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목표를 향한 방법론 2 가지
구남단2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13.07.24
1. 출발과 목표는 동일, 가는 길은 두 길
사람도 좋고 목표도 같습니다. 그런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길과 방법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다를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다르고 정반대로 보이기 때문에 '노선'이라는 말이 생깁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에게는 노선이라는 말이 중요하고, 생각 없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런 말은 듣기도 불편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2. 우리 주변의 여러 두 길들
- 학생들의 학업
학생이면 공부하기 위해 학교를 갔고 훗날 성공을 기약하며 공부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한 학생은 공부에 주력하고 공부에 방해 되는 것은 성공하고 난 훗날로 전부 미루는 경우가 있고, 한 학생은 놀아 가면서 공부를 함으로 성공한 훗날에 누릴 것을 미리 좀 사용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번째 경우를 두고 경험 있는 어른들은 방법을 잘못 선택했다고 하지만 더 넓게 본다면 20 년의 공부 기간에 미리 좀 노는 대신에 훗날의 성공이 작아 져서 훗날에 놀 기회가 좀 줄었다 해도 인생 전체를 계산해 보면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미리 좀 논 것과 공부만 한 것이 훗날의 성공에 무조건 확실하게 그대로 반영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부모의 경험과 일반적인 통계를 두고 볼 때 학생의 공부 집중이 낫다고 보이며 부모의 사랑은 조금이라도 낫겠다고 생각 되는 가능성 때문에 자녀의 공부 집중에 모든 것을 걸게 됩니다. 그런데 냉정히 생각해 보면 해 볼 만큼 해 보다가 안 되면 한 발 물러 서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동기나 목적은, 일반 모든 아이들이 같습니다. 방법만 두 길이 있습니다. 원하는 방법으로 하든 못하든 결과적으로 방법은 두 가지가 있고, 그 두 방법은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 사상전과 무력전
김구는 너 죽고 나 죽자며 일본인들을 죽였습니다. 안창호는 글이라도 읽어야 세상을 산다며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김구는 인기가 높고 안창호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며 애는 썼으나 안창호 때문에 우리가 대한의 독립에 덕 본 것이 있는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각계각층이 노력했다는 그런 의미에 그친 것 같습니다. 김구처럼 무력 투쟁에 나서고 이승만처럼 국제 외교와 정치에 나선 이들만 독립투사로 이름이 높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이었을까? 입장을 바꿔 놓고 보면 전혀 달라 집니다. 지금 남한을 위협하는 북한의 노력 중에 휴전선의 군대와 남한 내로 들어 와서 북한과 싸우면 안 된다고 달래는 노력 중 어느 것이 우리에게 더 위협적인가? 여자와 아이를 납치하여 인생을 짓밟아 버렸다는 뉴스가 몇 번을 거듭하면 이 나라 5천 만 가정이 여자와 아이를 단속하여 세상이 건전해 지지만 경찰력과 사회 안전망이 완벽하여 그런 상황이 없으면 이 나라 여자들이 모두 술집 접대부가 되고 이 나라 아이들이 그렇게 되려고 어릴 때부터 옷을 훌떡 벗고 다니며 그 것을 자유 세상의 인권이라고 합니다.
우리 눈에 화려하게 보이는 활동과 그 활동을 만들어 내고 그 활동의 방향을 잡아 주는 조용한 사상 운동을 두고, 생각이 있는 사람은 둘 다 필요하지만 무력전은 도배 장판의 인테리어라고 한다면 사상전은 건물의 기초 골조 공사라고 생각합니다.
- 교회의 사회적 사건화
교회의 사회적 사건화가 2000년대 한국 교회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어느 한 쪽에서는 학자들의 고전적 토론이 명맥을 유지하나 그 것은 관심도 없고 무슨 소리인지 알아 들을 수도 없는 수화 정도입니다. 중요성으로 본다면 한국 교회 전 교인들이 주목해야 할 토론 기회가 있어도 불과 토론 당사자나 이해 관계인 몇십 명이 앉은 정도며 아주 많아야 몇백 명이 전부인데 그 것도 회의를 개최하는 그 교회나 발표자와 인연이 있는 분들이 성의 표시로 앉은 정도라 보입니다.
