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전장터의 승패는, 전쟁이 시작 되기 전에 이미 결정 된 것

작성자
"
작성일
2018.07.27
참고: 李承晩과 얄타密約의 실체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A&nNewsNumb=201808100017


(사전 조처, 사후 대처)

김구는, 이 나라를 위해 가장 위험한 전장터에서 일선을 지휘한 분입니다. 독립을 위해 수고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합니다.
이승만은, 이 나라를 위해 수고한 공로가 김구와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합니다. 아무도 알 수가 없는 세계를 종횡무진했습니다.

곡돌사신 - 연통 끝을 옮기고 연통 주변의 마른 땔감을 옮기라고 말한 사람은 물 한 그릇 얻어 먹기도 어렵습니다.
초두난액 - 곡돌사신의 해결법을 무시한 집에 불이 났을 때 불을 끈다고 목숨을 건 사람은 크게 알아 줍니다.

이승만의 평생은 곡돌사신으로 살았고 김구는 초두난액으로 활동했습니다.
민족의 수준과 성향이 좀 그렇다 보니 김구는 이승만보다 100배나 존경을 받지만 아는 사람은 그 반대로 평가합니다.



(전쟁의 진행 상황)

대량으로 죽고 그리고 패전할 국가라면 싸우기 전에 잘 교섭하여 훗날을 도모한 네델란드처럼 가는 것이 좋습니다.
죽지 않아도 될 수 없는 사람이 죽은 프랑스는 전쟁 전에 이미 준비 자세만 봐도 싸울 것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백 목사님 사후, 서부교회와 총공회는 한국 교계에 많은 기록을 남기며 1년을 분쟁했고 이후 10년은 여진이 계속 되었습니다.
부공3, 이 연구소를 운영하는 지도자들은 생전에 준비를 했고 장례 때 이미 서부교회와 총공회의 이후를 다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부터 시작 된 분쟁에는 일반적인 대처만 했고 이듬해에 모든 것을 종결했습니다.
부공3이 종결을 할 때쯤, 대구공회와 부공2의 오늘을 지도하는 분들은 그 날부터 모든 전쟁이 시작 되었다며 후일담을 말합니다.

1997년, 연구소의 분리 과정도 그러했고
2013년, 저작권으로 모든 분쟁이 수 없이 이어 질 초두에 이미 부공3은 30년 생전에 배우고 30년 사후에 복습한 그 다음을 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이가 10개월을 다 채운 상태입니다. 아이가 싫어도 엄마가 아파도 주변에 누구 무슨 소리를 해도 웅장한 대자연의 섭리는 그 생명이 잠깐의 과도기를 거치며 새롭게 또 한 세대를 맡고 나갑니다. 지금 연구소의 많은 면을 걱정하는 분들께 제 진심을 말씀 드립니다.

pkist 사이트 1998년에 이미 오늘의 모든 것은 결판이 났습니다. 2013년의 고소 건부터는 사실 우리가 이기면 더 부담스러운 문제가 생기지만 그렇다고 지게 될 상황이란 인간적으로 볼 때 없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지면 하나님께서 기어코 다음 단계로 하나님의 객관적 인도하심이 또렷히 나타나니 다음 30년을 향할 때 부담이 없을 것이니 너무 감사하고, 만일 이기게 된다 해도 원래 생각한 30년의 다음 걸음을 출발은 해야 하는데 만일 이기게 되면 지난 30년의 복습이 혹시 또 30년 정도의 복습을 부탁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혼란 때문에 고민이 클 것으로 봤습니다. 지금 추세라면 저작권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 참으로 말도 되지 않으나 현행 제도에 의하여 그리고 몇몇 관련자들의 실수 때문에 패소가 명확할 것으로 보입니다. 고소측은 뛸 듯 기뻐할 것이고 이 곳을 향해 망한 소식을 기다리는 분들에게는 메마른 대지에 단비가 되겠지만 저는 혼자만 보고 온 감사에 더욱 감사를 더할 것같습니다.

1989년에 대구공회 과격한 인물 때문에 핵심 직원의 치아가 2개나 빠집니다. 그리고 해결이 됩니다.
2018년에 우리 핵심 교인 중에 한 분이 중상 5주가 진단되었습니다. 이런 희생이 있고야 이 고비를 넘깁니다.

