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46) 스쳐 지나 간 분들, 평생에 남겨 준 것 - 2차

작성자
10009
작성일
2020.03.22
(우리는 모두 역사적 인물인데)

설교록을 연구하기 위해 백영희의 족보와 평생을 안팎으로 전부 살펴 봤다.
그 과정에 백영희와 우호적인 분들을 만났고 또한 적대적인 분들도 만났다. 적대적인 분들은 필사적으로 만나 보고 모든 비판을 최대한 들어 보면서 비로소 나는 백영희의 위대한 점을 한 차원 더 높게 볼 수 있었다. 이 번 글은 내가 만난 인물들이 가졌던 남 다른 인적 자본을 적고 싶다.

내가 만난 분들은 거의 평범한 분들인데 그들은 의외로 여러 종류의 정말 역사적인 인물들을 개인적으로 접촉하며 살았고 그들이 겪은 사건은 교회사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참으로 놀란 것은, 그들을 스쳐 지나 간 인물과 사건들의 역사적 의미를 그들은 잊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 인물들이 거의 다 내가 알려 드리는 순간 비로소 그 의미들을 느꼈고 함께 감탄했다. 백영희를 이단으로 정죄했다가 회개한 한종희 목사님만은 처음부터 그가 접한 인물과 그가 겪은 사건은 역사적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분과 대화가 의외로 가장 쉽고 간단했었다. 나는 거의 다 그 분에게 듣고 배우는 입장이었고 그 분은 내게 수 없는 것을 가르쳤다. 백영희가 이단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 빼고.

나는 정말 평범한, 그냥 그 정도의 그런 사람으로 늘 생각해 왔었다. 어느 날, 내가 접했던 분들은 나와 비교하기 어려운 대단한 분들이며 내가 겪은 일들은 교회사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백영희 전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면서 모두가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너무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보다 더 위대하고 의미 있는 분들을 접했고 그런 사건들을 겪었는데도.

나의 집은 거창의 제일 중심에 있었다. 12개 읍면의 제일 중심에는 시장과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다. 부모님과 관계 되는 이들이 거창읍에 왔다가 일정 때문에 하루 밤을 자야 하면 나의 집을 찾았다. 경제도 집도 넉넉했고 부모님의 인심이 좋았다. 어머니는 롬12:13에서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씀 때문에 그랬던 듯하다. 아버지는 출23:9의 '나그네의 정경'이라는 말씀 때문이 아니라 그 말씀처럼 실제 고생을 해 본 경험 때문에 하룻밤 묵고 가는 분들과 식사만큼은 양해를 했다. 하룻밤이라도 자고 가게 되면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나는 옆에서 철없이 듣고 봤다. 그 중에 나의 평생에 크게 영향을 끼친 장면들만 소개해 본다. 철 없는, 신앙도 없는, 어린 아이의 눈과 귀에 남겨 지는 면도 심각하게 생각하자는 뜻이다.

1.이기점 전도부인

(소개)
개명교회 교인으로 종신했다. 백 목사님의 큰 사위 최재현 목사님의 모친이다.

백 목사님의 첫 사위가 최재현 목사님이다. 합천 사람이다. 이기점 집사님은 최재현 아들 하나를 데리고 개명에 와서 살았다. 아들이 훗날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카브난트를 졸업 한 후 그 곳에서 사업을 하며 공회의 세인트루이스 교회를 개척했다. 당시 미국에 살던 분들은 고국을 방문하는 것이 빨라도 10여 년 걸릴 때였다. 이기점 집사님은 개명에서 돌아 가실 때까지 혼자 살며 기도와 교회 충성에 생을 바쳤다.

(철 없는 아이에게)
이기점 집사님은 신앙과 교육이 지금 생각해도 참 남 달랐다. 많은 분들이 나의 집을 거쳐 갔지만 이 집사님만은 가방에 사탕을 넣고 오신다. 밑으로 어리거나 위에 형제가 멀리 있게 되어 집사님이 오시면 4-5명이 둘러 앉게 된다. 우선 사탕 하나씩을 주신다. 그리고 나면 반드시 옛날 이야기를 한 가지나 두 가지를 하신다. 그 이야기는 효자 이야기였다. 산 속에 어머니를 고려장 하려고 지고 간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나뭇가지를 꺾어 놓았다는 이야기, 지나 가는 사람을 도왔는데 나중에 복을 받아 부자가 된 이야기들이다. 눈을 깜빡 거리며 몰입 되어 들었다. 나는 별나게 어른 말을 우습게 알던 때다. 특히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그런 말을 하면 속에서 반론이 튀어 나오는 못된 성격이 강했다. 이 집사님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였다. 사탕 하나 때문에 호감을 가졌기 때문일까? 그 것만은 아니었다. 그 것뿐이면 나는 한 개 얻어 먹고 다른 방으로 갔을 성향이다. 집사님은 오실 때 주로 저녁 늦게 오셨다. 저녁 식사를 집에 와서 하면 되는데 다른 곳에서 하고 오실 때가 있어서 의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주무시는 것은 나의 집 외에 없다고 보인다. 그러나 식사 신세는 좀 피했던 느낌이다.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전혀 기억에 없다. 내게 이 분이 '할머니'라는 바로 그 기억을 남겼다.

