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학생회 예배인도시의 설교 수준은?
구남단2
작성자
추천.h3
작성일
2006.11.30
출처: /연구실/문의답변/294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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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설교
학생부 교사입니다
목사님 글중에서 강단에서 설교를 할때는 최고 수준으로 해야한다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러면 학생회나 청년회 예배시 그때도 설교를 최고의 수준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까?
(답변) 설교는 제일 최고의 수준으로 해야 합니다.
1.십자가 대속을 주제로 예를 들겠습니다. 대속을 가르치려면 구원도 가르쳐야 합니다.
설교 내용에서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과 그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한 것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구원과 대속을 설교에 주제로 삼거나 아니면 적어도 구원과 대속의 최소한을 가르치려고 한다면, 설교라는 것은 너무 어려워서 교인에 따라 망설여진다는 말을 하지 않을 분들이 없을 것입니다.
2.구원과 대속이라는 단어는 많아도 그 내용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습니다.
'구원'이나 '대속'을 내용으로 설교한 다른 설교집들을 많이 보았으나 구원과 대속의 최소한의 기본을 가르쳤다고 생각한 설교조차 거의 없었습니다. 설교 내용의 대부분은 얼마나 아프셨겠는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부분만 예를 들어 설명을 반복하지, 죄란 무엇이며 죄의 종류가 몇 가지며 죄의 값이 무엇이며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예수님이 왜 져야 하며, 죄라는 것을 왜 애당초 우리에게 주셨으며,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면 예수님이 왜 하나님으로 사람되어 왔어야 하며, 그리고 예수님이 대속을 위해서 왜 죽어야 했고 왜 다시 살아야 하며, 왜 아버지 없는 상태로 출생해야 했고 왜 인간의 고통을 당해야 했는가 ........ 이런 면을 설교한 설교집은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말씀드린 이런 내용은 설교라고 하지 않고 신학의 분과 중에서 '조직신학'이라고 합니다. 신학에서 가장 난해하다고 알려진 조직신학의 구원론과 기독론은 각각 3학점 정도로 대학원 과정 2학년에서 3학년 사이에 공부하는데 모두들 어려워서 어떻게 배웠는지도 모르고 통과하는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대속'과 '구원'에 대하여 교인을 상대로 설교를 하려면 목회자들로서는 자신들이 신학교 다닐 때 가장 어려워서 이해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 조직신학 과목 시험을 칠 때 점수를 제대로 딸 수도 없어서 미리 문제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몇 부분만 외워서 겨우 졸업을 했는데, 이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 신학에 전혀 지식이 없고 또 고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교인들이나 학생들을 상대로 그 교리들을 가르친다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가르치려면 가르치겠지만 그것을 예배 때마다 계속해서 그렇게 가르친다면 신학강좌가 될 것이고, 그렇다고 간단하게 몇 마디만 할 것 같으면 항상 꼭같은 내용이니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면 때문에 지금 설교를 대단히 수준높게 가르치는 분들이라 해도 성경 본문 중심으로 설교를 해도 어렵게 가르친다는 말이 나올 것인데, 아예 기독교 교리 강좌를 평범한 설교 시간에 중심으로 가르친다면 어느 교인이 그런 어렵고 재미없는 설교를 계속 들으러 교회에 나오겠느냐는 반문이 있을 것입니다.
3.청년회면 몰라도, 학생회 설교라면 이제 이런 어려운 설교를 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학생회라면 주로 중고등학생들이어서 학교 공부로는 제법 무엇을 배운 듯 해도 교리 관련 내용에 대하여는 한참 어린 때입니다. 청년회라면 요즘 대학을 나오지 않은 이들이 별로 없으니까 아무리 어려운 설교를 해도 그 내용 자체가 어려워서 듣지 못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학생회를 중심으로 예를 든다면, 그 학생들이 아무리 어리다 해도,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박혀야 했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이 우리 대신 사람되어 고생했고 십자가에서 그 아픈 고통을 참고 대신 죽어주셨으니 감사하다는 이런 호소적 감정적 설교만 한다면, 이것은 잘못이라고 이곳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4.최고 수준의 설교란, 단어나 표현을 어렵게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 내용입니다.
