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청년들이 이 신앙노선으로 살아가려면?
구남단2
작성자
추천.h3
작성일
2006.10.10
출처: /연구실/문의답변/1279번
------------------------------
(질문)
총공회 청년들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여야합니까?
많은분들이 시대가 바뀌었다고들합니다.
총공회 청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여야합니까?
바른길을 알려주세요.
(답변)
시대가 바뀌지 않은 때는 없었습니다. 바뀔 것과 바뀌면 안될 것이 따로 있습니다.
1.시대가 바뀐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시대를 따라 바뀔 것이 있고 바뀌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①시대가 바뀌는 것은 확실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죽고 아버지 어머니가 가정을 책임지는 때가 되었다면, 시대는 과연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도 죽고 이제 아들과 며느리가 자녀를 낳고 가정을 책임지며 살아야 되는 시대가 되었다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세상에 달라질 것이 많고 또 달라지고 나면 변화를 느낄 것도 많지만 결국 제일 큰 변화의 요소는 인간입니다. 자세하게 관찰하면 하루도 바뀌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불신자들의 경험과 통계에서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늙고 세대가 교체되는 것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주변 환경에 속하는 집들도 길도 바뀝니다. 산의 모습을 바꾸는 숲의 형태도 바뀌고 한번씩 강타하는 태풍과 집중 호우로 물길도 변하게 됩니다.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상 인심과 눈빛까지도 돌변하는 경우가 있는데 매년 그렇게 크게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10년 혹 2-30년이면 상상못할 정도로 변할 일들이 있습니다.
②지금 변하는 세상은, 예정도 측정도 무의미할 만큼 초고속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시대는 1에 1을 더하며 변해오던 6천년 인류역사 중에서 가장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1에 1을 더하는 식으로 변해오던 시절을 두고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이 속담이 정신도 못차릴 만큼 변하게 된 것은 우리가 막 살다가 빠져 나왔던 지난 20세기였습니다. 20세기의 변화는 1에 1을 더하는 것이 아니고 1에 1을 곱했습니다. 그다음에는 2를 곱했고 그다음에는 3을 곱했습니다. 그 이전 백년 수백년에 변할 것이 단 몇 년에 바뀌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 20세기를 마감하던 순간에 나타난 컴퓨터 사용의 대중화는 이 홈을 운영하는 시골 산골에까지 초고속 인터넷 전용선이 들어오면서 이제 2제곱 4제곱으로 곱하며 더 이상 변화를 예측하거나 측정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③현재 바뀌는 세상은 특이하게도, 변화를 상대하는 인간의 본질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상이 바뀌면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려고 대응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세상이 바뀌고 주변 환경이 바뀔 때, 우리 인간이 보인 행동은 변화된 환경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고 또 어떻게 대응하여 보다 유리하게 그 환경을 이용하느냐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의 변화를 대처하는 인간의 근본 자세에 중대한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많은 것이 단숨에 바뀌어 왔고 그 변화된 환경에 적응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결과가 불과 한 세대에 여러번을 겪게 되었고, 최근에는 그 주기가 더 단축되어 불과 10여년 사이에 그런 일을 몇 번씩 겪게 되었고, 지금은 불과 몇 년 사이에 그런 황망하고 충격적인 상황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급변의 환경은 급기야 우리 인간이 환경의 변화를 대처하는 내적 대응 자세 자체를 바꾸어놓고 말았습니다. 환경의 변화를 어떻게 파악하고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느냐는 것이 원래 환경의 변화에 대한 인간의 기본 자세였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외부 변화를 대처하는 인간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인간이 외부를 변화시키는 주체로 그 본질을 스스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지금까지는 환경의 변화를 외침으로 보고 인간은 방어선을 구축하여 생존전략으로 대비하는 방어군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인간이 하나님이 정해 주신 자기 지위를 떠났습니다.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자기 주거가 있는데 그 주거 개념을 없애버리고 이제는 환경의 변화가 외침으로 오든지 말든지 인간은 인간대로 자기가 지킬 성은 버려두고 천하를 점령하기 위해 끝없는 원정길에 나서고 있습니다.
④변화에 중독이 되었고 변화가 자기 본능이 되어버린 이상한 인간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에게 넣어 두신 자연 본능은 현실에 대한 순응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현실의 변화는 자기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파악하여 그 변화된 현실 속에서 자기가 대처할 바른 자세와 행동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만든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 본질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현실을 이리 저리 바꾸어 가면서 평생 우리를 길러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의 본질과 본성의 타락이 그 정도를 넘어서되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라도 가지고 있어야 할 마지막 인간다운 본질까지 내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변화를 대처하는 것이 아니고 변화라는 것 자체에게 중독이 되었고 그 변화가 이제는 인간 자기 내면의 기본 본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머리를 떼서 발에 붙여 보아야겠고, 남자를 여자로 만들어보아야 하며, 동물과 사람을 뒤섞어 변종을 제 눈으로 봐야하도록 되었습니다.
인간이 편리하게 사용하려고 만든 로봇은 원래 '도구'의 개념인데, 이것이 어느날 인간처럼 자기대로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자기 중심으로 인간을 상대하게 된다면 '본질적인 변화'라고 할 것입니다. 주인에게 팔려와서 주인을 위해 존재하고 주인이 죽이든 팔든 할 수 있던 노예가 이제 시민권을 가지고 주인과 같이 시민권을 행사하는 상태가 되었다면 이는 본질적인 변화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넘어서는 안될 또 하나의 선을 넘어 타락의 종착을 향해 줄달음을 치되 지금까지는 타락의 레일 위를 달리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 달려가는 길조차도 벗어나서 미쳐버린 열차 기관차가 된 정도입니다. 기관차가 이전보다 출력은 더 강한 상태에서 이제 레일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사방천지를 제 가고 싶은 대로 제 멋대로 그때 그때 즉흥적으로 휘둘고 다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⑤이렇게 볼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에게는 바꿀 것이 있고 바꾸면 안 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부 환경이 변하고 인심이 변하면 그 환경과 접촉하는 인간들 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겨울 날씨를 위해 두터운 옷을 준비하고 여름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얇은 옷감을 개발하여 대처를 해 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이 변하는 환경을 상대할 때까지만 해도 '발전'이라는 개념이 있었고 '진보'라는 결과를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자연계시를 통한 현실인도와 그 현실인도를 순종하는 신앙걸음은 어떻게 되는 것이 옳은지를 참고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환경 변화를 전제로 인간이 어떻게 대처를 하느냐는 차원이 아니고 인간이 자기 힘대로 실력대로 마음에 내키는 대로 자기 환경을 얼마나 바꾸느냐는 차원이 되었습니다. 환경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새로운 행동이 있으니 이 하나님의 요구를 순종하는 것이 '정상적인 변화'이며 이렇게 변화되는 것을 발전이라 진보라고 합니다. 또 이 변화에 늦어진 것을 뒷늦게라도 따라 잡기 위해 시험전날 벼락치기 밤공부를 하듯 급하게 뒤따를 때 그것을 '개혁'이라고 합니다.
