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구남단2

격화 되는 설교 표절 시비, 절벽에서 등을 떠 미는 해결책

구남단2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14.09.08
세상이 지성화 되고 밝아 지면서 과거에는 법 축에도 들지 못한 지적재산권이 온 세상의 중심에 선 느낌입니다. 장관들 임명을 두고 과거 남의 글 좀 배꼈다고 줄줄이 사직을 하는 모습에 중요한 사회 인사들이 이런 문제에 휘말리면 바로 끝장이 나는 경우가 흔해 졌습니다.

이 나라에 친일파 아닌 부모를 가진 이들이 거의 없었고, 이 나라에 세금 절도가 아닌 부모와 아닌 본인이 거의 없었듯이, 이 나라에 지적재산권에 도둑 아닌 이들은 제 상식으로는 거의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 숙제 배끼기를 도적이라고 생각했거나 자기 부모가 숙제를 도와 준 것이 표절이나 커닝이나 수험생 바꿔치기라는 범죄로 생각하지 않았고 이 것이 우리 전체의 모습이었습니다. 1천 명에 1 명 정도의 정직자가 있었다면 그는 999 명의 도적들이 난동을 하는데 그들을 고발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범죄를 방조한 죄에는 해당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적재산권이나 표절의 문제를 우리가 진지하게 상대하려면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엄단할지를 먼저 알리고 그리고 나서 집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언론권이나 사법권이나 정권을 가진 쪽에서 상대방만 난도질하는 현재 상황은 큰 도적이 작은 도적 잡는 꼴입니다. 요즘도 고속도로를 가면서 심심찮게 노상에서 소변 보는 신사들을 봅니다. 80년대 초반까지 우리 나라 전국의 대로에는 그런 일이 허다했고 1990년대까지도 고속도로 휴게소 풀밭에 아주머니들이 치마로 커텐을 치고 주저 앉아 해결하는 것은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문화나 의식이 그러했고 우리의 시설이 부족했고 우리 전부가 꼭 같았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설교 표절을 두고 지금 언론에서 남을 비판하는 이들을 향해 그들의 초등학교 때의 숙제부터 도로에 침뱉기와 아파트 좁은 진입로의 노란색 중앙선을 가로 지른 흔적을 조사하여 남을 정죄한 것 그대로 정죄한다면 그 누구도 돌을 들 수는 없을 듯합니다. 이제는 이렇게 세상이 바뀌었으니 이제부터는 책임을 무겁게 지운다는 면을 강조하여 고쳐 나가면 좋겠습니다. 살인죄는 과거부터 우리가 큰 죄인 줄 알고 우리 거의 전부가 그런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 살인범이 발각 되면 어떤 처벌을 해도 이해를 할 수 있지만 우리 전부가 꼭 같이 지은 죄를 두고 갑자기 언론과 사법과 정권을 가진 쪽이 떠들면 참으로 당황스럽습니다.


지금 설교 표절을 보며 가장 크게 느끼는 점은 설교를 표절하는 사람이 아니라 설교 표절을 비판하는 사람의 문제점입니다. 교인들에게 자기가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설교를 소개하는 사람은 자기 젖이 없던 옛날 어머니들이 자기 아이를 옆 집 젖 많은 분들에게 젖 동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얻어서라도 아이를 먹인다면 어머니 실력은 부족해도 어머니 모정은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것은 노력해서 쟁취할 수 있어도 설교의 은혜 면은 쟁취하여 얻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약간의 개선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배껴서 교인들에게 전하는 분들이 자기가 직접 만든 것이라는 말만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느 분의 설교가 은혜로운데 그리 알고 은혜를 받으시라고 하면 좋은데 이런 소개가 빠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자기는 아이 먹일 젖이 넘친다고 해서 어미라는 사람이 자기 젖을 자기 아이에게 먹여야 한다고 큰 소리를 치는 것은 교만이며 자랑이며 남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젖 없는 어머니들이 젖을 먹이기 싫어서 젖이 나오지 않도록 했을까! 설교자라면 누구든지 자기 설교가 은혜로워서 온 교인들이 먹고 넘치도록 되기를 원할 것인데 아무리 해 봐도 안 되니까 남의 젖이라도 얻어서 아이들의 입에 물리는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체질적으로 젖이 많은 사람이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젖이 적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유조차 없을 때는 젖배를 곯은 아이들은 평생 허약합니다. 요즘은 우유를 먹이는데 그 우유를 먹인다고 그 아이들이 송아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친모의 모유가 가장 좋고, 남의 젖이 그 다음 좋고, 그마저 길이 없으면 송아지 젖을 뺏았아 먹이는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젖 많은 어머니들이 젖이 없어 죽을 지경인 주변 사람들에게 표절을 말하고 심지어 법으로 규제까지 하겠다고 나선다면 젖 없는 어머니의 자녀들을 굶겨 죽이거나 젖배를 곯게 하여 평생 약골을 만들겠다는 무서운 시도가 아닐까.



