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불신자의 양심은?
구남단2
작성자
추천.h3
작성일
2007.11.27
출처: /연구실/문답/534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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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불신자의 양심은?
양심은 주인이 없고 지식의 지배를 받고 심신의 최고
권위를 가진 통치자 주권자로 마음의 눈 마음의 빛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독자는 신앙양심을 죽이지 않고 양심의 인도를
받을때 객관의 성령을 영접하는 걸로 알고있습니다.
불신자는 죽은지식-죽은양심-죽은행위-사망으로 연결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믿지 않은 사람이 정직하게
성실하게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심지어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이 양심은 어떤 양심입니까?
(답변) 양심은 넓은 범위로 본다면 육의 기능 중 하나일 뿐입니다.
나침반은 북쪽만 가르킵니다.
상황에 따라 북쪽을 가리키다 남족을 가리키게 되면 양심이 아닙니다.
그 나침반을 인민군이 사용하여 남쪽을 쳐도
그 나침반을 국군이 사용하여 북쪽을 쳐도
중이 나침반을 가지고 산사를 찾아가도
유교인이 그 나침반을 가지고 조상묘 자리를 찾아도
나침반이 하는 일은 오로지 북쪽을 가리키는 일입니다.
혹시 북쪽을 가리키게 되면 밟아뭉갠다고 협박을 해도
진실한 나침반이면 가루가 되도 상관없이 북쪽만 가리킵니다.
나침반에게는 가치평가를 하고 좌우 선택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믿는 사람의 양심이나
불신자의 양심이나
양심이란, 그 기능이 나침반과 같습니다.
마치
불신자의 눈도 앞을 보고 교인의 눈도 앞을 보는 것처럼
불신자의 혀도 말을 하고 교인의 혀도 말을 하는 것처럼
불신자의 욕심도 끌어모으고 교인의 욕심도 끌어모으는 것처럼
불신자의 양심도 교인의 양심도 양심은 나침반과 같이
그 결과와 선택은 주인에게 맡기고 양심이 하는 일은 나침반처럼 공평을 표시합니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과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이 10도 정도 차이가 있다면?
나침반은 정북과 지금 가는 길의 차이가 10도 정도 난다는 것만 표시합니다.
그 차이를 계산하여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양심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양심은 차이가 나면 차이가 난다고 표시만 합니다.
말하자면 정방향과 정위치를 표시하는 기능이 양심의 주 기능이며 존재 이유입니다.
불교인의 양심은 불교인에게 불교의 정북을 가리킵니다.
유교인에게 유교인의 양심은 유학의 정위치와 정방향을 말해줍니다.
그 기능이 탁월하고 위치선정이 또렷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자아에게
강력한 경고음을 내는 성능 좋은 양심은
결국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경고를 따라 제법 희생이 따른다 해도
위치를 바로 잡게 만듭니다.
가끔 아주 강력한 기능을 가장 초우량 양심은 자기의 생애애착욕까지를 누르고
방향을 잡도록 만듭니다.
불신자의 양심과 교인의 양심이 같은 점을 주로 설명했습니다.
두 양심의 다른 점은 그 양심을 소유한 정권자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진리의 새사람이 우리 양심의 주인이고
그들에게는 하나님 없은 옛사람이 그들 양심의 주인입니다.
불신자의 양심 중에서 성능이 우수한 양심을 가진 옛사람은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교인 중에서 조잡한 양심을 가진 새사람은 양심의 경고가 전신을 향해 특별히 하는 일이 없어 심신이 아주 제 멋대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참고로
믿는 사람이 불신자보다 비양심적이다 ... 이런 말을 아주 모독으로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믿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불신자보다도 다 나아야 합니다만, 불신자 중에서 양심의 성능이 특별하게 타고난 우수한 사람들이 있어 이들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 여러가지 운동을 하게 될 때 우리는 혼동하게 됩니다. 특히 그들의 행동이 성경이 명령하신 행동과 겉모양이 같은 행동을 할 때는 교인들이 크게 혼동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믿는 사람의 청각이 불신자 청각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믿는 사람은 불신자보다 달리기를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지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인 이유는
양심의 성능이 우수해서가 아니며, 달리기를 잘해서도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인 이유는 영이 중생되어 새사람이 되었고
이제부터는 자기의 주격이 중생된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앵무새가 벙어리보다 말을 더 잘한다고 해서
앵무새가 사람이 되는 것 아니며
사람이 앵무새만큼 말을 못한다고 해서 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고난 기능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다르게 주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체세력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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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불신자의 양심은?