현재 세상 변화의 본질은, 과거처럼 하나님께서 환경을 바꾸어 주셨으니 이 바뀐 세상 속에서 나 할 일이 무엇이냐는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바꾸어 주기도 전에 또 하나님이 바꾸어 주시지도 않는 것을 인간이 먼저 나서서 바꾸어 놓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겨울로 세상을 바꾸니 무슨 옷으로 대처할까, 부모를 일찍 불러갔으니 어린 나이지만 생계를 어떻게 할까, 세월 속에 지식이 누적되어 차가 굴러 다니는 세상이 되었으니 이 빠른 기계를 어디에 쓰라는 뜻일까 하는 것이 정상적인 변화와 그 변화를 대처하는 인간의 대응입니다.
지금 인간의 본질 자체가 변질이 되었다고 거론하는 것은 이제 예를 든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명백하게 10번째 계명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를 부모로 만들고 부모를 아이 자리로 내려 앉혀놓고 그것을 개혁이고 변화라고 하며, 이런 변화로 인하여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하는 발광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꿀 것이 있고 바꾸어도 되는 것이 있으며 바꾸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고 절대 바꾸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제 부모는 내버려두어 고려장으로 죽듯 해놓고 옆집 아파트 개 죽은 것을 두고는 새댁들이 모여 앉아 울고 불고 난리를 하는 변화는 이전의 변화와는 양상이 다릅니다. 그런 새댁들 그런 젊은이들이 인권을 주장하는 세대라고 나서는 변화는 진정한 의미의 변화와는 정반대 개념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이곳은 변질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초식동물에게 육식사료를 먹여 그 소가 미쳐버린 것이 광우병이라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이런 변화들도 변화라는 이름으로 이 말세 대로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런 변질들이 이 말세 대로를 완전히 점령을 해버렸습니다. 바꿀 것이 있고 바꾸면 절대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⑥바꾸면 안될 것까지 바꾼 배경에는, 악령의 말세 경영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발전적인 변화, 하나님이 인도하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진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꾸도록 주신 현실을 따라 바꿀 것을 바꿀 때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바꾸어도 되는 것을 바꾸는 것까지는 그래도 그 동기와 목적이 좋을 것이라고 위안하면서 지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꾸지 않아도 될 것을 바꾸고 나서는 세대를 볼 때는 4차선 대로 안에서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듯 합니다. 만일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을 바꾸는 일이라면, 이것은 '변화' 또는 '개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것입니다.
아담의 첫 범죄 이후 지난 6천년간 악령은 역사 속에 거쳐간 수도 없는 죄를 내놓았고 그 죄는 그 당대를 어지럽히며 교회의 복음운동에 맞서 왔었습니다. 이제 역사 세계의 최종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악령이 자기 시대를 마감하며 마지막 가장 큰 무기를 준비하고 사용할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말세를 마지막으로 경영하기 위해 악령이 내놓은 전략이 바로 첫 타락으로 시작한 인성을 이제 그 뿌리까지 본질적으로 다 바꾸어 자연상태에서조차 창조의 형태를 없애버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을 악령이 훼파하되 말세 직전까지는 신앙내적인 것에 주력을 했고 이제 최종 순간이 다가오자 자연계시에 해당되는 세상에 속한 것까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창조에 속한 것은 그 모습과 그 본질, 그 흔적까지 모두 도말하고 있습니다. 죄가 죄를 낳아 죄를 길러 온 역사 중에서도 이 죄는 가장 최악의 죄일 것입니다.
⑦인간의 본질 자체가 '변화'라는 문제를 두고 변질되어 버린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악령이 '변화'에 대처하는 인간의 본질 자체를 통째로 바꾼 과정은 우선 변화를 통해 모든 문화와 기술이 발달되고 현저하게 좋아지게 된 결과를 보여 준 것이 먼저였습니다. 특히 지난 수백년, 그 중에서도 지난 1백여년 동안 모든 인류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까지도 넋을 잃고 악령이 문화 과학 기술을 통해 재주를 부리는 것을 경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후천년설이라는 교리는 기독교 핵심 보수쪽의 다수가 믿고 있는데 이 교리는 이렇게 좋아지고 있는 세상을 볼 때 주님 오시기 전에 천년왕국이 먼저 임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의학의 발달, 경제의 발달, 문화의 발달로 인하여 이만하면 지상천국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았으며 이 정도 발달이 좀더 지속되면 하늘의 천국이 이 세상에 이루어진 정도겠다고 하는 교리입니다. 보수측 정통신학이 이 정도였으니 교회는 그렇게 눈에 좋도록만 보이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 이면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도 교회도 전부가 '변화'라는 것은 '발전'과 같은 말이고 '발전'이란 '행복'이라는 것이라고 통일을 시켜버렸습니다.
악령이 이렇게 세상을 좋게 만들되 '변화'라는 모습을 통해 그 목표를 이루게 되자 이자 '변화'라는 것은 무조건 발전이며 행복이며 지상낙원을 향한 필수코스라고 단정하게 됩니다. 세상 분위기를 이렇게 통일되자 교회도 그 통일이 지금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르고 함께 동승해버렸고 20세기의 변화만큼이나 교회도 덩달아서 변하게 됩니다. '변화'라는 귀신에게 교회가 통째로 씌이게 된 것입니다. 이후 100여년 오늘까지 세계교회사의 흐름은 그 주제가 '변화'에 있었습니다.
'변화'란 세상 뿐 아니라 교회에게도 항상 옳은 것이고 좋은 것이며 그것은 개혁이라는 진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을 말하는 사람은 한 시대를 앞서 보는 선지자가 되는 판이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이는 사람은 양심가가 되고 그것을 주장하다 손해를 본 사람은 말세 교회를 살리려고 희생한 순교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를 가마솥에 넣고 통째로 삶아 치운 것임을 아는 교회는 현재 우리가 알기로는 백영희신앙노선밖에 없습니다. '변화'를 뒤집어 쓰고 나타난 말세 귀신이 말세 교회에게 복음을 전하는 천사로 환영받았다는 말입니다.
