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신학과 철학의 관계는?
구남단2
작성자
추천.h3
작성일
2008.07.15
출처: /연구실/문답/649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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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철학은 어디까지?
어거스틴, 칼빈, 청교도, 그 유명했던 조나단 에드워즈 등 수많은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철학을 이용해 성경을 해석하고 하나님을 설명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데에 세상의 철학으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과 백목사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모든 하나님을 설명하고 성경을 해석합니다.
백영희신앙노선에서 보면 어거스틴이나, 칼빈, 청교도들, 조나단 에드워즈 등
수많은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도 잘못된 신앙관, 인본주의에 물들어
부족한 신앙을 가진것입니까?
지금까지도 철학은 조직신학이나 여러가지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많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청교도 저작물을 보면, 대표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철학을
이용해 하나님을 많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그것들의 문제점에 대해서 알고싶습니다.
(답변) 신학과 철학의 관계와 오해
1.신학과 철학
①불가분의 관계
말씀하신 대로
교회사를 통해 우리 신앙계통이라고 존중했던 모든 분들이
신학과 철학의 관계는 뗄 수 없는 관계로 상대했습니다.
심지어
신학을 제대로 하려면
신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려면
신학의 기본 소양으로서 철학을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신학의 상식입니다.
의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을 입학하려면
생물학 화학을 필수 기초 학문으로 공부해야 하듯이
변호사가 되려면 논리학 수사학 사회학 등을 그렇게 해야 하듯이
신학을 하려면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정통코스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교회와 신학의 상식입니다.
②어떻게 하다 교회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교회가 성경 유일, 말씀 단일의 '신앙'을 잃으면
순식간에 신학으로 탈선하고 신학이 조금 더 내려앉으면 철학이 됩니다.
철학과 신학은 차원만 약간 다를 뿐
연구하는 관심사도 그 내용도 그 연구하는 방법과 모습까지도
전부 같은 정도입니다.
마치 경제학과 경영학처럼
마치 달리기와 축구처럼
마치 행정학과 법학처럼
마치 정치학과 외교학처럼
이런 2가지 관계는 학문의 이름은 달라도 조금 생각해보면
거리로는 이웃사촌이며
내용으로는 얼마나 같은지 근친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현실 사회에 나타나는 이 2가지의 모습을 살펴보면
신학이 약간 현실에 관심을 가지면 현 천주교처럼 철학으로 내려앉고
반대로 철학이 약간 수준을 높이고 이상을 위로 잡은 것이 옛날 불교입니다.
지하철이나 복잡한 시장 한 귀퉁이에
철학가 점쟁이 사주 관상쟁이 도사 작명가 운명가들이 이름을 달리 하고 있지만
실은 다 하나입니다.
과학적으로 냉철하게 그들을 평가한다면 그들은 철학가들인데
그들은 언제라도 종교인 무속인 목사 승려 유교인으로 간판을 바꿀 수 있습니다.
③역사의 유명한 신앙인들의 경우
현재 이 노선처럼
과거에도 역사교회에는 성경 유일에 불타는 종들이 있어
오늘 우리에게 귀한 신앙노선과 교리와 교훈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질문자께서 구체적으로 거명한
어거스틴 칼빈 청교도 그 유명했던 조나단 에드워즈 등 수많은 분들과
우리와 가장 근접했던 박형룡 박윤선목사님과 같은 분들의 경우
한결같이 철학의 사상은 배격했으나 철학의 방법론은 아주 중요하게 존중했거나
아니면 대폭 활용한 면이 많습니다.
이 홈은 그분들이 남긴 평생의 많은 글을 헤집어 말꼬리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고
그분들의 전체 신앙사를 항상 존중하고 살피기 때문에
그분들이 철학을 상대할 때 철학의 내용까지 수용한다거나 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가 연구했고 전해주고 있는 신학은
심지어 플라토철학적 신학파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식 신학파니 하는 말들이
교회 안에서 나오고 그것도 정통 노선에서 상식처럼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④철학의 방법론을 이용하지 그 사상을 옳다는 것이 아니라지만
하필 최고급 요리집의 음식을 담아 내면서 요강을 씻어 사용한다면!
하필 집회를 법회라고 하고 연보를 시주라고 한다면?
우연히 같아질 수 있고 또 결과적으로 비슷하게 될 수도 있지만
교회가 플라토식이니 아리스토텔레스식이니 하는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을 할 뿐입니다.
어쨌든 위에서 거명한 여러 유명한 신앙인들의 경우
그분들이 그 사상적 내용까지 철학에 물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되었을찌라도 자꾸 탈색을 시켜 나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적으로만 그분들을 상대하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못마땅합니다.
