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이북교회의 바벨론 포로 70년

구남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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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12.10
1. 북한의 화폐개혁

2009년 11월 30일, 바로 지난 주 월요일에 북한은 화폐개혁을 했습니다. 북한의 조처는 벌써 다섯 번째이니 큰 문제도 아닙니다. 북한은 김일성 가족의 절대 독재로 유지 되는 체제이므로 김일성의 사망 같은 이런 사건이 큰 것인데도 지금까지 다 버텨 왔습니다. 그래서 이 번 일은 그냥 듣고 자나 갈 그렇고 그런 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최근 김정일조차 뇌졸증에 죽을 뻔했고 아직 후계 체제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남한의 정권이 과거와 달리 만만치 않고 국제정세도 과거 북한이 협박해서 먹히던 대와 상당히 달라 져 있습니다. 북한의 안팎 정세가 북한에게는 한 순간 모든 것이 다 뒤집어 질 수 있는 상황이므로 바로 이런 임계점에 달한 상황에서는 평소 실무적 조처에 지나지 않는 사소한 것이 발단이 되어 체제가 끝이 날 수 있으므로 이 번 화폐개혁은 아주 작은 일인데도 모두 숨을 죽이고 지켜 보는 눈치입니다.




2. 북한에 변혁이 생긴다면

과거에는 김일성이 죽는 그런 천지개벽의 사건일지라도 인물만 바뀌지 북한의 근본 방향은 바꾸어 놓지 못할 일인데 현 상황에서 만일 북한에 격변이 생긴다면 어떤 형태로든지 그 것은 어느 날 동독처럼 또는 8.15 해방처럼 갑작스럽게 북한 땅에 자유가 찾아 오는 방향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과거 소련이 망하고 자유 세상이 되는 길목에서 보수 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모스크바 시내에 탱크가 진입하고 포격을 가하여 일시 구 공산세력이 정권을 잡는 것처럼 보였으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은 되돌릴 수 없고 다만 꽃샘 추위가 있었던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북한이 갑작스럽게 바뀌는 과정에 만일 과거 독재정권을 잇는 세력이 정권을 잡는다 해도 대세를 바꾸지는 못할 듯 합니다.
화폐개혁 소식을 접하면서 바로 저런 사소한 일 하나가 촉발을 시켜 북한이 통일 되고 자유 왕래가 가능하게 된다면? 우리는 신앙인이므로 다른 모든 변혁은 다 뒤로 물리 치고 오로지 북한 땅에 드디어 자유로운 교회 재건이 시작 될 일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3. 다니엘의 70년과 오늘 북한 교회

다니엘서는 1장에는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던 과정을 잠깐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범죄로 유다 나라의 멸망은 미리 예정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외침으로 그 멸망이 조금 연기 되었다가 예레미야 선지 때에는 완전 멸망과 함께 70년 기간 동안 나라가 황폐할 것을 렘25:12에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 온 다니엘은 왕의 결정에 따라 특별하게 공부할 기회를 가졌고 여러 과정을 거쳐 총리가 되고 온 바벨론에 하나님의 영광을 높혔던 종이며 선지자였습니다. 그 다니엘이 9장 1절에서 문득 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예레미야로 미리 말씀하신 '70년'의 말씀 기록을 떠올렸습니다.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다니엘에게 이 70년이 문득 떠올려 졌 듯이 이 번 북한의 화폐개혁은 북한 정권의 운명이 촌각을 다투고 있는 상황에서 참으로 민감한 소식이므로 왜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들을 전개 시키실까 라는 생각 중에 북한교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북교회는 1939년으로부터 지금까지 만 70년을 신앙 자유를 잃고 내려 왔습니다. 만일 오늘이라도 북한 정권이 무너 지면 북한 땅에는 힘찬 교회 재건이 시작 될 것입니다. 현재 이남 교회의 기본 역량과 남한 정권의 경제 재건력과 이북의 핍절한 상황 그리고 이남 교회가 준비한 북한 선교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아마 세계 역사상 가장 단시간에 가장 놀라운 개척과 부흥 결과가 불 보듯 합니다.


