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민주와 인권 - 그 참 모습과 세상 정치 표현

구남단2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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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12.05
1. 인간의 심리

계모는 하나 베풀고도 열을 베푼 듯 광고를 하고
친모는 열을 베풀고도 하나 밖에 베풀지 못했다고 느껴져 자책을 하는 법입니다.



2. 인권과 민주

모든 사람이 인간이기 때문에 날 때부터 가지는 개별 권리를 인권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의 인권을 자유롭게 그리고 공정하게 행사하도록 하는 제도를 민주주의라 합니다.



3. 세상의 모순

민주와 인권을 많이 말하는 사람 중에는 정말 민주와 인권을 위해 일하는 사람도 있으나
대개는 민주와 인권을 많이 말하는 사람은 그 것을 내세워 민주와 인권을 삼키는 사람이니
공산 국가들의 이름에 한결 같이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들어 가는 이유가 그러하고
민주화 과정에 그 단어를 많이 사용한 사람들의 훗날을 살피면 그들이 상대하여 싸웠던
독재자들과 거의 막상 막하 수준으로 민주와 인권에 대한 개념이 없는 독재자들입니다.
싸우는 방편으로 상대방이 '독재'를 들었으니 이 쪽은 '민주'라는 무기를 든 것입니다.

이 것이 하나님 떠난 인간 사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므로
이 노선은 세상의 민주와 인권, 독재와 반인륜을 두고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대충 듣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기 전 목적을 정할 때부터 우리를 택자로 만드셨으니
우리는 인간을 대할 때는 하나님께서 목적 대상으로 만든 인권을 늘 기억하고 존중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목적 대상인 택자란 각자에게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따로 있기 때문에
이 택자들끼리의 모든 문제는 반드시 강제나 강행이 아니라 전원 일치로 결정하게 했으니
각 자에게 주어진 인권을 존중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도출된 참 민주 진정한 민주제입니다.



4. 교회의 인권과 민주

교회가 인권과 민주를 입에 담을 때는 하나님이 없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야 하니
인권을 두고는 믿지 않아도 인간이면 나면서 가지는 인권 문제는 세상에 맡겨 놓습니다.
민주를 두고도 하나님 없는 인간의 인권을 보장하는 민주 제도는 세상에 맡겨 놓습니다.

교회가 인권을 말할 때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목적에서 주어진 인권이니
택자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리, 즉 하나님 자녀로 살고 하나님을 닮아 가는 권리가 인권이고
불택자는 택자인지 잘 알지 못하므로 택자인지 살피는 권리가 그들의 우선 인권입니다.

교회가 말하는 민주주의란, 하나님의 자녀인 택자들의 인권들을 보장하는 제도이니
한 사람도 빼지 않고 모든 택자는 하나님께서 다른 모습 다른 역할을 제각각 맡기셨으니
각자에게 주어진 인권을 행사하고 남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게 하는 것이 참 민주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인권 민주와 교회의 인권 민주란 애당초 달라도 완전히 다른 것이니
그 표현조차 세상이 입에 담는 인권과 민주를 교회가 그대로 옮기면 안 되는 것인데
교회의 눈이 얼마나 어두워 졌으면 입에 담을 말인지 아닌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습니다.



5. 교회 내의 인권과 민주

이 곳은 교인들의 모임이니 세상 사람들을 의식하지 말고 교회 내의 문제로만 살핀다면
역사적으로 교회가 교인의 신앙 인권과 교회 내 민주 절차를 무시한 역사는 천주교입니다.
교황 한 사람만 하나님 앞에 믿는 사람이고 나머지는 전부 무시 배제되었으니 참 기막히고
교황 한 사람의 횡포만 보장하는 것이 천주교였으니 천주교는 민주와 반대 개념입니다.

그런데 현재 세상 모두가 알기를 그리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알기를
어느 사회에서든지 천주교는 인권과 민주를 위해 가장 수고하고 앞서 노력한다고 되어 있고
천주교 다음으로 이 사회의 인권과 민주를 위해 수고한다는 교파들의 이름들이 쭉 있는데
그 이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교단들의 순서가 독재와 인권 탄압을 많이 한 순서입니다.

