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연구소의 최근 출간 작업

구남단2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13.02.22
지금 원고가 끝나고 출간을 기다리는 책들이 몇 권이 모여 졌습니다.

1. '백영희 성경언어론': 백 목사님의 성경 원어와 번역에 대한 입장을 연구해 봤습니다.
2. '호남순교사': 제목은 정해 지지 않았으나 신사참배 3 명 순교자 중 잊혀 지고 잃어 진
심봉한 순교자 전기입니다. 내용 중 공회에 의미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3. '한종희 전기': 공회를 무한 비판했으나 연구소가 그 분의 전기를 그대로 출간합니다.
한 목사님 장점도 배우고 공회 비판의 잘못도 저절로 드러 나게 됩니다.
우리가 몰랐던 이 노선의 위대한 점이 한국교회사에 기록 됩니다.
4. '백영희 전기': 현재 2 가지 형태로 진행 중입니다. 기본 방향과 내용은 끝 났습니다.
잘 마무리 되어 신앙 생애를 통해 설교록 연구에 도움 되기를 바랍니다.
5. 이 외에도 많은 책들이 지금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 노선의 가치는 알수록 접할수록 일파만파요 쓰나미적으로 신앙의 전체 세계를 덮는데, 이 노선의 가치를 아는 분들이 적지 않은 이 시점에 이 연구를 위해 주력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으니 참으로 기이합니다. 가끔 한두 분씩 관련 연구서나 논문을 적지만 공회와 세상 것을 반반 섞거나 아니면 정치적인 이유가 있어 출간하는 것이어서 수에 칠 가치가 없습니다.

이 홈을 운영하면서 이 노선의 제일 중심부가 총 궐기를 하여 막아 선 적이 있었습니다. 공회 전체 재산을 팔아서라도 해야 할 일이고, 10만의 전국 공회인들이 일제히 기립 박수를 하고 평양식 열병을 통해 환영식을 해도 모자랄 판에 이 홈 운영 때문에 단두대에 올라 간 것이 1997년 1999년을 비롯해서 이제 몇 번인지 횟수도 잊었습니다.



이 과정을 생각하다 문득 미국의 서부 개척사가 생각 났습니다.
과거 1980년대까지 이 노선의 주일학교 전도 역사도 그러했고 책으로 내면서 그런 표현을 적었습니다. 전국 어느 골목에라도 이 노선의 주일학교 선생님 누구라도 한 번 쓸고 나면 수십 명의 학생들 때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을 매 주일 오전 8시 30분에 예배당 마루에 앉힐 수가 있었습니다. 전국의 모든 교단 교회들이 아이들은 돈이 되지 않는다고 버려 두었는데, 최근 상황에서 당시를 이해할 분들이 계실까요? 그 때는 그러했습니다. 산 꼭대기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도로까지 내려 오는데 몇 개 교회 대문 앞을 거칩니다. 개척 교회, 작은 교회, 대형 교회, 부산의 최고 오래 된 교회 앞을 그렇게 지나 친 다음에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서부교회가 나왔습니다. 예배당 골목에 놀고 있는 아이들조차 내 버려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회 교회만 전국을 쓸어 담았습니다. 그 당시 공회가 길렀던 수십 만 명의 주일학생이 지금 전국의 각 교파 각 교회의 주력 교인이 되었습니다.

당시를 생각하면 미국 동부의 뉴욕 필라델피아 버지니아 등지에 이민 온 미국인들이 향후 미국 중부와 서부를 개척하게 됩니다. 끝 없는 미국 대륙을 가로 질러 가면서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줏어 담았습니다. 끝 없이 달리며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가끔 인디언들이나 여기저기 노닐고 있던 그 어마어마한 대륙을 그냥 손에 넣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의 걸어 온 오늘까지 길이 그러했고 그리고 현재 눈 앞에 끝 없이 펼쳐 진 미지의 저 드 넓은 대륙이 그러합니다. 제가 잠깐 있던 곳이 St. Louis입니다. 이 곳이 서부로 들어 가는 관문입니다. 한 때 미국의 4 대 도시였습니다. 미국의 서부영화에 나오는 활극의 주요 무대입니다. 끝 없는 서부로 들어 가는 마지막 도시에서 모든 물품을 마차에 채우고 그리고 드디어 출발합니다. 밟는 곳, 보는 곳, 닿는 곳이 전부 그들의 것입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 그렇게 감추어 진 곳이 과연 오늘 있을 수 있을까? 바다 밑과 우주 공간과 남극 빙하가 과거 미국의 서부개척 시대의 신대륙일 것으로 기대하고 과학이 돌진하고 있습니다. 유전공학 나노과학의 세계도 그럴 것입니다.


이 노선으로 말하면, 언덕 위에 서서 끝 없는 지평선을 보며 저렇게 엄청 난 대륙이 왜 비어 있는지, 왜 다른 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지... 정말 이상하며 탄식하며 안타까우며 한 편으로 그렇게까지 싫으면 혼자서 죽도록 질주하다는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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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미국 대륙의 개척을 적은 글입니다. 이 번 글에 필요한 부분만 발췌했습니다.


