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주일 성수의 목표치, 최선치, 허용치
구남단2
작성자
추천.h3
작성일
2006.10.06
출처: /연구실/문의답변/181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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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스푸너사건에 대하여
박윤선 목사님이 고신을 떠나게 되는 발단이 된 표면적 사건을 일명하여 스푸너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은, 주일날 박윤선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수고 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선교사 스푸너와 그의 가족을 배웅하기 위하여 부두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가 시간이 허락치 않아 주위 근처의 교회에서 공예배 보는 것을 포기하고 선상에서 약식 예배를 한 것을 지칭합니다.
고신교단 이사회에서는 이 사건을 문제 삼아, 주일성수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물어 박윤선박사의 도덕적 사과가 있을 때까지 고려신학교 교장직과 교수직에서 임시 해임하고 복직은 사과 후에 다시 심의를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박윤선박사는 주일날에 불가피하고 선한일은 할수 있다고 생각하며
사과를 할만한 어떠한 일도 하지 않다고 하며 이 해고 조치를 부당한 처사라고 주장하고 결국은 고려파를 떠나게 됩니다.
제 기억으로는 백영희 목사님은 이상의 사건에 대해서는 표면적인 이유로 생각해서인지, 박윤선 목사님이 고려파를 떠나게 된 것이 백목사님 자신과 같이 예배당 소송 사건등에 관련된 교권 싸움의 희생으로 떠나시게 되었다고 설교하신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사건을 보기에는 박윤선 목사님이 주일을 범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를 사과하기는 커녕 별짝스런 논리와 주장들로 이를 합리화 하기 까지 한것 같습니다. 자신이 주일을 범하지 않았다고 그렇게 확신을 한다 할찌라도 분명히 주일에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행위를 했다고 지적을 받으면 최소한 그에 대한 사과는 했어야 옳지 않나 생각 합니다.
백영희 목사님께서는 이러한 부분에 대한 비판적 언급은 하시지 않고 그 내부적인 원인만을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백영희 목사님께서는 의도하신 바가 있어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총공회의 주일 성수에 대한 분위기와 하나님 최우선 주의라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하시고 심지어 어떤 이들에게는 박윤선 박사의 행위를 두둔 하는것과 같이 비춰질수도 있기에 분명한 해명을 부탁 드립니다.
훗날에 총공회의 어떤 이들이 백영희 목사님의 깊으신 의도와 뜻도 모르고 단순히 이러한 사실에만 치중하여 주일을 박윤선 박사와 같은 정도에서는 범하여도 된다는 교리까지 세울까 걱정되어 질문을 드립니다.
(답변)
가야 할 목표치, 내가 걸어가야 할 현 최선치, 듣고 넘어가야 할 허용치가 각각 있습니다.
1.모든 신앙 행위에 대한 평가에는 이런 면을 고려하셨으면 합니다.
①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가 가야 할 목표치
성경이 명령한 것은 우리가 가야 할 최고치입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잘 아는 성구로 예를 든다면, 원수를 사랑하라거나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자도 이미 간음하였다는 이런 성구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말하자면 그렇다'는 정도로 그 의미를 축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헛소리가 삽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걸어갈 길을 자세하게 적어 주신 것이 성경이니 그 말씀들은 전부가 우리의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이 길을 통과하지 않고는 그 면에 해당되는 구원은 실패입니다.
