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친절과 농담은 어느정도까지?

구남단2
작성자
추천.h3
작성일
2007.12.04
출처: /연구실/문답/537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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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친절까지?


자료방에 백영희 목사님은 농담과 친절을 금하셨습니다.
농담은 금할수 있지만, 상대방을 배려하여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까지
금한다면 너무 무리가 있지 안겠습니까?
신앙생활에서 친절은 기본중에 기본인데, 백목사님의 친절에 대한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현시대를 사는 우리는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것입니까?
예수님도 형제를 사랑하라 하셨고, 예수님도 제자들이나 사람들에게
분명 친절하게 대했을 것이며, 또한 바울이나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도
믿음의 성도들에게 친절하게 대했지 않나요?
백목사님의 발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요? 백목사님이 친절이
얼마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지 모르지는 않으셨을텐데...
백영희목사님은 친절하면 관계가 더 멀어진다고 그러셨는데..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도 친절하면 더욱더 친절해지며, 그리고 차갑게 대하면
깊은 관계를 맺기가 점점 힘든데..



(답변) 신앙생활에서 금해야 할 농담과 친절이란


1.신앙에서 금하고 조심해야 할 농담

(1)금하는 경우를 크게 2가지로 살핀다면

①신앙의 근본 자세를 흐트리는 경우

믿는 사람은 예배 시간에만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평소 생활에서도 하나님 앞에 늘 조심해야 하고 다른 사람 구원을 고려해서
말 한 마디도 행동 하나도 빛이 되도록 또 덕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다 보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음에 내키는 대로 다 뱉을 수가 없습니다.
화가 나도 참아야 할 때가 거의 전부이고
좋아도 어려운 이웃을 고려해서 적절히 절제해야 할 일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결국 믿는 사람의 생활 자세는 불신자나 남들이 볼 때
경건한 모습으로 비취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경건한 척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이런 자세를
앞뒤 고려없이 생각없이 그냥 단숨에 흐트러버리는 것이 바로 농담입니다.
그냥 시도때도 없이 시실거리고 히죽거리는 습관화된 농담.
이것은 그 사람 신앙자세 전체를 순간적으로 B급으로 C급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재미있게 이야기 하는 일체를 금하고 돌부처처럼 벅수처럼 표현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경건해야 할 성도의 기본 자세를 생각없이 흐트러 버리는 것을 금합니다.


②대화의 방향을 구원에 유익없는 다른 곳으로 가게 하는 경우

재미있게 대화를 하든 심각하게 토론을 하든 생활 속에 단순하게 담화를 하든
우리는
겉으로는 자연스럽게 평범하게 대화하는 것이 좋으나
속으로는 자타 구원에 유익된 내용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대화의 방향 자체가 목적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가게 하는 농담도 금하는 것이 좋습니다.

진지하게 삼위일체 교리를 논하는데
'하나님 아버지가 있으면 하나님 어머니도 있겠네! 깔깔깔 .... ' '낄낄낄 ...'
이런 식으로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가 신론을 강의하며 한 마디씩 해서 따분한
조직신학 강의를 재미있게 이어가고, 그런 강의가 인기를 끌고, 그런 교수를 교수라고 교수로 부르고 ... 이런 현상을 예사롭게 보게 되는데. 이것은 엄청난 귀신 운동입니다. 귀신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여호와증인과 비교할 때 정통 조직신학자의 정통 삼위일체 교리시간에 이런 농담 하나 슬쩍 넣고 낄낄대고 있다면 그는 정통 안에서 정통을 뿌리채 뽑아 없애는 내응 이단세력이라고 비판을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장 두렵고 조심해야 할 '예배시간', 그것도 '설교시간'에
목회자들이 설교가 재미없게 들린다 해서 이런 저런 농담을 섞고 있는 경우가
언제부터 아주 우리 교계의 설교에 한 흐름이 되고 후학들이 배우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예배 광고 때, 교회 내 결혼식 때, 기타 행사 때에도 광범위하게 그렇게 되고
또 그런 것을 좋게 보고 배운 일반 교인들은 일상 생활에서 흔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고 받는 대화의 방향이 신앙을 염두에 두고 나가야 할 때 그 방향을 흐리거나
다른 곳으로 흐트러지게 하는 것은 엄청나게 조심해야 할 사안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그 날 배운 설교 내용은 가물거리고
그 설교와 상관도 없고 그 내용을 도와주는 예화도 아닌 전혀 의미없는 농담만
머리 속에 기억되게 하는 경우...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앞에서 지적한 '신앙자세가 근본적으로 경건해야 하는 자세' 문제까지 나가게 됩니다.


(2)그렇다면 농담이란

①농담의 일반적 의미

원래 진행되는 대화에서 약간 벗어나면서 아주 재미있고 우습게 이야기를 하게 되면 농담이라고 합니다.

