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좋은 스승을 가진 오늘 이 곳 이용자들을 향해
구남단2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12.06.25
1. 스승
부족하여 배워야 한다면, 배움의 성격 상 조금이라도 나은 선생에게 배우는 것이 많은 면에서 유리하며 세월이 갈수록 그 중요성은 더해 집니다. 선생의 실력이란 속에 들어 있는 선생의 실제 실력과 그 선생이 남에게 자기를 따라 오도록 가르치는 실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수학의 본질을 더 잘 알거나 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력과 남에게 수학을 이해 시키는 실력은 다를 수 있습니다. 기술처럼 이공계 분야는 2 가지가 함께 갈 수 있으나 인문 사회 분야는 두 가지 실력이 현저하게 차이 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어떠할까? 2 가지 실력의 차이가 더 크게 날 수 있을 듯한데 실은 2 가지는 뗄 수 없도록 붙어 있습니다. 정말 잘 가르친다면 내부 실력이 있다는 뜻이고, 정말 속 신앙이 있다면 다른 사람이 따르도록 설명을 잘 하는 분입니다. 왜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성령이 한 분입니다. 그 성령이 그 선생의 신앙을 만들고 그가 가르칠 때 성령이 함께 해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배움
역사에 남을 정도의 선생을 만나 직접 배울 수 있다는 기회는 정말 엄청 난 가치를 가집니다. 이 노선은 백영희라는 이름으로 그런 선생을 가졌고 그는 수 많은 사람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이 노선에서 1989년 이전에 신앙 생활을 한 분들은 그 분과의 관계를 추억하며 그 분 사후에도 자기 신앙에 큰 도움을 받고 있으며 그런 이야기는 참으로 많아서 다 옮길 수도 없습니다. 최근에 몇 분이 백 목사님과 맞서거나 반발했던 과거를 추억하며 회개하는 글을 적었는데 그 분들은 비교적 백 목사님 접촉이 적거나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화들이 많았습니다. 하물며 주변 측근이라는 말을 들었던 이들이 글을 적으면 그 분량은 막대할 정도입니다.
여기서 소개하고 싶은 것은, 다른 역사적 인물들과 달리 백 목사님은 유일하게도 또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모든 것을 설교록에 다 담았고 그 설교록만 자세히 분석하면 그 분과 직접 접촉하며 배운 그 어떤 이들과 비교해도 뒤 떨어 지지 않고 오히려 평생을 함께 지낸 분들을 가르칠 정도로 모든 것을 알고 또 오늘에 활용하며 그 분의 가르침을 발전까지 시킬 수 있습니다.
정사와 야사, 발표와 내막, 활동과 내면은 참으로 차이도 많고 우스운 일도 있고 말도 안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역사적 인물일수록 외부에 알려 진 것과 그 인물을 생활 속에 상대한 사람이 아는 것은 너무도 다른데 백 목사님의 경우는 당시 그를 전혀 몰랐다가 사후에 그의 설교록으로 연구한 이들이 만일 그를 제대로 연구했다면 그의 생전 그 누구보다 그 분에게 가장 가깝게 정통으로 배운 제자가 될 수 있으니, 왜 그러할까?
그 분은 성경 그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생애는 그 분의 설교에 정말 모든 것이 다 담겨 있고 그 분은 그렇게 담기도록 살았으며 또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담긴 것이 설교 자료로 제한 없이 제공 되고 있습니다.
3. 최근에
이런 면을 더 뜨겁게 실감적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그 분의 생애가 더 크게 다가 옵니다. 말만 했던 설교가, 실천도 했으나 그 정도가 미약하여 그 설교에 그렇게 많이 담기지 않았던 목회자, 말씀도 실행도 대단했으나 그 가르침이 그의 설교에 썩 그렇게 많이 담기지 않은 성자들, 말씀도 실행도 설교까지도 대단했으나 기록으로 남겨 지지 않아 오늘 우리가 바로 그들을 참고하는 데는 너무 거리가 먼 이들, 이런 경우만 알고 있습니다.
