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공회 발언/연구

총공회의 주일성수 방법에 대한 의문에 대한 질문

작성자
청량리
작성일
2022.09.05
(발제)
이 글은 2009년 12월부터 연구소의 담당자와 개인적으로 오간 글이며, 이 글이 누구의 글인지 짐작할 수 없는 오늘의 상황에서 아직도 '주일'을 과거 총공회 방식으로 지켜야 하는가? 이 글의 질문에 앞 서 오늘 우리 스스로 자문자답을 해야 하는데, 이 글을 소개하는 것은 교계가 제기하는 내용을 포함하면서도 공회만이 아는 내부를 함께 적으며 주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욱 적합한 발제로 보입니다.

공회 신앙은 주일 한 번에 평생 직장도 포기하고 필요하면 목숨도 던지며 '순교'에 임하는 것이 정식입니다. 그런 신앙은 거의 없지만 우리의 원리는 그렇습니다. 이 글을 적은 분은 자칭 총공회 최고에 이른 분이어서 자기 교회 목회자도 가르치는 분이지 배우지는 않습니다. 또 구 연구소 게시판에서 방문인들에게 과제를 내 주고 혼을 내는 정도니 연구소의 운영진 전체보다 윗 자리에 계셨고 본 연구소가 아주 타락을 했다며 위해서 기도하자고 앞에 서기도 하는 분입니다. 이 분의 신상이나 위치나 신앙은 이 곳에서 아예 거론하지 않고, 오로지 이 분이 제기하는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옳다'는 주장만 가지고 살피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정중하게 질문을 하지만 글이 거듭 되면서 질문이 아니라 이의 제기였고 연구소의 기본 인식을 바꿈으로 공회를 바꾸고, 공회를 바꾸면 총공회의 근본이 변경 된다는 점을 인식한 듯합니다. 한국 교회에 아직도 남아 있는 마지막 주일 오판을 회개 시키는 글로 진행 된다고 보셨으면 합니다. 이 글이 옳으면 우리는 따르는 것이고 이 글이 틀리면 어떤 면이 틀렸는지만 지적하면 됩니다.


(댓글이나 추가 발언에 대한 요청)
이 글에 대해 오간 많은 추가 문답을 댓글에 계속 올리겠습니다. 등재가 끝이 나면 각자 의견을 적을 수 있으며, 글에 적힌 논리만 가지고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논점 외의 표현이 나오면 '사회' 입장에서 내용을 수정하고 표시를 해 놓겠습니다.








I. 히브리서에 나오는 안식에 대한 여러가지 의문



히브리서 3장 이후를 보면 다음과 같은 단어 들이 나옵니다.
이 단어들은 지금까지 주일(첫째날)로 해석하는 것이 저희 공회의 공식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공회의 같은 교훈으로는 아래와 같은 해석도 가능한데, 백목사님께서는 왜 아래 해석은 채택을 안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1. 오늘날 : 현실
2. 안식 : 순종/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건설구원의 결국
(1) 히브리서 3장 19절 :안식에 들어가고 못하고의 근거는 순종
(2) 히브리서 4장 2절 : 안식에 들어가고 못하고의 근거는 말씀과 믿음
3. 들어간다 : 현실에서 순종할 준비가 끝났다
4.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 간 자 : 현실에서 순종할 준비가 다 된 자
5. 자기일을 쉬느니라 : 하나님의 일을 한다. 곧 순종하여 건설구원을 이룬다



어찌보면 위의 해석이 성경 전체적으로는 더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신약시대는 '날'에 구애를 받지 않고, 모든 현실에서 건설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우리가 배운 자연스런 교리가 아닐까 하는 의문으로까지 발전합니다.

물론, 갈라디아서 4장 10절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는 말도 그 근거라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서 '날'은 육체의 이스라엘이 말하는 '제7일 안식일'일 수도 있으나, '너희가'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신약교회를 향하여 특정한 날에 구속되지 말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선뜻 그렇게 확정을 못하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도 있습니다.

1.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히브리서 4장 7절)
2.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시지 아니하셨으리라(히브리서 4장 8철)

즉, 특정한 날을 지칭하는 듯한 표현인 '어느 날'과 '다른 날'이란 두 단어 때문입니다.



그러나, 특정한 날을 지칭하는 듯한 이 두 표현은 다음 두 성구로 인해 특정한 날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란 해석도 가능합니다.



1.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브리서 4장 9절)
(1) 건설구원 이루는 것(안식)은 특정한 날(주일날)만 가능하다?
(2) 건설구원 이루는 것(안식)은 특정한 날(주일날)이 아닌 모든 현실이다?
(3) 건설구원 이루는 것(안식)은 특정한 날(주일날)에만 준비가 가능하다?


