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죽은 음식을 먹지 말자는 구호에
구남단2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12.10.17
말 뜻은 알겠는데 표현을 섬뜩하게 적는 것은 남의 관심을 끌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디를 지나 가다가 음식을 죽이지 말라, 죽은 음식을 먹지 말라 이런 표현을 봤습니다. 태우지 말고, 굽지 말고, 볶지 말고, 삶지 말고, 데치지도 말고 생 것으로 먹으라 그런 뜻으로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먹는 방법로만 가지고 말하면 원시 미개 시절로 돌아 가자는 말이고, 인류의 발전 발명사를 거스리는 운동입니다. 세상은 발전에 사활을 걸었고 이제는 자연 회귀에 또한 사활을 걸고 있으며 우리는 이 모습을 보며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씀 하나로 관전할 뿐입니다.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먹여도 먹일 것이고, 불러 가시는 것이 필요하면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도 소화기 질병에 걸리면 구경만 하지 맛 보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음식 하나로 말한다면 불신 세상의 6천 년 역사는 결국 성경 처음으로 돌아 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없고 그냥 먹는 방법론만 말하기 때문에 그들의 걸음은 성경으로 다가 선다 해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며 성경을 해석하고 배우는 데 참고를 하게 됩니다.
에덴동산의 음식 세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부터는 교리가 아니고 또 강단 설교가 아니므로 하나의 출발 방향만을 적어 두고 있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도 우리에게 먹는 것을 주셨습니다. 육식은 아니고 채식이었습니다. 먹을 수가 있다면 소화가 있고, 소화가 있다면 배출도 당연합니다. 이 과정에서 분해와 흡수와 힘의 생성과 소비 그리고 부산물이 생깁니다. 만일 불신자가 성경을 비판하려면 이런 기초 상식을 가지고 에덴동산에도 대소변이 있었을 것이니 냄새가 났을 것이고 화장실이 필요했다면 그 곳에도 오늘에 이르는 인류사의 모순과 불편의 초기 모습은 있었을 것이니 에덴은 천국의 모형이 아니라 하나의 모순적 허구적 상상 세계라고 할 것 같습니다. 아직 그런 논리를 들어 보지는 못했으나 할 일 없는 불신자나 반신자의 평생 하는 일은 이런 불쌍한 일에 몰두합니다.
우리는 창세기 3장의 타락 후 뱀에게 주어 진 환경과 아담과 하와에게 얹어 놓은 상황을 통해 에덴동산 이전을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천년왕국을 설명한 이사야서를 통해 더 구체적으로 그려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보여 주는 곳까지는 가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성경 무시거나 무지일 것입니다.
타락 전에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착취 몰수 수탈 강제 부패 낭비 변질은 없었을 것입니다. 먹었다면 그 모든 것이 위치와 형태를 바꾸었을 뿐이지 그 본질과 본성과 역할과 행위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적이며 찬송적이며 감동적이며 진리적이었을 것입니다. 아담에게서 하와가 생겨 지는 과정은 범죄 전이고 하와가 가인을 낳고 그 후손들이 아이를 만드는 과정은 극단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는 죽어 나가는 비명이며 하나는 하나님 품 안에서 잠깐 잠든 사이에 만들어 졌으니 꿈결같은 순간입니다. 하나는 모체를 착취하고 빨아 먹고 반 죽여 놓고 나오고 먹고 살아 가는데 하나는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라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고 둘은 서로에게 고맙기만 하고 좋기만 하고 감사하고 찬송만 할 관계입니다. 타락 후의 출산은 좋아 보이나 그 속에 세상 만사 고통을 다 품고 나오고, 타락 전의 출생은 아담 혼자만 있던 세상을 더욱 좋게 온전하게 만드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의 음식도 그 섭취와 사용과 그로 인한 결과를 연구한다면 범죄 후 출산에 따르는 모든 고통과 부작용과 잘못과 불행이 없는 범죄 이전의 하와 생산을 가지고 그렇게 연구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죄가 없고 불순종이 없고 오직 하나님 한 분과 그 진리의 말씀에 완전 피동의 결과만 있는 곳이니 범죄 이전의 먹음에는 반작용의 거부나 저항이나 불편한 부산물이 없었을 것입니다. 물리로 말하면 저항이 전혀 없는 상태의 운동이 되고, 화학으로 말하면 비용과 소모가 전혀 없는 반응이고, 생물학으로 말하면 냄새가 나거나 배출로 인한 처리 불편이나 노화나 그 어떤 부작용도 없는 완전 화합 과정일 것입니다. 범죄 이후에는 가능할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태워 먹는 것보다는 구워 먹는 것이, 그보다는 삶아 먹고 데쳐 먹는 것이, 그보다는 만일 가능하다면 채소 그대로 먹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그럴 듯합니다. 자연의 상식이며 관찰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시각으로 볼 때 에덴동산의 범죄 이전을 살피면 육식이 없고 또 당시의 기록은 거의 없으나 하나가 좋기 위해 다른 하나는 그만큼 싫고 희생을 해야 하는 부작용과 모순이 없습니다.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결과도 좋고, 모든 것이 다 좋을 수 있는 것은 에덴동산의 타락 전에 잠깐 우리에게 주신 일이 있고 영원 완전은 우리가 죽은 후의 신령한 세계라야 이루어 집니다.