말씀하신 주일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주일을 바로 지키려면 우선 6일간 세상 생활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주일문제가 비로소 주일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6일이 게으르거나 잘못 되었다면, 그 사람은 그런 면을 회개하기 위한 주일이 되면 되었지 그렇게 바로 살지 못한 6일 뒤에 오는 주일 자체는 이미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 주일은 형식적으로 일단 지키는 것이고 그 주일조차 주일로 지키지 않으면 더 큰 죄가 되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6일을 바로 산 사람이라면 주일을 바로 지킬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일을 바로 지키려면 주일날 금한 것을 하지 않는다고 주일을 지켰다고 생각하면 주일의 껍데기만 안 사람입니다. 껍데기는 속에 알맹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히 주일을 지키려면 주일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킨 다음, 주일의 알맹이가 되는 주일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주일 예배를 통해 주님 주시는 말씀과 영감의 은혜를 다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일 예배 시간에 한 눈을 판 사람, 잠깐 조운 사람, 예배에 집중을 했으나 부족감을 느낀 사람, 또 예배 후 남는 시간에 그날 말씀으로 묵상하고 회개하며 새김질 하는 일들을 하지 않거나 소홀히 했다면 이것도 주일을 바로 지킨 사람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설명드린 이런 소소한 일들은 우리 신앙생활의 초보가 되는 주일 계명에 있어 처음 믿는 사람에게도 설명을 해서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야 하는 믿는 사람의 걸어갈 실제 신앙길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본다면, 주일 설교하는 목회자가 어떤 주일은 주일 강단 설교 시간 도중에도 그 마음이 헛생각을 할 수 있고 또 주님의 감동은 없이 인간이 인간의 경험과 생각을 가지고 설교하는 자신을 종종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일을 지키는 최고의 목표치는 어디에 두어야 하겠는가 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성경을 기준으로 주일을 지키라고 한다면, 사실 우리 목사들도 전부 주일을 범하는 때가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지킬 수 없는 율법의 멍에를 메워놓고 믿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만 만드는 일이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했으면 우리는 성경대로 주일을 지켜야 하는 '목표치'를 설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목표치대로 다 살지 못하면 분명히 부족한 것이고 죄를 지은 것입니다. 교인들보다 나으니까 되었다고 할 수는 없고, 내 마음에 최선을 다했으니 죄송할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②각자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걸어가야 할 최고치
성경을 기준으로 설정해야 할 이 '목표치'는 어느 누구라 해도, 어떤 형편이라고 해도 꼭 같이 해당되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도 부르실 때도 그리고 믿은 이후에도 단 한 사람이라도 사람을 같이 만들어놓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로 비유하신 것이 성경이고 또 실제 우리를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왜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다른 사람과 같게 만들지 않고 다 달리 만들고 다른 형편을 주셨을까요? 각자에게 맡긴 일도 다르고 각자에게 길러가는 면도 다르며 각자를 길러가는 과정도 다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 모든 사람은 '성경기록'이라는 면에서는 단 하나의 기준, 단 하나의 목표치를 가지고 노력해야 하지만, 각자에게 주신 현실이 따로 있음을 알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현재' 이 순간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만의 '최선치'를 파악해야 합니다.
오늘 처음 교회를 나오는 분들에게는 주일 오전 예배 한번만은 빠지지 말라고 목표치를 말해 줄 때는, 이것은 성경의 목표치가 아니고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현 최선치'입니다. 그 최선치를 여러 어려운 가운데 달성하게 되면 그 다음 최선치를 또 설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길러가는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쉬지 않고 현재 설정한 최선치를 향해 노력하고, 그것을 달성했다면 그 다음 최선치를 또 설정하여, 마침내 최종적으로는 성경이 말씀하는 온전한 주일이 되기까지 계속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주일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성경이 말씀한 '목표치'를 가지고 살펴본다면, 아마 박윤선목사님의 신앙으로는 평생 단 한번도 온전한 주일을 지켜 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분은 신학자라는 면이 더 강했지 신앙가라는 면이 더 강한 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짐작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대충 정한 일반적인 선을 어긴 것이 바로 그 스푸너사건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그 주일에 선교사를 배웅하러 갔다는 것, 예배를 참석치 않은 것, 이런 것을 두고 정말로 엄밀하게 따져 나가려면 그 주일 한번이 문제가 아닙니다. 박목사님은 고신 최고의 인물이니 그에게는 더 심한 구별이 있어야 할 것인데, 만일 박목사님의 평소 주일엄수를 면밀하게 '성경 목표치'로 따져 본다면 수없는 문제점이 발견될 것입니다.
애당초 박윤선목사님이라는 신학자에게 주일 문제를 엄하게 묻는 것부터가 사실 문제가 있습니다. 누구든 성경 목표치로는 꼭같은 부족한 사람이니 성경 목표치는 훗날로 미루어 둔다 해도 우선 각자의 현 최선치를 가지고 논할 것인데, 신학자의 주일 성수는 교과서를 가지고 강의를 하는 이론과 자기의 현실 충성과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분들은 주일이 휴일 개념에 가깝지, 주일은 죽도록 노력해야 할 충성의 날이라는 개념이 없는 분들입니다.
아마 박윤선목사님에게 그가 가진 자신의 현 수준 최선치를 가지고 따진다면 박목사님은 그날 주일에 선교사를 배웅해야 했던 문제나 차량 문제 때문에 따로 예배 보는 문제 등이 그렇게 양심에 가책될 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최선치라는 것은 외부에서 비판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의 교단 내 위치를 고려해서 주일에 관한 최저치를 설정해서 지켰어야 하지 않느냐는 문제로 연구할 숙제였다는 것이 보다 객관적일 것 같습니다.
③다른 사람의 주일 문제에 대하여는, 듣고 넘어가야 할 허용치가 있습니다.