--> 매현실마다 건설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기에 셋 중 두번째 해석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물론 백목사님은 '특정한 날'의 의미와 '엿새동안의 건설구원의 종자'란 살리시면서 세번째 해석을 채택하셨습니다.

--> 그러나, 세번째 해석대로 한다면, 실제로 현실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심판이 주일날에 종속되어 이루어 지지 않고 있기에 선 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8월집회에 처음 참석하여 월요일에 중생되고 말씀대로 목요일까지 건설구원을 이루고 금요일에 하나님이 불러 가셨다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주일날 종자를 못받았기때문에 즉, 주일날 엿새동안 살 준비를 못하였기 때문에 건설구원(안식)은 없어야 된다란 이상한 이론이 됩니다. 오히려, 신약시대는 특정한 날에 구애 받지 않고 현실이라는 그 날에 현실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건설구원을 이루어 나간 것 자체가 사심판 통과고 그것이 곧 안식이란 해석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2.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히브리서 4장 8절)
--> 가나안 안식을 의미하는데 가나안 안식은 "기본구원"보다는 '건설구원'을 의미하고
건설구원(안식)을 율법으로 이룰수 없다란 해석으로, 다른 날에 대비가 되는 가나안 안식 자체는 특정한 날을 의미하지는 않으므로, 그 후에 다른 날 이란 표현은 특정 날이 아닌 특정 현실을 의미한다고 볼수 있음


실제로 이러한 해석과 일부 의견을 같이 하여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주일이 꼭 일요일일 필요는 없다. 신약시대는 날에 구애를 받지 않기에 편의상 주일이 월요일이어도 되고 일요일이어도 되고 구약과 같이 어느 특정한 날에 구애를 받지 아니한다'라고 기록을 하기도 했습니다.




II. 준비란 표현이 성경에 나오지 않음
백목사님이 주일날 예배시간에 말씀 받아 준비하여 엿새동안 그 힘으로 건설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란 해석에서 핵심이 되는 '주일날에 준비'란 표현이 명문화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일날에 준비'보다는 '주일의 의미'인 '예수님의 사활대속의 공로'를 현실에서 기념한다는 것이 곧 건설구원이요 안식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III. 안식일을 지키는 나머진 방식은 그대로란 표현도 성경에 안나옴
날자만 변경 되었고 안식일을 지키는 나머진 방식은 그대로 란 성구를 못찾았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해석이지 성경에 명문화된 성구를 못찾았습니다.
오히려 날자만 바뀌었고 기념하는 의미는 동일하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기념하는 방식이 동일하다란 해석보다는 더 자연스럽지 않나합니다.
다른 모든 절기는 그 형식이 폐하여 졌는데 십계명에 주일만 형식을 그대로 유지 한다란 것도 너무도 부자연 스럽고,
또한 그 내용을 지키는데 있어 주일날 매매가 필요한 경우도 금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모순 됩니다.
그 내용을 지킨다면 형식이 문제 될 것 없는게 신약시대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IV. 주일성수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신약 성경 어딘가에 지금 우리와 같은 주일 성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어야 되지 않나?
신약 성경 어디에도 지금 우리들이 주일 성수하는 그 방편, 그 모습을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그대로 주일 성수하는 기록이 없습니다.





V. 엄격한 주일성수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경우가 전무함
총공회는 엄격한 주일성수로 유별나고
이제 교회 나온지 얼마 안된 사람들도 주일성수에 엄격한 주일성수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그 누구하나 주일성수로 인해 잘된 사람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주일 성수로 신앙도 세상도 실패한 사람들 천지인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주일성수는 그 방식이 엄격할수록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주와 주의 말씀을 위하여 포기하게 될수 밖에 없는 현실을 수반하게 마련인데
성경말씀대로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자 없고 여러배 받아야 될 터인데
주변에 많은 총공회 선배들을 보아도 또 나를 보아도 여러배를 받기는 커녕 오리려 신앙에까지 위험을 겪는 다는 것은 성경이 잘못 되었든지
우리의 해석이 잘못 되었든지 뭔가 고장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VI. 물론 어느 해석이 옳다라고 확정을 못지을 때는 항상 내가 더 손해보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인 신앙의 자세이기에 주일을 엄격히 성수를 합니다만, 이상과 같은 의문은 20년을 지나도 항상 꼬리표로 따라다니며
다른 성구들(마12장, 막2장,눅6장)과 함께 항상 미혹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양한마리가 있어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란 성구가 귓전을 맴돌때가 많습니다.
사법시험도 주일 아닌날로 정착이 되어 가는 이 시점에 이제는 공론화 해서 시시비비를 가리어 참인 하나를 찾아야 할때 인것 같아 질문 드립니다.
전체 8

  • 2022-09-24 15:27
    1. 한번씩 겪고 가는 단계
    교파에 상관 없이 정통 교회 교인들은 삼위일체의 이론, 천국의 실제 모습, 예정과 자유의지의 관계를 그리고 꾸미다가, 마지막에는 대충 과거에 요약 된 표현에 함몰 되어 단순 반복으로 가르치거나 아니면 자기대로의 여러 해석을 붙여 변형을 시키거나 아니면 묻어 버리고 살게 됩니다.

