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에 대한 47가지 문답-2
(47가지 질문 중 21번~22번)
목차
21. (질문) 새를 팔려고 기르는데 주일에 먹이 주는 것은
22. (질문) 주일날의 대중교통 이용과 회사 업무시간에 인터넷 등 이용에 관하여
21. (질문) 새를 팔려고 기르는데 주일에 먹이 주는 것은
새를 팔려고 기르는데,
그 새에게 주일에 먹이를 주는것은 죄가 될까요, 안될까요?
한가지 더,
새를 기를 때 안 믿는 사람을 고용한다면,
고용된 사람이 주일날에 먹이 주로 오는 것은 어떻게 될까요?
(답변) 생존을 위한 생활과 생존 이상의 일로 구별하셨으면
1. 주일에 금할 일의 기준
주일날은 자타의 구원에 직접 관련된 일만 합니다.
예배를 중심으로 신앙에 관련된 일만 하고,
예배와 관련이 없는 세상일은 생존 관련 생활만 하고 생존 이상의 일반 업무는 중단합니다.
따라서
평소 하던 일은 할 수 있는 것이 많고 특별하게 하는 일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평소 미리 해 둘 수 있는 일은 미리 하되, 평소 대신할 수 없는 생활은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경제행위와 오락행위는 생존 이상의 활동이므로 대표적으로 금할 세상일입니다.
2. 교회가 공통적으로 안내할 수 있는 것은
1) 농부의 경우
반드시 그 날이 아니면 안 되는 짐승의 새끼 출산,
반드시 그 시간이 아니면 안 되는 짐승의 사고 구조는 주일이라도 할 수 있고,
다른 날에 할 수 있는 씨뿌리기나 풀뽑기 거름주기는 주일에 할 수 없습니다.
매일 물을 줘야 정상적으로 자라가는 화초라면 물을 줄 수 있습니다.
매일 먹어야 하는 짐승에게 먹이를 주는 것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주고 먹이주는 행동들 자체는 주일날 할 수 있는 생활이라 해도,
그 행동을 위해 사용해야 할 시간이 많아지면 생활 이상이 됩니다.
2) 장사의 경우
주일날 매매하는 것은 생존 이상의 경제행위이므로 금합니다.
주일날 팔고 다음날 돈을 받거나, 주일날 선금을 받고 물건을 다음에 넘기는 것도 금합니다.
3. 질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닭 몇 마리 길러서 파는 정도의 부수입이라면 주일날 먹이를 줄 수 있습니다.
부부가 양계장 1-2천 마리를 주업으로 한다면 주일날 30분 정도 먹이를 줄 수 있습니다.
만일 5만 마리 대기업 차원으로 양계장을 한다면 완전 기계화된 설비가 없으면 안됩니다.
하루 몇 시간 일상적으로 노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든지
다른 사람을 주일날 출근시켜 일을 하게 한다면 믿는 사람이 할 일은 아닙니다.
집에 기르는 닭 한쌍 주일날 먹이 줄 수 있지만,
그 닭을 훗날 팔 수 있다 해서
주일날 두 부부가 하루 종일 양계장에서 수만마리 닭을 뒤치닥거리 한다면
주일의 의미 자체가 달라집니다.
사람에게 월급을 주고 일을 시키는 경우,
그 사람을 집에 데리고 산다면 그 사람이 주인처럼 주인이 할 수 있는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출퇴근을 하는 사람이면 아예 주일날은 근방에 얼씬할 수 없습니다.
22. (질문) 주일날의 대중교통 이용과
회사 업무시간에 인터넷 등 이용에 관하여
1) 믿는 사람의 주거는 교회 옆에 위치해야 제일 좋은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집이 교회와 떨어져 있을 경우 대부분 자가용이 있어 직접 차를 운전하여 예배에 참석 합니다.
차가 없을 경우에는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지하철, 버스, 택시등을 이용하여도 무방한지 궁금합니다.
