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설교 표절 문제와 공회 설교 - 복음을 중심으로

구남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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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1.27
1. 글을 열며
고신 언론의 편집장님께서 '표절 설교'에 대한 글을 발표했습니다. 2012년 네이버에서 공회를 비판하는 과정에 저와 직접 대화가 오 갔으며 당시 그 언론의 내용을 평소 잘 옮겨 사용하고 있다고 감사를 했고 그 분은 그 언론의 기사를 소개하는 제게 역시 허락과 함께 감사를 했었습니다. 제가 교회 관련 내용으로 자료를 옮길 때는 상대방에게 일반적으로 '이런 문제는 주인의 허락을 사전에 받아야 하나 복음이기 때문에 이해해 주실 것으로 생각했다'고 양해를 구합니다. 이 번 글은 그 분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라 서로 걸어 가는 노선이 달라 다를 수밖에 없고 저는 그 분이 몸 담고 있는 일반 시각에 대하여 비판을 하고자 합니다.

2. 늘 조심할 우리 내부 문제
이 문제를 두고도 역시 우리가 한민족 우리임을 여지 없이 드러 냈습니다. 전 민족이 민족적으로 함께 했던 일을 두고 언론이 찍은 한 건만을 두고 전 국민이 비판을 쏟아 내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가장 우스운 것은 표절을 비판하는 기사들입니다. 기사들마다 표현들이 꼭 같습니다. 표절을 가장 많이 하는 곳이 바로 기자들의 기사들입니다. 대형사건은 비교하기가 쉽습니다. 초대형 사건이 생길 때 기사들을 비교해 보면 찬반에 따라 마지막 결론만 2 가지로 나뉘는데 그 결론이 가는 방향과 표현조차 동일합니다.
전 대통령의 퇴임 직후 전국은 그 일가의 축재와 횡령과 사조직 챙기는 문제를 오랜 세월 비판을 했습니다. 그 때도 그와 그 주변을 비판하던 우리 민족 전부를 통틀어 축재하지 않았던 사람, 횡령하지 않고 사조직을 챙기지 않았던 이들이 있었던가? 제 알기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비판하는 언론과 야당과 소위 시민단체 그들 세계도 그러했고 일반 서민이라는 세계도 꼭 같았습니다. 더러운 민족이어서 더러운 지도자가 나온 것인데 더러운 지도자를 배출한 더러운 민족이 더러운 지도자를 비판하는 것은 세상식이고 믿는 사람이라면 늘 더러운 지도자를 배출한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 보거나 최소한 동시에 살펴 봐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신앙의 세계란 늘 나와 주님과의 관계에서 세상 모든 문제를 해결합니다. 세상은 그 반대입니다.

3. 사회의 표절 문제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 사회는 각종 발표에 '표절' 문제가 급격히 부각 되고 그 기준이 갑자기 까다로워 졌습니다. 목사는 서구에서 시작 된 의사 변호사 교수처럼 꼭 같은 체계로 서구 사회가 만들어 낸 전문인 제도의 산물입니다. 학회에 발표하는 각종 논문이 지식을 훔치는 일을 하면 당연히 제재를 가해야 합니다.

