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의 과실에 대한 정의와 실제 사례(이동-관)
작성자
교인
작성일
2023.09.14
(23.09.14. 게시판 성격에 맞게 발언 > 총공회 발언 게시판으로 이동하였음 - 관리자)
창세기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2:15-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요한1서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선악과는 죄짓는 행위, 생명과는 의를 행하는 것이라면 임의과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는가?
임의의 과실은 죄도 아니요 의도 아닌 상태라면 사활 대속에 나오는 죄의 종류를 기준으로 설명해 본다면
임의과란 불법죄도 아니요 불의죄도 아니요 불목죄도 아니요 영생의 소망에 대한 낙망죄도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죄를 안 짓거나 의를 행하거나 화친이나 소망을 품지도 않는 중간 상태가 임의의 과실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현실에서 예를 든다면 임의의 과실을 먹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학생이 학교 수업 시간에 임의과란 어떤 행동을 말하는가?
부모가 직장에서 또는 가사에서 임의과란 어떤 행위를 일컫는가?
교인이 주일날 예배시간에 임의과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가?
장래 진로와 전공, 결혼을 두고 임의과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소질과 범위, 분량과 위치가 각각 다르고 다양하기에 죄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 선택할 수는 있겠지만 어떤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 주일성수와 집회 참석을 위해 더 유리하고 신앙 자유할 수 있겠는가? 네가 임의로 자유롭게 선택해라.
임의과란 불법죄도 아니고 죄없는 상태도 아니요, 의도 불의도 아니라, 불목도 화친도 아닌, 소망도 낙망도 아닌 상태라면 현실을 통과하기 이전 즉 죄와 의, 선과 악이 결정되기 전 내 임의로 무슨 사안을 결정하기 전을 두고 임의의 과실이라 할 수 있는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연보처럼 얼마를 감춘 것은 선악과, 정한 금액을 다 드렸다면 생명과, 이렇게 할지 저렇게 할지 고민하는 중일 때를 임의과라 정의한다면 현실에서 어떤 일을 결정하기 전, 모든 마음의 상태를 두고 정의할 때 임의과라 하겠는가? 그렇다면 모든 현실이 임의과라는 말이 되는데 좀더 명확하고 뚜렷한 정의를 구한다면...
사도행전 5:3-4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현실에서 위와 같은 상태란 어떤 경우인지 임의의 과실에 대한 정의와 현실에서 실례를 들어 다양한 분들의 의견이나 답변을 들어 봤으면 합니다. 다양한 의견이나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한다는 말씀처럼.
아니면 아래 성구들처럼 해도 되고 안해도 되지만 구윈에 유익한 쪽으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 임의과일까? 나는 천국을 위한 고자인 것 같으니 그냥 미혼으로 살까 이리면 결혼할까, 아니면 혼인시기, 언제 결혼할까, 이혼을 할까 말까, 재혼을 할까 말까, 식물, 돼지고기를 먹을까 말까, 중고등학교를 갈 것인가? 아니면 검정고시 길을 선택할 것인가?
20살에 대학을 들어가고 직장 선택후 30대에 결혼할 것인가? 아니면 20대 초반 일찍 결혼해서 다자녀의 복을 누릴 것인가? 직장을 계속 다닐 것인가? 아니면 집회, 양성원 등 신앙 자유가 가능한 개인 사업을 시작힐 것인가? 등등 하나님 각자 다양한 그릇으로 쓰시기 위해 어떤 사람은 20대에 결혼케 하시고 어떤 사람은 30대에 결혼케 하셔서 임의의 과실이라는 결과를 두고 서로 배우게 하시는가?
임의과란 어떤 사안을 두고 결정해야 할 때 본인에게 하나님이 예정해 두신 것을 찾아가게 하는 나침반 같은 것일까? 결혼할 시기에 부모님의 지나친 간섭이나 본인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강하면 임의과는 작동되지 않으니 그릇된 결정을 하기가 쉽다.
고린도전서7:8-9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린도전서8:8,9,13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창세기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2:15-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요한1서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선악과는 죄짓는 행위, 생명과는 의를 행하는 것이라면 임의과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는가?