    교회의 겉모습을 보며 모순과 불편과 역작용이 너무 많아서 보이는 교회를 모조리 없애는 것이 현재보다
    탁월하게 낫지는 않아도 총량으로 비교하면 조금은 더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상주의에 빠지면 무교회주의가 되고, 보통은 현실에 묶이고 치여 포기를 합니다. 그런데 더러 무교회주의적 성향으로 일반 교회를 다니는 분들 중에서 독보적인 신앙세계를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실상은 현재 교회 체제를 심각하게 위협할 정도입니다.

    총공회 교인들의 경우 과거에는 무조건 소속제일주의로 살다가 목사님 사후에는 소속 그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가, 외부에서도 공회 내부인보다 더 이 말씀에 붙들린 분들이 있어 그런 의문을 증폭 시킵니다. 현재 제 판단기준에서는 공회 내부나 외부가 공회 울타리 기준의 안팎 때문에 가감 되지 않습니다. 굳이 공회 명단 교회를 찾아 가야 하는가, 그 자리에 앉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와 교역자와 관련 목사만 안수하고 축도하는 것이 과연 신약적이며 공회 노선적인가, 저는 개인적으로 어느 집사님이 안수를 했다거나 축도를 했다면 효력 무효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혹시 비판하게 된다면 일반론적으로만 비판합니다. 여자가 목사 되는 문제도 동일합니다.


    교리적으로 인류의 제일 큰 죄인 아담, 둘째 죄인 가인 그리고 성경 기록 최후의 죄인 유다가 모두 택자일 것이고 구약에 기록 된 기준만으로도 이방인들이 받은 구원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인류 전체가 택자일 것이 아닌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구약의 극동 이방인들 역시 그들의 전래 조상들로 내려 온 복음의 흐미한 접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일반 신앙인으로, 우리 공회 입장에서, 목회나 교리나 성경 해석 면에서, 이 노선의 내용적 실질적 광범위한 해석 세계를 알지 못할 때는 흑백논리밖에 없었는데, 흑백논리 중에서도 가장 칼날같은 이 노선을 제대로 알게 되면 그 어느 것도 경계라는 것이 없고 그 접점에서는 융화 되어 하나 된 면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시각을 가지고 다시 양 극단을 조명하게 되면 양 극단은 목회 양육면에서는 흑백으로 쪼개지만 실제로는 하나라는 것이 갈수록 강해집니다.

    1970년대 설교에서 백 목사님은 마치 철학적 융합원리주의라고 비판 받을 정도로 아주 애매하게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만물의 구분이 없어 지는 설교, 물론 신학교 때 들었던 표현 하나를 사용하여 시비 가능성은 없앴지만 분명히 백 목사님의 당시 설교를 듣다 보면 만물이 하나님이라고 듣게 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경우가 가장 확실한 경우인데 백 목사님 삼위일체는 양태론적 이단설입니다. 그런데 신학교 때 들어 둔 역사적 이단의 이름 하나를 기억하고 계셨기 때문에 묘하게 피하 가셨습니다. 백 목사님을 왜 신학 과정에 넣으셨는지 이 대목에서 저는 그 필요성을 크게 느낄 때가 많습니다. 실제 생활 속에서 백 목사님의 세밀한 지도를 지켜 보며 주일과 평일의 차이를 본질적으로 느낄 수 없습니다. 공회 안팎의 소속에 대한 구별이 없습니다. 백 목사님을 잘 아는 사람들일수록 확신을 가지고 죄를 지으면서 떳떳할 수 있는 것이 알게 모르게 번져 나온 이런 목사님의 내면이 그 원인입니다.

    결혼도 어디까지가 간음이며 어디까지가 중매와 연애의 구분점인가, 세례를 주거나 거부하는 대상도 그렇고 심지어 예배와 예배 외의 생활이 이 노선에서는 구분이 없습니다. 찬송 설교 기도라고 하는 예배의 3가지 요소의 구분도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내면을 잘못 대하면 어린 사람이나 복 없는 사람은 그 어떤 방종으로 나가도 오히려 자신이 더 신앙적이라고 확신까지 할 수 있는 세계가 있습니다. 직접 목격하지 않아도 설교만 제대로 좀 살피면 그렇게 되어 집니다. (註우리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집사님에게도 이런 면을 대량 발견할 수 있고 서부교회에는 그런 분이 무수합니다.



