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시대를 보는 신앙의 자세
구남단2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14.04.19
이 글은 옮기지 마셨으면 합니다. 세상의 분노가 너무 뜨겁습니다. 이 노선을 이해하는 사람들끼리만 우리를 돌아 보는 글로 적었습니다.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자기를 돌아 봐야 '지혜'로운 대처가 생깁니다.
백 목사님은 생전 설교를 통해 우리 눈과 귀로 들리는 세상 소식에 대하여 핵심을 짚어 주셨습니다. 세상을 간섭하거나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이웃 나라의 소식을 접하며 믿는 우리가 그 나라를 여행할 때 주의할 점을 깨우쳐 주었고, 또 그 나라 사람과 우리 속에 들어 있는 바탕이 같으므로 우리 속에서 우리를 노리는 우리 옛 사람의 여러 면을 가르쳤습니다.
그 때를 추억하며 오늘을 살펴 봅니다.
지금 250여 명의 목숨이 달린 초대형 사고 앞에 모두들 자기를 빼고 다른 사람들만 지목하는 뉴스로 가득 차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인이며 특히 이 노선의 사람들이므로 가장 먼저 자기를 돌아 봅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이런 일을 대할 때는 사건의 가해자야 원래 죄악 세상 안에서도 죄인으로 정죄가 되었고 모두가 그 죄상을 낱낱이 밝혀 내고 있으니 그들의 죄는 세상에게 맡기고, 우리는 신앙인이니 우리가 피해자였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을 적는 제가 이 번 사건의 피해 학생의 부모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470여 명이 타고 가던 배가 침몰하고 현재 300여 명이 사망할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이 한 사건을 놓고 우리 사회의 전체 시각과 표현은 거의 같습니다. 초대형 사고를 우습게 낸 과정에 숱한 문제점이 밝혀 지며, 운항 책임자들이 승객을 버리고 먼저 도피하였으며, 18세 꽃다운 자식들을 잃게 된 부모들의 분노는 지금 어느 한 곳에서라도 건들이면 그 쪽으로 대폭발을 일으킬 참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언론이 바람을 잡고 민심이 한 방향으로 출렁입니다. 이쯤 되면 성난 군중의 민심은 이성을 잃고 순식간에 대폭발을 일으키며 우리 사회를 또 한 번 살라 버릴 폭풍의 전야입니다. 이 노선의 시각에서 살핀다면,
1. 이 좋은 4월에 금쪽 같이 귀한 외동을 밖에 내놓은 것이 잘못입니다.
못 살 때는 학교가 단체로 여행을 가야 가난한 집 아이들이 평소 또는 평생 갈 수 없는 곳을 가 보게 됩니다. 지금은 주말 여행 삼아 갈 수 있는 곳이 제주도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데리고 나간다면 본능적으로 안전에 최선을 다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지키지 못한 자식을 남이 대신 잘 지켜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오산입니다. 상대가 경찰 소방 군과 같은 특수 분야면 몰라도 일반 여행사나 운송 회사에 맡겼다면 처음부터 재미 있게 노는 것에 전문가지 안전의 전문가일 리는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18세 학생들인데 그 귀한 자식들, 다 키워 놓은 그 귀한 보물들을 왜 그 위험한 바다에 덜렁 내 던졌을까?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위험한 곳에 보내며 부모로서 방심한 자신들을 먼저 돌아 볼 시간입니다. 이 일은 이 번 일로 끝나지 않을, 우리의 생활 속에 흔하고 흔한 방심 사례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소위 '사범대를 나온 정규 교사 자격증'을 믿었을까? 그 자격증은 교실에서 선행 학습을 하는 데 필요하지 그 자격증이 제주도를 향해 가는 거친 바다 위에 철선의 안전 운항과 위험 할 때 구난을 해 주는 자격증으로 혹시 착각을 했을까? 대한민국의 고교 2학년의 학부모라면 그런 착각을 했을 리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스승 목사님은 생전에 먼 길을 가는 사람에게 고속버스도 위험하다며 웬만하면 철도를 이용하도록 권했습니다. 안전면에서는 확실하게 낫기 때문입니다. 1987년에 미국의 중학교 다니는 남 손주 2명이 여름 집회를 참석하려고 부산을 왔을 때 그 유명한 해운대 바다로 해수욕을 가겠다고 하자 그들의 안내를 맡고 있던 제게 '교회 뒤에 있는 구덕산 계곡에 가서 시냇물에 발목을 담그다가 오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목사님께 '손주들이 미주리 출신들인데 바다가 없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바다 구경을 못해 봤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자 '그러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붙여서 허벅지보다 깊은 곳으로 가거든 꺼집어 내는 조건으로 데려 가라'고 했습니다.