특히 택시의 경우에는 다른 것 보다 좀 더 구별해야 될 거 같은데,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더 성경적인지 궁금합니다.
2) 믿는 사람이 직장에 다닐 경우 업무시간 내에 신문을 보거나 인터넷 이용등 다른 일을 하는 것은
고용주로 부터 급여를 받은 사람이`시간을 도적질` 하여 8계명을 어기는거 같습니다.
일과 시간에 성경을 보거나 복음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하여 보는 것도 금해야 되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물론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과 마칠 때 성경 몇 장 읽고 기도하는 것는 무방하다고 봅니다.
좀 더 정확히 구별하고 싶어서 문의 드립니다.
복음 이라는 핑계로 너무나 많은것들을 묻어두고 가는 것 같아
주일날 택시를 이용하고 일과 시간에 성경 등을 보는 것도
주님 믿기 위해 하는 것이지만 따져볼 필요가 있어 문의 드리오니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1.평소 승차권을 사시고 일반 교통을 이용 하실 것
2.특정업무의 경우는 개인활용도 가능
1.교회로 오가는 교통편
① 자가용으로 교회를 오가는 경우가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자가용으로 교회를 오갈 수 있으면 신앙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때입니다.
폭설 폭우 교통정체 차량고장 등의 문제가 항상 교회길을 막고 있는 형편이지만,
이것은 말하자면 4차선 대로 옆에 살면서 4-5살 짜리 아이의 교통사고 걱정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는 주거환경 자체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뒤에 고려할 문제입니다만, 일단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임시 땜빵을 해야겠지요.
물론 도둑질은 도둑질이겠지만 먹고 살기 위해 우선 돈 몇 푼을 챙길 수밖에 없다면,
빈민층 병든 노인집보다는 차라리 술집 금고를 터는 것이 낫겠다고 말할 차원입니다.
②가장 일반적이고 평범한 교통수단을 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택시보다는 버스나 지하철이 나을 것입니다.
만일 택시를 탄다면 톨게이트를 지나가지 않는 곳으로 둘러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또한 버스나 지하철과 같이 가장 평범한 교통수단을 택하는 경우라 해도
그 요금지불은 현금보다는 1회용 토큰이나 회수권과 같이 미리 승차권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좋고,
그것보다는 충전식 전자결제와 같이 한 번 지출하면 여러번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교통편을 이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득이 현금으로 요금을 지출해야 한다면,
큰돈을 주고 잔돈을 거스러 받는 것보다
10원짜리 잔돈까지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그 날 사용할 1회용 티켓만 구입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주일날 부득이 식사를 해야 할 상황이라면,
누구나 가장 간단하게 먹는 자장면이나 비빔밥 한 그릇이 나을 것입니다.
이왕 사먹을 바에는 냉면이나 무슨 특식을 사먹는다든지 또 맛있게 하는 집을 찾아가는 것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인간의 세 끼 식사가 가지는 근본적인 의미인 필요 음식물 확보 차원에서 움직이는 것이 좋습니다.
③믿는 사람은 주일 때문에 항상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공중전화도 카드보다는 현금이 낫고,
교통수단도 승차권보다 현금을 사용하는 것이 경제 기본자세상 낫겠지만
주일에 발생할 긴급상황을 대비하여 잔돈까지 준비하고 움직이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대입 1개월을 남겨둔 두 학생의 현재 실력과 준비로는 시험을 치나마나 떨어질 것이라고 가정할 때,
한 학생은 해봐야 안될 것이라 하고 포기를 했고, 다른 학생은 이미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남은 1개월만이라도 나로서는 현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다 하겠다고 했는데,
둘 다 떨어진 경우를 놓고 비교합니다.
그 당시 상황에서는 해보나 마나 결과는 같았지만,
한 학생은 앞날에 소망이 있고, 한 학생은 그때 한번 떨어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도 늘 그런 생활을 반복할 사람이라는 점에서 아주 근본적으로 비교가 됩니다.