그런데 표절 문제를 두고 갑자기 기독교 쪽에서는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님의 논문 표절을 두고 격론이 벌어 졌습니다. 급기야 이 문제는 기독교를 허물고 싶거나 평소 손을 보고 싶었던 목사들을 잡으려고 그들의 설교 표절을 들고 나왔습니다. 의사 변호사 교수의 논문처럼 목사가 학자로서 논문을 발표한다면 그 것은 그런 체계에서 말하는 표절 문제가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한국사회는 5천년 도도히 흘러 온 우리의 인정 사정 배려 넉넉한 마음으로 표절을 허용해 온 역사와 최근까지의 배경을 고려한다면 표절 자체는 절도라고 못을 박아도 절도죄로 누구 하나를 지목하는 것은 그렇게 함부로 해서 안 되는 민족입니다. 설날 떡값을 주고 받지 않으면 인륜을 무시하는 짐승같은 놈으로 낙인을 찍어 온 사회가 그 민족적 역사와 감정과 실상을 그대로 두고 누구 하나 미운 사람을 찍어 그 사람을 서구 사회의 표절 도둑과 같이 몰아 세운다면, 표절 때문에 지목을 받는 사람이나 지목을 하는 사람이나 표절이라는 기준으로 살피면 도둑은 꼭 같은 도둑들인데 표절로 매맞는 사람은 도둑질을 하고 벌이라도 받고 있으니 나은 편이고 꼭 같이 도둑질을 한 인간들이 남만 도둑이라고 매질을 하면 그들은 표절 도둑에다 남을 매질한 죄가 더해 질 것이니 더 나쁜 인간입니다.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의사가 환자를 붙들고 대화하는 말, 변호사가 고객을 위해 법정에 제출하고 변론하는 표현, 교수가 학생들에게 평생 자기 전공 하나만 가지고 설명을 하는 표현들을 무작위로 녹음하고 타이핑을 친 다음 표절인지 조사를 해 보면 어떨까요? 거의 모든 경우가 전부 심각한 표절일 것입니다. 술 먹고 간이 부어 병원을 찾은 환자에게 간 전문의 내과 의사가 하는 말은 전국 수십 개 의과대학 의사들이 핵심 진료 표현을 달리 하는 경우가 있을까요? 변호사의 변론은 실정법의 적용 과정인데 여기에 변호사가 자기의 독창적인 법과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교수가 평생 학생을 가르치며 매년 같은 과목으로 같은 내용을 가르치면서 작년에 가르칠 때 사용한 표현을 자기 표절에 걸리지 않으려고 일일이 표현을 했을까요?

이제 최근에 급격히 기사화 되고 공론화 되고 있는 목사의 설교 표절 문제를 비교합니다. 세상 것은 인간이 불완전하니 먼저 말한 것이 더 나을지 더 정확할지 뒤에 나온 것이 더 우수할지 모르고 또 각자 자기 몫을 챙겨야 하므로 표절이라는 말을 가지고 자기 재산을 확보해야 하겠지만

4. 목사의 설교란
- 성경에서 나와야 하는 절대 명제가 있습니다.
성경 하나에서 나와야 하고 그 성경은 정확무오와 절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기도문으로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서 얼마나 다른 목사가 설교하지 않은 내용을 설교를 할 수 있을까요? 주기도문 문장은 2천 년이 되었는데 2천 년 내려온 기독교 역사에 그 수 없는 설교, 현재처럼 차고 넘치는 목사들과 설교들을 모두 다 뒤져서 남이 먼저 한 것은 상호 상표법처럼 또는 특허권 저작권처럼 고려하고 그 것을 피해서 설교를 하라? 애당초부터 불가능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것은 가능과 불가능 문제가 아니라