그런 희생자들에게는 죄송하나 대세적으로 보면 이런 저런 사연과 전개를 통해 결국 이 노선은 1989년 이전에 이미 확보 된 모든 자료에 의하여, 1998년에 이미 완료 된 모든 앞날 때문에, 더 나아가야 할 길이 지체 된 최근의 막힘이 풀리게 됩니다. 이런 심정으로 검색을 하던 중 다음 기사가 보였습니다. 이 나라를 향한 20세기의 초중반에 발생한 선제 조처들이 21세기 오늘의 세계 최고의 한국을 만들었습니다. 부공3도 그런 선제 조처들이 오래 전에 완료 되어 있습니다. 최근의 사건들은 사실 가야 할 기로에서 몸을 사리는 지도부를 재촉하는 고마운 일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李承晩과 얄타密約의 실체

이승만, ‘密約說’ 제기해 한국에 대한 미국의 관심 提高 성공


글 : 복거일 작가


⊙ 전향한 러시아인 에밀 구베로, 1945년 5월 이승만 찾아와 “얄타회담에서 조선을 러시아의 영향 아래 두기로 했다”고 제보
‌⊙ 이승만, ‘얄타密約說’ 제기… 미국 정부는 공식 부인, 후일 동아시아 관련 비밀 협약 공개
‌⊙ 이승만이 말한 ‘밀약’은 동아시아에 관한 공식 협약이 아니라 스탈린이 따로 미국의 누군가와 협의한 일일 것… 누군가는 앨저 히스?
⊙ 美, 얄타협정 때의 소극적 자세 벗어나 한반도에 미군 進駐… 한반도 전체 공산화 막아

卜鉅一
1946년 출생. 서울大 경제학과 졸업. 한국과학연구원 부설 선박연구소 연구개발실장, 문화미래포럼 대표, 《조선일보》 아침논단 필진, 대통령직속 사회통합위원회 민간위원, 《한국경제신문》 객원논설위원 역임. 저서·작품: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역사 속의 나그네》 《비명을 찾아서》 《높은 땅 낮은 이야기》 등


1945년 2월 얄타회담에 참석한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이승만은 이 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밀약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큰 인물이 나오는 나라는 불행하다. 평안한 나라는 큰 인물이 필요 없다. 개항 뒤 우리나라가 줄곧 외세에 시달리다 끝내 망한 뒤, 큰 인물들이 많이 나온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분들의 거룩한 노력 덕분에 우리나라가 되살아났다.

그 큰 인물들 가운데 으뜸은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이다. 우남보다 더 널리 세상을 살피고 더 깊이 우리 민족의 처지를 성찰하고 더 현실적인 방략을 내놓은 분은 없다. 무엇보다도, 우남은 대한민국을 세웠다. 건국처럼 거대한 과업을 한 사람이 해냈다는 얘기야 과장일 수밖에 없지만, 만일 우남이 없었다면 실재해 온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설령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지닌 국가가 세워졌다 하더라도, 그 실체는 지금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대한민국과는 상당히 달랐을 터이다.

우남은 여러 번 민족과 나라를 위해 혼자 세상에 맞섰고 끝내 이겼다. 두드러진 경우들은 ▲1945년의 얄타회담에서 공표된 합의 사항 말고 러시아와 미국 사이에 조선에 관한 ‘비밀 협약’이 있다고 폭로해서 그런 ‘비밀 협약’이 없다는 확인을 미국 정부로부터 받아낸 일 ▲한국전쟁 초기에 전황이 극도로 불리해져 미국이 국제연합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했을 때 확고하게 반대해서 패전을 혼자서 막은 일 ▲한국의 안보에 대한 고려 없이 휴전 협상이 진행되어 위기를 맞았을 때 혼자서 온 세계를 상대로 거세게 저항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한 일이다. 대한민국의 수립과 존속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이 세 업적들은 하나라도 이루기 어려운 위업이다.


이승만 부부의 외로움



이승만의 홍보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 교수.
이런 사정을 언뜻 보여주는 것은 얄타협정과 관련해서 우남이 혼자서 온 세상에 맞섰을 때 나온 한 장면이다. 1945년 중엽, 우남의 친구 로버트 올리버 교수는 우남 내외와 만났다. 당시 우남은 얄타협정에 한반도에 관한 ‘비밀 협약’이 있다고 폭로해서 미국 정부는 물론 미국 지식인 사회와 ‘서북파’ 세력으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올리버 교수는 《이승만: 신화 뒤의 사람(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나는 조선에서의 소비에트의 야심들에 대한 그의 걱정을 이해했지만, 신문들은 국제연합(UN)이 성공적으로 발족했고 이제 드디어 세계는 오래 연기되었던 국제 협력 시대로 들어섰다는 멋진 소식들로 가득했다…

(중략) 나는 위 단락에서 요약된 감정들을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이 박사에게 밝혔다. 새로운 국제주의에 관한 이 강의에, 나는 분명히 아시아의 소비에트 영향권 안에 자리 잡았으므로 조선은 당연히 러시아 사람들과 협력해야 한다는 보다 구체적인 의견을 덧붙였다. 모든 상황들을 종합해 보면, 한반도에 공산주의 연합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박사가 고른 진로는 그가 그 정부로부터 제외되는 상황으로 이끌 것이며 그런 결과로 그가 조선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평생 투쟁하고서도 그가 이루려 투쟁해 온 목표가 성취되는 순간에 개인적으로는 실패하리라는 것을 나는 덧붙였다.