내용을 보면 공회처럼 제도적으로 전면적으로 역사적으로 정말 민주화 된 교단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민주화 된 교단은 '민주'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고 그 용어를 싫어 하는데
황제 제도를 유지하는 천주교가 가장 민주와 인권을 입에 담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우습고
천주교 다음으로 성공회 감리교가 군주 제도를 가졌는데 민주와 인권을 자주 말하고
그리고 민주와 인권을 가장 강조한다는 장로교와 침례교는 어중간하게 그 단어를 말하고
이 모든 제도와 비교할 때 가장 민주화가 되어 더 이상 민주화와 인권을 보장 할 수 없는
완전하다 할 민주와 교인권을 보장하는 공회는 그 입에 민주와 인권을 담지 않습니다.



6. 교인의 인권과 교회의 민주를 진정으로 보장하는 공회의 교훈과 제도

어느 교리서든
그 구원의 순서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과 '택자인 우리'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이 노선의 교리보다 더 깊게 확실하게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살핀 교리서는 없습니다.
다른 교리서들은 이 분야가 목록만 제시될 정도이나 이 노선의 설명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개혁의 선배들이 가르친 세월이 오래 되어 오늘 교회들이 잊어 그렇지
개신교라는 우리 기독교는 이 노선처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연구가 가장 깊어야 하고
실제 그 면을 그렇게 밝혔기 때문에 교회 헌법마다 '자유'라는 원리가 먼저 들어 있습니다.

이 노선은 그 원리가 제일 먼저 들어 있는 이유를 바로 깨달았고 그리고 발전시켰고
일반 교단들은 그 원리를 신학교 책상에서 암기하고 시험친 뒤 묻어 버린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그 12 가지 속성이라는 교리에서 제대로 연구하려면 참으로 깊게 들어가게 되고
택자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유성을 주셔서 인격체로 길러 가는 면도 깊을 수 밖에 없고
이런 특별한 우리를 목적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창조와 오늘 세상이 돌아가고 있으니
기독교의 시작이요 근본인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을 바로 살피다 보면
교회는 택자인 교인 하나 하나에 대한 하니님의 목적과 섭리를 거스릴 리가 없게 되고
모든 교인 각자를 따로 인도하는 하나님 뜻을 안다면 단체의 결정은 특별할 수 밖에 없으니
교회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다수 교인이 소수 교인을, 전체 교인이 한 교인을 상대로
숫자나 교권이나 기타 법과 제도로 상대방을 꺾거나 침해하는 일은 할래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면 때문에 공회의 교회 행정 원리는
기독교의 초기 선배들의 수고를 제대로 배우고 익히고 계승한 다음 발전을 더해 보았으니
그 것이 '교회의 모든 결정은 전원 일치'라야 한다는 한 원칙으로 귀결하고 표현했습니다.
한 교인 교인은 하나님 앞에 별도의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로 인도되고 있다는 뜻이며
그런 교인들끼리 함께 의논할 일이 있으면 진리 앞에 전원 일치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맞고, 이치적으로 그리 될 수밖에 없으며, 교회 역사가 말을 하는 것이고
성경으로 봐도 그렇고, 교리로 요약을 해도 그렇고, 세상 사람도 인정을 할 정도입니다.
교회가 진정 교회다워지고 신앙이 신앙다워지는 길, 제도, 그릇은 진리 전원 일치입니다.


그래서 공회는 가르치고 권면하고 설득하는 일에는 있는 힘을 다 기울이지만
상대방이 듣지 않으면 결국 통고하는 것으로 끝을 내지 그 이상 조처를 하지 않습니다.
총회장의 지시니 노회장이 듣지 않으면 손해를 볼까 싶어 굴복을 하는 일이 없고
교인들의 다수 때문에 소수의 진리 주장이 묻히는 경우가 없습니다.
장사나 정치가처럼 타협과 흥정으로 일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로 인해 손해 보는 것은 단 한 가지이니 세상 기준으로 볼 때 눈에 보이는 성과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그 성과나 결과란 신앙이 아니라 두고 갈 세상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교회답고 신앙이 신앙다워지려면 이 노선의 행정 체계가 단연 돋보입니다.



