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설교가 은혜가 안 될 경우는?

구남단2
작성자
추천.h3
작성일
2007.01.09
출처: /연구실/문의답변/325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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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제가 다니는....


총공회 교인입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님을 저는 존경합니다.
또 저는 그분이 귀한 하나님의 종 임을 저는 압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분에 설교를 들으면 은혜가 되질 않습니다.
다른분들은 은혜를 받는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저는
예배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은혜가 되질 않습니다.
이럴땐 어떻게 하여야 하나요.



(답변) 우리 모두의 고민입니다. 그리고 고통입니다.


1.설교는 ①'말씀'과 ②'성령'이 한 자리에 모인 경우를 말합니다.

①강의는 많으나, 설교는 희귀한 시대입니다.

정통노선에 있고 또 보수적인 신학교 강의실에나 각종 주석 등 신학서적에서는 '성경 말씀'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글들을 읽을 때 읽는 사람 마음을 성령이 흔들어 놓는 역사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신학교나 신학서적을 통해서는 '강의'가 있고 '강의안'만 있을 뿐입니다.


②감동은 크지만, 세상 TV에서도 안면이 있습니다.

혹 산속에 효험이 많다는 기도원 강단에서, 또 많은 교회들이 다투어 모시려는 유명 부흥사에게서, 또 현 우리 교계에서 설교로 유명하다고 이름 난 분들에게서 느끼는 감동들이 크다고 교인들 사이에는 가끔 소문이 돌곤 합니다. 그러나 '감동'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성령이 움직인 '영감'이라고 안다면 오해입니다.

성령의 감동과 인간의 설득에 의한 감동을 구별하는 일차적 기준은 '말씀'입니다. 성령의 감동은 말씀을 떠나서 역사하는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 불신자들끼리도 주고 받는 감동과 믿는 우리가 성령으로만 받아가지는 감동은 그 오가는 말씀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바로 담고 있는지를 가지고 거의 다 구별할 수 있습니다.


③설교 은혜라는 것은, 말씀과 감동이 한 자리에 모인 경우를 말합니다.

오늘은 신학교가 많고 신학박사들이 많아서 강의는 수도 없이 많이 개설되고 있지만 성령이 그 말씀 속에서 뜨겁게 역사한다는 소식은 드물고 또 아직까지 한국교계 여러 강단에서 뜨거운 감동의 역사가 있더라는 소식도 더러 접하지만 그 감동을 불러 일으킨 연료는 교회내에서 사용이 금지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보입니다.

예배당 안에서 교인들이 동감을 느끼고 환희를 가지고 마음에 느낌이 있다면 전부 설교 은혜인가? 오늘 강단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애용하는 나눠먹기 경제론, 환경단체들이 좋아하는 자연애호, 단군종교인들이 좋아하는 애국애족, 무신론자들이 좋아하는 민주 인권론, 아니면 무당들도 사용하는 착란적 신명풀이를 가지고 교인들을 즐겁게 하고 교인들에게 들을 것이 있는 설교로 평가받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고 보고 있습니다.


④참된 설교은혜는, 말씀에 의한, 말씀 안에서, 말씀으로 오는 감동입니다.

교인들이 예배 때 받아야 할 설교 은혜가 변질되면,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 대신 주로 세상 정세에 대한 해설, 현대인의 고민에 대한 윤리적 문제점을 짚어 우리의 세상 양심을 찌르거나 아니면 우리 인간이 가진 감정이라는 본능을 적절히 자극하고 분위기를 잡아 나가기 때문에 느껴지는 그런 세상 수준의 감동이 교회 안을 배회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의 은혜가 멀어진 교회일수록 이런 감동들을 설교의 은혜라고 강하게 주장까지 하게 되는 것도 보고 있습니다.

이런 감동은 불교의 유명한 설법자로부터도 느낄 수 있고, 선동정치가들의 열변으로부터도 우러나올 수 있으며, 떠돌이 약장사 세치 혀 때문에 시골에 나이 많은 분들이 보약셋트나 의료기를 구입할 때 느껴지는 그런 감동과 대동소이입니다.