- 진리는 하나이며 진리가 복음으로 전해 져야 하는 문제로 본다면
한 목사의 설교가 내 설교보다 나으면 우리는 그 목사의 설교를 피해서 나의 독창적 설교를 하려 할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설교가 진리에 가깝고 복음의 전파력에서 더 우수하다면 우리는 그 것을 따라 가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모를 때 몰라서 무능하고 실수하고 틀릴 수는 있습니다. 그 것은 봐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꼭 같은 주기도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서 더 나은 해석, 더 나은 표현, 더 은혜스런 전달 방법이 있다면 그 것은 복음 전파자가 배워서 따라 가야 할 길이 됩니다.
세상은 자기 중심이니 자기가 가진 것은 남에게 돈을 받고 팔 물건입니다. 내가 먹고 살기 위해 남을 이용하는 것이 세상이 돌아 가는 기본 원리입니다. 타락 후 세상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는 자본주의를 본질로 하는 세상 환경에 처해 있으나 우리의 사상과 중심과 언행은 골수까지 복음주의라야 합니다. 주님이 내게 다 주셨으니 나도 내 가진 전부를 다른 사람에 전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나의 독창으로 80점짜리 설교밖에 할 수 없는데 이웃 목사가 90점짜리 설교로 교인들이 은혜를 받게 한다면 어떤 것이 목사의 자세일까?
너는 너대로의 개성이 있고 나는 나대로의 개성이 있다며 자존심을 먼저 내세워야 할까?
그 사람의 설교가 더 은혜롭다면 그 은혜는 성령이 그에게 주신 것이며 성령이 나에게는 주지 않고 그 사람을 통해 주신 것이 있다면 우리는 배우기는 성령에게 배우나 그 배우는 경로가 그 사람을 통해 내려 올 때 그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당연히 그 사람을 통해 주시는 성령에게 그 사람을 통해 받아 가지는 것이 옳고 바르지 않을까?
목회자의 설교가 아니라 신학교수의 논문이라면 그 것은 세상 학자를 흉내 내겠다고 판을 벌여 놓은 것이니 세상식으로 발표하고 저작권을 행사해서 돈이든 명예를 누리고 또 그 것을 갖다 쓸 사람은 표절 문제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설교라면 그 설교는 이 사람을 통하든 저 사람을 통하든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전체에게 전해 주는 것이니 그 주인은 하나님이고 그 것을 전하는 사람은 내 것이라는 개념을 가질 수 없는 복음입니다. 자기를 통해 주시는 것을 한 사람이라도 가져 가면 더 반가워 해야 하고 열 사람이 가져 가면 더 감사해야 합니다. 먼저 준 사람에게는 전할 책임을 맡겨 놓았으니 가져 가지 않으려 해도 욕을 얻어 먹고서라도 전달해 줘야 하는 것이 설교며 복음인데 만일 상대방이 가져 갔다면 나의 짐을 덜어 줬다고 고마워 해야 할 일입니다. 물론 가져 가는 사람이 인사를 하고 예절을 갖추고 또 가져 가서 누구에게서 가져 왔다고 표시를 한다면 그 것은 그 사람의 복이며 덕이 되는 것이나 최소한 주는 쪽에서는 가져 간 쪽에 대해 권리 행사나 다른 제재를 가할 수가 없습니다.

- 변치 않을 진리를 전하되, 자기 것으로 전해야 하니
표절 문제는 처음부터 생길 수가 없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이런 표현 이런 설교법이 은혜롭다고 생각한 지방 교회 무식한 목사가 그 방법과 그 표현을 그대로 옮긴다고 할 때 그 목사님보다야 녹음기가 훨씬 잘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녹음기는 정확무오하게 설교를 옮길 수는 있으나 성령은 그 기계를 기계로 사용하지 인격체로 붙들어 인격체를 통할 때 역사하는 그런 산 역사를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를 배껴서 옮기는 것만 문제면 녹음기가 좋으나 그 옮기는 목사님이 옮길 때 자기 인격과 충성이 들어 가야 하기 때문에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를 열심히 읽고 이해를 하고 깨닫고, 만일 그 분보다 더 나은 표현이 있다면 그렇게 하되 한 목사님의 그 방법과 그 표현보다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없다면 그대로 옮겨야 하고 옮길 때는 옮기는 목사님이 그 말씀에 먼저 은혜를 받고 그 말씀으로 자기를 만들고 그리고 전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옮겨 진 것은 누구의 것인가? 사회의 표절법으로 보면 표절입니다. 복음의 원리로 본다면 그 것은 한 목사님의 것인 동시에 옮긴 그 목사님의 것입니다. 공동 소유가 됩니다. 원 저자는 성령입니다. 이 것이 세상 모든 것과 다른 목회자의 설교 세계입니다. 진리를 전해야 하되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하는 우리의 세계입니다.

