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오늘, 이 노선에서 본 현실

기독교의 '보편성', 공회의 특별한 점

작성자
담당
작성일
2021.04.01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보편성' '일반성'을 강조한다.

불교나 유교는 특별한 사람만이 도를 닦고 선생이 될 수 있다. 우수한 인간이 만든 세계여서 우수한 사람만 지도자가 된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가 역사하기 때문에 아무리 우수해도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그대신 아무리 무능해도 하나님의 전적 은혜가 더해 지면 일반 인간이 상상하지 못할 세계를 가지게 된다. 누구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가?

기본구원은 영원 전에 예정 된 택자만 특수하게 허락하지만 우리의 평소 신앙 생활에서 인간의 차이에 해당 되는 건설구원의 성화 과정에서는 하나님만 바라 보는 '소망'을 보고, 주신 형편에서 자기를 다하는 '진실'한 사람의 '충성'이면 된다.

천주교의 특수성을 개혁한 오늘의 기독교의 현황은 다른가?

성경 기록조차 무식한 사람도 기록 시켰고 언어도 일반인의 생활 언어로 기록하여 유무식과 지위 고하는 물론 특수 지역이나 특수 교육을 받은 사람만 알 수 있게 하지 않았다. 천주교는 원어와 라틴어로만 성경을 접하게 하고 신앙을 교육 시킴으로 일반 교인들은 신앙의 세계를 감히 접할 수 없었다. 몇 가지 적어 주는 것을 주문처럼 외우고 신부라는 특수한 사람이 끄는 대로 따라 갈 뿐이었다. 루터 칼빈의 교회 개혁은 이런 특수 계층의 특수 언어와 특수 교육의 특수층을 깨뜨려 버리고 그 나라의 일반 글로 성경을 번역하고 아무나 주님 앞에 꼭 같이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버렸다.

그런데 이런 개혁주의 역사와 기독교의 근본 원리는 모든 교파들이 한결 같이 강조를 하면서 정작 오늘의 신학 교육은 또 다른 특수 계층만의 세계로 만들어 버렸다. 학습 능력이 특별한 사람이 원어와 외국어를 배우고 7년의 정규 과정을 거쳐 봐야 아는 것이 별로 없을 정도니 그 이상을 알고 써 먹으려면 목회자는 전문가가 되어야 하고 일반 교인은 그 세계가 너무 높고 가마득하여 감히 흉내 내기도 어렵다. 자기 교회 목사가 던져 주는 몇 마디만 들고 그 것이 전부이거나 그 것만 중요한 것처럼 따라 가는 것이 좋은 교인처럼 되어 있다. 천주교를 혁파했다는데, 뱅뱅 돌아서 이런 면에서도 역시나 크게 다르지 않다.

공회의 특별한 점을 다시 강조해 본다.

공회는 목회자를 보낼 때 신학 공부 7년을 하고 전도사 강도사 부목 등의 절차를 밟은 특수 과정의 전문가를 선발하지 않는다. 공회 아무 교회나 그 교회에서 교인 노릇을 실제 제일 잘 하는 사람, 그 사람이 세월 속에 자기 현실에서 자기 가정을 책임 지면서도 전체 교인을 위해 수고하고 평소 주일학교나 장년반에서 설교도 하고 전도도 하며 살아 온 신앙의 실제 모습이 괜찮을 때 목회자로 바로 파송한다. 그리고 목회자가 된 후에는 일반 교인 시절에는 알 필요가 없었던 몇 가지 상식을 양성원에서 접하게 된다. 타 교단이 7년의 교육 과정으로 전념을 시키는 신학 과정을 공회는 몇 시간의 교양 상식 정도로만 접하게 한다.