말씀도 실행도 설교도 그리고 남겨 진 자세한 기록까지 다 존재하고 있어 오늘 우리가 그 분 생전에 그를 직접 접촉했던 분들이 회고 한 마디를 가지고 특별한 신앙이나 된 것처럼 또는 자신에게만 전수 된 비법이 있는 것처럼 흘리는데, 이 노선의 그 분이 아니라면 역사적 인물을 상대한 이들은 그렇게 해도 되고 그렇게 해도 될 만한 이유가 있지만 이 노선에서는 실제가 아닌 회고나 왜곡 된 회고나 동기나 이유가 잘못 된 오염 된 회고를 다 걷어 내고 그 위에 초월하고 넘어 설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노선 교인들이 훌륭하고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 노선 교인들의 부족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더 큰 은혜를 주셔서 덜 부족하도록 만드는 역사라고 생각 됩니다. 그 분을 누구 못지 않게 가깝게 그 분의 사생활과 개인 기록과 가정 내막까지 그리고 정사보다 비사와 야사와 비공식과 생활까지를 너무 많이 접하고 알고 심부름하고 그 때를 자료화 하여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이 홈은 이 글을 적습니다. 그런 접촉과 자료와 기억이 있어도 좋고,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조금도 처지거나 불리하거나 소외 되거나 위축 될 것이 없는 세계가 이 노선입니다.
이 면을 강조할 때마다 늘 써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 생전을 살았으나 그는 예수님을 모르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12 제자는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통해 기록 된 예수님의 분량이 가장 많습니다.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12 사도 중에 수 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육체로 보지 못한 제자였습니다. 육체로 예수님을 보고 모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손바닥에 체온까지 설명할 수 있으나 그의 경험담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팔아 먹을 때 필요한 정보가 되었습니다.
경험적으로 백 목사님과의 관계를 회고하고 사용하는 분들의 대부분은 적절한 반 거짓말로 자신을 화장하는 재료로 사용하거나 자신의 죄를 덮는 데 사용합니다. 박윤철 목사님처럼 자신의 부족을 더 크게 선전하기 위해 사용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책임은 자기에게 있습니다. 속는 책임도.
부족하여 배워야 한다면, 배움의 성격 상 조금이라도 나은 선생에게 배우는 것이 많은 면에서 유리하며 세월이 갈수록 그 중요성은 더해 집니다. 선생의 실력이란 속에 들어 있는 선생의 실제 실력과 그 선생이 남에게 자기를 따라 오도록 가르치는 실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수학의 본질을 더 잘 알거나 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력과 남에게 수학을 이해 시키는 실력은 다를 수 있습니다. 기술처럼 이공계 분야는 2 가지가 함께 갈 수 있으나 인문 사회 분야는 두 가지 실력이 현저하게 차이 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어떠할까? 2 가지 실력의 차이가 더 크게 날 수 있을 듯한데 실은 2 가지는 뗄 수 없도록 붙어 있습니다. 정말 잘 가르친다면 내부 실력이 있다는 뜻이고, 정말 속 신앙이 있다면 다른 사람이 따르도록 설명을 잘 하는 분입니다. 왜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성령이 한 분입니다. 그 성령이 그 선생의 신앙을 만들고 그가 가르칠 때 성령이 함께 해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배움
역사에 남을 정도의 선생을 만나 직접 배울 수 있다는 기회는 정말 엄청 난 가치를 가집니다. 이 노선은 백영희라는 이름으로 그런 선생을 가졌고 그는 수 많은 사람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이 노선에서 1989년 이전에 신앙 생활을 한 분들은 그 분과의 관계를 추억하며 그 분 사후에도 자기 신앙에 큰 도움을 받고 있으며 그런 이야기는 참으로 많아서 다 옮길 수도 없습니다. 최근에 몇 분이 백 목사님과 맞서거나 반발했던 과거를 추억하며 회개하는 글을 적었는데 그 분들은 비교적 백 목사님 접촉이 적거나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화들이 많았습니다. 하물며 주변 측근이라는 말을 들었던 이들이 글을 적으면 그 분량은 막대할 정도입니다.