깨끗하게 입고 단정하게 오신다. 한 눈에 다른 분들과 돋보일 만큼 귀한 모습을 보였다. 이야기도 품위가 있었다. 차분히 한 마디씩 머리 속에 집어 넣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마음 속으로 '아! 저럴 수도 있겠다'라는 인식을 가졌다. 그런데 그런 종류의 이야기만 올 때마다 계속했는데도 지겹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야기거리도 많고 이야기를 잘 하는 분이라는 뜻이겠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교사라면 참으로 너무 훌륭했겠다 싶다.

식사를 하게 되면 꼭 기도를 인도하신다. 이 밥을 먹고 이 아이들이 다니엘처럼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게 해 달라고 하셨다. 기도 내용이 늘 같았기 때문에 기억할 수 있다. 오늘 내가 다니엘과 조금이라도 비슷하게 하나님의 영광이 된 면이 있다면 이 면으로 나를 위해 가장 기도를 간절히 또 많이 한 분이 이기점 집사님이므로 나는 그 분의 그 기도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 번은 미국에 간 아들 이야기를 했다. 아들이 미국에 유학을 가기 위해 밥을 먹을 때도 영어 책을 놓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당시 나는 마음 속으로 '무슨 공부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설마 그렇게까지?' 반신 반의가 되었다. 뒤에 나는 철이 들면서 어느 순간에 밥을 먹을 때 책을 들고 있었다. 공부라 하면 무조건 그렇게 싫었고, 내가 어느 날 책을 들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하던 때 들었던 그 한 마디, 밥을 먹으면서 책을 들고 공부를 할 수가 있다는 것은 나의 마음에 그림이 그려 지지 않았으나, 바로 그 이야기 하나가 어느 순간 나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최근까지도 나는 혼자 식사를 하게 되면 책을 들든 아니면책을 쓴다. 그 분의 말씀 하나가 내 평생을 그려 놓았다.

(철이 들고 만난 그 아드님)
1984년 5월, 내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공항으로 나를 데리러 온 분이 바로 그 분의 그 아들, 최재현 목사님이었다. 최 목사님께 그 때 이야기를 질문했다. 최 목사님은 전쟁 직후 유학을 위해 유학 영어 시험을 쳤고, 합격을 해서 미국으로 공부하러 나왔다. 최 목사님과 같이 공부를 하고 유학을 함께 한 평생의 친구가 브니엘고등학교와 브니엘 교단과 신학교를 만든 이성기 목사님이다. 88올림픽 선수촌장도 했고 또 한국의 테니스 계에 거목이기도 하다. 백 목사님을 부친처럼 존경하는 분이다. 두 분은 형제보다 가깝다. 내가 유학을 마치고 결혼을 하자 최 목사님은 아내를 바로 브니엘 고교 교사로 부탁하겠다 하셨다. 그 때는 아는 사람의 말 한 마디면 되던 때였다. 최 목사님은 돈이 없는 내가 미국 유학을 위해 절차를 밟을 때 미국에서 필요한 모든 재정보증과 St. Louis University와 Covenant 입학에 필요한 일체를 도맡았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하는 아이를 맡은 학부모와 같았다. 그 모친과 어릴 때를 전부 되살릴 수 있었다. 하룻밤 주무시고 가셨고 기도를 해 주셨고 이야기를 해 주셨던 모친, 그리고 20여년이 지나 바로 그 아들에게 측량할 수 없는 배려와 후원을 받았다. 이렇게 드리고, 너무 많은 양으로 되 받은 즉시 나는 최 목사님 댁의 두 아들을 위해 그들의 평생에 나의 도움과 배려를 벗어 날 수 없는 도움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 부인은 그의 평생 나처럼 믿고 도움 받은 인물은 없다. 백 목사님의 모든 가족과 공회의 알 만한 분들은 모두 알고 있다. 이기점 집사님이 철 없는 아이를 데리고 하나님께서 운영하시는 세상의 자연 원리를 이야기로 들려 주셨다. 나는 그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부럽지 않았다. 분명히 그 이상이었다.

최 목사님은 그 어머니와 얼굴이나 체형이나 품성이 같았다. 최 목사님은 모친 장례 때 한국에 혼자 나왔고 돌아 가는 길에 나의 집을 들러 모친이 자주 찾고 또 모친이 좋아했던 아이들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서 무슨 인사를 하고 갔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고향을 떠났을 때라 가족에게 전해 들었다. 최 목사님을 만나 모친 이야기를 했다. 최 목사님은 모친에 대한 깊은 회한을 가졌으나 옆에 있는 부인 때문에 표시를 내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부인은 분위기를 알고 한 마디 하셨다. '그 때 우리가 살아 남기 위해 얼마나 바쁠 때였다'는 그런 설명 한 마디가 전부였다. 이 순간을 통해 나는 어릴 때 이기점 전도 부인, 공회는 그냥 집사님이라고 부른다. 집사님이 늘 주무시기 전에 우리를 앉혀 놓고 했던 효도 이야기들, 아들 이야기, 공부 이야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귀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모든 날들에 개명에 계시며 미국의 아들을 위해 기도하며 가졌던 이기점 집사님의 마음과 미국에서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향해 가졌던 최 목사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을 수가 있었고 어머니와 아들의 속 사정도 알 수가 있었다.