세상에 주신 만물을 자연계시와 선물로 사용하기 때문에
건축학을 이용해서 예배당 건물을 짓고
인쇄술로 성경을 제작하고 전하고 있으니
철학도 수많은 학문들 중의 하나로 우리 신앙에 이용되기를 수많은 학문들 중의 하나로 이용을 당한다면 분을 새길 수가 있겠는데
신학과 철학을
아예 동료로 취급하거나 친인척으로 혼동하는 일이 흔하고
심지어 철학과 신학을 기아차와 현대차처럼 한 회사의 두 가지 상표로 생각하는 정도이니
격분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⑤늘 기억하고 있는 사례입니다.
연구회 전신인 서부교회 편집실 직원으로 있다가
1986년 외부 신학과정을 마치고 직원으로 복귀하면서 총공회 목회자 과정에 입학을 했는데
교회사 교리사를 전공했던 당시 양성원 교수 한 분이 강의 시간 도중에
답변자에게 아직 젊고 기회가 많으니 철학을 충분히 공부해서 조직신학을 연구했으면 좋겠다고 공개 권면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조직신학을 가르치던 교수도 같은 권면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답변자를 그분들의 진심을 다해 권면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고
그분들이 답변자를 공회 교리를 전념할 사람으로 기대한 것은 과분한 기대라 생각하며
그분들이 추호도 신학과 철학의 내용물을 혼동할 수준은 아니라고 그 당시 믿었지만
답변자로서는
성경이 성경의 내용 뿐 아니라 성경을 요약하고 가르치는 방법까지 다 가르치고 있는데
하필이면 신학의 일대 원수요 필생의 적이며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하나가 사는
그런 원수를 배우고 익혀 교리 정립에 보탬이 되도록 하라는 그분들의 권면 내용에 대하여서는 당시 격분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철학을 배운다면 철학이 얼마나 틀렸고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어떤 위험이 있으니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철학의 폐해를 광고하는데 필요하면 모를까
철학의 방법론이 필요하여 배우라는 말은 철학에게 삼켰다는 증거이고 그 원인은 그들이 공부한 신학이 오염된 신학이어서 자신들도 그 폐해를 모르고 그렇게 좋게 권면하였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2.어거스틴이나 칼빈 같은 이들의 철학 활용
그분들은
오늘 우리처럼 철학 자체가 필요조차 없는 시대를 살지 못했습니다.
비록 같은 신약이지만 우리는 신약에서도 가장 발전 발달된 시대를 살고 있고
그분들은 오늘처럼 철학을 완전히 분리 격리 배격해야 할 시대로 발전되기 이전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자기 시대를 하나님 앞에서 감당했던 그 면만으로 하나님 앞에 잘 사용되었고
오늘 우리처럼 철학조차 비판하는 이런 사명과 필요성은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철학 사용에 대하여서는 그분들의 당시를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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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철학은 어디까지?
어거스틴, 칼빈, 청교도, 그 유명했던 조나단 에드워즈 등 수많은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철학을 이용해 성경을 해석하고 하나님을 설명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데에 세상의 철학으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과 백목사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모든 하나님을 설명하고 성경을 해석합니다.
백영희신앙노선에서 보면 어거스틴이나, 칼빈, 청교도들, 조나단 에드워즈 등
수많은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도 잘못된 신앙관, 인본주의에 물들어
부족한 신앙을 가진것입니까?
지금까지도 철학은 조직신학이나 여러가지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많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청교도 저작물을 보면, 대표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철학을
이용해 하나님을 많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그것들의 문제점에 대해서 알고싶습니다.
(답변) 신학과 철학의 관계와 오해
1.신학과 철학
①불가분의 관계
말씀하신 대로
교회사를 통해 우리 신앙계통이라고 존중했던 모든 분들이
신학과 철학의 관계는 뗄 수 없는 관계로 상대했습니다.
심지어
신학을 제대로 하려면
신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려면
신학의 기본 소양으로서 철학을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신학의 상식입니다.
의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을 입학하려면
생물학 화학을 필수 기초 학문으로 공부해야 하듯이
변호사가 되려면 논리학 수사학 사회학 등을 그렇게 해야 하듯이
신학을 하려면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정통코스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교회와 신학의 상식입니다.
②어떻게 하다 교회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교회가 성경 유일, 말씀 단일의 '신앙'을 잃으면
순식간에 신학으로 탈선하고 신학이 조금 더 내려앉으면 철학이 됩니다.
철학과 신학은 차원만 약간 다를 뿐
연구하는 관심사도 그 내용도 그 연구하는 방법과 모습까지도
전부 같은 정도입니다.
마치 경제학과 경영학처럼
마치 달리기와 축구처럼
마치 행정학과 법학처럼
마치 정치학과 외교학처럼
이런 2가지 관계는 학문의 이름은 달라도 조금 생각해보면
거리로는 이웃사촌이며
내용으로는 얼마나 같은지 근친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현실 사회에 나타나는 이 2가지의 모습을 살펴보면
신학이 약간 현실에 관심을 가지면 현 천주교처럼 철학으로 내려앉고
반대로 철학이 약간 수준을 높이고 이상을 위로 잡은 것이 옛날 불교입니다.
