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교계 여러 곳의 건설구원론 소식

구남단2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07.11.09
박윤선의 이름은

신학계에서 박형룡목사님과 함께 가장 큰 인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1988년 그의 사후 오늘까지도 그를 연구하고 그를 존경하는 움직임은 큰 것 같습니다.



최근 백목사님 전기 작업을 하면서

백영희는 박윤선과 개인적으로 특별한 관계가 많았으므로 이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백영희 자녀들은 박윤선 가정에 허물없이 나다니고 심부름을 갔던 기억이 많습니다.
자녀분들을 통해 박목사님 가정의 여러 小事 秘事를 많이 듣고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두 분의 특별한 관계를 짐작할 수도 있었습니다.

백영희는
1950년 고려신학교에 입학하고 공부하게 되고 1952년 서부교회로 부임하게 되면서
박윤선의 가장 아끼고 기대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로부터 세계신학을 설명듣게 됩니다.
신학에 특별히 집중할 기회가 없었으나 박윤선을 통해 세계신학을 접한 그 경험은
백영희가 평생 성경만 상대하여 연구하면서
세계신학 속에서 자기 연구의 위치와 의미를 인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어찌 크나큰 하나님의 오묘하고 기막힌 섭리 역사라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성경만 상대하여 연구하던 백영희가
스스로 세계신학에 중요하게 살펴야 할 총론적 상식들을 직접 파악하려 했다면
수많은 세월과 노력이 필요하게 되어 순수한 성경연구가 훼손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다고 세계신학에 대한 안목이 없었다면 백영희 혼자와 주변 신앙에는 상관 없겠지만
교회사의 정통 신학을 백영희신앙노선이 이어가는 이 일에 차질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만 연구하는 일에도 지장이 없으면서 세계신학의 안목을 제공한 것을 두고
박윤선이라는 인물은 백영희에게 있어 유일한 신학 분야의 선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면을 고려하여 백영희는 박윤선의 임종 직전 그의 방문을 받고 '선생님'이라 했습니다.


이런 모습 일부를 접하고 감동 받은 공회 내에 어떤 분들은
자기도 교리책 한 줄만 읽으면 전체를 파악하는 수준이라고 착각한 다음
앞뒤도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줄줄 글을 적어 조직신학으로 발표를 해버리고 있는데
그 내용이 한글 독해도 못해서 거꾸로 읽고 반대로 설명을 하면서 계속 큰소리를 치게 되자
백목사님 수준도 그런 수준으로 만드는 선전을 하는 꼴이 되어 안타깝습니다만
이번 글은 그쪽이 아니고 현재 한국교계 곳곳에 머리를 내미는 건설구원 주장 문제입니다.



고신이 극단적 교권 투쟁에 나서던 1950년대
백영희는 분연히 일어났고 고신 내부에 큰 파란을 일으켰으며 그때 박윤선은 만류합니다.
그리고 백영희는 신학을 맡은 교장 박윤선목사님이 왜 나서지 않느냐고 오히려 책망합니다.
이후 박윤선까지 고신의 예배당 소송 비판에 가세하게 되고
고신은 백영희를 먼저 제거하고 박윤선을 이어 제거하게 됩니다.

1960년 11월 고신을 떠나 아무 갈 곳도 없어 방황하고 부산 동래 어느 뒷골목을 전전할 때
박윤선을 받아 준 이재만목사님, 이후 서울에서 개척한 동산교회, 이후 대구의 동성로교회
그리고 고신에서 나온 이후 개혁신학교를 제대로 해보겠다고 하던 시절....

이 부분은 모든 종류의 박윤선 전기 연구집에서 갑자기 안개 속에서 잠깐 지나게 됩니다.
출생부터 초등학교 시절과 유학 시절 등 박윤선의 언행 하나하나가 세밀히 관찰 기록되지만
1960년 고신에서 나온 후 총신대학교로 들어갈 때까지의 1960년대 수년 기록은 사라집니다.
이 누락된 박윤선의 시기는 전부 백영희와의 관계에서 자세하게 재구성되고 있습니다.


박윤선은 백목사님께 개혁신학을 함께 하자고 찾아 오게 됩니다.
박목사님에게는 신학강좌만 있었지 그 신학이 진행될 그 어떤 것도 없었던 시절입니다.
확고한 보수신앙에 서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그 일을 가능하게 할 인물은
박윤선에게 백영희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인물 경제 실력 신앙 모든 면이었습니다.

