회 내 목회성격의 직책을 가진 분들
전체의 공통적 입장으로 살폈으면 합니다.
2.목회자의 불행과 행복
①목회자의 가중되는 양심가책
매일 다른 사람에게 죄를 이기고 의롭게 살도록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목회자 자신이 죄를 짓거나 의로 살지 못할 때는 양심의 가책이 심각합니다.
교인시절의 목회자나 목사가 된 목회자나 사람은 그 사람이니
그 단점 그 장점이 목회를 하기 전이나 후나 꼭 같이 자기 속에 있는데
자꾸 남을 가르치다 보니 그때마다 남보다 감당못할 가책을 계속 갖게 됩니다.
②목회자의 자기 죄와 설교
따로 소개하지 않고 해명하지 않는다 해도
평신도가 목회자로 임명받는 그 임명식이 그를 완전자로 만드는 것은 아닌데
사람들은 목회자의 직책을 상대할 때 그 속에 단점보다는 그의 설교를 들으며
목회자 속에 숨겨진 단점과 죄를 잘 볼 수 없습니다.
평범한 일반 교인들은 죄를 회개하라는 목회자를 보면서 목회자는 그런 죄가 없는 줄 오해하거나 아니면 그런 사실을 알아도 자꾸 잊어버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인들은 목회자를 이렇게 좋게 볼 때 신앙이 자랍니다. 이런 면에서 어린 교인들의 오해와 무지는 그 시절 그들의 신앙 성장에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에 대한 이런 호감은 어느날 그 목회자의 죄를 알게 될 때 그 호감이 돌변하여 지나친 좌절을 주게 됩니다. 사실 그 전에 가졌던 호감도 사실보다는 지나친 호감이고, 새로 알게 된 사실 때문에 겪는 좌절도 그렇게까지 좌절할 일이 아닌데 지나치게 반응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목회 현장이기 때문에 목회자의 외부 언행은 조심하는 것이 마땅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자녀가 자기 부모에게는 지나친 호감과 정도 이상의 실망을 가지게 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면으로 신앙은 가정으로 비교하게 됩니다.
목회자도 일반 교인처럼 교인 출신이며 지금도 교인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
목회자는 일반 교인보다 자기 죄를 더 느낄 수밖에 없다는 사실
목회자는 자기를 포함한 교인 전체에게 죄와 의를 가르치는 직책자라는 사실
목회자는 그런 직책 때문에 일반 교인보다 죄와 의에 대한 지식이 앞서 있고
목회자는 그런 지식 때문에 자신을 고치는 데 유리하다는 사실 때문에
③목회자의 불행은
교인이던 시절이나 목회자로 일하는 시절이나 사람은 꼭 같은 그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이 목회자를 너무 지나치게 기대하여 교만으로 불행해지게 되거나
아니면 목회자의 잘못을 가지고 지나치게 외식자나 사기꾼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목회자들이 겪는 불행입니다.
④목회자의 행복은
일반 교인으로 있었더라면
나같은 일반 교인이야 의례 그렇겠지 ... 하든지
그런 양심의 가책을 느낄 틈도 없이 그냥 살아갔을 터인데
남을 가르치기 때문에 보다 밝은 빛을 늘 들고 살게 되고
이 빛 때문에 남들은 몰라도 자기는 자신 속에 있는 단점들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비록 체면 때문에
남들에게 알리지는 않는다 해도
남들이 지적을 하면 그렇지 않은 척하고 넘어가기도 하며
때로는 시침을 딱 떼고 연극도 하지만
그런 외식과 거짓은
한편으로 보면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의 나쁜 단점이지만
한편으로 보면 그 사람이 평신도였다 해도 그 단점은 그렇게 있었을 것인데
남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 단점을 몇 배나 큰 단점으로 가지고 고민해야 하고
결국 자기 속에 잘못을 인지한다면 앞으로 고치는 데에는 나아질 수밖에 없으므로
대개 젊은 목회자는 혈기로 날뛰지만 이런 단점들이 무더기로 쌓여있기 마련이고
대개 목회를 오랫동안 하다 보면 세월 속에 그래도 말씀으로 자기를 고치는 면이 많습니다.
목회자의 행복은
이런 저런 우유곡절을 겪더라도 마침내 목회 나오기 전보다 목회를 했기 때문에
대개는 교인 시절로 끝나는 것보다는 자기 단점과 죄를 더 회개하고 고칠 기회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3.질문의 답을 찾는 방법
①답변의 범위를 넓게 잡은 이유는
목회자 스스로 자신의 죄를 '사람이 짓는 죄'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져오는 위험성 때문입니다. 죄를 상대하되 죄를 죄 이상으로 상대하면 죄와 싸우기도 전에 죄의 꾀에게 당하여 죄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죄를 쉽게 보고 가볍게 생각하는 것도 탈이지만 죄를 죄 이상의 것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 잘못입니다.
즉, 목회자의 죄라는 것을 가지고 너무 자책하는 분들은
목회자의 죄를 일단 교인의 죄와 그 본질은 같은 것으로 알고 상대했으면 합니다.
목회자 속에 있는 죄와 교인 속에 있는 죄가 딴 모습이 아니고 별개의 죄가 아니고
그 종류나 성격이나 그 모든 회개 방법까지 다 같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목회자의 죄는 목회직 때문에 그 결과가 엄청나게 크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목회자의 죄는 아주 특별하게 엄하게 상대하고
그대신 참고 기다리는 면도 특별합니다.
목회직 때문에 다르게 상대하는 것은 있지만
본질적으로 죄는 목회자의 죄나 교인의 죄나 같기 때문에
우선 목회자의 회개는 일반 교인의 일반 죄 차원에서 정밀 분석하고 상대하고
그다음 목회직을 가진 사람이니 목회직에 더해지는 책임을 부가했으면 합니다.