임의의 과실은 죄도 아니요 의도 아닌 상태라면 사활 대속에 나오는 죄의 종류를 기준으로 설명해 본다면
임의과란 불법죄도 아니요 불의죄도 아니요 불목죄도 아니요 영생의 소망에 대한 낙망죄도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죄를 안 짓거나 의를 행하거나 화친이나 소망을 품지도 않는 중간 상태가 임의의 과실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현실에서 예를 든다면 임의의 과실을 먹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학생이 학교 수업 시간에 임의과란 어떤 행동을 말하는가?
부모가 직장에서 또는 가사에서 임의과란 어떤 행위를 일컫는가?
교인이 주일날 예배시간에 임의과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가?
장래 진로와 전공, 결혼을 두고 임의과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소질과 범위, 분량과 위치가 각각 다르고 다양하기에 죄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 선택할 수는 있겠지만 어떤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 주일성수와 집회 참석을 위해 더 유리하고 신앙 자유할 수 있겠는가? 네가 임의로 자유롭게 선택해라.
임의과란 불법죄도 아니고 죄없는 상태도 아니요, 의도 불의도 아니라, 불목도 화친도 아닌, 소망도 낙망도 아닌 상태라면 현실을 통과하기 이전 즉 죄와 의, 선과 악이 결정되기 전 내 임의로 무슨 사안을 결정하기 전을 두고 임의의 과실이라 할 수 있는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연보처럼 얼마를 감춘 것은 선악과, 정한 금액을 다 드렸다면 생명과, 이렇게 할지 저렇게 할지 고민하는 중일 때를 임의과라 정의한다면 현실에서 어떤 일을 결정하기 전, 모든 마음의 상태를 두고 정의할 때 임의과라 하겠는가? 그렇다면 모든 현실이 임의과라는 말이 되는데 좀더 명확하고 뚜렷한 정의를 구한다면...
사도행전 5:3-4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현실에서 위와 같은 상태란 어떤 경우인지 임의의 과실에 대한 정의와 현실에서 실례를 들어 다양한 분들의 의견이나 답변을 들어 봤으면 합니다. 다양한 의견이나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한다는 말씀처럼.
아니면 아래 성구들처럼 해도 되고 안해도 되지만 구윈에 유익한 쪽으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 임의과일까? 나는 천국을 위한 고자인 것 같으니 그냥 미혼으로 살까 이리면 결혼할까, 아니면 혼인시기, 언제 결혼할까, 이혼을 할까 말까, 재혼을 할까 말까, 식물, 돼지고기를 먹을까 말까, 중고등학교를 갈 것인가? 아니면 검정고시 길을 선택할 것인가?
20살에 대학을 들어가고 직장 선택후 30대에 결혼할 것인가? 아니면 20대 초반 일찍 결혼해서 다자녀의 복을 누릴 것인가? 직장을 계속 다닐 것인가? 아니면 집회, 양성원 등 신앙 자유가 가능한 개인 사업을 시작힐 것인가? 등등 하나님 각자 다양한 그릇으로 쓰시기 위해 어떤 사람은 20대에 결혼케 하시고 어떤 사람은 30대에 결혼케 하셔서 임의의 과실이라는 결과를 두고 서로 배우게 하시는가?
임의과란 어떤 사안을 두고 결정해야 할 때 본인에게 하나님이 예정해 두신 것을 찾아가게 하는 나침반 같은 것일까? 결혼할 시기에 부모님의 지나친 간섭이나 본인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강하면 임의과는 작동되지 않으니 그릇된 결정을 하기가 쉽다.