딸이 좋은 곳에 시집 갔다는 표현은 대개 남편과 시댁 전부를 희생해야 가능한 세계를 말합니다. 딸과 남편이 반반씩 희생하고 좋게 된다면 본전 장사가 되어 시쿵둥해 집니다. 만일 눈꼽만큼이라도 우리 편이 손해를 본다 싶으면 결혼으로 불행하게 되었다고 펄쩍 뛰게 됩니다. 그런데 범죄 이후 세상은 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새로 부어 주시는 것은 없고 이미 주어 진 것만 가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에너지나 질량의 총량은 변치 않는다는 원리처럼 함께 좋거나 다 같이 웃는 경우는 없습니다. 음식으로 말하면 먹기는 먹어야 하는데 먹은 만큼 노화가 되고 또 먹고 나면 당장에 후속 처리가 엄청 나게 복잡하고 어려우며, 그런 고민 이전에 안정적으로 충분하게 먹는 것 자체가 인생의 전부라 할 만큼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범죄 이후 일어 난 일입니다.
죄가 없었다면 섭취를 위해 투쟁이나 땀이나 고생이나 작전을 짜야 할 일이 없었습니다. 먹는 순간도 나와 상대가 함께 행복하고, 먹은 이후 서로의 순종으로 가지는 모습이 있고, 그 이후는 또 다시 다음 단계를 위해 서로가 해야 할 또 다음 숙제가 있고 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과 진리만 있고 위에서 주시는 은혜만 있고 모두에게 기쁨과 감사와 감격만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좋겠으나 신앙의 세계를 장난으로 만들고 그 곳으로 은혜가 다 새어 나갈까 해서 이런 설명을 할 때는 표현을 추상적으로 하게 됩니다.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먹여도 먹일 것이고, 불러 가시는 것이 필요하면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도 소화기 질병에 걸리면 구경만 하지 맛 보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음식 하나로 말한다면 불신 세상의 6천 년 역사는 결국 성경 처음으로 돌아 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없고 그냥 먹는 방법론만 말하기 때문에 그들의 걸음은 성경으로 다가 선다 해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며 성경을 해석하고 배우는 데 참고를 하게 됩니다.
에덴동산의 음식 세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부터는 교리가 아니고 또 강단 설교가 아니므로 하나의 출발 방향만을 적어 두고 있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도 우리에게 먹는 것을 주셨습니다. 육식은 아니고 채식이었습니다. 먹을 수가 있다면 소화가 있고, 소화가 있다면 배출도 당연합니다. 이 과정에서 분해와 흡수와 힘의 생성과 소비 그리고 부산물이 생깁니다. 만일 불신자가 성경을 비판하려면 이런 기초 상식을 가지고 에덴동산에도 대소변이 있었을 것이니 냄새가 났을 것이고 화장실이 필요했다면 그 곳에도 오늘에 이르는 인류사의 모순과 불편의 초기 모습은 있었을 것이니 에덴은 천국의 모형이 아니라 하나의 모순적 허구적 상상 세계라고 할 것 같습니다. 아직 그런 논리를 들어 보지는 못했으나 할 일 없는 불신자나 반신자의 평생 하는 일은 이런 불쌍한 일에 몰두합니다.
우리는 창세기 3장의 타락 후 뱀에게 주어 진 환경과 아담과 하와에게 얹어 놓은 상황을 통해 에덴동산 이전을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천년왕국을 설명한 이사야서를 통해 더 구체적으로 그려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보여 주는 곳까지는 가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성경 무시거나 무지일 것입니다.
