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43) 백영희와 가족, 나의 기억들 (진행 2)

작성자
담당
작성일
2020.02.11
(백영희를 소개하는 마음)
나는 백영희에 대한 모든 자료를 무조건 무료로 전하는 것을 평생 사명으로 삼는다.
스승 백영희는 자기가 전한 것이 말세를 감당할 복음이고 백영희를 접한 사람은 전할 책임이 있다고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백영희 자녀들은 부친은 말만 그렇게 했고 실제 모든 설교는 자녀에게 상속을 시켜 줬으니 사유재산이라며 나를 고소했다.
나는 백영희에게 속은 사람이다. 순박했는지 바보였는지 모르겠으나 평생을 벌짓했다. 자녀들의 고소 내용을 보면 그렇다.

자녀들은 나를 경찰 검찰 법원에 고소했고 나는 전과자가 되었으며 대법원도 자녀들의 재산이 맞다 했기 때문에 중단했다.
그러나 내 평생, 특히 인터넷으로 20년을 전한 이 내용은 이 시간에도 저절로 확대 재생산이 되고 있다. 누구도 막지 못한다.
책은 돈이 들기 때문에 연구소의 pkist 사이트를 통해 20년을 무제한 무조건 무료로 전했다. 나의 말 한 마디까지 고소한다.
현재 나는 전과 2범이 되었고 다른 형사 재판도 여러 건이 진행 되고 있다. 자녀들은 전과자라 하고 나는 출옥성도라고 한다.

다른 공회들, 다른 목회자들은 협박이나 경고를 받으면 황급히 자취를 감춘다. 나는 막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하고 있다.
왜 그런가? 백영희, 그의 설교와 자료와 그의 걸음은 이 시간에 다시 생각해 봐도 말세 오늘을 살아 갈 복음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경험담이 필요한가? )
나는 백영희와 서부교회와 총공회에 관한 자료는 모두 가지고 있다. 그 전부를 평생 전했다. 그런데 왜 이런 글을 더하는가?
글과 사진과 동영상 자료는 넘치지만 백영희를 겪어 본 아날로그는 각종 데이타화 된 자료에 없는 면을 전하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사람을 통해 나는 그들이 겪은 백영희를 소개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나처럼 겪은 몇몇 분들이 함구를 하고 있다.
이 것도 필요하고 저 것도 필요한데, 생활 속에서 백영희와 그 가족들을 겪은 아날로그는 백영희 전체 자료의 차원을 높인다.
모든 자료는 넘치게 전했음에도 이런 자료를 남겨야 할 분들이 끝까지 자신만의 보배로 숨기기 때문에 이제 입을 여는 것이다.
백영희와 그 가족을 접한 자료는 북한의 경우 김 씨 일가 자료처럼 극 소수만 안다. 그래서 이 자료는 더욱 공개가 필요하다.
북한의 김 씨 자료는 밝혀 질수록 북한과 김 씨의 역사가 허물어 지지만 백영희 자료는 그 반대다.

남이 모르는 것을 혼자 알면 희귀성이 생긴다. 희소성의 가치는 보물을 만든다. 그래서 모두 비밀로 남겨둔다.
복음은 그 반대다. 생명성이 있다. 알릴수록 보물은 더욱 보물이 된다. 묻으면 묻을수록 잡석이 된다.
다른 분들을 기다렸으나 아무도 말씀을 하지 않으니 보다 못한 것을 가지고 이조차 없는 분들에게 제공한다.

한 사람의 기억은 다른 사람의 간접 체험이 될 수 있다. 사진 녹음 그리고 동영상으로 전하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하지만 성경 기록을 보면 다른 면이 있다. 성경은 그림 없이 글로만 적어 주셨다. 진리와 구원의 도리는 그림보다 글이 낫다. 그러나 출애굽기 25장과 에스겔 40장으로부터 시작되는 성막은 그림이 훨씬 낫다. 약간의 글을 더했다면 당시를 재구성하는 fact 파악에 훨씬 좋았을 것 같다. 창세기 1장의 창조와 2장의 에덴동산도 스켓치 정도의 그림 한 장을 남겨 주셨더라면 역사 전체를 통해 에덴동산이 이렇게 왜곡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향후 교회 안에까지 오해와 곡해와 미궁에 빠질 줄을 알면서도 성경은 전부 글로만 기록했다. 백영희 노선의 연구를 두고 대부분은 설교 자료가 중요하다. 그러나 가끔 행정 데이타 때문에 설교가 더욱 명확해 진다. 그리고 이 노선의 여러 인물들의 생애는 이 노선의 교훈과 행정이 지나 간 결과를 살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백영희와 가족의 일면은 이 노선의 교훈과 행정의 몇몇 곳을 밝혀 주면서 이 노선 곳곳에 막힌 부분을 비로소 해결해 준다.