    2. 주일에 대하여
    그 생성부터 태양절이라는 이방 절기에 흡수 되었다는 비판으로부터 신학적으로도 명문이 없기 때문에 좋은 뜻이며 나쁜 뜻이든 예수님 생존 기간에 예수님 당신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논란거리입니다. 성경의 정경론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다 기록하는 것이 아니며 기록이 필요 없는 부분은 생략을 한다는 원칙과 오늘 우리 현실을 가지고 다시 짚어 본다면 별로 더듬을 사안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가 예수님 당시는 철이 없었으나 승천 후부터는 생전에 배운 대로 바로 움직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백 목사님 사후 공회가 아무리 천지만엽으로 나뉘어 무엇이 공회냐는 논란이 제기 된다면 좌우를 가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데도 정말 제대로 알려면 그리고 아는 사람들끼리는 아무런 논란이 필요가 없이 과거 공회를 규정하는 것은 낫 놓고 기역을 적 듯 쉽습니다. 예수님 후 시기 사람들 중에서 사도교회의 내부인이 아닌 사람들 또는 신앙 내면에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지금까지 신학의 모든 난제가 다 난제거리지만 내부인 또는 내부인적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는 논란이 된 적도 없었고 될 리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이것은 성경이고 이것은 그냥 내가 적는 설교라고 구별시켰고 그것이 그대로 내려왔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방식이나 모든 것도 다 그렇습니다. 결론적으로 사실 여부는 더듬을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무식하게 그리고 논리 초월적인 증험론으로 해결합니다. 그렇지만 세부 사항으로 들어 가면 그 때부터는 정답이 없는 연구만이 있을 뿐입니다. 기름부음의 현실인도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3. 질문에서
    - 히브리서 3-4장
    모든 다른 성구들이 다 그러하듯 이 노선 세계로 들어오면 꼭 어느 한 경우에만 해당 된다고 찍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양면이 있거나 그 어느 경우에도 다 해당 되는 이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무조건 다 그런 것이 아닌 것은 무교회주의는 부분적으로 그렇게 살아야 할 사람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교회주의가 맞고 그래서 초대교회 이후 지금까지 교회가 형태로도 이어져 왔습니다. 신약은 무조건 무교회주의다 그렇게 말하면 우리는 틀렸다 하고 교회는 교회주의인데 개인적으로 부분적으로 교회주의를 유지하지 않고 무교회주의처럼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신앙과 같다 할 것입니다.

    신약의 거의 모든 것이 다 신령한 면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형식은 최소화에 그치고 거의 대부분은 실질면에 집중하는데 꼭 형식까지 지키는 것이 주일과 교회주의와 성찬과 예배 정도입니다. 구약과 천주교의 그 무수한 형식이 다 없어 졌다고 할 정도입니다만 정확하게 말하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 그렇게 일부는 형식을 굳이 지켜야 하느냐, 그 것은 주님이 필요해서 그렇게 말씀했고, 제자들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에 눈으로 알고 있는 일입니다. 주님이 말씀한 것은 성경이 교회 제도지침서가 아니므로 가부를 구분해 놓지 않았지만 성경에는 없는 이치가 없기 때문에 전체를 자세히 잘 살핀다면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반대로 주장할 사람들에게 그 반대 주장의 근거도 그 만큼은 있습니다. 때로는 더 많기도 합니다.

    백 목사님이 재독을 죄라 했는가 의라 했는가, 더듬을 것도 없이 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를 모르는 일반 공회인 전부가 회의와 싸움을 해 보니까 아니라는 쪽이 증거도 많고 근거도 많았습니다. 전원일치는 거의 전부가 다 반대 쪽이었습니다. 그런데 목격한 사람에게는 그 누가 뭐라 해도 아닙니다. 다만 대외 설득력의 문제일 뿐이었습니다. 주일만 말하기는 어려우나 주일이 꼭 형식적 주일이 아니라면 신약은 사실상 그 어떤 제약도 없습니다. 심지어 굳이 우리의 육체가 7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느냐는 문제도 없습니다. 지킨 사람과 지키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없고 실효가 없고 분리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예는 주로 심한 논쟁으로 갈 때 상대방의 입을 막는 소방수 역할일 뿐입니다만.

    저는 이런 난처하고 애매한 문제, 나만의 경험으로는 단정하겠는데 상대방에게 이치적으로 설명을 해야 할 때 그 설명이 진행되다 보면 상대방에게 네 말이 맞고 그렇게 딱 잘라서 아니라 할 수 없다고 하는 사안이 나올 때는 과거 우리가 지켜 온 입장에 서서 상대방을 설명하지 않고, 반대로 우리가 지켜 온 내용과 달리 생각해 보자는 그 입장에 선 다음 그 사람보다 더 강하게 우리가 걸어 온 걸음을 공격해 봅니다. 주일은 절대로 지킬 필요가 없고 주일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며 교회도 예배도 찬송도 기도도 다 없애야 한다며 초강경 극단적 부정을 해 봅니다. 그렇게 해 보면,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없애면 분명히 안 되겠다, 일단은 필요하구나라는 계산과 느낌과 확신이 바로 섭니다.