70년이란, 다니엘의 시기에는 구약이므로 보이는 육체 면을 중심으로 교회를 양육하신 시기여서 문자 그대로 70년이 중요합니다.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9장에서 날짜까지 손꼽아 기다려야 할 상황입니다만 오늘 우리 신약교회에게는 이 70년이 꼭 신앙자유를 잃은 교회의 재건에 걸리는 절대 기간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70년을 기록하신 이상 늘 그 숫자는 우리에게 숫자로도 머리에 맴돌게 됩니다. 비록 신약이지만 그 숫자를 그대로 재현할 수도 있는 분입니다. 대개 구약의 숫자는 신약 우리에게는 신령한 면으로 가르치는 뜻을 살펴야 합니다. 7은 하나님의 수이며 10은 우리 인간의 만수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회개에 필요한 기간, 범죄한 교회가 그 값을 느끼고 체험하며 철저히 돌이 킬 수 있는 그 분량 만수입니다.
만일 현재 하나님께서 북한을 없애고 이북교회에 신앙자유를 주신다면 다니엘 9장의 70년의 신령한 면은 어떻게 되겠는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이 1938년이나 그 결의는 총회 지도부에게 해당 된 것이고 그 결의는 한국교회의 상징적 대표성이었지만 1939년에 들어 서면서 총독부는 무력으로 신사참배를 전국 교회에 강행을 시켜 일반적으로 전체적으로 본다면 이북교회의 신앙은 말살 되었습니다. 1945년의 해방으로 이남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갖고 오늘에 이르지만 이북교회는 일제보다 더 독하고 철저한 공산당에 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평양 총회의 결의로 한국교회가 법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 1938년이고
총독부의 지시로 전국 경찰들이 교회를 신사참배로 장악한 것이 1939년이며
이북 교회에 희망조차 없게 된 그 재확인의 시점이 해방이었던 1945년인데
5년 준비를 통해 전쟁이 일어 났고 더 이상 희망이 없던 시점이 1950년이며
전쟁 중에 남북한이 남진과 북진을 거듭하다 대탈출을 했던 것은 1951년 1월 4일, 1.4후퇴입니다.

물론 지금도 북한의 도처에는 70년 전에 가졌던 신앙의 생명이 지하교회로 유지 되는 사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만, 시대적으로 전체 교회를 볼 때에는 북한의 교회는 그 남은 성도들까지 6.25 기간의 1.4후퇴에 다 내려 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남교회의 각 교파 지도자 대부분은 그 출신이 이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북한 교회의 생명력이 이남교회에서 지도급으로 활동하고 있으나 시대적으로 넓은 면에서 평가할 때는 이북교회는 앞에 소개한 그런 과정을 거쳐 완전히 사라 졌습니다. 지금 북한에 2 개의 교회가 있다는데 그 교회를 교회라고 한다면 저 쪽의 공산당과 비슷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만일 남한 정권이 남한에 작은 교회 2 개만 남겨 두고 다 없앤 다음, 그래도 종교 자유가 있다라고 한다면 그 소리를 사람의 말로 그대로 들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시점에서 70년을 잡느냐에 따라 숫자적 70년은 달라 집니다. 1.4후퇴 때에 북한 땅에 남아 있던 성도들이 대규모 월남을 한 것을 기준으로 잡는다면 이제 60년 정도를 지나고 있으며 2021년까지 기다려 볼 일입니다. 한 편 신사참배의 강행조처가 있었던 1939년으로 잡는다면 벌써 올해 12월에 북한에 자유가 찾아 와도 그 수치를 두고 우리는 다니엘 9장에서 다니엘이 예레미야로 주신 그 년수를 기억하며 특별히 기도한 그 자세가 우리에게 우리 할 일을 깨닫게 할 수 있습니다.