최재현 목사님에게는 형제라고 이종 사촌 하나만 있다 할 정도다. 유흥수 씨다. 요즘으로 말하면 부산경찰청장 서울경찰청장을 거쳐 1979년 10.26 이후의 급변기에 경찰총수를 지낸 학자급 고시 출신의 인물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군의 정보를 장악한 보안사령관이고 유흥수 치안본부장은 일반 민간 세계의 정보를 장악했으며 둘다 경남 합천 출신이다. 정보부장은 저격 후 체포 되었고 정보부는 묶여 있던 시절이다. 최 목사님은 동생으로부터 일반인이 알 수 없는 향후 정국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며 내게 당시를 설명했다. 군부가 기존 모든 세력을 완전히 묶고 없애는 대신 참신한 새 인물들을 대거 등용한다는 것이며, 합천 출신으로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성공적인 미주 교민으로 활동하던 최 목사님은 새로운 정권에서 기회가 있다는 취지였다.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은 최 목사님에게 '그 쪽에 들어 가면 너는 죽는다!'고 야단을 쳐서 막았다. 이 때 죽음은 육체적 죽음까지 포함했을 듯하다. 최소한 인생이 끝장 나는 것은 기본일 것이다. 그리고 목사님은 딸 부부의 목회자 소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 면을 두고 말한다면 100% 맞는 말씀이다. 백 목사님은 큰 아들이 한국인 최초로 미국 하바드 대학교 법학박사 과정의 합격증을 받았을 때도 또 그 아들이 2공화국 법무 장관에 30세 나이로 입각을 제의 받을 때 같은 취지로 막았다. 나는 1987년 유흥수 씨를 부산의 국회의원 선거 사무실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 때 백순희 사모님과 만나는 모습을 지켜 보며 설교록에 나오는 백 목사님의 언급과 최재현 목사님의 지난 날 이야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유흥수 씨는 부산시경에 있을 때 백 목사님의 말 한 마디에 바로 움직였고 목사님은 평생 그 부탁을 회개했다는 내용이 설교록에 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결정한 것을 두고 목사님도 평생 그런 일이 두 번 있었고 그 중에 한 번을 예로 들었다. 유흥수 씨는 박근혜 대통령 시기 일본과 위안부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령인데도 다시 일본 대사로 투입된 인물이다.

최재현 목사님 때문에 유흥수 씨는 백 목사님을 아버지처럼 여겼다. 서부교회 예배당에 벽이 붙은 옆집은 이불 솜공장이다. 그 먼지가 심각하여 교인들의 건강이 문제가 되는데 교회를 얕잡아 보고 불법적인 일이 너무 많았다. 목사님은 유흥수 시경국장에게 한 마디를 했다. 유흥수 씨는 바로 움직였다. 신고를 받고 법적으로 절차를 밟는 일이었고 당시는 이런 것이 요즘처럼 문제가 되지 않을 때다. 목사님은 이 부탁을 두고 하나님 앞에 심히 괴롭게 회개를 했다. 이 집과의 문제는 목사님 돌아 가실 때까지 해결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집 때문에 서부교회 본당 건물은 직사각형의 예배당을 만들지 못하고 기억자로 파행이 된다.

내가 이 분을 사무실에서 만나러 갈 때, 나는 막 결혼을 했을 때였고 아내 가정과 공직에서 뜻 깊은 관계가 있었다. 너무 사적인 이야기여서 생략한다. 최재현, 유흥수, 김00, 강경식... 이 분들의 이름만 나오면 나의 머리에서는 바로 어릴 때 늘 집에 와서 함께 자고 도란도란 이야기 해 주던 때를 생각한다. 나도 모르게 나의 인생, 나의 신앙의 기본에 속하는 바탕을 색칠한 이야기가 된다. 나는 설교 중에 알게 모르게 효도 이야기를 참 많이 담는다. 당연히 백 목사님의 5계명 교리가 전부다. 그러나 이기점 전도부인, 이 집사님의 무릎에 앉아 그 긴긴 밤에 들었던 '그 흔하고 흔한 세상의 효도 이야기'가 나에게는 이렇게까지 나의 생에 색칠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오늘도 어린 아이와의 이야기는, 비록 짧아도 대수롭지 않게 지나간다 해도 그 아이에게 어떤 것을 심어 놓을지, 그 아이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 놓을 사경회의 은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산다. 겉으로는 쉽게 좋게 간단하게 진행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속으로는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옥토에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종자를 생각해야 하고, 훗날의 결과를 책임 져야 하는 일이며, 성령과 악령이 이 아이의 마음을 두고 치열하게 전쟁을 하게 된다. 나는 가운데 있다. 순식간에 귀신의 군병이 될 수도 있고 또 돌아 서면 성령에 붙들릴 수도 있다.

2. 이규갑

(소개)
일제를 상대로 독립운동에 집안이 전부 나선 유명한 집안의 중심 인물이다. 이순신 장군의 10대손 직계다.
이 집안의 특징은 시집 온 부인들이 충무공의 정신으로 일본과의 투쟁에 자녀와 남편들을 몰아 냈다. 더 강해 보인다.
사임당은 신 씨다. 그러나 율곡의 부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독립운동에 나선 부인들의 이야기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규갑은 감리교 목사지만 집안에 공회 핵심들과 가까왔다. 어쩌다 보니 연구소에도 많다.