성경으로 주일을 지켜야 할 기준은 사실 아주 단촐합니다. 간단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 현실에서 노력할 자기의 최선치는 각자의 신앙양심에 맡겨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간 진실되게 노력하지 않으면 그 최선치는 대폭 낮추어질 가능성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신앙문제에 대하여는 듣고 넘어가야 할 허용치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을 삼가 조심해서 적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목사가 주일날 식당을 갔다면, 성경 목표치를 기준으로 발언한다면 단호하게 죄를 지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가 기장측 문익환씨 계열의 목회자라고 한다면 비록 성경으로는 정죄를 하겠으나 그 사람의 현 최선치를 고려할 때 그 목사가 주일날 설교는 하고 나서 식당을 갔는지 아니면 주일날 화난다고 강단에도 서지 않고 식당에서 술을 먹었는지, 그런 차원에서 조사해서 그 교단에서 징계를 하든지 따져봐야 할 수준들입니다.
만일 백영희신앙노선에 있는 목사가 주일날 식당을 갔다면, 각자의 현 최선치를 기준으로 말한다고 해도 선을 넘었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주일날 식당을 갈 수 있는 수준을 최선치로 가진 사람은 목회자가 될 수 없는 다른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모든 문제가 다 마찬가지지만, 이제 다른 사람의 주일 문제를 가지고 말하는 이 글에서 특별히 말씀드릴 것은 박윤선목사님의 주일문제는 사실 고신에서 문제를 삼고 나설 일이 아니었다고 평가하겠습니다. 이유는, 개인적으로 예배를 봤느냐 다른 교회를 가서 예배를 봤느냐는 문제는 두 세 사람 모인 곳에도 함께 하겠다는 신약교회의 회집 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우리 믿는 사람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도 했습니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따진다면 고신이 징계처리하겠다고 나선 것은 무식한 처사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본인이 자기 양심대로 자기의 그 당시 현 상황에서 주일 문제를 생각하여 그 순간을 이렇게 처신했다고 말한다면, 그런데 그 자신의 양심에 옳은 대로 했다면, 그 설명은 듣는 데에서 그쳐야 할 일이지 징계를 한다고 나설 수는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고신이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주일날 출타나 타 거주처에 있는 교인은 반드시 주변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려야 예배가 되니까 그렇게 하라 하여 정해 놓은 것이 있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정해놓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주일을 어긴 죄로 징계를 하는 것처럼 형식을 취할 수는 있지만, 그 죄의 내용은 주일 어긴 죄가 본질이 아니고 교단 목회자들이 하나님 앞에 복음을 위해 함께 서원한 것을 어겼으니 그 서원 불이행에 대하여 징계를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 이런 경우, 박목사님을 주일 계명으로 징계하려 한다면, 성경 목표치의 기준을 가지고 박목사님을 징계해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지상 교회는 모든 교인 목회자를 평생 징계하고 사는 일만 해야 된다는 결론이 됩니다.
2.이번 답변에서 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을 할 때 가질 자세 문제입니다.
성경 기준이 있고, 현실 최대치를 설정해 놓은 것이 있으며, 현실 최저치를 교회가 복음에 필요하여 설정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총공회가 설정해 놓은 최저치를 가지고 만일 다른 교단 목회자들을 비판한다면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이때 죄인이라는 의미는 그 기준이 총공회 최저기준 때문에 나온 표현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교단 교역자들도 다 죄인이지만 공회 교역자들도 꼭같은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한 교단 안에서 같은 최저치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라면, 그 교단의 최저치를 벗어난 행동이 아닐 때는, 각자 그 사람의 자기 형편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사안을 이해하고 또 그 당시 그 사람으로 취할 행동에 대하여도 감안을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고려 사항은 전부가 그 사람의 주관 문제입니다. 그 사람의 느낌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외부에서는 그 사람에게 전후 사정을 먼저 충분히 들어본 다음, 권고할 문제로 그쳐야 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완전하게 그 교회가 정한 최저선을 벗어났다는 정도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신앙행위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정죄라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곤란한 문제입니다. 또한 실제 복음의 유익문제를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3.그렇다면, 질문자께서 말씀하신 우려 대로, 주일문제가 방종으로 치닫는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①교훈은 성경 목표치를 향해 최선을 다하되, 심방과 행정은 교회 최저치 이하의 교인을 상대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설교와 교훈 노력은 항상 성경 목표치를 증거하는 데 있는 힘을 다 해야 합니다. 그 목표치를 교인들이 깨닫는 만큼 교인 각자는 자기 속에 자기가 스스로 지킬 자신의 최선치를 높여가게 됩니다. 누가 외부에서 규율을 정하여 강행을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게 되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좀 느린 것같아도 신앙에서는 실제 그렇게 되어야 옳고 또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면 신앙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세상 집단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목회자의 강단은 인간으로서는 생각조차 한번 못해보았을 높은 도를 찾아 깨닫고 증거하여 꾸준히 교인들에게 우리가 함께 가야 할 길을 밝혀놓고, 그다음 각자가 가져야 할 최선치도 각자가 스스로 높여가며 지키도록 한다음, 교인들을 하나씩 심방하여 챙길 때는, 자기가 스스로 정해 놓은 자기의 결심마저도 잘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또 다시 한번 더 힘을 내서 해 보라고 권면을 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꾸중만 하고 징계만 할 수 있는 신앙의 실력이나 그런 상태에 있는 교회나 목회자는 사실 없습니다.