대속, 구원, 사죄, 신인양성일위 등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달리 바꾸는 것은 극단적으로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단어는 많아봐야 몇 백개 더 되겠습니까? 중학교 3학년 과정에서 배우는 영어단어가 약 1500여개 정도 되는데, 남의 글을 남의 문자로 통째로 외워가면서도 그 정도는 외우고 있습니다. 설교 시간 한번에 그 단어를 다 내놓는 것도 아니니까, 교회가 오랜 역사를 통해 확정한 교리와 표현은 최대한 그대로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설교를 최고의 설교로 하라는 말은, 이렇게 교리적으로 교회가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그대로 사용하되, 다만 그 설교 내용에서 만일 구원을 가르치려면 대속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대속을 가르치려면 지은 죄를 먼저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죄를 가르치려면 그 학생들이 도덕의 죄, 국법의 죄, 인륜을 범한 죄와 성경이 말한 죄를 혼동할 것이니까,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께 삐뚤어진 것을 말한다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삐뚤어진 첫 행위가 에덴동산의 범죄니까 이를 원죄라 한다고 가르치고, 또 자기가 지은 죄는 본죄라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원죄와 본죄로 죄값이 있어 우리는 죽어야 하는데, 지옥을 가지 않게 하려면 이 죄를 대신 갚는 존재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되어 왔다는 것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설교자가 시간이 없어 간단하게 가르치는 것은 자유지만, 또 설교자가 주로 가르치려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럴 수 있지만, 만일 설교자가 이런 내용은 실제로는 꼭 알아야 하지만 학생들이 어리고, 또 오늘 처음 나온 사람이 이해를 하겠는가 하는 면 때문에 설교에서 가르칠 내용을 빼버린다든지, 아니면 선악과라는 추상적 개념을 알아듣겠나 해서 사과를 몰래 먹다가 목에 걸렸다는 식으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5.마지막으로 학교로 예를 들면
고등학교에서 한반에 40명을 놓고 가르치면 1등하는 학생은 서울대를 목표하고 5등 하는 학생은 서울 4년제 대학을 목표로 하고 20등 하는 학생은 지방대 아무 곳이나 4년제나 갈려고 하는 학생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칠 때 서울대를 목표로 하는 1등하는 학생의 수준과 진도에 맞추면 5등 이하 학생은 눈만 껌뻑거리고 시간만 때우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 10등 정도 학생 수준에 강의 난이도와 진도를 맞추면 5등 안에 있는 학생들은 학교 출석부 때문에 무료하게 앉아 있어 주어야 하는 형편이 생깁니다.
입시 성적에 학교 명운을 걸고 있는 학교는 5등 안에 드는 학생을 목표로 몰아갑니다. 나머지 학생들은 5등 안에 드는 학생들 들러리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피하려면 수준별로 학급을 편성해야 하는데, 위화감을 조성한다고 평준화 정책이 막고 있습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좀 풀린다고 듣고 있으나 크게 개선될 여지가 없습니다. 자연계시의 이치로 보면 수준별로 해야 합니다. 못나서 열등감을 가진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세상 생존경쟁의 처절함을 맛봐야 제 살길을 어떻게 해서라도 찾게 됩니다.