<이규갑 생애 자료 게시판 바로 가기>

이규갑은 인터넷을 좀 찾아 보면 전설적인 이야기로 넘친다. 해방 후 감리교의 방향을 결정했던 인물이다. 독립운동 과정에 이규풍 이민호 이규갑 박안라 이애라... 집안 식구들이 일선에 모두 나섰고, 해방 후 이규갑은 좌익에 간 김두한에게 김좌진 이야기를 통해 우익으로 돌려 세웠고 해방 후 정국에서도 재정을 맡았다. 이런 인연으로 한국은행과 재경부 쪽에 소리 없이 큰 역할을 했다.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이자 광복회장을 최후까지 역임한 이갑성과 사돈으로 신앙과 정치성향까지 같았다. 독립운동에도 누구보다 매진했으나 해방 후에는 나라의 건설적 앞 날을 위해 모두가 이해하지 못했던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도왔다.



이 글에 이규풍의 직계 이길영은 서부교회 핵심 가정이어서 연구소 구 게시판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서부교회 행정실장 이탁원 목사가 호주처럼 되어 있으나, 이규갑에 대한 직접 이야기는 아마 거의 없을 듯하다. 이규갑의 아들 이민휘까지 살피다 보면 족보의 내력을 엿보는 데 참고가 될 듯하다.



이규갑 목사님 부부는 은퇴 후 거창의 나의 집을 자주 들렀다. 그의 집안은 숫자가 적었다. 조상 때 워낙 많은 사람을 남해 바다에 수장시켰 버린 결과였을까? 전국에 집성촌이 4곳뿐이다. 경기도 양평과 용인이 중부지방, 남부지방에는 전북 김제와 경남 거창의 완대리가 전부다. 완대는 공회의 출발지인 주상면과 고제면 사이에 있고 현재 대구공회 본부가 있는 곳이다. 공회에는 이 곳 출신의 숫자가 적지 않다. 이규갑은 원래 조상 때부터 집안 대부분이 불교나 유교처럼 불신이다. 그러나 이규갑은 믿는 사람이면서사라 해도 대충 목사를 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의감이 넘치는 목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집안을 챙기는 차원에서 전국을 다녔지만 거창의 집안 식구들은 총공회 교인들이라 신앙이 독실하면서도 거창 전체를 두고도 유지에 속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규갑의 노년에 집에 자주 들렀다. 이 분은 해방 후 정부나 청와대 차원에서 독립운동뿐 아니라 재정경제 분야의 최고 원로였기 때문에 거창이란 곳은 집안이면서도 신앙에 특별한 점이 아니면 들를 이유가 없었다.

(집안 이야기)
평생 독립운동과 감리교 교단과 해방 후 조국의 발전에 주력하던 이규갑과 그 식구들을 접해 보면 호적과 상관 없이 충무공의 직계라는 느낌이 확 들어 온다. 식구들의 품성, 외모, 특성, 그리고 뿜어 나오는 용력은 위에 인용한 자료에서 봐도 누구나 느낄 듯하다. 집안에 소리 없이 흐르는 그런 기질이 있다. 뭔가 정의감이 약간 보인다. 또 고난을 당해도 쉽게 무너 지지 않으며, 큰 흐름을 두고 핵심을 짚어 낸다.

이규갑은 노년에 모든 공직의 일선에서 물러 나자 집안을 챙기기 시작했다. 전국의 집안 후손들에게 신앙과 애국 헌신을 전하고 싶었다. 집안의 집성촌은 9곳, 그 중에 5곳이 북한에 있다. 경기도에 2곳, 전북 김제에 1곳, 거의 다 신앙과 거리가 있다. 그런데 거창의 집안들은 세상적으로는 허무하다 할 만큼 별 볼 일이 없는데 신앙에 독실한 가정들이 있었고 그들은 공회 식구들이다. 봉산교회와 칼바위 그리고 그 기도와 집회가 특별한 신앙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덕유산 골짝의 못난 지역이지만 지역에서는 그래도 신앙과 사업을 하며 약간 눈에 띄는 집안이 있었다. 60년대, 교통이 참으로 험할 때 70대 몸을 이끌고 부부가 함께 거창을 자주 찾았다. 거창을 오면 나의 집에 머물었다. 집안 이야기가 나왔다. 그 때는 모르고 눈과 귀로 담았다. 이기점 전도부인, 집사님이 나의 집을 들르던 때와 비슷한 시기였다. 나는 당시 이규갑 어른의 이름만 자주 들었지 어떤 인물인지 실제 알게 된 것은 훗날이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이름 있는 분인지는 최근에야 인터넷을 통해 알았다. 공회는 세상과 집안을 모르고 사는 것이 공회인답지 않은가?