손주가 해운대 백사장에서 빠져 죽을 확률은 100만 분의 1 이하입니다. 여름 성수기에는 해양경찰이 곳곳에서 감시를 하기 때문에 매일 1 명이라도 죽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100만 분의 1의 확률 이하로 안전하다 해도 만일 내 아이가 죽게 된다면 이 것은 확률로 다가 설 문제가 아닙니다.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우리 목숨과 앞 날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택권이 주어 진다면 우리가 아는 대로는 조심하는 것이 주님이 자기에게 맡겨 놓은 하나뿐인 생명을 귀한 줄 아는 사람입니다. 스승 목사님은 조심스런 분입니다. 아니, 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그런 부탁을 들으며 그 부탁을 철저하게 이행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스승 목사님을 옆에서 지켜 보며 배워서 그런지, 그 분의 막내 아드님이 1997년 10월 7일 10시에 서대전 역에서 만나 자기 외아들을 예일대 기숙사에 데려다 주면서 탈출용 로프를 따로 사서 주고 온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미국이니, 예일대니, 그들의 안전 의식과 대처가 어느 정도겠습니까만 화재가 복도에서 발생하고 창문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가정 하에 그 방의 구조를 둘러 봤을 때 비상용 로프는 따로 마련했어야 했다고 했습니다. 이 번 사고를 지켜 보며 그 분의 그 조처를 그 때는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주변에서는 이런 면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아직도 먼 것 같습니다.
공회의 안전 의식은 이 정도입니다. 주를 위해서는 죽을 동 살 동 모르고 쫓아 다니며 어떤 위험도 감수합니다. 그 길에서는 죽으면 순교가 되고 살면 능력이 될 복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돈을 벌러 가거나 놀러 다니고 인사를 다니는 일은, 우리 믿는 사람이 그런 일을 하다가 다치고 죽고 사고를 만난다면 헛된 죽음이니 늘 자기가 할 일을 두고 과연 해야 하는지를 먼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불신자라도 마찬 가지입니다.
믿지 않고 죽으면 구원이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그들에게 주어 진 그들의 한 번뿐인 웃을 기회며 누릴 기회입니다. 그들에게 위험이 닥칠 수 있는 일을 알면서도 해야 할 일은 알고 보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고교 2학년이라니 공부에 집중할 이 좋은 4월에 '학생'의 이름을 가진 아이들을 공부만 시켜도 바쁜데 한 학교 학생 전부를 저 멀리 보냈다는 것을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가난하던 시절에는 수학여행 이름으로 학교가 단체로 가지 않으면 평생 가 볼 수 없는 곳들이 허다했습니다. 지금은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주말마다 전국 곳곳을 다닐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이 다녀서 학생인지 노는 아이들인지 분간을 할 수 없는 시대인데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일제 여행 방식을 21세기에도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이며 각 부모는 학교나 사회가 보통 하는 일에는 무조건 해 놓고 보는 습성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또한 배를 태워 인천에서 제주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을 가다 보면 만의 하나 문제가 생기면 초상을 칠 수 있는 위험한 여행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 아는 일입니다. 대한민국은 대통령을 욕할 자유도 있는 나라입니다. 동성연애를 하면서도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자유의 나라입니다. 당연히 위험한 곳을 가자는 학교의 계획은 처음부터 반대할 수 있고, 전체 결정을 막지 못하면 빠질 자유가 있는 나라입니다. 누구를 믿고 보냈는가? 학교를! 교사를! 교육 제도를! 이 나라 선박 안전 운항 시스템을! 사고 후 현장으로 달려 가서 아이들을 구조 해 낼 해경을!