고린도전서7:8-9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린도전서8:8,9,13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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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는 수입의 10분의 1로 계명에 명확히 명시를 했으니 당연히 드리는 것이고 나머지 10분의 9를 가지고는 각자 믿음의 정도에 따라 임의로, 자유롭게 그 마음에 정한대로 십일조를 드린다고 한다면, 백목사님의 경우는 사례 중에서 10의 2조를 십일조로 공식적으로 교회에 연보하시고 나머지 10의 8조 대부분을 개척교회 세우는데 사용하시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10의 1조면 충분하고 나머지는 의식주나 자기 취미, 여행, 가족만을 위해 임의로 편하게 사용하면 된다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극과 극의 차이가 있는 이유가 믿음의 분량이나 정도가 제각각 사람마다 다르다 보니 - 모든 것을 자유로 결정하되 그 자유가 구원에 유익되게만 사용할 수 있다면 내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사람이 될 때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 즉 지금의 우리 현실에 임의의 과실을 두신 목적이 무엇이겠는가?를 추가적으로 십일조를 예로 들어 적어 봅니다.
임의로 결혼을 안하고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 본인은 주님과 결혼했다 하여 자기 주변 친구들이 결혼하여 마음이 나뉘는 것을 보면서 미혼으로 주님과 사는 것을 선택하는 이들을 가끔 본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이들은 본인 스스로 결혼에 대해 임의로 결정한 듯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사람에게는 결혼 대신 독신이라는 은사를 주셨다.
그래서 독신으로 사는 사람은 정욕이, 결혼할 사람보다 불타지 않도록 주님이 조절해 주셨다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반대로 결혼해야 할 사람이 본인은 독신의 은사를 받았다며 혼자 살 것을 고집한다면 이 또한 임의의 과실을 잘못 상대하는 것이 될 것이다. 독신으로 살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보는 견해가 맞을 것이다. 대부분은 가정을 이루되 그 결혼할 시기만 사람마다 다를 뿐이다.
그런데 결혼한 친구가 옆에서 보다가 아내도 없이 자식도 없이 노총각으로 처량하게 사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마디 한다는 것이 "친구야! 창세기2장에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네. 내가 좋은 사람 소개시켜 줄 테니 한번 만나보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새출발 하는 게 어떻겠나?" 이런다면 독신이 좋아서 사는 친구의 임의과를 꺽어 버리는 꼴이 되는가?
다음으로 음행의 연고로 이혼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아내가 또는 남편이 몰래 바람을 피웠다 하자. 그럼 당한 사람은 이혼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회개하면 용서해 줄 수 있는 법도 있다. 현재 상태로는 회개할 여지도 전혀 없고 앞으로 변화될 기약도 없다. 음행을 들켰는데도 더 뻔뻔스럽게 큰 소리를 친다. 이혼할 것인가, 계속 살 것인가?
이런 경우를 두고 임의과라 할 수 있는가? 부모가 옛날에는 자식 때문에라도 그냥 살아라 하지만 지금은 장모가 나서서 귀한 딸을 이리 대접했냐고 펄펄 뛰면서 이혼을 부추긴다. 지도하고 안내까지는 할 수 있겠지만 부모가 순간 욱하는 감정이 앞서서 이혼하라 마라고 하는 것은 자녀의 임의성을 망치게 만드는 꼴이 된다.
그렇다면 재혼도 임의과인가? 상대와 사별했다. 그냥 살아도 되고 재혼해도 된다. 이혼한 상대가 재혼했다면 나도 재혼할 수 있는가? 상대가 재혼을 했든 안했든 상관없이 나는 자유롭게 임의로 재혼이 가능한가? 임의과는 최종 본인이 알아서 결정하라는 것인데 옆에서 부모가 가족이 지인이 어떤 조언을 해 줄때 자유성을 해치지 않는 - 선을 넘지 않는 범위는 어디까지겠는가?
임의과는 어떤 사안의 종류에 따라 임의과다 아니다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자유롭게 결정할 때는 임의과지만 그 결정이 나중에 보면 생명과가 되던지 선악과가 되던지 둘 중 하나의 결과를 반드시 낳게 만드는 것인지 아직은 미정이다.
주장1 : 임의과는 생명과, 선악과와는 상관없는 자유성의 선택적인 행위다.
주장2 : 임의과는 결국 생명과, 선악과 둘중 하나로 반드시 결과를 맺게 되어 있다.