만일, 교회가 집사에게 목사에게 장로에게 반사에게 일반 세례 교인에게 정한 최저치조차도 지키지 못한 경우가 있다면, 그럴 경우라 해도 우선 본인에게 충분히 설명을 듣고, 그에게 왜 그 선을 지켜야 하는지를 설명을 하고 이해를 시켜 스스로 느끼고 노력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만일 악의로 범했거나 다른 어린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경우는 교회로서, 그 행동은 이런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며 발표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백영희신앙노선의 교회 '치리제도'의 근본 시각입니다.
②박윤선목사님의 주일문제는, 주일문제가 아니라 분명한 정치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박윤선목사님의 경우는, 고신이 총회측과 대외 투쟁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박목사님이 신학교를 책임진 학자로서 교단의 대외 생존투쟁에 필요한 이론을 제공하고 학자의 권위로 교권투쟁을 독려해서 고신교단의 나갈 길을 돕지는 못할 망정, 교과서에 나온 이론이라고 하면서 소송을 하면 안된다는 주장 등을 하면서 자꾸 뒷발목을 잡고 있다고 교권측에서는 느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목회 현장의 영향력이 대단했던 백영희목사님이나 신학교의 영향력이 대단했던 박윤선목사님은 기회만 되면 제거해야 할 암적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 고신의 지도부였습니다. 그 지도부 중에도 강경 투쟁론자들의 복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눈에 띄이는 문제가 발생되니까, 이 문제를 가지고 성경을 논하고 주일 성수를 논하고 어린 교인들에게 미치는 영향까지를 우려한다며 총궐기를 했던 것입니다. 그분들이 정말 그런 기준들이 문제였다면 세상언론에까지 연일 대서특필 되고 있던 예배당 소송 등 모든 교권투쟁 행동들을 했을 리는 없었습니다.
당시 백목사님과 같은 경우는, 죄목을 찾을래야 죄목이 나오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서부교회 내부에 연결되는 교인을 넣어서 고신 지도부에 고소를 하게 만들고 지도부는 고소가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개입한다고 하면서 결국 제명을 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③아무리 정치 문제였다고 해도, 박목사님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질문 내용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예배당에 가서 봐야 하느냐는 문제는 앞에서 잠깐 설명 드린 대로 쉽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당에 가서 예배 보는 것이 더 은혜스러울 수 있고 어떤 환경 어떤 교회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일 문제를 두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몇 가지 중요한 행동 지침은 예시를 하고 모두들 지키도록 한 교회 내에서는 서약을 하고 있습니다만, 주일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님 대속으로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시고 그 은혜를 받도록 날짜로서는 주일을 정해 놓았으니, 이 주일을 법령에 정해 놓았기 때문에 지키느냐 아니면 법령으로는 대충 예시 했으니 그것을 우선 충실하게 지키되 더욱 중요한 것은 주일에 이 대속의 은혜로 내가 항상 새로워지려면 과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고민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일을 이런 시각과 자세로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저저로 최저선으로 예시한 것은 지키려고 애쓰게 되어 있고 또 예시할 수 없는 각자 환경의 수없는 현실에서 자기만이 알고 힘쓰려는 투쟁이 있게 됩니다. 만일 주일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깨닫는 면이 없다면, 외부적으로 어떤 규정을 두고 어떤 처리를 해 나간다 해도 바리새인이나 천주교는 될 수 있을지라도 복음운동의 바른 결실은 나오지 않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곳에 /백영희신앙연구/라는 연구실을 열고 이곳에서는 다른 교파는 말할 것도 없고 총공회 신앙노선 내에 있는 분들을 향해서도 대단히 혹독한 비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타 교파나 공회 내의 다른 신앙노선을 한껏 비판하는 것도, 신앙의 기본 자세가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어느 개인이나 교회나 교단을 정죄하는 데 방향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자세하게 또 냉정하게 살펴본다면 기본 방향에 늘 이번 답변에서 말씀드리는 내용이 있다고 느끼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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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스푸너사건에 대하여
박윤선 목사님이 고신을 떠나게 되는 발단이 된 표면적 사건을 일명하여 스푸너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은, 주일날 박윤선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수고 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선교사 스푸너와 그의 가족을 배웅하기 위하여 부두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가 시간이 허락치 않아 주위 근처의 교회에서 공예배 보는 것을 포기하고 선상에서 약식 예배를 한 것을 지칭합니다.