이 사건을 두고 안타까워 하며 비판을 하는 우리 전부는 이 나라의 공무원이며, 교사며, 택시나 버스 기사처럼 운전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 전체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공무원이 있다면 그는 이 나라 행정 체계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형식적임을.
우리 중에 택시나 버스 기사가 있다면 이 나라 기사들의 체질을 잘 압니다. 안전불감증을.
우리 중에 경찰이나 군인이나 소방관이 있다면 구조 체계를 더 잘 압니다. 얼마나 허술함을.
18세 아이들의 부모는 대개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인데 이만큼 세상을 살았으면 바다의 위험, 이런 대형 운송체의 위험 소식은 수 없이 듣고 보고 살았을 것입니다. 알면서, 막상 사고가 나자 누구를 원망하는가? 나를 먼저 돌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내 아이니 그 아이의 죽음이나 죽을 위기 앞에 제일의 죄인은 선장의 비열함이나 구조대의 미숙함이 아니라 아이의 부모인 바로 우리들입니다. 유치원에서 사고가 생겼다면 유치원 교사나 원장의 멱살을 잡기 전에 우리는 그 곳에 보낸 내 멱살을 잡아야 합니다. 대학에 보낸 아이가 MT에 갔다가 선배에게 맞아 죽었다면 그 선배를 처벌하기 전에 우리는 그런 학교에 보내며 내 아들이 그렇게 될 가능성을 미리 생각하지 못한 나를 스스로 처벌해야 합니다. 모름지기 위험한 줄 알고 승차를 하면 탑승자의 피해자 과실로 인한 보상 감액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자가용 시대의 보험 개념입니다.
2. 지금 온 나라는 누구 하나를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면 지성인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문화국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18세 아이가 죽은 것은 하늘이 무너 질 일입니다. 이 일을 두고 저는 제 아이를 그 곳에 보낸 저를 먼저 지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 나라 모든 부모들에게 귀한 아이들을 위험한 곳에 함부로 보내지 않도록 호소를 해야 순서가 될 듯합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 전체가 자기 직업과 자기 주변과 자기 평소 생활에서 안전 수칙을 생활화 해야 합니다. 순서를 이렇게 밟아 나가면 현재 솟구치는 분을 누를 길은 없으나 앞으로는 이런 일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토요일의 전국 고속도로에 안전 속도를 지키는 차량들이 있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우리가 그 배의 선장이며 선원들입니다. 우리 전체의 수준과 평소 행동이 이러니 이 번 여객선에서 발생한 사고 가운데 우리 아이들을 살려 낼 우리의 수준이 이 모양으로 드러 난 것입니다. 현재 오열하는 부모님들도 대부분 자기의 전문 분야나 자신의 거주지 주변에서 다른 사람의 안전 문제를 두고 우리 평균과 그렇게 큰 차이가 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목욕탕을 가 보면 자기가 사용한 수도꼭지와 비누와 앉은 곳을 정리하고 일어 서는 분을 본 적은 없습니다. 저도 사실 치우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살아 왔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쯤 어느 뉴스에서 일본 관광객들을 모시는 안내원이 그들이 한국의 대중목욕탕을 사용하면 반드시 자기 앉은 자리를 깔끔하게 치우더라고 글을 적었고 그 글을 읽은 다음부터 제 행동도 바뀌었습니다. 60 년을 건너다 보는 나이가 되도록 저도 그러했습니다. 이 것이 우리입니다. 이 사고가 우리의 생활 속에 젖어 있는 우리의 잘못 된 모습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신앙까지도 이렇다면 이 것은 이 세상에서 끝 날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문제입니다.
3. 지금 누구 하나 잡으려고 모두들 혈안이 된 듯합니다.
