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31) 내게 각인 시킨 목회자의 고난

작성자
담당
작성일
2020.01.09
1976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대학 1학년을 서울 사직동교회에서 보내다 방학이 되면서 잠깐 인사차 집에 내려 왔을 때 일이다. 창동교회는 전성수 조사님이 계셨다. 갑자기 어머니가 조사님 심부름 한다면서 주상면 남산리 마을로 가자 한다. 그 곳은 도평 집회 장소의 맞은 편 산 너머다. 거남교회가 있는데 백태영 목사님이 계셨다가 오래 동안 교인이 없어 교회가 없어 졌으나 공회에서 새로 개척을 한다며 목회자가 파송 된다고 했고, 전성수 조사님이 준비를 하게 되었다. 거창 지방은 교회들이 모두 약하다. 창동교회가 시내 중심에 있고 교회가 견실하여 거창 집회와 거창 지방의 모든 교회의 중심이다. 목회자의 자세에 따라 공회 교회들이 가장 약하고 많은 지역이어서 그 영향은 참으로 크다.

새로 시작 되는 교회는 과거 교회가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새 개척이다. 한 번 손을 댄 곳이어서 사실 더 어렵다. 창북교회 이환봉 장로님이나 서부교회 이탁원 목사님이 이 곳 출신들이다. 주력 교인들이 나오다 보니 교회가 없어 졌고 이제 다시 시작하는 교인이 두어 가정 된다고 한다. 교회 와서 앉을 사람은 3-4명 될지 모른다 한다. 후임은 서울 사직동교회 출신으로 공직을 사직한 분이어서 목회를 나오기 전에는 잘 살던 분이라는 말만 들었다. 경북 쪽에서 목회를 했고 그 곳도 교회 형편이 아주 어렵다 한다.

교회를 시작할 곳에 도착을 했다. 마을은 이런 골짝을 돌아 들어 가도 마을이 있을까 할 정도다. 거창은 산골이다. 그 중에서도 이런 마을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도평은 전국의 우리 공회 교인들이 매년 모이는 유명한 곳인데 산 너머는 이러했다. 어머니가 두어 곳에 물어서 집을 찾았다. 여기는 예배를 드릴 곳이고 여기는 사택이겠구나! 어머니는 그리 서툴러 보이지 않는다. 내 눈에는 교회 할 곳도 사택 할 곳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버려 진 헛간이었다. 사택 할 곳은 그래도 문이 있고 벽이라도 있다. 예배당으로 앉을 곳은 문도 벽도 없다. 요즘 볼 수 있는 시골 집 수준이 아니라 70년대, 그 때도 이런 집은 이제 마지막 사라 지는 고대 사회가 남긴 헛간이었다.

공직에 계셨던 분이 이런 곳에서 이제 다시 개척을 해야 하니 얼마나 고생일까! 어머니는 안스러워 어쭐 줄을 모른다. 그래서 목회자가 오시면 마루라도 닦아야 한다며 이리 저리 부지런하게 움직이지만 어디를 어떻게 손을 봐야 할지 몰라 한다. 내 눈에 이 날의 모습은 나의 평생에 '교회가 출발'할 때 각오해야 할 현장 사진으로 박혀 있다. 내 눈에 그 사진과 비교해서 비슷하면 공회의 개척 모습이다. 이보다 좋으면 개척의 수고가 아니라 호강을 하는 것이다. 나는 초가집이 완전 폐가로 버려 진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이 사는 주택으로는 그런 모습을 평생 다시는 본 적이 없다.

이 첫 모습은 나에게 엄청난 횡재를 가져다 주었다. 나는 거창의 시내에서 손꼽는 좋은 집에서 태어 났고 20세까지 살았다. 이 집은 50년대 지을 때 일본식으로 지었고 마루의 복도 끝에 화장실이 있었다. 재래식이지만 마치 현대식을 조금 흉내 낸 정도다. 집에는 어릴 때부터 응접실이 있어 소파가 있는 거실에 몰래 들어 가면 별 세상이었다. 수족관도 있었고, 한 쪽에 있는 큰 금고는 부자집임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 문은 매일 저녁 열린다. 그리고 공장에서 벌어 들인 지폐를 다시 손질하며 헤아리고 그리고 억지로 밀어 넣는다. 당시 목회자였던 이재순 목사님은 모두가 어렵던 시절 나의 부친은 돈을 벌어만 오고 돈은 어머니가 관리를 했다 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교회나 목회자가 필요하면 집히는 대로 덥썩 짚어 낸다고 했다. 백태영 백영침 이재순, 나는 공회 원로 목사님들께 당시의 감회를 들었다. 내가 신풍에서 목회하며 서로 공회가 나뉜 뒤에 그 분들이 나와의 과거 좋은 추억을 말할 때 나온 이야기다. 신도범 목사님은 창동교회 예배당을 건축할 때 연보자와 액수를 일일이 기억하며 어머니의 연보액을 특별히 표현했다.