공회는 출발 때부터 백 목사님의 말씀 은혜는 너무 넘쳐서 듣는 교인들이 담아 낼 그릇이 모자랐고 그 은혜는 대형 수도 관로가 터져 물이 도로에 넘친 것처럼 그렇게 유실이 컸습니다. 당시 거의 모든 교회들은 말씀의 은혜가 없어 목이 갈했고 백 목사님의 강단은 가는 곳마다 이런 현상이 있었으므로 그 분이 서는 강단은 항상 강대상 위에까지 사람들이 빼곡하게 몰렸습니다. 요즘처럼 인터넷 실시간의 방법이 있었다라면 서부교회의 주일학교의 역사적 사건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역사가 생겼을 것입니다. 교통 불편하고 통신 없는 시대에 세 끼 밥도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정마다 신앙 박해로 주일도 겨우 지키던 시절, 손양원 목사님이나 백 목사님의 사경회는 가는 곳은 미어 터지도록 모여 들었지만 한국 교회 전체로 본다면 설교의 은혜가 너무 기갈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손양원 김창인 등 수도 없는 부흥강사들과 비교할 때 백 목사님의 다른 점은, 그가 서는 강단에는 모든 교인들이 저절로 필기를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분의 설교와 달리 백 목사님의 설교를 반복해서 듣다 보면 필기를 해서 설교 후에 다시 들쳐 보지 않고는 안 되는 내용이며 그 은혜가 그렇게 넘쳤습니다. 그 분 역시 설교 때마다 듣는 이들이 들어 보지 않은 이 설교 저 설교를 전시하여 눈과 귀를 끈 것이 아니라 한 본문으로 또는 한 주제로 한 주간 계속 반복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못 된 마음으로 표절을 욕하는 이들의 기준으로 본다면 백 목사님 설교는 평생 자기 표절이었습니다. 남의 글과 설교를 옮기는 것도 표절의 절도지만 자기 글을 발표해 놓고 다음에 자기 발표한 글을 또 그대로 써 먹는 것도 자기 표절입니다. 백 목사님 설교는 계시록 1장 1절 한 본문을 가지고 거의 40여 회에 달할 만큼 한 달 계속 설교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것도 한 교회의 한 자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분의 설교를 듣다가 귀가 열리면 그 시간에 들은 내용 토씨 하나까지 그냥 놓칠 수가 없어 저절로 필기를 하게 됩니다. 그 표현 그 토씨가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가 끝나면 다시 뒤지게 됩니다. 설교자는 귀한 말씀을 듣는 이들이 현장에서 바로 다 깨닫지 못하고 또 깨달았다 해도 그 말씀 그대로 실제 살려면 한 번에 자전거를 배우거나 걸음마를 배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복해서 지도를 해 줘야 하듯이 목사님도 자기 교인들이 말씀으로 세상 생활을 실제 살 수 있도록 계속해서 같은 말씀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그 설교의 은혜에 놀라고 그 설교 때문에 실제 자기들 현실에서 살아 보려고 노력하게 되고 실제 노력을 해 보면 그 말씀의 이런 저런 부분을 새로 확인해야 하거나 중요한 대목을 다시 참고하려고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래서 설교 하는 분도 한 설교를 계속 반복하고 듣는 이들은 같은 설교가 반복 되는데도 갈수록 예배 참석이 더 많아 지고 그 것도 모자라서 필기를 하게 되고 그 필기를 자꾸 참고하며 다시 현실에서 말씀으로 실행하는 데 나아 갔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남 달리 눈에 띄는 젊은 남자들은 각 교회의 설교자로 또는 목회자로 한 발씩 다가 갑니다. 백 목사님께 들은 설교의 줄거리를 기억하고 전해 볼 때, 교인들이 받는 은혜가 남 다르니 은혜 있는 설교는 간접으로 전달만 해도 설교가 서툰 사람과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백 목사님의 설교를 필기한 것을 원고로 사용해서 전해 보면 그 반응이 굉장하고, 만일 그 필기 그대로 읽어 보면 어떤 신학생이나 목회자들은 한 페이지에 받은 은혜가 인생을 바꾼 결정으로 이어 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아이의 걸음마가 수 년에 걸쳐 수천 번을 넘어 지며 배우는 것인데
신학교 졸업장 하나 달랑 든 서툰 목회자에게 갑자기 세계적 설교로 은혜를 끼치라는 것은 신학교 책이나 읽는 이들에게서 무책임하게 나올 말이지 목회자 개인의 실력과 각 교회의 현장을 아는 이들 입에서 할 소리는 아닙니다.