②질문하신 '욕심' 관련 죄에 집중하겠습니다.
죄는 하나님께 벗어난 모든 것이지만
몇 가지 큰 분류로 상대하면 죄를 파악하고 이기고 상대하기 쉬운 면이 있으니
이번 답변에서는 '눈으로 보고 느끼게 되는 죄'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질문자께서 '이성의 정욕'에 관련된 죄를 구체적으로 예를 드셨는데
7계명 죄는 이 홈의 /문의답변/과 /쉬운문답/ 게시판에서 몇 차례 자세히 안내한 바와 같이
이 죄는 그 독성과 전염성이 특별하여 치료한다며 건들이면 그것까지 이용해서 더 강하게 더 멀리 더 깨끗한 곳까지 퍼져가는 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죄를 두고 회개하고 살펴볼 때는 그 죄가 속한 '욕심'의 죄 차원에서 주로 살피고 있습니다.
배고플 때 음식을 두고 느끼는 죄
배가 부르게 되면 눈에 좋은 것이 보일 때 안목의 죄
배부르고 가질 것을 다 가지게 되면 그다음 호사스런 7계의 죄가 나타나는데
이 죄들은 공통적으로 욕심의 죄라는 면으로 상대했으면 합니다.
물론 이때 음식에 대한 욕심은 생명 유지 차원일 때와 다른 평소 식욕입니다.
4.저절로 발생하는 '욕심'의 죄들을 상대하실 때
①보면서 죄를 짓고, 마음에 떠올라서 저절로 짓게 되는 죄
이번 질문의 핵심 내용은
죄와 싸우느냐 마느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에 보이면서 바로 죄짓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경우와 같은 죄를 고민한다고 읽었습니다.
신사참배를 하는 죄 문제라면 시간을 갖고 따져보고 기도하고 고민이라도 하겠는데
눈에 좋은 사람이 보이면 내 마음이 순간적으로 죄를 짓고 있으니
생각할 틈도 어떻게 손쓸 여유도 없이 짓는 죄들이 있고 그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②이런 죄들의 공통적인 원인은 배가 불러서 그렇습니다.
보는 순간, 생각이 나는 순간, 바로 죄로 이어지는 이런 죄들의 공통점은
욕심들이 발동해서 죄로 발전하는 경우입니다.
더 좋은 것을 먹고 싶고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싶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이성의 욕심은 자기 생사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비슷한 경우인데
이런 욕심의 죄들은 아직도 덜 급해서 생긴 죄들입니다.
따라서 생사 문제가 걸리면 전부 다 없어지는 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일으키거나 죽을 병이 들게 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여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문제로 발생하는 죄들은 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급한 순간에도 조금 배부르고 여유가 생기면 그다음에 즉시 볼거리 먹을거리 입을거리 즐길거리를 찾는 것이 타락한 우리의 본능입니다.
③따라서 질문하신 죄는 배불러서 짓는 죄입니다.
시대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평안한 길을 주시며 배부른 환경을 제공하시면
인간은 더 감사해서 더 충성하고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지 않고
반대로 배가 불러서 눈을 옆으로 돌려버립니다.
이런 점 때문에
알고 보면 시대와 교회와 개인에게 평안을 구할 때마다 늘 불안합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의무가 있어 구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지 않아서 문제인가, 우리가 평안을 받아서 문제인가!
그렇다고
6.25처럼, 또는 교회의 부도 직전처럼, 또는 개인에게 암이나 교통사고처럼
급박한 일을 만나면 죽도록 하나님께 부르짖고 어떤 욕심의 죄도 짓지 않는데
그럴 때는 너무 불쌍해서 또 평안을 주셔야 하고 우리도 한번만 봐 주시면 다음에는 있는 힘을 다해서 옆돌아보지 않고 충성하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창조이래 지금까지 늘 반복되는 역사요 현실입니다.
이번 질문을 두고 우리는 다 함께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런 죄는 세밀하게 접근하면 할수록 그 죄에게 먹히게 됩니다.
그대신 역사와 시대를 통해 평안과 배부름의 복이 구원에 도움된 적이 있었던가!
고난과 생사 위험의 환란이 역사 이래 성도에게 구원에 손해된 적이 있었던가!
주님이여!
우리에게 고난이라는 복을 주옵소서!
우리에게 죄를 방어하는 최고의 대장군 환란을 주옵소서!
우리에게 순간도 옆을 돌아보지 않도록 우리 성결을 세밀히 지켜주는 배고픔을 주옵소서!
순식간에 들어오며 생각할 겨를도 없이 습격하여 점령하는 이 욕심의 죄들은
경비원들을 풀어서 지키는 것은 해봐야 효력이 없습니다.
거저 배고파 죽을 만하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고 죽을 병이 걸리면 생각할 여유도 없고 생각하라 해도 몸과 마음이 알아서 벌벌 떨고 피하여 그런 죄가 들어올 틈이 없는데, 우리 안에서 배가 불러오면 외벽을 아무리 높고 강하게 철저히 쌓아도 벌써 성벽안으로 온갖 탐욕의 죄들이 다 들어와서 가득 차 있습니다.
④하나님께서 착수하시느냐, 아니면 나 스스로 미리 조심하느냐는 선택 문제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배부른 상태가 계속되면 우리는 어찌할 바 없이 죄를 짓고
죄를 짓는 것이 반복되면 하나님께서 시계를 보고 계씨다가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되면 초가 녹듯 우리는 몸과 마음이 다 녹아서 죽어버립니다.
그때가 되면 이렇게 복잡한 글이 필요없고 그런 환경을 만난 이들은 죽을 문제가 문제이지 이런 문답으로 고민하는 죄 문제들은 저절로 다 해결됩니다.