여기서 소개하고 싶은 것은, 다른 역사적 인물들과 달리 백 목사님은 유일하게도 또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모든 것을 설교록에 다 담았고 그 설교록만 자세히 분석하면 그 분과 직접 접촉하며 배운 그 어떤 이들과 비교해도 뒤 떨어 지지 않고 오히려 평생을 함께 지낸 분들을 가르칠 정도로 모든 것을 알고 또 오늘에 활용하며 그 분의 가르침을 발전까지 시킬 수 있습니다.
정사와 야사, 발표와 내막, 활동과 내면은 참으로 차이도 많고 우스운 일도 있고 말도 안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역사적 인물일수록 외부에 알려 진 것과 그 인물을 생활 속에 상대한 사람이 아는 것은 너무도 다른데 백 목사님의 경우는 당시 그를 전혀 몰랐다가 사후에 그의 설교록으로 연구한 이들이 만일 그를 제대로 연구했다면 그의 생전 그 누구보다 그 분에게 가장 가깝게 정통으로 배운 제자가 될 수 있으니, 왜 그러할까?
그 분은 성경 그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생애는 그 분의 설교에 정말 모든 것이 다 담겨 있고 그 분은 그렇게 담기도록 살았으며 또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담긴 것이 설교 자료로 제한 없이 제공 되고 있습니다.
3. 최근에
이런 면을 더 뜨겁게 실감적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그 분의 생애가 더 크게 다가 옵니다. 말만 했던 설교가, 실천도 했으나 그 정도가 미약하여 그 설교에 그렇게 많이 담기지 않았던 목회자, 말씀도 실행도 대단했으나 그 가르침이 그의 설교에 썩 그렇게 많이 담기지 않은 성자들, 말씀도 실행도 설교까지도 대단했으나 기록으로 남겨 지지 않아 오늘 우리가 바로 그들을 참고하는 데는 너무 거리가 먼 이들, 이런 경우만 알고 있습니다.
말씀도 실행도 설교도 그리고 남겨 진 자세한 기록까지 다 존재하고 있어 오늘 우리가 그 분 생전에 그를 직접 접촉했던 분들이 회고 한 마디를 가지고 특별한 신앙이나 된 것처럼 또는 자신에게만 전수 된 비법이 있는 것처럼 흘리는데, 이 노선의 그 분이 아니라면 역사적 인물을 상대한 이들은 그렇게 해도 되고 그렇게 해도 될 만한 이유가 있지만 이 노선에서는 실제가 아닌 회고나 왜곡 된 회고나 동기나 이유가 잘못 된 오염 된 회고를 다 걷어 내고 그 위에 초월하고 넘어 설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노선 교인들이 훌륭하고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 노선 교인들의 부족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더 큰 은혜를 주셔서 덜 부족하도록 만드는 역사라고 생각 됩니다. 그 분을 누구 못지 않게 가깝게 그 분의 사생활과 개인 기록과 가정 내막까지 그리고 정사보다 비사와 야사와 비공식과 생활까지를 너무 많이 접하고 알고 심부름하고 그 때를 자료화 하여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이 홈은 이 글을 적습니다. 그런 접촉과 자료와 기억이 있어도 좋고,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조금도 처지거나 불리하거나 소외 되거나 위축 될 것이 없는 세계가 이 노선입니다.
이 면을 강조할 때마다 늘 써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 생전을 살았으나 그는 예수님을 모르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12 제자는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통해 기록 된 예수님의 분량이 가장 많습니다.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12 사도 중에 수 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육체로 보지 못한 제자였습니다. 육체로 예수님을 보고 모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손바닥에 체온까지 설명할 수 있으나 그의 경험담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팔아 먹을 때 필요한 정보가 되었습니다.
경험적으로 백 목사님과의 관계를 회고하고 사용하는 분들의 대부분은 적절한 반 거짓말로 자신을 화장하는 재료로 사용하거나 자신의 죄를 덮는 데 사용합니다. 박윤철 목사님처럼 자신의 부족을 더 크게 선전하기 위해 사용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책임은 자기에게 있습니다. 속는 책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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