(백영희 가족에 대한 첫 기억)
교계의 방식으로 말하면 '총공회의 발족'은 1966.5.26.이다. 총공회의 처음이며 공식 기록이 그렇다. 그런데 공회를 실제 지켜 본 이들은 1959년 9월에 고신이 제명할 때로 잡는다. 공회의 내면을 아는 사람은 1936년의 백영희 신앙 출발로 잡는다. 아이가 출생한 날, 아이를 호적에 올린 날, 아이를 가진 날, 한 아이에게는 3가지의 출생일이 있다. 한국의 만 나이와 성경의 나이는 아이가 어머니 속에 들어 선 날을 사람으로 잡는다. 형편 따라 개인 성향에 따라 알아서 생일을 표시하면 된다. 내가 pkist 개설하던 1998년 12월에 총공회 일자를 참으로 고심하다 1966년으로 표기했다. 이후 모두 이 기록을 복사하면서 현재는 그렇게 굳어 진 느낌이다. 내가 그렇게 표기한 것은 공회와 백영희란 교계와 거의 모든 것을 달리 하는데 더 중요한 것에 집중을 하라면 논점이 될 필요가 없는 것은 우선 일반화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학교를 입학하면서 호적 신고가 늦어 졌을 뿐이라며 실제 생일을 적거나 10개월 전을 적어 버리는 것과 같은 그런 문제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백영희를 처음 접한 것은 내가 태어 나던 1957년에 어머니의 삼봉산 집회를 참석했다. 백 목사님의 8월 집회는 원래 거창군 고제면 봉산리의 삼봉산 야산 또는 그 주변의 봉산마을에 있던 봉산교회에서 시작 되었다. 백 목사님은 직접 기록한 사경회 일지에 '山峰山 集會 第1會 1960년 4월 25일'로 적었다. 그리고 '三峰山 集會 第2會 1960년 9월 12일'로 적었다. 이 집회가 장소 문제로 40리 밑에 있던 백 목사님의 고향 주상면 도평리 장생골로 옮긴다. 장소도 일자도 여러 번 바뀌었다. 부산공회로 표시되는 이들은 '백영희 그대로!'를 외친다. '삼봉산'인가 '산봉산'인가? 山이 아니고 三이 맞다. 그런데 거창 사투리의 특색이 알파벳을 정확히 구별하지 않고 편하게 사용한다. 봉산교회의 첫 집회는 1948년이고 이 집회가 백영희의 평생 집회들 중에 가장 뜨거운 집회가 되어 백영희의 집회는 '봉산집회'가 되었고 '봉산 집회 = 삼봉산 집회 > 도평 집회'로 이어 진다. 1957년 이전에도 백 목사님의 봉산 집회는 있었지만, 평생 매년 집회로 이어 지는 면을 보면 1957년이다. 그래서 나는 공회의 집회 역사를 1957년으로 잡는다. 바로 이 해에 내가 출생한다. 어머니에게 붙들려 첫 집회를 참석했다. 어머니는 그 때부터 여러 입장 때문에 백 목사님의 8월 집회에는 늘 '강사실'을 전담했다. 특히 1959년에 백 목사님이 고신에서 제명을 당할 때 나는 세 살이고 부친은 주남선 목사님이 계셨던 고신의 거창읍교회에서 장로가 되기 직전인데 백파라 해서 밀려 났고 부모님은 집의 마루에서 개척 예배를 드렸고 곧 이어 마당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렸으며 이후에 마당에 20여 평 예배당을 지어 중앙교회 이름으로 훗날의 창동교회를 개척했다. 백 목사님은 1959년 개척 직후 천막 시절에 1차 집회를 왔다. 강사실도 나의 집도 예배당도 나의 집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업히고 안겨 목사님을 지켜 봤다. 목사님의 기억력은 탁월하다. 특히 신앙에 관련 된 것은 정말 놀랍다. 나는 목사님을 모르나 목사님은 출생 전의 무거운 몸을 가졌던 때부터 출생하고 세 살이 된 나를 계속 지켜 보셨다.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있을까? 내게는 천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랑이다. 이 글을 적는 것은, 나뿐 아니라 믿는 사람은 자기의 지난 날을 잘 들여다 보면 주님이 눈 앞에서 또는 옆에서 손을 잡아 주셨거나 동행했던 사건이 참으로 많다. 나처럼 자료를 뒤져서 나오는 사람도 있으나 그 자료가 전부는 아니다.