주일날 어떤 경우에라도 돈을 사용한다든지 하여 주일을 범하는 경우는,
이미 그 당시 신앙은 낙제로 결론을 맺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낙제를 하는 경우라 해도 자기로서는 그 상황에서라도 할 수 있는 최선을 향해 준비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회개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며 소망이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주일날 차량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차량이 고장날 경우를 대비하여 비상 연료나 타이어 교체 또는 주변에 교통편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을 확보 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무리하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은 차라리 주일날 연료를 사넣고 또 카센타를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조금 신경을 쓰면 가능할 수 있는 방법들을 알아두라는 정도입니다.
주일에 갑자기 식구 중 탈이 나게 되면 병원을 가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진통제나 해열제와 같이 기본적인 몇 가지는 생명과 건강을 위해서도 준비해 두어야겠지만, 주일문제를 두고도 다른 사람보다 하나 더 주의하고 노력할 일입니다.
④현대적 의미에서 주일교통문제는 이런 면을 고려해야 합니다.
집과 교회의 거리문제는 어떤 경우라도 도보거리로 가까와야 하지만,
기도를 가거나 원거리 심방을 해야 하는 기타 활동 거리를 두고는 달리 생각할 면이 있습니다.
지금 통행료를 부과하면서 새로운 교통망 확충이 대폭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기도나 원거리 심방을 위해 톨게이트를 통과할 때 전자결제로 자동화가 된다면 이는 사용할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전 전화교환수를 거쳐야만 전화를 할 수 있는 때에는 주일에 전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내전화는 자동이 되고 시외전화만 교환수에게 신청을 하여 통화가 될 때에는 시외전화만 피했었습니다.
현재 시내 시외 등 모든 전화가 자동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주일에 전화하는 것은 그 내용이 문제지, 전화하는 자체에 대하여는 달리 금할 일이 없습니다.
전기 전화와 같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주일날 직접 일을 하도록 하는 경우가 아니고 자동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은 주일날 이용을 하고 있는 것처럼 톨게이트도 그런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톨게이트 외에도 이런 경우는 적지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일을 지키는 원칙과 방향이 오늘 신약 우리는 어떤 길을 지켜야 하는지가 문제이지, 구체적으로 택시나 지하철의 이름을 들어가며 구별할 일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철과 택시 등을 두고 택시를 될 수 있으면 피하라는 것과 또 현금 결제를 피하라고 일일이 예를 드는 것은 절대치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상황에서는 주일 원칙을 고려할 때 그리해야 더 좋겠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하실 일은,
전체 방향이 중요하다며 구체적인 면을 구별하고 따지는 것을 쉽게 생각하면 잔뿌리 없는 뿌리가 되어 그 뿌리가 아무리 커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일의 전체방향을 늘 근본 자세로 깔아두시고
동시에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은 양심으로 판단하되
자기 할 수 있는 대로 세밀히 끝까지 평생 따져 살아야할 것입니다.
2.월급은 한달 자기 할 일과 맞바꾼 것입니다. 소홀했다면 그만큼은 도적입니다.
① 다른 사람에게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은 약속에 따라 충실해야 합니다.
노동으로 하루 일당을 버는 사람, 월급을 받고 어느 업무를 맡은 사람인 경우 사장의 돈과 자기의 노동을 서로 교환하고 있습니다.
주기로 한 돈에서 빼게되면 그만큼은 도둑질이 되듯이, 하기로 된 업무나 노동에서 뺀 것이 있다면 그것도 도둑질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무실 근무자들이 업무 시간에 성경을 보거나 인터넷 등을 개인적으로 사용한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 옳고 또 어떤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할지를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옳습니다.
생각없이 대충 넘어가거나 남들이 다 하기 때문에 무작정 따라가는 자세는,
신앙전반이 생명없이 흘러가는 죽은 신앙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② 이 질문은, 우선 돈과 바꾸기로 한 것이 무엇인지를 좀더 분류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회사의 전화안내를 맡고 있다면 걸려오는 전화를 안내하는 일에 지장이 없으면 업무시간 중에도 성경을 읽거나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톨게이트 직원들이 책을 읽고 있다가 들어오는 차량을 상대할 때 반 요금 정산에 있어 박자 늦게 반응하거나 준비가 안된 얼굴 표정으로 상대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조심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업무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고 근무시간 내내 집중을 하도록 되어있는 직책입니다.