결혼해야 할 사람이 또는 재혼해야만 구원을 잘 이룰 수 있는 사람이 고집을 부리며 독신으로 살았다면 선악과를 먹었다 할 수는 있겠지만 천국을 위해 고자로 살 사람, 즉 독신으로 살 사람에게 결혼을 안했다고 하여 선악과라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물론 생명과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이런 사람에게 독신이라는 본인 임의의 선택은 선악과도 생명과도 아닌 말 그대로 임의과인 것이다. 십일조의 양, 결혼할 시기, 전공이나 직장의 선택, 사별후 또는 이혼후 재혼뿐 아니라 어떤 사안에 따라서 또는 사람의 믿음 분량에 따라 달라지는 류의 것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임의과가 널려 있다.
임의과를 제대로 연구해 보면,
상대방의 임의과를 잘 키워주어 억지가 아닌 원하고 원하는 마음을 길러 주려면 부부간, 부모와 자녀간 가정에서 많은 대화가 필요함을 느낀다. 과거 부모가 커가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께 세월 속에 들은 연륜의 이야기들, 일상 속에서 느낀 점을 저녁에 모여 차한잔 하며 나누는 대화 속에서 임의과는 무럭무럭 자란다.
이는 진로나 결혼같이 중대한 결정을 하는데 있어 비로소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장래 진로나 결혼에 관한한 이러한 밑거름의 밑작업은 유치원때부터 말해 두어도 빠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 천국을 우리는 미리 앞당겨 계산하고 예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임의과를 잘못 해석하면 좌로 치우쳐 정죄를 낳거나 또는 우로 치우쳐 방종이 되기 쉽다.
결론적으로 임의과는 자유과이다. 그러나 임의의 그 자유가 결국 자타 구원에 유익되게 사용될 때, 비로소 하나님이 현실이라는 에덴동산에서 임의의 과실을 만든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너무나도 쉬운 결론이지만 자자손손 실천과 그 계대는 갈길이 멀어 보인다. 개인적으로 아직도 더 많은 연구와 실행이 필요한 성경 주제 같다.
며칠전 딸 아이가 동그란 스티커 통을 들고 학교에 갔다. 친구들에게 나눠 주려고 그 통 안에는 여러 종류의 스티커가 수십개 정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방과 후 집에 와서 울상이 되었다. 쉬는 시간에 그 스티커 통을 책상 위에 잠시 두고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보니 스티커 통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속이 상해서 침대에 누워서 훌쩍훌쩍 하고만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보통 네가 이름을 적어 놓았어야지 훔쳐간 도둑보다 훔치도록 기회를 준 네가 더 나쁜 사람이다. 다음부터는 반드시 이름을 적어 놓고 다니고 네 것은 더욱 조심해서 간수를 잘해라. 알았지. 이렇게 결론만 내고 끝내는 경우가 많을 듯 하다.
요즘 성경을 읽다가 임의의 과실이라는 뜻을 묵상하는 중이라서 딸 아이의 이번 사건에 적용해 보기로 했다. 나무라거나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 이전에 왜 하나님이 이런 현실을 주셨을까? 이렇게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자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너라면 어떻게 할 거니.. 부모가 없어도 아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고 싶었다.
다음날 학교 등교 후 한 친구가 자기와 똑같은 스티커 통을 가지고 쉬는 시간에 놀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평소 딸 아이는 본인 스티커 통 앞면에 또 뒷면이 자기가 좋아하는 스티커를 5-6장씩 붙여 두었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 것임을 직감하고 다가가 이 스티커 통 네 거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자기것이 맞다고 했다. 분명 딸 아이가 앞, 뒤에 붙인 스티커가 분명했다. 이 스티커 내가 붙인 거고 내 것이 분명하다며 싸울 수도 있었지만 더 묻지 않고 다시 집으로 왔다. 아이와 여러 말을 주고 받고서 어떻게 처리할까를 두고 부모와 자녀간에 여러 방법을 적어 보기로 했다.
1. 선생님께 말해서 훔쳐간 아이의 버릇을 고쳐준다.
2. 직접 그 아이에게 따져서 내것이라며 달라고 강하게 말한다.
3. 훔쳐간 친구 스스로 돌려줄 수 있도록 그냥 기다린다.