내가 말을 마치자, 긴 침묵이 내렸는데, 마침내 미세스 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이 박사와 나는 당신이 제기한 문제에 관해서 오래 얘기했습니다. 당신이 한 얘기가 아마도 맞으리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조선은 공산주의 정부를 가질 것 같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그렇게 보이도록 합니다. 이 박사가 택한 입장 때문에 우리는 그런 정부의 한 부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어찌 되었든, 그는 그런 연합에 결코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얄타회담

당시 우남 부부가 얼마나 외롭고 어려운 처지였는지 지금 상상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우남 부부의 처지를 보다 잘 이해하려면, 먼저 얄타협정에 대해서 살피는 것이 순서다.

지금 우리가 얄타협정에 관심을 보여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얄타협정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권이 처음부터 비밀처럼 다루어서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모가 밝혀진 것은 여러 해 뒤였다. 다시 몇십 년이 지나서,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비밀로 합의한 내용이 나오기도 했다. 지금도 우리는 확신하지 못한다, 얄타에서 일어난 일들이 모두 다 드러났는지.

그동안 밝혀진 이런 정보들은 우리로 하여금 얄타회담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고 재평가하도록 만든다. 특히 우남이 폭로한 ‘비밀 협약’에 대해서 새롭게 접근할 필요성이 커졌다. 새로운 정보들은 모두 우남의 견해가 실상에 무척 가까웠다는 것을 가리킨다. 아쉽게도, 우리 사회에선 그런 움직임이 없다.

얄타협정(Yalta Agreements)은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러시아 남부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열린 얄타회담에서 미국·영국 및 러시아의 지도자들이 합의한 사항들을 가리킨다. 이 회담에 참석한 루스벨트, 처칠 및 스탈린은 주로 종전 뒤 독일의 처리와 유럽의 정치적 개편에 대해 논의했다. 얄타회담에서 합의된 사항들 가운데 핵심적인 것들은 아래와 같다.

1. 나치 독일의 ‘무조건 항복’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2. 전쟁이 끝나면, 독일과 베를린은 4개 지역으로 분할된다. 프랑스는 네 번째 지역을 차지하지만, 그 지역은 미국과 영국이 차지한 지역에서 만들어진다.

3. 독일은 ‘비무장화’와 ‘비나치화’를 겪는다. 나치 전범(戰犯)들은 재판에 회부된다.

4. 독일은 현물로 손해배상을 하며, 현물배상은 독일의 노동력도 포함한다.

5. 러시아가 수립한 공산주의 폴란드 정권은 ‘보다 넓은 민주적 바탕’을 지니도록 개편된다.

6. 폴란드의 동쪽 국경은 커즌선으로 하고, 폴란드는 서쪽 국경에서 독일로부터 영토를 보상받는다.

7. 러시아는 국제연합에 참여한다.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는 각기 독립된 구성원 자격을 지닌다.

이처럼 러시아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합의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나왔다. 가장 근본적 요인은 전쟁이 끝난 뒤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세우는 일에 관한 루스벨트의 전략이었다.


루스벨트의 전략



루스벨트에게 스탈린을 경계하라고 직언한 윌리엄 불리트.
테헤란 회담과 얄타회담에 임할 때, 루스벨트가 구상한 전략은 ‘공산주의 러시아와의 공존’이었다. 그는 독일에 맞서 함께 싸운 러시아와 미국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협력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는 공산주의와 스탈린에 대해 아주 낙관적인 견해를 품었다. 그리고 그의 측근들은 거의 다 그런 낙관적 견해를 부추겼다. 공산주의와 스탈린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은 루스벨트의 배척을 받았다.

전쟁의 형세가 연합국 쪽으로 분명히 기운 1943년 1월, 초대 러시아 주재 대사를 지냈고 당시엔 순회대사로 일하던 윌리엄 불리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두툼한 비밀 보고서를 제출했다.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러시아의 실상을 목격했고 그동안 스탈린 정권의 배신을 여러 번 겪은 터라, 불리트의 보고서는 러시아와의 협력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세 시간 가까이 걸린 불리트의 보고가 끝나자, 루스벨트는 보고의 내용이 정확하고 논리가 옳다는 것을 선선히 인정했다. 그래도 루스벨트는 스탈린과의 관계에 대해 낙관적이라고 밝혔다.