목회자로 예를 들면, 최소한으로 일을 하고 싶으면 예배시간과 심방요청이 있는 경우만 움직이고 나머지 시간은 마음껏 놀아도 됩니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활동하려면 잠자는 시간 외에는 늘 교회와 교인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미리 살피는 등으로 순간도 쉬지 말아야 할 직책입니다.
이런 점에서 목회를 정상적으로 하는 사람은 저절로 사생활이 존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일반 회사로 말하면 연구 개발 시장 조사 등의 업무를 맡은 사람, 출판사로 말하면 디자인을 맡은 사람은 최소한 근무시간 도중에는 거의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놀고자 한다면 실컷 놀 수 있고 일하려 한다면 한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근무시간만은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학교 교사의 경우, 한 시간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생각하고 학생 개별적으로 살필 것까지 생각한다면 거의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요약하면, 사장과 직원 사이의 근무 조건이 맡겨진 특정 업무의 수행에 있다면 업무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보다 자유롭게 시간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고,
만일 특정 업무를 정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맡긴 경우는 자기 개인 시간 사용을 스스로 대단히 절제해야 옳을 것입니다.
③ 업무를 잘 해 보려면 한이 없을 것이나 우리에게는 또 한 가지 고려할 일이 있습니다.
교사로 말한다면 대한민국 교사 전체의 업무에 대한 평균 집중도와 자기 학교 교사들의 평균 집중도를 기준으로 하여 최고 수준은 못할지라도 적어도 상위 수준은 지켜야 할 것입니다. 회사원이라 한다면 자기 회사 직원 전체를 고려하고 동시에 자기 부서나 관련 업무를 맡은 분들과 비교할 때 상위를 유지하면 되겠지요.
단정할 수 없으니 결국은 본인이 기도하고 양심으로 결정할 일이지만,
혹 하나님께서 자기 업무에 최선을 다 하게 하시고 그 충성을 통하여 요셉이나 다니엘처럼 뒷날에 크게 쓰실 것인지, 아니면 그런 방향 대신 매 현실 주신 만큼 충실하게 하면서 사용 가능한 시간들을 쪼개어 그때그때 귀하게 사용하는 것을 원하실는지는 각자가 자기 신앙과 영감으로 결정하실 일입니다.
④ 위에 설명 드린 내용으로도 판단이 서지 않으면 최종적으로 이렇게 판별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기준은, 업무 중 개인 일을 보고 있는 모습을 사장님이나 나를 책임진 사람이 보았을 때 내가 자연스럽게 그분을 상대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만일 당황한다든지 아니면 미리 감추어야 할 정도라면 개인일을 보는 양을 줄이든지 하지 말아야 할 경우입니다. 애매하면 대충의 선을 미리 책임자와 상의하는 것이 옳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는 윗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또 상의하지 않고 혼자만 알면서도 양심에 가책이 없을 경우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현재 목회자의 세금문제와 같은 경우입니다. 세금내지 않는다고 선전할 것도 없고 세금내기 위해 세무소 갈 것도 없고 세금내지 않아도 되는 경우인지 세무소에 문의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고 있습니다.
소득이 있으면 세금을 내야 하는 것은 우리 세법의 현재 규정입니다. 10만명이 넘는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국세청은 현재 이 세법을 적용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납세의 기준과 제외하는 경우는 세상이 그때 형편을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법규정이 있기 때문에 불법문제가 생기는 것이지, 법규정에 상관없이 발생되는 살인 등의 자연범죄와는 다른 성격이 있습니다. 따라서 규정을 만들었기 때문에 법이 되는 세법과 같은 경우는 10만 성직자 중 제1호로 모범을 보일 문제가 아니라 세상 일반을 따라 가는 자세로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나 자연계시로 엄금한 교회간 소송문제는 천하 교회가 다 한다 해도 우리는 일반을 참고하지 않고 성경에 입각하여 거부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의 모든 일은, 만일 공개가 되고 알려졌을 때 누구에게 내놓고 설명을 해도 떳떳해야 하고 옳아야 하며 설명이 얼마든지 가능해야 합니다.
