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공회 발언/연구

생의 자료를 모두 주시면서 - 박윤철 목사님을 그리며

발언
작성자
ylee
작성일
2019.01.11



'기증'
1. 본인 소장 테이프
2. 박혜영 유품 (필기 노트) 전체
위 물품을 이영인 목사에게 기증함
1997.12.5.
목사 박윤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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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를 처음 배우시는 분들에게 '의미' 있는 공회 인물 한 분을 소개합니다.
너무 공회적이지 않으신 분인데, 너무 공회적으로 사시다가 가셨고, 그래서인지 공회를 위해 자신이 가진 전부를 기증하셨으며, 그 뜻을 아는 사모님은 목사님 사후에 박윤철 목사님의 남은 유품까지 다 연구소에 제공해 주셨습니다.


다음 내용은 앞으로 출간 될 '총공회 인물서에 올려 질 내용이나 정서가 되지 않았음을 양해 구합니다.
구 게시판에 올렸던 내용입니다. 이 좋은 내용들이 외부에 무제한 나가는 것을 막는 세력이 있다면 지금쯤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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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박윤철
부제: 평생에 공회 신앙노선에 일관되었던 80년대 행정실장

1916. 평남 강서 출생
1925. 만주로 이주
1948. 만주에서 귀국
1950. 부산 동광성결교회 장로
1954. 부산 서부교회로 출석
1974. 경북 의성군 화전교회 전도사, 공회 목회자로 출발
1977. 경북 청도군 청도읍교회 전도사
1979. 경남 거창군 도평교회 부임
1980. 목사 안수
1980. 총공회 양성원 교학실장
1987. 서울 동문교회 목사
1988. 경남 거창군 창북교회
1994. 전남 여수시 묘창교회, 80세까지 목회를 하시다가 이후 93세까지 주로 거창에서 기도하며 말씀을 연구하다
1997. 이 곳 연구소에 '백영희 관련' 자신의 평생 기록 일체를 기증하고
2006. 별세하시다.


가족으로는 신현자 사모님과 사이에
아들 3명, 딸 2명이 있습니다. 사위 두 분이 대구공회 지도자로 계시는 김명재 목사님과 교계에서 활동하는 마호군 목사님인데 두 분이 원래 서부교회 중심 교인으로 백 목사님께서 직접 지도하셨던 분들입니다. 온 가족이 본 연구소를 격려하고 마음 깊이 성원하는 분들입니다. 특히 막내가 되는 박정미 사모님은 1982년 당시 연구소가 서부교회 편집실로 출발하던 첫 해부터 직원이었습니다.



(소개)

성결교 장로님 출신으로 서부교회로 와서 백목사님을 따르게 되었고, 70년대에 은행에서 은퇴하고 목회를 시작했고, 1980년대 양성원 교학실장으로 가장 오래 계셨습니다. 특히 그 기간동안에는 백목사님 이후 총공회 신앙노선이 여러가지로 분화될 사안들이 많았기 때문에 현재 각 공회의 본질을 가장 잘 알고 계실 분으로 부부가 함께 평생 백목사님 신앙노선에서 한번도 이탈되지 않고 나왔던 분으로는 거의 유일한 분입니다.

백목사님의 행정이나 회계 서기가 나인숙이었다면, '설교' 서기는 박혜영 집사님인데 박 목사님의 3세 아래 동생입니다. 1984. 12. 4. 돌아 가실 때 66로 만 40년간 백목사님 말씀을 노트에 기록했던 분입니다. 이화여대 출신으로, 복음 때문에 미혼으로 평생 독신을 지킨 분입니다. 그런 분으로 서부교회에는 추순덕 장정애 두 분이 더 계셨습니다.



(일제 시대와 성장 배경)