7. 참 인권과 참 민주제를 가진 공회는 민주와 인권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습니다.

이 홈의 수만 개 글 전체를 읽어 보셔도 '민주'나 '인권'이라는 표현은 없을 것입니다.
이 노선은 가장 인권적이며 가장 민주적인데 입에다 그런 표현을 담지를 않습니다.
그 단어가 세상이 먼저 시작해서 유행시켰으므로 이 노선이 세상과 떨어져 있어 그러하고
그 단어의 역사에는 세상 모순되고 거짓된 민주와 인권이 담겨 있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 번 글에서는 설명을 위해 세상 기준으로 세상이 사용하는 단어를 가지고
그 단어가 향하는 원래의 뜻을 살피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 좋아하는 대로 표현과 기준을 다 내어 주고 살펴도 이 노선이 옳습니다.



8. 문득 이 글을 적게 된 것은

지금 공회는 1970년 이래로 계속하고 있는 매 2 년의 교역자 시무 투표 때문에
5 개 교회가 불신임이 되어 교역자 이동과 이로 인해 민감한 분위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년 퇴직 때까지 목회자들이 자기 자리를 보장 받는 것이 일반 교단의 법인데
이 노선은 매 2 년 목회자들이 먼저 제안하여 교인 4분의 1의 반대면 사임하겠다는 것이니
이 제도 역시 그 뿌리는 하나님께서 교인 각자에게 주신 택자의 권리를 깊이 생각했고
그 다음 각 교인들의 권리가 충돌할 때 전체 통일 의견을 모으는 방법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 제도로 인하여 살아나는 것은 교인의 신앙 권리, 하나님을 닮아 가는데 유리함이며
이 제도는 교회 내에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하나님이 될 수 없게 하여 모든 교인들이
한 분 하나님 앞에 각자 자기 신앙 걸음과 전체가 노력할 복음 운동만 위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1960년 8월 4일 목 요일 오후 설교 노트를 검토하면서
마태복음 13장의 진주와 보화는 우리가 세상에서 가져야 할 구원이니 믿는 우리로서는
우리의 신앙이 자라 가는 것이 보화이며 이 보화를 얻기 위해서는 굽신거려야겠다고 했고
그 다음 설교 내용은 '성도도 천상 천하에 것에게 투표 받는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만물이 오늘 땅 위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았으며 무슨 말을 했는지 일일이 다 지켜 보다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 만물이 일제히 찬성과 반대로 소리를 외치고 증언을 할 것입니다.
이 날이 다가 오고 있는데 손 바닥으로 하늘을 가리 듯 덮는다고 덮어 질 것인가?
차라리 가장 가까운 자기 교인들에게 투표를 시켜 미리 나를 검토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모든 무신론자 불택자 원수까지 악령까지 만물까지 증언하고 나설 그 날을 생각한다면
오늘 그래도 나와 가장 가까운 형제에게 부모에게 나를 물어 나를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 것이 세상에서는 자멸 행위일 것이고 자살 행위일 것이고 명예 훼손이 될 수 있겠으나
우리에게는 하나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일에 확보할 인권 차원의 지혜가 아닐까!
그리고 그런 교인들이 함께 가야 할 교회의 전체 결정에 대한 진정한 민주제가 아닐까!

외부의 강압이나 외부의 다수에 의하여 나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 당하는 것이 아니라
교역자 스스로 원하고 원하여 부탁하고 그 부탁 때문에 전체 신앙 유익을 위해 하는 투표.
이 것이 공회의 시무 투표이고 이 시무 투표의 겉 모습만 가지고도 기독교 유래에 없는
정말 굉장한, 그런데 너무 자연스럽고 지극히 당연한, 모범 제도라 할 것인데
그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목적과 택자에 대한 섭리 차원을 현실의 자기 구원에 잇는다면
이는 교회가 선택적으로 취할 사안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9. 만물이 투표하게 되는 그 날

이 날은 우리는 세상 종말이라, 말세라, 부활의 날이라, 심판의 날이라고 합니다.
이 날을 부인한다면 이단입니다. 이종교가 됩니다. 불신자이거나 무신론자입니다.
그 날의 특징은 그 날에는 모르는 것이 없이 다 드러나는데 고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이 오기 전, 오늘의 특징은 고치지 못할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공회는

1970년에 교역자들이 먼저 제안하여 짝수 되는 매 2년 11월 마지막 주일 오전 대 예배에
그 예배를 참석한 중학교 1학년 학생 이상의 모든 교인이 담임 목회자를 상대로 투표하고
비밀 자유 투표의 결과 4분의 1 이상의 반대가 있으면 목회자는 그 순간 바로 사임되고
그 후 즉시 교인들이 완전 자유로 교회 운영을 결정하는 되는 것이 시무 투표입니다.