같은 원리로 주일학교 교사도 타 교단처럼 교육 프로그램에 따른 순서를 밟지 않는다. 세상 학교나 대학이나 전문 분야는 그렇게 할 수도 있고 그 것이 나을 수도 있지만 교회란 가정과 같은 곳이며 생명 세계의 성격으로만 상대하기 때문에 과거 90년대까지는 주변 골목에 나가면 안 믿는 학생들을 데리고 올 수 있으니 5명을 데리고 오면 그 학생들을 직접 가르칠 반사로 임명한다. 어머니라는 것은 교육을 통해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 남자를 만나면 아이를 낳게 되고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저절로 어머니가 된다는 논리다.

백영희 사후의 공회와 연구소의 사명

그 분의 신앙 세계가 너무 높고 귀하기 때문에 그 분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그리고 무엇이 장점이며 어떤 점이 과제인지 살펴 볼 기간을 오랜 세월 가져 봤었다. 그 분의 장례가 끝이 나자 지금의 서울 공회를 중심으로 지금의 대구 공회 대부분 목회자들은 지난 날 배운 것을 많이 버리고 많이 바꾸면 개혁이 된다고 그렇게 많이 바꾸고 버렸다. 그런데 그들이 버리고 바꾼 결과를 보면 일반 교단의 모습이었다. 그 일반 교단의 모습이 개혁주의를 포기하고 천주교화 된 모습들이어서 공회는 원래 개혁주의의 원리에 철저했는데, 개혁의 이름으로 더욱 비개혁 반개혁이 되었으나 가슴 아프기 짝이 없었다. 요즘 남한 사회가 철이 지난 공산주의를 본 받자면 세계적으로 혼자 역주행을 하는 모습과 같았다.

이 곳의 연구소, 이 연구소를 운영하는 주요 직원들이 목회하는 교회들을 부산공회3, 부공3이라 한다. 우리는 백 목사님 사후에 그 분의 생전 자료 전부를 가지고 30여 년을 복습하며 우리가 가졌던 총공회의 장점을 추려 봤다. 다른 신학과 비교도 하고 다른 교단의 역사와 평가도 해 봤다. 공회가 가진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그 단점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내부적으로 폐쇄적으로만 살펴서는 곤란하다 생각하여 1998년부터 사이트를 통해 무제한 읽고 쓰고 비판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20여년을 통해 모든 비판과 지적을 다 받아 봤다. 주요 교단의 신학교 강의실에서 많은 언급이 있었고 그 강의를 들었던 신학생들이 이 곳에 생생하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 왔다. 중요한 것은 어느 신학교 강의실에서도 이 곳 모르게 비판은 해도 이 곳에 직접 비판을 하지는 못했다. 공회는 이미 그들의 세계를 너무 확실히 넘어 섰기 때문이었다. 2018년경, 부공3의 이 연구소는 저작권이라는 해괴한 고소를 받고 백영희의 설교를 소개했다는 죄로 여러 직원들이 전과자가 되엇다. 백영희 가족들의 주장은 백영희 목사님이 각서나 공증을 통해 백영희 설교는 자녀만의 사유재산이 아니라고 문서로 만들지 않았다면 설교 중에 어떤 말을 해도 빈 말일 뿐이라는 것이다. 법원은 당연히 자녀들이 옳다고 판결했고 연구소, 부공3은 이 사건을 접하며

지난 30여년을 백영희 설교와 신앙의 노선에 대한 연구를 매진해 온 단계를 이제 한 차원 더 높이라는 주님의 뜻으로 받았다. 자녀들의 고소가 없었다면 백영희 세계의 자료와 연구에만 아마 평생 몰두했을 듯하다. 2018년부터 세상 법원까지 나서서 막는 바람에 우리는 나귀를 통해 돌들을 동원 시켜서라도 둔탁한 우리를 가르칠 수 있으니 이런 고소와 법원의 판결을 미워 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백영희 신앙 노선의 연구의 다음 단계로 나아 가라는 명령으로 받았다.

그런데, 참으로 부족한 사람들이 과연 할 수 있는 길일까?