3.지금 질문자들의 고민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전부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①설교 은혜만 있다면, 신앙은 진정 즐겁고 기쁜 길입니다.

비록 경제 손해, 가정 갈등, 사회의 소외, 질병의 고통 등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교인이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의 강단에서 설교를 들을 때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자기의 모든 어려운 여건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첫사랑에 미친 두 남녀가 내일 굶어죽을지라도 오늘은 만사를 잊고 기쁨을 가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물론 그런 세상 즐거움과 말씀의 은혜가 다른 점은 지속기간입니다. 말씀으로 받는 은혜가 아닌 것은 그 어떤 즐거운 일이 있어도 며칠만 지나가면 그 수명이 다하여 쓰고난 배터리로 움직이는 기계와 같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주는 은혜는 정해진 수명도 없거니와 오히려 타오르는 불길과 같아서 갈수록 더 뜨거워질 수 있습니다. 세상 남녀 사랑은 그 어떤 뜨거운 사랑이 있어도 첫사랑의 뜨거움을 능가하는 것이 없으나, 믿음 안에 말씀으로 받는 뜨거움은 처음보다 나중이, 나중보다 그 나중이, 그 나중보다 그 다음 나중이 비교할 수도 없이 뜨거워집니다.

따라서 교인이 연보를 하든 교회 봉사를 하든 전도를 하든 어떤 문제든 자기 강단에서 말씀의 은혜를 받게 되면 고생을 할수록 자기가 손해를 볼수록 더 감사하고 더 힘이 나게 되는데, 말일 말씀의 은혜가 식어지고 없어진다면 그때는 하나님이 두려워 교인이 해야 할 기본 의무는 하지만 속으로는 말못할 고통과 견딜 수 없는 갑갑함을 가지게 됩니다.


②이곳 홈이 소개하는 공회 노선의 교인들에게는, 회고할 만한 과거가 있었습니다.

한국교계 설교 강단에 말씀의 은혜가 바닥난 것은 대충 1950년대였습니다. 물론 한 두 명 귀한 종들이 시대에 상관없이 말씀의 은혜가 무엇이라는 것을 자기 교인들에게 부분적으로 구경시키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전체적으로 말하면 한국교계는 196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강단에서 악을 쓰는 열심은 있고, 신학교에서 배운 강의안을 골격으로 교리 강의를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 속에서 성령이 뜨겁게 역사하며 교인들로 하여금 설교 은혜로 신앙생활하는 세상모를 세계를 구경시키는 것은 없어졌다고 할 시점입니다.

그러나 이곳이 소개하는 백영희신앙노선에 속한 공회 교인들에게는 왜 교인이 고난을 당할수록 기쁘고, 왜 바칠수록 더욱 바치고 싶고, 왜 주를 위해 죽어드리지 못해서 안달을 하는지! 왜 예배시간이 기다려지는 것이며, 한주간에 1-2회 설교 가지고는 부족해서 금요일까지 설교를 듣기 위해 예배를 신설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목회자는 매일 새벽예배 설교를 타교회의 주일 오전 설교 이상으로 설교를 하게 되고 교인들은 하루 새벽을 빠져도 그날 하루가 다 공허해진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는지! 공회 교인들은 이런 세계를 다소간 차이는 있더라도 전부 직접 겪어 보았습니다.

물론 그런 말씀의 세계를 이어가던 중심에는 백영희목사님의 설교 세계가 있었고, 그가 목회하던 교회와 멀리 떨어져 있던 교회 교인들은 자기 교회 목회자들이 백목사님의 서부교회로 매주 금요일 예배를 보러 가서 그곳에서 한 두 시간 참석한 예배의 말씀을 필기하여 다시 자기 교회에서 설교할 때 그 설교를 한 주간 계속 나눠 들으면서 위에서 소개한 그런 말씀 세계로 살았습니다.