울고 싶은데 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 전부가 울분에 찬 이 상황에서 누구라도 하나 걸렸다 하면 다시는 일어 서지 못할 민심의 직격탄을 맞을 듯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선은 마음에 보복심을 풀 수 있어 좀 개운해 질 수 있습니다. 이 번에 사고를 낸 선장과 관련자들을 조선시대 사형법을 소급 적용 시켜 전 국민이 보는 가운데 참형을 시키거나 북한 식으로 기관포를 발사한다면 부모님들의 마음은 좀 위로가 되고 우리 전체의 울분을 식히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방식은 로마를 불질러 놓고 기독교인을 지목하여 분을 푼 네로 식입니다. 동경 대지진에 조선인을 학살했던 일제 방식입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이 번의 울분을 풀면 틀림 없이 앞으로 또 그런 일을 반복할 민족입니다.
냉정하게 철저하게 잘 살펴 반성을 하되 그 반성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며 이 노선입니다. 이 번 사고도 다른 사고도 그 어떤 경우라도 늘 인생사의 어려움과 재난이라는 것은 그렇게 푸는 것입니다.
4. 이제 신앙인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 번 학생들의 대참사를 보며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보통 다른 일을 겪거나 접할 때는 그렇게 크게 느끼지 않습니다. 아니, 느끼지 않도록 제가 제 마음을 미리 단속을 합니다. 북한 동포 수백 만 명이 굶어 죽었다 하던 시기에도 온 나라가 떠들었으나 저는 그냥 지나 쳤습니다. 그런데 이 번 일을 두고는 '저 학생들이 18 년 동안을 효도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을 터인데, 이대로 간다면 이 세상에 왔다가 역사 제일 풍요로운 시대를 즐기기만 했지 사람으로 제 부모를 위해 효도 한 번 해 보지 않고 가는 불행한 사람이 되겠다'는 안타까움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이니 자연히 다음 단계를 생각합니다. 저 아이들 중에 적지 않은 학생들은 불신자일 것인데 이렇게 간다면 구원의 기회가 없어 안 되겠다고 생각하니 더욱 절박했습니다. 또 믿는 학생이라면 교회를 거의 다 놀러 다니듯 다녔지 제대로 은혜 생활을 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 지금 이대로 서게 되면 지옥 갈 불택자든지, 천국에는 가게 되나 사람 노릇해 볼 기회가 없었든지 아니면 제대로 신앙의 건설을 할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다른 사고와 달리 기도가 많이 나왔습니다. 이 번에는 어떻게 하시든 살려 주셔서 남은 세월은 저들이 이 번 사고 전과 비교할 때 정신을 차리고 인간답게 살고 신앙인답게 살 기회를 주시도록. 이왕이면 이 노선의 귀한 사람이 될 기회까지 주셔서 이 번의 구사일생이 한 번은 죽어야 하는 육체의 생명이 연장 되는 그런 무가치 한 데 그치지 않고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를 할 때는 힘이 납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가지고 저들을 살릴지 아니면 이 기도를 가지고 그들이 아니라 기도하는 우리를 살릴지.
같은 소식을 들으며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식이 만의 하나라도 저렇게 될까 싶어 한 번 더 먹이고 한 번 더 입히고 한 번 더 보듬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만의 하나 저리 된다면 18년동안 인간 노릇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상태로 주님 앞에 보낼 수는 없다 싶어 이런 소식을 듣는 이 순간에 시급하게 아이들에게 땀 흘려 돈 버는 부모의 고생을 체험하게 하거나, 부모가 번 돈을 한 푼이라도 아낌으로 효도의 작은 한 발을 딛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소식을 듣고 같은 하늘에 살면서 한 사람은 이리 되고 한 사람은 저리 될 것입니다. 이 노선의 우리는 이런 소식을 들으며 사람이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학교 하루를 빼도 성경 한 장을 더 읽히고, 학교 한 주간을 빼도 집회 한 주간은 참석을 시켜야 하겠다는 방향으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과거 세상이 다 함께 놀랄 일이 생길 때마다 스승 목사님이 한 마디로 요약하며 눈을 열어 주던 때를 그리며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자기를 돌아 봐야 '지혜'로운 대처가 생깁니다.