문제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가르칠 때, 교인들의 수준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장로님 또는 이해력 높은 지성인들은 어려워도 최고의 설교를 할 수 있는데 처음 나온 교인 주일학생 연로한 분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가 지금 세상을 너무 지나치게 닮아서 교회의 조직과 체제가 전부 세상 조직을 닮아있습니다. 장년반 조직은 세상 행정조직을 본따고, 주일학교 학생회 조직은 학교 교육 체제를 정확하게 옮겨놓고 있습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닮으면 그것을 속화라 하고, 속화가 되면 타락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경을 가르치는 곳이라면, 성경은 설교하는 이의 설득력에 달려있거나 웅변의 호소력에 달린 것이 아니고 듣는 이 속에 성령의 감화와 감동에 달려 있다면, 세상 학교 강의처럼 1등을 기준으로 가르치면 10등 이하 학생들이 어찌 어려워서 따라오겠느냐는 개념이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화가 없으면 아무리 쉽게 쉽게 설명을 해도 도저히 믿어지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것이 설교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어렵게 아무리 최고의 설교를 해도 성령이 깨닫게 하면 믿어지고 바로 고속으로 자라게 됩니다. 따라서 가르치는 이는 있는 힘껏 노력하여 최고의 설교로 교인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대상이 주일학생이든 중학생이든 신학생이든 꼭 같아야 합니다. 신학박사들을 앉혀놓고 자주 설교하는 분이 종종 말하기를 왜 할머니들과 주일학생들은 잘 듣고 깨닫는데 신학박사들은 저렇게 귀가 막혔는가 라는 탄식입니다.
학교 강의는 1등을 기준으로 가르치면 10등이나 20등 하는 학생이 어느날 갑자기 이해가 된다면서 1등으로 올라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무조건 수준별로 분류해서 그 실력대로 취급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교육은, 특히 교회의 설교는 성경을 가지고 성령으로 가르치는 곳입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가장 값진 것, 가장 기름진 것,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인간이 볼 때는 허비 낭비로 보여도 그분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신약 우리들은 최고의 교훈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깨닫는 것은 성령께 간구하면서 전하는 이가 할 일은, 오늘 처음 오는 이가 또는 오늘 제일 어린 주일학생이 이 설교에서 남몰래 은혜를 받고 오늘 받은 이 말씀을 가지고 평생 자기의 신앙걸음에 유일한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백영희신앙노선의 총공회 설교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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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설교
학생부 교사입니다
목사님 글중에서 강단에서 설교를 할때는 최고 수준으로 해야한다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러면 학생회나 청년회 예배시 그때도 설교를 최고의 수준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까?
(답변) 설교는 제일 최고의 수준으로 해야 합니다.
1.십자가 대속을 주제로 예를 들겠습니다. 대속을 가르치려면 구원도 가르쳐야 합니다.
설교 내용에서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과 그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한 것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구원과 대속을 설교에 주제로 삼거나 아니면 적어도 구원과 대속의 최소한을 가르치려고 한다면, 설교라는 것은 너무 어려워서 교인에 따라 망설여진다는 말을 하지 않을 분들이 없을 것입니다.
2.구원과 대속이라는 단어는 많아도 그 내용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습니다.
