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15세기 인쇄기와 20세기 인터넷 - 교회사에 끼친 영향

구남단2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12.07.05
오후에 어느 분과 대화하던 내용을 두고 그 분 외에 이 곳을 찾는 분들께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 15세기의 인쇄기
1450년경, 독일의 쿠텐베르그가 인쇄기를 발명합니다. 유럽은 알파벳 문화권이어서 삽시간에 유럽 대륙에 각국어로 된 인쇄기가 가득차게 됩니다. 대량으로 인쇄가 가능하게 되자 천주교는 면죄부 발행에 활용하여 돈 벌기가 좋았고 인쇄기를 하나님의 은혜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에 이어 1936년 칼빈이 천주교를 비판한 기독교강요는 이 인쇄기를 날개로 삼아 일시에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갔고 1천 년의 천주교 세상을 뒤집어 엎고 교회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오게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합니다. 루터가 천주교의 허리춤을 붙들었고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천주교를 뒤집어 버렸습니다. 루터가 파 놓은 바위 구멍에 칼빈이 다이너마이트를 넣었고 인쇄기가 불을 붙였습니다. 천주교의 중세 서양세계 장악은 몇 사람이 죽는다고 깨질 그런 정도가 아닌 철옹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쇄기는 루터의 시작과 칼빈의 논리를 유럽 전역에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고 명확하게 전달했고 유럽 전체를 통해 신앙인들은 힘을 얻었고 지성들은 천주교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으며 이 모든 일이 유럽 전역을 통해 동시에 불이 붙었기 때문에 천주교 천년왕국을 깨뜨린 것입니다. 세상은 인쇄기의 덕을 봤다 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쇄기를 예비하고 때를 주셨다고 기억합니다.

- 21세기의 인터넷
1980년 후반, 인터넷이 실제 생활 속에 걸음마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1985년경 미주리에 있는 100 명 정도의 백인 중심 신학교 기숙사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던 학생은 한 명도 없었으나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밟는 학생이 여름 학기에 잠깐 이 대학원에 들러 공부를 하면서 자기 집에 두고 온 컴퓨터를 전화선으로 연결하여 자료를 활용하는 것을 봤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원거리의 데이터 송수신이 가능했으나 실제로는 아주 초보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 서면서 이제는 전 세계인의 책상과 손바닥에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이 우리가 원하는 순간 바로 눈 앞에 쫙 펼쳐 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왕래가 빨라 지고 지식이 더해 지리라 하신 다니엘 예언이 이 시대 우리에게만큼 실감 있게 실용적으로 적용 된 시기는 역사에 없습니다. 이집트 등 여러 나라가 인터넷을 통해 알려 지는 지식 때문에 국가 체계가 근본적으로 바뀐 사례까지 나타 나고 있습니다. 중국과 북한의 체제 유지는 이 정보 유통을 차단하는 여부에 달려 있는 정도입니다.

- 인터넷의 창 끝이 향하는 곳
1천 년 천주교의 전통과 교권이 서양 세계 전부를 장악했지만 인쇄기의 동시 전파에 무너 진 면이 있다면 오늘 인터넷이 향하는 방향은 어디일까요? 세상은 정치 문화 교육 상업 의료 등에 관심을 쏟고 있으나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인쇄기를 통해 동시 다발적으로 출간 된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유럽 전체의 지성인들에게 천주교에 대한 의심과 반발과 기독교의 새출발에 대한 교육을 실시했다면, 오늘의 인터넷은 세상 그 어떤 분야를 뒤집든 건들이든 그 것은 두고 갈 땅의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너무 하찮은 것이니 우리의 신앙 세계를 향해 이 인터넷의 창 끝이 향하는 부분은 강단입니다.

과거에는 성경의 분량이 많고 어려워서 일반 교인들은 성경을 가져 봤자 읽는 데서 끝이 났습니다. 일반 교인들이 가진 성경은 목회자나 신학자나 교파나 신학의 흐름을 맞상대할 정도에는 턱도 없이 미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강단에서 목회자가 설교하는 순간 그 밑에서 듣고 있는 교인들이 설교 내용 중에 의심이 되는 부분이 있으면 손에 있는 휴대폰으로 모든 종류의 신학 자료를 전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설교 내용을 반박하는 자료까지 설교를 듣고 있는 교인의 손에 실시간으로 쥐어 지는 시대입니다.

