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새장 속의 새 잡아 먹는 고양이의 영악, 전략

구남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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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7.23
1. 호랑이와 고양이

이 나라 우리에게는 호랑이가 최고의 맹수입니다.
덩치와 날랜 몸놀림에다 이빨과 앞발의 타격을 갖춘 호랑이는 맞상대가 없습니다.
사자와 비교할 때 호랑이는 날쌘 몸놀림과 함께 비상한 두뇌를 가진 면에서 탁월합니다.

갖가지 짐승을 통해 우리 인간의 갖가지 인격을 느끼도록 가르치는 면이 있으니
호랑이도 우리에게 필요해서 주신 짐승인데
사자와 달리 자연상태에서 호랑이를 관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우리에게 호랑이를 수십 분지 일로 축소하여 호랑이를 미루어 살펴보게 하셨으니
고양이가 바로 호랑이의 축소판입니다.


2. 고양이의 새사냥

호랑이가 새사냥을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고양이가 새사냥하는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호랑이 이야기를 먼저 길게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가 성경의 사자를 연상하며 참고할 때 호랑이가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신앙세계를 잘 설명한 천로역정의 사자 이야기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보면 틀림없이 나를 삼킬 것 같아도 내가 진리의 외길만 걸어가면
그 사자는 나를 침노할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일정한 길의 줄로 묶어 두었습니다.

지금 우리 이야기는 고양이의 새사냥입니다.
고양이는 야생 상태에서 새사냥을 즐깁니다.
순간도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날짐승을 제 아무리 날쌔다 해도 어떻게 땅짐승이 잡겠는가?

그러나 한번만 세심히 관찰해 보면 무릎을 치며 '아하!' 하고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고양이가 새를 점찍게 되면 집요하게 쳐다만 봅니다.
새가 정처없이 멀리만 다닐 듯 해도 고양이가 노리는 텃새들은 그 행동 반경이 얼마되지 않습니다.
조금만 차분히 지켜보면 움직이는 동선과 또 머무는 습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새를 잡는 고양이는
목적의식, 인내심, 괄찰력, 문제해결 능력, 그리고 기회 포착의 순간 대응력에서 감탄할 정도입니다.
그래도 도심에서 사는 분들께는 이런 볼거리가 없을 듯 합니다.


3. 고양이의 새장 속 새사냥

야생의 새사냥은 관찰하기 어렵다 해도 도심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사냥이 있습니다.
고양이의 새장 속 새사냥입니다.
1 센티 간격의 촘촘한 쇠철장 속에 들어 있는 새를 고양이가 끄집어 내어 먹어 치웁니다.

우선 고양이는 주인의 눈치를 살핍니다.
그리고 조용히 때를 잡습니다. 주인이 장기 외출하는 경우 아니면 밤중이 가장 좋은 때입니다.

우선 새장의 한쪽을 칩니다.
그러면 새들은 전부 반대편으로 화들짝 놀라며 쏠립니다.
고양이는 이미 새들의 그런 반응을 알기 때문에 한쪽을 친 것은 사력을 다한 것이 아니고
치는 척만 한 것이고 실은 그 동작 다음에 이어질 반대쪽으로 돌아가는데 힘을 다 쏟습니다. 2-3번만 사방을 돌아치게 되면 새는 이쪽에서 저 끝으로, 다시 반대 끝으로 찰싹 찰싹 달라붙어가며 정신없이 끝에서 끝으로 움직입니다.

몇 번을 정신없이 사방을 치게 되면 새장 끝까지 도망 간 새의 날개 쭉지가 창살 밖으로 삐쳐 나오게 되고 그 순간 고양이는 여지없이 쭉 찢어 당깁니다. 새는 깃털로 쌓였을 때 덩치가 커보여도 벗겨 놓으면 별 것 없습니다. 창살 밖으로 무참하게 잡혀 나가서 고양이 입에 들어갑니다.