백 목사님은 생전 설교를 통해 우리 눈과 귀로 들리는 세상 소식에 대하여 핵심을 짚어 주셨습니다. 세상을 간섭하거나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이웃 나라의 소식을 접하며 믿는 우리가 그 나라를 여행할 때 주의할 점을 깨우쳐 주었고, 또 그 나라 사람과 우리 속에 들어 있는 바탕이 같으므로 우리 속에서 우리를 노리는 우리 옛 사람의 여러 면을 가르쳤습니다.
그 때를 추억하며 오늘을 살펴 봅니다.
지금 250여 명의 목숨이 달린 초대형 사고 앞에 모두들 자기를 빼고 다른 사람들만 지목하는 뉴스로 가득 차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인이며 특히 이 노선의 사람들이므로 가장 먼저 자기를 돌아 봅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이런 일을 대할 때는 사건의 가해자야 원래 죄악 세상 안에서도 죄인으로 정죄가 되었고 모두가 그 죄상을 낱낱이 밝혀 내고 있으니 그들의 죄는 세상에게 맡기고, 우리는 신앙인이니 우리가 피해자였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을 적는 제가 이 번 사건의 피해 학생의 부모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470여 명이 타고 가던 배가 침몰하고 현재 300여 명이 사망할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이 한 사건을 놓고 우리 사회의 전체 시각과 표현은 거의 같습니다. 초대형 사고를 우습게 낸 과정에 숱한 문제점이 밝혀 지며, 운항 책임자들이 승객을 버리고 먼저 도피하였으며, 18세 꽃다운 자식들을 잃게 된 부모들의 분노는 지금 어느 한 곳에서라도 건들이면 그 쪽으로 대폭발을 일으킬 참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언론이 바람을 잡고 민심이 한 방향으로 출렁입니다. 이쯤 되면 성난 군중의 민심은 이성을 잃고 순식간에 대폭발을 일으키며 우리 사회를 또 한 번 살라 버릴 폭풍의 전야입니다. 이 노선의 시각에서 살핀다면,
1. 이 좋은 4월에 금쪽 같이 귀한 외동을 밖에 내놓은 것이 잘못입니다.
못 살 때는 학교가 단체로 여행을 가야 가난한 집 아이들이 평소 또는 평생 갈 수 없는 곳을 가 보게 됩니다. 지금은 주말 여행 삼아 갈 수 있는 곳이 제주도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데리고 나간다면 본능적으로 안전에 최선을 다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지키지 못한 자식을 남이 대신 잘 지켜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오산입니다. 상대가 경찰 소방 군과 같은 특수 분야면 몰라도 일반 여행사나 운송 회사에 맡겼다면 처음부터 재미 있게 노는 것에 전문가지 안전의 전문가일 리는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18세 학생들인데 그 귀한 자식들, 다 키워 놓은 그 귀한 보물들을 왜 그 위험한 바다에 덜렁 내 던졌을까?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위험한 곳에 보내며 부모로서 방심한 자신들을 먼저 돌아 볼 시간입니다. 이 일은 이 번 일로 끝나지 않을, 우리의 생활 속에 흔하고 흔한 방심 사례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소위 '사범대를 나온 정규 교사 자격증'을 믿었을까? 그 자격증은 교실에서 선행 학습을 하는 데 필요하지 그 자격증이 제주도를 향해 가는 거친 바다 위에 철선의 안전 운항과 위험 할 때 구난을 해 주는 자격증으로 혹시 착각을 했을까? 대한민국의 고교 2학년의 학부모라면 그런 착각을 했을 리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스승 목사님은 생전에 먼 길을 가는 사람에게 고속버스도 위험하다며 웬만하면 철도를 이용하도록 권했습니다. 안전면에서는 확실하게 낫기 때문입니다. 1987년에 미국의 중학교 다니는 남 손주 2명이 여름 집회를 참석하려고 부산을 왔을 때 그 유명한 해운대 바다로 해수욕을 가겠다고 하자 그들의 안내를 맡고 있던 제게 '교회 뒤에 있는 구덕산 계곡에 가서 시냇물에 발목을 담그다가 오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목사님께 '손주들이 미주리 출신들인데 바다가 없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바다 구경을 못해 봤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자 '그러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붙여서 허벅지보다 깊은 곳으로 가거든 꺼집어 내는 조건으로 데려 가라'고 했습니다.