나는 자칫 시골의 우물 안 부자 집의 환경 때문에 어중간한 사람이 되어 경제면에서 몹쓸 사람이 될 수 있는 환경을 가졌으나 바로 거남교회의 시골 개척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런 모습은 다시는 우리 나라 교회의 개척 역사에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던 정말 순수한 생고생의 험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장면이 목사의 기본이며, 교회의 출발이며, 공회 노선을 고수하려면 늘 생활화로 적응할 수 있어야 하는 교과서였다.

나는 1977년 서부교회로 왔고, 1982년 서부교회 편집실에 들어 가면서 교회와 공회의 직원으로 전국 교회를 업무상 갈 일들이 있었다. 또한 나의 활동 범위와 대상은 자연스럽게 사직동교회 달산교회처럼 공회 제일 좋은 사택으로부터 예배당 뒷편에 방 한 칸을 붙여 놓은 별별 사택을 다 볼 수 있었다. 그 때마다 거남교회 개척 당시의 사택과 예배당을 비교할 곳은 없다. 다 그보다는 낫다. 그리고 나는 그런 좋은 곳을 볼 때마다 거남교회보다 나으니 그래도 숨은 쉴 수가 있어 다행이라며 그 곳에 목회자들께 마음 속에 좀 따뜻한 자세를 가질 수 있었다. 그 뜨거운 여름에, 거남교회에 이사를 오시는 가정을 두고 어머니는 사모님이 그리 고운 분이라시는데 어떻게 할까, 아이들도 있다는데, 서울에서 잘 사시던 분이라던데... 전성수 조사님 얼굴에는 비장함이 보였다. 이런 고생을 해 보신 분이다. 그런데 전 조사님은 창동교회라는 아주 좋은 곳에 있고, 동역자는 이런 곳에 모셔야 하며 여기 오신 분의 수고가 남의 일이 아니라 형제의 고생임을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는 8월 집회가 되면 강사로 오시는 부산의 백 목사님의 강사실에 필요한 것을 늘 책임 맡아 모셨다. 평생이 그런 식이다. 창동교회 사택을 속속들이 잘 안다. 전 조사님은 사택에 과일이라도 좀 들어 오면 사모님과 아이들이 모두 쳐다 보는데도 바로 그 과일을 손 대지 못하게 묶어 놓고, 기회가 있으면 시골의 교회들, 또 개척 교회들의 사택에 계속 보내는 바람에 창동교회의 사택 식구들의 고난을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나는 거남교회의 개척을 준비할 때 하루 갔다 온 것이 전부다. 내가 오고 난 뒤에 이삿짐이 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가슴이 아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목회자는 풍체가 원래 아주 좋은 분이라 한다. 그런데 세 끼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여 얼굴과 온 몸이 어떻게 버텨 냈는지 모를 정도로 보였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공회의 70년대까지 목회자들은 모두가 생활이었다. 그런데도 살다 보면 어떨 때는 좀 덜할 때도 있는 법이다. 내게는 참으로 복이 되도록, 가장 어려운 장면이 한 컷 머리 속에 들어 와 버린 것이다. 이 것을 기준 삼아 그 분을 상대할 때 평생 늘 그 때를 기억하며 공회를 위한 고생을 감사한다. 또 그 분과 같은 시기에 함께 고생한 우리 공회 모든 70년대 목회자들을 감사한다. 그렇게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 할 수 있어 부럽고, 나처럼 탈 없이 잘 먹고 잘 살고 목회를 출발할 때는 모든 환경이 좋아 져서 그런 시기는 박물관에 구경이나 할 정도가 된 것이 죄송하다. 그래서 비록 그럴 때처럼 재구성해서 살 수는 없지만 마음에 그 분들의 그 때를 흉내라도 좀 내 보겠다는 자세로 살고 있다. 이런 흉내만 조금 내는데도 모두들 경제 면으로는 나를 인정해 준다. 체험 학습 좀 했다고.