지하철이나 복잡한 시장 한 귀퉁이에
철학가 점쟁이 사주 관상쟁이 도사 작명가 운명가들이 이름을 달리 하고 있지만
실은 다 하나입니다.
과학적으로 냉철하게 그들을 평가한다면 그들은 철학가들인데
그들은 언제라도 종교인 무속인 목사 승려 유교인으로 간판을 바꿀 수 있습니다.
③역사의 유명한 신앙인들의 경우
현재 이 노선처럼
과거에도 역사교회에는 성경 유일에 불타는 종들이 있어
오늘 우리에게 귀한 신앙노선과 교리와 교훈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질문자께서 구체적으로 거명한
어거스틴 칼빈 청교도 그 유명했던 조나단 에드워즈 등 수많은 분들과
우리와 가장 근접했던 박형룡 박윤선목사님과 같은 분들의 경우
한결같이 철학의 사상은 배격했으나 철학의 방법론은 아주 중요하게 존중했거나
아니면 대폭 활용한 면이 많습니다.
이 홈은 그분들이 남긴 평생의 많은 글을 헤집어 말꼬리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고
그분들의 전체 신앙사를 항상 존중하고 살피기 때문에
그분들이 철학을 상대할 때 철학의 내용까지 수용한다거나 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가 연구했고 전해주고 있는 신학은
심지어 플라토철학적 신학파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식 신학파니 하는 말들이
교회 안에서 나오고 그것도 정통 노선에서 상식처럼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④철학의 방법론을 이용하지 그 사상을 옳다는 것이 아니라지만
하필 최고급 요리집의 음식을 담아 내면서 요강을 씻어 사용한다면!
하필 집회를 법회라고 하고 연보를 시주라고 한다면?
우연히 같아질 수 있고 또 결과적으로 비슷하게 될 수도 있지만
교회가 플라토식이니 아리스토텔레스식이니 하는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을 할 뿐입니다.
어쨌든 위에서 거명한 여러 유명한 신앙인들의 경우
그분들이 그 사상적 내용까지 철학에 물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되었을찌라도 자꾸 탈색을 시켜 나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적으로만 그분들을 상대하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못마땅합니다.
세상에 주신 만물을 자연계시와 선물로 사용하기 때문에
건축학을 이용해서 예배당 건물을 짓고
인쇄술로 성경을 제작하고 전하고 있으니
철학도 수많은 학문들 중의 하나로 우리 신앙에 이용되기를 수많은 학문들 중의 하나로 이용을 당한다면 분을 새길 수가 있겠는데
신학과 철학을
아예 동료로 취급하거나 친인척으로 혼동하는 일이 흔하고
심지어 철학과 신학을 기아차와 현대차처럼 한 회사의 두 가지 상표로 생각하는 정도이니
격분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⑤늘 기억하고 있는 사례입니다.
연구회 전신인 서부교회 편집실 직원으로 있다가
1986년 외부 신학과정을 마치고 직원으로 복귀하면서 총공회 목회자 과정에 입학을 했는데
교회사 교리사를 전공했던 당시 양성원 교수 한 분이 강의 시간 도중에
답변자에게 아직 젊고 기회가 많으니 철학을 충분히 공부해서 조직신학을 연구했으면 좋겠다고 공개 권면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조직신학을 가르치던 교수도 같은 권면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답변자를 그분들의 진심을 다해 권면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고
그분들이 답변자를 공회 교리를 전념할 사람으로 기대한 것은 과분한 기대라 생각하며
그분들이 추호도 신학과 철학의 내용물을 혼동할 수준은 아니라고 그 당시 믿었지만
답변자로서는
성경이 성경의 내용 뿐 아니라 성경을 요약하고 가르치는 방법까지 다 가르치고 있는데
하필이면 신학의 일대 원수요 필생의 적이며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하나가 사는
그런 원수를 배우고 익혀 교리 정립에 보탬이 되도록 하라는 그분들의 권면 내용에 대하여서는 당시 격분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철학을 배운다면 철학이 얼마나 틀렸고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어떤 위험이 있으니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철학의 폐해를 광고하는데 필요하면 모를까
철학의 방법론이 필요하여 배우라는 말은 철학에게 삼켰다는 증거이고 그 원인은 그들이 공부한 신학이 오염된 신학이어서 자신들도 그 폐해를 모르고 그렇게 좋게 권면하였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2.어거스틴이나 칼빈 같은 이들의 철학 활용
그분들은
오늘 우리처럼 철학 자체가 필요조차 없는 시대를 살지 못했습니다.
비록 같은 신약이지만 우리는 신약에서도 가장 발전 발달된 시대를 살고 있고
그분들은 오늘처럼 철학을 완전히 분리 격리 배격해야 할 시대로 발전되기 이전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자기 시대를 하나님 앞에서 감당했던 그 면만으로 하나님 앞에 잘 사용되었고
오늘 우리처럼 철학조차 비판하는 이런 사명과 필요성은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철학 사용에 대하여서는 그분들의 당시를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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