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공회 발언/연구

지식의 양면성

발언
작성자
공회원
작성일
2022.06.09

지식의 양면성

 

 


1. 지식과 무식

 

지식은 안다는 말입니다.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아는 것을 지식이라고 합니다.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안다는 그 범위는 아주 넓습니다.

과거와 현재는 단순히 시간적인 면을 말하지만,

그 시간의 흐름 속에는 물질계 우주 전부가 들어 있고,

우주 안에는 무한에 가까운 사물들과 그 작용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식이란 이름으로 안다고 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며 지엽적일 뿐입니다.

 

배우지 못해서 알지 못하면 무식하다고 합니다.

무지하다고도 합니다.

무지라는 말은 무식보다 더하다는 말로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냥 비판하는 말로 사용하지만 그 내면을 생각해 보면

누군가를 보고 무식하다거나 무지하다고 하는 그 말 자체가 무식하고 무지한 말일 수 있습니다.

무식이란 그 범위를 한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알아야 될 정도를 모를 때 단순하게 사용할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식하며 무지합니다.

무한에 가까운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을 사람이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살아가다 보면 무식하다거나 무지하다는 말은 사용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대놓고 그렇게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꼭 필요한 경우에는,

본인에게나 전체적으로 알아야 하고 알려야 될 때,

알리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손해를 보거나 곤란하게 될 때는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 무지한 사람들 메시야 죽였네’라는 찬송도 있듯이,

성경에도 무지하다거나 무식하다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 무지의 위험성

 

1) 몇 가지 예를 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길 때,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으신 것을 알고 놓아 주겠다고 했고,

유대인들이 끝까지 정죄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아 달라고 할 때

빌라도는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합니다.

 

그럴 때 무지한 백성들이 다 대답하기를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무지하고 무식한 말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서 소리를 질러 댄 것입니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 자자손손 역사에 없는 비참한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지의 결과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아데미라는 우상의 은감실을 만들어 파는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사람들을 충동하여

바울을 잡아 수많은 사람이 연극장으로 몰려갔습니다.

온 성이 요란할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두 시간 넘게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쳤는데

성경에 기록되기를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온 성이 요란할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서 그 난리를 쳤는데

그 중에 태반이 왜 모였는지도 모르고 그냥 따라 움직인 것이었습니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행동부터 하고 보는 단순무식하고 무지한 결과입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킬 때,

독일 국민의 절대다수가 지지했다고 합니다.  90%가 넘게 지지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과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주변 사람들 따라서 그냥 지지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겠지만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초기에는 러시아 국민들도 대부분 푸틴을 지지했다고 합니다.

 

역사의 대부분의 독재자들, 결과적으로 나라를 파탄시킨 많은 정권자들이 실패한 것은

그 이면에 그들을 맹목적이다시피 지지한 무지한 백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볼 때 군중은 어리석다는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은 지금 시대도 다르지 않습니다.

 

대개 국민성이 후진적일수록 그런 경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은 다른 각도지만,

다수를 좇는 민주주의가 태생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는 원리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2) 또 다른 예를 들면


여러 사람이 모여 회의할 때, 한 주제를 가지고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의견을 내고 주장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지식의 범위 안에서 주장하게 됩니다.

지식을 벗어난 의견이 있을 수 없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어떤 주장보다 더 넓고 깊고 높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의견을 내면

어떤 사람의 의견은 꺾어집니다.

 

따라서,

여러 사람의 주장이 나올 때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자기 의견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말씀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보다 더 아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록에 보면 팽이를 거꾸로 묻어 놓은 것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팽이는 위는 넓고 아패가 뾰족합니다.

그것을 거꾸로 묻으면 드러나는 위는 아주 좁고, 묻혀서 드러나지 않는 아래는 넓습니다.

뽑아도 잘 뽑히지 않습니다.

드러나서 보이는 면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신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은 말도 행동도 가볍지 않습니다.

최대한 무겁게 신중하게 움직입니다.

자기가 아는 것보다 더 넓고 깊게 아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편협한 자기 지식, 토끼 꼬리만한 자기 지식으로 함부로 주장하다가 자칫하면 수치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주장이든지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운다" (잠언 17장)

자기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 지혜롭다는 말씀입니다.

 


3. 지식의 양면성

 

1) 모든 것의 양면성

 

양면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사물 안에 반대되는 성질이 들어 있을 때 쓰는 말입니다.

 

모든 약은 약인 동시에 독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독이 있기 때문에 약이 된다고 합니다.