이런 설교 말씀의 은혜가 서부교회와 온 공회 소속 교인들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향후 수십년간 한국교회 교단 단위에서는 유일하게 주일을 지키기 위해 공무원 시험과 각종 자격증 시험 그리고 대소간 회사에 취직하는 일들을 당연하게 남의 일로 취급했습니다. 마치 초대교회 교인들이 조금 믿는 축에 들면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20세기 후반부를 그 시대상황에서는 그런 순교적 신앙을 가지고 기쁨과 자부심으로 기꺼이 살아갔습니다.


③여러 면에서 공회 소속 교인과 외부 교인을 상대하는 이곳의 자세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전방 군인과 후방 군인은 다를 수밖에 없듯이, 공무원의 출근 자세와 개인 사업가의 눈빛은 같을 수가 없듯이, 한국교계의 교권을 두고 대권투쟁을 하던 일반 교단에 속한 교인들과 외부 교계를 저 멀리 발 아래 동네로 굽어보며 태산 높이 서 있던 공회의 깨끗하고 신령했던 세계는 너무도 많은 면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술을 끊지 않고도 목사 장로가 될 수 있는 교단 소속 교인들과 술을 끊지 못하면 세례도 주지 않는 공회 교인들의 고충을 들을 때, 이곳의 답변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 교회에서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면, 목회자가 설마 불경을 읽지는 않았을 터이니 설교를 듣는 교인이 마음을 기우려 노력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권면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공회 교인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여 고통스럽다고 한다면, 안내하는 방향은 많이 달라집니다. 공회 소속 교인으로서 말씀의 은혜 때문에 갈급을 느낀다면 이는 백목사님 생전 공회의 말씀 분위기 때 은혜를 회고하며 그때와 비교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만일 그 때 분위기를 생각하여 말씀의 은혜가 그립다고 한다면, 이곳에서 제공하는 /초기화면/활용자료/녹음본/에서 설교를 듣고 읽으면서 다시 과거 말씀 은혜의 시대를 되살릴 수밖에 없습니다.


④백목사님 생전, 서부교회를 멀리 떠나 살아야 하던 교인들의 불평을 지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서부교인들은 하나(1)만 노력해도 강단의 설교가 아홉(9)을 감당하기 때문에 열(10) 수준의 말씀은혜로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서부교인이 다른 지방 공회 교회로 가게 되면 그곳 목회자의 설교가 하나(1)가 되는데, 그 교인이 이전 서부교회에서처럼 자기는 하나(1) 노력을 그대로 하면서 왜 서부교회 때만큼 말씀 은혜가 없느냐는 문제를 두고 그 교회 목회자를 탓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 교회로 간 사람이 서부교회에서처럼 은혜를 받으려면 그 교회 강단의 설교가 하나(1)를 제공하고 있으니 자기가 이전보다 아홉배나 노력해서 열(10)의 은혜가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화는 오늘 답변자에게 여러 면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시대는 시대적으로 설교 은혜를 주도하던 백목사님이 없고 그를 이을 만한 사람도 아직까지는 없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백목사님이 생존한 상태에서 그가 생존하고 활동한 것 때문에 직접이든 간접이든 말씀의 은혜가 공회 노선 교인들에게는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없는 시대이니, 그가 생존할 때 십(10)점 만점에 십(10)점 은혜를 받도록 하기 위해 아홉(9)을 감당했으니 우리는 예배 때 결석만 하지 않고 자리만 앉아 있어도 열(10)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가 없고 그를 대신할 만한 목회자도 없으니 부득 우리가 아홉(9)의 힘을 쏟고 준비해야 과거와 같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곳 답변자를 포함하여 목회자들로서는 백목사님이 없어진 이상 우리 목회자 각자가 백목사님이 감당하던 그 자리를 빈공간으로 비워두지 않기 위해 과거보다 십(10)배의 노력을 해야 하는데 하지 못했으므로 오늘 교인들이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한 책임은 전적 월급을 받고 있는 우리 탓입니다. 그러나 교인들 입장에서 꼭 하나 아실 일은, 목회자들에게 월급을 달달이 줬다고 해서 '니들이 사도바울이 되고, 백목사가 되라!' 이렇게 할 것이 아닙니다. 하라고 재촉하는 것은 자유지만 재촉해도 안 된다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목회자들이 게을러서 과거 신앙생활을 계속하지 못했다고 해도 면책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인이, 교인 스스로 말씀을 받기 위해 자신이 과거 백목사님 생전 말씀 은혜를 받던 때와 비교하여 얼마나 더 노력했는지를 되돌아 볼 일입니다.