만일 그런 환란을 겪어 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만일 그런 환란을 겪기 전에 성경과 주변 환경을 보며 미리 겁이 나는 분이라면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배고픔으로 죄짓지 않도록 고난을 만들어 주시기 전에
스스로 고난을 만들어 자기 집에 자기 양식이 많을 때 절식하는 것이 좋고
목회자가 교회가 평안하고 목회가 안정되어 곁눈을 뜰 수 있을 정도의 평안이 있을 때
다시 한번 개척 초기나 교회의 극단적 어려울 때로 되돌아 가서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질문하신 종류의 죄들은 배부르고 평안해서 생긴 성인병적 죄악들입니다.
부모가 잘 벌고 자녀를 잘 돌보고 가정이 넉넉해서
자녀들이 마음껏 먹고 놀고 자고 하고 싶은 것을 다하게 되면
투쟁력도 생존력도 경쟁력도 활동력도 전부 저하됩니다.
그리고 나면 북쪽에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아도 그 사회와 그 개인 내부적으로
음식이 넘쳐서 혈관 내벽에 찌꺼기들이 쌓여지고
섭취한 영양분들을 배출하지 않으니 비만으로 진행하고
적이 오기도 전에 당뇨와 암과 혈관질환들로 인해서 그에게는 사망이 엄습하는데
그런 심각한 상황을 알기 직전까지는 얼굴이 번들번들해서 보는 사람들마다 살기가 괜찮다고 오히려 부러워하고 난리들입니다. 한 사람을 완전히 잡아버리는 과정이 이렇게 진행합니다.
⑤목회자니까, 목회자라면
일주일 내도록 자기 교인 전부를 심방할 일정을 빽빽하게 짜놓고
하루 50명씩 전도지를 나누는 계획표도 세워두고
정해놓은 기도시간 성경읽기 시간, 설교 시간을 준비하며
연보하는 교인들 중 가장 어려운 분들의 경제형편을 생각해서 목회자가 자기 경제 수준을 교인들 중 가장 어려운 쪽에다 맞추되
그 모든 활동과 계획 속에다
주님 날 위해 가난해지고 욕얻어먹고 마지막 가진 것 다 십자가에 못박은 것에 눌려서 눈물의 감격과 이로 인한 충성할 일에 눈을 부릅뜨게 되면, 질문에서 언급한 죄들은 찾으려 해도 어디 갔는지 흔적도 없을 것이지만, 주님 대속에 팔린 죄책감과 내가 맡은 직책에 열심히 뛰어 다녀야 할 바쁜 일거리, 그리고 먹고 사용하는 경제 수준을 스스로 낮추어 주님이 가난하게 만들어서 나를 깨끗하게 만들기 전, 내가 나를 배고프게 하면 가난해 지기 전에 가난을 미리 가진 사람이므로 하나님께서 가난하게 만들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이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는 모든 종류의 욕심 관련 죄들이 전부 막아집니다.
5.이 홈에서 '백영희신앙노선'을 집중 소개하는 이유 중 하나는
①질문 관련 죄의 방어와 신앙노선
백영희목사님은 이 홈 운영자가 직접 겪어 보고 배우고 알게 된 분 중에는
이런 길을 유일하게 걸어갔던 분이면서 동시에 이런 면을 바로 가르쳐 그 교인들에게 그런 길을 걷도록 한 분이기 때문에 이번 질문자의 내심 고통까지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신앙노선이기 때문입니다.
본인들 혼자 이런 길을 걸어갔던 분들은 시대마다 종종 있어 왔습니다.
또 본인들 뿐 아니라 교인들까지 그렇게 걸어가도록 가르친 분들도 시대마다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그런 길을 가며 교인들을 그렇게 가도록 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가야 하는 면들을 교리로 신조로 또 행정의 원칙으로까지 확립하여 관련 신앙인 전체가 대대로 그런 길을 걸어가게 만든 분은 몇 세대에 한 사람이 있을까 할 만큼 대단한 것인데, 이 홈 운영자가 살고 있는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전반에서는 백목사님이 가장 대표적이므로 이 노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②욕을 해도, 그리고 뭐라 해도
목회자가 이번 질문 내용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면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노선 자체가 잘 먹고 잘 놀자는 교단이라고 하면 그 속에서 목회자가 이런 죄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섣불리 단정하고 싶습니다. 이 노선처럼 또는 이 노선이 아니라 해도 주님 대속에 사무쳐 어떻게 복음을 위해 죽어보고 배고파 볼까 하는 면에 집중을 하는 곳이라면, 그리고 배부르게 되면 사람은 막을래야 막을 수 없는 욕심 관련 죄들이 밀려온다는 것을 알아서 배불리 먹을 수 있는데도 조금이라도 덜 먹고 충성을 할까 하여 죄를 간파하고 상대할 줄 아는 신앙의 걸음, 그리고 교회와 교단 전체 분위기가 경건하여 조심하고 서로 두려워하며 충성하는 분위기가 된다면,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질문하신 죄를 두고 방어할 방법들이 많습니다.