(첫 기억 속에 백영희)
1971년 8월 16일부터 8월집회가 시작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가 되었으나 교회와 어머니는 나를 집회로 데려 가지 않았다. 집회는 장년반 집회였다. 뒤에 들어 보니 학생들도 더러 참석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그 것이 대세였거나 목사님의 언급이 있었다면 어머니는 무조건 순종할 분이다. 따라서 내가 중2까지도 내가 사는 고향에서 개최 되는 전국 단위 집회를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공회의 전체 흐름과 발전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자연 발생적이며 자라가는 과정에 하나씩 더해지는 것이 공회다. 무엇을 기획하여 한꺼번에 몰아 치지 않는다. 밀려서, 더 이상 뭔가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때 공회는 비로소 한 걸음을 더 나아 가는 식이다.

공회 교회와 중심 가정들은 연중 행사를 꼽는다면 설과 추석이 아니고 5월과 8월의 집회다. 5월은 규모가 8월의 3분의 1정도다. 8월 집회만은 공회 교인이라면 당연히 참석하는 정도다. 신앙은 없으나 온 교회와 가정이 준비 과정부터 떠들썩 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멋 모르고 함께 들썩인다. 궁금하다. 또 이상하다. 그리고 늘 듣는 소리가 있다. '백영희'라는 이름이다. 그렇게 듣다 보면 어느 덧 신앙이 없어도 일단 공회 아이들에게는 백영희라는 이름이 세상 표현으로 우상이며 전설 신화가 된다. 교회에 전화가 없던 시절, 교회에 직접 전화 할 때가 있으면 목사님은 '거창 144번' 나의 집 전화로 창동교회 목회자를 부른다. 전화를 받으러 오는 목회자의 표정과 자세, 옆에서 멀뚱하게 보면서도 함께 긴장을 했다. 나는 신앙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나도 모르게 내 속에 스며 들어 왔고, 내 평생에 신앙의 자산이 되었다.

이런 평소 분위기 때문에, 그리고 그 험한 삼봉산에서 집회를 하다가 20리 떨어 진 도평으로 집회 장소를 옮겼다는 소식, 이제 중2가 된 상황. 밑에 사촌까지 합하면 몰려 다니는 동생들과 보통 10여명, 20리 정도라면 5명 정도는 가 볼 수 있다. 모두가 궁금하던 차에, 그리고 혼자 가기는 먼 거리, 화요일로 기억 되는 아침, 일찍 서둘러 나섰다. 여름 뙤약볕에 땀을 흘리며 비포장 20리를 모두가 걸었다. 아주아주 가끔 차 한 대가 지나 가던 시절, 그냥 주변을 기웃거리며 처음 집을 나서 걷는 그 길은 요즘의 100리 길이나 되는 느낌이다. 20리? 그 나이에 동생들을 데리고 걸어 가 볼 수 있는 당시의 최대 범위였다. 도평 삼거리에서 집회 장소가 있는 장생골까지 올라 가는 길은 지금과 달라 약 1km를 비좁은 논길을 따라 가야 한다. 논 길이 끝나는 마지막에는 비록 얕으마한 언덕을 돌아 들어 가야 하지만 공기가 달랐다. 서늘했고 산속에 온 느낌이 확 든다. 골짝의 여기저기 천막을 쳐 놓았고 골짝 안에 있는 예배당은 6.25 때 사용하던 미군의 대형 천막을 2개 달아 놓았다. 개인들의 천막은 거의 미군의 2인 1조식 야전용이다. 바닥 면적 가로 세로 2m, 중앙이 단추식으로 정면에서 보면 탈부착 되는 정삼각형이다. 예배당은 사람이 설 수 있다. 양쪽 기둥이 사람 높이고, 중앙은 4m 높이나 되어 보인다. 면적은 기억이 없다. 김영웅 목사님이 그 집회용 예배 천막의 주 관리 담당이어서 잘 기억하실 듯하다. 미군의 막사용 최대 텐트를 알아 보려고 노력했으나 사진만 구하고 실측은 아직 모른다. 기억에 하나에 5-7m 넓이에 10-15m 길이 정도가 아닐까. 2개를 나란히 옆으로 붙였다.