2.교회가 시대를 따라 변해온 면을 두고 살펴보아야 할 마지막 시점입니다.
①이곳이 아는 수준에서만 본다면, 이곳이 이런 주장을 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런지!
개를 주인 안방에 모셔놓고, 그 주인은 대문 앞 개집에 가서 집을 지키는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끓는 가마솥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철부지들이 세상을 경영하고, 그 할애비 할미들은 양민이 되어 통치받는 묘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모든 세상과 모든 교회들이 개혁이며 발전이며 지상낙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일치 떠들고 있는데, 이곳은 그 반대로 알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발언하고 있습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혹 이곳이 이런 발언을 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런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대에 소망이 없고 훼파되어 돌 위에 돌 하나도 첩놓이지 않고 끝장이 났던 예루살렘 꼴이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염려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배당의 남녀반을 섞는 것이 변화고 개혁이며 그것이 사랑의 동산이 된다는 그 논리와 주장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남녀 7계명이 금한 사랑을 기준에서 본다면 분명히 옳습니다. 그러나 7계명을 금한 구원의 사랑을 기준에서 본다면 예배당을 연애당으로 만드는 타락이 아닙니까?
교회가 지금까지 변하여 세상을 닮아왔고 세상을 따라갔으니 교회가 변하고 변하며 이루어낸 마지막 결과는 교회인지 세상인지 구별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심은 것은 애매해서 단정하기 어려웠으나 현재 교회들의 사랑과 행위와 운영과 그 모습이 세상을 닮아가고 있지 과연 초대교회를 닮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은 곳이 없는 때임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면을 지적하며 오늘 시대 전체를 두고 탄식하는 소리 자체가 잦아들어버리니 이곳이 이것을 외치는 마지막 세대가 될까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②고신으로 예를 들어 미안하지만, 너무 좋은 본보기이니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③고신으로 예를 든 것은, 무슨 소리를 해도 결국 '변화'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④교회에 피아노가 들어온 예를 들어 드럼을 들여놓고 있습니다.
예배당 건축이 바뀌어 왔으니 교리도 바꿀 수가 있다는 논리
예배당 남녀 칸막이를 했다가 없앴으니 남녀 혼석으로 가는 것이 발전이라는 논리
한복 입던 목회자가 양복으로 바꾸어 입었으니, 세상을 따라 변해야 교회라는 논리입니다.
한복입던 한국사회가 양복으로 바꾸었으니, 바꾸는 것이 변화고 변화는 발전이라고 한다면, 입으로 먹던 밥을 이제는 항문으로 먹어야 발전이겠는가? 입 안에 이빨이 28개 있던 것을 이제 다 뽑아서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이 과거와 달라진 개혁이고 발전인가? 이렇게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꿀 것을 바꾸고, 또 바꾸어서 좋아질 것을 바꾸는 것이 발전인데, 있던 것을 무조건 없애고 바꾸고 고치기만 하면 전부가 발전이라고 해 버리는 것이 현재 교회의 모든 행태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교회는 거의 00대를 사용하여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인쇄를 했습니다. 1990년대 이후로는 컴퓨터 출력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속도가 단순히 빨라지고 종이의 질이 좋아지는 것을 변질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타이프로 치던 것을 워드프로세서로 편리하게 대체하고 그것을 컴퓨터로 입력하여 오늘처럼 자료를 이렇게 잘 사용하는 것을 두고 야단치는 것도 아닙니다. 발로 심방하던 것이 자전거로 또 자동차로 움직이는 것을 두고 본질이 변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⑤문제는 이 백영희신앙노선에 있는 교회들과 그 청년들입니다. 입장은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질문자께서 질문 내용 중에서 던져주신 숙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이미 시대가 바뀌었고 이 바뀐 세상에서 총공회 신앙노선으로 살아야 하는 청년들이 문제입니다. 백영희신앙노선 외에서는 이미 그 머리되는 지도자들부터 교단차원에서 다 세상 속으로 자진해서 항복하고 들어갔다고 표현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살펴볼 가치가 없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아는 바로는, 지난 20세기 후반부를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속에서 유일하게 성경 진리에다 못을 박아놓고 흔들리지 않고 걸어왔던 노선이 있다면 이곳이 중점으로 연구하는 백영희신앙노선입니다.
이 노선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현재 그들의 친구들을 따라 기호를 따라 드럼을 치고 남녀 혼성으로 예배당 안에서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즐기고 있을지라도 이러면 되고 이러면 안되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1970년대 한국교회적으로 급격히 탈선이 진행되던 때 술 담배 논쟁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선교사들의 업무 지침이었느니, 성경에 없는 것이라느니.... 했습니다. 이제 2003년이 된 지금, 그분들에게 다시 권합니다. 담배, 실컷 태우십시오. 자녀에게도 실컷 권하시고, 술독에도 푹 빠지십시오. 아마 간이 그 정도는 견딜 정도로 튼튼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그것도 목사님들이 술 담배를 할 수 있다고 우겨대던 1970년대 1980년대 그들은 세상이 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제까지나 교회가 이것 저것에 매여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그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자기들 깊은 양심에 진정 술 담배가 나쁘다는 것을 몰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몇몇 못된 신학자 목회자들 빼놓고는. 대개는 군대나 사회 생활 중에서 주위 눈치를 이기지 못하고 술 담배를 배웠는데, 자기 행동 합리화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신앙노선에 있는 청년들이 남녀 혼성으로 대학 써클 같이 움직이고 세상 이벤트식으로 나가고 하는 일은 그들 나이에 그들 주변 분위기 때문에 물이 들고 또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설마 그들이 성경에 근거를 두고 신학 이론을 정립하여 본 그 결과를 가지고 실행차원에서 하는 행동은 아닐 것입니다. 못된 청년 한 둘이 예배당 안에 이쁜 여자애들 욕심을 내고 접근하는 방법으로 시작을 했든지 아니면 주색잡기가 체질이어서 놀자판을 만들었을 것이고, 대개 선량한 청년 학생들은 배운 것이나 어릴 때 교육 받은 것에 의하면 문제가 있지만 대세를 거부하지 못해서 따라 나선 일입니다.