결론적으로
철장 속에 보호되는 새가 고양이에게 잡혀 나간 것은
고양이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새의 반응과 행동이 얼마나 빠른지 자기 행동의 다음 단계를 생각할 틈도 없을 만큼 순식간에 반대쪽으로 이동한 새의 날쌘 행동이 고양이 밥이 된 원인이라 하겠습니다.



4. 사탄의 성도 사냥

대속을 입은 성도는 철장과 같은 절대성의 보호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
사탄이 어떤 힘으로도 우리에게 털끝 하나 손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고양이보다 더 영리한 사탄은 주님의 대속의 철장같은 보호를 이길 수는 없지만
성도가 철장 밖으로 행동 하나를 벗어나게 되면 그 순간 그 행동 하나를 낚아 챌 수는 있습니다.

건설구원적으로 말한다면
대속의 왕권은 사탄이 접근도 할 수 없으나
대속을 입은 성도가 실제 생활 속에서 분주복잡하게 움직이다가 자기 행동이 대속을 잃어버리고 신앙의 방향에서 탈선할 수 있습니다.

교계의 신앙 없는 이들을 동원하여
믿는 성도들을 이리 쓸고 저리 몰아가며 제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듭니다.
좌로 치우쳐도 우로 치우쳐도, 신앙의 원래 갈 길에서 이탈되면 탈선입니다.
새장 속의 새가 새장 가운데만 딱 버티고 지키면 고양이의 위협과 공격은 철장에 막혀 그림 속의 호랑이밖에 되지 않습니다.

왼쪽에서 자기 얼굴을 향해 고양이의 왼발이 휘둘러치면
그 고양이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슨 목적인지 새대가리 밖에 안되는 새 수준으로는 휘둘러 치는 모습에 놀라서 덮어놓고 반대쪽으로 찰싹 달라붙어 오돌오돌 떨며 다음 행동에 대하여 또 도망칠 반대방향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양이는 그런 새 수준의 대응을 미리 읽고 장난삼아 몇 번 치고 새 한 마리 간단히 잡아챕니다.


5. 오늘 예배당을 갖지 않는 교회가 있다며 크게 소개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교회가 원할 때 교회가 예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장소적으로는 예배당 확보입니다.
천주교로부터 탈출할 때 우리 교회들의 첫 소원이 '양심자유' 그리고 '교회자유'였습니다.
지금 모든 장로교 헌법의 제1조와 제2조에 기록된 원칙입니다.

남 때문에 하나님 섬기는 나의 자유를 방해받지 않겠다!
이것이 '양심자유' 또는 '신앙자유'라는 제1 원칙이고
교회 밖의 다른 세력에게 우리 교회가 하나님 섬기는 자유를 손해보지 않겠다!
이것이 '교회자유' 또는 '개교회자유주의'라고 하는 제2 원칙입니다.

이것이 오늘 '기독교'라고 이름을 붙인 우리 개신교 전체의 출발 정신입니다.
이 정신이 영국에서 핍박을 받을 때 청교도 이름으로 그들은 미국을 향했고
그곳에서 교회를 건설하며 개인의 신앙자유 교회의 개교회 자유를 그토록 강하게 외쳤으며
그들은 이 2가지 자유를 신앙의 절대 자유로 내걸고 오늘까지 귀한 신앙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교회가 예배당을 교회 보유 재산으로 확보하지 않고 항상 예배당을 남의 집에 세들어 살겠다고 하면서 이것을 무슨 큰 자랑으로 우리에게 선전하는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당황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예배당 건물이야 오늘 신약 우리에게는 예배 보는 장소의 의미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당 건물이 교회가 소유한 부동산이라면 교회의 예배 자유가 확보되는 것이고 만일 교회 외부 세력에게 예배당을 세내고 빌려 사용하게 되면 주인의 마음에 따라 항상 예배가 유동적이 될 수 있는데, 왜 교회가 예배당을 구입해서 예배자유의 안정적 확보를 포기하는 것이 잘 믿는 특수한 신앙처럼 여겨지는 이런 현실이 닥쳤을까?