그 대신 전국의 교회 강단과 출간물과 언론과 각종 교회의 회의에서는 사회적으로 사건화가 된 문제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독주를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 교회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 남북과 세계 평화에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인가... 모두 이런 것입니다. 이런 토론에 발을 담고 이런 주제가 강단이나 교회 운영의 근본에 침습을 한다면 그 토론에서 이길 것도 없고 이길 수도 없이 이미 삼켜 버렸습니다. 독수리가 새장 안에서 늑대와 싸운다면 싸워 볼 것도 없습니다.
3. 출애굽을 두고 내려온 교회의 두 길
19세기까지만 해도 신약 2천 년의 대부분 교회의 가르침은 교리의 차이나 역사적 차이는 있다 해도 세상과 사회를 향해 가진 자세는 동일했습니다. 마치 그 시기까지 세상의 과학과 기술에 대해 교회가 가진 사상처럼. 그런데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하자 교회 내에서는 무조건 반대파가 대세였는데 세월 속에 거의 다 죽고 없어 졌고 그 대신 다윈 때문이 아니라고 하는데 다윈의 진화론 발표 이후부터 교회 내에서는 과연 예수님이 물 위로 걸었겠는가? 창세기가 실제 이야기였겠는가? 이런 식으로 기독교의 근본을 해체하는 발언이 시작 되었고 순식간에 기독교를 다 삼켜 버렸습니다. 성경은 착하게 살라는 도덕서로 내려 앉았고 절대의 세계는 과학이 정권을 잡아 버렸습니다. 이런 과학의 기독교 장악에 바로 이어 출애굽이란 무엇이냐는 논쟁이 시작 되고 과학의 뒤를 이어 현재 기독교를 다 장악해 버렸습니다.
출애굽이란 크고 강한 것에게 작고 약한 것이 억압을 받고 왔으나 기독교가 가나안과 하나님을 기치에 걸고 모세 같은 지도자가 되어 강대국에서 약소국이 눈치를 보지 않고, 부자에게 가난한 사람이 노동 착취를 당하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지 출애굽기의 출애굽 역사가 실제의 역사적 기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에 이런 불신자들의 출애굽 시야는 다윈의 진화론이 성경의 절대성을 흔들어 놓은 터 위에 돋아 났고 오늘까지 이 주장은 창궐하여 교회를 다 잡고 있습니다. 고신 합신 합동 개혁처럼 스스로 이 나라 최고 최상의 신앙 단체라는 곳에도 알게 모르게 이미 흐름을 그런 쪽에서 다 잡아 버렸습니다.
4. 이 글에서는 대화의 아쉬움만 지적합니다.
- 좋은 사람들의 좋은 목표
이 홈을 가치 있게 보시는 분들에게는 상기 글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글을 올리는 것은 이런 두 길을 두고 대화의 아쉬움 때문입니다. 세상은 위에서 말한 두 극단의 방법론을 좌익 우익이라고 하나 교회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쪽이든 사람의 본능은 잘해 보고 싶은 것이고 전체가 다 함께 잘 되기를 원합니다. 동기도 좋고 목적도 좋습니다. 결과론적으로 극단적 자본주의자가 자기 한 사람 외에는 다 죽으라고 했다지만 냉정하게 살피면 그는 자기가 세상에 유일하게 제일 잘 되고 싶고 모든 인류는 자기 밑에 있는 구도를 만들고 그 구도 하에서 전부가 행복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의 혁명도 자유 진영에서 무지막지하게 표현을 해서 그렇지 그들끼리는 스탈린 혼자만 죽을 때까지 제일 높은 사람만 될 수 있다면 모두가 다 행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동기로 그 목적을 이루려니 자기를 노리는 몇몇은 가차 없이 처단을 해야 했습니다. 지금 북한의 김씨들도 그들만 이 나라에 흔들리지 않는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면 못 할 일이 없습니다. 자기들의 위치를 흔들 수 있기 때문에 핵을 포함해서 모든 극단 조처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 볼 때 인간은 그 누구라도 동기만 들어 보고 또 그들의 목표만 청취해 본다면 좋은 말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개 2 가지 길이 있는데 이 길을 두고 하나를 선택해야 하니 길을 선택하는 것을 노선이라고 합니다.