“만일 내가 (스탈린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주고 대가로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면,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의무(noblesse oblige)가 있으니, 그는 아무 것도 병합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민주주의와 평화의 세계를 위해 일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뚝심이 있는 불리트는 루스벨트의 의견에 곧바로 이의를 달았다.

“각하께서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의무’를 말씀하셨는데, 지금은 (영국의 대표적 귀족인) 노퍼크 공작이 아니라 코카사스의 도둑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무엇을 거저 얻으면 상대가 바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탈린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세계를 정복해야 한다는 공산주의 신조를 믿습니다.”

불리트의 조언을 루스벨트는 끝내 물리쳤다.

얄타협정의 내용은 곧바로 모두 공개되지 않았다. 2월 13일에야 일부가 공개되었다. 얄타협정의 모든 합의 사항들의 완전한 대본은 전쟁이 끝난 1947년까지 발표되지 않았다. 이런 조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얄타협정의 내용에 대해 의구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1945년 3월 1일 루스벨트는 의회에서 연설하면서 얄타회담의 성과를 자랑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스탈린이 약속을 지킬 뜻이 없음을 가리키는 일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스탈린은 드러내 놓고 루스벨트를 모욕했다.

마침내 3월 13일 루스벨트는 사이가 가까웠던 애너 로젠버그에게 고백했다,

“우리는 스탈린하고 일할 수 없어. 그는 얄타에서 한 약속들을 모두 깨뜨렸어.”

한 달 뒤 그는 죽었다, 나치 독일보다 훨씬 위협적인 공산주의 러시아의 출현이라는 부정적 유산을 남기고. 4월 12일 부통령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이어 받았다.


구베로의 정보

얄타협정에 따라, 1945년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의 헌장을 기초하는 회의가 열렸다. 3월 8일 우남은 회의를 주도하던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초청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국무부는 ‘1945년 3월 1일 현재 연합국으로 승인된 나라들만이 초청받을 수 있으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자격이 없다고 거절했다.

국제연합 회의에 초청받을 가능성이 희미해진 5월 초순, 에밀 구베로(Emile Gouvereau)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이 묵고 있던 모리스 호텔로 우남을 찾아왔다. 그는 우남의 오랜 친구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가 홍보 전문가로 추천한 사람이었는데, 자신을 공산당에서 전향(轉向)한 러시아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통신사 INS의 기자인 윌리엄스와 함께 워싱턴에서 얻어낸 얄타협정에 관한 비밀 정보를 우남에게 알려주었다. 얄타회담에서 미국·영국 및 러시아의 지도자들이 조선을 일본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러시아의 영향 아래 두며 미국과 영국은 조선에 대해서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기로 했다는 얘기였다. 이런 비밀협정은 스탈린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했다.

구베로의 정보는 우남의 생각과 부합했다. 우남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미국 국무부가 조선 문제에 러시아의 이익 위주로 접근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번 국제연합 회의에 대한민국이 초청받지 못한 것도 미국 국무부 안에 러시아의 이익을 앞세우는 세력이 있어서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여기던 참이었다.

일본 함대가 펄하버를 기습한 지 한 달이 채 못 된 1942년 1월 2일, 우남은 국무부를 찾아 동아시아 정책을 담당한 앨저 히스(Alger Hiss)를 만났다. 우남은 미국으로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을 펴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히스는 우남의 요청을 단박에 거절했다. ‘조선 문제는 러시아의 이익과 관련되었다. 지금 러시아는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라서, 조선 문제에 나설 수 없다. 따라서 조선 문제는 일본이 패망한 뒤 러시아가 참여한 자리에서 비로소 논의될 수 있다’는 것이 히스가 내세운 이유였다.

태평양 전쟁 초기에도 그처럼 러시아의 이익을 앞세웠던 히스가 이제는 국제연합의 창설을 지휘하고 있었다.


‘얄타密約’ 폭로



이승만의 ‘얄타밀약설’ 제기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였던 월터 조지 상원의원.
구베로의 정보가 사실이라고 믿은 우남은 이내 행동에 나섰다.

우남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신문들을 거느린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에게 편지를 썼다. 구베로가 제공한 정보를 설명한 다음, 강대국들의 비밀협정(密約)으로 희생된 조선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제이 제롬 윌리엄스가 근무하는 통신사 INS도 허스트의 소유였다.