손주가 해운대 백사장에서 빠져 죽을 확률은 100만 분의 1 이하입니다. 여름 성수기에는 해양경찰이 곳곳에서 감시를 하기 때문에 매일 1 명이라도 죽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100만 분의 1의 확률 이하로 안전하다 해도 만일 내 아이가 죽게 된다면 이 것은 확률로 다가 설 문제가 아닙니다.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우리 목숨과 앞 날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택권이 주어 진다면 우리가 아는 대로는 조심하는 것이 주님이 자기에게 맡겨 놓은 하나뿐인 생명을 귀한 줄 아는 사람입니다. 스승 목사님은 조심스런 분입니다. 아니, 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그런 부탁을 들으며 그 부탁을 철저하게 이행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스승 목사님을 옆에서 지켜 보며 배워서 그런지, 그 분의 막내 아드님이 1997년 10월 7일 10시에 서대전 역에서 만나 자기 외아들을 예일대 기숙사에 데려다 주면서 탈출용 로프를 따로 사서 주고 온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미국이니, 예일대니, 그들의 안전 의식과 대처가 어느 정도겠습니까만 화재가 복도에서 발생하고 창문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가정 하에 그 방의 구조를 둘러 봤을 때 비상용 로프는 따로 마련했어야 했다고 했습니다. 이 번 사고를 지켜 보며 그 분의 그 조처를 그 때는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주변에서는 이런 면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아직도 먼 것 같습니다.
공회의 안전 의식은 이 정도입니다. 주를 위해서는 죽을 동 살 동 모르고 쫓아 다니며 어떤 위험도 감수합니다. 그 길에서는 죽으면 순교가 되고 살면 능력이 될 복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돈을 벌러 가거나 놀러 다니고 인사를 다니는 일은, 우리 믿는 사람이 그런 일을 하다가 다치고 죽고 사고를 만난다면 헛된 죽음이니 늘 자기가 할 일을 두고 과연 해야 하는지를 먼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불신자라도 마찬 가지입니다.
믿지 않고 죽으면 구원이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그들에게 주어 진 그들의 한 번뿐인 웃을 기회며 누릴 기회입니다. 그들에게 위험이 닥칠 수 있는 일을 알면서도 해야 할 일은 알고 보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고교 2학년이라니 공부에 집중할 이 좋은 4월에 '학생'의 이름을 가진 아이들을 공부만 시켜도 바쁜데 한 학교 학생 전부를 저 멀리 보냈다는 것을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가난하던 시절에는 수학여행 이름으로 학교가 단체로 가지 않으면 평생 가 볼 수 없는 곳들이 허다했습니다. 지금은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주말마다 전국 곳곳을 다닐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이 다녀서 학생인지 노는 아이들인지 분간을 할 수 없는 시대인데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일제 여행 방식을 21세기에도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이며 각 부모는 학교나 사회가 보통 하는 일에는 무조건 해 놓고 보는 습성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또한 배를 태워 인천에서 제주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을 가다 보면 만의 하나 문제가 생기면 초상을 칠 수 있는 위험한 여행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 아는 일입니다. 대한민국은 대통령을 욕할 자유도 있는 나라입니다. 동성연애를 하면서도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자유의 나라입니다. 당연히 위험한 곳을 가자는 학교의 계획은 처음부터 반대할 수 있고, 전체 결정을 막지 못하면 빠질 자유가 있는 나라입니다. 누구를 믿고 보냈는가? 학교를! 교사를! 교육 제도를! 이 나라 선박 안전 운항 시스템을! 사고 후 현장으로 달려 가서 아이들을 구조 해 낼 해경을!