자기 근무의 성격이나 여러 여건이 윗사람에게 또는 남에게 개인적 일을 이 정도는 봐도 된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고 떳떳할 수 있는 선에서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3. 예배당과 자기 집의 거리 문제를 두고 일반적으로 알고 계실 신앙상식입니다.
① 교리적으로 죄와 의는 그 구분이 아주 간단하고 쉽습니다.
예배당과 차량거리를 두고 살고 있는 사람은 일단 죄인이라고 단정을 해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면에서 죄인이라고 하는지는 약간의 명상이 필요할 것입니다.
수도 없이 많은 죄가 알고보면 예배당과 멀어진 주거에서부터 나온다는 계산은 그렇게 어려운 산수가 아닐 것입니다. 자기 나이와 건강 형편에 맞추어 도보거리 안에서 사는 것이 의가 됩니다.
교리적으로는 죄와 의를 구별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선이 명확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먹으면 죽는 것이 선악과입니다. 먹었으면 죄고 먹지 말라 하신 말씀대로 안 먹었으면 의가 됩니다.
의와 죄에는 그 중간이 없습니다.
의가 아니면 죄고 죄가 아니면 의가 됩니다.
의는 의일 뿐이지 작은 의 큰 의로 나눌 수 없습니다. 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살인죄는 큰 죄고 도둑질한 죄는 작은 죄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죄나 의에 대한 문제는 아주 딱 부러지게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리의 세계입니다.
② 그러나 목회적으로 표현한다면, 죄와 의를 구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죄인을 회개시키는 하나님의 섭리는 대부분 점차 진행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말 술을 먹던 큰 죄인을 일단 포도주 한 잔씩 가끔 하는 작은 죄인으로 만든 다음, 어느 기회에 은혜를 주셔서 마침내 술잔을 완전히 던져버릴 수 있게 하여 비로소 죄없는 사람으로 인도해 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7-80년이라는 길이로 생을 주신 이유입니다. 출생한 아이가 청장년을 거쳐 노년의 원숙함에 이르는 자연계시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의도 그렇습니다.
한 순간에 순교 성자의 완전함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많은 세월 갈고 닦으며 작은 의인이 큰 의인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기본구원과 기본구원의 은혜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참으로 순식간에 상상도 못할 변화가 일어나지만, 건설구원에 관련된 것은 매일매일 단어 한 두개 외우고 배워서 어학실력이 자라가듯 수없는 반복과 연습으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목회적으로 말한다면 빵점짜리 큰 죄인이라도 죄를 회개하고 벗어나는 방향으로 움직여 5점 10점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은 복받을 의인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100점만점의 최고 수준의 신앙에 있는 사람이 99점 98점의 신앙이 되었다면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매를 준비하게 됩니다.
목회적으로는 현재 그 사람이 어떤 교리적 죄인이며 교리적 의인이냐는 것보다 그 죄와 의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주목하게 됩니다.
이전보다 예배당에서 더 먼곳으로 이사를 가면 소돔으로 향하는 롯으로 보셔야 하고, 소돔의 도심 주택가에서 살던 롯이 성밖으로 나왔다면 이는 마구 축복을 해야 할 일입니다.
③ 우선 예배당과 자기집의 거리는 도보거리를 고려하고 최대한 좁혀야 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생활 형편으로 말한다면, 차량 30분 거리는 예배당 주변이라고 해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다닐 수 있는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차량의 고장, 교통 정체 등 돌발적인 일이 일어날 때를 상정한다면 이런 거리에서 차량으로 오가는 교인들은, 잠재적 죄인들입니다. 여차하면 그까짓 죄는 지을 수 있다는 각오와 결심이 끝난 사람들입니다.