- 좋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두 길
어중간한 사람들은 좀 빼 버리고, 유무식을 막론하고 정말 좋은 사람들끼리는 동기와 목적은 미사여구로 끝 없이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목표를 위해 어느 방법을 사용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방법론을 두고 사람들은 길을 가는 도중에도 또 마지막 실패를 했을 때도 나의 진심을 모르느냐, 나의 동기와 목표를 의심하느냐고 펄펄 뜁니다. 이럴 때 아쉬운 것은 방법을 잘못 택한 그 한 순간이 그의 좋은 동기와 목표를 스스로 짓 이겨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살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자살을 기어코 하겠다면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해 봐야 목표를 달성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한 가지 진한 아쉬움이 있다면 '대화'입니다. 진정한 대화. 양 쪽의 모든 것을 다 드러 내고 하나씩 제대로 짚어 봤다면 인간은 생의 본능이 있고 발전의 욕구가 있기 때문에 왠 만하면 방법론의 수정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평양 김씨들의 성격상 그리고 이미 방법론의 첫 선택이 잘못 된 이상 그들은 오늘의 저 길을 걸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과는 대화가 아니라 오로지 죽고 살기로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오늘 저런 모습을 보며 아쉬운 것은 현재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대화는 저 쪽의 급작스런 도발을 조금 무마할 정도의 작전으로만 생각하고 이 쪽의 힘을 기르는 것뿐입니다. 그들과 대화는 그들이 그런 사상을 가지게 되던 어린 시절, 구한 말, 식민지 시기에 조용하게 끝장 토론을 제대로 잘 했더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그들뿐 아니라 어느 누구와도 그 사람 자체가 나쁘거나 그의 목표가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서로가 입에 담을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나는 착한데 너는 원래 나쁘지 않은가, 이렇게 대화하고 이런 자세를 가진다면 이 사람은 남을 연구해 보지 않은 막 가는 사람입니다.
- 대화
이 노선은 전국 교회의 교인이 세상적으로 무식합니다. 그래서 대화라는 단어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이 노선은 그 시작과 오늘까지 모든 길을 늘 가장 초보적이며 가장 근본적이며 가장 가치적인 것만 가지고 한도 없이 살피고 있습니다. 1989년까지 개최 되었던 전국 집회, 15,000여 명의 남녀노소가 함께 앉은 자리의 기록이 가장 공회적인데 11 회의 설교 내용을 짚어 보면 신학교에서도 목사 과정에서는 들어 볼 수 없고 Th.M이라는 박사 전 과정의 학생이라야 자기 전공 분야에 한하여 이해가 될 내용으로 집회 설교의 4 분의 1 정도를 채우고, 그리고 성경 본문에 대한 것이 4 분의 1 정도입니다. 이 글을 적는 저는 대한민국의 중상 수준의 학습력을 가졌고 공부한 경력은 상위급입니다. 그런데 그 집회 설교 하나를 가지고 수십 번을 들어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들을수록 더 깊어 지고 들을수록 지난 날 그렇게 많이 들었는데 왜 이 것은 몰랐던가 라는 탄식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런 설교를 가지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 초등학교 1학년, 심지어 글을 읽지 못하는 노인들까지 함께 앉아 설교를 함께 듣습니다.