이 노선 목회자가 아니시라 해도, 이 노선의 이런 분위기를 십분 감안하셔서 현재 소속은 그 소속 그대로 계시되 그 속에서 이런 차원으로 자신을 통제하시면 그 죄와 싸울 것도 없이 이길 것이고, 그런 죄와 구체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 그때는 그 죄와 싸우는 법을 가르치는 책을 읽는 순간 이미 그 죄 속으로 들어가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 노선이 아니라 일반 교계에서 목회하면서 자신을 더 배고프게 더 충성하게 더 대속의 사람으로 살면서 고난을 주지도 않는데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어가려 하신다면 주변 목회자들과 여러 사람들 눈에 이상한 사람으로 지목을 받아 그 고통 역시 만만치 않은 고통이 될 것이지만, 적어도 그 죄를 이기는 데에는 이런 방법 외에는 근본적으로 방법이 없음을 잘 인식하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성경이 말씀하신 성도의 광야생활도 알게 될 것입니다. 큰 교단에 속해 있지만 속으로는 혼자 외로운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가면 주변 모든 분들이 질문자 한분으로 모여들고 감화를 받고 진정한 목회자의 길을 보고 본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③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 시대는
질문자께서 말씀하신 그런 안목의 죄를 이기고 싶어도 이길 수 없는 시대가 되었고
그런 죄를 역사 이후로 가장 조장하여 노아 때는 죄가 땅에 가득찼지만 이제 오늘은 죄가 하늘에까지 관영한 때입니다. 교회가 그런 죄를 짓도록 교회 안에서부터 온갖 제도와 프로그램과 설교 내용과 교회 운영 방향을 그렇게 하고 있으니 그 죄를 죄인 줄 아는 것도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지탄 받을 상황이고 그 죄를 상대로 이곳처럼 생각을 한다면 신판 이단이 될 정도입니다.
시대와 달리 말씀만으로 걸어가고 싶다면
소속에 상관없이 우리는 한 성경 한 천국을 가야 할 한 성도들이며 많은 교인들을 책임진 같은 목회자이므로 일반 교인들과 달리 또한 세상의 유행과 조류와 달리, 우리는 이제 소개한 이런 사고방식으로 이런 길을 걸어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고 그렇게 된다면 이런 종류의 죄는 인간이라 순간 찰나 어찌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내 머리 속에 둥지를 틀고 죄를 짓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활을 조금 계속하다 보면 순간적으로 머리 속에 들어오는 것조차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긴장'과 '충성'이라는 2가지 자세를 요청합니다.
마음이 주님 대속에 감사하고 어떻게 주를 위해 고난을 받을까 생각하는 그 생각에 불이 붙으면 우리 마음은 긴장하게 되어 있고, 그다음 우리 몸이 목회자로서 죽도록 해야 할 자기 일에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봐도 보이지 않게 되고 봐도 무엇을 봤는지 모르고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긴장과 육체의 충성스런 부지런함, 둘 중 하나가 잘못되면,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그런 과정을 통해 이길 수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틀림없이 패전하게 되어, 늘 남 모르는 목회자의 자책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긴장되어 있다 해도 몸이 나태해지면 몸이 마음에게 강한 욕구를 전달하여 결국 마음이 무너지게 되어 있고, 몸이 아무리 바쁘게 고난 속에 충성을 한다 해도 마음의 긴장이 따라가지 않으면 그 몸이 바쁘게 활동하다가 잠시 쉬면 그 쉬는 틈에 기다리던 죄가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것이 건강하고 정상적인 인간의 공통점입니다.
다행히도 목회자는 긴장과 충성을 다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장을 가졌습니다. 세상에서 돈을 벌기 위해 날뛰는 사람도 공부로 출세하려는 사람도 먹을 것 다 먹고 볼 것 다 보고 즐길 것을 다 즐길 시간이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들이겠습니까? 그들은 그 목적을 위해 죽도록 뛸 때는 모든 것을 자제하는데 그 목표가 달성되면 한꺼번에 그런 것들이 다 밀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젊은 정치가들일수록 또 시민운동가들일수록 청렴하고 물샐틈없는 도덕성을 자랑하는데 그들이 자기 목표치를 달성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고 나면 더 더러워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런 도덕가 세상 야망가들과 달리 하나님을 목표로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목회자가 세상 정치꾼들이나 시민운동가 차원으로 스스로 직업의식을 낮추는 바람에 이런 현상이 함께 발생하지만 목회자가 진정 목회자의 자세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그럴 틈조차 없습니다.
이 홈에서 제공하는 많은 설교자료들이 있습니다.
그 자료들 전체에서 늘 느끼고 배우며 얻게 되는 것은
한 순간도 마음을 놓지 않는 긴장과 충성입니다. 이 부분이 계속되면, 비록 인간이어서 자기의 특별한 약점 때문에 남보다 더 크게 또 더 자주 실수하는 면이 하나씩 있다 해도 그것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동안에 산기슭 여러 곳에 남아있는 눈과 같아서 그 눈과 얼음이 분명히 눈이며 얼음이지만 봄으로 변화되어 가는 대세를 가진 상황에서는 눈이 아니며 얼음이 아니며 오히려 그런 것들 때문에 더욱 봄이 기다려지고 봄이 봄답게 우리에게 가치있는 모습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답변이 길어져 전체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평소 마음에 담아둔 것만 적어보았습니다.
목회자가 눈으로 보는 죄를 두고 문답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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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목회자
①목회자 자체는
과거 교인출신입니다.
그가 목회자로 나섰다고 과거 그 교인 시절 그 사람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 자신은 현재도 목회하는 그 교회 여러 교인 중 한 명입니다.
이 사실을 목회자가 망각하면
목회자의 자기착각으로 인해 교만 횡포 단계를 거쳐 교회파멸로 몰아갑니다.
이 사실을 교인들이 망각하면
좋을 때는 목회자를 지나치게 우대하여 모래 위의 집을 건축하게 되고
나쁠 때는 지나친 적대감으로 자기 신앙과 교회 전체를 파멸로 몰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목회자 자체는
그 교회 많은 교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목회자와 교인이 함께 인식하되
교회 안에 목회자 한 사람이 필요하여 교인 중 한 사람이 직책을 맡은 것이며
모두 자기 생업에 바빠서 그 일을 맡지 못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그 일을 맡았으니
목회자는 교인 생활을 하다가 전체를 위해 한 가지 수고를 더하게 된 교인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이 한 가지만 잊지 않는다 해도 교회가 교회 안에서 목회자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순과 문제는 거의 다 해결이 될 것입니다.