오히려 남의 설교를 그대로 배껴도 그 설교 안에는 그 설교를 처음 발표한 사람과 다른 교회 다른 장소 다른 사람들을 놓고 그 설교를 사용하는 2차 설교자가 그 원작 설교를 접하며 자기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그 설교를 통해 자기가 각오하고 결심하고 자기의 마음을 바꾼 다음 원작의 완성도와 그 설교 내용의 가치성을 소중히 여겨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그대로 전한다면 남이 볼 때는 앵무새의 흉내요 녹음기를 켰을 뿐이라고 비판해도 전하는 사람과 듣는 교인이 은혜를 받고 그렇게 되는 것은 그 시간에 성령이 우리를 감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노력과 과정 없이 그냥 옮긴다면 성령으로 중생 된 교인들은 그 속에 자기를 감화하시는 영감의 역사가 각기 다 있기 때문에 요10장의 말씀처럼 자기 목자의 목소리가 남의 목소리를 흉내낸 것인지 남의 목소리를 흉내낸 것은 맞지만 그 속에 자기를 고치고 성령님께 붙들려 은혜를 잘 전하는 것인지를 두고는 각 교회에 교인들이 알아서 결정할 것이고 그런 책임도 있는 법입니다. 태어 난 지 몇 달만 되어도 제 엄마를 알아 보는데 자기 목사의 설교가 남의 설교를 배꼈든지 말았든지 자기에게 양식이 되지 않고 은혜 되지 않는데도 그 목사가 좋아서 교인 노릇을 한다면 그 것은 남의 교회에 그들의 자기 결정권이니 옆에서 뭐라고 개입하고 들어 갈 일은 아닙니다.

우리 각자 자기 하나가 제대로 잘 믿고 잘 살면 나를 붙들고 주변을 주님이 감동 시켜 나갈 터인데 언론에도 이런저런 소리를 함부로 하는 것은 설교나 은혜나 성령님의 역사를 과연 알기나 하는지 인정을 하는지, 아니면 세상 책을 가지고 강연하는 이들이나 접해 본 사람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설교 표절을 두고 설교에 자신이 있는 목회자들과 교수들이 주로 비판을 하고 나서는데 실제 이 나라 최고의 설교 권위자들은 서툰 20대 신학생들이 제대로 뭘 안다고 강단에서 감히 연설을 하는 것보다는 은혜로운 설교를 잘 살피고 연구하고 잘 사용해서 설교력을 세월 속에 길러 가라고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비판적 학자들에게 이렇게 반론해 봅니다. 이 나라 신학계 신학자들마다 칼빈이 깨달은 것과 웨슬리가 깨달아 발표한 것을 제쳐 놓고 자기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한 다음 성경이든 조직신학이든 그 어떤 것이든 자기의 독창적인 것을 발표한 사람들이 있는가? 그런 강의가 과연 가능한가? 박형룡과 박윤선의 전집은 거의 전부 배낀 것인데, 미개한 한국 교회가 그런 좋은 서구 교회의 교리와 주해가 있는지도 모르던 것을 소개하여 한국 교회가 이렇게 건전해 지고 자랐다면 우리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를 표절했고 선교사의 언행과 지시를 표절했고 주석과 교리와 교회사까지도 다 표절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 표절을 신앙의 순종이며 자라 가는 과정이라고 알지 않은가! 공회는 그 표절의 자라 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까지도 모르던 내용들을 거침 없이 발표했는데 이런 발표가 시작 되자 세계 교회와 한국의 선배 교회들의 말과 표현과 행동까지 그대로 표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단 정죄를 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모두들 너무 성급한 듯합니다.


설교는 영감 받아 바로 전하고, 그 전달이 역사적 설교가 되는 것이 1등이며
1등이 될 자신이 없으면 훌륭한 설교를 잘 연구해서 잘 전하는 과정을 통해 설교를 배우는 것이 2등일 것입니다. 1등을 못하면 2등을 해야 하는데 이 땅 위에 많은 사람들을 만들면서 하나님께서는 1등은 각 분야에서 아주 소수를 만들었고 대다수는 그 1등을 잘 참고하여 2등까지는 빠르게 발전할 수 있도록 하셨는데, 1등의 위치에 설 수 있는 은혜 받은 이들이 나머지 전부를 향해 1등을 참고하지 말고 독자적으로 1등이 되어 보라고 하는데 그 소리는 아무래도 조롱 같이 달리고, 꼴찌들이 2등까지라도 속성하고 2등까지 자란 이들이 1등을 넘 볼 수 있는 방법을 차단하고 나서는 듯합니다.


설교를 표절하는 방법을 잘 지도해서 설교를 배우고 설교력을 갖춰 가도록 지도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고, 오히려 그렇게 자라 갈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한 선배들이 실력 없는 후배들을 낭떠러지에서 밀어 버리는 인상입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