4. 선교, 북한 선교 그리고 백영희 신앙노선

이 노선의 특징은 참으로 많습니다만 '선교' '북한 선교'라는 이런 이름 앞에서도 아주 특이한 걸음을 걷고 있습니다. 진정한 공회, 공회의 의미를 알고 공회의 길을 걷는 이들의 입에서는 '선교'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좀 죄송한 표현인데, 공회 내에서 '선교'를 입에 올리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그 단어 하나를 가지고 공회인과 사이비 공회인을 구별할 정도가 됩니다. 왜 그런가?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마6:3을 아는 교회라면 본능적으로 선교를 그렇게 홍보하고 광고하고 자기 입으로 달고 다니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선교는 가장 중요하고 생사까지 걸어야 할 문제여서 최전선에 나갈 육탄 돌격대가 자기 임무를 알면 그 임무에 마음이 무거워 져 입에서 어떤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육탄 돌격대로 선발 된 사람이 율동을 하며 축포를 쏘아 대며 웃어 가며 기념 촬영을 한다면 그들은 연극이나 영화 배우의 연출이며 흉내 내기를 하는 것이지 실전과는 아예 상관도 없는 사람이고, 만일 실전에 투입 될 사람이 그런 식이라면 그들은 정신이 모자라거나 잘 못 된 사람들일 것입니다.
또한 선교는 전도의 끝자락에서 나타 나는 현상이니 공회 교인들은 자기 현실에 자기에게 메워 진 주변 사람의 전도에 전력을 다하다 보니까 그 전도의 저 쪽 너머까지 갈 힘이 없어 그래서 자연스럽게 선교라는 표현을 입에 잘 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변 생활 속에 전도는 하지 않고 가족과 친구와 직장에는 덕이 되지 않는 사람이 보따리를 싸서 아주 먼 곳으로 가서 그 곳에서 선교를 한다면 그 선교지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게 출발 될 수 있겠는가? 새 임지의 새 분위기가 사라 지게 되는 시점이 되면 내나 본토 고향에서 자기가 해결하지 못한 자기 속의 문제 때문에 선교지에서 자기로 말미암은 온갖 부작용이 또 생기게 됩니다.
사람이 온전을 이룬 다음에 다음 일을 해야 한다면 아무도 그렇게 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자기로서는 자기 현실에 먼저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현실을 통해 다음 단계로 이끄시면 그 때는 우리가 어느 지경이라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임무를 주시면 그 임무에 나아 가면서 자기가 고칠 것은 더욱 가속으로 고치고 또 해야 할 일은 하는 것입니다.
공회의 선교관이 이렇고 이 것이 성경의 기본 방향이라고 깨닫기 때문에 공회는 주변에 전도하는 일에는 세계 교회에 모범이 되었고 한국교회에 공회 교인들처럼 안 믿는 사람을 상대로 어린 아이 하나까지 진정으로 전도하려 노력한 사례는 없었습니다. 다른 교회들이 예배당 건축의 미를 통해 또는 과시를 통해 혹은 교회 운영의 프로그램을 통해 다른 교회에 다니는 이들을 인기몰이로 끌어다 놓고 그 것을 전도라고 또는 선교라고 하는 그런 인식은 공회 내에는 들어 설 여지조차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예배당의 규모와 교인의 숫자에 있어서는 아주 낙후 된 교단이 되었으나 신앙의 근본과 인식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공회 교회는 일반 교회의 부흥을 부흥이 아니라 탈선 속화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 더하여 공회 교회는 전국의 수도 없이 많은 교단들 중에 유일하게 남한 출신들이 남한에서 믿어 교단을 이룬 거의 유일한 경우입니다. 고신 재건 합동 통합... 할 것 없이 북한 교회가 앞서 믿고 인재들이 많았고 해방 후에 신앙 자유를 찾아 대거 이남으로 월남하였기 때문에 어느 교단이든 이북 출신의 신앙인들이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하여, 그들로 인해 선교, 특히 북한 선교가 강조 되었고 벌써 1970년대부터 대규모 북한 선교를 준비한 곳도 있습니다. 북한 선교가 늦어 지자 북한 선교를 하기 위한 중간 단계로도 사용하면서 한 편으로 당장에 대규모 선교가 필요한 중국 선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회는 일반 목회자 중에는 가끔 이북이 고향인 분이 계시나 이북에 있을 때는 믿지도 않았습니다. 공회는 지도부로부터 교역자들 전부와 교인 전부가 거의 북한과 전혀 관계가 없는 정도가 되다 보니까 이북교회를 위한 기도는 아프리카 선교를 위한 기도처럼, 또는 인도를 향한 기도처럼 그렇게 거리가 멀었습니다. 공회의 기본 신앙 방향 때문에도 그러했고 연고조차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백영희 목사님은 생존 당시 한국교회 전체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할 위치에 있었고 그래서 '이남을 이북에 붙이지 마시고 이북을 이남에 붙여 이북교회에도 신앙의 자유의 기회를 허락해 주시고,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어린 것들을 기르는 이 기회를 더 허락해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돌아 가실 때까지 했었습니다.