다음 날 우남은 구베로 명의로 의회 지도자들인 랠프 브루스터 상원의원, 월터 조지 상원의원 그리고 클레어 호프먼 하원의원에게 전보를 보내서 얄타회담에서 연합국들이 맺은 비밀협정을 바로잡아 달라고 호소했다.

우남의 전보에 조지 상원의원만이 반응했다. 그는 구베로 명의로 된 두 통의 전보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면서, “나는 이 전보들을 각하에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주제에 관하여 전보 말고는 다른 정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각하께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라고 믿습니다”라고 편지에 썼다.

조지에게 전보를 친 날, 우남은 트루먼 대통령에게도 편지를 썼다. 그는 조선을 러시아에 넘긴다는 ‘얄타 비밀 협약’이 바로잡혀야 하며, 대한민국이 국제연합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있고, 조선인들을 일본과의 전쟁에 동원하는 정책이 합리적임을 역설했다. 백악관은 이 편지를 국무부에 이송했다.

홍보를 맡은 구베로는 우남과 신문기자들의 회합을 주선했다. 국제연합에 관한 소식들이 드물었던 참이라, 신문들은 우남의 ‘얄타 비밀 협약’ 주장을 크게 보도했다. 특히 허스트 계열의 간판 신문인 《샌프란시스코 익재미너》는 우남의 주장을 상세히 소개하고 “만일 사실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각서가 정말로 사실이라면, 이곳에 모인 연합국 회의에 외교적 폭발물이 될 것”이라고 평했다. 의회에선 폴 셰이퍼 하원의원이 ‘얄타 비밀 협약’에 대한 국무장관의 해명을 요구했다.


美, 비밀 협약 부인

애초에 희망한 대로, 우남은 미국 시민들이 조선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만일 구베로의 정보가 사실이 아니라면, 우남은 감당할 수 없는 비난과 보복을 받을 터였다.

이런 위험을 맨 먼저 깨달은 사람은 우남의 오랜 동지인 정한경이었다.

“박사님은 그러한 고발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실제로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 그 결과가 두렵지 않으십니까?”

우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 박사 얘기대로 나는 증거가 없소. 그것은 오직 나의 관찰에 따른 신념일 따름이오. 한국을 위하여 나는 내가 틀렸기를 바라오. 만일 비밀협정이 없다면, 그 결과에 대하여 나는 기꺼이 모든 책임을 지겠소. 사실이든 거짓이든, 우리나라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 밝히기 위해 지금 그것을 터뜨릴 필요가 있소. 내가 바라는 것은 얄타협정에 서명한 국가 수뇌들이 그것을 공식으로 부인하는 것이오. 그보다 더 나를 기쁘게 할 것이 없소.”

한반도의 운명이 강대국들의 비밀스러운 거래들로 결정되는 상황에서, 아무런 발언권이 없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최소한의 언질이라도 얻으려면 미국 사회의 관심을 끌어 미국 정부의 팔을 비틀어야 한다는 것을 우남은 잘 알았고 구베로의 정보에서 그 기회를 이내 알아본 것이다. 그런 통찰은 오직 나라와 민족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면서 자신에게 퍼부어질 억측과 비난과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품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

1945년 6월 5일 국무부 극동국장 대리 프랭크 록하트는 국무장관 대리를 대신해서 우남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5월 15일 자 편지에 대한 답장을 보내 왔다. 그는 우남이 제기한 의혹은 ‘거짓 소문’에 바탕을 두었으며 카이로선언에서 천명된 연합국의 조선에 관한 정책은 충실히 이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6월 8일 조지프 그루 국무장관 대리는 록하트가 우남에게 편지로 통보한 사항을 직접 성명을 통해 발표했다.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부인하자, 얄타회담에서 ‘비밀 협약’이 있었다는 의혹은 일단 해소되었다.


동아시아에 관한 비밀 협약의 존재

얄타협정이 맺어진 지 꼭 1년 만인 1946년 2월 11일 동아시아에 관한 비밀 협약이 공개되었다. 스탈린은 독일과의 전쟁이 끝난 뒤 두세 달 안에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루스벨트와 처칠에게 약속했다. 그런 참전은 아래의 조건들이 충족된다는 것을 전제로 삼았다.

1. 외몽골(몽골인민공화국)에서의 현상(status quo)은 유지된다.

2. 1904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가 잃은 권리들은 복원된다.
(a) 남부 사할린과 주변의 섬들은 러시아에 반환된다.
(b) 다롄(大連)항은 국제항이 되고 이 항구에 대해서 러시아가 지녔던 특권들은 복원된다. 러시아가 뤼순(旅順)항을 해군기지로 조차한 것은 복원된다.
(c) 만주의 동지나철도와 남만주철도는 중국과 공동으로 운영된다.