1989년 3월 18일, '여수'가 어딘지 지도로 처음 명확히 확인을 했다. 그리고 33세에 부임을 했다. 여수시 율촌면, 그리고 신풍리라는 주소를 볼 때 면 소재지도 아니니 나는 마음 속에 거남교회 사택을 생각했다. 그 정도를 당연히 생각했다. 고생을 해 본 사람은 고생을 하게 되면 무난히 견뎌 낸다. 문제는 그 고생을 알기 때문에 그런 고생을 하게 되면 미리 고생을 겪는 정도가 된다. 나는 그런 고생을 직접 하기 전까지는 오히려 그런 고생이 체험 학습처럼 생각이 되어 호기심이 든다. 막상 고생이 시작되면 고생을 해 본 사람은 덤덤하게 할 것이고 나 같은 사람은 며칠도 견디지 못해서 난리를 하겠지만, 적어도 고생의 소굴로 들어 가는 순간까지는 고생을 모르니 자뭇 흥미진진하다 할 만큼 나의 마음은 즐거웠다. 어떤 곳일까?

대로에서 예배당이 있는 곳을 보니 웅장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택으로 들어 갔다. 서부교회와 서울의 잠실동교회 2 곳을 빼고는 전국 최고의 사택이었다. 우선 사택이 현대식 2층 슬라브 단독 주택에 1층이다. 이중창인데 밖은 샤시 유리창이고 내부는 내장목으로 된 나무 창문이다. 거실에는 무늬목으로 벽과 천장이 마감 되어 있다. 20평 정도의 반듯한 신축이다. 달산교회 사직동교회 사택조차 예배당 뒤에 붙어 있다. 이 곳은 별도 건물이다. 서부교회는 1970년대에 예배당 앞에 단독 2층 주택을 사택으로 구입했으나 이는 예배당을 증축하기 위해 미리 확보해 둔 집일 뿐이다.

이 시골에, 이 바닷가에, 직장인은 없고 모두가 농사나 바닷 일을 한다. 사택은 공회의 전국 최고 수준이다. 방 3칸 중 2칸만 사용했다. 양심상 다 사용할 수가 없었다. 사택을 들어 갈 때와 나올 때, 볼 때마다 나는 거남교회의 사택과 전국의 공회 교회들의 사택을 그려 본다. 목회 출발의 전도사를 이런 교회에 보냈으니 모두들 백 목사님도 측근이라 하여 특혜를 준 것으로 생각했다. 6개월 후 백 목사님이 돌아 가셨고, 9월의 첫 교역자회가 시작 되자 백태영 목사님은 누가 임명한 적도 없는데 벌써 백영희 목사님의 위치에 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취임사처럼 앞으로 공회 운영안을 척척 발표했다. 그 중에는 백으로 올라 간 사람은 다시 끄집어 내리겠다는 발언이 나왔다. 이름을 찍지 않았으나 나를 지목했다는 것은 상식이다. 모두들 내게 안부를 걱정했다. 그런데 이미 그 6개월 동안 신풍교회의 교인들은 세상 말로 말하면 나의 사람들로 바뀌어 있었다.

나의 여러 부풀려 진 소문이 배경이었다. 서울법대 법학과 수석 졸업생이며 백 목사님이 몇 달 훈련만 거치면 서부교회 후임으로 데려 갈 인재다, 이런 식이었다. 이런 헛소문은 내가 서부교회 핵심 직원으로 있는 것을 끌어 내리기 위해 훗날 대구공회의 주력이 될 지도부가 신풍으로 유배를 보내려는데 신풍 시골 교인들이 나이가 젊고 목회를 처음 출발하는 전도사를 쉽게 생각하고 받아 들이지를 안으려 하자 나를 받아 들이도록 설득을 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그 과정이 작정하고 허위 선전에 열을 올리기도 했고 또 원래 공회가 무식하니 무허가 신학교와 신대원을 구별하지 못하고, 서울의 대학교는 서울대학교와  섞어 쓰고, 신학교의 Ph.D를 철학 전공 학위라고 우기는 수준이니 신풍의 시골 사람들에게 나를 받도록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던 듯하다. 몇 달 뒤에 백 목사님은 다시 서부교회로 부른다는 것은 맞다. 후임으로 다시 데려 간다는 것은 백 목사님을 모르는 이들의 추론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백영희 목사님의 사후 후임 후계가 되어 버렸다. 부산의 동대신동 381번지에는 다른 분이 계시나 역할과 위치는 어느 덧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 교인들이 내가 부임 한 후 6개월만에 실제 나를 믿고 따르게 된 것은 단 1가지 이유다. 나는 인건비가 적게 된다. 실력은 주관적 요소가 많으니 미뤄 두고, 인건비는 내가 아는 한 총공회 전체를 통해 가장 적지 않을까? 이 곳은 바닷가에서 온 몸을 갯바닥에 뒹굴며 돈을 버는 곳이다. 억척들이다. 그만큼 경제에 대한 속 계산이 중요하다. 나의 전임자는 월급이 90만원이다. 나는 부임하며 바로 35만원을 적정선으로 산출하고 월급을 내가 결정했다. 그 때 서슴치 않고 그렇게 산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1976년 여름의 그 더위에 그렇게 훌륭하게 세상을 살던 선배가 그렇게 곯고 고생하며 자신의 몸을 가누기 어렵도록 충성하며 헐벗던 바로 그 모습 때문이었다. 35만원을 나는 적정선으로 봤지 최저선으로 부른 액수가 아니다. 아내는 고생을 견디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나는 아이 4명을 초등학교만 공부 시켰다. 선배들의 고난의 시기를 조금이라도 동참하고 싶었지만 세대가 바뀌어 먹을 것이 넘치는데 굶는 것은 자학일 수 있고, 입을 것이 길에도 늘렸는데 헤어 진 옷을 입는 것은 괴상한 것이지 검소한 것이 아닌 상황이다.