1916. 1. 14. 평남 강서군 적송면 삼부리 516번지 출생이며, 조부가 1906년경 복음을 받고 제사를 완전 폐했습니다. 건너 마을 적근리에 소재했던 감리교회르 다녔고, 모친은 소학교에서 교직을 가졌고 신앙이 깊었습니다. 부친이 3.1 만세 운동 때문에 만주로 먼저 이주하게 도었고. 만주 영구 전장터가 개간되고, 한인들의 이주로 밭농사 밖에 모르던 곳에 벼농사로 정착되자, 9세 되던 1924년, 모친과 누이 박혜영 등 세 식구도 만주로 이주하여 정착했습니다. 영구에 있던 일본인 심상 소학교 6년을 졸업한 후, 장춘 상업학교를 끝내고 1935년 일제가 만주에 세운 만주 철도회사 운영의 '무순 탄광'에 취직합니다. 학교를 다닐 때 럭비와 스케이트가 특출하여 회사에 입사하게 되자 상고 출신으로 보통 맡게 되는 일반 경리 보직이 아니라 이주민 주거지역을 담당하는 토지계를 맡게 됩니다. 한국은 해방 후 70년대가 되어서야 신택지 조성이 본격화 되지만 일제는 1930년대에 벌써 당시 만수에 혼하 강변 신택지 조성공사로 몇천 호를 이주 시키는데 그 일을 주관하게 되면서 평생 부동산 평가 등에 관련 된 업무를 하게 됩니다. 당시 부서에서 채탄용 부지와 관련하여 보상금을 책정, 지급하며, 기타 용지의 사용, 임대, 경작이 업무였습니다. 1945년 일제가 망할 때까지 근무하게 됩니다. 1940년 스피드 스케이팅 만주 대표 선수로 선발 되어 일본과 한국과 만주를 포함하는 3개국의 전일본 선수권대회에서 1위를 합니다. 이 때 경력 때문에 삿뽀르 동계 올림픽 대표 선수가 되어 훈련을 받던 중 세계 제2차대전 발발로 올림픽 경력은 무산됩니다. 회사에 럭비팀을 창설하여 만주 대표가 되는 등 운동에는 만능이며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 와서도 평생 빙상연맹의 큰 어른으로 대접 받고 살았습니다.

1940. 5. 16일에 결혼합니다. 신현자 사모님은 평북 양시마을 양시성결교회 목사님의 모태 신앙입니다. 일본 도요하시에서 여학교를 다녔습니다.

박윤철은 고향에서 감리교 교회를 다녔는데 만주에서는 성결교회로 출석했습니다. 당시 무순에는 봉천(심양)합동신학교가 있었고 박윤선, 박형룡박사가 신학을 강의했습니다. 해방 후 고신의 송상석 목사님의 청빙으로 박형룡 박사가 남하하여 고려신학교가 출발됩니다. 무순 성결교회에서 주교 부장으로, 집사로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만주로 나와 이 지역을 들렀던 김창인, 박리현 두 사람의 열렬한 기도와 신앙을 보며 국내 신사참배 상황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해방 후 혼란과 귀국)
해방 후 중국은 좌우 내전이 벌어졌고 만주는 어느 정도 조용했습니다. 해방 후 2년 반이 지나면서도 회사에 계속 근무를 했습니다. 당시 팔로군과 소련군이 무순 탄광의 기계 자재들을 계속 징발하게 되고 심지어 길을 가다가 직접 차고 있던 만년필을 군인들이 그냥 빼기는 정도의 분위기였습니다. 한 번은 자전거까지 압수를 당했으나 4급 소련 통역을 할 수 있어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소련군이 회사에 시찰을 나오면 통역을 맡고 있었습니다. 원래 만주철도회사 내 어학검정시험에서 1등을 했습니다.


1948. 5. 회사 근무 중, 팔로군과 소련군이 군정을 확보하며 공산 치하가 확립 되어가는 도중에 장개석의 국부군이 진출하였는데, 대도시는 국부군, 농촌은 공산군이 잠입하던 때였습니다. 일단 국부군은 전투 없이 도심을 점령했으나 국부군은 군으로서 이미 부패되었고 공산군은 준비가 된 상태였습니다. 1948년에 만주까지 공산화가 완료될 직전, 도시 외곽들이 공산군에 의하여 도로가 차단됩니다. 그래서 봉천에서 북경까지 비행기로 이동하고 한국 교민회가 일본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와 중국의 장개석 정부 협조로 8차에 걸친 철수작전이 있었습니다. 그 3차 철수하던 일본 연락선으로 인천 피난민 수용소에서 3주를 생활합니다. 그 과정에;서 전주 성결교회를 맡고 있던 장인이 사위 가족의 명단을 확인하여 겨우 전주로 가족이 합류합니다. 전주에서 상업은행에 취직을 했으나 전주 지점장이 부산 지점장으로 이동되면서 동행하여 부산 생활이 시작됩니다.



(6.25 전시)

1950년에 전쟁이 발생합니다. 피난 온 친지들 때문에 은행 직원으로 있던 박윤철의 주택에는 55명이 거처를 정하는 정도였습니다. 교회는 용두산 아래 있던 동광성결교회를 다녔습니다. 1953년, 36세에 성결교 장로가 되었고 그 안수식은 이명직 목사님이 주관을 했는데, 그 분은 한국 성결교회의 지도자로서 일제 말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라고 주장을 하며 일본까지 가서 '미소이 바라이'를 했던 서울신학교 교장, 오늘의 서울신학대학 총장입니다.