타락 전에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착취 몰수 수탈 강제 부패 낭비 변질은 없었을 것입니다. 먹었다면 그 모든 것이 위치와 형태를 바꾸었을 뿐이지 그 본질과 본성과 역할과 행위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적이며 찬송적이며 감동적이며 진리적이었을 것입니다. 아담에게서 하와가 생겨 지는 과정은 범죄 전이고 하와가 가인을 낳고 그 후손들이 아이를 만드는 과정은 극단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는 죽어 나가는 비명이며 하나는 하나님 품 안에서 잠깐 잠든 사이에 만들어 졌으니 꿈결같은 순간입니다. 하나는 모체를 착취하고 빨아 먹고 반 죽여 놓고 나오고 먹고 살아 가는데 하나는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라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고 둘은 서로에게 고맙기만 하고 좋기만 하고 감사하고 찬송만 할 관계입니다. 타락 후의 출산은 좋아 보이나 그 속에 세상 만사 고통을 다 품고 나오고, 타락 전의 출생은 아담 혼자만 있던 세상을 더욱 좋게 온전하게 만드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의 음식도 그 섭취와 사용과 그로 인한 결과를 연구한다면 범죄 후 출산에 따르는 모든 고통과 부작용과 잘못과 불행이 없는 범죄 이전의 하와 생산을 가지고 그렇게 연구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죄가 없고 불순종이 없고 오직 하나님 한 분과 그 진리의 말씀에 완전 피동의 결과만 있는 곳이니 범죄 이전의 먹음에는 반작용의 거부나 저항이나 불편한 부산물이 없었을 것입니다. 물리로 말하면 저항이 전혀 없는 상태의 운동이 되고, 화학으로 말하면 비용과 소모가 전혀 없는 반응이고, 생물학으로 말하면 냄새가 나거나 배출로 인한 처리 불편이나 노화나 그 어떤 부작용도 없는 완전 화합 과정일 것입니다. 범죄 이후에는 가능할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태워 먹는 것보다는 구워 먹는 것이, 그보다는 삶아 먹고 데쳐 먹는 것이, 그보다는 만일 가능하다면 채소 그대로 먹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그럴 듯합니다. 자연의 상식이며 관찰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시각으로 볼 때 에덴동산의 범죄 이전을 살피면 육식이 없고 또 당시의 기록은 거의 없으나 하나가 좋기 위해 다른 하나는 그만큼 싫고 희생을 해야 하는 부작용과 모순이 없습니다.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결과도 좋고, 모든 것이 다 좋을 수 있는 것은 에덴동산의 타락 전에 잠깐 우리에게 주신 일이 있고 영원 완전은 우리가 죽은 후의 신령한 세계라야 이루어 집니다.
딸이 좋은 곳에 시집 갔다는 표현은 대개 남편과 시댁 전부를 희생해야 가능한 세계를 말합니다. 딸과 남편이 반반씩 희생하고 좋게 된다면 본전 장사가 되어 시쿵둥해 집니다. 만일 눈꼽만큼이라도 우리 편이 손해를 본다 싶으면 결혼으로 불행하게 되었다고 펄쩍 뛰게 됩니다. 그런데 범죄 이후 세상은 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새로 부어 주시는 것은 없고 이미 주어 진 것만 가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에너지나 질량의 총량은 변치 않는다는 원리처럼 함께 좋거나 다 같이 웃는 경우는 없습니다. 음식으로 말하면 먹기는 먹어야 하는데 먹은 만큼 노화가 되고 또 먹고 나면 당장에 후속 처리가 엄청 나게 복잡하고 어려우며, 그런 고민 이전에 안정적으로 충분하게 먹는 것 자체가 인생의 전부라 할 만큼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범죄 이후 일어 난 일입니다.
죄가 없었다면 섭취를 위해 투쟁이나 땀이나 고생이나 작전을 짜야 할 일이 없었습니다. 먹는 순간도 나와 상대가 함께 행복하고, 먹은 이후 서로의 순종으로 가지는 모습이 있고, 그 이후는 또 다시 다음 단계를 위해 서로가 해야 할 또 다음 숙제가 있고 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과 진리만 있고 위에서 주시는 은혜만 있고 모두에게 기쁨과 감사와 감격만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좋겠으나 신앙의 세계를 장난으로 만들고 그 곳으로 은혜가 다 새어 나갈까 해서 이런 설명을 할 때는 표현을 추상적으로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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