②목회자가 가진 직책
목회자 자체는 교인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목회자가 맡게 된 그 직책은 출애굽 이스라엘에게 모세처럼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상대할 때는 그 교회 전체를 생각하고 상대하시고
교인들도 목회자의 설교나 결정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해야 옳고
목회자 자신은 날선 칼을 손에 쥔 줄 알고 그 사용에 극도로 조심을 해야 합니다.
③목회자의 범위
대개 목사나 조사님만 목회자라고 하지만
주일학생을 가르치는 반사나 일반 교인들을 지도하는 구역장도
그 범위가 좀 작고 좁아서 그렇지 목회자와 같은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번 '목회자' 관련 글은 교회 내 목회성격의 직책을 가진 분들
전체의 공통적 입장으로 살폈으면 합니다.
2.목회자의 불행과 행복
①목회자의 가중되는 양심가책
매일 다른 사람에게 죄를 이기고 의롭게 살도록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목회자 자신이 죄를 짓거나 의로 살지 못할 때는 양심의 가책이 심각합니다.
교인시절의 목회자나 목사가 된 목회자나 사람은 그 사람이니
그 단점 그 장점이 목회를 하기 전이나 후나 꼭 같이 자기 속에 있는데
자꾸 남을 가르치다 보니 그때마다 남보다 감당못할 가책을 계속 갖게 됩니다.
②목회자의 자기 죄와 설교
따로 소개하지 않고 해명하지 않는다 해도
평신도가 목회자로 임명받는 그 임명식이 그를 완전자로 만드는 것은 아닌데
사람들은 목회자의 직책을 상대할 때 그 속에 단점보다는 그의 설교를 들으며
목회자 속에 숨겨진 단점과 죄를 잘 볼 수 없습니다.
평범한 일반 교인들은 죄를 회개하라는 목회자를 보면서 목회자는 그런 죄가 없는 줄 오해하거나 아니면 그런 사실을 알아도 자꾸 잊어버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인들은 목회자를 이렇게 좋게 볼 때 신앙이 자랍니다. 이런 면에서 어린 교인들의 오해와 무지는 그 시절 그들의 신앙 성장에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에 대한 이런 호감은 어느날 그 목회자의 죄를 알게 될 때 그 호감이 돌변하여 지나친 좌절을 주게 됩니다. 사실 그 전에 가졌던 호감도 사실보다는 지나친 호감이고, 새로 알게 된 사실 때문에 겪는 좌절도 그렇게까지 좌절할 일이 아닌데 지나치게 반응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목회 현장이기 때문에 목회자의 외부 언행은 조심하는 것이 마땅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자녀가 자기 부모에게는 지나친 호감과 정도 이상의 실망을 가지게 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면으로 신앙은 가정으로 비교하게 됩니다.
목회자도 일반 교인처럼 교인 출신이며 지금도 교인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
목회자는 일반 교인보다 자기 죄를 더 느낄 수밖에 없다는 사실
목회자는 자기를 포함한 교인 전체에게 죄와 의를 가르치는 직책자라는 사실
목회자는 그런 직책 때문에 일반 교인보다 죄와 의에 대한 지식이 앞서 있고
목회자는 그런 지식 때문에 자신을 고치는 데 유리하다는 사실 때문에
③목회자의 불행은
교인이던 시절이나 목회자로 일하는 시절이나 사람은 꼭 같은 그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이 목회자를 너무 지나치게 기대하여 교만으로 불행해지게 되거나
아니면 목회자의 잘못을 가지고 지나치게 외식자나 사기꾼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목회자들이 겪는 불행입니다.
④목회자의 행복은
일반 교인으로 있었더라면
나같은 일반 교인이야 의례 그렇겠지 ... 하든지
그런 양심의 가책을 느낄 틈도 없이 그냥 살아갔을 터인데
남을 가르치기 때문에 보다 밝은 빛을 늘 들고 살게 되고
이 빛 때문에 남들은 몰라도 자기는 자신 속에 있는 단점들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비록 체면 때문에
남들에게 알리지는 않는다 해도
남들이 지적을 하면 그렇지 않은 척하고 넘어가기도 하며
때로는 시침을 딱 떼고 연극도 하지만
그런 외식과 거짓은
한편으로 보면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의 나쁜 단점이지만
한편으로 보면 그 사람이 평신도였다 해도 그 단점은 그렇게 있었을 것인데
남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 단점을 몇 배나 큰 단점으로 가지고 고민해야 하고
결국 자기 속에 잘못을 인지한다면 앞으로 고치는 데에는 나아질 수밖에 없으므로
대개 젊은 목회자는 혈기로 날뛰지만 이런 단점들이 무더기로 쌓여있기 마련이고
대개 목회를 오랫동안 하다 보면 세월 속에 그래도 말씀으로 자기를 고치는 면이 많습니다.
목회자의 행복은
이런 저런 우유곡절을 겪더라도 마침내 목회 나오기 전보다 목회를 했기 때문에
대개는 교인 시절로 끝나는 것보다는 자기 단점과 죄를 더 회개하고 고칠 기회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3.질문의 답을 찾는 방법
①답변의 범위를 넓게 잡은 이유는
목회자 스스로 자신의 죄를 '사람이 짓는 죄'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져오는 위험성 때문입니다. 죄를 상대하되 죄를 죄 이상으로 상대하면 죄와 싸우기도 전에 죄의 꾀에게 당하여 죄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죄를 쉽게 보고 가볍게 생각하는 것도 탈이지만 죄를 죄 이상의 것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 잘못입니다.