이 사건을 두고 안타까워 하며 비판을 하는 우리 전부는 이 나라의 공무원이며, 교사며, 택시나 버스 기사처럼 운전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 전체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공무원이 있다면 그는 이 나라 행정 체계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형식적임을.
우리 중에 택시나 버스 기사가 있다면 이 나라 기사들의 체질을 잘 압니다. 안전불감증을.
우리 중에 경찰이나 군인이나 소방관이 있다면 구조 체계를 더 잘 압니다. 얼마나 허술함을.
18세 아이들의 부모는 대개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인데 이만큼 세상을 살았으면 바다의 위험, 이런 대형 운송체의 위험 소식은 수 없이 듣고 보고 살았을 것입니다. 알면서, 막상 사고가 나자 누구를 원망하는가? 나를 먼저 돌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내 아이니 그 아이의 죽음이나 죽을 위기 앞에 제일의 죄인은 선장의 비열함이나 구조대의 미숙함이 아니라 아이의 부모인 바로 우리들입니다. 유치원에서 사고가 생겼다면 유치원 교사나 원장의 멱살을 잡기 전에 우리는 그 곳에 보낸 내 멱살을 잡아야 합니다. 대학에 보낸 아이가 MT에 갔다가 선배에게 맞아 죽었다면 그 선배를 처벌하기 전에 우리는 그런 학교에 보내며 내 아들이 그렇게 될 가능성을 미리 생각하지 못한 나를 스스로 처벌해야 합니다. 모름지기 위험한 줄 알고 승차를 하면 탑승자의 피해자 과실로 인한 보상 감액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자가용 시대의 보험 개념입니다.
2. 지금 온 나라는 누구 하나를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면 지성인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문화국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18세 아이가 죽은 것은 하늘이 무너 질 일입니다. 이 일을 두고 저는 제 아이를 그 곳에 보낸 저를 먼저 지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 나라 모든 부모들에게 귀한 아이들을 위험한 곳에 함부로 보내지 않도록 호소를 해야 순서가 될 듯합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 전체가 자기 직업과 자기 주변과 자기 평소 생활에서 안전 수칙을 생활화 해야 합니다. 순서를 이렇게 밟아 나가면 현재 솟구치는 분을 누를 길은 없으나 앞으로는 이런 일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토요일의 전국 고속도로에 안전 속도를 지키는 차량들이 있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우리가 그 배의 선장이며 선원들입니다. 우리 전체의 수준과 평소 행동이 이러니 이 번 여객선에서 발생한 사고 가운데 우리 아이들을 살려 낼 우리의 수준이 이 모양으로 드러 난 것입니다. 현재 오열하는 부모님들도 대부분 자기의 전문 분야나 자신의 거주지 주변에서 다른 사람의 안전 문제를 두고 우리 평균과 그렇게 큰 차이가 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목욕탕을 가 보면 자기가 사용한 수도꼭지와 비누와 앉은 곳을 정리하고 일어 서는 분을 본 적은 없습니다. 저도 사실 치우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살아 왔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쯤 어느 뉴스에서 일본 관광객들을 모시는 안내원이 그들이 한국의 대중목욕탕을 사용하면 반드시 자기 앉은 자리를 깔끔하게 치우더라고 글을 적었고 그 글을 읽은 다음부터 제 행동도 바뀌었습니다. 60 년을 건너다 보는 나이가 되도록 저도 그러했습니다. 이 것이 우리입니다. 이 사고가 우리의 생활 속에 젖어 있는 우리의 잘못 된 모습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신앙까지도 이렇다면 이 것은 이 세상에서 끝 날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문제입니다.
3. 지금 누구 하나 잡으려고 모두들 혈안이 된 듯합니다.