한 편으로는 백 목사님의 설교는 그의 인간적 노력과 인간적 지성을 전하지 않고 자기 속에 말씀을 전하고 싶은 하나님께 붙들려 전달하려 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분의 설교의 시작과 중점과 진력을 다하는 것은 근본 이치, 절대적 가치 세계를 끝도 없이 파고 들어 갔고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귀가 열린 사람은 한 번 듣고는 자기 죽는 날까지 이 신앙을 떠날 수 없고 다른 세계와 비교를 거부합니다. 오만 독선이 아니라 금반지와 구리반지라는 것은 비교 자체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누가 오해를 하든 당사자조차 그렇게 하든 이 노선은 이 노선에 근본적 문제가 있다면 만사를 희생하고 중단한다 해도 일단 그 문제를 살펴 봐야 하는 곳입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 노선은 보이는 좋은 모습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중요하다 해도 어려운 것은 대충 덮어 놓고 우선 좋게 다독거리며 나가야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이고 그래야 뭔가를 건설을 할 수 있는데 옆에서는 10층까지 건축물을 올리는데도 이 노선은 어디에 터를 파야 할 것인지를 살피는 곳이고, 10층까지 건축물을 올린 상태에서도 기초에 문제가 발견 되면 일단 모든 것을 중단하고 그 기초를 살피는 방식이 이 노선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돈을 벌고 외면에 성공을 하는 조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공회가 교계가 부러워 할 외형까지 가졌던 1980년대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격려한다고 한 번 배려를 해서 받았던 시기지 원래 이 노선의 본질은 그런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 이 노선이 말하는 대화는 '연구'
보통 대화라면 한 잔 먹고 네 입장과 내 입장을 버무리는 비빔밥을 말합니다. 이 대화는 이 노선의 대화와 알파벳만 같지 뜻은 정반대입니다. 이 노선의 대화는 둘의 본질이 뭔지 파악을 하고, 둘을 비교해서 길고 짧은 것을 살펴 보며, 모든 면으로 연구를 해서 마지막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절대 진리를 찾아 가는 과정에 혼자의 눈보다 다른 눈으로 본 것을 참고하고 싶은 노력입니다.
사람도 좋고 목표도 같습니다. 그런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길과 방법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다를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다르고 정반대로 보이기 때문에 '노선'이라는 말이 생깁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에게는 노선이라는 말이 중요하고, 생각 없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런 말은 듣기도 불편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2. 우리 주변의 여러 두 길들
- 학생들의 학업
학생이면 공부하기 위해 학교를 갔고 훗날 성공을 기약하며 공부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한 학생은 공부에 주력하고 공부에 방해 되는 것은 성공하고 난 훗날로 전부 미루는 경우가 있고, 한 학생은 놀아 가면서 공부를 함으로 성공한 훗날에 누릴 것을 미리 좀 사용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번째 경우를 두고 경험 있는 어른들은 방법을 잘못 선택했다고 하지만 더 넓게 본다면 20 년의 공부 기간에 미리 좀 노는 대신에 훗날의 성공이 작아 져서 훗날에 놀 기회가 좀 줄었다 해도 인생 전체를 계산해 보면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미리 좀 논 것과 공부만 한 것이 훗날의 성공에 무조건 확실하게 그대로 반영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부모의 경험과 일반적인 통계를 두고 볼 때 학생의 공부 집중이 낫다고 보이며 부모의 사랑은 조금이라도 낫겠다고 생각 되는 가능성 때문에 자녀의 공부 집중에 모든 것을 걸게 됩니다. 그런데 냉정히 생각해 보면 해 볼 만큼 해 보다가 안 되면 한 발 물러 서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동기나 목적은, 일반 모든 아이들이 같습니다. 방법만 두 길이 있습니다. 원하는 방법으로 하든 못하든 결과적으로 방법은 두 가지가 있고, 그 두 방법은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 사상전과 무력전
김구는 너 죽고 나 죽자며 일본인들을 죽였습니다. 안창호는 글이라도 읽어야 세상을 산다며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김구는 인기가 높고 안창호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며 애는 썼으나 안창호 때문에 우리가 대한의 독립에 덕 본 것이 있는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각계각층이 노력했다는 그런 의미에 그친 것 같습니다. 김구처럼 무력 투쟁에 나서고 이승만처럼 국제 외교와 정치에 나선 이들만 독립투사로 이름이 높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이었을까? 입장을 바꿔 놓고 보면 전혀 달라 집니다. 지금 남한을 위협하는 북한의 노력 중에 휴전선의 군대와 남한 내로 들어 와서 북한과 싸우면 안 된다고 달래는 노력 중 어느 것이 우리에게 더 위협적인가? 여자와 아이를 납치하여 인생을 짓밟아 버렸다는 뉴스가 몇 번을 거듭하면 이 나라 5천 만 가정이 여자와 아이를 단속하여 세상이 건전해 지지만 경찰력과 사회 안전망이 완벽하여 그런 상황이 없으면 이 나라 여자들이 모두 술집 접대부가 되고 이 나라 아이들이 그렇게 되려고 어릴 때부터 옷을 훌떡 벗고 다니며 그 것을 자유 세상의 인권이라고 합니다.