하다보니까 늦게 배운 도둑놈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이제 공회 교회들은 청년회 학생회 노는 것을 이제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교파들이 수십년 전에 재미보고 버렸던 것을 줏어들고 신기해 합니다. 그 신기해 하는 것을 감동이라 하고 그것을 영감이라고까지 한다나요! 어쨌든 교리 정립과 노선 검토가 없이 먼저 일을 벌여놓고 뒤에 와서 이곳에서 공개적으로 난타를 하기 때문에 자기 합리화를 위해 다윗도 여호와 앞에서 댄스를 했고 구약에도 악기 종류를 다 동원해서 여호와를 찬양했다는 다른 교단 논리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공회 신앙노선을 부인하고 발언하려면 가능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공회 신앙노선을 전제로 두고 발언하려면 얼른 입을 막는 것이 옳습니다. 그들 위에 있는 그들의 담임목회자가 지금 인사권을 쥐고 있는 장로님 딸, 회계 집사님 아들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제대로 말을 못할 뿐이지, 그 목사님들이 1989년 이전에는 거의 다 그러면 안 된다고 그 이유를 가르쳤던 분들입니다. 이제는 각 공회와 교회의 목회자 자녀들이 먼저 북을 치고 장구를 치고 강단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때입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을 것이니, 교리와 성경 원리로 말하면 금할 일이지만 대세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⑥우리의 변화 기준은 성경입니다. 성경에서 멀어지면 변질이고 가까와지면 발전입니다.
백목사님 밑에서 현재 이곳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답변자와 함께 제일 강하게 주장했던 분이 백목사님 생전 주일학교 총무입니다. 그분도 1998년 답변자와 만났던 마지막 대화에서 교인이 많이 모이게 하려면 할 수 있는 방법은 전부 다 해겠다고 했고 그후로는 이곳은 두번 만나지 않았습니다. 길이 다르면 욕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따로 만날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향해 바쁜 걸음을 움직여야 하는 실무자들입니다. 길이 다른 분들과 서로 허비할 시간은 없어야 정상입니다.
백목사님 밑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직접 모시고 일을 했던 최고 보수 강경파까지 다 이렇게 흩어진 마당에 지방교회에서 친구 따라 드럼셋트를 치고 있는 청년들을 향해 이곳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다. 목적도 좋고 동기도 좋았을 것이고 또 이해도 한다고 말은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주변과 지도자를 핑게댈 수는 없습니다. 좋은 동지가 있고 바로 외치는 종이 있으면 더 좋고 없으면 성경 들고 자기 힘대로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백목사님처럼 당시 현실과 환경 전부를 이기고 신앙노선 뿐 아니라 교회 부흥까지도 이룰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으나 오늘 그 신앙노선을 걷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자기가 걸어온 신앙노선을 지키는 정도이지 그 노선에서 부흥으로까지 나가기는 어려운 시대를 만나고 있습니다.
부흥은 있으면 더 좋고 없으면 실력이 없는 것이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노선이라는 것은 어떤 이권을 위해서도 내놓을 수 없습니다.
무조건 지킬 뿐입니다. 예배당 의자 길이를 6자로 하느냐 7자로 하느냐, 예배당 차량을 12인승으로 하느냐 15인승으로 하느냐는 문제를 두고는 타협도 양보도 협상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노선 자체를 두고는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변하는 시대 속에서 그 신앙노선을 지키는 것으로 '신앙'이 됩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나님이 바뀐 것이 아니고 진리가 바뀐 것도 아닙니다.
⑦총공회 소속 교회의 청년들이여!
아무짝에도 못쓸 한복도 제것이라고 도심 대로를 입고 다니는 것이 세상의 양심가들이고 우리 것을 좋아하는 요즘 젊은 세대라고 합니다. 수 천년 전에 세워두었던 묘지 비석 하나에 새긴 글자 몇 개를 두고 세상이 확 뒤집어져 버리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서울이 개발되면서 다 없어지고 현재 남아 있는 주택 하나가 있으면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보물이 되고 돈벌이가 됩니다.
이 시대 지금 기독교는 성경대로 기독교가 분명히 아닙니다.
이 시대 지금 한국교계는 성경대로 믿는 기독교가 분명히 아닙니다.
이 시대 지금 총공회 교회들의 현재 모습은 분명히 공회 노선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시대, 기독교가 멸종된 이 때에 세상 희소성의 가치라는 경제원리로 보더라도 기독교 원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할 때입니다. 한국교회가 없어졌고 총공회 교회들이 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세상식으로 말하자면 멸종의 막바지 위기에 놓여 있는 희귀종입니다. 잘 보존하고 나 한 사람이라도 잘 붙들고 있으면 아주 소장 가치가 천정부지로 뛸 때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역사 지난 날의 모든 시대별로 교회와 교인들을 모을 때, 가장 교회가 희귀하고 믿는 사람이 희귀하며 바로 믿고 나간 걸음이 없던 때는 바로 말세지 말인 지금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놓을 때, 오늘 우리가 받고 우리가 아는 이 신앙노선보다 수평 가치적으로도 더 귀한 노선은 희귀하겠지만, 동시에 오늘 이 바뀐 시대 상황 자체가 바로 믿는 노선을 붙들려고 하는 그 노력 그 사람 하나 하나에 대한 가치를 말할 수 없이 높이고 있는 때입니다.
시대가 과연 상상 못할 만큼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따라 바뀌려고 남 따라 가지 않으셨으면
이런 시대에, 따라 바뀌려고 남들과 선두 경쟁도 하지 마셨으면
이런 시대에, 남들보다 앞서 바뀌어야 한다고 헛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눈에 보이는 대로 다 바꾸어놓는 그런 말세의 죄인들이 되지 마셨으면 합니다.
누구에게 이런 말씀을 전하겠습니까? 백영희신앙노선에 있는 분들에게라야 말이라도 건네 볼 수 있는 때입니다. 천하가 목욕탕을 남녀 혼탕으로 만들 때, 우리는 남녀 분리탕을 만들 수 있고 또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그립고 드럼을 치고 싶으면 몰래 시내로 가서 혼자 실컷 발산하고 오십시오. 그리고 교회에 와서는, 세상에서는 놀았으나 이곳은 노는 곳이 아니라고 외치십시오.
못난 이들에게 우선은 낯 뜨거운 행동이 될지 몰라도, 몇번 반복해서 주장하고 나면 속으로는 그들도 뒷머리를 쇠망치로 얻어 맞은 듯 무엇인가 느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꼭 외부 환경이 그렇게 시대가 바뀌어 할 수 없다고 하신다면, 그들을 따라 에이즈가 들어올 것입니다. 자기 환경을 이기지 못한 청년이 앞으로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으면 자녀에게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나도 세상이 바뀌고 대세가 그렇게 되면 따라갔다.
너도 네 환경에 따라 네 몸을 맡기고 살아라.
그것이 인생이니라!'
