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신앙자유, 양심자유, 교회자유?

구남단2
작성자
추천.h3
작성일
2006.10.16
출처: /연구실/문의답변/182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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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신앙자유, 양심자유, 교회자유란?


오래전부터 신앙자유, 양심자유, 교회자유가 무얼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좋은 직장 구해서 예배 자유롭게 참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것도 꼭 필요하겠지만 내부적으로 악령, 악성, 악습으로부터의 자유가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앙자유, 양심자유, 교회자유란 무엇입니까?
대속의 관점에서 평생에 새길만큼의 내부에 담긴 깊고 깊은 뜻을 알고 싶습니다.

저는 생각해 봤습니다.
신앙자유는 대속주의로 살때 가능한 것이고, 양심자유는 신본주의로 살때 가능한 것이고 교회자유는 매 현실에서 은혜주의로 현실구원이 이루어 져야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해 봤습니다.

또한 성도는 신앙자유, 양심자유, 교회자유를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루 아침에 다 자랄 수는 없지만, 자유가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내게 자유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답변)
교회 정치의 제1, 제2원리가 '양심자유' '교회자유'입니다. 이 원리의 외부, 내부


1.우선 질문하신 내용에 관련한 몇 가지 상식을 말씀드립니다.

①장로교의 신앙자유는 2가지로 표현됩니다. '양심자유'와 '교회자유'입니다.

모든 장로교는 헌법을 가지고 있으며 그 헌법들은 예외없이 제1장 제1조에 '양심자유' 그리고 제2조에 '교회자유'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장로교 정치의 첫 원리가 '신앙은 자유'라는 것을 선언한 것인데 '양심자유'는 개인의 신앙자유를 말하고 '교회자유'는 교회의 신앙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장로교 정치원리의 신앙자유는 2가지로 요약되고 있는데, 질문 내용처럼 '신앙자유, 양심자유, 교회자유'라고 3가지로 표현하는 것은 주로 백영희신앙노선에 있는 분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백목사님이 평생 그렇게 표현을 했기 때문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 교회 역사적으로나 현재 일반 교회 상식으로는 그렇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②백목사님이 3가지 자유로 표현한 이유는, '자유'의 의미를 제한하기 위해서입니다.

백목사님 생전에 미국의 '독립교회' 대표들이 서부교회로 백목사님을 방문하러 온 적이 있었습니다. 일반 교회들의 교권 단체주의를 반대하며 미국 내에서 독립교회를 주도하는 분들인데 그들은 한국 내에서는 백목사님이 독립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로 듣고 온 것입니다. 당시 미국에서 경제적 지원까지 아끼지 않겠다고 제의한 것을 백목사님은 일절 사양합니다. 그때 백목사님이 그들에게 왜 독립교회로 나가는지 질문했을 때, 그들은 '양심자유' '교회자유' 때문이라고 대답했는데, 백목사님은 '자유란 개인의 개별 자유가 되면 안되고 하나님과 말씀에 붙들려 살고싶은 그 자유가 꺾이면 안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재 장로교 정치 원리의 제1조와 제2조는 '양심자유'와 '교회자유'로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자세한 설명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일반인들이 입에 외워서 익은 표현은 '양심자유' '교회자유'입니다. 그러다보니 개인은 제 양심대로 하면 되고, 교회는 개교회가 개교회 자유로 하면 되는 것이 교회 정치의 첫 원리라고 인식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실제 이 '양심자유' '교회자유'는 일종의 구호가 되고 또 하나의 행동지침이 되어, 개인이나 어느 개별교회가 하나님을 떠나고 말씀을 어기는 자유로 사용되면서 오늘 교회가 '자유' 때문에 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자유'라는 표현을 그냥 사용하게 될 때 발생하는 이런 잘못된 인식을 막기 위해 백목사님은 양심자유나 교회자유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일부러 '신앙자유'라는 표현을 꼭 쓰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양심자유'와 '교회자유'라는 장로교 정치의 첫 원리는 '하나님과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지, 어느 개인이나 교회가 삐뚤어진 자기 양심을 따라 가도 자유를 보장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③참고로, 일반 장로교 정치원리의 제1조와 제2조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제1조: 양심의 자유

양심을 주재하시는 이는 하나님 뿐이시다. 그가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그 말씀에 위반되거나 탈선되는 사람의 명령이나 교리를 받지 않게 양심의 자유를 주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종교에 관계되는 각 항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각자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으므로 누구든지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


제2조: 교회의 자유

양심의 자유가 개인에게 있음 같이 어느 교파, 어느 교회든지 교인의 입회 규칙과 입교인 및 직원의 자격과 교회 정치의 일체 조직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하신 대로 설정할 자유권이 있다.