우리 눈에 화려하게 보이는 활동과 그 활동을 만들어 내고 그 활동의 방향을 잡아 주는 조용한 사상 운동을 두고, 생각이 있는 사람은 둘 다 필요하지만 무력전은 도배 장판의 인테리어라고 한다면 사상전은 건물의 기초 골조 공사라고 생각합니다.
- 교회의 사회적 사건화
교회의 사회적 사건화가 2000년대 한국 교회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어느 한 쪽에서는 학자들의 고전적 토론이 명맥을 유지하나 그 것은 관심도 없고 무슨 소리인지 알아 들을 수도 없는 수화 정도입니다. 중요성으로 본다면 한국 교회 전 교인들이 주목해야 할 토론 기회가 있어도 불과 토론 당사자나 이해 관계인 몇십 명이 앉은 정도며 아주 많아야 몇백 명이 전부인데 그 것도 회의를 개최하는 그 교회나 발표자와 인연이 있는 분들이 성의 표시로 앉은 정도라 보입니다.
그 대신 전국의 교회 강단과 출간물과 언론과 각종 교회의 회의에서는 사회적으로 사건화가 된 문제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독주를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 교회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 남북과 세계 평화에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인가... 모두 이런 것입니다. 이런 토론에 발을 담고 이런 주제가 강단이나 교회 운영의 근본에 침습을 한다면 그 토론에서 이길 것도 없고 이길 수도 없이 이미 삼켜 버렸습니다. 독수리가 새장 안에서 늑대와 싸운다면 싸워 볼 것도 없습니다.
3. 출애굽을 두고 내려온 교회의 두 길
19세기까지만 해도 신약 2천 년의 대부분 교회의 가르침은 교리의 차이나 역사적 차이는 있다 해도 세상과 사회를 향해 가진 자세는 동일했습니다. 마치 그 시기까지 세상의 과학과 기술에 대해 교회가 가진 사상처럼. 그런데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하자 교회 내에서는 무조건 반대파가 대세였는데 세월 속에 거의 다 죽고 없어 졌고 그 대신 다윈 때문이 아니라고 하는데 다윈의 진화론 발표 이후부터 교회 내에서는 과연 예수님이 물 위로 걸었겠는가? 창세기가 실제 이야기였겠는가? 이런 식으로 기독교의 근본을 해체하는 발언이 시작 되었고 순식간에 기독교를 다 삼켜 버렸습니다. 성경은 착하게 살라는 도덕서로 내려 앉았고 절대의 세계는 과학이 정권을 잡아 버렸습니다. 이런 과학의 기독교 장악에 바로 이어 출애굽이란 무엇이냐는 논쟁이 시작 되고 과학의 뒤를 이어 현재 기독교를 다 장악해 버렸습니다.