다른 학문이나 전문 분야는 일반인이 인터넷을 활용하여 전문가를 공박하려 해도 제대로 된 전문가라면 그 인터넷 기술을 가지고 자기 분야에 필요한 내용을 더 빠르게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새로 연구하고 새로운 자료들을 습득하여 일반인의 반론을 누르고 오히려 그들을 가르치며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나 신학자는 성경이라는 울타리가 있어 이 울타리 안에서 뛰고 날라야 하기 때문에 인터넷이라는 도구는 성경과 신학 상식이 모자라는 일반인에게는 날개를 달아 주어 성경과 신학에 나타 난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알게 해 줍니다. 그렇다면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이미 나타 난 것 외에 새로운 것을 성경 안에서 찾아 내야 하는데 성경 안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 낸다는 것은 몇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어려운 세계입니다. 다른 학문이나 기술처럼 자고 일어 나면 신기술과 신기법이 제시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있는 것은 과거에 의인들이 밝은 영안으로 가르친 것인데 그들보다 더 영안이 밝아야 새로운 것을 밝혀 가르칠 터인데 이 영안은 인터넷 활용도와는 반비례를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 인터넷을 초월하는 세계
모든 다른 학문과 기술에게는 인터넷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며 그 끝을 예측할 수도 없도록 만들고 있으나 성경과 신앙 세계만은 인터넷을 포함하여 세상 그 어떤 발전과 개발이 있다 해도 그런 세상적인 것들이 오히려 영안을 위축 시키고 흐리게 만들어 성경 안에 있거나 과거에 가르쳐 놓은 것조차 잘 보이지 않도록 만듭니다. 성경은 이미 66 권으로 그 기록이 끝이 났고 그 안에 있는 내용은 인터넷을 포함한 어떤 인간의 기술과 노력이 동원 되어도 단순 활용 외에는 발전을 향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성령이 함께 해야 열리는 세계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새로운 발견과 신앙의 발전은 거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반면에 평신도들은 인터넷으로 과거 존재한 모든 신앙 자료를 전부 손에 쥐고 있습니다. 목회자와 신학자는 인터넷 때문에 설 자리가 없고 교회의 강단은 휴대폰이나 휴대용 컴퓨터 때문에 맹물만 촐랑 거리는 곳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교회를 출석해야 할까? 근본적으로 이런 문제가 제기 되는 시기입니다. 과거 미국이나 유럽의 교회가 사회 발달 때문에 급격하게 쇠락하였듯이 오늘의 한국교회와 세계 모든 교회는 인터넷 앞에서 더 이상 도망 갈 곳도 없이 내 몰리고 있습니다.

성경을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았다 해도 휴대폰으로 신학과 성구 전부를 검색해서 화면에 띄워 놓고 목회자나 신학자를 상대로 평가하고 토론하고 논쟁을 할 수 있는 반면에, 신학자와 목회자는 비록 성경을 다 외웠고 역사의 신학설을 다 꿰뚫고 있다 해도 인터넷 기계를 가진 사람 앞에서는 그 사람이나 이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디에서 길을 찾아야 할까요? 애당초 신앙의 세계는 성령의 감화 감동을 따라 순종하는 길에서 만들어 졌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인터넷을 사용하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에게서는 멀리 계시고 그런 기술이나 기계를 멀리 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십니다. 기계로부터, 기술로부터, 인간의 것으로부터, 인간의 도움으로부터 좀 멀어 지고 주님 아니면 안 되는 절박감 속에 자기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인도해 주시라는 이 절대성의 소망과 순종에만 성령은 역사하시며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꼭 같은 그 성경 안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말씀을 받게 되는 일은 주일학생이나 첫 신앙의 교인이나 목회자나 신학자나 동일하게 받을 수 있는 은혜입니다.