즉, 목회자의 죄라는 것을 가지고 너무 자책하는 분들은
목회자의 죄를 일단 교인의 죄와 그 본질은 같은 것으로 알고 상대했으면 합니다.
목회자 속에 있는 죄와 교인 속에 있는 죄가 딴 모습이 아니고 별개의 죄가 아니고
그 종류나 성격이나 그 모든 회개 방법까지 다 같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목회자의 죄는 목회직 때문에 그 결과가 엄청나게 크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목회자의 죄는 아주 특별하게 엄하게 상대하고
그대신 참고 기다리는 면도 특별합니다.
목회직 때문에 다르게 상대하는 것은 있지만
본질적으로 죄는 목회자의 죄나 교인의 죄나 같기 때문에
우선 목회자의 회개는 일반 교인의 일반 죄 차원에서 정밀 분석하고 상대하고
그다음 목회직을 가진 사람이니 목회직에 더해지는 책임을 부가했으면 합니다.
②질문하신 '욕심' 관련 죄에 집중하겠습니다.
죄는 하나님께 벗어난 모든 것이지만
몇 가지 큰 분류로 상대하면 죄를 파악하고 이기고 상대하기 쉬운 면이 있으니
이번 답변에서는 '눈으로 보고 느끼게 되는 죄'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질문자께서 '이성의 정욕'에 관련된 죄를 구체적으로 예를 드셨는데
7계명 죄는 이 홈의 /문의답변/과 /쉬운문답/ 게시판에서 몇 차례 자세히 안내한 바와 같이
이 죄는 그 독성과 전염성이 특별하여 치료한다며 건들이면 그것까지 이용해서 더 강하게 더 멀리 더 깨끗한 곳까지 퍼져가는 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죄를 두고 회개하고 살펴볼 때는 그 죄가 속한 '욕심'의 죄 차원에서 주로 살피고 있습니다.
배고플 때 음식을 두고 느끼는 죄
배가 부르게 되면 눈에 좋은 것이 보일 때 안목의 죄
배부르고 가질 것을 다 가지게 되면 그다음 호사스런 7계의 죄가 나타나는데
이 죄들은 공통적으로 욕심의 죄라는 면으로 상대했으면 합니다.
물론 이때 음식에 대한 욕심은 생명 유지 차원일 때와 다른 평소 식욕입니다.
4.저절로 발생하는 '욕심'의 죄들을 상대하실 때
①보면서 죄를 짓고, 마음에 떠올라서 저절로 짓게 되는 죄
이번 질문의 핵심 내용은
죄와 싸우느냐 마느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에 보이면서 바로 죄짓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경우와 같은 죄를 고민한다고 읽었습니다.
신사참배를 하는 죄 문제라면 시간을 갖고 따져보고 기도하고 고민이라도 하겠는데
눈에 좋은 사람이 보이면 내 마음이 순간적으로 죄를 짓고 있으니
생각할 틈도 어떻게 손쓸 여유도 없이 짓는 죄들이 있고 그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②이런 죄들의 공통적인 원인은 배가 불러서 그렇습니다.
보는 순간, 생각이 나는 순간, 바로 죄로 이어지는 이런 죄들의 공통점은
욕심들이 발동해서 죄로 발전하는 경우입니다.
더 좋은 것을 먹고 싶고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싶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이성의 욕심은 자기 생사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비슷한 경우인데
이런 욕심의 죄들은 아직도 덜 급해서 생긴 죄들입니다.
따라서 생사 문제가 걸리면 전부 다 없어지는 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일으키거나 죽을 병이 들게 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여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문제로 발생하는 죄들은 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급한 순간에도 조금 배부르고 여유가 생기면 그다음에 즉시 볼거리 먹을거리 입을거리 즐길거리를 찾는 것이 타락한 우리의 본능입니다.
③따라서 질문하신 죄는 배불러서 짓는 죄입니다.
시대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평안한 길을 주시며 배부른 환경을 제공하시면
인간은 더 감사해서 더 충성하고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지 않고
반대로 배가 불러서 눈을 옆으로 돌려버립니다.
이런 점 때문에
알고 보면 시대와 교회와 개인에게 평안을 구할 때마다 늘 불안합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의무가 있어 구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지 않아서 문제인가, 우리가 평안을 받아서 문제인가!
그렇다고
6.25처럼, 또는 교회의 부도 직전처럼, 또는 개인에게 암이나 교통사고처럼
급박한 일을 만나면 죽도록 하나님께 부르짖고 어떤 욕심의 죄도 짓지 않는데
그럴 때는 너무 불쌍해서 또 평안을 주셔야 하고 우리도 한번만 봐 주시면 다음에는 있는 힘을 다해서 옆돌아보지 않고 충성하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창조이래 지금까지 늘 반복되는 역사요 현실입니다.
이번 질문을 두고 우리는 다 함께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런 죄는 세밀하게 접근하면 할수록 그 죄에게 먹히게 됩니다.
그대신 역사와 시대를 통해 평안과 배부름의 복이 구원에 도움된 적이 있었던가!
고난과 생사 위험의 환란이 역사 이래 성도에게 구원에 손해된 적이 있었던가!
주님이여!
우리에게 고난이라는 복을 주옵소서!
우리에게 죄를 방어하는 최고의 대장군 환란을 주옵소서!
우리에게 순간도 옆을 돌아보지 않도록 우리 성결을 세밀히 지켜주는 배고픔을 주옵소서!
순식간에 들어오며 생각할 겨를도 없이 습격하여 점령하는 이 욕심의 죄들은
경비원들을 풀어서 지키는 것은 해봐야 효력이 없습니다.