3. 쿠릴 열도는 러시아에 할양된다.

우남이 줄기차게 주장한 ‘얄타 비밀 협약’은 실체가 있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조선에 관한 항목은 비밀 협약에 들어 있지 않았다.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조선은 무척 중요했다. 한번 러시아군에 점령되면, 조선은 아주 오래 러시아의 통치를 받을 터였다. 러시아가 한반도를 오래 점령하면, 조선에서도 폴란드와 같은 상황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가 조직하고 지원하는 공산주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다른 세력들은 숙청되거나 무력화(無力化)될 것이었다. 우남이 걱정한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러시아가 점령한 북한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당연히, 스탈린으로선 조선에 관해 어떤 합의도 언급도 없는 편이 오히려 나았다. 테헤란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조선을 40년 동안 신탁통치 아래 두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스탈린은 어물어물 넘어갔다. 얄타회담에서도 루스벨트는 조선 문제에 대해 합의하고자 했지만, 스탈린은 다시 어물어물 넘어갔다.

얄타협정에서 조선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수상하고 간접적으로 비밀 협약의 존재를 가리킨다. 모든 일들에 용의주도하고 자잘한 이권들까지 챙기는 스탈린이 조선처럼 탐이 나고 사람들 눈에 잘 뜨이는 존재를 적극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하지 않은 채 그냥 운에 맡겼을 것 같지는 않다.

동아시아에 관한 협약은 두 가지 이유로 비밀에 부쳐졌을 것이다. 하나는 얄타회담 때까지만 해도 아직 러시아와 일본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다른 하나는 러시아가 탐낸 만주의 이권들은 연합국의 일원인 중국의 동의를 얻어야 될 사항들이었다.

따라서 우남이 지목한 ‘비밀 협약’은 동아시아에 관한 공식 협약이 아니라 스탈린이 따로 미국의 누군가와 협의한 일이라고 추론(推論)할 수 있다. 그렇게 보아야, 스탈린의 이상한 행태가 설명된다. 단순히 발표되지 않았다는 뜻에서의 ‘비밀 협약’이 아니라 협약의 존재 자체가 비밀이었다는 얘기다.


앨저 히스의 역할

그러면 스탈린은 미국의 누구와 언제 어디서 조선 문제에 대해 양해를 주고받았을까? 여기서 우남의 숙적 앨저 히스가 다시 등장한다.

얄타에서 실질적으로 큰 역할을 한 사람은 국무부의 장관 특별보좌관 히스다. 얄타회담의 주제가 유럽 문제였으므로, 동아시아 전문가인 히스가 발탁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더더욱 이상한 것은 히스가 러시아의 첩자라는 의혹이 널리 퍼졌고 루스벨트 자신도 그런 정보를 여러 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발탁되었다는 사실이다. 1939년 9월 미국공산당원으로 러시아의 첩자였던 휘터커 체임버즈는 국무부 차관보로 국무부 보안 책임자였던 아돌프 벌을 찾아가서 워싱턴에서 여러 해 동안 암약한 러시아 첩자 조직 둘이 있음을 밝혔다. 그가 밝힌 첩자들의 명단엔 히스도 들어 있었다. 벌은 그 명단을 루스벨트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체임버즈의 제보를 수사하자는 벌의 제안을 단박에 거부했다.

루스벨트는 러시아가 미국에 심어 놓은 첩자들을 수사해서 드러내는 일에 관심이 없었고 적극적으로 수사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반감을 드러냈다. 국가 안보의 최종 책임자인 대통령이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뉴딜 정책’에서 보듯, 루스벨트가 사회주의에 기울었다는 사실이 가장 근본적 요인일 것이다. 이념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니, 공산주의 러시아를 혐오하거나 경계하는 마음이 덜했을 것이다. 게다가 ‘뉴딜 정책’은 젊은 좌파 지식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그 정책을 집행하는 기구들은 그들로 채워졌다. 자연히, 루스벨트는 그들에게 호감을 품었고 그들을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여겼을 것이다. 히스에 관해서는, 그가 루스벨트 가족의 친구였다는 사실도 작용했을 듯하다.

어쨌든, 히스는 대표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었고, 러시아와의 협상에서 미국의 전략과 대응을 실질적으로 조율했다. 스테티니어스는 1944년 12월 1일에 국무장관에 취임했으므로, 외교 업무를 총괄한 지 겨우 두 달이었다. 뒷날 얄타협정의 내용이 문제가 되었을 때, 스테티니어스는 자신도 모르게 일들이 결정되었다고 해명하면서 히스의 농간을 탓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실제로 국무부 본부에서 얄타회담장의 미국 대표단에 보낸 건의서들이 스테티니어스나 루스벨트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의혹이 일었다.