5. 이 홈을 찾는 분들, 특히 이 노선에 충실한 분들께

우리는 선교를 전도의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실력이 없어서 선교를 하지 못하지 만일 해야 할 상황을 주신다면 전도 중에서도 가장 영광스럽게 나서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홈의 자료를 호의적으로 접하게 되면 저절로 선교와 멀어 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현상은 일반 교회들의 무분별한 선교를 기준으로 본다면 멀어 지는 것이 좋은 현상이나, 원래 성경이 말한 제대로 된 선교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선교란 우리 입에서 우리 생각에서 잊혀 지거나 무시 되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폭행하는 남편을 욕하다가 자칫 남편이라는 제도를 만드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면 이는 3계명의 죄가 됩니다. 요즘 여자들의 횡패가 심하다고 여자들을 욕하다가 자칫 천하 모든 여자를 여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희망 없게 상대하면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맞서는 죄가 됩니다. 틀린 것이 많으면 그 틀린 것을 고치려는 노력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선을 넘어 서면 아니 됩니다.

북한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원래는 북한이라 하지 않고 이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전체가 한 교회라는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비록 세상이 북한으로 자꾸 단어 사용을 굳혀 가고 있지만 우리는 이북과 이남이라는 표현이 더 좋을 듯 합니다.

이북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이남교회에 앞서 먼저 이 나라 복음화를 이루었고 이 나라 교회의 주도 역할을 했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한 편으로 우리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모두를 위해 기도하되 가까우면 가까운 만큼 더욱 기도의 책임이 무겁습니다. 아프리카보다는 중국을, 중국보다는 이북교회를 위해 기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물론 이북교회보다 더 급한 것은 현재 우리의 현실이 되어 있는 이남의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다 함께 바로 살아야 하는 것도 우리의 시급한 사명이지만, 우리는 이 노선 총공회 신앙에 있는 전국 어느 교파 어느 교회의 어느 목회자나 교인이라도 백영희 신앙노선상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에 앞서 현재 우리가 맡고 있는 교회, 우리가 출석하는 교회의 교인들을 위한 기도는 그 기도의 분량과 횟수와 정도가 더 많고 뜨거워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모든 이들을 다 합한 것보다 나 자신과 내가 개인적으로 책임 진 가족과 신앙의 식구들의 경우는, 이들이 잘못 되면 남들에게 짐이 됩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야 남을 살립니다.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하루 30분의 기도는 모자랄 것입니다. 최소한 공회 교인이라면 매일 30분씩 기도하자는 노력을 1980년초반부터 해 와서 이제 30년에 이르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인가? 자기 속에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에 가장 주력하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잘못 된 것을 돌아 보며 고치기 위해 가장 치열한 전투와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것은 다 빼 버리고 기도를 하면 첫 마디에 아프리카와 세계와 북한을 위해 기도한다면 이 것도 참 문제가 많은 기도이고, 늘 자기 속의 믿음 투쟁에 전력하다가 형제를 위해 이북교회를 위해 중국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잊어 버린다면 이 것도 역시 문제입니다.