- 다시 살펴 봅니다.
세상의 모든 분야는 인터넷 때문에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며 그 발전의 끝을 예측도 못하고 그 발전의 효력을 다 누릴 시간도 없을 만큼 빠르게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인터넷의 발전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을 전문 분야일수록 전문가의 권위와 영향력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일반인이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알 수 있는 내용을 그 방면에 전문가가 함께 알고 일반인의 질문과 반발에 대처하며 한 걸음 더 나가는 조처까지 취할 수 있고, 또 긍정적으로는 인터넷의 실시간 검색에 올라 가지 못할 내용을 그 전문가들이 인터넷을 통해 파악한 자료를 가지고 또 한 걸음 더 나아 가는 발전에 나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신학이며 신앙의 세계입니다. 다른 전문 영역은 활동의 범위가 정해 져 있지 않으나 신학과 신앙의 세계는 2천 년 전에 기록이 끝나 버린 성경 안에서만 알고 가르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 하는데, 이 것은 하나님과 둘이 앉아 신령한 세계로 들어 가야만 가능하지 다른 전문 분야의 다른 발전이나 개발처럼 인터넷에 앉아서 해결할 일은 아닙니다. 인터넷과 가까워 질수록 첫 신앙이 신학의 상식과 전문 지식을 알아 가는 데는 가속도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나 이미 2천 년 교회사를 통해 다 드러 나고 알려 진 내용에서 더 발전하고 더 깨달은 것을 내 놓으려면 이 것은 인터넷에서 멀수록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는 기도와 말씀 묵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과 가깝게 동행을 해야 비로서 새로운 깨달음을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재 21세기 교회는 시대적 선지자도 더 이상 나타 나지 않고 시대를 주도하던 교회들도 무너 져 내린다는 소식만 들리지 제대로 된 교회가 새로 일어 난다는 소식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들으려고 노력할 것도 없이 그런 종들이나 교회가 일어 날 토대나 토양 자체가 존재를 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시기입니다. 교단이 교회가 신학교가 신학의 제일 꼭대기 지도자들이 모조리 주일날에 세상 행사를 해 대면서 주일 계명을 다 뭉개 버리는 상황에 어디에선들 성경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 가서 배우고 깨닫는 그런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인터넷이 세상에게는 세상의 모든 방면을 발전 시키는 획기전 전기를 제공했으나 교회에게는 더 이상의 발전할 가능성을 막아 놓았고 동시에 어린 교인들에게는 이 시대 최고의 신학자와 마주 앉아 어떤 주제를 가지고도 토론하며 반발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으니 교회의 제일 앞에 서서 교회를 이끌 교회의 강단은 인터넷 앞에서 퇴로가 막힌 채로 인터넷의 창 끝에 전부 전멸을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교회의 설교가 우스워서 좋다는 것은 TV 프로그램을 따라 갈 수 없고, 교회의 설교가 생활 속에 다양한 교양과 지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각종 인터넷 정보 제공을 따라 갈 수 없습니다. 함께 모여 찬송하고 율동함으로 느끼는 것은 이제 유아원에서부터 각종 학교와 사회 단체가 수 없는 형태로 다양한 체험과 다양한 모임을 제공하여 교회에 가서 꼭 앉아야 할 이유를 근본적으로 없애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이 시대를 맞서 강단을 지키는 교회들과 지도자들이 소수 있지만 그들을 노리는 인터넷의 검색 창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헛점이 발견 되면 바로 초토화를 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그런 사례를 모아서 아직 그런 헛점을 보이지 않고 있는 지도자들과 교회들이 있다 해도 기독교와 목회자들을 통째로 묶어서 죄인을 만들고 사회로부터 격리를 시켜 버리는 운동이 천하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미 중생 되고 또 세상의 어떤 이론과 여론에도 불구하고 자기 체험의 기본 신앙을 가지고 버티는 이들이 전국과 세계 곳곳에 있기 때문에 현재 근소하게라도 핵심 교회와 교인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지키는 듯이 보입니다만, 이미 큰 배가 서서히 가라 앉는 것처럼 또 하나의 거대 국가가 내려 앉을 때는 한 가정의 몰락과는 그 목격할 수 있는 바가 다른 것처럼 세계 교회와 특히 한국교회의 몰락은 이미 아는 사람들로서는 세상과 싸움에서 끝장이 났고 그 싸움의 최종 확인 사실의 무기는 인터넷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 이 시대를 초월합시다.

공회는 처음부터 내부 내용을 무제한 펼쳐 놓고 외부에 공개하며 믿고 나왔습니다. 가룬다고 가려 지지도 않고 가룬다고 심판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니 처음부터 펼쳐 놓고 사람의 비판과 심판을 먼저 초청하여 하나님 앞에 설 날을 미리 대비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은 커녕 세상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않는 것을 원하며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과 등을 지도 살 듯 살면서 오직 성경 안에서 늘 새롭게 가르치는 성령의 역사에만 집중해 왔습니다. 세상과 가까이 하면서 폭발적으로 지식을 넓혀 가는 타 교단의 목회자나 교인과 비교할 때 공회는 대책 없이 무지막지한 단체로 전락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인터넷의 덕을 보면서 그 동안 배우지 못한 세상 지식을 간단히 상식할 수 있게 되었고 한 편으로 원래부터 주력한 대로 말씀 안에서 배우는 성령의 인도에서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 수백 년에 한 번 나타 날 수 있을까 말까 한 깨달음을 많이 접하고 있어 이 것에만 매진해도 시간이 없을 정도입니다.

시대를 초월하려 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삼키지 않으려 긴장했고 늘 부족했으므로 성령의 도우심만 바라 보고 살아 왔는데 이 길을 오래 걷다 보니 공회는 성경 중심이라는 표현을 말로만 하지 않고 실제 그 깊은 내용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과는 많이 떨어 지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공회는 원래 인터넷과 같은 세상 기술의 덕을 본 적도 없었으니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들어 와서 비판하고 반론을 펴려는 분들이 계신다면 마치 연기를 칼로 도륙하려는 노력과 같습니다. 타 교회나 타 신앙 노선과는 존재 형식과 향방과 주력이 달랐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오직 주님과 말씀만 따라 걸어 온 과거, 그 과거가 고대사회뿐 아니라 숨가쁘게 변하고 발전하던 근대와 현대와 오늘까지도 우리는 주님과 말씀으로만 변치 않고 나왔기 때문에 인터넷의 창끝을 피할 수 있는 신학이 없고 그런 교회와 목회자가 없는 이 시대에 이 노선은 그런 기술 앞에 자유로움을 가집니다. 내부의 부족 때문에 부족하지 인터넷의 검색과 공개와 비판 앞에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교회뿐 아니라 개인의 생활과 신앙도 그렇게 될 때, 아마 이 시대를 초월하는 신앙이 될 것입니다. 이 시대를 초월한다면 그는 말세를 이기는 말세 성도일 것입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