간첩 앨저 히스



미 국무부 고위관리로 소련 간첩이었던 앨저 히스.
후일 히스에 대한 유죄 판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국의 승인을 얻도록 하려는 우남의 줄기찬 노력이 실패한 이유를 밝혀 주었다. 러시아에 충성하는 히스가 국무부에서 일하는 한, 우남의 명쾌한 논리도 줄기찬 노력도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얄타회담에 즈음해선 우남도 히스의 정체와 의도에 대해 상당한 심증(心證)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언급된 7월 25일 자 편지에서 우남은 국무부의 숨은 의도에 관한 자신의 의심을 록하트에게 직설적으로 밝혔다.

“이것은 국무부가 한국 공산주의자들에게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의 괴뢰정부인) 루블린 정부와 같은 정부를 구성할 기회를 주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지연시켜 왔다는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는 듯합니다.”

히스의 정체와 의도에 대해 심증을 품지 않았다면, 아무리 담대한 우남이라도 미국 정부의 용인 아래 미국에서 활동하는 처지에서 국무부에 대고 이처럼 노골적인 힐난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에밀 구베로와 제이 제롬 윌리엄스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선을 러시아의 영향 아래 둔다’는 ‘얄타 비밀 협약’이 맺어졌다는 얘기를 어떻게 듣게 되었을까?

이 흥미롭고 중요한 물음에 대해서 냉전(冷戰) 종식 이후 공개된 베노나 전문(電文)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 전문에는 히스임이 확실시되는 암호명 ‘ALES’가 등장한다. 그가 얄타회담 후 모스크바에 갔을 때, 그는 소련 외무차관 안드레이 비신스키로부터 러시아 첩자로 수행한 공로에 대해 훈장을 받았다. 그때 그는 그의 조직원 넷의 훈장들까지 대신 받았다. 원래 그가 속한 러시아 첩자 조직은 해롤드 웨어가 이끈 ‘웨어 조직(Ware Group)’이었는데, 히스는 그 조직의 하부 조직을 이끌었다. 그 비밀 시상식에서 ALES를 조종해 온 러시아 군정보기관 GRU는 비신스키를 통해 ALES와 다른 네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히스가 동료들과 공유한 정보들은 러시아 첩자들의 인맥을 통해서 퍼졌을 것이다. 아울러, 그런 정보는 히스와 그의 동료들을 조종하는 러시아 정보 요원을 통해서 러시아 사람들에게도 알려졌을 것이다.

러시아 공산당원이었다가 전향한 구베로는 이들을 통해서 조선에 관한 ‘얄타 비밀 협약’의 존재에 관해서 알게 되었을 것이다. ‘구베로가 제이 제롬 윌리엄스의 도움을 받아 조선을 팔아 넘기려는 비밀 협약을 워싱턴에서 밝혀 냈다’고 우남이 편지에 쓴 것은 히스와 그의 동료 첩자들 및 그들을 조종하는 러시아 첩보 요원들이 모두 워싱턴에서 활약했다는 사실과 부합된다. 비밀 협약이 문서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구베로가 믿은 것도 그 정보가 그렇게 여러 단계를 거쳤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해가 된다.