백영희의 세계는 이미 많이 소개했다. 대단한 분이다. 객관적 결과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분 밑에서 교인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설교록 곳곳에 보면 이 곳의 주요 직원들을 설교 시간 중에 책망한 기록이 참으로 많다. 그 분은 우리에게 가능성은 분명히 봤고 그런 언급은 기록으로도 남아 있다. 그런데 실제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백 목사님부터 의문을 표시해 놓았다. 그 분이 의문을 표시하고 말고를 떠나 우리는 우리의 수준을 안다. 배우는 것도 버거운 사람들이다. 하물며 배운 것을 가지고 이 노선의 다음을 향해 한 발을 내 딛는다는 것은 너무 먼 나라의 이야기다.

그런데 기독교는 '일반성' '보편성'의 원칙이 있다. 모세가 탁월해서 광야 40년을 그 모든 백성을 인도했던가? 물과 만나가 없으면 버틸 수가 없는 곳이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의 40년 경험을 했기 때문에 반석에서 물을 내고 만나를 줄 수 있었던가? 아니다. 아예 해당이 없다. 그런데 모세의 지팡이는 어떻게 홍해를 열고 반석에서 물을 냈던가? 박달나무여서 단단하기 때문에 그러했던가? 향나무여서 반석이 향에 취해서 물을 토해 냈던가? 우리가 아무리 부족해도 모세 손의 지팡이와 비교하면 나무 막대기 정도는 되지 않을까? 우리처럼 못난 사람, 부족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할 수 있을 때 그 것이 기독교의 본질인 신앙의 일반성과 보편성이 실제 입증이 될 듯하다. 공회에 대한 연구와 다음 걸음을 내딛는 것도 이런 부족한 사람이 할 수 있을 때 공회는 보편성과 일반성을 가진 거의 유일한 교회가 될 듯하다.

그리고 우리의 지난 날을 살펴 본다. 세계적인 또 역사적인 서부교회의 주일학교 시절, 여기 우리 직원들은 그 한 가운데를 거쳐 왔다. 책임자를 지냈다. 우리의 실력이었던가? 모세의 지팡이는 나무 막대기인데도 광야 40년에 기적을 일구어 냈다. 지팡이의 실력이 아니라 붙들렸을 때 되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그 시간, 그 장소, 그 사건에, 그 위치에 있다는 것이 이미 그 막대기는 이미 일반 막대기를 넘어 서고 모세의 지팡이 되어 마치 전능인 것처럼 활동하게 된다. 백영희의 사망, 사후에 이 노선에 대한 자료와 연구와 노력이 없는 상황, 심지어 부산의 연구소가 백영희 사후를 책임 져 놓고도 앞 장 서서 막아 서는 상황, 이 상황에서 우리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 알았고 제명과 처벌과 형사 전과자가 되어도 그냥 넘어 갈 수 없어서 맞섰다. 바로 이런 시기, 이런 장소, 이런 상황에 선 사람들은 비록 아무리 나무 막대기처럼 허무해도 이미 이들을 붙들고 광야 40년을 헤쳐 나가려고 하나님이 결정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이 연구소는 어떤 회원이라도 이 연구소의 연구원이 될 수 있도록 1998년부터 길을 열어 두었다. 누구라도 어떤 글이라도 적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 발표가 옳으면 우리는 따르는 것이고 그 발표가 우리를 지적하면 우리는 배우겠다고 했다. 우리를 지적하고 우리가 배우고 고치면 그는 주일학생이라도 우리의 선생이 된다. 우리의 선생이 되는 정도면 그에게 주신 위치와 영안은 백영희 사후를 이어 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면으로 그렇게 되기는 어렵다 해도 어느 한 면으로는 그렇게 될 수 있다. 우리도 그렇게 한 면은 그리 될 수 있고, 외부인도 그리 될 수 있고, 우리끼리도 서로 한 면으로는 다른 사람을 앞 설 수 있다. 이 말은 앞 설 수 있는 그 면 외에 다른 면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입장이 된다는 뜻이다.

오늘 문득 여러 사람들을 돌아 봤다.