거저 배고파 죽을 만하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고 죽을 병이 걸리면 생각할 여유도 없고 생각하라 해도 몸과 마음이 알아서 벌벌 떨고 피하여 그런 죄가 들어올 틈이 없는데, 우리 안에서 배가 불러오면 외벽을 아무리 높고 강하게 철저히 쌓아도 벌써 성벽안으로 온갖 탐욕의 죄들이 다 들어와서 가득 차 있습니다.
④하나님께서 착수하시느냐, 아니면 나 스스로 미리 조심하느냐는 선택 문제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배부른 상태가 계속되면 우리는 어찌할 바 없이 죄를 짓고
죄를 짓는 것이 반복되면 하나님께서 시계를 보고 계씨다가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되면 초가 녹듯 우리는 몸과 마음이 다 녹아서 죽어버립니다.
그때가 되면 이렇게 복잡한 글이 필요없고 그런 환경을 만난 이들은 죽을 문제가 문제이지 이런 문답으로 고민하는 죄 문제들은 저절로 다 해결됩니다.
만일 그런 환란을 겪어 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만일 그런 환란을 겪기 전에 성경과 주변 환경을 보며 미리 겁이 나는 분이라면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배고픔으로 죄짓지 않도록 고난을 만들어 주시기 전에
스스로 고난을 만들어 자기 집에 자기 양식이 많을 때 절식하는 것이 좋고
목회자가 교회가 평안하고 목회가 안정되어 곁눈을 뜰 수 있을 정도의 평안이 있을 때
다시 한번 개척 초기나 교회의 극단적 어려울 때로 되돌아 가서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질문하신 종류의 죄들은 배부르고 평안해서 생긴 성인병적 죄악들입니다.
부모가 잘 벌고 자녀를 잘 돌보고 가정이 넉넉해서
자녀들이 마음껏 먹고 놀고 자고 하고 싶은 것을 다하게 되면
투쟁력도 생존력도 경쟁력도 활동력도 전부 저하됩니다.
그리고 나면 북쪽에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아도 그 사회와 그 개인 내부적으로
음식이 넘쳐서 혈관 내벽에 찌꺼기들이 쌓여지고
섭취한 영양분들을 배출하지 않으니 비만으로 진행하고
적이 오기도 전에 당뇨와 암과 혈관질환들로 인해서 그에게는 사망이 엄습하는데
그런 심각한 상황을 알기 직전까지는 얼굴이 번들번들해서 보는 사람들마다 살기가 괜찮다고 오히려 부러워하고 난리들입니다. 한 사람을 완전히 잡아버리는 과정이 이렇게 진행합니다.
⑤목회자니까, 목회자라면
일주일 내도록 자기 교인 전부를 심방할 일정을 빽빽하게 짜놓고
하루 50명씩 전도지를 나누는 계획표도 세워두고
정해놓은 기도시간 성경읽기 시간, 설교 시간을 준비하며
연보하는 교인들 중 가장 어려운 분들의 경제형편을 생각해서 목회자가 자기 경제 수준을 교인들 중 가장 어려운 쪽에다 맞추되
그 모든 활동과 계획 속에다
주님 날 위해 가난해지고 욕얻어먹고 마지막 가진 것 다 십자가에 못박은 것에 눌려서 눈물의 감격과 이로 인한 충성할 일에 눈을 부릅뜨게 되면, 질문에서 언급한 죄들은 찾으려 해도 어디 갔는지 흔적도 없을 것이지만, 주님 대속에 팔린 죄책감과 내가 맡은 직책에 열심히 뛰어 다녀야 할 바쁜 일거리, 그리고 먹고 사용하는 경제 수준을 스스로 낮추어 주님이 가난하게 만들어서 나를 깨끗하게 만들기 전, 내가 나를 배고프게 하면 가난해 지기 전에 가난을 미리 가진 사람이므로 하나님께서 가난하게 만들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이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는 모든 종류의 욕심 관련 죄들이 전부 막아집니다.
5.이 홈에서 '백영희신앙노선'을 집중 소개하는 이유 중 하나는
①질문 관련 죄의 방어와 신앙노선
백영희목사님은 이 홈 운영자가 직접 겪어 보고 배우고 알게 된 분 중에는
이런 길을 유일하게 걸어갔던 분이면서 동시에 이런 면을 바로 가르쳐 그 교인들에게 그런 길을 걷도록 한 분이기 때문에 이번 질문자의 내심 고통까지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신앙노선이기 때문입니다.
본인들 혼자 이런 길을 걸어갔던 분들은 시대마다 종종 있어 왔습니다.
또 본인들 뿐 아니라 교인들까지 그렇게 걸어가도록 가르친 분들도 시대마다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그런 길을 가며 교인들을 그렇게 가도록 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가야 하는 면들을 교리로 신조로 또 행정의 원칙으로까지 확립하여 관련 신앙인 전체가 대대로 그런 길을 걸어가게 만든 분은 몇 세대에 한 사람이 있을까 할 만큼 대단한 것인데, 이 홈 운영자가 살고 있는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전반에서는 백목사님이 가장 대표적이므로 이 노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②욕을 해도, 그리고 뭐라 해도
목회자가 이번 질문 내용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면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노선 자체가 잘 먹고 잘 놀자는 교단이라고 하면 그 속에서 목회자가 이런 죄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섣불리 단정하고 싶습니다. 이 노선처럼 또는 이 노선이 아니라 해도 주님 대속에 사무쳐 어떻게 복음을 위해 죽어보고 배고파 볼까 하는 면에 집중을 하는 곳이라면, 그리고 배부르게 되면 사람은 막을래야 막을 수 없는 욕심 관련 죄들이 밀려온다는 것을 알아서 배불리 먹을 수 있는데도 조금이라도 덜 먹고 충성을 할까 하여 죄를 간파하고 상대할 줄 아는 신앙의 걸음, 그리고 교회와 교단 전체 분위기가 경건하여 조심하고 서로 두려워하며 충성하는 분위기가 된다면,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질문하신 죄를 두고 방어할 방법들이 많습니다.