출애굽이란 크고 강한 것에게 작고 약한 것이 억압을 받고 왔으나 기독교가 가나안과 하나님을 기치에 걸고 모세 같은 지도자가 되어 강대국에서 약소국이 눈치를 보지 않고, 부자에게 가난한 사람이 노동 착취를 당하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지 출애굽기의 출애굽 역사가 실제의 역사적 기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에 이런 불신자들의 출애굽 시야는 다윈의 진화론이 성경의 절대성을 흔들어 놓은 터 위에 돋아 났고 오늘까지 이 주장은 창궐하여 교회를 다 잡고 있습니다. 고신 합신 합동 개혁처럼 스스로 이 나라 최고 최상의 신앙 단체라는 곳에도 알게 모르게 이미 흐름을 그런 쪽에서 다 잡아 버렸습니다.
4. 이 글에서는 대화의 아쉬움만 지적합니다.
- 좋은 사람들의 좋은 목표
이 홈을 가치 있게 보시는 분들에게는 상기 글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글을 올리는 것은 이런 두 길을 두고 대화의 아쉬움 때문입니다. 세상은 위에서 말한 두 극단의 방법론을 좌익 우익이라고 하나 교회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쪽이든 사람의 본능은 잘해 보고 싶은 것이고 전체가 다 함께 잘 되기를 원합니다. 동기도 좋고 목적도 좋습니다. 결과론적으로 극단적 자본주의자가 자기 한 사람 외에는 다 죽으라고 했다지만 냉정하게 살피면 그는 자기가 세상에 유일하게 제일 잘 되고 싶고 모든 인류는 자기 밑에 있는 구도를 만들고 그 구도 하에서 전부가 행복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의 혁명도 자유 진영에서 무지막지하게 표현을 해서 그렇지 그들끼리는 스탈린 혼자만 죽을 때까지 제일 높은 사람만 될 수 있다면 모두가 다 행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동기로 그 목적을 이루려니 자기를 노리는 몇몇은 가차 없이 처단을 해야 했습니다. 지금 북한의 김씨들도 그들만 이 나라에 흔들리지 않는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면 못 할 일이 없습니다. 자기들의 위치를 흔들 수 있기 때문에 핵을 포함해서 모든 극단 조처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 볼 때 인간은 그 누구라도 동기만 들어 보고 또 그들의 목표만 청취해 본다면 좋은 말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개 2 가지 길이 있는데 이 길을 두고 하나를 선택해야 하니 길을 선택하는 것을 노선이라고 합니다.
- 좋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두 길
어중간한 사람들은 좀 빼 버리고, 유무식을 막론하고 정말 좋은 사람들끼리는 동기와 목적은 미사여구로 끝 없이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목표를 위해 어느 방법을 사용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방법론을 두고 사람들은 길을 가는 도중에도 또 마지막 실패를 했을 때도 나의 진심을 모르느냐, 나의 동기와 목표를 의심하느냐고 펄펄 뜁니다. 이럴 때 아쉬운 것은 방법을 잘못 택한 그 한 순간이 그의 좋은 동기와 목표를 스스로 짓 이겨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살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자살을 기어코 하겠다면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해 봐야 목표를 달성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한 가지 진한 아쉬움이 있다면 '대화'입니다. 진정한 대화. 양 쪽의 모든 것을 다 드러 내고 하나씩 제대로 짚어 봤다면 인간은 생의 본능이 있고 발전의 욕구가 있기 때문에 왠 만하면 방법론의 수정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평양 김씨들의 성격상 그리고 이미 방법론의 첫 선택이 잘못 된 이상 그들은 오늘의 저 길을 걸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과는 대화가 아니라 오로지 죽고 살기로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오늘 저런 모습을 보며 아쉬운 것은 현재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대화는 저 쪽의 급작스런 도발을 조금 무마할 정도의 작전으로만 생각하고 이 쪽의 힘을 기르는 것뿐입니다. 그들과 대화는 그들이 그런 사상을 가지게 되던 어린 시절, 구한 말, 식민지 시기에 조용하게 끝장 토론을 제대로 잘 했더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그들뿐 아니라 어느 누구와도 그 사람 자체가 나쁘거나 그의 목표가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서로가 입에 담을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나는 착한데 너는 원래 나쁘지 않은가, 이렇게 대화하고 이런 자세를 가진다면 이 사람은 남을 연구해 보지 않은 막 가는 사람입니다.