백영희는
박윤선의 신앙과 신학은 믿고 있었으나 그의 교계 대처 실력과 영안은 아니었습니다.
교계가 간악하게 흔들면 결국은 흔들릴 수 밖에 없는 박윤선의 근시안이 걱정이었습니다.
또한 박윤선이 세계신학을 소개할 때 백영희는 목회자로서 신학을 소개받는 입장이었지만
백영희는 원래부터 또 신학을 하던 순간도 그리고 그 이후 생의 끝날까지도
박윤선과 같이 과거 신학을 단순히 학습하고 반복하며 보수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성경이 이 시대에 가라는 곳을 가되 과거 신학과 그 모습과 내용이 달라 보일 수 있는데
이런 백영희 신앙노선의 근본 방향은 박윤선 같은 단순 학자에게는 맞지 않을 것이니
하나님께 받은 서로의 사명과 가야 할 길이 다르므로 그곳에서 선을 긋고 이별하게 됩니다.

일반 관찰자가 본다면
그때 섭섭한 것 때문에 박윤선은 곧 이어 백영희를 이단으로 정죄하도록 협조했다 하겠으나
그 내심을 속단하기보다 그의 평생 인품을 볼 때 판단 착오였다는 것이 옳을 것같습니다.
어쨌든 고신에서 제거 된 후 제대로 된 개혁신학을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 했던 박윤선은
고신에서 제거 된 후 한국교회 본류에 있던 총신에 몸을 담기 이전 수 년의 기간 동안에
백영희의 목회 영향력과 범위 내에서 또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움직이게 됩니다.

고신에서 제거 된 후 처음 몸을 의탁한 이재만목사님도 백목사님을 따르고 관계가 특별했고
이후 개척한 서울의 동산교회는 백목사님이 개척한 내수동교회의 지원을 받게 되고
박윤선 전기 관련 어떤 연구집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대구동성로교회 부임은
박윤선으로 참담하게 된 경우인데 그 동성로교회에서 성경과 교리로 이 노선과 담판을 했고
한국교회 최고 성경신학자라는 박윤선 이름이 대구의 공회 교인들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박윤선의 신학 범위에 있던 교회들이 이 노선을 정죄하게 됩니다.
중생교리와 건설구원 때문에 이 노선은 박목사님이 향후 몸담을 곳에서 이단이 되었는데
정작 박윤선은 임종 전에 백영희를 만나 모든 과거 잘못을 해결하고 갔습니다.
그리고 최근 박윤선을 배경으로 한 그의 후학 곳곳에서
당시 정죄된 이 노선 교리가 이제 그들의 교리가 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세한 관찰자라면
중생된 영의 범죄 문제를 두고는
박윤선의 초판 주석과 이후 발간한 내용의 차이를 통해 그의 입장을 살필 수 있습니다.
또한 건설구원 문제를 두고는
자료를 자세히 살펴봐야겠으나 박윤선목사님은 건설구원을 주장했다는 내용까지 나옵니다.



공관복음 주석 670쪽을 통해

...... 성경은 구원과 상급은 다르며 '천국의 상급에는 층계가 있다.(박윤선 목사님의 표현: 박윤선 공관복음 주석 670쪽)'는 사실을 명백하게 가르칩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뜻이 모호한 성경 몇 구절로 '천국의 상급에 층계가 없다'고 가르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들을 용납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내용 때문에 이 노선은 그렇게 고초를 겪었는데 이제는 우리 대신 외부에서 이렇게 강하게 외치고 있어 한편으로는 반갑고 감사한데 한편으로는 참으로 어리둥절합니다. 많은 자료들이 있으나 한 가지를 가지고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이 정도 글로 여기서는 이 홈을 찾는 분들에게 의미있는 내용의 일부만 소개합니다.

박윤선목사님의 주석과 저서를 출간하는 영음사에서 자료를 데이타화하고 홈운영을 통해
내용 활용이 가능하게 했다면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연구할 내용이 많은데 아쉬움을 느끼나
사람이 할 수 있다고 다하는 것이 아니라 주지 않으면 말아야 하므로 눈에 띄는 내용만
간단히 먼저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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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press.or.kr/board_file/drafting/sangg.hwp


천국의 상급에는 층계가 있다(수정)

근래에 들어 하나님과 구원이 곧 상급이므로 천국의 상급은 차별이 없다는 주장이 치밀한 논리로 무장하고 빠르게 유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이 교회에 상당한 피해를 주고 있으므로 이 사상이 성경의 본뜻이 아님을 밝혀서 교회가 피해를 입는 것을 다소라도 방지하고자 하여 이 글을 씁니다.