(일본 이야기, 친일파 이야기)
내가 자라 가면서 일본을 이렇게도 배웠고 또 반대 편에게 좋은 면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충무공은 왜놈 하나도 살려 보내지 못한다며 남해 바다에 닥치는 대로 가라 앉힌 인물이다. 우리 역사로 보면 성웅이지만 일본에서 보면 그들이 한 짓은 생각하지도 않고 너무 잔인하다고 했을 듯하다. 객관적으로 보면 어떨까? 전쟁이란 어떤 전쟁도 자비한 전쟁은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양쪽이 같다. 준비한 쪽과 당하는 쪽, 센 쪽과 약한 쪽만 있을 뿐이다. 임진왜란 정도의 참혹한 전쟁은 역사에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막바지에 정리를 할 때 즈음이 되면 종전의 절차를 밟는다. 형식이 있든 없든, 7년의 전쟁을 통해 이제는 지겨울 때다. 쳐 들어 온 쪽에서 이제 살아만 가겠다는데, 당할 대로 당하여 군인도 없고 싸울 힘도 없는 조선수군의 대장은 왜ㄴ을 하나도 살려 보내지 못한다고 끝까지 추격을 하다 전사를 한다. 쥐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대든다 한다. 고양이가 쥐를 잡기는 하겠지만 실수로 고양이에게 상처가 나면 고양이는 항생제가 없어 곤란해 진다. 왜병은 우리와 차원이 달랐다. 그 이전에도 최근에도, 임진왜란 당시의 전력 차이와 성격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런 왜병이 명나라 대장에게 뇌물을 바치고 도망을 가기로 했는데 충무공은 기어코 따라 가서 끝장을 봤다.

이 것이 이규갑 집안에 내려 오는 역사며 가정 교육이다. 또한 집안에 조용히 흐르는 기질이다. 내가 이규갑 어른을 알게 될 때는 초등학교 때인 1960년대이다. 해방 된 조국의 건설에 매진하고 이북과 전쟁을 겪은 터라 일본인을 욕할 시간도 없고 오히려 미국과 함께 북한을 상대로 싸워야 했기 때문에 일본이 비록 미워도 더 밉고 더 위협적인 당장의 원수 때문에 이규갑은 일본에 대한 감정을 겨우 억제하고 있었다. 그런지 아닌지 남의 마음을 어떻게 알까? 더구나 나는 어릴 때다.

나의 아버지는 친일파도 아니고 독립운동가도 아니다. 그냥 3끼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이 나라의 가장 밑바닥에 머슴이었다. 아버지는 3끼 밥을 먹여 주면 친일파에게 박수를 칠 분이고, 마지막 한 끼를 먹어야 하는데 독립운동을 한다며 그 밥그릇을 가져 가는 애국자가 있다면 그 애국자의 뒤통수에 돌을 던지고 그 밥을 찾아 올 분이다. 오로지 하루의 생존만이 아버지에게는 전부였다. 이 이야기의 초두에 아버지의 어렵던 어릴 때 환경을 적었다. 오로지 3끼 밥을 먹고 생존을 하는 것이 전부다. 교육도 받지 못했고, 누가 사상을 고취 시키지도 않았고 그럴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1960년대 아버지는 거창 사회에서는 최고로 손꼽을 몇 사람 중에 들어 있었다. 돈과 사회적 명성에 신앙까지 대단했는데 문제는 아버지는 사상과 인품의 수준이 천출이다. 이규갑은 충무공 직계로 이 나라 최고의 귀골이다. 일제 때 벌써 와세다 유학을 다녀 왔다. 그리고 골수 독립 운동가이며 투쟁가다. 목사다. 사상적으로 또 가정 교육적으로 그리고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이 나라 최고의 인품을 모두 갖춘 어른이다. 그런데 어린 내 눈 앞에 두 분은 한 번씩 언쟁을 했다. 언쟁이 될 상대는 아니다. 집안의 어른이 시골에 참으로 못난 아랫 사람을 애타는 마음으로 훈도하는 상황이고, 아버지는 그 분에게 마치 10대가 부모에게 불쑥불쑥 한 마디씩 던지듯 한다고 봐야 맞다.