전국의 마지막 피난처였던 부산에는 몰려 든 피난민으로 북적였고, 피난 온 교인들을 중심으로 회개운동과 기도운동은 뜨거웠으며 많은 교회들이 생겨지며 부흥회가 많았습니다. 우연히 길에서 백영희 조사님의 집회 포스타를 보게 되었습니다. 위치가 살고 있는 곳에 부근 있는 부민교회와 동시에 집회가 있어 마음에 걸렸으나 함께 살던 동생 박혜영과 또 교회를 함께 다녔던 이복순 집사님과 지금까지 믿어 왔던 방향과 전혀 다른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바로 서부교회로 출석을 했고, 박윤철 목사님은 일단 밤 예배만 계속해서 다니며 말씀에 끌렸으나 주일은 성결교회를 그대로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954년이 되어서야 서부교회로 정식 출석했습니다.



(새로 출발한, 공회 신앙)

박 목사님은 성결교회의 중생교리가 특별하여 이 점은 아주 명확하게 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중생이 될 때 그 증거는 떨림이나 환상 등을 보게 되고 그 다음에는 성결의 은혜를 받게 되는데 이때는 원죄까지 완전히 뿌리가 뽑혀 버리고 자기가 중생한 날이 생일 같이 확실하게 되며 중생 이후에는 죄질 생각까지 없어져서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그러나 성결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도 그 후 죄를 짓는 것은 알고 보면 마찬가지였습니다. 백 목사님은 요3:3에서 바람 부는 것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지 중생을 한 후에도 우리는 계속 '자라간다'고 가르쳤는데 맞는 말씀이었고 점점 교훈에 확신을 하게 됩니다.

백 목사님은 전국 사경회 일정 때문에 서부교회 본 강단 설교는 집사님들에게 주로 맡겼습니다. 50년대까지는 주일 밤에 예배가 있었고, 주일 밤 예배를 오후 2시로 바꾼 것은 김현봉 목사님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1959년경 상업은행의 서울 본사에 감정과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부산에서 생활을 일단 끝내고 서울에서 공회 교인으로 이어 가게 됩니다. 상업은행의 본사에서 기술조사과장으로 1971년 1월, 만 55세 정년 퇴직합니다.



(목회 여정)
신앙 있는 사람이 세상에 너무 오래 붙들려 있었다며 늘 안타까워 하시던 백 목사님은 드디어 공회를 위해 목회자로서 또 공회 행정을 위해서 인재를 갖게 됩니다.

1974. 03. 24. 경북 의성 화전교회
1977. 11. 10. 경북 청도읍교회
1979. 11. 22. 경남 거창 도평교회
1980. 12. 09. 총공회 양성원의 교학실장 행정실장 겸임
1987. 10. 29. 서울 동문교회
1988. 12. 13. 경남 거창 창북교회
1994. 03. 25. 전남 여수의 묘창교회에서 일단 목회 충성은 마칩니다.





하중앙: 백영희 (흰 머리)
하우측: 박윤철 (백 목사님 옆 흰 샤츠)




( * 큰 딸 가정)
김명재 목사님, '총공회/소식' 2002-03-30

김명재 목사님
백 목사님께 직접 배운 서부교회 교인으로 반사와 집사를 거쳐, 1978년 전도사로 출발합니다. 당시 김병춘 이상규 훗날 목사님과 함께 나갑니다. 경남 밀양의 시산교회를 거쳐 서울 상도동의 상남교회, 이후 경북의 구미교회를 거치며 가는 곳마다 교회의 부흥이 엄청났습니다. 백 목사님 장례 후 공회의 분리 과정에서 온건 보수를 표방하는 대구공회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서울 상남교회를 맡아 현재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특히 설교로 정평이 있어 공회 내에서 최고의 사경회 강사로 알려 져 있습니다. 원래 지성적인 분이어서 신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본 연구소와 모든 심정을 함께 하시나 이 곳은 입장을 매사 좀 강하게 가집니다.



( * 둘째 딸 가정)
마호군 목사님, '총공회/소식' 2004.4.8.

소개할 분량이 너무 많아서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경남 거창 출신이며 사업을 하던 교인이어서 목회나 신학에서는 일반적일 것이라고 선입견을 가지면 안 되는 발군의 인재입니다. 이 곳 연구소는 백 목사님 사후 제1순위로 모시고 싶었고 또한 이 곳에서 평생을 함께 할 분으로 봤으나 당시 약간의 시각 차이가 있어 오늘까지 늘 아쉬운 마음 그지 없습니다. 그 분도 마찬 가지일 듯합니다.