'구원'이나 '대속'을 내용으로 설교한 다른 설교집들을 많이 보았으나 구원과 대속의 최소한의 기본을 가르쳤다고 생각한 설교조차 거의 없었습니다. 설교 내용의 대부분은 얼마나 아프셨겠는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부분만 예를 들어 설명을 반복하지, 죄란 무엇이며 죄의 종류가 몇 가지며 죄의 값이 무엇이며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예수님이 왜 져야 하며, 죄라는 것을 왜 애당초 우리에게 주셨으며,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면 예수님이 왜 하나님으로 사람되어 왔어야 하며, 그리고 예수님이 대속을 위해서 왜 죽어야 했고 왜 다시 살아야 하며, 왜 아버지 없는 상태로 출생해야 했고 왜 인간의 고통을 당해야 했는가 ........ 이런 면을 설교한 설교집은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말씀드린 이런 내용은 설교라고 하지 않고 신학의 분과 중에서 '조직신학'이라고 합니다. 신학에서 가장 난해하다고 알려진 조직신학의 구원론과 기독론은 각각 3학점 정도로 대학원 과정 2학년에서 3학년 사이에 공부하는데 모두들 어려워서 어떻게 배웠는지도 모르고 통과하는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대속'과 '구원'에 대하여 교인을 상대로 설교를 하려면 목회자들로서는 자신들이 신학교 다닐 때 가장 어려워서 이해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 조직신학 과목 시험을 칠 때 점수를 제대로 딸 수도 없어서 미리 문제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몇 부분만 외워서 겨우 졸업을 했는데, 이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 신학에 전혀 지식이 없고 또 고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교인들이나 학생들을 상대로 그 교리들을 가르친다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가르치려면 가르치겠지만 그것을 예배 때마다 계속해서 그렇게 가르친다면 신학강좌가 될 것이고, 그렇다고 간단하게 몇 마디만 할 것 같으면 항상 꼭같은 내용이니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면 때문에 지금 설교를 대단히 수준높게 가르치는 분들이라 해도 성경 본문 중심으로 설교를 해도 어렵게 가르친다는 말이 나올 것인데, 아예 기독교 교리 강좌를 평범한 설교 시간에 중심으로 가르친다면 어느 교인이 그런 어렵고 재미없는 설교를 계속 들으러 교회에 나오겠느냐는 반문이 있을 것입니다.
3.청년회면 몰라도, 학생회 설교라면 이제 이런 어려운 설교를 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학생회라면 주로 중고등학생들이어서 학교 공부로는 제법 무엇을 배운 듯 해도 교리 관련 내용에 대하여는 한참 어린 때입니다. 청년회라면 요즘 대학을 나오지 않은 이들이 별로 없으니까 아무리 어려운 설교를 해도 그 내용 자체가 어려워서 듣지 못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학생회를 중심으로 예를 든다면, 그 학생들이 아무리 어리다 해도,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박혀야 했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이 우리 대신 사람되어 고생했고 십자가에서 그 아픈 고통을 참고 대신 죽어주셨으니 감사하다는 이런 호소적 감정적 설교만 한다면, 이것은 잘못이라고 이곳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4.최고 수준의 설교란, 단어나 표현을 어렵게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 내용입니다.
대속, 구원, 사죄, 신인양성일위 등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달리 바꾸는 것은 극단적으로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단어는 많아봐야 몇 백개 더 되겠습니까? 중학교 3학년 과정에서 배우는 영어단어가 약 1500여개 정도 되는데, 남의 글을 남의 문자로 통째로 외워가면서도 그 정도는 외우고 있습니다. 설교 시간 한번에 그 단어를 다 내놓는 것도 아니니까, 교회가 오랜 역사를 통해 확정한 교리와 표현은 최대한 그대로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설교를 최고의 설교로 하라는 말은, 이렇게 교리적으로 교회가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그대로 사용하되, 다만 그 설교 내용에서 만일 구원을 가르치려면 대속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대속을 가르치려면 지은 죄를 먼저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죄를 가르치려면 그 학생들이 도덕의 죄, 국법의 죄, 인륜을 범한 죄와 성경이 말한 죄를 혼동할 것이니까,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께 삐뚤어진 것을 말한다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삐뚤어진 첫 행위가 에덴동산의 범죄니까 이를 원죄라 한다고 가르치고, 또 자기가 지은 죄는 본죄라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원죄와 본죄로 죄값이 있어 우리는 죽어야 하는데, 지옥을 가지 않게 하려면 이 죄를 대신 갚는 존재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되어 왔다는 것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설교자가 시간이 없어 간단하게 가르치는 것은 자유지만, 또 설교자가 주로 가르치려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럴 수 있지만, 만일 설교자가 이런 내용은 실제로는 꼭 알아야 하지만 학생들이 어리고, 또 오늘 처음 나온 사람이 이해를 하겠는가 하는 면 때문에 설교에서 가르칠 내용을 빼버린다든지, 아니면 선악과라는 추상적 개념을 알아듣겠나 해서 사과를 몰래 먹다가 목에 걸렸다는 식으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5.마지막으로 학교로 예를 들면
고등학교에서 한반에 40명을 놓고 가르치면 1등하는 학생은 서울대를 목표하고 5등 하는 학생은 서울 4년제 대학을 목표로 하고 20등 하는 학생은 지방대 아무 곳이나 4년제나 갈려고 하는 학생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칠 때 서울대를 목표로 하는 1등하는 학생의 수준과 진도에 맞추면 5등 이하 학생은 눈만 껌뻑거리고 시간만 때우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 10등 정도 학생 수준에 강의 난이도와 진도를 맞추면 5등 안에 있는 학생들은 학교 출석부 때문에 무료하게 앉아 있어 주어야 하는 형편이 생깁니다.