- 대화
이 노선은 전국 교회의 교인이 세상적으로 무식합니다. 그래서 대화라는 단어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이 노선은 그 시작과 오늘까지 모든 길을 늘 가장 초보적이며 가장 근본적이며 가장 가치적인 것만 가지고 한도 없이 살피고 있습니다. 1989년까지 개최 되었던 전국 집회, 15,000여 명의 남녀노소가 함께 앉은 자리의 기록이 가장 공회적인데 11 회의 설교 내용을 짚어 보면 신학교에서도 목사 과정에서는 들어 볼 수 없고 Th.M이라는 박사 전 과정의 학생이라야 자기 전공 분야에 한하여 이해가 될 내용으로 집회 설교의 4 분의 1 정도를 채우고, 그리고 성경 본문에 대한 것이 4 분의 1 정도입니다. 이 글을 적는 저는 대한민국의 중상 수준의 학습력을 가졌고 공부한 경력은 상위급입니다. 그런데 그 집회 설교 하나를 가지고 수십 번을 들어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들을수록 더 깊어 지고 들을수록 지난 날 그렇게 많이 들었는데 왜 이 것은 몰랐던가 라는 탄식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런 설교를 가지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 초등학교 1학년, 심지어 글을 읽지 못하는 노인들까지 함께 앉아 설교를 함께 듣습니다.
한 편으로는 백 목사님의 설교는 그의 인간적 노력과 인간적 지성을 전하지 않고 자기 속에 말씀을 전하고 싶은 하나님께 붙들려 전달하려 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분의 설교의 시작과 중점과 진력을 다하는 것은 근본 이치, 절대적 가치 세계를 끝도 없이 파고 들어 갔고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귀가 열린 사람은 한 번 듣고는 자기 죽는 날까지 이 신앙을 떠날 수 없고 다른 세계와 비교를 거부합니다. 오만 독선이 아니라 금반지와 구리반지라는 것은 비교 자체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누가 오해를 하든 당사자조차 그렇게 하든 이 노선은 이 노선에 근본적 문제가 있다면 만사를 희생하고 중단한다 해도 일단 그 문제를 살펴 봐야 하는 곳입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 노선은 보이는 좋은 모습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중요하다 해도 어려운 것은 대충 덮어 놓고 우선 좋게 다독거리며 나가야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이고 그래야 뭔가를 건설을 할 수 있는데 옆에서는 10층까지 건축물을 올리는데도 이 노선은 어디에 터를 파야 할 것인지를 살피는 곳이고, 10층까지 건축물을 올린 상태에서도 기초에 문제가 발견 되면 일단 모든 것을 중단하고 그 기초를 살피는 방식이 이 노선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돈을 벌고 외면에 성공을 하는 조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공회가 교계가 부러워 할 외형까지 가졌던 1980년대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격려한다고 한 번 배려를 해서 받았던 시기지 원래 이 노선의 본질은 그런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 이 노선이 말하는 대화는 '연구'
보통 대화라면 한 잔 먹고 네 입장과 내 입장을 버무리는 비빔밥을 말합니다. 이 대화는 이 노선의 대화와 알파벳만 같지 뜻은 정반대입니다. 이 노선의 대화는 둘의 본질이 뭔지 파악을 하고, 둘을 비교해서 길고 짧은 것을 살펴 보며, 모든 면으로 연구를 해서 마지막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절대 진리를 찾아 가는 과정에 혼자의 눈보다 다른 눈으로 본 것을 참고하고 싶은 노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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