고신교단 이사회에서는 이 사건을 문제 삼아, 주일성수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물어 박윤선박사의 도덕적 사과가 있을 때까지 고려신학교 교장직과 교수직에서 임시 해임하고 복직은 사과 후에 다시 심의를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박윤선박사는 주일날에 불가피하고 선한일은 할수 있다고 생각하며
사과를 할만한 어떠한 일도 하지 않다고 하며 이 해고 조치를 부당한 처사라고 주장하고 결국은 고려파를 떠나게 됩니다.
제 기억으로는 백영희 목사님은 이상의 사건에 대해서는 표면적인 이유로 생각해서인지, 박윤선 목사님이 고려파를 떠나게 된 것이 백목사님 자신과 같이 예배당 소송 사건등에 관련된 교권 싸움의 희생으로 떠나시게 되었다고 설교하신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사건을 보기에는 박윤선 목사님이 주일을 범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를 사과하기는 커녕 별짝스런 논리와 주장들로 이를 합리화 하기 까지 한것 같습니다. 자신이 주일을 범하지 않았다고 그렇게 확신을 한다 할찌라도 분명히 주일에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행위를 했다고 지적을 받으면 최소한 그에 대한 사과는 했어야 옳지 않나 생각 합니다.
백영희 목사님께서는 이러한 부분에 대한 비판적 언급은 하시지 않고 그 내부적인 원인만을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백영희 목사님께서는 의도하신 바가 있어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총공회의 주일 성수에 대한 분위기와 하나님 최우선 주의라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하시고 심지어 어떤 이들에게는 박윤선 박사의 행위를 두둔 하는것과 같이 비춰질수도 있기에 분명한 해명을 부탁 드립니다.
훗날에 총공회의 어떤 이들이 백영희 목사님의 깊으신 의도와 뜻도 모르고 단순히 이러한 사실에만 치중하여 주일을 박윤선 박사와 같은 정도에서는 범하여도 된다는 교리까지 세울까 걱정되어 질문을 드립니다.
(답변)
가야 할 목표치, 내가 걸어가야 할 현 최선치, 듣고 넘어가야 할 허용치가 각각 있습니다.
1.모든 신앙 행위에 대한 평가에는 이런 면을 고려하셨으면 합니다.
①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가 가야 할 목표치
성경이 명령한 것은 우리가 가야 할 최고치입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잘 아는 성구로 예를 든다면, 원수를 사랑하라거나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자도 이미 간음하였다는 이런 성구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말하자면 그렇다'는 정도로 그 의미를 축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헛소리가 삽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걸어갈 길을 자세하게 적어 주신 것이 성경이니 그 말씀들은 전부가 우리의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이 길을 통과하지 않고는 그 면에 해당되는 구원은 실패입니다.