물론 차량 1시간 거리에서 30분 거리로 좁힌 사람과 도보거리에 살다가 차량 30분 거리로 나간 사람에 대한 근본적 상태는 다르지만, 차량거리와 도보거리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런 면에서 아주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도보거리 역시 젊은 청년 부부라고 한다면 어린아이의 안전과 교회 통행을 위해서, 그리고 중 장년 부부라고 한다면 본인들이 어느날 불편할 때도 있고 현재로는 그 자녀들이 중고등학교 또는 대학교 등으로 위험한 시절을 보내고 있으니 그들에게 교회와 가정의 거리를 좁혀 놓기 위해서, 그리고 노인 부부라고 한다면 어느 순간 중환자가 되어야 할 상황이 눈앞에 닥쳤으니 이를 위해서 예배당과 자기집의 거리는 최대한 좁혀 놓는 것이 지혜로울 것입니다.
④ 하나님이 만든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도록 일부러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할 수 있는 대로 자기 환경을 의에 유리하도록 조성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요셉과 같이 애굽으로 끌려간 곳이라고 한다면, 그곳에서 별별 우상과 귀신들에 섞여 살았겠지만 그것에 오염되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다윗과 같이 자기 나라 내부를 자기가 자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는 두말할 것 없이 우상이나 산당의 여러 잡신들은 뿌리를 뽑아 아예 대청소를 해버려야 합니다.
예배당이 가까이 있으면 신앙에 유익할 것은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예배당과 멀어지면 예배당과 통행거리만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거리까지도 멀어지는 것이 우리의 경험일 것입니다.
물론 감상적 신앙주의가 되어 예배당 옆으로만 가면 은혜가 더 넘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초원 위에 작은 집 하나는 멋있게 보이겠지만 실제 그곳에 살게 되면 사방 천지에 쇠똥과 쇠파리 때문에 어지간한 사람은 살 수가 없습니다.
교회 내부에서 흔하게 발생하는 여러 불미스런 일에 익숙치 않은 어린 신앙이라고 한다면 예배당과 큰 블럭 하나 정도, 그렇지 않으면 작은 블럭 2개 정도는 거리를 띄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물론 어느날 예배당과 담을 맞닿고 살 정도로 교회의 여러 형편을 다 이해하고 초월할 수 있는 신앙에 나아가야 옳을 것입니다.
⑤ 평생토록, 예배당 종탑이 보이는 곳에 집을 마련하겠다는 분을 기억합니다.
세계적인 기업의 중역이면서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분 가정이었습니다. 언젠가 집을 사게 되면 예배당 종탑을 볼 수 있는 도보 거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했고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었으며 그 이후 많은 복을 받는 모습을 지켜 볼 수 있었습니다. 아들 하나는 하바드대학을 졸업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음 아들은 밥 죤스 의과대학을 나온 의사로, 그리고 딸은 미국 최고의 여대 웨슬리를 졸업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기준으로 복을 말한다면 이곳도 오늘 교계와 같겠지만, 그 가정은 부부 뿐 아니라 성장기를 거쳐 이제 청년이 된 자녀들까지도 지금까지 늘 백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들으며 오늘 극도로 타락한 미국 한 복판에서도 이곳의 신앙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의 신앙 한 복판에는 늘 예배당 종탑이 보이는 도보거리 주택을 소원한 그 기도가 있었음을 그들 스스로 알고 감사한다는 점을 이번 답변에서는 특별히 소개하고 싶습니다.
백영희신앙노선이란, 예배당과 자기집과의 거리 문제에 있어서는 사실 따로 설명하거나 강조할 일이 없었습니다. 밥 먹을 때는 수저를 사용하라는 말은 따로 말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백영희목사님이 목회하던 서부교회나 그 소속 교회들은 교인들의 예배당 주거근접도가 탁월하였고 이로 인하여 교인의 교회 중심 신앙생활은 그 어떤 교단이나 교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방송통신대학생들의 학교 소속감과 사관학생들의 소속감으로 비교를 할 만했습니다.