미국 서부 개척

서쪽으로 서쪽으로…





아즈텍과 잉카를 정복한 에스파냐는 북쪽으로 올라가서 미국 서부 지방을 식민지로 삼았고, 캐나다 동부로부터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내려온 프랑스는 미국 중부 지방을, 대서양에 접한 해안가에 발을 붙인 영국은 미국 동부 지방을 장악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1776. 7. 4)하기 전에는 주로 동부 해안에 사람들이 몰려 살았지만, 1750년에 워커(Walker)라는 영국인 의사에 의해 산을 넘을 수 있는 고갯길이 알려졌다. 그는 이 산길을 캠벌랜드 산길(Cumberland Gap)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 길을 크게 넓힌 사람은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태어난 '분'(Daniel Boone, 1734~1820)이란 모험가였다. 분은 전쟁(프렌치-인디언 전쟁)에 참가한 후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산속으로 들어가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는 산길을 스케치하며 사냥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는 인디언들에게 붙잡혀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지만 산 생활을 계속했다고 한다. 마침내 1775년 사냥꾼과 나무꾼 30여명을 모아 이름도 없는 산길(애팔래치아)을 처음 넘었다. 분은 이 산길을 들소들이 밟아 다져진 들판 길과 연결하고, 나무를 자르고 이정표를 세웠다. 480㎞의 이 황야의 길(Wilderness Road)은 나중에 오하이오 강변의 루이지애나까지 연결되었다.

당시 루이지애나 지역은 프랑스(나폴레옹)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1801년 동부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탐색전으로 35,000명의 군대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무더위와 토박이들의 게릴라 전술에 말려 24,000명이 목숨을 잃고 만다. 유럽 최강을 자랑하는 나폴레옹 군대가 아메리카에서 창피를 당한 것이다. 그 후 나폴레옹은 “아메리카”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고 한다. 아무튼 전쟁 비용도 충당할 겸 자국의 라살(La Sallc)이 1682년에 점령한 루이지애나를 1500만 달러라는 이상한 가격으로 1803년에 미합중국에 넘기고 말았다. 이 가격은 공짜나 마찬가지였다.

미국 대통령 제퍼슨은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미국 땅을 두 배로 넓힌 대통령이 되었다. 애팔래치아 동부의 좁은 땅에서 머물던 영국(미국)은 분의 공적으로 미시시피 강까지 가는 길을 개척하고 나폴레옹의 바보스런 거래로 루이지애나(지금의 루이지애나, 아칸소, 사우스다코타, 노스다코타, 아이오와, 네브래스카, 캔자스, 미네소타, 콜로라도, 와이오밍, 몬태나, 오클라호마, 미주리 등 13주) 전체를 손에 넣었다.

미국 정부는 그 후 서쪽에 있는 땅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하여 1804년 5월에 육군 탐험대를 보내기로 하였다. 탐험 대장은 제퍼슨 대통령의 비서인 루이스(Mcriwether Lewis, 1774~1809)육군 대위, 부대장은 포병 중위이자 인디언을 잘 알고 있는 클라크(William Clark, 1770~1838)였는데, 두 사람은 아주 친한 사이였다.

대통령은 그들에게 태평양까지 연결되는 길을 찾고 인디언들의 말과 풍속을 비롯한 그 지역의 자연 기상, 동식물, 지질 등 다방면의 자료를 수집하라고 지시하였다. 45명의 탐험 대원은 벌레와 모기에 시달리며 끝없는 들판으로 나아갔다. 플랫 강(Platte River)을 건너서 인디언 땅에 들어섰는데, 순하고 친절한 아리카라(Arikara)족, 무섭고 사나운 수(Sioux)족을 거쳐서 5개월 만에 중간 지점인 맨던(Mandan)족 마을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2,600㎞를 걸어 온 탐험대는 여기서 겨울을 나기로 했다.


미국 서부 탐험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헐값에 사들인 중부의 루이지애나 땅과 스페인이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서부 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대통령의 직접 전두지위하에 탐험 팀을 보냈다.

그들은 맨던족 마을에서 행운을 얻었다. 거기 보다 더 서쪽에 있는 쇼쇼니(Shoshoni) 부족의 젊은 여자인 사카가위아(Sacagawea)를 만난 것이었다. 이 여자는 맨던족에게 납치되어 왔다가 그곳에서 프랑스인과 살고 있었는데, 탐험대는 그녀에게 안내와 통역을 부탁했고 쾌히 승낙을 받았다. 봄이 되어(1805) 그 곳을 출발한 탐험대는 문명인이 처음 가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사카가위아는 생각보다 똑똑한 여인이었다. 맨 앞에서 안내를 했는데 그녀 덕분에 간간이 만나는 인디언들과 친구가 되고 우호적인 만남도 이루어졌다. 중간에 배가 물에 빠지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미주리 강의 대폭포도 보았고, 멀리서 로키 산맥도 보았다. 마침내 쇼쇼니족 마을에 도착하여 사카가위아를 추장인 오빠에게 인계하고 길 안내를 받아 출발하였다.

로키 산맥에 들어서자 날씨는 춥고 먹을 것도 귀하고 길은 험하고 굶주림과 동상에 시달렸다. 드디어 로키를 넘어 탁 트인 들판에 다다랐다. 다시 협곡을 지나 컬럼비아 강을 만나 일행은 통나무 카누를 타고 내려갔다. 드디어 위대한 날이 도래하였다. 탐험대는 대륙을 가로질러 태평양을 본 첫 번째 미국인이 되었다. 장장 2년 4개월만인 1806년 9월에 개선하여 큰 환대를 받았다. 그 후 루이스와 클라크는 『원정기(Journals of the Lewis and Clark)』라는 탐험기를 출판하였지만 4년 뒤 루이스는 죽고, 클라크는 1838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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