말씀하신 주일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주일을 바로 지키려면 우선 6일간 세상 생활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주일문제가 비로소 주일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6일이 게으르거나 잘못 되었다면, 그 사람은 그런 면을 회개하기 위한 주일이 되면 되었지 그렇게 바로 살지 못한 6일 뒤에 오는 주일 자체는 이미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 주일은 형식적으로 일단 지키는 것이고 그 주일조차 주일로 지키지 않으면 더 큰 죄가 되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6일을 바로 산 사람이라면 주일을 바로 지킬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일을 바로 지키려면 주일날 금한 것을 하지 않는다고 주일을 지켰다고 생각하면 주일의 껍데기만 안 사람입니다. 껍데기는 속에 알맹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히 주일을 지키려면 주일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킨 다음, 주일의 알맹이가 되는 주일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주일 예배를 통해 주님 주시는 말씀과 영감의 은혜를 다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일 예배 시간에 한 눈을 판 사람, 잠깐 조운 사람, 예배에 집중을 했으나 부족감을 느낀 사람, 또 예배 후 남는 시간에 그날 말씀으로 묵상하고 회개하며 새김질 하는 일들을 하지 않거나 소홀히 했다면 이것도 주일을 바로 지킨 사람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설명드린 이런 소소한 일들은 우리 신앙생활의 초보가 되는 주일 계명에 있어 처음 믿는 사람에게도 설명을 해서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야 하는 믿는 사람의 걸어갈 실제 신앙길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본다면, 주일 설교하는 목회자가 어떤 주일은 주일 강단 설교 시간 도중에도 그 마음이 헛생각을 할 수 있고 또 주님의 감동은 없이 인간이 인간의 경험과 생각을 가지고 설교하는 자신을 종종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일을 지키는 최고의 목표치는 어디에 두어야 하겠는가 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성경을 기준으로 주일을 지키라고 한다면, 사실 우리 목사들도 전부 주일을 범하는 때가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지킬 수 없는 율법의 멍에를 메워놓고 믿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만 만드는 일이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했으면 우리는 성경대로 주일을 지켜야 하는 '목표치'를 설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목표치대로 다 살지 못하면 분명히 부족한 것이고 죄를 지은 것입니다. 교인들보다 나으니까 되었다고 할 수는 없고, 내 마음에 최선을 다했으니 죄송할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②각자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걸어가야 할 최고치
성경을 기준으로 설정해야 할 이 '목표치'는 어느 누구라 해도, 어떤 형편이라고 해도 꼭 같이 해당되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도 부르실 때도 그리고 믿은 이후에도 단 한 사람이라도 사람을 같이 만들어놓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로 비유하신 것이 성경이고 또 실제 우리를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왜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다른 사람과 같게 만들지 않고 다 달리 만들고 다른 형편을 주셨을까요? 각자에게 맡긴 일도 다르고 각자에게 길러가는 면도 다르며 각자를 길러가는 과정도 다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 모든 사람은 '성경기록'이라는 면에서는 단 하나의 기준, 단 하나의 목표치를 가지고 노력해야 하지만, 각자에게 주신 현실이 따로 있음을 알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현재' 이 순간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만의 '최선치'를 파악해야 합니다.
오늘 처음 교회를 나오는 분들에게는 주일 오전 예배 한번만은 빠지지 말라고 목표치를 말해 줄 때는, 이것은 성경의 목표치가 아니고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현 최선치'입니다. 그 최선치를 여러 어려운 가운데 달성하게 되면 그 다음 최선치를 또 설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길러가는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쉬지 않고 현재 설정한 최선치를 향해 노력하고, 그것을 달성했다면 그 다음 최선치를 또 설정하여, 마침내 최종적으로는 성경이 말씀하는 온전한 주일이 되기까지 계속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주일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성경이 말씀한 '목표치'를 가지고 살펴본다면, 아마 박윤선목사님의 신앙으로는 평생 단 한번도 온전한 주일을 지켜 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분은 신학자라는 면이 더 강했지 신앙가라는 면이 더 강한 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짐작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대충 정한 일반적인 선을 어긴 것이 바로 그 스푸너사건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그 주일에 선교사를 배웅하러 갔다는 것, 예배를 참석치 않은 것, 이런 것을 두고 정말로 엄밀하게 따져 나가려면 그 주일 한번이 문제가 아닙니다. 박목사님은 고신 최고의 인물이니 그에게는 더 심한 구별이 있어야 할 것인데, 만일 박목사님의 평소 주일엄수를 면밀하게 '성경 목표치'로 따져 본다면 수없는 문제점이 발견될 것입니다.
애당초 박윤선목사님이라는 신학자에게 주일 문제를 엄하게 묻는 것부터가 사실 문제가 있습니다. 누구든 성경 목표치로는 꼭같은 부족한 사람이니 성경 목표치는 훗날로 미루어 둔다 해도 우선 각자의 현 최선치를 가지고 논할 것인데, 신학자의 주일 성수는 교과서를 가지고 강의를 하는 이론과 자기의 현실 충성과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분들은 주일이 휴일 개념에 가깝지, 주일은 죽도록 노력해야 할 충성의 날이라는 개념이 없는 분들입니다.
아마 박윤선목사님에게 그가 가진 자신의 현 수준 최선치를 가지고 따진다면 박목사님은 그날 주일에 선교사를 배웅해야 했던 문제나 차량 문제 때문에 따로 예배 보는 문제 등이 그렇게 양심에 가책될 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최선치라는 것은 외부에서 비판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의 교단 내 위치를 고려해서 주일에 관한 최저치를 설정해서 지켰어야 하지 않느냐는 문제로 연구할 숙제였다는 것이 보다 객관적일 것 같습니다.
③다른 사람의 주일 문제에 대하여는, 듣고 넘어가야 할 허용치가 있습니다.