    평소 하나님을 봤냐고 물었을 때 자기 속으로 '내가 본 적이 있는가'라고 생각해 보면 의심이 듭니다만 '하나님은 절대 없다'고 극단적으로 단정을 해 보면 '계시지 않는다고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은 믿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쉽게 나오는 느낌이며 단정입니다. 바로 이 것이 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집을 떠나 봤을 때 부모의 가치를 비로소 확신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일은평소 제가 늘 주일과 안식일과 무주일 무안식일 논쟁에서 제 마음에 가져 온 확신이며 설득용 재료입니다만, 12 제사와 그들을 바로 이어 온 초대교회 가장 건전했을 때에 거의 모든 이들이 순교하게 된 이유는 2계명과 4계명이었습니다. 2계명은 행사에서 숨어버릴 수 있는데 4계명은 숨지도 못합니다. 이로 인해 교회의 전 회원이 다 멸종이 되는 상황에서는 만일 초대교회가 형식으로 지키는 문제이며 약간의 신축이 있을 사안이었다면 그렇게 지켜 오면 이어 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 본문을 살피는 일은 이미 아는 문제라 생각 되어 생략합니다.


    - 평일과 주일의 성화
    주일에만 성화 되고 평일에는 자라간다는 설교는 이론적으로 은혜를 받았지 실감하여 내 것이 되지 않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이후에 다시 과거와 당시, 그리고 이후를 살필 때에 확신할 수가 있었습니다. 마치 성경인지 마지막까지 논란이 되었던 히브리서를 놓고 읽어 보라 한 다음에 읽어 보니까 성경이더냐 아니더냐? 맞더라 하면 성경이고 아니더라 하면 성경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교리사이기 때문에 성경이 과연 성경이냐는 것이 끝없는 논란이며 모든 정통교회들의 정경론이 구약의 예언 그대로다, 초대교회 기록이 어떻더라 하는데 우리는 그런 소리 일체를 무시합니다.

    내가 읽어 보니까 성경이더라, 그래서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백 목사님 외에는 입에 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제 수준에서는 백 목사님이 남긴 서류 중에서 백 목사님 장례 후에 대구공회에서 별별 서류를 다 들이밀면서 백 목사님이 이렇게 유언을 남기셨다고 했는데 저는 보면 맞다 아니다 바로 판정했습니다. 바로 이 판정을 2천년 전으로 가져 가서 이것이 바울사도가 남긴 성경이냐 아니냐라고 물었을 때 교회 내부인에게는 의심이라는 것은 있을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성경이면 바로 그 말씀 지키다 그 말씀 때문에 자기는 바로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학습과 결과로 공부하는 사람과 역사를 자기 본능으로 아는 사람의 경우, 전자는 학적으로 검증이 되어 인정을 받고 후자는 헛소리로 잊혀 집니다만 신앙은 후자가 이단들이 써 먹는 주 방법인데 바로 그 방법이 교회가 가질 유일한 방법입니다.



    - 성경 근거
    성경 근거는 그 분량과 내용 때문에 없는 근거는 없습니다. 성경은 그 성경 바로 그대로를 가지고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가 되면서 그 반대가 되기도 합니다. 성구를 개별적으로 살피면 없지만 성구끼리 연결시키면 많습니다. 성경을 지키는 방법도 그렇습니다. 주일에 하숙을 치게 되면 주일에 외상 장사를 하는 것이 됩니다. 성경에도 다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시대마다 각자 자기의 다른 모습에 따라 약간씩 달라 보이기는 합니다만. 또 주일 성수로 복을 받은 경우는 별 비교 연구 대상이 되지 않을 듯 합니다. 사례가 많습니다.

    일반 신앙들에게는 옳은 것을 찾아 가는 과정이 되는 유익면보다 평생에 의심을 갖게 될 손해 면이 클 것 같으나 누구라도 한번쯤 지나가면서 갖게 되는 의문일 것이므로 차라리 공론화 할 내용 같습니다. 한꺼번에 글을 많이 올리면 읽거나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제가 조금씩 나누어 올리면서 시간을 갖고 그 때마다 해당 내용으로 일단 안내를 해 보면 합니다. 글을 더 적으려다 너무 분량이 많아질 것 같아서 초소화했습니다.

