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23) 교회 경영론으로 본 백영희 (거창고 전영창과 비교하며)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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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4
(22)번 글이 너무 길어서 제목과 내용을 (22)번과 (23)번으로 나누겠습니다. 일부 중복도 있고 일부 다른 부분도 있으며, 원래 담으려던 내용이 (24)번 이하에 등재 될 수 있습니다. 연구소 공용 컴퓨터에 남겨진 이영인 목사님의 여러 글을 정리하다 보니 글의 일관성에 문제가 좀 있으나 사료적 가치와 함께 공회의 시각을 참고한다는 점에서 진행의 혼선은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내용에 변동이 있으면 제목에 '보충1' '보충2' 등을 붙이겠습니다.

- 정리자




공회 안에는 '거창고 전영창'과 '서부교회 백영희'를 동시에 직접 겪은 인물들이 많다. 내가 적는 이 번 글은 공회 내에 웬만한 사람들은 남의 말이나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 원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인물은 많은 면에서 특이했고 비슷했다. 그런데 내용은 아주 정반대였다.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살펴 본다. 나는 공회 내의 인물들을 가장 많이 알 수 있는 위치다. 태어 나서 자란 환경이 그렇다. 두 사람을 정반대로 알면 나와 같은 신앙이고, 비슷하게 놓고 본다면 나와 반대 신앙이다.


(두 사람의 평판)
백영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나처럼 이 땅 위에 이런 인물은 1세기의 사도 바울과 5세기의 어거스틴과 16세기의 루터 칼빈밖에 없다는 정도로 치켜 세운다. 백영희를 제대로 아는 순간 이 땅 위에 어떤 신앙의 인물도 그냥 대충 보일 뿐이라 한다. 이런 극소수의 인물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이들은 백영희의 평생을 그가 이단의 괴수로 사이비의 죄인으로 알았다.

전영창을 좀 아는 사람은 내가 백영희를 치켜 세우는 정도다. 한국의 현대 교육을 자율화 인격화 개성화라는 개념으로 발전해 왔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전영창의 거창고교를 총공회와 서부교회 정도로 친다. 총공회는 이단을 겨우 벗은 정도라면 전영창의 거창고교 교육은 이 나라의 전교조와 진보 좌파들에게 우상이며 목표가 되었다. 나는 그들이 아주 헛짚었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한국의 교육계는 이미 수십 년 동안 거창고등학교의 철학과 성공 사례로 진하게 물을 들여 향후 1세기가 지나도 그 물이 빠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 전영창은 1970년대까지는 교육계의 이단이었다. 1980년대부터 각광을 받았으나 진보 좌파가 좋아하는 편중이었다. 지금은 이 나라 교육계를 진보 좌파가 거의 점령했다. 그리고 그 학교의 명성은 이제 철옹성이 된 듯하다.

나는 이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공회의 역사 정리를 위해 이 글을 좀 자세히 적는다. 나는 이 나라의 교육의 붕괴와 맹신을 비판하기 위해 적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공회 신앙의 교인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때 오늘 우리 사회의 교육의 사상과 현장에 문제점을 알고 대처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이 글을 적는다. 현재 이 나라의 교육 철학과 방향은 철저히 잘못 되었으며 그 배경을 이해하고 그 잘못을 쉽게 비판하기 위해서는 공회 시각에서 공회가 아는 전영창의 거창고를 설명하고 싶다.



(백영희와 전영창)
백영희는 1910년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에서 출생했고 1929년에 결혼을 하면서 고제면 개명리에 살며 거창읍과 연고가 없다.
1936년에 신앙 출발을 하면서 거창읍교회와 주남선을 통해 거창읍과 거창 전체와 주변의 합천 함양 산청이 활동 무대였다.
전영창은 1916년 전북 무주군 적상면 출신이다. 무주와 거창은 덕유산의 이 쪽과 저 쪽으로 모두 덕유산을 끼고 살았다.
백영희는 1952년 덕유산 남쪽인 거창의 위천에서 부산 서부교회로 갔고, 전영창은 1951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부산에 왔다.
두 사람은 6.25 전쟁이라는 기간에, 피난 수도 부산이라는 장소에서, 고려파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 겪으며 서로를 잘 알았고
안용준 나인숙과는 순교자 유가족 후원회 때문에, 한상동 한명동 조수옥 주경순과는 고려파 교권과 현장 대처 때문에, 박윤선 한부선 등과는 고려신학교나 신앙 노선 때문에 늘 서로를 지켜 볼 수 있었다. 다만 성향이 너무 반대여서 직접 함께 할 일은 없었다.