성경으로 주일을 지켜야 할 기준은 사실 아주 단촐합니다. 간단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 현실에서 노력할 자기의 최선치는 각자의 신앙양심에 맡겨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간 진실되게 노력하지 않으면 그 최선치는 대폭 낮추어질 가능성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신앙문제에 대하여는 듣고 넘어가야 할 허용치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을 삼가 조심해서 적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목사가 주일날 식당을 갔다면, 성경 목표치를 기준으로 발언한다면 단호하게 죄를 지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가 기장측 문익환씨 계열의 목회자라고 한다면 비록 성경으로는 정죄를 하겠으나 그 사람의 현 최선치를 고려할 때 그 목사가 주일날 설교는 하고 나서 식당을 갔는지 아니면 주일날 화난다고 강단에도 서지 않고 식당에서 술을 먹었는지, 그런 차원에서 조사해서 그 교단에서 징계를 하든지 따져봐야 할 수준들입니다.
만일 백영희신앙노선에 있는 목사가 주일날 식당을 갔다면, 각자의 현 최선치를 기준으로 말한다고 해도 선을 넘었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주일날 식당을 갈 수 있는 수준을 최선치로 가진 사람은 목회자가 될 수 없는 다른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모든 문제가 다 마찬가지지만, 이제 다른 사람의 주일 문제를 가지고 말하는 이 글에서 특별히 말씀드릴 것은 박윤선목사님의 주일문제는 사실 고신에서 문제를 삼고 나설 일이 아니었다고 평가하겠습니다. 이유는, 개인적으로 예배를 봤느냐 다른 교회를 가서 예배를 봤느냐는 문제는 두 세 사람 모인 곳에도 함께 하겠다는 신약교회의 회집 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우리 믿는 사람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도 했습니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따진다면 고신이 징계처리하겠다고 나선 것은 무식한 처사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본인이 자기 양심대로 자기의 그 당시 현 상황에서 주일 문제를 생각하여 그 순간을 이렇게 처신했다고 말한다면, 그런데 그 자신의 양심에 옳은 대로 했다면, 그 설명은 듣는 데에서 그쳐야 할 일이지 징계를 한다고 나설 수는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고신이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주일날 출타나 타 거주처에 있는 교인은 반드시 주변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려야 예배가 되니까 그렇게 하라 하여 정해 놓은 것이 있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정해놓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주일을 어긴 죄로 징계를 하는 것처럼 형식을 취할 수는 있지만, 그 죄의 내용은 주일 어긴 죄가 본질이 아니고 교단 목회자들이 하나님 앞에 복음을 위해 함께 서원한 것을 어겼으니 그 서원 불이행에 대하여 징계를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 이런 경우, 박목사님을 주일 계명으로 징계하려 한다면, 성경 목표치의 기준을 가지고 박목사님을 징계해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지상 교회는 모든 교인 목회자를 평생 징계하고 사는 일만 해야 된다는 결론이 됩니다.
2.이번 답변에서 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을 할 때 가질 자세 문제입니다.
성경 기준이 있고, 현실 최대치를 설정해 놓은 것이 있으며, 현실 최저치를 교회가 복음에 필요하여 설정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총공회가 설정해 놓은 최저치를 가지고 만일 다른 교단 목회자들을 비판한다면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이때 죄인이라는 의미는 그 기준이 총공회 최저기준 때문에 나온 표현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교단 교역자들도 다 죄인이지만 공회 교역자들도 꼭같은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한 교단 안에서 같은 최저치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라면, 그 교단의 최저치를 벗어난 행동이 아닐 때는, 각자 그 사람의 자기 형편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사안을 이해하고 또 그 당시 그 사람으로 취할 행동에 대하여도 감안을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고려 사항은 전부가 그 사람의 주관 문제입니다. 그 사람의 느낌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외부에서는 그 사람에게 전후 사정을 먼저 충분히 들어본 다음, 권고할 문제로 그쳐야 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완전하게 그 교회가 정한 최저선을 벗어났다는 정도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신앙행위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정죄라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곤란한 문제입니다. 또한 실제 복음의 유익문제를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3.그렇다면, 질문자께서 말씀하신 우려 대로, 주일문제가 방종으로 치닫는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①교훈은 성경 목표치를 향해 최선을 다하되, 심방과 행정은 교회 최저치 이하의 교인을 상대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설교와 교훈 노력은 항상 성경 목표치를 증거하는 데 있는 힘을 다 해야 합니다. 그 목표치를 교인들이 깨닫는 만큼 교인 각자는 자기 속에 자기가 스스로 지킬 자신의 최선치를 높여가게 됩니다. 누가 외부에서 규율을 정하여 강행을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게 되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좀 느린 것같아도 신앙에서는 실제 그렇게 되어야 옳고 또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면 신앙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세상 집단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목회자의 강단은 인간으로서는 생각조차 한번 못해보았을 높은 도를 찾아 깨닫고 증거하여 꾸준히 교인들에게 우리가 함께 가야 할 길을 밝혀놓고, 그다음 각자가 가져야 할 최선치도 각자가 스스로 높여가며 지키도록 한다음, 교인들을 하나씩 심방하여 챙길 때는, 자기가 스스로 정해 놓은 자기의 결심마저도 잘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또 다시 한번 더 힘을 내서 해 보라고 권면을 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꾸중만 하고 징계만 할 수 있는 신앙의 실력이나 그런 상태에 있는 교회나 목회자는 사실 없습니다.