그런데 전국의 목회자 가정의 경제는 자녀 교육에 있었고, 이 것은 과소비였고 낭비였다. 그래서 사택의 자녀 공부 문제를 간추리니 사택 비용은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이 과정을 지켜 본 이들이 나를 향해  목회나 설교나 인격은 문제가 많지만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경제성을 본 것이다. 실제 나는 목사님 돌아 가시고 발생한 충돌 과정과 이후 오늘까지 돈에 대해서는 유일하게 좋은 점수를 받고 있다. 나는 오늘도 강단에서 큰 소리를 친다. 신풍 교인이 나를 아직도 신임투표를 통해 붙들고 있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닌가! 인건비 때문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나는 부공3이 시작 되던 초기에 어느 교회를 개척하든 또 집회 등의 공석을 통해 반드시 한 가지만 약속을 했다. 우리 공회가 파송하는 목회자는 인건비가 싸게 들 것이다. 여러 분들은 말로는 신앙이니 진리니 복음 운동이니 떠들지만 속으로는 교회에 돈 내는 것이 제일 아까운데 우리 공회는 인건비가 싸고 이 것 때문에 연보에 부담이 없으니 연보를 덜 하고 싶어서 우리 공회의 개척에 참석하지 않았는가? 또 우리 공회 교회를 지금도 다니고 있는 이유는 그 것뿐이지 않는가? 다른 이유가 있는가? 부공3의 연구소 직원들에게 인건비 외에 조금이라도 다른 공회에 비해 괜찮은 점이 있는가? 돈이 제일인데, 돈이 전부인데, 교회에도 돈을 내기 싫은데, 교회를 개척해도 개척 연보를 1원도 하기 싫고, 교회 건축을 해도 아예 돈을 내기 싫은데 부공3은 목사들이 아이들 공부조차 시키지 않으니 인건비가 싸고, 인건비를 아낀 돈으로 저금하면 나중에 예배당을 마련할 때 교인들이 연보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런 이해 관계를 암산해 가지고 돈 손해를 보지 않으니 부공3을 마치 진리 노선인 것처럼 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직도 이런 나의 공적인 질문을 두고, 반박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연보를 넘치게 하는 분들은 그런 질문에 해당이 없으니 질문을 할 리가 없고, 연보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개척 교인이 개척 연보를 1원도 해 보지를 않았으니 어떻게 발언을 하겠는가?

그들이 지금 예배당이 엄청 나게 좋고 비싼 상황에서 과거 1원이라도 개척 연보를 했더라면 1원은 했다고 할 터인데 1원조차 하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개척 연보를 1만원이라도 해서 내가 큰 소리를 치는 이 논리에 가시 방석을 피하고 싶을 듯하다. 그런데 다른 연보는 언제라도 할 수 있으나 개척 연보는 개척을 할 때만 할 수 있다. 이미 밤중이 되었고 신랑이 지나 가버렸으며 문이 닫혀 버렸다. 오늘의 이 절규를 가지고, 다른 면으로는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런 내용을 외칠 때마다 거창의 거남교회를 재개척하며 고생을 하신 분을 떠올린다. 그 분은 대구공회에 계실 듯하다. 그리고 사석에서 나를 평생 극단적으로 비판한다고 듣고 있다. 적어도 그 분이 내 면전에서는 그런 적이 없다. 내 면전에서는 내 어머니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몰라도 극찬으로 상대해 왔다. 나는 그 분의 얼굴과 그 사모님과 가족들의 말 못할 고난을 나의 양식으로 삼아 최소한 돈에 대해서는 평생 감사하고 산다. 그 분께 이런 글을 통해서라도 나의 진심 담은 감사를 전하고 싶다. 그리고 오늘 이후에 이 노선에서 사명을 가지는 분들은 이 글을 통해 직접 보지 못한 당시를 그려 가며 최소한 경제면에서는 귀신에게 붙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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