성경은 구원과 상급은 다르며 '천국의 상급에는 층계가 있다.(박윤선 목사님의 표현: 박윤선 공관복음 주석 670쪽)'는 사실을 명백하게 가르칩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뜻이 모호한 성경 몇 구절로 '천국의 상급에 층계가 없다'고 가르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들을 용납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뜻이 모호한 성경 몇 구절로 뜻이 분명한 성경을 마음대로 뒤집어엎는 것을 용납한다면 성경의 바른 교리는 남아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신득의교리, 예수님의 동정녀탄생교리, 삼위일체교리, 유일신교리, 예수님의 육체적 재림교리, 부부간의 지위차별교리 등은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는 교리입니다.
만일 뜻이 모호한 성경 몇 구절로 이러한 교리를 반대하는 주장을 용납한다면 이러한 교리들도 모두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는 상급차등론을 뜻이 모호한 성경 몇 구절로 반대하고 부정하는 주장은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될 견해인 것입니다.

이런 원칙 때문에 뜻이 분명한 성경만 해석하신 것으로 정평이 난 박윤선 목사님이 아무 주저함 없이 "내세 상급에 층계가 있다."고 확언을 하신 것입니다.
만일 성경이 상급차등을 모호하게 가르친다면 뜻이 확실한 성경만 해석하시기로 유명한 박윤선 목사님은 틀림없이 그런 확언을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변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개혁신학인 것입니다.

"학자들은 상급균등론을 말할 수도 있다"며 상급차등론을 부정하는 사상을 용납하려는 입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겠습니다.
제가 박윤선 목사님께 가르침을 받을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어느 날 총신의 간하배 교수님이 합신에 초청받아 오셔서 특강을 하였습니다.
간하배 교수님은 그 특강에서 매우 치밀한 논리로 뜻이 모호한 성경 몇 구절을(‘너희는 피차 복종하라’는 성구 등을) 들어가며 "여성의 지위와 남성의 지위가 차이가 없으므로 남편과 아내의 지위도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시대의 추세가 남녀평등을 외치니까 선교차원에서 그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의가 끝나자 박윤선 목사님이 늘 들고 다니시는 큰 성경책을 들고 강단으로 나오셨습니다.
박 목사님은 베드로전서 3장 6절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벧전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박윤선 목사님은 성경을 읽은 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간하배 교수님이 남편과 아내의 지위는 동등하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분명하게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명백한 말씀이 있는데 그렇게 가르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을 들은 간하배 교수님이 웃으며 말씀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그렇다면 그런 것입니다."
저는 그 때 간하배 교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했어야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지적을 받고 생각하니 제가 잘못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는 말씀에 무조건 굴복하는 것이 진정한 개혁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박윤선 목사님이 간하배 교수님(외국인 교수님)에게 잘못하신 것입니까?
박윤선 목사님이 그 강사님에게 무례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분명한 진리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성경의 바른 교리를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박윤선 목사님이 그렇게 단호하게 행동하신 것입니다.

학자들이 말하고 표현하는 자유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목회자들은 학자들이 잘못 말하는 것을 지적하고 성경의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목자로 세움받은 목회자들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이제부터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는 상급차등론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어떤 이들은 구원이 곧 상급이며 구원은 너무나 큰 상급이기 때문에 구원이외의 상급은 없으며 상급의 차등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서 충성해야지 구원이외의 다른 상급을 바라보고 충성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합니다.
매우 그럴듯해 보이지만 성경의 본 뜻과는 다르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성구가 몇 구절 있습니다.

첫째 성구는 마태복음20:1이하에 기록된 포도원품군 비유입니다.
이들은 포도원 품군비유를 예로 들면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포도원주인이 포도원 일군들에게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을 보니 사후의 상급에 차등이 없고 모두 같은 상급을 받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 이외에 상급은 없다."