대화가 변화없이 진행되면 우리 인체의 습득 기능은 자동 운항장치를 작동시켜 근성으로 듣게 합니다. 인간 두뇌의 성능과 용량이 유한하기 때문에 들리는 전부를 다 같은 수준에서 기억할 때 용량문제도 있고 활용의 효과성 문제도 있기 때문에 비슷한 것은 이전 정보와 같다고 판단하여 대충 듣게 합니다.

마치, 최근 인터넷 검색은 관련 자료를 검색해 주는 것은 기본이고 이제는 자료의 정확성과 중요성을 매겨 순서대로 나열하는 기능도 있는 것과 같이 우리 인체의 인지 저장 과정에서도 이런 작용이 있습니다.

따라서 평소 못듣던 소리, 색다른 내용, 자극적인 예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듣게 되면 우리 인지 기능은 이를 새로운 정보로 취급하고 중요하게 취급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감이 바짝 긴장을 해서 주의를 기우리고 기억도 잘 되도록 특별히 저장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감성 이성 지성 등의 요소들이 복잡하게 상호작용을 하고 역할 분담까지 하는 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②농담의 필요성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변화 없는 언행만 반복하면 견디지를 못하게 됩니다. 생명체의 본질은 새로운 것을 찾고 성장하며 대처하는 긍정적 의미의 변화가 필수적이므로 아무 변화없는 단순 반복은 생명체에게 큰 위협이므로 지겨운 이야기나 생활이 계속되면 인체에서는 경고음을 내게 됩니다. 아예 무시하거나 아니면 자버리거나 아니면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꼭 필요한 대화를 장시간 해야 하거나, 비슷한 실험을 수없이 해야 하는 연구작업, 또는 밤새도록 적을 관찰해야 하는 잠복근무를 하는 최전방 군인에게는 인체가 견디지를 못해서 변화를 요구하게 됩니다. 이럴 때 간단한 농담 한 마디는 귀와 뇌와 생각에 일시 자극을 주어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사이다 역할을 합니다. 꼭 필요할 때, 어색함을 깨야 할 때, 아주 필요한 경우에 우리는 농담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


③농담의 위험성

문제는 농담에게는 담배나 화투와 같은 습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담배 자체나 화투 자체가 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습관성 때문에 본인이 통제력을 잃고 그것들에게 붙들리고 그다음 소중한 돈과 시간을 없애기 때문에 우리는 담배와 화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한국교회가 죄라고 공통적으로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농담도 이론적으로는 아주 필요한 경우 적절히 이용하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문제는 농담을 끄집어 내고 사용하게 되면 농담을 하는 기능이 급격하게 자라서 자신이 통제를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머리 좋고 말재주가 있는 사람에게는 한두 번만 연습을 해도 단번에 숙달이 되어 주체를 할 수 없게 되고, 또 재주가 없고 둔감한 사람이라 해도 농담에 재미를 들이게 되면 적어도 마음 속으로 그것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심리 때문에 중요한 순간에 심리적 평정을 잃게 됩니다.

특히 세상만 보고 살고 세상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불신자라면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마찬가지겠지만, 믿는 우리에게는 한번밖에 없는 현실에서 어떻게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했으며 어떤 상태로 그 현실을 통과했느냐에 따라 영원한 건설의 차이가 있는데 이런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농담 한두 마디에 코가 꿰어 실수를 한다면 너무도 억울 할 일이므로, 비록 신사참배같은 시대적 환란은 우리가 못나서 이기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생활 속에 누구든지 마음만 먹고 알기만 한다면 이길 수 있는 이런 간단한 위험은 벗어나자는 뜻으로 농담을 그렇게 엄하게 조심시키는 것입니다.

특히 신앙없는 우리의 인체는
설교나 전도나 심방 등 신앙생활 관련 전반에 걸쳐 늘 조심하고 바로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 자세를 지겹게 생각하고 무료하게 느끼기 쉽기 때문에 농담처럼 아주 가볍고 간단한 웃음거리 하나로 긴장을 풀고 지겨운 상황을 해소해 버려고 기회를 엿보게 됩니다. 이 철없는 농담 한두 번이 초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신앙의 근본 자세를 가볍게 만들고 그것을 습관화 시키며 또한 중요한 설교나 예배 시간 또는 신앙으로 지도해야 하는 고비에 농담 하나로 주의를 흩어버리거나 김을 빼버린다면, 너무도 아쉬운 일입니다.