⑥그 시대가 어떻게 발달하고 변화되어도, 여전히 지켜져야 할 것 중에 하나입니다.
현재 인터넷 방송거리 개념으로 사실상 공간적 거리는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신 근본적인 원리 몇 가지는 아무리 그 시대와 형편이 달라진다 하더라도 달라질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식과 피부로 접촉하고 자식을 위해 땀을 흘린만큼 그 자식에 대한 사랑이 커진다는 것은 어떤 기술이나 교육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번 돈은 반드시 쉽게 없어진다는 원리도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여전히 인간으로서는 반드시 구속될 수밖에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눈으로 보이는 것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기도하면 기도가 잘 되고 눈을 뜨고 기도를 하게되면 기도의 집중이 잘 안되는 원리와도 같을 것입니다.
앞으로 도로여건 교통체계가 어떻게 발달이 되고 또한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이 혼재하는 시대가 되어도, 우리는 신앙원칙상 초대교회의 모습을 늘 우리 행동과 생활모습의 구심에 두고 있는 것이 결과적으로 지혜있고 복된 길을 걸었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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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 | 2023.03.20 | 0 | 33 |
12829 |
(참고주해) 이사야 51:4-5, '하나님의 의'
1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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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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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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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 2023.03.12 | 0 | 54 |
12802 |
목자 양 비유와 표어
12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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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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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3
|
목회자 | 2023.03.03 | 0 | 93 |
12753 |
절대자 하나님의 절대적인 역사
12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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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원
|
2023.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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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원 | 2023.02.13 | 0 | 74 |
12796 |
![]()
12796
|
공회원
|
2023.02.25
|
공회원 | 2023.02.25 | 0 | 106 |
12828 |
![]()
12828
|
"
|
2023.03.11
|
" | 2023.03.11 | 0 | 51 |
12714 |
영의 창조나 중생 순간의 상태
(4)
1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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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원1
|
2023.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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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원1 | 2023.02.02 | 0 | 86 |
127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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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15
|
"
|
2023.02.02
|
" | 2023.02.02 | 0 | 84 |
5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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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9
|
동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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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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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실 | 2020.12.10 | 0 | 316 |
12699 |
경건에 대한 9가지 문답
12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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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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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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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 2023.01.31 | 0 | 153 |
127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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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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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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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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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13 | 0 | 157 |
12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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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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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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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08 | 0 | 101 |
12664 |
십자가와 간판없는 교회
![]()
12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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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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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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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 2023.01.22 | 0 | 239 |
12651 |
가룟 유다의 구원 - 요13:10
(2)
12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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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
20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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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 2023.01.19 | 0 | 107 |
11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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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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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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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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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 2022.07.10 | 0 | 442 |
12650 |
공회, 우리의 성령론에 '영감'의 의미
12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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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
20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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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 2023.01.19 | 0 | 150 |
54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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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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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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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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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원생 | 2021.01.07 | 0 | 450 |
12463 |
찬송가별 저작 연대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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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63
|
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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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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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 2022.11.28 | 0 | 214 |
11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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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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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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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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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 2022.02.15 | 0 | 404 |
12446 |
'성경단어집' - 공회 성경신학의 기본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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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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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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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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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 2022.11.23 | 0 | 171 |
12406 |
백영희 '한글 성경'만의 성경 해석론
12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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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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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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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부 | 2022.11.14 | 0 | 227 |
12295 |
설교록 연구 -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①
(4)
12295
|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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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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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 2022.10.18 | 0 | 356 |
12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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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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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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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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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 2022.10.21 | 0 | 298 |
12271 |
공회 연구의 한가지 사례 - 주일론 정리
(2)
1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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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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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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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 2022.10.13 | 0 | 260 |
122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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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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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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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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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 2022.10.09 | 0 |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