그런데 자기는 옆으로 걸어가면서도 제 자식에게는 '똑 바로 걷지 못해!'라고 외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 속에 모든 답안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그 자신도 자기 환경에서 얼마든지 그 정도는 이길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
(질문)
총공회 청년들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여야합니까?
많은분들이 시대가 바뀌었다고들합니다.
총공회 청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여야합니까?
바른길을 알려주세요.
(답변)
시대가 바뀌지 않은 때는 없었습니다. 바뀔 것과 바뀌면 안될 것이 따로 있습니다.
1.시대가 바뀐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시대를 따라 바뀔 것이 있고 바뀌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①시대가 바뀌는 것은 확실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죽고 아버지 어머니가 가정을 책임지는 때가 되었다면, 시대는 과연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도 죽고 이제 아들과 며느리가 자녀를 낳고 가정을 책임지며 살아야 되는 시대가 되었다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세상에 달라질 것이 많고 또 달라지고 나면 변화를 느낄 것도 많지만 결국 제일 큰 변화의 요소는 인간입니다. 자세하게 관찰하면 하루도 바뀌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불신자들의 경험과 통계에서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늙고 세대가 교체되는 것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주변 환경에 속하는 집들도 길도 바뀝니다. 산의 모습을 바꾸는 숲의 형태도 바뀌고 한번씩 강타하는 태풍과 집중 호우로 물길도 변하게 됩니다.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상 인심과 눈빛까지도 돌변하는 경우가 있는데 매년 그렇게 크게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10년 혹 2-30년이면 상상못할 정도로 변할 일들이 있습니다.
②지금 변하는 세상은, 예정도 측정도 무의미할 만큼 초고속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시대는 1에 1을 더하며 변해오던 6천년 인류역사 중에서 가장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1에 1을 더하는 식으로 변해오던 시절을 두고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이 속담이 정신도 못차릴 만큼 변하게 된 것은 우리가 막 살다가 빠져 나왔던 지난 20세기였습니다. 20세기의 변화는 1에 1을 더하는 것이 아니고 1에 1을 곱했습니다. 그다음에는 2를 곱했고 그다음에는 3을 곱했습니다. 그 이전 백년 수백년에 변할 것이 단 몇 년에 바뀌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 20세기를 마감하던 순간에 나타난 컴퓨터 사용의 대중화는 이 홈을 운영하는 시골 산골에까지 초고속 인터넷 전용선이 들어오면서 이제 2제곱 4제곱으로 곱하며 더 이상 변화를 예측하거나 측정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③현재 바뀌는 세상은 특이하게도, 변화를 상대하는 인간의 본질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상이 바뀌면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려고 대응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세상이 바뀌고 주변 환경이 바뀔 때, 우리 인간이 보인 행동은 변화된 환경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고 또 어떻게 대응하여 보다 유리하게 그 환경을 이용하느냐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의 변화를 대처하는 인간의 근본 자세에 중대한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많은 것이 단숨에 바뀌어 왔고 그 변화된 환경에 적응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결과가 불과 한 세대에 여러번을 겪게 되었고, 최근에는 그 주기가 더 단축되어 불과 10여년 사이에 그런 일을 몇 번씩 겪게 되었고, 지금은 불과 몇 년 사이에 그런 황망하고 충격적인 상황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급변의 환경은 급기야 우리 인간이 환경의 변화를 대처하는 내적 대응 자세 자체를 바꾸어놓고 말았습니다. 환경의 변화를 어떻게 파악하고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느냐는 것이 원래 환경의 변화에 대한 인간의 기본 자세였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외부 변화를 대처하는 인간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인간이 외부를 변화시키는 주체로 그 본질을 스스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지금까지는 환경의 변화를 외침으로 보고 인간은 방어선을 구축하여 생존전략으로 대비하는 방어군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인간이 하나님이 정해 주신 자기 지위를 떠났습니다.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자기 주거가 있는데 그 주거 개념을 없애버리고 이제는 환경의 변화가 외침으로 오든지 말든지 인간은 인간대로 자기가 지킬 성은 버려두고 천하를 점령하기 위해 끝없는 원정길에 나서고 있습니다.
④변화에 중독이 되었고 변화가 자기 본능이 되어버린 이상한 인간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에게 넣어 두신 자연 본능은 현실에 대한 순응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현실의 변화는 자기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파악하여 그 변화된 현실 속에서 자기가 대처할 바른 자세와 행동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만든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 본질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현실을 이리 저리 바꾸어 가면서 평생 우리를 길러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의 본질과 본성의 타락이 그 정도를 넘어서되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라도 가지고 있어야 할 마지막 인간다운 본질까지 내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변화를 대처하는 것이 아니고 변화라는 것 자체에게 중독이 되었고 그 변화가 이제는 인간 자기 내면의 기본 본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머리를 떼서 발에 붙여 보아야겠고, 남자를 여자로 만들어보아야 하며, 동물과 사람을 뒤섞어 변종을 제 눈으로 봐야하도록 되었습니다.
인간이 편리하게 사용하려고 만든 로봇은 원래 '도구'의 개념인데, 이것이 어느날 인간처럼 자기대로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자기 중심으로 인간을 상대하게 된다면 '본질적인 변화'라고 할 것입니다. 주인에게 팔려와서 주인을 위해 존재하고 주인이 죽이든 팔든 할 수 있던 노예가 이제 시민권을 가지고 주인과 같이 시민권을 행사하는 상태가 되었다면 이는 본질적인 변화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넘어서는 안될 또 하나의 선을 넘어 타락의 종착을 향해 줄달음을 치되 지금까지는 타락의 레일 위를 달리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 달려가는 길조차도 벗어나서 미쳐버린 열차 기관차가 된 정도입니다. 기관차가 이전보다 출력은 더 강한 상태에서 이제 레일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사방천지를 제 가고 싶은 대로 제 멋대로 그때 그때 즉흥적으로 휘둘고 다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⑤이렇게 볼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에게는 바꿀 것이 있고 바꾸면 안 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부 환경이 변하고 인심이 변하면 그 환경과 접촉하는 인간들 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겨울 날씨를 위해 두터운 옷을 준비하고 여름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얇은 옷감을 개발하여 대처를 해 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이 변하는 환경을 상대할 때까지만 해도 '발전'이라는 개념이 있었고 '진보'라는 결과를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자연계시를 통한 현실인도와 그 현실인도를 순종하는 신앙걸음은 어떻게 되는 것이 옳은지를 참고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환경 변화를 전제로 인간이 어떻게 대처를 하느냐는 차원이 아니고 인간이 자기 힘대로 실력대로 마음에 내키는 대로 자기 환경을 얼마나 바꾸느냐는 차원이 되었습니다. 환경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새로운 행동이 있으니 이 하나님의 요구를 순종하는 것이 '정상적인 변화'이며 이렇게 변화되는 것을 발전이라 진보라고 합니다. 또 이 변화에 늦어진 것을 뒷늦게라도 따라 잡기 위해 시험전날 벼락치기 밤공부를 하듯 급하게 뒤따를 때 그것을 '개혁'이라고 합니다.