울고 싶은데 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 전부가 울분에 찬 이 상황에서 누구라도 하나 걸렸다 하면 다시는 일어 서지 못할 민심의 직격탄을 맞을 듯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선은 마음에 보복심을 풀 수 있어 좀 개운해 질 수 있습니다. 이 번에 사고를 낸 선장과 관련자들을 조선시대 사형법을 소급 적용 시켜 전 국민이 보는 가운데 참형을 시키거나 북한 식으로 기관포를 발사한다면 부모님들의 마음은 좀 위로가 되고 우리 전체의 울분을 식히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방식은 로마를 불질러 놓고 기독교인을 지목하여 분을 푼 네로 식입니다. 동경 대지진에 조선인을 학살했던 일제 방식입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이 번의 울분을 풀면 틀림 없이 앞으로 또 그런 일을 반복할 민족입니다.
냉정하게 철저하게 잘 살펴 반성을 하되 그 반성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며 이 노선입니다. 이 번 사고도 다른 사고도 그 어떤 경우라도 늘 인생사의 어려움과 재난이라는 것은 그렇게 푸는 것입니다.
4. 이제 신앙인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 번 학생들의 대참사를 보며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보통 다른 일을 겪거나 접할 때는 그렇게 크게 느끼지 않습니다. 아니, 느끼지 않도록 제가 제 마음을 미리 단속을 합니다. 북한 동포 수백 만 명이 굶어 죽었다 하던 시기에도 온 나라가 떠들었으나 저는 그냥 지나 쳤습니다. 그런데 이 번 일을 두고는 '저 학생들이 18 년 동안을 효도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을 터인데, 이대로 간다면 이 세상에 왔다가 역사 제일 풍요로운 시대를 즐기기만 했지 사람으로 제 부모를 위해 효도 한 번 해 보지 않고 가는 불행한 사람이 되겠다'는 안타까움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이니 자연히 다음 단계를 생각합니다. 저 아이들 중에 적지 않은 학생들은 불신자일 것인데 이렇게 간다면 구원의 기회가 없어 안 되겠다고 생각하니 더욱 절박했습니다. 또 믿는 학생이라면 교회를 거의 다 놀러 다니듯 다녔지 제대로 은혜 생활을 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 지금 이대로 서게 되면 지옥 갈 불택자든지, 천국에는 가게 되나 사람 노릇해 볼 기회가 없었든지 아니면 제대로 신앙의 건설을 할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다른 사고와 달리 기도가 많이 나왔습니다. 이 번에는 어떻게 하시든 살려 주셔서 남은 세월은 저들이 이 번 사고 전과 비교할 때 정신을 차리고 인간답게 살고 신앙인답게 살 기회를 주시도록. 이왕이면 이 노선의 귀한 사람이 될 기회까지 주셔서 이 번의 구사일생이 한 번은 죽어야 하는 육체의 생명이 연장 되는 그런 무가치 한 데 그치지 않고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를 할 때는 힘이 납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가지고 저들을 살릴지 아니면 이 기도를 가지고 그들이 아니라 기도하는 우리를 살릴지.
같은 소식을 들으며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식이 만의 하나라도 저렇게 될까 싶어 한 번 더 먹이고 한 번 더 입히고 한 번 더 보듬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만의 하나 저리 된다면 18년동안 인간 노릇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상태로 주님 앞에 보낼 수는 없다 싶어 이런 소식을 듣는 이 순간에 시급하게 아이들에게 땀 흘려 돈 버는 부모의 고생을 체험하게 하거나, 부모가 번 돈을 한 푼이라도 아낌으로 효도의 작은 한 발을 딛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소식을 듣고 같은 하늘에 살면서 한 사람은 이리 되고 한 사람은 저리 될 것입니다. 이 노선의 우리는 이런 소식을 들으며 사람이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학교 하루를 빼도 성경 한 장을 더 읽히고, 학교 한 주간을 빼도 집회 한 주간은 참석을 시켜야 하겠다는 방향으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과거 세상이 다 함께 놀랄 일이 생길 때마다 스승 목사님이 한 마디로 요약하며 눈을 열어 주던 때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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