⑤백목사님 탄식 중에 이런 탄식도 있었습니다.

백목사님은 그 시대 외치라고 알려주는 말씀을 생명 아끼지 않고 다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전할 때마다 '나를 통해 주시는 이 말씀은, 이 말씀을 듣는 이 서부교인들을 위해서 주시는 것 같지는 않다'는 탄식입니다. 실력있는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추어주면 그 아들은 우선 애비 덕에 최상의 생활은 하는데 문제는 그 아들에게 자생력이라는 자기 자체 생존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라게 되거나 못난 부모 밑에 자라는 사람들은 환경으로부터 손해 볼 것은 있어도 주변으로부터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자주국방에 눈을 뜨게 됩니다. 자립 자주 자생력을 어릴 때부터 기르게 되므로 비록 남들이 행복하게 부모 손잡고 외식 다닐 때 자기는 중국집 짜장면 배달을 하고 그 시기를 보내지만, 문제는 이 두 아이를 홀딱 벗겨놓고 그들의 인간 점수, 인간 실력, 내면의 성능을 비교하게 되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서부교회와 공회목회자들 그리고 공회 소속 교인들은, 타교단 목회자와 교인들이 암8:11-13에서 미리 예언한 대로 기근과 기갈의 시대를 살고 있을 때 넘치는 생수천 옆에서 물로 장난치고 그 물을 주체할 수 없어 주변 모래바닥에 쏟아붓고 있었습니다. 이미 한국교회에 말씀의 은혜가 떠난지는 반세기를 헤아리고 있는데도 공회 교회에는 말씀의 은혜가 폭우처럼 붓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단면을 잘라서 양자를 비교하라면 공회교인은 복이 넘쳤고 일반 교회는 기갈과 기근으로 현재 북한처럼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회 교인들에게는 그 당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세지 말을 늘 그렇게 놀고 먹고 배부르게 살도록 기회를 무한정으로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계시록에서 일곱 천사를 통해 말세 재앙을 차례로 퍼부을 때도 중간에 '반시쯤 고요함'을 주고 있는 것처럼, 공회 노선은 과거 교회사를 그대로 잇고 있는 유일한 신앙노선이고 더구나 말세를 감당할 교훈을 백목사님을 통해 내놓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아무나 설교를 하면 은혜를 받을 수 있었고, 교인들은 졸면서 놀면서도 일반 교회가 상상도 못할 설교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는 1980년대로 마감시키고 곧 이어진 1990년대부터는 단 하루밤에 한여름이 한겨울로 바뀌듯 돌변했습니다. 모두들 이 시기 공회의 혼란을 두고 목사들이 저 모양이냐, 아니 저렇게 모두 말만 잘 하느냐, 진리는 높아도 사랑은 하나도 없네.... 이런 비난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를 그렇게 중계방송을 하거나 그렇게 해설하는 분들은, 시대의 큰 흐름을 전혀 읽지 못하는 소경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노선에 있는 이들에게, 믿는 사람으로서 근본 힘을 삼아야 하는 그 말씀의 은혜를 두고, 시대 자체를 바꾸고 있었습니다. 과거는 시대와 교회사를 위해 특별히 세운 종을 통해 아홉(9)의 은혜를 무조건 기본으로 주고 시작했던 때입니다. 백목사님의 설교는 서부교회 옆집에 살면서 예배 방해를 수십년간 해오던 사람도 '백목사 설교는 내가 예수를 안 믿어도 감동이 되고 속으로는 좋다고 느껴요, 그러나 다른 목사들이 설교를 하면 고함만 꽥꽥 지르지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발언하는 정도였습니다.