이 곳이 출발하던 1987년에는 없었던 분들이 1987년에 출발 때 있었던 분들을 앞 선 분들도 배출이 되었다. 그리고 1987년에 주도 입장에 있던 분들 중에 외부에서 보면 선배로 보이고 지도자로 보이고 더 나아 보이는 분들은 거의 다 스스로 다른 길로 갔다. 1989년 백영희 사후의 급박하던 시절에 현장에서 심부름만 하던 분들이 세월 속에 이 곳의 지도자로 올라 선 분들이 있다. 이 분들은 2010년을 거치며 다시 방향을 바꾸어 지금은 부산 연구소의 주장을 추종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방향을 바꾼 분들이 연구소의 주력으로 활동할 때 이 노선 밖에 계셨던 분들 또는 일반 교인으로서 이런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던 분들이 지금은 그 분들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 모든 세월 속에서 변치 않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통계적으로는 입장을 바꾸거나 반대 방향으로 가 버린 분들이 훨씬 많다. 사실 성경의 역사가 그렇고 기독교의 역사가 그렇다. 개혁주의 5백 년 역사도 그렇고 해방 후 신사참배 처리 과정에서도 그렇다. 백 목사님 생전의 공회도 그랬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교회를 기를 때 끊임 없이 새로운 생명을 길러 가시고 그 과정에 그 생명을 끝까지 붙들고 자라 가는 생명의 계통에 선 이들도 소수가 있고 대부분은 세월 따라 주변 따라 입장을 바꾸면서 참 된 신앙의 세계를 연단하는 입장에 그치는 이들이다. 사울이 그랬고 북쪽 이스라엘이 그랬고 주님 오실 때 바리새인이 그러했듯이.

2018년의 법원 판결은 총공회 최대 최악의 참사다. 그런데 들여다 보면 이 노선 역사의 최대 최선의 다음을 위해 주님이 밀어 붙이는 역사이기도 하다. 참사라는 점만 붙들고 있으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잘해 봐야 발전은 없다. 그러나 그런 면을 알면서 교회를 길러 가는 주님의 역사를 생각하고 다시 들여다 보면 이 풍랑 인연하여 더 빨리 가게 되었으니 감사할 일이다. 실제 2018년의 판결 이후에 공회 내에는 이전에 생각하지 못한 분들이 기술면으로 또 연구나 자료 분석 면으로 대거 앞에 서서 수고를 하고 있다. 2018년 이전에는 거의 1인 단체처럼 운영이 되었으나 이후로는 정말로 이 노선의 다음을 위해 수고하는 여러 사람으로 인하여 이 사이트가 운영이 되고 있다. 다만 구 게시판과 새 게시판의 전환기라는 점 때문에 현재 여러 면에서 애매하고 불편해 보이는 부분들이 있을 듯하다. 그런데 자라 가는 면으로 본다면 걸음마를 넘어 서서 이제 제대로 걷기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인 연구소처럼 운영 되고 1인의 공회처럼 운영이 되던 이 곳에 이제는 여러 연구원들이 함께 일을 하고 그 중에는 생각 못했던 분들이 새로 추가 되면서 세대를 이어 가며 주님 오실 때까지 더 좋은 노선을 만들 것으로 보이는 그들은 어떤 이들일까? 특수 환경에서 특수한 자질을 타고 난 분들일까? 그렇지 않다. 누가 봐도 그냥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분들이다. 세상적으로 이 면에 우수하나 다른 면은 그렇지 않고, 신앙적으로 이런 면은 장점이나 저런 면이 그렇지 않은, 그래서 어느 교단이나 다른 공회와 비교해도 대략 짐작할 만한 그런 분들이다. 그런데 이런 분들을 통해 지금 의미 있는, 생명의 새움으로 볼 수 있는 결과들이 속속 진행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노선은 '일반성'과 '보편성'이라는 신앙의 근본 성질을 책에서 이론으로만 적어 놓지 않고, 실제 그렇게 운영이 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점을 생각하게 되자 또 한 번 백영희의 세계에 감사하고 뜻 깊은 인사를 이 곳에 적고 싶다. 이 것이 이 많은 글을 적은 배경이다. 독일의 장교는 귀족 출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한국의 군인도 육사 출신이라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한국 사회에 서울대가 가진 인맥은 우리가 다 짐작을 한다. 공회도 특정 지역, 특별한 재능, 그 어떤 그런 특수성 특별성이 있었던가? 백영희 생전의 원래 총공회와 서부교회에는 그런 면이 없었다. 백영희 사후에는? 부공3 이 연구소에는 없었다. 지금도 그런 것이 없는 상태로 다음 세대가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준비는 예비에 그치지 않고 모든 면으로 현장을 맡아 직접 움직이고 있다. 이런 분야만은 후임이 없을 줄 알았던 그런 업무까지도 생각하지 못한 그냥 첫 교인 일반 교인 어린 교인이 도맡고 있기도 하다.