아버지의 수준으로 볼 때 아버지는 그 어른의 국가적 위상을 설명해 준다 해도 알아 듣기도 힘들었을 듯하다. 아버지는 조상이 밥을 먹여 주지 않았고, 집안이 구휼해 준 적도 없었으며, 나랏님과 사회가 아버지를 보살펴 준 일이 없다. 보기 드물게 작은 체구에 어려서부터 죽도록 머슴살이만 했다. 만일 일찍 믿지 않았더라면 딱 공산당의 먹잇감이다. 아버지가 만일 공산당에게 포섭이 되었다면 적어도 덕유산과 지리산에서는 이름을 날렸을 듯하다. 아버지가 잘 하는 것은 나무 타기와 번개처럼 사라 지는 운동 신경이다. 원래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지만 다람쥐처럼 날랬다. 그리고 남의 아픈 곳을 긁어 놓을 때는 말도 잘했다. 아버지의 외가는 거창의 그 지역 일대에 좌익 머리였다. 아버지는 6.25 전쟁이 일어 나기 전에 아버지 외삼촌에게 미리 남침이 임박했으니 교회를 그만 두고 입장을 전향하라는 절박한 호소를 들었다. 설마설마 했으나 나중에 점령이 되고 보니까 숨어 있던 모든 조직이 드러 났다. 아버지는 점령 기간 내내 어떤 순간에라도 순식간에 사라 졌다. 어머니만 남아서 인민군과 빨치산 속에서 여러 번 순교의 위기를 넘겼다. 어머니의 회고에 의하면 멋 모르고 죽기가 두렵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봐도 그렇다. 논리나 비교 평가가 아니라 어머니는 단순한데 백 목사님께 은혜를 받았고 변판원처럼 순교를 애모했다. 망설임 없이 인민군과 빨치산의 총 앞에 담대하게 설 때 아버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 졌다. 어떤 때는 무성한 나무 꼭대기에 올라 갔고 어떤 때는 담을 넘어 어디까지 가서 숨었는지도 모르겠더라고 한다.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 갔다. 그리고 큰 돈을 벌었다. 이로 인해 남은 인생을 머슴에서 지역의 유지로 살았다. 일본인 이웃이 자기 아들처럼 몸소 가르쳐 사업을 했다. 일본 생활을 통해 한국은 일본을 넘어 설 수가 없음을 체득했다. 정신 무장, 기술, 자본, 발전 된 모든 면으로 우리는 그들과 맞서 봐야 헛 일이며 영원히 한국은 일본을 따라 갈 수 없다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다. 나는 학교에서 늘 일본 욕만 배웠다. 집에 와서 일본을 욕하면 아버지는 거짓말에 속지 말라고 난리다. 1960년대 우리 나라는 자전거까지만 만들었다. 일본은 이미 수십 년 전에 항공모함과 전투기를 만들어 미국을 위기에 몰아 넣었다. 아버지는 일본인들의 단결과 헌신을 일일이 설명했다. 일본의 도로 관리, 일본의 기계를 하나씩 제시하면 내가 학교에서 총론적으로 왜놈들은 나쁘다고 배워 온 지식으로는 이길 수 없다. 내 눈에 아버지는 친일파였다. 그런데 훗날 다시 생각해 보니 생존 차원과 현실적 차이를 짚었을 뿐이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국 사람이다. 겉으로는 어리숙 해 보여도 속으로는 계산이 있다. 속으로는 오기도 있다. 왜인이 좋아서 친일파가 아니다. 자기 민족에 대한 자조라고 봐야 옳을 듯했다. 이규갑은 이런 아버지를 시골 나의 집에까지 와서 일본의 잔악성을 이야기했다. 상대를 할 수 없는 수준이다 보니 그냥 점잖게 한두 마디만 한다. 해 봐야 알아 들을 수 없는 상대다. 이규갑 부인, 나는 그냥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이런 대화가 시작 되면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볼 때 얼마나 분노하는지 느낄 수 있다. 그 전율은 오늘도 느낀다.

이규갑 어른의 가족이 당한 고문을 생각하면 이 분들 앞에서 일본에 대한 우호적 평가는 어른의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다. 나는 친일적 평가와 반일적 감정의 문제를 두고 1977년 백영희 목사님께 설교를 들으며 비로소 해결을 했다. 사회주의 좌익에 대한 분석과 평가도 같은 시기에 함께 해소를 했다. 이규갑 어른이 어릴 때 나의 집을 방문하고 내게 이 나라의 역사와 정치에 관련 된 수 많은 면을 어린 나에게 남겨 뒀다. 책과 방송을 통해 무슨 말을 듣는 것보다 일제와 해방 후의 격동기에 이 나라의 중심 인물로 살아 온 분과 한 집에서 함께 먹고 함께 자고 직접 보여 준 언행은 하나님께서 내 평생의 신앙에 꼭 도움이 되는 면을 자연계시로 주신 것이다. 나만 그럴까?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맡길 사명 때문에 그 면에 필요한 교육을 시키면서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나의 예를 제시하며 나처럼 또는 나보다 더 많고 중요한 인물과 사건을 보내 주신 주님의 은혜를 살펴 보시면 좋겠다.

(베푼 혜택들)
아버지는 양혜원을 운영했다. 일전에 다른 글을 통해 복지부 장관이며 국회의 보건복지부 위원장을 지낸 의사 선생님이 진안군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며 아버지에게 한센병 치료 마을을 중앙정부에 등록 시켜 국가적으로 지원을 받게 한 과정을 적었다. 바로 그 시기에 이규갑 어른은 거창의 나의 집을 들렀다. 이 분은 국회에서 문교사회분과 위원장이었다. 그 시절 그런 경력을 가진 이는 퇴임 뒤에도 영향력이 컸다. 더구나 평생 정부의 각종 고문을 맡았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있다. 양혜원에 도움을 줬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나는 7남매다. 제일 위에 누님은 나이 차이가 많다. 자형이 대학을 졸업하던 해 한국은행에 취직이 예정 되었다. 이 분은 해방 후 국가의 재정 분야에서도 활동했었다. 경희대 상대를 졸업할 예정이던 자형은 신앙과 인품과 실력 면으로 대단히 우수한 인재다. 국가를 위해 꼭 쓰일 만한 인재라고 확인을 하고 추천하고 또 복지시설에 대해 도움을 줄 때 양심과 실제 상황을 모두 고려하는 분이다. 그 집안에는 그런 면이 너무 남 다르다.

또 한 가지를 기억한다. 바로 그 시기에 자형은 거창에 자동차정비업을 허가 받기 위해 아버지를 심부름 하고 있었다. 당시 자동차 정비업은 허가제였다. 아무리 요건이 맞아도 허가를 받기 어려웠다. 자동차정비업이 허가가 나던 때 집안은 아주 들떠 있었다. 제대로 된 큰 사업이고, 향후를 보장하는 기계 공업이다. 아버지는 돈을 주고 허가를 받아 오는 로비력이 없다. 하지도 않고 할 줄도 모른다. 누가 도와 주면 고맙게 받을 줄만 안다. 양혜원의 복지시설 허가도, 자동차정비업도 모두 그렇게 되었다.