불신자도 그 은혜의 간접 전달을 통해 무엇인가 두렵고 느껴지는 것이 있을 정도의 그 설교가 공회 안으로 쏟아부어지던 그때, 그때를 지금도 그때인 줄 알고 예배 출석만 하면 말씀의 은혜라는 것이 그냥 받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공회 소속 교인들은 지금 남의 시대를 살면서 꿈을 꾸고 계신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제 네가 받아야 할 말씀의 은혜는 네 속에 있는 성령에게 닿을 때까지 네 마음 속 샘을 파서 그 샘 속에서 나오는 생수를 파이프로 연결해서 이 기갈의 시대를 살아남으라고 하십니다.


4.물론, 설교를 하는 목회자가 교인들이 왜 조우느냐고 질문하신다면, 반대로 소개했을 것입니다.

과거 백목사님 설교를 필기해서 조금씩 나누어 읽어만 드려도 은혜를 받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설교하면서 그것이 목회인 줄 알던 철없는 어린 목회자를 기르기 위해 그를 지도하던 백목사님은 밤을 낮삼아 잠도 없이 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그들이 담임하던 교회에서 저질러 놓은 문제를 해결하느라고 죽을 병을 몇 차례나 얻고 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주변 울타리와 상부 지도자와 위에서 내려 보내는 윗샘을 하나님
께서 전부 없애고, 우리 목회자들에게 스스로 자기 속에 성령을 손에 쥐고 있는 말씀을 통해 직접 모시고 상대하여 배우라고 합니다. 다행히 과거 그런 길을 걸었던 분의 행적과 자료가 자세하게 남겨질 수 있는 시대이므로 우리에게는 성경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이번 질문자는 공회 소속 교인입니다. 목회자가 질문 하신 것이 아니므로 당연히 교인편에서 가져야 할 오늘 시대를 읽는 전반적 시각을 주로 말씀드렸습니다. 목회자가 다섯(5)이라도 감당하는 교회 교인이라면 자기가 다섯(5)만 노력하고 채우면 과거 받던 열(10)의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산수계산법 때문에 목회자와 교인들이 서로 상대방에게 '너 할 몫을 일단 네가 먼저 하라'는 식으로 미루고 있습니다. 만일 상대방이 먼저 다섯(5) 노력을 해서 나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지금 은혜보다 다섯(5) 배 은혜를 받는다면 공짜로 다섯배 수입을 봤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문제는 그는 늘 남의 등불 밑에 살아가는 신세라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가 자기 등불을 켜고, 자기 노력으로 그 어떤 목회자를 모셔도 그에게서 그로 인하여 받을 은혜는 받고, 그 목회자를 위해 기도할 책임을 가지고 목회자에게 명목상으로는 교인이지만 내적으로 하나님께는 자기 목회자를 배후에서 기르는 목회자 양성원 교수노릇을 해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현재 공회 내에는 이런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서울에 몇 분, 안양에도 한 분, 부산에는 좀더 많고, 거창에도 한 두 분씩 남아 있습니다.

평생 하나님 앞에 교인이지만, 그 사람은 자기 교회 목회자를 목회자로 모시면서 결례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으로 상대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내면적으로는 그 목회자를 책임지고 그를 하나님 앞에 진정한 목회자가 되도록 배후에서 기도하고 또 마찰이나 대립보다 그 목회자가 양심적으로 그 교인에게 의지하고 따르고 지도받고 그 교인 때문에 자기는 진정한 목회자로 출발하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지혜있게 여러 면으로 노력하는 분도 있습니다.


5.적어도 4-5가지 면으로 답변을 해야 할 정도로 질문을 주셨습니다.

한번에 다 적기는 시간 문제가 있고 해서 다음에 또 다른 질문이 들어올 때 기회를 보겠습니다. 오늘 답변은 혹 질문자께는 직접 기대하신 방향으로 답변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질문자의 질문 내용을 기초로 답변을 시작하지만, 답변을 달 때는 이곳을 찾는 분들 또 앞으로 이곳을 접촉하게 되실 분들을 폭넓게 예상해서 질문자께서 생각하는 방향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답변을 드리는 수가 많습니다.