1998년에 시작한 구 게시판이 1 년을 지나면서 총공회의 실질적인 중심이 되고 교계적으로도 총공회를 대표하는 곳이 되면서 뜻깊은 이용자들이 급증할 때 갑자기 등장했던 '질문' '요구'가 하나 있었다. 이 연구소만 유지가 되면 보이는 서부교회와 총공회는 무너 져도 실제 서부교회와 총공회는 전혀 문제가 없겠으니 이 연구소를 도맡은 핵심 1인, 그 사람의 후계자가 누군지 또는 기르고 있는지 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답변은 '공회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오늘이라는 현재 상황에서는 그냥 그 1명이 자기 할 일에 전념할 뿐이며 인간이 자기 혼자 생각으로 훗날을 대비하거나 후임을 선별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안내를 드렸다. 거듭 되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늘 그렇게 답변해 왔습니다. 그리고 2013년에 생각하지 못한 고소가 시작이 되었고 6년의 과도기를 거쳐 2018년 1월에 구 게시판을 닫게 되면서 그 동안 이용했던 분들은 자료를 개별 보관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했고 연구소는 이미 1998년부터 교계와 세계에 무한정 자료를 전했고 그 자료들은 손톱만한 USB에 담겨 나가 버렸기 때문에 기존 자료의 사용은 불편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의 활동은 현재 이 게시판에서 여러 면으로 의미 있게 재출발을 하고 있다. 과거 자료 중에서 다시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다시 꺼내어 전개하고 있고 2018년을 기점으로 새로 시작할 부분은 이 게시판을 통해 전부 공개하며 제공하고 있다.

평생을 타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다 이 곳으로 합류한 분들과 원래 이 곳을 처음부터 지켜 온 분들이 함께 하고 있다. 그런데 누구도 별 차이가 없다. 그냥 본인들에게 주어진 원래 장단점은 보이고 있다. 공회 출신의 성골 진골은 늘 지도부가 되고, 외부에서 들어 온 분은 늘 하수인만 된다면 이 것도 하나의 특수성 특별성이 된다. 그렇다면 이 곳도 인간의 활동판이지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되고 역사하는 곳은 아닐 것이다.

전체 3

  • 2021-04-02 12:35
    보편성이 곧 특수성이다.
    지금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직분을 맡은 제사장이다.

    글마다 댓글을 달고 싶은데...
    석류알 같이 알차고 귀한 깨달음 감사합니다.

  • 2021-04-04 19:08
    (댓글에 대한 희망)
    이 게시판의 취지와 올려 진 글의 범위를 벗어 나지 않는 글은 비판도, 대안도, 평가도 늘 환영합니다. 옳을 때는 옳다 할 수 있으면 좋고, 문제가 있으면 가차 없는 지적을, 반론이 있으면 이유와 함께 더 나은 대안을 적어 주면 좋겠습니다. 운영하는 직원들이 먼저 적고 있지만, 특히 남단은 그러기 위한 장소지만, 우리조차 천주교나 타 교단처럼 되지 않으려면 늘 우리의 빈 곳과 잘못 된 곳을 배울 기회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 공회 노선입니다.