2.세상 교회들이 말하는 자유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습니다만, 문제는 진정한 '자유'입니다.

①교회가 교회 헌법에서 말하는 자유는 그야말로 세상식 방종을 허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과 말씀에 붙들려 살 수 있는 자유를 자유라고 하는데, 문제는 각자가 깨닫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하는 것이 자기 양심의 자유가 되고 교회의 자유로 되는 데까지 나가고 있습니다. 기장측의 한신대 부류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공자를 믿어도 천국을 간다고 말하는데 그런 자유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자유입니다.

말하자면 죄짓는 자유, 방종을 보호하는 자유, 하나님을 버리는 자유, 말씀을 폐기하는 자유가 오늘 장로교의 2가지 자유에 의하여 보장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방종이 판을 칠 수 있도록 자유를 규정하였을까요? 그렇다면, 이런 방종을 막기 위해서는 자유에 대한 이 규정을 제한해야 할까요?


②이 '자유'라는 규정은, 진정 하나님과 진리로 자유할 사람에게 그 행동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교회 헌법이 '자유'를 허락하고 있다 해서 죄짓는 자유까지 자기가 가질 자유인 줄 아는 사람을 막으려고 만일 교회가 자유에 대하여 다른 규제를 하게 되면 그 규제에 의하여 정작 죽어나는 것은 하나님과 진리로 자유할 사람들입니다. 죄지을 자유로 알고 방종하는 사람들은 교권의 눈치를 보고 행동을 하지만, 진정 하나님과 진리에 따르는 자유를 가질 사람들은 잘못된 규제에 제재에도 불구하고 그 자유대로 행동할 것이고, 그 행동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자유'라는 규정은 겉으로는 방종할 사람을 방종하도록 만든 규정같으나, 내적으로는 진리에 자유할 우리를 위한 규정이라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③문제는, 진정한 자유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교회의 헌법이 이런 저런 규정을 아무리 만들어봐야 그 규정 때문에 죄지을 사람이 막히는 수도 없을 것이고 또 그 규정이 아니라도 죄를 짓지 않을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하나의 선언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질 진정한 '신앙자유'란 어떤 차원이며 어떤 면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냐는 문제입니다.


3.믿는 사람만은, 자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①자유라는 의미는 죄를 짓느냐 의로 사느냐는 자유를 자유라고 합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할 때 그 제일 핵심되는 요소는 자유성입니다. 만물과 달리 인간에게는 자유성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자유라는 의미를 아침을 먹느냐 마느냐,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는 결정과 행동에 대한 자유를 두고 자유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은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느냐 사슴을 잡느냐는 것은 호랑이의 자유인데 이런 자유를 자유라고 한다면, 짐승에게도 자유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다고 할 때 이 자유성은, 하나님 없이 사느냐 아니면 하나님 모시고 사느냐, 죄를 짓느냐 의로 사느냐는 이 기준에서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아담에게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는데 그 선택권을 가지고 아담은 죄를 짓는 자유로 사용을 했습니다. 이 한번의 선택으로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두번 다시 간섭을 받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번 그렇게 선택한 이상 그다음 다시 돌아오는 자유까지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두고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아담은 하나님 없는 지옥을 택했던 것입니다.


②다행히, 택자에게는 예수님 대속으로 인하여 다시 한번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지금도 안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짓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오직 중생된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활의 대속을 하심으로 이 선택권이 한번 더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믿는 우리는 다시 한번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권에 매 현실마다 주어지면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더 주어진 기회에 다시 한번 더 죄를 택하게 되면 그 현실 그 요소는 다시는 사하는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한번 더 못박히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유'라는 이 개념이 지금 세상이나 교회나 꼭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 국민이 대통령을 선택할 자유, 장애인이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자유, 돈없는 사람이 배울 자유, 여자가 차별받지 않을 자유를 자유의 전부인 줄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의 의미는 그 차원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다시 한번 중생시켜 믿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진리를 따라 살 자유와 또 다시 하나님과 진리를 버리고 살 자유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의 선택 뒤에는 영원 영생과 영원 멸망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전적 우리의 자유입니다.


③그렇다면 당연히 우리의 자유는, 죄를 짓지 않을 자유입니다. 하나님과 진리로 살 자유입니다.