하지만 이 성구는 상급을 가르치는 성구가 아니라 구원을 가르치는 성구입니다.
그 증거는 첫째로 상급의 차등을 가르치는 다른 성구들이 많기 때문이며 다음으로 마태복음22:1이하의 천국비유(혼인잔치비유)에서 구원이 차등이 없음을 증거해주기 때문입니다.
혼인잔치비유를 보면 왕은 혼인잔치에 먼저 온 사람이나 나중 온 사람이나 모두 똑같은 예복을 줍니다.
반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벌을 줍니다.
이 말씀은 포도원 주인이 모든 일군들에게 데나리온을 준 것과 같은 뜻으로 믿음의 질에 상관없이 구원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공평한 구원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죽은 한편 강도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원품군비유는 상급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 구원을 가르치는 비유인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일찍 믿으나 늦게 믿으나 같은 구원을 주신다는 것이며 힘들게 믿으나 쉽게 믿으나 같은 구원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신구약주석을 완간하신 박윤선 목사님의 공관복음 주석을 보니까 박 목사님도 같은 해석을 하셨습니다.
박 목사님은 다음의 말씀을 이렇게 주석하셨습니다.
(마 20:9)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세상 끝에 같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이름이다."(박윤선 공관복음 주석 670쪽)
그런데도 어떤 이들이 포도원품군비유를 상급을 가르치는 비유로 해석하니 성경의 상급차등론을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런 오류 때문에 박윤선 목사님같이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한 분을 성경해석을 잘못한 무지한 분으로 취급하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도 틀릴 수 있으므로 박 목사님의 주석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입니다.
물론 박윤선 목사님도 틀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박 목사님이 틀릴 경우는 뜻이 분명하지 않은 성경구절을 해석할 때입니다.
박윤선 목사님같이 신실하고 해박한 성경지식을 가진 분이 뜻이 분명한 구절을 해석할 때 틀리게 해석한다고 하는 것은 위대한 주경신학자이신 박윤선 목사님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상급차등 반대자들이 내세우는 둘째 성구는 마태복음25:14이하에 기록된 달란트비유입니다.
이들은 달란트비유를 예로 들면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똑같은 칭찬과 상급을 받았으니 상급의 차등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그냥 준 것이 아니라 재능대로 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관리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다섯 달란트를 준 것이고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두 달란트 밖에 관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두 달란트를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반드시 다섯 달란트를 남겨야 100% 헌신한 것이며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반드시 두 달란트를 남겨야 100% 헌신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이 네 달란트만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두 달란트를 남겼다면 주인의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의 능력을 100% 발휘하지 않고 조금 게으름을 피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주인은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의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에게 줍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 25:28 - 마 25:29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열 달란트 받은 종은 열한 달란트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도 분명히 상급의 차이가 벌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가지고 상급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상급차등을 부정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성구는 창세기15:1절입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상급차등 부정론자들은 이 성구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이렇게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큰 상급이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사후에 다른 상급이 필요치 않으면 상급의 차등도 없다."

하지만 이 논리에는 모순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제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경을 한 곳 보겠습니다
(시 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자 이제 제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겠습니다.
"성경은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했다. 하나님이 복이시므로 사람들이 받는 복에는 차등이 있을 수 없다."
제가 이렇게 주장하면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성경은 너무나 분명하게 각 사람이 받는 복이 다름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거의 시종일관 신앙생활을 잘 한 다윗왕이 받은 복과 온갖 악을 행하다 마지막에 회개한 므낫세 왕이 받은 복이 어찌 똑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복’이므로 복의 차등을 부정하는 것이 오류이듯이 ‘하나님이 상급’이므로 상급의 차등을 부정하는 것도 오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상급이심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이 다른 상급도 주시는 것을 성경이 명백하기 가르치는 이상 누구도 상급차등을 부정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상급차등 부정론자들이 내세우는 다음 주장은 이렇습니다.
"구원이 너무나 큰 상급이기 때문에 구원 이외의 상급은 없다."

저도 구원이 큰 상급인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구원 이외의 상급이 없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구원이외의 상급이 있음을, 그것도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상급이 있음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게 기록된 상급차등성구를 부정하는 것은 마치 부부의 지위가 다르다고 가르치는 성구를 부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상급차등을 부정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성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눅 17:9 - 눅 17:10
(9)명한 대로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상급차등부정론자들은 말합니다.
'주인이 종에게 사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보니 상급의 층계는 없다.'

그러나 이 본문은 상급의 층계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니라 상급의 공로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례는 한 일에 따라 주는 보수입니다.
이러한 보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받는 모든 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무익한 종이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도 은혜로 주시고 복도 은혜로 주시고 상급도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충성한 종에게 사례는 하지 않으시지만 복은 주시고 상은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에게 사례하지 않는다'는 구절로 상급차등을 부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성경의 상급차등을 가르치는 명백한 성구 몇 절을 제시하겠습니다.