    댓글이 활발하면 더 감사하겠지만 공회는 발표에 신중한 성향 때문에 이 곳에 글을 적는 저희가 교만죄로 눈치를 봐야 하고 댓글로 적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이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신약의 모든 교인은 할 말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이를 피하여 돌들이 소리를 지르게 되는 상황임을 말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필명에 대한 희망)
    * 실명과 필명
    그 어떤 상황이라도 복음의 전파는 실명이 원칙이며 더 나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공회와 이 노선의 인적 구성이 이런 초보적 상식조차 수용하지 않고 엉뚱한 파열만 만들기 때문에 '실명 원칙, 필명 허용'이라는 연구소 정책이 마치 '필명 원칙, 실명 허용'처럼 되었습니다. 직원들은 실명을 고수하다 수백 건으로 고소를 당하고 몇몇 전과까지 당한 상황이어서 현재 필명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과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수백 건의 고소를 쏟아 부으면 경찰에 해명을 하느라고 할 일을 하지 못합니다. 부산 연구소 측과 그들을 적극 지지하는 본 연구소의 이탈 직원들은 더 옳은 길에 나서면 이 곳은 저절로 없어 질 터인데 그들의 연구는 전혀 없고 이 곳의 연구만 막는 것으로 전업을 삼는 모습이니 신앙의 사람이라면 한 눈에 양측을 평가하겠지만 본 직원들이 실명을 적지 않게 된 손해는 아쉬운 점입니다. 실명이라야 글을 적은 사람의 평생과 목회와 다른 글과 비교하여 더 나은 연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 필명을 사용할 때
    필명을 사용하되 일정한 필명을 사용한다면 모두에게 연구적으로 좋습니다. 한 분의 글은 다른 시기에 다른 글과 비교가 될 때 제대로 연구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장관처럼 횡설수설은 미쳐도 할 수 있고 술주정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과 입장이 달라 질 때 비로소 글이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필명을 사용하려면 하나의 필명을 부탁합니다. 스스로도 훗날 검색을 통해 참고하면 유익할 듯합니다.

    * 여러 필명의 경우
    한 분이 한 가지 필명으로 여러 사안을 적어 주면 더 낫지만, 사안에 따라 다른 필명을 사용하면 더 나을 때도 있습니다. 이 곳의 직원들은 직원으로서 글을 적을 때가 있고, 이 곳을 방문하는 일반 회원의 자격으로 글을 적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발표할 글도 있고, 동창회에서 친구로 발표할 때도 있습니다. 세배하러 온 손주에게 할 말도 있고 자기 부모님께 병문 때 사용할 말도 있습니다. 연구소 직원들도 대표도 연구원도 마찬 가지입니다. 다만 사안에 따라 다른 필명을 사용하되 그 필명들이 사용 되는 사안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었으면 합니다.

    신학적 논제는 'A'로만, 목회적 논제는 'B'로만, 세상에 대한 평가는 'C'로만 사용한다면 비록 필명이지만 어느 한 분의 글 또는 어느 한 분의 한 사안에 대한 글로 서로 읽게 되면서 비록 실명을 알지 못한다 해도 서로 대화가 제대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희망조차 확인할 길은 없지만 사이트를 운영하는 직원들도 어떤 분은 하나의 필명으로, 어떤 분은 사안에 따라 2-3개의 필명을 사용하고 있음을 모두가 알고 계시고 문답에도 또 개인 연락 때도 따로 표시하고 있어 다행스럽습니다. 앞선 댓글의 BG 글 때문에 게시판의 실명과 필명을 두루 살펴 봤습니다. 성경의 기록도 모세나 바울을 통해 너무 많은 글을 적어 주셨고 12제자 중에는 아예 성경의 기록에서 배제 된 분들도 있습니다. 뭐든지 성경과 우리 신앙의 내력을 참고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며...

  • 2021-04-05 07:13
    지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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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선과 목회 : 같은데 다르고, 다르나 같은 세계
9526 | 담당 | 2021.03.04
담당 2021.03.04 0 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