4. 훔쳐간 친구에게 편지와 스티커를 사 주되 스티커 훔쳐간 이야기는 하지 말고 그냥 네가 나랑 같은 반 친구가 되어 줘서 고마워 등등 상대방이 스스로 생각해 보고 양심에 찔리면 돌려주길 기도해 본다.
때론 1번이다. 2번이다. 처럼 안내를 하거나 부모의 생각을 먼저 말해 줘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암튼 위 4가지 중 어느 것 하나 임의로 선택해도 될 것이다. 이런 선택의 결과가 선악과의 사망도 생명과의 생명도 아닌 그냥 자유성을 기르는 결과만 낳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친구들에게 계속 도벽증을 나타내면 분명 선생님에게 말씀드려 조치해야 하는 사안인 1번일 수도 있다.
어쨌든 딸 아이는 4번을 택하기로 했다. 오후에 다이소에 같이 가서 1,000원짜리 스티커를 2개 사 주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원수는 왜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그 다이소에서 전날 스티커 통 훔쳐간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그래서 스티커 중에서 뭐가 좋은지 좀 추천해 달라고 하면서 30분 정도 대화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집에 와서 편지와 함께 예쁜 포장지에 정성을 담아 포장한 뒤 다다음날 그 친구에게 선물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선물한 바로 그 다음날 학교에 갔는데 훔쳐간 스티커 통을 아무말 없이 돌려 주었단다. 친구의 머리에 숯불을 올려 놓게 된 것이 선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고 좋아라 했다. 그 친구를 위해 꾸준히 기도해 주고 기회가 되면 예수님 믿고 우리 교회 주일학교 예배 한번 와 보라고 하면 좋겠다는 조언도 덧붙여 주었다.
이를 통해 딸 아이가 어떤 선택을 할지 지켜보며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결론을 먼저 제시할 것이 아니라 자녀의 마음 속 깊은 우물물인, 임의의 생각을 끌어내는 것이 필요함을 느꼈다. 임의과는 당혹스런 상황속에서도 흥분하지 않고 기치를 발휘할 수 있는 다양한 생각들이라 생각한다.
하나님도 내게 이런 상황을 주실 때 넌 어떻게 할 거니? 하고 물을 때가 종종 있다. 기도 안해도 다 들어주실 수 있지만 내 형편 다 아시니 저는 무지하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나님 뜻대로 다 해 주옵소서 보다는 물론 마지막은 그래야 하겠지만 우선은 네 소원은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이런 임의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기도 응답 이상의 것, 하나님과 의중이 하나되는 수입을 얻게 되는 것 같다.
본 연구소는 일상 속 일어났던 일들을 그대로 적지 않고 이치만 따져서 적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직 실력이 안되는 필자의 부족이다.
임의과는 풀어야 할 숙제를 주시고 네가 어떻게 하는가 한번 보자. 할 때에 사람 눈치나 주위 시선 또는 부모님의 안내나 목회자의 지도를 받기 전에 가장 먼저 내 안에 기름부으심을 의지하는 임의성이 아닐까 싶다. 이는 어쩌면 나는 생명과를 찾아가려는 임의인데 제3자가 볼 때는 선악과를 집으려는 자기 중심처럼 보일 수도 있다.
성경에 모르는 단어가 보이면 네이버에 사전검색이나 설교록 참고, 부모님이나 반사선생님께 묻기 전에 가장 먼저는 내 스스로 성구 앞뒤 문맥을 수십번 따져 보는 것, 누구의 도움을 받기 전에 자기 스스로 먼저 난제를 풀어나가 보려는 시도의 임의성, 이것이 부모님이나 목사님 사후를 준비하는 사람일까?
교회에서 목사님 부재시 재독 이전에 나는 설교할 준비가 됐는가? 집회 강단의 자리가 빈다면 너는 설교할 준비가 되었느냐? 사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임의성 때문에 백목사님도 후계자를 정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이 후계자를 안 주셨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사후 남겨진 이들의 임의성에 따라 결정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주일과 평일, 십일조와 연보, 모든면이 넘어가면 안되는 선이 정해져 있고 그 선 안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듯이 마음껏 연습하며 좋으면 하고 안좋으면 안하고 비교하고 따져보며 마지막은 7일이 전부 주일이 되도록, 10분의 10을 드리는 신앙으로 자라가는 과정이 임의과라 생각됩니다.