만일, 교회가 집사에게 목사에게 장로에게 반사에게 일반 세례 교인에게 정한 최저치조차도 지키지 못한 경우가 있다면, 그럴 경우라 해도 우선 본인에게 충분히 설명을 듣고, 그에게 왜 그 선을 지켜야 하는지를 설명을 하고 이해를 시켜 스스로 느끼고 노력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만일 악의로 범했거나 다른 어린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경우는 교회로서, 그 행동은 이런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며 발표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백영희신앙노선의 교회 '치리제도'의 근본 시각입니다.
②박윤선목사님의 주일문제는, 주일문제가 아니라 분명한 정치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박윤선목사님의 경우는, 고신이 총회측과 대외 투쟁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박목사님이 신학교를 책임진 학자로서 교단의 대외 생존투쟁에 필요한 이론을 제공하고 학자의 권위로 교권투쟁을 독려해서 고신교단의 나갈 길을 돕지는 못할 망정, 교과서에 나온 이론이라고 하면서 소송을 하면 안된다는 주장 등을 하면서 자꾸 뒷발목을 잡고 있다고 교권측에서는 느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목회 현장의 영향력이 대단했던 백영희목사님이나 신학교의 영향력이 대단했던 박윤선목사님은 기회만 되면 제거해야 할 암적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 고신의 지도부였습니다. 그 지도부 중에도 강경 투쟁론자들의 복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눈에 띄이는 문제가 발생되니까, 이 문제를 가지고 성경을 논하고 주일 성수를 논하고 어린 교인들에게 미치는 영향까지를 우려한다며 총궐기를 했던 것입니다. 그분들이 정말 그런 기준들이 문제였다면 세상언론에까지 연일 대서특필 되고 있던 예배당 소송 등 모든 교권투쟁 행동들을 했을 리는 없었습니다.
당시 백목사님과 같은 경우는, 죄목을 찾을래야 죄목이 나오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서부교회 내부에 연결되는 교인을 넣어서 고신 지도부에 고소를 하게 만들고 지도부는 고소가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개입한다고 하면서 결국 제명을 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③아무리 정치 문제였다고 해도, 박목사님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질문 내용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예배당에 가서 봐야 하느냐는 문제는 앞에서 잠깐 설명 드린 대로 쉽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당에 가서 예배 보는 것이 더 은혜스러울 수 있고 어떤 환경 어떤 교회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일 문제를 두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몇 가지 중요한 행동 지침은 예시를 하고 모두들 지키도록 한 교회 내에서는 서약을 하고 있습니다만, 주일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님 대속으로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시고 그 은혜를 받도록 날짜로서는 주일을 정해 놓았으니, 이 주일을 법령에 정해 놓았기 때문에 지키느냐 아니면 법령으로는 대충 예시 했으니 그것을 우선 충실하게 지키되 더욱 중요한 것은 주일에 이 대속의 은혜로 내가 항상 새로워지려면 과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고민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일을 이런 시각과 자세로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저저로 최저선으로 예시한 것은 지키려고 애쓰게 되어 있고 또 예시할 수 없는 각자 환경의 수없는 현실에서 자기만이 알고 힘쓰려는 투쟁이 있게 됩니다. 만일 주일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깨닫는 면이 없다면, 외부적으로 어떤 규정을 두고 어떤 처리를 해 나간다 해도 바리새인이나 천주교는 될 수 있을지라도 복음운동의 바른 결실은 나오지 않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곳에 /백영희신앙연구/라는 연구실을 열고 이곳에서는 다른 교파는 말할 것도 없고 총공회 신앙노선 내에 있는 분들을 향해서도 대단히 혹독한 비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타 교파나 공회 내의 다른 신앙노선을 한껏 비판하는 것도, 신앙의 기본 자세가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어느 개인이나 교회나 교단을 정죄하는 데 방향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자세하게 또 냉정하게 살펴본다면 기본 방향에 늘 이번 답변에서 말씀드리는 내용이 있다고 느끼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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