- 독창적이란 당연한 것이나, 함부로 시도할 수 없으니
걸음마를 배우는 것이야 수만 번을 넘어 져 가며 배우나 핵실험이란 아무나 해 놓고 본다면 처참한 재앙이 생깁니다. 진리의 복음을 중고교생 웅변 연습처럼 아무나 독창적 연설을 시도하듯 할 수 있는가? 의과대학의 새로운 심장 수술 기법을 인턴들이 레지던트들이 아무 칼이나 붙들고 대통령 심장이든 외과 교수 심장이든 자기만의 기법으로 아이디어로 도전 정신으로 마구 헤집어 봐도 되는 사안일까? 의대의 수술을 이론으로 수 없이 배우고 암기하고, 견습으로 지켜 보고 시키는 대로 연습하고 그대로 흉내 내기를 마치 자기 본능처럼 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많은 임상 실습을 거친 다음에 이런 방법이 어떨지? 시도를 해 보는 것입니다. 그 시도조차 동물 실험이나 여러 동료와 학회에서 토론을 벌여 가며 조심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세발 자전거 패달 돌리기는 어떤 방법이든 시도부터 해 볼 수 있으나 심장이나 뇌 수술은 무조건 배끼기를 해서 그 방면에 달인이 된 다음에 지금까지 시도해 보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또 한 번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진리의 복음,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설교가 중고교생의 웅변연습이라면 무슨 말이라도 어떤 표현이라도 입에 담고 외쳐 보고 그리고 나서 평가를 받아 수정을 해도 되겠지만 목사의 강단 설교는 차원이 다릅니다. 영생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한 걸음씩 떨며 걸어 가야 하는 길입니다. 어느 날 성령이 붙들어 한 시대를 깨치는 예언을 주신다면 거침 없이 외쳐야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리 목사들의 강단이란 우리 스스로 너무 부족하여 사실 설 수도 없는데 달리 설 사람이 없어 할 수 없어 밀려서 올라 간 자리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좋은 설교법은 목사가 가장 은혜롭게 듣고 배운 설교를 최대한 그대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대로 옮기다 보면 자기 교회 형편에 맞는 표현 하나가 더해 질 수 있고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나아 가는 것입니다.

5. 물론
현재 설교의 표절을 지적하는 다음 글과 몇몇 사람들은 이런 상식을 다 알지만 이런 상식을 이용해서 오히려 배껴다 옮기는 것이 대학의 구내 서점에 복사집의 장사 심보로 옮기는 목회자를 지적한다고 이해를 합니다.

공회는 이런 설교 표절 문제를 두고도 원천적으로 타 교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전국의 모든 목회자가 백 목사님의 설교를 한 자도 빠지지 않으려고 모두 필기에 매진했고, 모든 교인들도 함께 그렇게 했고, 그리고 각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할 때 목회자는 한 자라도 실수할까 싶어 읽었고 교인들은 목회자가 필기를 잘못 한 부분이 있는지 살폈고 잘못이 있다면 설교 중에라도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멋 모르는 사람들은 공회 강단과 설교에는 독창성이 없고 발전이 없으며 생명력이 없다고 비판을 했으나 우리는 그들을 향해 진리의 세계가 얼마나 두려운지를 모르니 너희들은 혹시 불신자가 아니냐고 의심을 했고 그들이 말하는 독창적이란 복음 파괴나 허물기 경쟁이 아닐까 염려를 했습니다. 서로가 초창기에는 말싸움만 있고 결과를 쉽게 보기 어려웠습니다. 세월은 흘러 갔고 오늘 이 글을 적는 2014년 시점은 백 목사님의 설교 세계란 일반 목회자들에게는 너무 깊고 높아서 수십 년을 그대로 배끼며 옮기며 흉내를 내면서 느껴 보고 그리고 나서 한 걸음씩 응용으로 나가는 차원임이 교계적으로도 알려 져 있습니다.

최근에 백 목사님 설교에도 저작권이 있어 자녀들은 그 상속권을 갖는다는 주장이 법원에서 구체적으로 제기 되었습니다. 복음도 진리도 하나님도, 이 노선도 설교의 세계도 모르는 분들의 주장입니다. 더구나 백영희라는 이름이 누군지 어떤지 근방에도 가 보지 못한 분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알파벳으로는 적을 수 있고 설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분의 신앙 내면은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어서 나온 주장입니다. 공회는 목회자든 주교반사든 응용이나 독창적인 발전을 해야 하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은혜 되는 설교를 철저히 따라 하고 배끼고 토씨 하나도 조심해서 그대로 옮기라고 가르친 곳입니다. 저작권의 세계가 처음부터 적용이 되지 않는 세계입니다. 사실 모든 교단에 다 적용 될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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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설교를 어찌 하랴!