현재 세상 변화의 본질은, 과거처럼 하나님께서 환경을 바꾸어 주셨으니 이 바뀐 세상 속에서 나 할 일이 무엇이냐는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바꾸어 주기도 전에 또 하나님이 바꾸어 주시지도 않는 것을 인간이 먼저 나서서 바꾸어 놓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겨울로 세상을 바꾸니 무슨 옷으로 대처할까, 부모를 일찍 불러갔으니 어린 나이지만 생계를 어떻게 할까, 세월 속에 지식이 누적되어 차가 굴러 다니는 세상이 되었으니 이 빠른 기계를 어디에 쓰라는 뜻일까 하는 것이 정상적인 변화와 그 변화를 대처하는 인간의 대응입니다.
지금 인간의 본질 자체가 변질이 되었다고 거론하는 것은 이제 예를 든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명백하게 10번째 계명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를 부모로 만들고 부모를 아이 자리로 내려 앉혀놓고 그것을 개혁이고 변화라고 하며, 이런 변화로 인하여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하는 발광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꿀 것이 있고 바꾸어도 되는 것이 있으며 바꾸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고 절대 바꾸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제 부모는 내버려두어 고려장으로 죽듯 해놓고 옆집 아파트 개 죽은 것을 두고는 새댁들이 모여 앉아 울고 불고 난리를 하는 변화는 이전의 변화와는 양상이 다릅니다. 그런 새댁들 그런 젊은이들이 인권을 주장하는 세대라고 나서는 변화는 진정한 의미의 변화와는 정반대 개념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이곳은 변질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초식동물에게 육식사료를 먹여 그 소가 미쳐버린 것이 광우병이라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이런 변화들도 변화라는 이름으로 이 말세 대로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런 변질들이 이 말세 대로를 완전히 점령을 해버렸습니다. 바꿀 것이 있고 바꾸면 절대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⑥바꾸면 안될 것까지 바꾼 배경에는, 악령의 말세 경영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발전적인 변화, 하나님이 인도하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진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꾸도록 주신 현실을 따라 바꿀 것을 바꿀 때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바꾸어도 되는 것을 바꾸는 것까지는 그래도 그 동기와 목적이 좋을 것이라고 위안하면서 지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꾸지 않아도 될 것을 바꾸고 나서는 세대를 볼 때는 4차선 대로 안에서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듯 합니다. 만일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을 바꾸는 일이라면, 이것은 '변화' 또는 '개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것입니다.
아담의 첫 범죄 이후 지난 6천년간 악령은 역사 속에 거쳐간 수도 없는 죄를 내놓았고 그 죄는 그 당대를 어지럽히며 교회의 복음운동에 맞서 왔었습니다. 이제 역사 세계의 최종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악령이 자기 시대를 마감하며 마지막 가장 큰 무기를 준비하고 사용할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말세를 마지막으로 경영하기 위해 악령이 내놓은 전략이 바로 첫 타락으로 시작한 인성을 이제 그 뿌리까지 본질적으로 다 바꾸어 자연상태에서조차 창조의 형태를 없애버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을 악령이 훼파하되 말세 직전까지는 신앙내적인 것에 주력을 했고 이제 최종 순간이 다가오자 자연계시에 해당되는 세상에 속한 것까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창조에 속한 것은 그 모습과 그 본질, 그 흔적까지 모두 도말하고 있습니다. 죄가 죄를 낳아 죄를 길러 온 역사 중에서도 이 죄는 가장 최악의 죄일 것입니다.
⑦인간의 본질 자체가 '변화'라는 문제를 두고 변질되어 버린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악령이 '변화'에 대처하는 인간의 본질 자체를 통째로 바꾼 과정은 우선 변화를 통해 모든 문화와 기술이 발달되고 현저하게 좋아지게 된 결과를 보여 준 것이 먼저였습니다. 특히 지난 수백년, 그 중에서도 지난 1백여년 동안 모든 인류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까지도 넋을 잃고 악령이 문화 과학 기술을 통해 재주를 부리는 것을 경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후천년설이라는 교리는 기독교 핵심 보수쪽의 다수가 믿고 있는데 이 교리는 이렇게 좋아지고 있는 세상을 볼 때 주님 오시기 전에 천년왕국이 먼저 임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의학의 발달, 경제의 발달, 문화의 발달로 인하여 이만하면 지상천국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았으며 이 정도 발달이 좀더 지속되면 하늘의 천국이 이 세상에 이루어진 정도겠다고 하는 교리입니다. 보수측 정통신학이 이 정도였으니 교회는 그렇게 눈에 좋도록만 보이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 이면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도 교회도 전부가 '변화'라는 것은 '발전'과 같은 말이고 '발전'이란 '행복'이라는 것이라고 통일을 시켜버렸습니다.
악령이 이렇게 세상을 좋게 만들되 '변화'라는 모습을 통해 그 목표를 이루게 되자 이자 '변화'라는 것은 무조건 발전이며 행복이며 지상낙원을 향한 필수코스라고 단정하게 됩니다. 세상 분위기를 이렇게 통일되자 교회도 그 통일이 지금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르고 함께 동승해버렸고 20세기의 변화만큼이나 교회도 덩달아서 변하게 됩니다. '변화'라는 귀신에게 교회가 통째로 씌이게 된 것입니다. 이후 100여년 오늘까지 세계교회사의 흐름은 그 주제가 '변화'에 있었습니다.
'변화'란 세상 뿐 아니라 교회에게도 항상 옳은 것이고 좋은 것이며 그것은 개혁이라는 진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을 말하는 사람은 한 시대를 앞서 보는 선지자가 되는 판이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이는 사람은 양심가가 되고 그것을 주장하다 손해를 본 사람은 말세 교회를 살리려고 희생한 순교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를 가마솥에 넣고 통째로 삶아 치운 것임을 아는 교회는 현재 우리가 알기로는 백영희신앙노선밖에 없습니다. '변화'를 뒤집어 쓰고 나타난 말세 귀신이 말세 교회에게 복음을 전하는 천사로 환영받았다는 말입니다.
2.교회가 시대를 따라 변해온 면을 두고 살펴보아야 할 마지막 시점입니다.