내가 거창에 있던 시절만 해도 이런 사업들의 성격과 장래성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아들을 일찍 낳지 못해서 사업을 잇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자형은 정비업이 허가 나던 바로 그 시점에 돌아 가셨다. 아들들은 아직 중학교 이하였다. 그리고 이 허가 사업은 남에게 돈이라도 받고 넘겼으면 큰 돈일 터인데 이미 아버지는 이 시기에 제 정신을 놓고 있었다. 하루 종일, 1년 365일 술에만 빠져 있었다. 이런 경험들은 내 평생의 신앙 생활에 거의 모든 면에서 말할 수 없는 귀한 자료가 되었다. 백 목사님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위의 형 때문에 학교를 그만 두고 일본에 3년을 다녀왔다. 그 때 본 일본과 가정의 와해 과정은 백영희의 평생 설교와 신앙의 노선과 신앙의 모든 면을 형성하는 데 정말 값지게 사용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버릴 만한 것을 주신 적이 없다. 롬4:4에서 우리는 그 어떤 불행도 아쉬움도 잘 살펴 보고 주님께 그 사연을 여쭈어 보면 주님을 닮는 이 목적에 이용하라고 주신 선물이다. 이 성경이 백 목사님에게나 해당이 되지 나 같은 것에게까지 해당 될지는 실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백영희 전기를 구성하기 위해 만난 수 많은 분들에게 의외로 모두 그런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거친 흔적을 보며 나의 지난 날을 겹쳐 보았다. 믿는 우리는, 한 사람도 빼지 않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 역사적으로 귀한 인재들이다. 이런 우리를 만들기 위해 주님은 우리 평생에 뜻하지 않았던 천사를 보내셨다.

 

(전국 부인회)

60년대 말, 어머니는 서울에 집안 모임에 간다고 했다. 어머니는 도평 집회 장소 바로 언덕 너머에 있던 친정도 가지 않는 분이다. 다니던 공회 교회에 충성, 하나 외에는 없다. 그런데 전국의 집안 모임을 간다니 평생 살아 오신 어머니답지 않았다. 다녀 온 뒤에 창립총회의 사진과 거북선 모양으로 만든 브로치를 보여 주셨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서울에서 늘 거창 여기 집까지 오셨고 양혜원과 자형과 집안 사업까지 이렇게 도와 주셨는데 목사님이어서 주일을 피해 전국의 집안 부인들을 모아 사임당은 물론 일제 때 독립운동에 나선 집안의 부인들의 충절을 이어 가자는 총회를 만들고 꼭 서울에 와야 한다고 너무 부탁하는 바람에 가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밤낮 철야 기도에 전도와 교회 일 외에 외부 활동이 전혀 없는 분이다. 이규갑 어른의 덕을 얼마나 봤는지 또 나의 가정을 돌아 봤는지 느낄 수가 있었다..

사진도 보고 서울의 이규갑 어른 댁에 전국의 집안 부인들만 모아 놓은 창립총회 이야기도 해 주셨다. 너무 어머니답지 않은 분위기여서 어머니도 속화가 되었나, 무슨 집안 식구가 모이는 총회를 입에 담는 것부터 아주 어색했다. 지금 돌아 보니 나를 위해 내게 필요한 내용들이 되었다. 집안의 숫자가 적고 인물이 없다 보니 이규갑 어른의 직계가 중심이고 나머지는 어떻게 해서 좀 모아 놓은 형색이다. 전국의 집성촌이 4곳인데 거창에서는 어머니와 숙모들이 다녀 오셨다. 이 사진과 그 총회에 참석한 몇 안 되는 회원이니 어느 날 사임당의 몇 안 되는 무슨 후손에 들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될 분위기다. 사진을 보면서 이렇게 집안의 사람 숫자가 적을까? 어머니와 숙모들이 가서 자리를 채워야 할 정도니 위대한 조상들 중에 남을 너무 많이 도륙 내 버리면 아무리 그 일이 좋은 목적이라 해도 후손들에게 별로 좋지는 않는가 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진 때문에 나는 집안이 실제로는 보잘 것이 없고, 가끔 이규갑 형제분들처럼 위대한 분들이 있는 것은 이 나라 어느 집안인들 통계적으로 그 정도의 위인들이야 한둘씩 있을 수 있는 그런 정도겠다고 느꼈다.

사진 때문에 나는 집안의 전국 회장과 총무에게 전화를 해 봤다. 덕수이씨 애국부인회 전국 총회의 사진이 있는지 또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살피고 싶었다. 종친회 본부는 물론 이규갑 어른의 직계 분들도 그 부인회라는 존재도 또 사진도 당시 상황도 아는 분들이 없었다. 나는 이 노선에 필요하지 않으면 친형제도 30년 넘게 얼굴도 전화 한 번도 하지 않고 산다. 내게 필요해서 자료를 신세 지려고 살피다 보니 조금 더 움직이면 집안에 접촉이 될 상황이 될 듯해서 아쉽지만 마무리를 했다. 오늘의 나를 만드시려고 하나님이 불신 시절 이 나라와 조상들을 어떻게 운영해 오셨는지, 여기까지가 나의 할 일이다. 조국을 위해 순국하고 남 다르게 충절을 보이며 실력과 실적으로 수놓은 것은 두고 갈 땅에 것이니 내가 전념하는 이 길에서 이런 과거는 자연계시의 선에서 구별이 되어야 한다. 이런 것까지 미리 가르쳐 준 백 목사님께 나는 감사할 일이 많다.