38선의 탄생



38선을 그은 딘 러스크.
‘얄타 비밀 협약’에 대한 우남의 거듭된 공개적 비판은 먼저 미국 사회에서 조선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멸망한 나라로선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히는 것이 가장 두려운 운명이다. 잊히지 않아야 언젠가는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지닐 수 있다. 우남은 자기 조국이 잊히는 것을 막기 위해 평생 진력(盡力)했다. 그가 그런 목적을 위해 일부러 소란을 피우고 말썽을 일으킨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얄타 비밀 협약’을 공개적으로 거론함으로써, 그는 미국 시민들과 관료들과 정치가들이 ‘코리아(Korea)’를 결코 잊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나아가서, 그는 미국 국무부가 비밀 협약이 없다고 확인하는 성과를 얻었다. 그런 확인은 평상시엔 결코 나올 수 없는 성격의 일이다. 그리고 그런 확인으로 러시아가 슬그머니 한반도를 장악할 위험은 크게 줄어들었다. 우남은 평생 독립운동을 하면서, 큰일들을 이루었다. 그런 업적들 가운데 ‘얄타 비밀 협약’을 폭로함으로써 얻어낸 성과는 단연 으뜸이다. 그의 애국적 모험 덕분에, 한반도가 공산주의 러시아에 슬그머니 병합될 위험이 실질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우남의 이런 헌신적 노력이 실질적으로 작용한 모습을 우리는 ‘38선 획정’ 과정에서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루스벨트는 조선에 대해서 구체적인 정책을 지니지 않은 채 얄타회담에 임했다. 조선을 즉시 독립시키는 대신 상당 기간 연합국의 신탁통치 아래 둔다는 방안이 현실적이라 여겼다. 그러나 1945년 7월 17일에서 8월 2일까지 독일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서 열린 포츠담회담에선 미국은 조선의 일부를 군사적으로 점령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포츠담선언이 발표된 7월 26일 이후 사태는 급격히 진행되었다. 8월 6일엔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되었고, 8월 9일엔 나가사키에 다시 투하되었다. 8월 6일엔 러시아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를 공격했다. 마침내 8월 10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밝혔다. 러시아는 한반도 북부로 진공(進攻)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한반도 전부를 점령할 가능성을 걱정한 미군 지휘부는 국방부에 근무하던 딘 러스크 대령에게 미군 점령 지역을 획정하라고 지시했다. 갑작스러운 임무를 받자, 조선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던 그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지의 지도를 보고 서울을 포함하는 지역을 미군 점령 지역으로 잡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삼았다. 미국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제안하자, 러시아는 선뜻 수락했다. 그렇게 해서 ‘38선’이 탄생했다.


‘이승만’이라는 變數

위에서 보듯,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 사이의 5개월 동안에 미국의 조선 정책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조선을 상당 기간 연합국의 신탁통치 아래 두기로 해서 조선에서의 러시아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는 태도에서 군사적으로 점령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도 미리 점령 지역을 획정해서 이미 조선을 점령하기 시작한 러시아에 동의를 요구하는 태도로 바뀐 것이다. 이런 태도의 변화는 어떻게 나왔나?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 사이의 5개월 동안에 나온 조선과 관련된 사건은 우남의 ‘얄타 비밀 협약’ 폭로뿐이다. 그것은 연합국 정부들이 관련된 국제적 사건이었고, 미국 사회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미국 국무성이 공식적으로 우남의 폭로를 부인해서 조선이 러시아의 일방적 영향 아래 놓이는 상황을 막았고, 덕분에 조선 문제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따라서 미군이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게 된 일은 우남의 행동이 영향을, 결정적 영향이 아니라면 적어도 실질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지도자가 바뀌었다. 트루먼은 루스벨트처럼 스탈린에게 속지 않았다. 트루먼 정권은 스탈린의 음험한 책략에 루스벨트 정권과는 상당히 다른 대응을 하게 되었다.

사정이 그리 달라졌지만, 세계 어떤 지도자들보다 먼저 공산주의 러시아가 제기하는 위협을 경고해 오고 ‘얄타 비밀 협약’을 폭로한 우남의 활동이 결정적인, 적어도 실질적으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한국의 은인 에밀 구베로

만일 우남이 ‘얄타밀약’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아마도 38선 이남의 한반도에 미군이 진주(進駐)하는 상황은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쉽게도 그 단초를 마련한 구베로에 대한 기록은 아주 소략하다. 우남 자신이 밝힌 정보는 1945년 5월 11일 샌프란시스코 모리스 호텔에서 보낸 수취인 불명의 편지 사본이 전부다.

〈제이가 우리를 도우려고 이리로 보낸 구베로 씨는 멋진 일들을 합니다. 비록 지금 내가 그에게 그런 얘기를 하지 않지만. 처음엔, 그는 그의 “친구들”인 소비에트 사람들이 그를 만나는 것조차 거부해서 좀 실망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이의 도움으로 워싱턴에서 한 가장 큰 일은 40년 동안에 한국을 두 번 째 팔아넘기는 비밀 협약을 밝혀 낸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남의 전기에서 올리버 교수는 구베로를 ‘공산당을 떠난 러시아 사람 (a Russian who had left the communist party)’이라고 기술했다. 공산당을 떠났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든, 구베로는 국제연합 회의에 참석한 러시아 대표들과 안면이 있었을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얘기다.

자연히, 러시아의 비밀 문서들엔 그의 이력에 대한 기록이 있을 터이고, 우남이 구베로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얄타 비밀 협약’을 폭로했으므로, 러시아엔 당연히 구베로의 활동에 관한 기록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러시아가 그런 기록을 공개할 가능성은 현재로선 없으므로, 오래 세월이 지나야 우리에게 큰 혜택을 준 은인의 모습이 보다 자세하게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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