  • 2022-10-02 04:29
    공회 주일 문제는 공론화를 피했으면 합니다
    2010-01-01

    일반 신앙들에게는 옳은 것을 찾아 가는 과정이 되는 유익면보다
    평생에 의심을 갖게 될 손해 면이 클 것 같으나
    누구라도 한번쯤 지나가면서 갖게 되는 의문일 것이므로 차라리 공론화 할 내용 같습니다.


    (1) 공론화에는 반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유익보다 손해가 크고 그 미혹성의 힘이 대단히 크기에 공론화에는 반대합니다.
    메일로 질문을 드린 이유도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저와 같은 의문으로 까지 나아가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을 뿐더러,
    답변 하신 것 처럼 이론으로 참인 하나를 구분 지을 정도로 확신을 할수 있는 사안이 아니므로
    이미 잘 믿고 있는 사람들 조차도 미혹이 될까 염려됩니다.

    이렇게 메일로 주고 받는 정도면 충분하고, 후일에 이와 같은 내용으로 논란이 될 것을
    배려하여 아주 가까운 사람들 중에 미혹이 안 받을 만한 분들께
    천천히 전파 정도 하시면 될 듯 합니다.



    (2) 주신 답변에 대한 평가 1
    전반적으로 저와 같은 의견입니다만,
    주일에 관해서는 다른 사람의 인생에 너무도 직접적이며 커다란 데미지가 있는 사안인지라
    나도 의문이 있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무조건 맞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양심에 걸리는 문제가 남습니다.



    (3) 주신 답변에 대한 평가 2
    초대교회에서 4계명으로 순교가 많았다고 하셨는데, 유대인 중에는 있을지 몰라도, 기독교 내부에서는
    2계명을 제외하고는 제가 들어 보지를 못했습니다. 사례를 알려 주십시오,



    (4) 주신 답변에 대한 평가 3
    칼빈의 경우에는 완전희 공회나 청교도들의 주일성수 방식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공회의 주일관과 칼빈의 주일관은 동일하다고 답변을 적은 신적이 수차 있어서 다시 질문 드립니다.

  • 2022-10-02 04:54
    1. 공론화
    끝까지 가야 할 내용을 가지고 믿을 수 있으면 믿어야 하고 끝까지 가야 할 내용에 머뭇거릴 사람은 언제가 돌아 섭니다. 실명을 거론하며 일반인의 개인 비리를 가지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고 7계명처럼 듣는 순간 연상 되는 죄가 번지는 것은 문제지만 이 문제는 공회 신앙이 다 겪고 나가는 것이므로 공론화는 평소 지론입니다. 기회가 없어 따로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2. 초대교회의 4계명 문제와 칼빈의 주일 문제
    칼빈이 꼭 7일이라야 할 것은 아니다고 말한 그 말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않았는가? 칼빈과 칼빈주의는 미국의 청교도까지 이어 오면서 주일에 목숨을 건 사람들입니다. 칼빈이 꼭 7일이라야 할 것은 없다고 말했는지 그 표현은 기억이 없습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만 가지고 한 학기를 배웠는데 제대로 알아 듣지는 못해도 대충 느낌은 있었습니다. 칼빈이 정통 보수 신학에서 진리처럼 지켜 지는 내용 중에 몇 가지를 두고 유보적 입장을 가진 것은 있습니다. 그러나 실행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칼빈이 제네바를 교회 내부 다스리듯 했고 교리가 맞지 않으면 스스로 처형을 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주일을 두고 꼭 7일이 아니라도 된다는 말이 사실이고 또 그 말이 그 글 표현 그대로였다면 주일 문제를 두고 제네바는 아무런 문제가 생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법을 제네바 시민들이 시의 법처럼 지켜야 했던 제네바의 분위기와 주일 문제를 엄하게 집행했던 당시를 생각한다면 칼빈의 주일관은 오늘 우리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교리서에서 꼭 7일을 고집하지 않는다고 했으면 이 내용은 칼빈이 몇몇 다른 논점에서 좀 애매하게 표현한 듯 했으나 칼빈 스스로는 자신의 길을 가지고 있었고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걸어 갈 길의 공간을 인정한 정도가 아닐까 추론합니다.

    로마 초대교회의 경우는 주일성수 때문에 직접 박해를 당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려 하면 사회생활 속에서 믿는 사람임이 드러나게 되고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 로마정권은 2계명으로 그들을 시험했고 마지막에는 그 죄 때문에 처형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일반 신학자료나 역사자료를 뒤져야 할 증거들은 한번 봐 두면 따로 적거나 기억하지 않아서 일일이 제시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신약교회 역사를 통해 불신사회나 여건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우상에 앞서 주일문제에서 먼저 부딪히게 됩니다. 매주 한번씩 생활 속에서 바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칼빈의 경우는 우리와 같다 다르다는 특별한 자료가 기억 되는 것은 없고 칼빈과 우리가 다르기 때문에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을 찾아 본 일이 있었는데 당시 주일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 2022-10-02 04:57
    공론화를 피하고자 하는 이유는 회피가 아니라 명확해지지 못할 것에 대한 우려입니다.
    2010-01-03



    1. 7계명 처럼 언급자체로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니나
    명쾌하게 해결이 되지 않는 다면 평생에 의문으로만 미혹으로만 남는 문제라 공론화를 피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 문제로 오늘날이란 성구를 현실로 고민할 자 그리 많지 않다고 봅니다.