비록 이번 답변이 질문자가 원하시는 방향은 아니라 해도, 분명히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질문자 두 분께도 이번 답변은 성급히 읽지 마시고 보다 넓게 생각하신다면 이번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6.순서는 바뀌었지만, 마지막으로 두 분 질문자의 직접 표현에 대하여 잠깐 몇 말씀 올립니다.

①첫번째 질문입니다.

'담임목사님을 저는 존경합니다... 또 저는 그분이 귀한 하나님의 종 임을 저는 압니다...'

자기 목사님에 대한 평가 자체는 전반적으로 좋으나, 말씀의 은혜만 문제가 되는 경우로 보입니다.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세상 이야기는 자기 자랑이나 늘어놓는 정도는 아니라고 보입니다. 평범하게 말씀을 읽고 전하는 정도인데, 말씀의 은혜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면, 말할 것 없이 듣는 자기쪽 수도꼭지에 막힌 것이 있습니다. 뚫기 전문가들을 불러 5만원에서 10만원만 주면 단 5분, 늦어도 30분이면 속이 시원하도록 뻥 뚫어줄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자의 귀가 막혀 있는 이 문제는 스스로 뚫어야 합니다. 우선, 예배 때마다 또 식사 때마다, 또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누울 때마다 '말씀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한 마디 기도를 오랫동안 계속하셨으면 합니다.

목회자가 신앙노선으로 다른 길을 간다든지, 비리가 있다든지 등의 이유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이런 사안의 내용을 가지고 우선 지식적으로 따져보고 평가해야 하는 선결과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자체를 두고는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고 좋은 분으로 보고 계신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본인의 문제입니다. 본인의 문제일 때는 우선 앞서 소개한 것처럼 그런 기도를 중심에 담아 장기가 계속 해 보시고, 그다음으로 목사님의 설교를 필기를 해 보셨으면 합니다. 비록 필기할 내용이 없다 해도, 꾸준하게 그리고 설교 시간 끝까지 계속 해서 적어 보면, 자세한 원인이 나올 것입니다.

좋기는 자리도 앞자리 중앙쪽을 잡고 목사님이 잘 보이고 또 목사님도 질문자를 잘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으면 더욱 좋으리라고 봅니다. 아마 1달만 계속 적어보면, 대충의 길은 보일 것 같습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는 다음 다른 기회에 설명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②두번째 질문 주신 분의 내용입니다.

'교인에게 은혜를 끼치는 "생명 있는 설교"와 "생명 없는 설교"는 어떤 것인가'

두번째 질문 주신 분도 특별히 목회자 자신의 비리나 노선 문제나 설교 외적 다른 문제 때문에 설교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설교는 잘하고 또 교인으로서 설교는 잘 듣고 있는데, 들어봐야 아무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김빠진 사이다 같고, 공포탄처럼 소리만 있지 실제 목표를 뚫고 파괴하는 결과는 없다는 말씀 같습니다.

역시, 두번째 질문자께도 필기를 우선 권합니다. 이번에 질문하신 두 분의 경우는, 비록 그 소속이 이곳과 같든지 다르든지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일단 소속 교회에 별일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고, 또 자기 목회자에게 말씀 자체의 뜨거운 은혜가 계속 되는 그런 점이 없어 질문자들 내적으로 힘을 잃어가는 정도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노선과 목회자 사생활 또는 교회내 행정 처리나 처신 때문에 큰 논쟁이 발생한 경우가 아니라면, 교인은 목회자의 설교를 조용하게 그러면서도 성실하게 계속해서 필기를 하다보면, 자기 안에 있는 문제는 거의 다 해결이 됩니다.

이렇게 했는데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때는 생사를 놓고 살펴야 하는 큰 문제가 숨어 있는지 정밀검사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일반 교인들은 이제 말씀드린 정도의 처방에서 자율적이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기만 아는 자기 체험을 쌓으며 해결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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