(연구소와 관계)
박윤철 목사님은 그의 평생이 '은행'에서 '조사'를 담당해 왔고, 선천적인 성격까지 완벽주의였던 배경으로 이 노선에 들어온 이유가 오로지 이 노선이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모든 자료의 형성과 관리에 철저했던 분입니다. 연구소가 1982년 백 목사님의 지시로 서부교회 편집실로 출발할 때부터 백 목사님의 모든 음성의 녹음을 독자적으로 진행했고, 연구소가 업무로 녹음을 해도 혹시 싶어 별도로 녹음을 했기 때문에 연구소 젊은 직원들이 실수로 녹음에 부실이나 잘못이 있는 경우, 즉시 박 목사님께 자료를 구해 보충했을 정도입니다. 또한 연구소가 출간하는 모든 서적은 토씨 하나까지 일일이 녹음과 대조하여 평생 그 정오표를 깨알처럼 적어 보내 오셨습니다. 특히 박 목사님은 연구소가 공식 예배 중심으로 녹음을 하다가 '교역자회' '권찰회' '반사회' '각종 임원회' '개인 심방' 등의 비공개식 자료를 수백 개나 별도 보관하였고 박 목사님의 3세 아래 누이 박혜영 집사님은 1979년 이전의 필기 시대를 전부 기록한 분인데 그 자료까지 모두 본 연구소에 기증을 했습니다.



(공회 역사 모든 교학실장의 자료 기증)
부산 연구소가 부친의 상속권을 주장할 개연성을 미리 보시면서 박 목사님 자신의 모든 보관 기록은 이 곳에 기증을 했습니다. 또한 80년대의 교학실장으로 보관한 모든 자료도 전부 주셨습니다. 박 목사님의 자료 기증 이후 박 목사님 앞에 교학실장을 역임한 김철수 목사님은 공회를 비판하고 탈퇴까지 한 인물이나 총공회의 역사적 의미만은 분명하고 그 연구의 노력과 정통성은 세월을 놓고 볼 때 이 곳이 옳다면서 그 분 역시 임종 전에 모든 자료를 기증해 주셨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백 목사님 사후에 공회 최장수 교학실장이었던 이만기 목사님이 부산공회의 모든 자료를 수개 월에 걸쳐 이 곳에 모두 기증하고 불과 몇 년 전에 별세를 하게 됩니다. 공회 분리 과정에 감추고 싶었던 모든 부끄러운 자료를 하필 그 분이 중심되어 제명했던 이 곳에 모두 주고 가신 것은 주님이 인정하고 그 분이 최후 양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기쁜 일입니다. 그 분의 자료를 통해 연구소는 1989년 백 목사님 사후의 공회가 분열 되는 과정에서 소위 '정통'을 주장했고, 일견 그럴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부산공회의 내부 문건 전부를 갖게 됨으로 30여년 걸쳐 본 연구소가 주장해 온 것을 모두 입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입증이 큰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해 주심을 감사할 뿐입니다.

복음에 필요한 교회의 자료를 감추려 하는 자? 말뚝에 목을 맨 염소가 뱅뱅 돌다가 자기 행동으로 목매달고 죽습니다.
복음에 필요한 자료를 무제한 무한정 제공하려는 자? 달팽이처럼 기어 가던 어린 이 연구소가 역사교회를 맡게 됩니다.
전체 2

  • 2019-01-11 18:17
    박윤철 목사님 자녀들을 잘 압니다. 사위 2명 목사님은 부친 자료를 누구보다 욕심 내고 아끼는 분들입니다. 그런데도 부친 목사님을 알기 때문에 이왕이면 공회의 연구소를 대표하는 곳에 기증했다고 오히려 감사합니다. 만에 하나 그냥 가셨다가 자자손손 어느 날 누구 하나라도 하나님과 공회의 것을 상속 재산이라고 말하면 가문이 어찌 될 겁니까?

    박 목사님은 인간적으로 백 목사님 7남매 자녀 전부와 특수관계입니다. 너무 잘 아는 사이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백번이라도 부산연구소에 끌렸을 분인데 과연 주님 앞에 옳게 하셨습니다. 최근 사건을 보니까 당시 일이 더욱 빛이 납니다.

    Always, two way.
    Only, one way!

  • 2019-01-18 20:22
    서부교회 예배시간 나무판대기 양손에 고무줄로 걸고 장탁자를 두들기며 예배를 방해했던 하나님앞에 대역죄인들이 대구공회 인간들이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셨지마는 회개없이 주님앞에 갔다면 주님의 그 복수의 형벌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회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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