도착했을 때는 설교가 한창이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다 구덩이에 빠진다' '새술은 새부대에.. 여기에 술은 무엇이며 여기에 부대는 무엇인가' '귀신이 귀신을 쫓아 내면' '거짓 선지자' 등을 설명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고 그 때 설교 내용이 몇 표현으로 남아 있다. 목사님은 머리를 빡빡 깎았다. 머리가 없는지 깎았는지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필기를 하고 있었다. 어른들뿐이었다. 가끔 품에 안은 아이만 보일 정도였다. 한 눈에 어른들의 모임이다. 어른들만 모이기 때문에 와서 아니 되는 분위기였고, 궁금해서 몰래 온 것이다. 그런데 곧 예배는 끝이 났다. 불과 몇백 명 참석하던 시절이니 바로 어머니가 이야기를 듣고 오셨다. 먼저 야단을 쳤다. 오지 말아야 할 곳이며, 위험하게 멀리 왔다는 뜻이다. 온 김에 점심이니 밥을 먹고 내려 왔다. 그러나 이 때 내 기억으로 처음 본 백 목사님은 오늘까지 평생에 내 기억에 첫 모습으로 남아 있다. 62세의 목사님, 내 나이 이미 그렇게 되었다. 감히 비교야 하지 못하겠으나 나도 그 나이에 그 정도 교인들이 모인 곳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다. 늘 그 때 그 목사님의 모습은 내 평생 늘 나의 첫 백영희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제 아무 짝에도 쓰지 못할 듯한 작으며 단단한 씨앗 하나가 떨어 진 것이다.









(백영희 자녀에 대한 첫 기억)




(소중한 가족, 그 고난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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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 사람의 사례로, 각자 자기를 살펴 보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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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
(3) 백영희의 학습 세계, 나의 과거를 돌아 본다. (3)
서기 | 2019.09.11 | 추천 0 | 조회 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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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6
(4) 백영희 설교의 자료화, 1948년의 의미 (1)
서기 | 2019.09.14 | 추천 0 | 조회 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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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7
(5) 공회의 '선교관'
서기 | 2019.09.15 | 추천 0 | 조회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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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1
(6) 모이면 썩고 흩어지면 사는, 진리의 세계
서기 | 2019.09.17 | 추천 0 | 조회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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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
(7) 우리는 못났다. 그러나 자라 가면 된다. (1)
서기 | 2019.09.20 | 추천 0 | 조회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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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3
(8) 백영희 가정의 교육 - 이 노선 우리에게 주신 보석들
서기 | 2019.09.22 | 추천 0 | 조회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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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
(9) 공회의 결혼 이야기 - 20세에 결혼하고 30세에 아이 4명
서기 | 2019.09.22 | 추천 0 | 조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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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10) 나의 총공회 1등 기록들 - 혼자 달리니 민망했다.
서기 | 2019.09.24 | 추천 0 | 조회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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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9
(11) 공회의 감탄할 기록들 – 모두가 가장 평범한 것에서
서기 | 2019.09.27 | 추천 0 | 조회 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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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2
변치 않는 사명, 변하는 사명
담당 | 2019.09.07 | 추천 0 | 조회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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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3
다윗의 전쟁, 그 모든 향방은 '성전' 건축
담당 | 2019.09.07 | 추천 0 | 조회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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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7
다윗의 성전 준비로 본 연구소의 사명
담당 | 2019.08.30 | 추천 0 | 조회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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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4
훌륭한 지도자의 당대와 후대
담당 | 2019.09.07 | 추천 0 | 조회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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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6
압살롬과 시므이 (1)
담당 | 2019.08.30 | 추천 0 | 조회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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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6
세상의 어느 장관, 공회의 어느 장관 (1)
담당 | 2019.09.18 | 추천 0 | 조회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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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1
'시체를 도적질하여 갔다'고 퍼뜨리니 오늘까지..
담당 | 2019.08.24 | 추천 0 | 조회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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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이론적 양심가들의 불장난과 시대의 균형추
담당 | 2019.08.21 | 추천 0 | 조회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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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3
최악의 좌익이, 정상적 우익으로 - 안병직으로 본 공회 (1)
회원 | 2019.08.25 | 추천 0 | 조회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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