2014.01.25

편집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23일 발표한 성명에서 "인터넷은 서로를 연결해주고 결속하는 어마어마한 기회를 제공한다."며 "이는 매우 좋은 현상이고,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2천년 전 팔레스틴의 촌 구석을 누비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12:3)

현대는 인터넷의 시대이다. 휴대전화기도 인터넷이 안 되는 것은 없을 정도로 조그만 아이에서 노인들까지 모두 스마트폰을 쓴다. 스마트폰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며 산다. 장보기에서부터 교육이나 집안 관리까지...

그 스마트폰에 세계가 들어있다. 얼마나 많은 정보들을 쌓아놓고 사람들이 방문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빠져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정치, 경제, 문화, 보건, 의료등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분야에서 변혁을 이뤄내고 있다. 인터넷이 비단 사회만 변화시키고 있을 뿐이겠는가? 교회도 그 예외는 아니다. 지금은 누가 어디서 방귀만 뀌어도 전국에서 동시에 그 소리를 듣고 있다고 응답하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도 현장을 방문해서 지식을 얻는 효과를 얻게 되고 속사정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교회의 정치,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어둡던 시절 엄청난 악성 부채를 안고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부비다 결국 부도를 냈던 복음병원의 일은 이제 옛말이 되고 있다. 골방에서 한 말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주님은 2천 년 전에 이미 그것을 아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교회의 목사가 표절 설교를 한다는 글이 토론방에 올라왔다. 지난 6년간 그랬다는 이야기다. 그는 한술 더 떠서 아예 카페를 만들어 수천편의 설교를 올려놓고 누구든지 가입비를 내고 회원이 되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남의 설교로 장사를 하고 있다는 셈이다.

어차피 모든 설교는 모방 설교이니 좋은 설교를 골라 전하면 매부 좋고 누이 좋고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지론인 것 같다. 물론 전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묘한 거짓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설교는 목회자가 교인의 형편을 살펴 병든 부분은 치유하고, 약한 부분은 격려하면서 세상을 이길 능력을 가지도록 교육하는 복합적인 기능이다. 그러므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본인이 전해야 하고 전하고자 하는 말을 본인의 말로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듣기 좋은 설교를 골라 표절하는 것은 도적질이요, 좋은 말만 들려주므로 교인을 더 병들게 하거나, 격려가 필요한 사람을 더 우울하게 만들 수 있는 독초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문앞에 있는데 평안하다 평안하다면서 백성들의 환심을 샀던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의 행태이다.

이는 또한 자신의 노력 없이 남에게 빌붙어 밥 빌어 먹고 살려는 삯군의 발상이다. 물론 모든 목사가 매번 자신만의 독창적인 설교를 한다는 것은 설교 횟수가 너무 많은 한국의 목회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잘 안다. 남의 설교를 많이 듣고 참고하는 것은 정말 좋은 습관이다. 하지만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자신의 설교를 해야 한다. 80% 이상을 남의 설교에 의지하는 것은 명백한 표절이다.

어떤 대형교회 목사는 학위논문에서 인용구절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인하여 표절논란에 휩싸여 곤욕을 겪었다. 그것도 단지 몇 구절 때문이다. 학위를 준 학교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문제를 삼았고 많은 목사들이 고소하다는 깨소금의 박수를 쳤다.

그런데 주일마다 하는 설교에서 매번 표절 설교를 한다면 그는 어떤 비난을 받아야 하고 노회나 총회는 어떤 제재를 가해야 하는지 묻고 싶다. 같은 목사이기 때문에 그냥 묻어주고 어물쩍 넘어가야 하는가?

아마도 그는 동영상도 없고 주보에 설교를 기록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 마디 중요한 단어만 검색창에 넣고 검색해 보라. 비슷한 설교문이 얼마나 많이 떠오르는지.

우리는 주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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