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에어컨 설치
구남단2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13.07.31
제가 24시간 근무하는 교회 사무실 1층에 오늘 에어컨을 달았습니다. 2002년에 본 예배당에 에어컨을 처음 설치하였고 이후 교육관과 사무실에 차례로 에어컨을 설치했으나 제가 근무하는 1층에는 에어컨을 막고 나왔습니다. 한 번 달게 되면 더위를 이기는 제 몸의 실력은 점점 떨어 지고 그 기계를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 의존적 인체가 될 터인데 이는 제게 주신 자유성을 제가 제한하는 일입니다.
그 동안 살면서 더우면 하루 3회 정도 찬물에 샤워를 했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의 어려움입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저를 찾아 오는 손님들입니다. 비용 때문에 일단 트윈을 거실에 달고 각 방의 문을 열어 놓고 함께 에어컨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제 사무실의 단독 에어컨은 손님이 올 때만 사용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와 제한은 그 사람에게 맡기되, 제 자유는 최대한 확보를 하여 오늘 21세기의 넘치는 세상에 아무리 덥다 해도 여름을 덥게 보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며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는 일은 저로서는 자유를 내어 놓는 일이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 사무실의 에어컨 때문에 이 글을 적는 것이 아니라 계시록 13장 16절 이하의 말세 형편 때문입니다. 천하를 편리하게 좋게 하나로 묶어 놓은 귀신이 믿는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양보하지 않으면 세상을 살 수 없도록 압박할 터인데 귀신은 우리를 확실하게 압박하여 효력을 보려고 지금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허락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자유롭게 살되 이 이상 자유로울 수 없도록 세상 자유의 맛을 함께 허락하고 있습니다. 겨울을 여름처럼, 여름을 겨울처럼 살 수 있는 이런 세상의 자유는 과거 로마 황제조차 누리지 못했던 자유며 풍요입니다. 세상의 맛과 멋과 편리함을 마음껏 누리게 하고 익히게 한 후에 신앙의 자유를 양보하게 하면서 이를 거절하면 세상의 혜택을 사정 없이 회수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신앙과 세상을 놓고 세상을 택하도록 말세의 주변과 환경과 세상 전부를 몰아 가고 있습니다.
어떤 세상이든지 포기할 수 있고, 어떤 환경의 편리함과 풍요로움에도 나 자신을 쉽게 노출 시키거나 익어 지게 하여 세상에게 길들여 지지 않도록 하는 것, 이 것이 세상과의 현재 싸움과 앞 날의 격화 될 싸움에서 스스로 나를 지키는 샅바 싸움입니다. 자녀 교육도, 교회 부흥도, 경제 여건도, 세상 편리함과 풍요로움까지 그 어떤 것도 다 내어 놓을 수 있는지 아니면 신앙을 내어 놓을 것인지 이 양자택일의 싸움이 에덴동산이나 과거 어느 역사의 투쟁보다 더 격화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많이 가질수록 누릴수록 여유로울수록 이 싸움에서는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스승 되는 백 목사님은 1989년 임종 때까지 세계 10대교회라고 불리던 서부교회 예배당 본당에 선풍기 하나 없이 지냈습니다. 그 분 평생에 어떤 한 겨울에도 예배당 본당에 난로 하나가 없었습니다. 유아실이나 기도실에만 난방이 있었고 본당에는 돌아 가시던 80세의 마지막 해 온풍기를 설치했습니다. 그 분이 걸어 간 걸음을 바로 주변에서 지켜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오늘까지 그 분 없는 25년 내내 저를 절제 시키고 재갈을 물리는 힘이었습니다. 80세로 돌아 가실 때까지 냉방 없이 살았던 분을 생각할 때 오늘도 현대 시설의 냉방을 유유히 비웃고 그 냉방이 주는 자유를 거부하고 나의 여름을 내가 결정하며 내가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지내고 있습니다.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것과 휴대폰 사용과 기타 많은 현대의 생활 필수품을 상대할 때마다 늘 주체와 주권을 내가 쥐고 있는지를 먼저 살피고 있습니다.
거실을 중심으로 서로 문을 열고 있는 사무실에서 손님과 직원들을 위해 에어컨을 설치하고 운영을 시작하면서 이 속에서 홀로 더위를 넘어 서는 신앙의 주체적 자유라는 무거운 주제로 현대 문명과 기술의 생활화를 주목해 봅니다.
돈만 있다면 오늘의 세상 편의를 누릴 수 있는 대로 누리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만 생각하는 것이 이 노선 외의 교회들의 세상관입니다. 그러나 이 노선은 그렇게 누릴 수 있는 환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염세주의나 고행주의가 아니라 신앙주의의 걸음을 더욱 가볍게 하기 위해 스스로 세상에게 자신을 함부로 내어 주지 않으려는 소리 없는 전쟁을 합니다. 자연주의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탈문명주의라서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말세 환경 속에서 신앙의 자유를 잠식해 들어 오는 원수의 포위망을 보며 주님과 말씀 외의 딴 것에게는 근본적으로 구속이 되거나 붙들려 매이는 것 자체를 피함으로 고지를 고수하고자 함입니다.