양심은 주인이 없고 지식의 지배를 받고 심신의 최고
권위를 가진 통치자 주권자로 마음의 눈 마음의 빛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독자는 신앙양심을 죽이지 않고 양심의 인도를
받을때 객관의 성령을 영접하는 걸로 알고있습니다.
불신자는 죽은지식-죽은양심-죽은행위-사망으로 연결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믿지 않은 사람이 정직하게
성실하게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심지어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이 양심은 어떤 양심입니까?
(답변) 양심은 넓은 범위로 본다면 육의 기능 중 하나일 뿐입니다.
나침반은 북쪽만 가르킵니다.
상황에 따라 북쪽을 가리키다 남족을 가리키게 되면 양심이 아닙니다.
그 나침반을 인민군이 사용하여 남쪽을 쳐도
그 나침반을 국군이 사용하여 북쪽을 쳐도
중이 나침반을 가지고 산사를 찾아가도
유교인이 그 나침반을 가지고 조상묘 자리를 찾아도
나침반이 하는 일은 오로지 북쪽을 가리키는 일입니다.
혹시 북쪽을 가리키게 되면 밟아뭉갠다고 협박을 해도
진실한 나침반이면 가루가 되도 상관없이 북쪽만 가리킵니다.
나침반에게는 가치평가를 하고 좌우 선택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믿는 사람의 양심이나
불신자의 양심이나
양심이란, 그 기능이 나침반과 같습니다.
마치
불신자의 눈도 앞을 보고 교인의 눈도 앞을 보는 것처럼
불신자의 혀도 말을 하고 교인의 혀도 말을 하는 것처럼
불신자의 욕심도 끌어모으고 교인의 욕심도 끌어모으는 것처럼
불신자의 양심도 교인의 양심도 양심은 나침반과 같이
그 결과와 선택은 주인에게 맡기고 양심이 하는 일은 나침반처럼 공평을 표시합니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과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이 10도 정도 차이가 있다면?
나침반은 정북과 지금 가는 길의 차이가 10도 정도 난다는 것만 표시합니다.
그 차이를 계산하여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양심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양심은 차이가 나면 차이가 난다고 표시만 합니다.
말하자면 정방향과 정위치를 표시하는 기능이 양심의 주 기능이며 존재 이유입니다.
불교인의 양심은 불교인에게 불교의 정북을 가리킵니다.
유교인에게 유교인의 양심은 유학의 정위치와 정방향을 말해줍니다.
그 기능이 탁월하고 위치선정이 또렷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자아에게
강력한 경고음을 내는 성능 좋은 양심은
결국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경고를 따라 제법 희생이 따른다 해도
위치를 바로 잡게 만듭니다.
가끔 아주 강력한 기능을 가장 초우량 양심은 자기의 생애애착욕까지를 누르고
방향을 잡도록 만듭니다.
불신자의 양심과 교인의 양심이 같은 점을 주로 설명했습니다.
두 양심의 다른 점은 그 양심을 소유한 정권자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진리의 새사람이 우리 양심의 주인이고
그들에게는 하나님 없은 옛사람이 그들 양심의 주인입니다.
불신자의 양심 중에서 성능이 우수한 양심을 가진 옛사람은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교인 중에서 조잡한 양심을 가진 새사람은 양심의 경고가 전신을 향해 특별히 하는 일이 없어 심신이 아주 제 멋대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참고로
믿는 사람이 불신자보다 비양심적이다 ... 이런 말을 아주 모독으로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믿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불신자보다도 다 나아야 합니다만, 불신자 중에서 양심의 성능이 특별하게 타고난 우수한 사람들이 있어 이들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 여러가지 운동을 하게 될 때 우리는 혼동하게 됩니다. 특히 그들의 행동이 성경이 명령하신 행동과 겉모양이 같은 행동을 할 때는 교인들이 크게 혼동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믿는 사람의 청각이 불신자 청각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믿는 사람은 불신자보다 달리기를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지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인 이유는
양심의 성능이 우수해서가 아니며, 달리기를 잘해서도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인 이유는 영이 중생되어 새사람이 되었고
이제부터는 자기의 주격이 중생된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앵무새가 벙어리보다 말을 더 잘한다고 해서
앵무새가 사람이 되는 것 아니며
사람이 앵무새만큼 말을 못한다고 해서 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고난 기능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다르게 주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체세력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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