신앙이 자랄수록, 신앙이 높을수록, 신앙으로 앞서 지도해야 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분들의 모습을 보면 말 하나 행동하나 일처리 하나 심지어 백목사님은 멀리서 얼굴만 처다봐도 은혜가 되었다는 것처럼 그런 우리로 자라도록 주신 없어서는 안될 귀한 선물인것 같습니다.
나머지 대부분은 임의의 나무들로 채워져 있다.
하나님은 왜 임의의 나무들을 만드셨을까?
임의과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
자유성, 그 다음은 무엇일까?
다양성과 포용성을 길러 다양한 의견 속에서 일치성, 즉 전원일치를 끌어낼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일까?
전원일치라는 결론을 내기 위해서는 수없이 다양한 생각들이 나와야 하는데 임의라는 다양성과 포용성이 무시되고 있으니 전원일치가 안되는 것은 아닐까?
일치가 되어도 가부장적이고 일방적인 일치는 나중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내 주변 현실은 에덴동산과 정반대다.
임의의 나무는 동산 중앙에 딱 한그루, 나머지 대부분은 생명나무들과 선악나무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숨쉬는 것조차 힘드니 본인 가정에는 참 기쁨도 없고 직장에서 열심히는 하는데 대부분 일중독이다.
생명력은 없고 메말라가는, 열매없는 가을나무처럼 말이다.
다양성이라는 과정이 없으면 일치성의 결론도 없는 법이다.
밥 묵었나? 아이는? 자자!
부부간 자녀간 참된 신앙적인 대화가 없으면 속이 답답하다.
이런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조차 금기사항이다.
족하오니 차라리 죽여 달라는 엘리야처럼 자살은 먼데 있지 않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순간 심장이 멎는다.
문제 많고 부족한 내게 말이라도 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오늘부터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다 아시는 하나님이 마지막 기회를 주신 것이리라.
일치성 없는 다양성은 배가 산으로 가는 중구난방이 될 수 밖에 없고
다양성 없는 일치성은 다윗의 독단적인 인구조사처럼 좌초되기 쉽다.
주관과 객관에 대한 안목도 결국 임의성을 얼마나 키웠느냐에 달려 있다.
임의성의 주관객관을 무시하면 내 주변에 사람들이,
심지어 마지막 버팀목인 食口조차도 차츰차츰 나를 멀리하다가 결국은 영영 떠나가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 쓴 필자의 글들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자신의 일보다 타인을 더 사랑하고,관심둘수 있다면 그는 예수님이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허나 예수가 필요없는 인간이 세상에 있을까?
성구 속 단어 하나에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뜻 전부를 다 담아 주셨다.
반면 성경 전체를 한 성구로 정리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인생의 요절 하나를 가지고 밤새도록 담소를 나눌 수도 있다.
내 임의(任意)로 판단하고 결정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다 딱 들어 맞았다면,
이는 헛말이나 헛일을 안했다는 것이고 사무엘의 말처럼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게 된다.
글 실수는 고칠 수 있으나 중심이 틀어진 것은 상대적으로 바로 잡기가 대단히 어렵다.
집중해야 할 오직 한 일을 제대로 잡았다면 이렇게 글을 한가하게 적고 있을 시간도 없다.
마귀에게 속고 있다는 뜻이다.
임의의 나무를 내신 것은,
겉은 내 맘대로 하는데 속은 전부 하나님 뜻대로 하게 만드는 것이 최종 목적이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창조적 임의가 계시록에서 종말론적 임의로 해석되고 종결된다.
다른 성경도 전부 다 임의라는 각도에서 다시 읽어보니 성경이 새롭게 읽혀진다.
남단 글도 달리 읽혀지고 매일 똑같은 현실도 늘 새롭게 느껴진다.
'임의'라는 단어를 연구할수록 글쓰는 것이 두렵고 공공의 피해를 주는 것 같다.
댓글이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