그 동안 살면서 더우면 하루 3회 정도 찬물에 샤워를 했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의 어려움입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저를 찾아 오는 손님들입니다. 비용 때문에 일단 트윈을 거실에 달고 각 방의 문을 열어 놓고 함께 에어컨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제 사무실의 단독 에어컨은 손님이 올 때만 사용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와 제한은 그 사람에게 맡기되, 제 자유는 최대한 확보를 하여 오늘 21세기의 넘치는 세상에 아무리 덥다 해도 여름을 덥게 보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며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는 일은 저로서는 자유를 내어 놓는 일이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 사무실의 에어컨 때문에 이 글을 적는 것이 아니라 계시록 13장 16절 이하의 말세 형편 때문입니다. 천하를 편리하게 좋게 하나로 묶어 놓은 귀신이 믿는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양보하지 않으면 세상을 살 수 없도록 압박할 터인데 귀신은 우리를 확실하게 압박하여 효력을 보려고 지금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허락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자유롭게 살되 이 이상 자유로울 수 없도록 세상 자유의 맛을 함께 허락하고 있습니다. 겨울을 여름처럼, 여름을 겨울처럼 살 수 있는 이런 세상의 자유는 과거 로마 황제조차 누리지 못했던 자유며 풍요입니다. 세상의 맛과 멋과 편리함을 마음껏 누리게 하고 익히게 한 후에 신앙의 자유를 양보하게 하면서 이를 거절하면 세상의 혜택을 사정 없이 회수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신앙과 세상을 놓고 세상을 택하도록 말세의 주변과 환경과 세상 전부를 몰아 가고 있습니다.
어떤 세상이든지 포기할 수 있고, 어떤 환경의 편리함과 풍요로움에도 나 자신을 쉽게 노출 시키거나 익어 지게 하여 세상에게 길들여 지지 않도록 하는 것, 이 것이 세상과의 현재 싸움과 앞 날의 격화 될 싸움에서 스스로 나를 지키는 샅바 싸움입니다. 자녀 교육도, 교회 부흥도, 경제 여건도, 세상 편리함과 풍요로움까지 그 어떤 것도 다 내어 놓을 수 있는지 아니면 신앙을 내어 놓을 것인지 이 양자택일의 싸움이 에덴동산이나 과거 어느 역사의 투쟁보다 더 격화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많이 가질수록 누릴수록 여유로울수록 이 싸움에서는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스승 되는 백 목사님은 1989년 임종 때까지 세계 10대교회라고 불리던 서부교회 예배당 본당에 선풍기 하나 없이 지냈습니다. 그 분 평생에 어떤 한 겨울에도 예배당 본당에 난로 하나가 없었습니다. 유아실이나 기도실에만 난방이 있었고 본당에는 돌아 가시던 80세의 마지막 해 온풍기를 설치했습니다. 그 분이 걸어 간 걸음을 바로 주변에서 지켜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오늘까지 그 분 없는 25년 내내 저를 절제 시키고 재갈을 물리는 힘이었습니다. 80세로 돌아 가실 때까지 냉방 없이 살았던 분을 생각할 때 오늘도 현대 시설의 냉방을 유유히 비웃고 그 냉방이 주는 자유를 거부하고 나의 여름을 내가 결정하며 내가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지내고 있습니다.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것과 휴대폰 사용과 기타 많은 현대의 생활 필수품을 상대할 때마다 늘 주체와 주권을 내가 쥐고 있는지를 먼저 살피고 있습니다.
거실을 중심으로 서로 문을 열고 있는 사무실에서 손님과 직원들을 위해 에어컨을 설치하고 운영을 시작하면서 이 속에서 홀로 더위를 넘어 서는 신앙의 주체적 자유라는 무거운 주제로 현대 문명과 기술의 생활화를 주목해 봅니다.
돈만 있다면 오늘의 세상 편의를 누릴 수 있는 대로 누리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만 생각하는 것이 이 노선 외의 교회들의 세상관입니다. 그러나 이 노선은 그렇게 누릴 수 있는 환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염세주의나 고행주의가 아니라 신앙주의의 걸음을 더욱 가볍게 하기 위해 스스로 세상에게 자신을 함부로 내어 주지 않으려는 소리 없는 전쟁을 합니다. 자연주의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탈문명주의라서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말세 환경 속에서 신앙의 자유를 잠식해 들어 오는 원수의 포위망을 보며 주님과 말씀 외의 딴 것에게는 근본적으로 구속이 되거나 붙들려 매이는 것 자체를 피함으로 고지를 고수하고자 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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