 

3. 공회의 훌륭한 인물들
나는 정갑용 권사님이 돌아 가시기 전에 개며에 두 번을 방문했고 내가 어릴 때부터 들어 오며 궁금했던 것을 직접 다 여쭈어 봤다. 녹음까지 해 두었는데 두 번이나 그 녹음은 불발에 그쳤다. 나는 백 목사님 생전에 목사님을 상대로 사전에 양해 없이 사진기를 갖다 대는 등의 행동을 해 봤다. 무례하고, 해서 아니 될 경우가 되면 사진을 찍었는데 필름에 찍히지 않았고, 녹음을 했으나 녹음이 되지 않았다. 나는 1982년부터 연구소에 근무하였고 이후로는 자료를 남기는 면에는 전문가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는 분들에게는 인간적인 기술을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막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바로 이런 세계가 신앙의 건전한 신비주의가 아닐까? 그들을 보호하는 천사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정갑용 권사님께 백 목사님 사후의 '재독'의 은혜와 백 목사님 생전의 설교 은혜를 두고, 권사님이 느낀 성령의 역사를 여쭤 봤다. 이 정도의 질문은 백 목사님과 정갑용 권사님 두 분 외에는 물어 볼 대상이 없다. 교리적으로 교회사적으로 또는 목회적 이론과 대화에서는 내가 권사님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런 주님이 실제 동행하며 그 손을 붙잡고 인도하거나 그 마음을 통해 알려 주는 신령한 세계를 두고 말한다면 나는 시력이 군 면제 수준이다. 권사님은 그 시력이 명료하다. 권사님은 두 은혜를 거의 같이 봤다. 나는 이미 수 년간을 비교하며 그렇게 느껴 왔으나 남들에게 단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권사님에게 확인을 받은 뒤부터 나는 강하게 발표했다. 백영희 설교 재독의 은혜는 백 목사님 생전 설교와 나란히 놓을 수 있다고.

이 글의 제목을 적을 때는 이런 정도의 분들을 좀 많이 적으려 했다. 여러 면을 생각해서 이 정도에서 마치고자 한다.
적지 않아도 나머지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각자 자기에게 보낸 천사를 다시 회상해 보면 줄줄이 나올 것이다.
마하나임에서 야곱은 천사를 봤다. 얍복강에서도 봤다. 보고도 강퍅하여 마치 인간들을 본 듯이 또는 보지 않은 것처럼 산다. 우리의 심령이 흐려서 문제지 주님은 우리 하나하나를 귀하게 기르시는 것이 틀림 없다. 이 못난, 이 나쁜 나에게도 이 정도로 챙기는 것을 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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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으로 교회를 한 번 흔들어 봤다. - 마귀의 궤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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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 전하다 이 말씀 때문에 죽는 것' - 종교인의 상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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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정체성에 대한 참담한 시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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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지진, 전쟁이라는 파란이 주는 선물
서기 | 2019.11.09 | 추천 0 | 조회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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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사후 30년을 돌아 보며 - 연구소의 역사적 고찰
서기 | 2019.09.29 | 추천 0 | 조회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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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전원일치의 악용 - 탈선이란 제도로는 막지 못한다. (3)
서기 | 2019.09.29 | 추천 0 | 조회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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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의 요게벳 - 김명자 나인숙을 평생 그린다. (1)
서기 | 2019.10.01 | 추천 0 | 조회 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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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세상을 참 몰랐다. 지금은 세상을 안다. - 공회와 교인의 여러 현안을 중심으로 (1)
서기 | 2019.10.06 | 추천 0 | 조회 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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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국가에 반영된 공회 의견들 - 공회와 세상 (보충) (4)
서기 | 2019.10.09 | 추천 0 | 조회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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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전국 최고, 최초, 최대를 휩쓴 기록들
서기 | 2019.10.13 | 추천 0 | 조회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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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하늘에서 떨어 진 횡재, 백 목사님께 순종하면 그러했다.
서기 | 2019.10.20 | 추천 0 | 조회 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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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극단적 탈선과 가족의 고난, 백 목사님께 거역하면 그러했다.
서기 | 2019.10.24 | 추천 0 | 조회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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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아버지께 배운 '경제 내핍'과 '백영희 자녀 교육'
서기 | 2019.10.26 | 추천 0 | 조회 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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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축소 시켜 허락하신 '호사스런 경험'
서기 | 2019.11.03 | 추천 0 | 조회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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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백영희를 소개한 분들, 보물을 소쿠리에 끌어 담다. - 보충
서기 | 2019.11.06 | 추천 0 | 조회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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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교회 경영론으로 본 백영희 (거창고 전영창과 비교하며) - 1
서기 | 2019.11.10 | 추천 0 | 조회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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