제가 제시하는 첫째 성구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누가복음19:11이하에 나오는 므나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보면 주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와서 상을 주는 것에 차등이 있습니다.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사람은 열 고을 권세를 주지만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은 다섯 고을 권세 밖에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후상급에 차등이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이 때문에 심지어 자유주의 신학자 바클레이까지도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한결같이 사후상급에 차등이 있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바클레이는 다음과 같이 주석했습니다.
'이것은 보상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훌륭하게 일한 보수는 보다 더 중대한 일을 맡는 일이었다(바클레이 누가복음주석: 338쪽)
성경을 신중하게 주석하기로 유명한 박윤선 목사님은 므나비유를 아주 분명하고 단호하게 이렇게 주석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내세의 상급에 층계가 있다.(고전3:15 참조)"(공관복음 주석: 686쪽)
이 본문을 박윤선 목사님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그것을 누가 해석하든지, 어떻게 해석하든지 억지해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제시하는 두 번째 성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전 3:11 - 고전 3:15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이 성구를 보면 분명히 공력이 남아 있어서 상을 받는 사람이 있고 공력이 불타서 겨우 구원만 받는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하셨습니다.
"해를 받는다 함은 상급을 잃는다는 뜻이다.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음은 위기일발의 위험을 피하여 겨우 구원을 받음을 가리킨다."
본문의 뜻이 분명하므로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정직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확실한 말씀을 무시한 채 상급차등을 부정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상급의 차이를 가르치는 한 구절 더 제시하겠습니다.
계 3:11 - 계 3:12
(11)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2하게 하라 (12)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2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은 분명히 "네 면류관은 빼앗길 수 있다."고 가르치시며 또한 "지는 자는 성전의 기둥이 될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충성을 해서 면류관을 얻을 자격을 얻었다고 해도 다시 불충성하거나 범죄하면 그 자격을 잃을 것이며 남다른 헌신을 해서 성전의 기둥이 될 자격을 얻었다고 해도 다시 악하고 게으르게 되면 그 자격을 잃을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상급의 차등을 증거하는 분명한 성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전 9:24
(24)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상급차등부정론자들의 견해대로라면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했어야 옳습니다.
"너희는 이미 상(구원이라는 상)을 얻었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그러나 바울 사도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구원얻은 너희지만 앞으로 상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 말씀은 "만일 너희가 달음질을 게을리 한다면 상을 잃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뜻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성경은 상급의 차등을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급차등 부정론자들은 뜻이 모호한 몇 구절의 성경으로 뜻이 분명한 상급차등론을 부정하는 것은 오류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왜 상급차등부정론자들이 그런 주정을 들고 나왔는가를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아마도 이들이 상급차등부정론을 들고 나온 원인은 기독교가 지나치게 기복주의와 기상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소홀히 취급하는 데 대한 반발 내지는 개선책제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발도 좋고 개선책도 좋지만 성경대로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개선책을 분명한 성경을 왜곡하여 내어놓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기존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떠 안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해서 충성하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그렇게 외쳐도 실제로 그렇게 충성하거나 목회하는 사람은 매우 찾기 힘든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상급균등론은 주장하는 이들은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상급을 마련해 두셨겠습니까?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몰라서 그러셨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원의 은혜가 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상급을 제시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심리가 대가없는 일에 충성하는데는 한계를 느낀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상까지 제시하시고 충성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충성하는 동기가 첫째는 구원의 은혜에 감격해서요 둘째는 이 땅의 복과 하늘의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아브라함도 모세도 바울도 내세의 상주심을 바라보고 충성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까?

극히 일부 사람들은 워낙 신앙이 돈독하고 인격이 훌륭해서 내세의 상급이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구원의 은혜만으로 충성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적이 아니라 예외에 불과합니다.
예외를 보편화시키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상급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충성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상급균등론에 물이 들면 목회자들은 목회의욕이 꺾이고 성도들은 충성과 헌신이 약화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상급균등론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성경은 상급차등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성경이 상급차등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이상 그 누구도 뜻이 모호한 성경 몇 구절로 상급차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주장을 용납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야만 성경의 바른 교리들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개혁신학인 것입니다.

저의 긴 글을 읽는 불편을 감수하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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