6. 물론 예배당의 구약 성전화 폐단 때문에 나온 반발이겠지만

원인이 나쁘면 그것을 상대로 반발한 것은 전부 의가 되겠는가?
철없는 아이들의 가출 심리나 배우자 불륜에 맞바람치기 같은 자멸행위의 원인을 살펴보면
반발심입니다.

교회가 본연을 잊어버리고 천주교 성당처럼 구약성전처럼 착각하여 예배당 건축 지상주의로 치우친 폐단도 큰 죄겠지만, 그 폐단에 반발하여 이번에는 교회가 예배당을 소유하지 않겠다며 새장의 반대쪽 끝으로 날아가 찰싹 들어붙게 되면 왼편을 때린 사탄을 피하여 안전한 장소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게 경제자유를 주지 않으면 무리해서 예배당을 구입할 수 없고
예배자유를 확보하지 못해도 세들어 예배당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에게 예배당 마련의 경제를 주신다면, 그래도 내 고집으로 내 어릴 때 아픈 기억만 되새기며 평생 반발심으로 사는 사람처럼 예배당의 자유를 갖지 않겠다고 해야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낮추시는데 올라가려는 것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죄악심리지만, 가끔 하나님께서 높히시는데 굳이 자기를 낮추는 이들도 있고 그 모습이 의인 같은데 모세가 아론을 데려가게 된 것처럼 멀리 훗날을 계산할 때 크나큰 폐단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예배당 건축을 두고 오늘 우리 교회들이 보여온 지나친 행동도 행동이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난 반발 반항 심리 하나만 가지고 예배당 자체를 없애겠다는 무교회주의나
예배당 건물을 소유하지 않겠다고 나가는 예배당 무소유주의나
그들의 행동 배경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나가게 된다면
내나 예배당 건축 지상주의로 교회를 삼킨 바로 그 귀신 그 고양이에게 자신을 내어주게 되는 것이 아닌지를 깊이 생각해 보았는지, 참으로 큰 탄식과 근심이 있었습니다.


예배당조차 소유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 교회 교인들에게 자기 집 없이 모두들 셋방으로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 믿는 것이야 믿음 하나로 예배당이 없다 해도 어디라도 세들어 예배보고 살 수 있지만
개인의 세상생활은 셋방살이가 훨씬 싸게 먹히지만
세상 생활 편히 살기 위해 주거안정을 위해 내집 마련에 총력을 기울이는 교인들이 아닌지?



7. 유명한 미국 목사님이 양복 대신 아무 옷이나 입고 강단에 서니까

한국의 손꼽는 목사님들 부자 교회 비싼 정장의 목사님들이 그 시간에는 전부 싸구려 아무 옷이나 입고 강단에 쭈욱 늘어앉아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옷을 그렇게 입은 것이 맞다면, 수만 명 성도나 목회자들이 모인 집회 강단 위에서 입는 복장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면 이제 집회 후에 각 교회로 돌아가서 모두들 그렇게 하실지! 아니면 연출을 위해 그 자리에서만 그렇게 한 것인지...

만세반석 주님 한 분만 믿고 그분의 말씀 하나만 따라
먹으라면 먹고 굶으라면 굶고 그냥 그 길 하나만 따라 가면 복잡할 것 없고 꾀쓸 것도 없고 만고에 편하고 쉽고 감사할 일인데

공연히 더 먹도록 충동질하는 귀신에게 미혹 받아 사례를 더 받으려 무리하는 것도 죄고
그런 동역자와 시대의 타락상을 보며 오기가 안 먹고 사는 것을 자랑으로 아는 고행주의도 탈입니다.

예배당을 정도 이상으로 비싸게 화려하게 자기 자랑을 위해 짓는 것도 낭비의 죄고
예배당을 가지면 예배자유와 신앙유익에 필요한 정도가 있는데 무소유주의가 신앙인 줄 알고 남들이 하지 않는 무슨 특별한 아이디어로 반발심에 충천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도 이 노선은 반대합니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길
오늘 우리 주변 만사를 보면서 생각할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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