①이곳이 아는 수준에서만 본다면, 이곳이 이런 주장을 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런지!
개를 주인 안방에 모셔놓고, 그 주인은 대문 앞 개집에 가서 집을 지키는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끓는 가마솥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철부지들이 세상을 경영하고, 그 할애비 할미들은 양민이 되어 통치받는 묘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모든 세상과 모든 교회들이 개혁이며 발전이며 지상낙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일치 떠들고 있는데, 이곳은 그 반대로 알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발언하고 있습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혹 이곳이 이런 발언을 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런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대에 소망이 없고 훼파되어 돌 위에 돌 하나도 첩놓이지 않고 끝장이 났던 예루살렘 꼴이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염려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배당의 남녀반을 섞는 것이 변화고 개혁이며 그것이 사랑의 동산이 된다는 그 논리와 주장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남녀 7계명이 금한 사랑을 기준에서 본다면 분명히 옳습니다. 그러나 7계명을 금한 구원의 사랑을 기준에서 본다면 예배당을 연애당으로 만드는 타락이 아닙니까?
교회가 지금까지 변하여 세상을 닮아왔고 세상을 따라갔으니 교회가 변하고 변하며 이루어낸 마지막 결과는 교회인지 세상인지 구별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심은 것은 애매해서 단정하기 어려웠으나 현재 교회들의 사랑과 행위와 운영과 그 모습이 세상을 닮아가고 있지 과연 초대교회를 닮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은 곳이 없는 때임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면을 지적하며 오늘 시대 전체를 두고 탄식하는 소리 자체가 잦아들어버리니 이곳이 이것을 외치는 마지막 세대가 될까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②고신으로 예를 들어 미안하지만, 너무 좋은 본보기이니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③고신으로 예를 든 것은, 무슨 소리를 해도 결국 '변화'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④교회에 피아노가 들어온 예를 들어 드럼을 들여놓고 있습니다.
예배당 건축이 바뀌어 왔으니 교리도 바꿀 수가 있다는 논리
예배당 남녀 칸막이를 했다가 없앴으니 남녀 혼석으로 가는 것이 발전이라는 논리
한복 입던 목회자가 양복으로 바꾸어 입었으니, 세상을 따라 변해야 교회라는 논리입니다.
한복입던 한국사회가 양복으로 바꾸었으니, 바꾸는 것이 변화고 변화는 발전이라고 한다면, 입으로 먹던 밥을 이제는 항문으로 먹어야 발전이겠는가? 입 안에 이빨이 28개 있던 것을 이제 다 뽑아서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이 과거와 달라진 개혁이고 발전인가? 이렇게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꿀 것을 바꾸고, 또 바꾸어서 좋아질 것을 바꾸는 것이 발전인데, 있던 것을 무조건 없애고 바꾸고 고치기만 하면 전부가 발전이라고 해 버리는 것이 현재 교회의 모든 행태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교회는 거의 00대를 사용하여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인쇄를 했습니다. 1990년대 이후로는 컴퓨터 출력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속도가 단순히 빨라지고 종이의 질이 좋아지는 것을 변질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타이프로 치던 것을 워드프로세서로 편리하게 대체하고 그것을 컴퓨터로 입력하여 오늘처럼 자료를 이렇게 잘 사용하는 것을 두고 야단치는 것도 아닙니다. 발로 심방하던 것이 자전거로 또 자동차로 움직이는 것을 두고 본질이 변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⑤문제는 이 백영희신앙노선에 있는 교회들과 그 청년들입니다. 입장은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질문자께서 질문 내용 중에서 던져주신 숙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이미 시대가 바뀌었고 이 바뀐 세상에서 총공회 신앙노선으로 살아야 하는 청년들이 문제입니다. 백영희신앙노선 외에서는 이미 그 머리되는 지도자들부터 교단차원에서 다 세상 속으로 자진해서 항복하고 들어갔다고 표현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살펴볼 가치가 없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아는 바로는, 지난 20세기 후반부를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속에서 유일하게 성경 진리에다 못을 박아놓고 흔들리지 않고 걸어왔던 노선이 있다면 이곳이 중점으로 연구하는 백영희신앙노선입니다.
이 노선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현재 그들의 친구들을 따라 기호를 따라 드럼을 치고 남녀 혼성으로 예배당 안에서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즐기고 있을지라도 이러면 되고 이러면 안되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1970년대 한국교회적으로 급격히 탈선이 진행되던 때 술 담배 논쟁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선교사들의 업무 지침이었느니, 성경에 없는 것이라느니.... 했습니다. 이제 2003년이 된 지금, 그분들에게 다시 권합니다. 담배, 실컷 태우십시오. 자녀에게도 실컷 권하시고, 술독에도 푹 빠지십시오. 아마 간이 그 정도는 견딜 정도로 튼튼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그것도 목사님들이 술 담배를 할 수 있다고 우겨대던 1970년대 1980년대 그들은 세상이 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제까지나 교회가 이것 저것에 매여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그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자기들 깊은 양심에 진정 술 담배가 나쁘다는 것을 몰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몇몇 못된 신학자 목회자들 빼놓고는. 대개는 군대나 사회 생활 중에서 주위 눈치를 이기지 못하고 술 담배를 배웠는데, 자기 행동 합리화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신앙노선에 있는 청년들이 남녀 혼성으로 대학 써클 같이 움직이고 세상 이벤트식으로 나가고 하는 일은 그들 나이에 그들 주변 분위기 때문에 물이 들고 또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설마 그들이 성경에 근거를 두고 신학 이론을 정립하여 본 그 결과를 가지고 실행차원에서 하는 행동은 아닐 것입니다. 못된 청년 한 둘이 예배당 안에 이쁜 여자애들 욕심을 내고 접근하는 방법으로 시작을 했든지 아니면 주색잡기가 체질이어서 놀자판을 만들었을 것이고, 대개 선량한 청년 학생들은 배운 것이나 어릴 때 교육 받은 것에 의하면 문제가 있지만 대세를 거부하지 못해서 따라 나선 일입니다.