무엇이 '양심자유'인가? 주님 날 대속했으니 이 주님 위해 살겠다는 양심이 양심이고, 이 양심은 어디에도 막히지 말고 자유로워야 하니 양심자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주님 주신 이 복음을 전하는데 그 무엇이 막아도 막히지 말고 전해야 하겠으니 교회자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대속으로 다시 한번 구원해 놓은 우리를 향해 하나님과 진리가 인도하는 길은 우선 예수님의 이 대속의 사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자유를 가진 사람이고 그렇게 살지 못하면 자유를 뺏긴 사람입니다. 대속의 사람으로 살려고 하는데도 우리를 막는 원수는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는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 이 대속으로 살고자 하는 새사람의 자유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현실은 이 대속으로 살고자 할 때 많은 어려움과 손해를 보도록 만들며 우리가 대속으로 살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주님 대속은 사죄와 칭의와 하나님과 화친, 그리고 영생의 소망 4가지입니다. 주님 대속을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의 몸과 마음까지도 죄없는 자로 마음껏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이 자유를 주셨는데 이 자유를 막는 것이 안으로는 옛사람이요 밖으로는 세상 현실이니 믿는 우리에게는 우리는 이 안팎의 대적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말할 것 없이 우리 믿는 사람은 중생 될 때 예수님의 대속으로 중생이 되었는데, 이 예수님의 대속은 믿는 우리의 몸과 마음은 죄를 짓지 않으려면 죄를 짓지 않을 자유를 주셨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이런 자유가 없습니다. 밥을 먹고 안 먹는 자유는 있지만,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는 자유는 중생한 성도에게만 주어진 권리입니다.


④대속받은 성도가 대속받은 사람으로 살 때, 주변과 교권에서는 많은 박해가 있게 됩니다.

자기 속의 옛사람도 원수지만 자기 밖에서 대속의 사람으로 살려는 것을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막는 원수도 많습니다. 세상 불신 사회 제도들이 첫째는 막고 나섭니다만, 더 두려운 원수는 바로 함께 믿는 사람들이나 신앙의 선배들 또는 교회 위에 설치되어 있는 교권 제도들입니다.

일본의 태양신에게는 절할 수 없다는 것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것인데, 일본 총독부는 힘으로 그들을 강요했고 당시 교회는 교회적으로 신사참배를 하는 사람들은 제명을 시키고 교회에서 쫓아내버리고 있었습니다. 타락한 교회는 바로 믿으려는 사람의 그 형편을 낱낱이 알기 때문에 세상이 탄압을 할 줄 몰라서 탄압을 못하는 부분을 알려주고 지도하여 씨를 말려버리는 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기도가는 곳을 가룟유다는 알기 때문에 예수님을 잡으려는 사람들을 그리로 안내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⑤믿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대속인 피, 말씀인 진리, 하나님이신 성령으로만 붙들려 살아야 합니다.

개인과 개별 교회는 어느 누가 무슨 반대를 해도, 예수님의 대속의 사람으로 살고 이 대속에 붙들려 구원 운동을 할 수 있는 이 자유권을 뺏겨서 안됩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이 자유권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포기하지 않으면 외부에서 강제로 뺏어갈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대로 산다고 상대가 생명을 뺏으면 대속에 붙들려 산 그 사람은 대속에 붙들려 산 상태에서 끝이 났기 때문에 영원한 하늘나라의 완전한 자유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계와 우주의 영원은 바로 그런 자유로 산 그 사람들에게 다 맡겨져 그 사람들이 자기 자유로 그 영원을 통치하게 됩니다. 바로 그 사람들 속에는 그 사람들의 자기 중심으로 영원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자유로 주님께 붙들려 살기를 있는 힘 다 했던 바로 그 순종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헌법에서 이런 저런 규정을 내놓은 것은 수박 겉이나 핥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양심자유' '교회자유'라는 교회 헌법의 규정은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번 참고나 하시면 됩니다. 다른 교회 다른 성도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서 그들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표현을 상식적으로 몇 가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들어 두시는 정도라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고 말을 했을지라도 우리는 그들이 교회 헌법 제1조와 제2조에서 발표한 '자유'의 의미를 성경에서 직접 찾아 우리 신앙에서 우리 차원으로 이해하고 살펴야 할 일입니다. 피흘려 우리에게 다시 쥐어 주신 '죄 짓지 않을 수 있는' 사죄, '주님 뜻대로만 살 수 있는' 칭의,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화친', 영원만 바라보고 살 수 있는 '소망', 이것을 주님이 마음껏 가지고 살라고 주셨으니 이것을 가지고 살 수 있는 바로 이 자유가 우리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 외부로는 일반 교회들이 헌법으로 양심자유와 교회자유를 써먹어니까 잠깐 참고로 알아 두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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