바로 잘 사용하면 약이 되고, 약을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됩니다.

독도 잘 사용하면 약이 될 수 있습니다.

 

수술하는 의사가 사용하는 칼은 구인 도구이지만 살인자가 사용하면 살인 도구가 됩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항암 치료제는 암세포를 죽이는 동시에 좋은 세포도 많이 죽인다고 합니다.

항암 치료하다가 죽는 사람들은 암세포 때문에 죽는 것보다

좋은 세포가 많이 죽어 면역력이 떨어져 합병증으로 죽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살린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죽이게 되는 경우입니다.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살리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위험성이 있는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2) 지식의 해독성 지식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백 목사님은 지식의 위험성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습니다.

세상 지식 때문에 신앙을 팔아먹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인간 지식의 주인이 되어야 하고,

인간 지식은 하나님 지식의 종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수도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반지식론자로 오해할 만큼 강하게, 많이 외쳤습니다.

지식의 위험성이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세상 지식을 광문다학한 사람치고 공회 신앙을 제대로 가진 사람을 찾기는 흰 쌀의 뉘처럼 희귀합니다.

당연히, 세상 지식을 많이 가지고도 공회 신앙을 제대로 가졌으면 그만큼 귀한 인물입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중학생이 되면 식어집니다.

고등학생이 되면 확 가라앉습니다.

대학생이 되면 교회도 잘 다니지 않고 세상으로 나가버립니다.

이런 경우가 백 목사님 계시던 서부교회에서도 아주 흔하게 많았습니다.

 

경제 때문이든 실력이 안 되어서든

대학을 가지 않고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취업하는 경우는

래도 대개 기본신앙은 지킵니다.

중학교만 졸업하고 일찍부터 취업전선에 나서면 거의 신앙생활을 제대로 합니다.

 

대학만 들어가면

신앙은 거의 죽어버리고, 미국에 유학까지 갔다 오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지식의 양면성 중에 지식이 해가 되는 경우입니다.

 

3) 지식의 유용성


지식은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주인이 되어야 하고 세상 지식은 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배우려면 최소한 한글은 알아야 합니다.

한글을 아는 것은 아주 기초이지만 지식은 지식입니다.

한글을 알면 한글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글만 아는 것보다 한문 글자를 조금 알면 성경에 기록된 단어의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영어를 알면 한글과 한자로 알기 어려운 부분들을 이해하는 데 조금은 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지식의 유용성입니다.

 

주인의 실력이 약한데 종이 뛰어나면 주인은 종에게 이용당합니다.

어린아이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으면 옛날에는 손가락이 잘려 나간다고 했었습니다.

쓸이꾼이나 강도에게 당하는 것입니다.

 

물이나 권세나 도구나 무엇이든지 실력 이상의 좋은 것을 가지면

반드시 그것 때문에 해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주인이 실력이 있으면

종은 많을수록, 종의 실력이 뛰어날수록 주인도 좋고 일도 많이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랬고 아브라함의 종이 그랬습니다.

 

지식도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주인이 되면 세상 지식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유리합니다.

종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 최고의 사도, 성경을 가장 많이 기록하고 가장 깊은 교리서를 기록한 사도가 바울입니다.

바울은 당대 최고의 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당시로서는 최고의 학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아볼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복음 받고 난 다음에는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겼다고 했습니다.

세상 지식을 하나님의 지식이 이용한 결과입니다.

 


4. 결론적으로

 

세상의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이 지식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공회는 세상 지식을 극히 조심시킵니다.

 

당연합니다.

세상 지식을 가질수록 신앙은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세상 지식이 반비례하는 것은 아닌데 현실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지식이라는 종에게 끌려 이용당하느니 차라리 종 없이 주인으로 그냥 사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실력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지만 이치가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은 중요합니다.

 

신앙은 아는 것이 첫째입니다.

믿음의 요소는 지식, 인정, 실행입니다. 지식이 첫째입니다.

모르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며 무식한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무조건 알아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지식을 말하지만 세상 지식도 중요합니다.

뭐든지 아는 만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소꿈장난을 해도 알아야 할 수 있고 아는 만큼 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자기가 아는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알아야 생각도 하고,

알아야 연구도 하고,

알아야 계산도 하고,

알아야 구별도 하고,

심지어 알아야 욕심도 생깁니다.

 

아는 만큼 넓어지고 깊어지고 온전해집니다.

 

가장 위험한데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지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의 양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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