입시 성적에 학교 명운을 걸고 있는 학교는 5등 안에 드는 학생을 목표로 몰아갑니다. 나머지 학생들은 5등 안에 드는 학생들 들러리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피하려면 수준별로 학급을 편성해야 하는데, 위화감을 조성한다고 평준화 정책이 막고 있습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좀 풀린다고 듣고 있으나 크게 개선될 여지가 없습니다. 자연계시의 이치로 보면 수준별로 해야 합니다. 못나서 열등감을 가진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세상 생존경쟁의 처절함을 맛봐야 제 살길을 어떻게 해서라도 찾게 됩니다.
문제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가르칠 때, 교인들의 수준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장로님 또는 이해력 높은 지성인들은 어려워도 최고의 설교를 할 수 있는데 처음 나온 교인 주일학생 연로한 분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가 지금 세상을 너무 지나치게 닮아서 교회의 조직과 체제가 전부 세상 조직을 닮아있습니다. 장년반 조직은 세상 행정조직을 본따고, 주일학교 학생회 조직은 학교 교육 체제를 정확하게 옮겨놓고 있습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닮으면 그것을 속화라 하고, 속화가 되면 타락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경을 가르치는 곳이라면, 성경은 설교하는 이의 설득력에 달려있거나 웅변의 호소력에 달린 것이 아니고 듣는 이 속에 성령의 감화와 감동에 달려 있다면, 세상 학교 강의처럼 1등을 기준으로 가르치면 10등 이하 학생들이 어찌 어려워서 따라오겠느냐는 개념이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화가 없으면 아무리 쉽게 쉽게 설명을 해도 도저히 믿어지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것이 설교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어렵게 아무리 최고의 설교를 해도 성령이 깨닫게 하면 믿어지고 바로 고속으로 자라게 됩니다. 따라서 가르치는 이는 있는 힘껏 노력하여 최고의 설교로 교인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대상이 주일학생이든 중학생이든 신학생이든 꼭 같아야 합니다. 신학박사들을 앉혀놓고 자주 설교하는 분이 종종 말하기를 왜 할머니들과 주일학생들은 잘 듣고 깨닫는데 신학박사들은 저렇게 귀가 막혔는가 라는 탄식입니다.
학교 강의는 1등을 기준으로 가르치면 10등이나 20등 하는 학생이 어느날 갑자기 이해가 된다면서 1등으로 올라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무조건 수준별로 분류해서 그 실력대로 취급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교육은, 특히 교회의 설교는 성경을 가지고 성령으로 가르치는 곳입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가장 값진 것, 가장 기름진 것,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인간이 볼 때는 허비 낭비로 보여도 그분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신약 우리들은 최고의 교훈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깨닫는 것은 성령께 간구하면서 전하는 이가 할 일은, 오늘 처음 오는 이가 또는 오늘 제일 어린 주일학생이 이 설교에서 남몰래 은혜를 받고 오늘 받은 이 말씀을 가지고 평생 자기의 신앙걸음에 유일한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백영희신앙노선의 총공회 설교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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