    2. 칼빈 뿐만 아니라 루터도 어거스틴도 저스틴도 동일한 입장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목사님 말씀 하신 것 처럼 초대교회에서 주일 성수는 안식일 배격과 더불어 시행되어 진 것으로 받아들여 집니다만, 예배만 드리느냐? 아니면 엄격한 주일 성수였느냐에 대해선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초대교회에 예배로 모인 주일성수가 아니라 엄격한 주일성수로 2계명으로까지 번졌다는 것은 추측입니다. 엄격한 주일 성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립 이후로 알고 있습니다. 그후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배격되고 다시 청교도들에 의해 부활 된 것이 정론입니다.


    3.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확신 하겠으나, 설명을 못하시겠다란 것도 명확해 질수 없습니다.
    진리는 누구에게나 들어맞아야 진리인데,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되고는 아니라고 봅니다. 주일날 성화가 된다는 것도 이치상 맞지가 않으며 '이 날이 저날 보다 낫다'를 비판한 성경과도 반대로 보입니다. 또한 주일로 인해 손해 본 것이 주와 주의 말씀을 위해 손해 본 것이라면, 멀리 갈 것도 없이 세상에서 여러배 받아야 할 사람이 우리 주변엔 많아야 되나 오히려 전무 하다란 것 입니다.



    4. 바울의 전도여행에서 주일 성수가 그렇게 중요했다면 신약성격 어디에서라도 신약의 유일한 의식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 흔적이 있어야 되는데 없다는 것도 여전히 의문입니다.



    5. 날자만 바뀌고 의식은 그대로라 한다는 것은 과연 성격적인 지지를 받을수 있을지 이 또한 명확해 지지 않습니다.



    6. 개인적인 경험을 돌이켜봐도 안지킨 것 보다는 지킨 것이 대부분이어서 그 경험이 엄격한 주일성수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구분이 불명확합니다.



    7. 현실적인 부분도 무시 못합니다. 사람을 위하고 인자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 중에 주일에 매매를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만, 저희 공회는 그것마저 금지하고 있습니다. 백목사님이 주일에 상대방이 죄를 짓지 않게 끔 하기 위해 택시를 안타시고 걸어 가셨다란 설교는 은혜는 되나, 그렇다면, 전기는 왜 쓰고 물은 왜 마시는 지? 너무도 모순됩니다.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거치는 것이 없어야 바리새인들과 다른 것 아닙니까? 응급실, 소방소, 군인, 전쟁 등 너무도 이러한 예는 많습니다.



    8. 이 모든 것에 명확한 답변을 하실수 가 없기에 공론화를 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2022-10-02 04:59
    명확해 질 수 없는 '성경의 정경 확정과 그 결정 과정'과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도 교회는 노력했고 그 객관적이지 않은 설명을 가지고 당시도 그리고 오늘까지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였습니다. 당시 아리우스와 정통 교리를 사이에 두고 오고간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 당시는 사실 이단과 정통이 이론에서는 존재했으나 현실적으로는 누가 어디까지 이단인지 정통인지 객관적으로 구분할 수 없는데도 뒤 날 보니까 열매로 볼 때 그 결정은 옳았습니다. 처음에는 이론적으로 끝이 없는 논쟁만 만들어 냈을 뿐이었는데 결과로 볼 때 아무 이의도 토씨도 달지 못하도록 이단론은 결말이 그렇게 나갔고 정통 교회도 그 어떤 이론이 설명할 수 없는 결론을 냈습니다.

    따질 데까지 따진 후 어떤 것은 마음 속에 숙제로만 생각하고 행동으로는 드러 내지 않아야 할 문제도 있고, 어떤 문제는 명확하지 않은 데도 신앙 본능을 따라 더 나가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험이나 도박처럼 그렇게 보이는데 그 상황에서는 더 이상 설명이 아니라 그냥 각자 갈 길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교회 분리나 노선 분리는 진정 신앙다운 모습이고 분리는 자연스럽고 필연적 입니다. 지역이나 이해득실에 따른 일반 분열과는 차원이 다릅니다만 훗날 결과를 놓고 본다면 후자는 애들 장난이었기 때문에 다시 고칠 수도 있고 그 폐해가 적은데 오히려 진실한 사람들의 제대로 된 고민과 결과는 그 폐해가 인간 수준을 넘어 서 버립니다.