큰 기도, 많은 기도, 유명한 기도... 이런 기도보다 지금까지 기도하는 평소의 각자 기도에 더하여 비록 가끔이라도 비록 짧게라도 진심으로 그리고 당연하게 이북교회를 위해 기도하기를 제안합니다. 평소 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더 강조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노선의 성향과 역사와 강조점 때문에 마치 이북교회를 기도하지 않을 대상처럼 된 것은 분명히 고장이며 잘못입니다.



6.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다니엘이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해 주신 '70년'을 기억하자 바로 3절에서 기도를 했는데,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며 기도한 그 기도가 시작 된 바로 그 시점에 하나님께서 가브리엘 천사에게 명령을 내려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는 드디어 다니엘에게 이스라엘이 고향으로 돌아 가며 예루살렘을 중건하게 되고 구원의 날이 이를 것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이어서 하나님께 명령을 받은 천사가 다니엘에게까지 날아 오는데 시간이 좀 걸린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명령은 그와 동시에 천사에게 떨어 졌고, 필요한 약간의 시행 절차를 통해 실제 다니엘에게 전달 된 것은 조금 후였으니 오늘 우리에게도 이북교회의 신앙자유를 위해 기도하면 그 기도가 이루어 지는 순서는 몇 가지를 거칠지라도 내막을 보면 제대로 기도하는 바른 종의 기도는 그 기도의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그 순간입니다.

그런 기도를 오래 전에 미리 해 두었던 분들도 있을 것이고, 이 홈의 운영자는 이 번 화폐개혁 조처를 보며 크게 느끼게 되어 이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구약과 달리 신약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다른 시기에 다르게 출발한 기도들을 전체로 묶어서 하나로 보고 그 기도를 기준으로 이북교회의 자유를 허락하시고 이후 해방의 절차를 밟으십니다. 미리 기도한 사람은 그만큼 더 복이 많을 것이고 이북교회에 대한 사랑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 홈처럼 이제 기도한 곳은 덜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이북교회의 신앙자유와 자기의 의무를 두고 누가 얼마나 제대로 된 기도를 뜨겁게 진정으로 했느냐는 것은 외부로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북한이 고향이어서 고향교회를 위해 기도한 분들도 있을 것이고, 이 노선처럼 북한의 연고가 없는데도 순수하게 한 몸 된 교회의 형제이고 그 형제를 위해 기도를 원하시는 그 뜻을 그대로 깨닫고 기도하는 것이면 이 노선의 적은 기도 그리고 늦어 진 기도라도 각자에게 맡긴 분량에 있어서는 더 기뻐하시는 기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교회 담임이 자기가 이씨라고 해서 세계의 이씨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한다면 그 기도가 그 목사님의 개인 기도라면 개인 책임으로 해야 할 기도지만, 그 목사님이 그 교회의 담임으로서 전체 교인들에게 부탁하고 또 교회의 운영 방향을 세계의 이씨들의 복음화를 위해 쏟는다면 비록 교회가 복음화를 위해 하는 일이니 해야 할 일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왜 하필 그 교회가 세계에 흩어 진 이씨들을 위해 기도하느냐는 문제로 차분히 따져 본다면 교회를 목회자 자기 개인용으로 사용한 잘못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교회가 교회 차원에서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자연스럽고 또한 마땅한 의무겠지만, 어떤 교회의 이북선교는 어떤 면을 봐도 그냥 한 건 해보겠다는 사업주의 명예주의 개인 영달주의의 발로로 보이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주력해야 할 일과
비록 주력할 일은 아니지만 잊어서 안 되는 일을 잊는 문제를 두고 살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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