이 노선 목회자가 아니시라 해도, 이 노선의 이런 분위기를 십분 감안하셔서 현재 소속은 그 소속 그대로 계시되 그 속에서 이런 차원으로 자신을 통제하시면 그 죄와 싸울 것도 없이 이길 것이고, 그런 죄와 구체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 그때는 그 죄와 싸우는 법을 가르치는 책을 읽는 순간 이미 그 죄 속으로 들어가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 노선이 아니라 일반 교계에서 목회하면서 자신을 더 배고프게 더 충성하게 더 대속의 사람으로 살면서 고난을 주지도 않는데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어가려 하신다면 주변 목회자들과 여러 사람들 눈에 이상한 사람으로 지목을 받아 그 고통 역시 만만치 않은 고통이 될 것이지만, 적어도 그 죄를 이기는 데에는 이런 방법 외에는 근본적으로 방법이 없음을 잘 인식하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성경이 말씀하신 성도의 광야생활도 알게 될 것입니다. 큰 교단에 속해 있지만 속으로는 혼자 외로운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가면 주변 모든 분들이 질문자 한분으로 모여들고 감화를 받고 진정한 목회자의 길을 보고 본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③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 시대는
질문자께서 말씀하신 그런 안목의 죄를 이기고 싶어도 이길 수 없는 시대가 되었고
그런 죄를 역사 이후로 가장 조장하여 노아 때는 죄가 땅에 가득찼지만 이제 오늘은 죄가 하늘에까지 관영한 때입니다. 교회가 그런 죄를 짓도록 교회 안에서부터 온갖 제도와 프로그램과 설교 내용과 교회 운영 방향을 그렇게 하고 있으니 그 죄를 죄인 줄 아는 것도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지탄 받을 상황이고 그 죄를 상대로 이곳처럼 생각을 한다면 신판 이단이 될 정도입니다.
시대와 달리 말씀만으로 걸어가고 싶다면
소속에 상관없이 우리는 한 성경 한 천국을 가야 할 한 성도들이며 많은 교인들을 책임진 같은 목회자이므로 일반 교인들과 달리 또한 세상의 유행과 조류와 달리, 우리는 이제 소개한 이런 사고방식으로 이런 길을 걸어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고 그렇게 된다면 이런 종류의 죄는 인간이라 순간 찰나 어찌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내 머리 속에 둥지를 틀고 죄를 짓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활을 조금 계속하다 보면 순간적으로 머리 속에 들어오는 것조차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긴장'과 '충성'이라는 2가지 자세를 요청합니다.
마음이 주님 대속에 감사하고 어떻게 주를 위해 고난을 받을까 생각하는 그 생각에 불이 붙으면 우리 마음은 긴장하게 되어 있고, 그다음 우리 몸이 목회자로서 죽도록 해야 할 자기 일에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봐도 보이지 않게 되고 봐도 무엇을 봤는지 모르고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긴장과 육체의 충성스런 부지런함, 둘 중 하나가 잘못되면,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그런 과정을 통해 이길 수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틀림없이 패전하게 되어, 늘 남 모르는 목회자의 자책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긴장되어 있다 해도 몸이 나태해지면 몸이 마음에게 강한 욕구를 전달하여 결국 마음이 무너지게 되어 있고, 몸이 아무리 바쁘게 고난 속에 충성을 한다 해도 마음의 긴장이 따라가지 않으면 그 몸이 바쁘게 활동하다가 잠시 쉬면 그 쉬는 틈에 기다리던 죄가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것이 건강하고 정상적인 인간의 공통점입니다.
다행히도 목회자는 긴장과 충성을 다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장을 가졌습니다. 세상에서 돈을 벌기 위해 날뛰는 사람도 공부로 출세하려는 사람도 먹을 것 다 먹고 볼 것 다 보고 즐길 것을 다 즐길 시간이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들이겠습니까? 그들은 그 목적을 위해 죽도록 뛸 때는 모든 것을 자제하는데 그 목표가 달성되면 한꺼번에 그런 것들이 다 밀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젊은 정치가들일수록 또 시민운동가들일수록 청렴하고 물샐틈없는 도덕성을 자랑하는데 그들이 자기 목표치를 달성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고 나면 더 더러워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런 도덕가 세상 야망가들과 달리 하나님을 목표로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목회자가 세상 정치꾼들이나 시민운동가 차원으로 스스로 직업의식을 낮추는 바람에 이런 현상이 함께 발생하지만 목회자가 진정 목회자의 자세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그럴 틈조차 없습니다.
이 홈에서 제공하는 많은 설교자료들이 있습니다.
그 자료들 전체에서 늘 느끼고 배우며 얻게 되는 것은
한 순간도 마음을 놓지 않는 긴장과 충성입니다. 이 부분이 계속되면, 비록 인간이어서 자기의 특별한 약점 때문에 남보다 더 크게 또 더 자주 실수하는 면이 하나씩 있다 해도 그것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동안에 산기슭 여러 곳에 남아있는 눈과 같아서 그 눈과 얼음이 분명히 눈이며 얼음이지만 봄으로 변화되어 가는 대세를 가진 상황에서는 눈이 아니며 얼음이 아니며 오히려 그런 것들 때문에 더욱 봄이 기다려지고 봄이 봄답게 우리에게 가치있는 모습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답변이 길어져 전체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평소 마음에 담아둔 것만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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