    조금 깊이 있게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사실 신앙의 모든 면에서 단 하나도 빠짐 없이 이런 세계는 다 나타나게 됩니다. 마치 직업을 두고 일반 분류로는 신앙에 유리하고 불리한 것이 있고 또 사회에 대하여 좋은 직업과 해로운 직업이 있지만 조금만 더 들어 가면 좋지 않은 직업의 해는 적고 좋아 보이는 직업의 위험은 인간으로 넘어 설 수 없는 세계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 2022-10-02 05:01
    http://www.chongshin.re.kr/zeroboard/zboard.php?id=study1&no=39

    위의 내용을 보면

    제가 말씀 드린 대로 칼빈이 주일을 교회의 질서 유지를 위하여 일주일 중 한 날을 정한 것이란 의견은 그대로 있으나 목사님께서 말씀 하신 대로 칼빈이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될지에 대한 엄격한 해석이 있어 저번에 제가 한 부분만 본 것을 수정하여 보충 드립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2022-10-02 05:04
    주일 주제 건
    2010-04-25


    평안을 비옵고

    평소 가능한 모든 문제점을 살펴 본 뒤에 결론을 가진 사안이었고 기초 자료를 다시 찾아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원리만 설명 드리고 끝냈습니다. 대화 상대가 그 문제로 신앙에 요동이 있을 수 있다면 시간을 할애했을 것이나 매사 신중한 선생님이라 생각하여 얼마든지 세월 속에 풀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며칠 전에 pkist.net 홈의 /연구실/일반자료/1143번, 안실일과 주일 문제, 양낙홍'이라는 목록이 있었으므로 선생님을 생각하여 유심히 읽어 보았습니다. 그 자료를 올린 것은 2003년이나 당시 주의 깊게 읽지 않고 언젠가 관련 주제로 대화하면서 기초 자료가 필요하면 참고하려고 넣어 둔 것입니다. /일반자료/ 게시판에는 내가 항상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기초 자료로 제시할 내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세한 자료는 과거 사안 별로 한 번씩 본 다음에 그런 외부의 세부 자료까지 살핀 뒤에 마음에 확정이 되면 그 확정과 원리만 남기고 세부 내용은 머리 속에서 비우는 편입니다. 꼭 그 자료가 필요하면 찾아서 제시하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에 신학을 멀리하려는 노력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주일 문제는 어느 교단이든지 문제조차 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좀 깊이 들여다 보는 사람이 없어 필요한 자료를 찾기 어려운데 이 자료는 그래도 어느 정도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자료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선생님이 생각하는 면이 다 맞다는 신학적 기초 사실을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고신의 교수이므로 고신의 분위기나 눈치를 봐서라도 그리고 자기의 정체성을 생각해서라도 주일이 특별한 날이라고 강하게 주장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역사적으로 그런 여지는 전혀 없다는 것이 논문입니다.

    그런데 그 교수의 말한 내용 전부를 일일이 다 따라 가며 읽어 보면서도 역시 우리 공회 주일관이 그 자료에 의하여 맞다는 것이 그 자료의 내용에서 다 증명이 되므로 선생님에게 참고 자료로 전합니다. 이 자료를 이미 검토했는지도 모르겠으나, 일단 이 자료의 내용만 가지고도 나는 그 교수의 주장한 결론과는 다른 결론을 가진 공회의 입장을 유지하는데 그 자료가 오히려 참고 자료가 된다는 입장입니다.



    선생님이 개별적으로 연락했던 내용이며 이 노선 주일관이 맞다 해도 객관적으로 맞다고 하려면 선생님 지적은 우리가 반드시 넘어 가야 할 문제점을 거론한 것이어서 참고로 전합니다.

  • 2022-10-02 07:20
    종교개혁 당시에 중세교회는 여러절기를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이 팽배했습니다.
    그래서 칼빈을 포함한 종교개혁자들은 주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도 중세교회의 행위구원으로 연결될 까봐 조심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신칭의교리가 확립이 되고 시간이 좀 지난 청교도시대가 되었을 때는 주일성수에 철저하게 됩니다. 왜냐면 중세교회의 절기를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폐단을 모두 없앴기 때문입니다. 청교도시대는 성화를 강조하는 시대여서 자연스럽게 주일성수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공회교리사적으로 종교개혁은 기본구원을 확립하는 시기였고 그 이후 시대는 점점 건설구원으로 나아가는 시대였기에, 종교개혁시대때는 굳이 주일성수를 강하게 주장할 필요가 없는 시대였던 것 같고, 그 이후 시대는 주일성수를 중요하게 말하고 지켜야 하는 시대 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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