④한국교회와 농담의 폐해

우리를 전도한 서양교회들은 그들의 문화와 사회 분위기 때문에 농담을 아주 습관처럼 사용하고 농담이 없으면 대화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경건한 분들은 백목사님처럼 그렇게 살다간 생애를 더러 들을 수 있습니다. 일단 말하는 자세나 표현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서양사회는 위트라고 하든 농담이라고 하든 예화라고 하든 그들은 말의 표현을 재미있게 하고 한 단어의 깊이를 우리처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의 선배요 어른이었던 서양교회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강단에서 자기들 대로는 조심한다며 하지만 필요하다 해서 조금씩 대화나 설교 중에 다른 말을 섞었는데 이것이 아주 훌륭한 목회자의 멋있는 재주라고 생각한 우리 한국교회는 강단을 아주 엉망으로 만들었다 할 만합니다.

지금도 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의 기자회견 내용을 비교해 보면 그들은 재미있는 말들을 섞어가며 체질적으로 재미있게 대화를 하고 우리는 컴퓨터 기계음처럼 판에 박힌 표현을 하는 것을 봅니다. 바리새인처럼 형식 자체를 무조건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은 아무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의 중심이 문제라는 자세 때문에 하찮은 농담 하나 때문에 교역자 회의나 교회 내 주요 행사 모임 교제가 유아놀이방 수준으로 변질되고 그들의 표현만큼이나 그 신앙의 내면과 중심도 천박해질까 해서 여러 모로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3)결론적으로

농담은 본래 하던 이야기에서 약간 벗어나는 재미있고 자극적인 이상한 이야기를 말하는데, 그 농담 자체를 우리가 정말 필요할 때 조심스럽게 사용한다면 농담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우리 교인들의 신앙 수준과 수양 정도가 '농담을 금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가르쳐야 할 수준이지, 조심해서 사용하십시오 하기가 어렵습니다.

농담을 금한 백목사님도 설교 도중, 또는 교인과 개별대화 도중에 정말 재미있는 예화를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농담이라 할 순간은 그렇게 가깝게 대해도 한번도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가끔 어린 사람들을 친근하게 만들기 위해 재미있는 대화를 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어떤 분위기에서 어떤 정도의 이야기가 농담이며, 어떤 정도는 재미있는 예화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농담은 금하는 것이 좋습니다.'


2.친절을 금하는 이유

농담을 조심시키는 이유를 바로 이해했다면 친절에 대한 면은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스스로 정답을 작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자세하게 소개하는 것도 가끔 필요하지만 또 가능하다면 이곳을 찾는 분들이 신앙의 이치를 깨달아 이 홈이 안내하는 이 노선의 훌륭한 신앙인이 되도록 이런 문제를 자기 양심에 따라 생각하고 해결해 보셨으면 합니다.


간단히 요약을 한다면

우리에게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주어진 것 같지만 분해하여 살펴보면 시간도 힘도 기능도 기회도 모든 것은 한 현실에 단 한번밖에 없는 선택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한 자리에서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걸어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맡긴 자기 일을 있는 힘 다하여 하려 하면 남을 지나치게 돕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보통 남을 돕는다는 것은 오늘 불신 사회까지도 무조건 좋은 것으로 알고 있으며 교회는 그것을 십자가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라고 하는 십자가를 져야 하고, 아직 십자가를 질 기회를 주지 않으시면 예수님도 33년 이상을 기다렸습니다. 이 땅 위에 오시자 말자 바로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싫어서 회피했다면 죄가 되지만 때를 주지 않았다면 기다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신 다음 먹지 못하는 사람을 무조건 먹이지도 않았습니다. 필요할 때 5,000명과 7,000명을 먹였습니다. 죽어야 할 때가 있고 남을 위해 땀을 흘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친절이 아니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우리의 임무입니다. 남들은 그것을 친절이라 하겠지요.

백목사님이 극히 조심시키는 친절은
자기 할 일은 하지 않고
또 자기가 꼭 해야 하는 자기 임무로서 남을 위한 배려가 아니고
또한 자기가 그렇게 남을 돕고 배려할 수 있는 친절의 실력과 자본을 가지지 않고도
무작정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냥 '친절'이라고 표현하는 그런 친절을
믿는 우리가 해야 할 친절인 줄 아는 그런 친절을 금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집 지붕에 비가 새는데 누워서 낮잠을 자는 사람이
옆집에서 비새는 지붕을 고쳐달라 하면 벌떡 일어나서 도와주러 가는 그런 식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늘 남을 위해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따라서 친절은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문제는 꼭 해야 하며 주님이 원하시며 내가 해야 할 친절인가?
그렇다면 순교할 각오로 해야 하고
아니라면 다음 기회로 미룰 수도 있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가진 시간과 힘이 유한하기 때문에 어디에 어떻게 쓸지
주님이 인도하는 대로 쓰야하지
친절이라는 표현으로 함부로 사용하면 자타에게 결과적으로 '허실' '낭비' '방탕'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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