초기 20여 년 목회자들이 스스로 목회자들만 상대로 이런 투표를 실시하여 나오다가
이 제도의 취지와 방향과 세부 내용이 잘 파악되고 안정적인 제도로 정착되겠다고 하여
1988년부터는 교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장로님과 권사님들도 포함시켰습니다.
그 외의 직책은 매년 목회자나 전체 교인이 1 년 직으로 선출해 왔으니 상관이 없습니다.

알고 보면 하부 직책들은 매 년 시무 신임을 물어 비정규직처럼 진퇴를 심사 받는데
더 중요한 고위직들은 한 번 임명 받으면 죽는 날까지 계속하게 되었으니 문제였습니다.
한 번 성자라고 계속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 490 번 실수도 한다는 것이 성경이니
공무원처럼 신분과 권한과 직책을 보장 받게 되면 그 권리를 좋은 데 사용하지 않고
남을 위해서는 게으르고 무책임하게 하고 자기를 위해서는 권리만 챙기는 것처럼
교회도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는 이 땅 위에서 세상 그런 악습 악성이 늘 함께 있기 때문에
미리 자기를 깨끗하게 하게 만들어 자기가 먼저 복을 받고 그로 인해 전체가 복 되자고 한
제도가 이 시무 투표 제도입니다.



10. '균형'을 위해 마지막 한 가지를 덧 붙입니다.

교인들로서는 이 제도를 설명하면 동의하지 않는 분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아주 적극적으로 이 제도를 강조하고 나섭니다.

그런데 자기가 훗날 장로님이 되어 시무 투표를 받게 될 때 그 때는 무엇이라 할 것인가?
그 때를 생각하고 지금 말을 해야 합니다.
그 날이 올까 생각하고 큰 소리 치지 말 것입니다. 하기는 하되 알고는 있어야 합니다.
그 투표를 당하는 입장에서는 막상 자신을 황무지에 내 몰린 그런 신세가 되게 했을 때
오늘 남을 투표하는 입장에서 이 제도의 원칙을 설파할 때의 감정 입장을 새겨야 합니다.

그러니, 교인들은 오늘 시무 투표 시행을 너무 강하게 말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러니, 교인들도 자신을 그 날의 그 입장에 자신을 세워 두고 매사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교인 시절에 장로님들을 그렇게 질타한 분들이
막상 장로님이 되고 나서는 더 심한 경우가 참으로 허다하고
교인 시절에 목회자에 대하여 아낌 없이 비판하고 정죄한 분들이 훗날 목회자가 되었을 때
그 때는 입장이 달라졌다 해서 그렇게까지 다른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말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보아 왔습니다.

그래서 이 홈에서 일반 교인들이 목회자를 비판하거나 교회를 평할 때에
이 홈은 연구 홈이기 때문에 원리적 차원에서 그 주장을 대폭 다 수용하고 이해하는 편이나
늘 마음 속으로는 이 분들이 앞으로 목회자가 되었을 때, 그 때는 어떻게 말을 할까?
이 마음을 가지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시집을 많이 살아 본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고 나면 시집을 그렇게 많이 살리고
맞아 본 졸병들이 고참이 되고 나면 졸병들을 그렇게 많이 때리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술 먹고 폭행하는 아버지 밑에 자란 아이들이 그 아버지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가야 할 우리의 길
쉽게 생각하지 마시되 그렇다고 훗날 내가 당할 때를 생각해서 서로 봐주기를 하지도 말고
한 길, 십자가 진리의 길을 연구하여 찾아 놓고
그리고는 끝까지 한 길만 달려 가고 싶어 이 홈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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