하다보니까 늦게 배운 도둑놈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이제 공회 교회들은 청년회 학생회 노는 것을 이제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교파들이 수십년 전에 재미보고 버렸던 것을 줏어들고 신기해 합니다. 그 신기해 하는 것을 감동이라 하고 그것을 영감이라고까지 한다나요! 어쨌든 교리 정립과 노선 검토가 없이 먼저 일을 벌여놓고 뒤에 와서 이곳에서 공개적으로 난타를 하기 때문에 자기 합리화를 위해 다윗도 여호와 앞에서 댄스를 했고 구약에도 악기 종류를 다 동원해서 여호와를 찬양했다는 다른 교단 논리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공회 신앙노선을 부인하고 발언하려면 가능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공회 신앙노선을 전제로 두고 발언하려면 얼른 입을 막는 것이 옳습니다. 그들 위에 있는 그들의 담임목회자가 지금 인사권을 쥐고 있는 장로님 딸, 회계 집사님 아들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제대로 말을 못할 뿐이지, 그 목사님들이 1989년 이전에는 거의 다 그러면 안 된다고 그 이유를 가르쳤던 분들입니다. 이제는 각 공회와 교회의 목회자 자녀들이 먼저 북을 치고 장구를 치고 강단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때입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을 것이니, 교리와 성경 원리로 말하면 금할 일이지만 대세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⑥우리의 변화 기준은 성경입니다. 성경에서 멀어지면 변질이고 가까와지면 발전입니다.
백목사님 밑에서 현재 이곳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답변자와 함께 제일 강하게 주장했던 분이 백목사님 생전 주일학교 총무입니다. 그분도 1998년 답변자와 만났던 마지막 대화에서 교인이 많이 모이게 하려면 할 수 있는 방법은 전부 다 해겠다고 했고 그후로는 이곳은 두번 만나지 않았습니다. 길이 다르면 욕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따로 만날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향해 바쁜 걸음을 움직여야 하는 실무자들입니다. 길이 다른 분들과 서로 허비할 시간은 없어야 정상입니다.
백목사님 밑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직접 모시고 일을 했던 최고 보수 강경파까지 다 이렇게 흩어진 마당에 지방교회에서 친구 따라 드럼셋트를 치고 있는 청년들을 향해 이곳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다. 목적도 좋고 동기도 좋았을 것이고 또 이해도 한다고 말은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주변과 지도자를 핑게댈 수는 없습니다. 좋은 동지가 있고 바로 외치는 종이 있으면 더 좋고 없으면 성경 들고 자기 힘대로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백목사님처럼 당시 현실과 환경 전부를 이기고 신앙노선 뿐 아니라 교회 부흥까지도 이룰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으나 오늘 그 신앙노선을 걷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자기가 걸어온 신앙노선을 지키는 정도이지 그 노선에서 부흥으로까지 나가기는 어려운 시대를 만나고 있습니다.
부흥은 있으면 더 좋고 없으면 실력이 없는 것이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노선이라는 것은 어떤 이권을 위해서도 내놓을 수 없습니다.
무조건 지킬 뿐입니다. 예배당 의자 길이를 6자로 하느냐 7자로 하느냐, 예배당 차량을 12인승으로 하느냐 15인승으로 하느냐는 문제를 두고는 타협도 양보도 협상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노선 자체를 두고는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변하는 시대 속에서 그 신앙노선을 지키는 것으로 '신앙'이 됩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나님이 바뀐 것이 아니고 진리가 바뀐 것도 아닙니다.
⑦총공회 소속 교회의 청년들이여!
아무짝에도 못쓸 한복도 제것이라고 도심 대로를 입고 다니는 것이 세상의 양심가들이고 우리 것을 좋아하는 요즘 젊은 세대라고 합니다. 수 천년 전에 세워두었던 묘지 비석 하나에 새긴 글자 몇 개를 두고 세상이 확 뒤집어져 버리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서울이 개발되면서 다 없어지고 현재 남아 있는 주택 하나가 있으면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보물이 되고 돈벌이가 됩니다.
이 시대 지금 기독교는 성경대로 기독교가 분명히 아닙니다.
이 시대 지금 한국교계는 성경대로 믿는 기독교가 분명히 아닙니다.
이 시대 지금 총공회 교회들의 현재 모습은 분명히 공회 노선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시대, 기독교가 멸종된 이 때에 세상 희소성의 가치라는 경제원리로 보더라도 기독교 원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할 때입니다. 한국교회가 없어졌고 총공회 교회들이 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세상식으로 말하자면 멸종의 막바지 위기에 놓여 있는 희귀종입니다. 잘 보존하고 나 한 사람이라도 잘 붙들고 있으면 아주 소장 가치가 천정부지로 뛸 때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역사 지난 날의 모든 시대별로 교회와 교인들을 모을 때, 가장 교회가 희귀하고 믿는 사람이 희귀하며 바로 믿고 나간 걸음이 없던 때는 바로 말세지 말인 지금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놓을 때, 오늘 우리가 받고 우리가 아는 이 신앙노선보다 수평 가치적으로도 더 귀한 노선은 희귀하겠지만, 동시에 오늘 이 바뀐 시대 상황 자체가 바로 믿는 노선을 붙들려고 하는 그 노력 그 사람 하나 하나에 대한 가치를 말할 수 없이 높이고 있는 때입니다.
시대가 과연 상상 못할 만큼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따라 바뀌려고 남 따라 가지 않으셨으면
이런 시대에, 따라 바뀌려고 남들과 선두 경쟁도 하지 마셨으면
이런 시대에, 남들보다 앞서 바뀌어야 한다고 헛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눈에 보이는 대로 다 바꾸어놓는 그런 말세의 죄인들이 되지 마셨으면 합니다.
누구에게 이런 말씀을 전하겠습니까? 백영희신앙노선에 있는 분들에게라야 말이라도 건네 볼 수 있는 때입니다. 천하가 목욕탕을 남녀 혼탕으로 만들 때, 우리는 남녀 분리탕을 만들 수 있고 또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그립고 드럼을 치고 싶으면 몰래 시내로 가서 혼자 실컷 발산하고 오십시오. 그리고 교회에 와서는, 세상에서는 놀았으나 이곳은 노는 곳이 아니라고 외치십시오.
못난 이들에게 우선은 낯 뜨거운 행동이 될지 몰라도, 몇번 반복해서 주장하고 나면 속으로는 그들도 뒷머리를 쇠망치로 얻어 맞은 듯 무엇인가 느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꼭 외부 환경이 그렇게 시대가 바뀌어 할 수 없다고 하신다면, 그들을 따라 에이즈가 들어올 것입니다. 자기 환경을 이기지 못한 청년이 앞으로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으면 자녀에게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나도 세상이 바뀌고 대세가 그렇게 되면 따라갔다.
너도 네 환경에 따라 네 몸을 맡기고 살아라.
그것이 인생이니라!'
그런데 자기는 옆으로 걸어가면서도 제 자식에게는 '똑 바로 걷지 못해!'라고 외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 속에 모든 답안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그 자신도 자기 환경에서 얼마든지 그 정도는 이길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