확실한 것은 1961년과 62년 중 어느 토요일에 전영창 교장의 부탁으로 백영희는 거창고교에서 전교생을 상대로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로 설교를 한 적이 있다. 이 시점은 백영희가 고신에서 7년 넘게 박해를 당한 끝에 1959년에 제명을 당했고, 전영창은 이에 앞서 고신대 대학병원의 모체가 되는 복음병원을 1951년에 설립을 하고도 1953년에 횡령 등의 치욕적인 죄인으로 정죄를 받아 고신에서 제거를 당하고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컨콜디아신학교로 유학을 간다. 이 이야기는 고신 내에서 나온 논문을 참고하면 좋겠다. 공회가 고신에서 당한 50년대를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복음병원 설립자, 전영창인가 장기려인가? : 고명길> 고신대학병원 설립자 소고

이 시기에 백 목사님에 대한 고신의 탄압은 극에 달했는데 전영창과 백영희를 제거한 핵심 인물은 같다. 전영창은 1955년 12월에 귀국하고 1956년에는 린튼 학장이 한남대학교 부학장을 제의하고 훗날 학교를 맡기려 했으나 거창고교를 택한다. 이 거고는 호주선교부가 있던 건물을 주남선 목사님의 장남 주경중 장로님이 받아 설립했다. 백영희와 전영창의 관계를 설명해 나가려면 이야기가 너무 많다.

문제는 둘은 누가 봐도 겉 모습은 같은데 그 속은 판이했다 같다는 점은 하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타협이 없고, 거침 없이 돌진하였으며, 교단 교계의 어떤 박해와 저항이 있다 해도 포기가 없다. 진실과 헌신과 고난이라는 단어를 두고 이들의 주변에는 이들과 같은 사람이 없다. 그런데 전영창은 사회를 교육하고 사회를 개혁하여 하나님 나라를 만들자는 기독교사회주의자고 백영희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맡기고 오로지 교회 안에서 끝장을 봤다. 전영창이 본 백영희는 교회 울타리에 갇힌 또 하나의 바리새인이고, 백영희가 본 전영창은 기독교로 출발하여 세상의 사회를 개량하는 것으로 끝낼 비신앙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둘은 너무 잘 이해했고, 그래서 둘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서로 만날 일도 부딪힐 일도 없었다. 공회의 출발 핵심인 대구 동성로교회 신도관 목사님은 전영창이 1947년에 SFC의 전신인 학생신앙협조회를 시작할 때 10인 모임의 막내로서, 이후 전영창의 평생에 후원자였다. 전영창이 유학을 했고 또 훗날 미국 모금 운동을 위해 방문한 세인트루이스는 백 목사님의 자녀들이 평생 사는 곳이며 큰 사위 최재현 목사님이 그 곳에서 카브난트 신학교를 다녔고, 전영창은 미국에도 사람 같은 사람이 하나 있다, 그가 백영희 목사님의 사위 최재현이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고려파에서 철저히 매장을 당하여 고려파를 평생 원수처럼 상대해야 한다면 백영희와 전영창이다. 그들은 고려파에서 제거 된 뒤 각각 그들이 원하던 길을 죽도록 달려 갔다. 거창고등학교 코 앞에 제일 가까운 교회가 공회의 창동교회다. 학교에서 나오고 들어 가려면 창동교회를 보지 않고는 갈 수가 없다. 서부교회 행정실의 이탁원 목사님, 박신찬 목사님, 이경형 장로님(백영희 조카), 최근의 여러 목사님들까지 그 학교 출신이다. 이 글을 적는 나는 가까운 친인척 중에 그 학교 출신이 20명이고 거창고 내에 있는 샛별초등학교 출신은 30여명에 이른다. 백영희목회연구소가 서부교회 내에 있을 때 남직원 8명 중에 3명이 그 출신이었다. 공회 교인들이 그 학교를 다니게 되면 아주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눈에 띈다. 전영창은 학교 운영이 돈 문제 때문에 어려울 때 서부교회로 두 차례나 찾아 가서 백영희에게 '나인숙'을 보내 달라고 간청을 한다. 거창고는 돈 문제만 아니면 전영창이 전부 해결을 한다. 외부에서 돈을 끌어다 놓아도 이 관리를 믿을 사람이 없어 평생 고민을 했다. 1951년에 안용준 목사와 순교자유가족후원회를 운영할 때 나인숙을 알게 되었다.



(교육의 경영자 전영창, 교회의 경영자 백영희)
이제 본론을 적는다. 초 중 고교의 한국 교육을 두고 전영창만큼 훌륭한 인물이 있을까? 없을 듯하다. 교회의 운영을 두고 백영희만한 인물이 있을까? 이 분야는 내가 평생 전공이다. 없다. 있을 수가 없다. 2년에 한 번씩 출석한 교인 전체에게 비밀 투표를 시키고 25%가 반대하면 조건 없이 목사를 내보내는 이 한 가지만 가지고 이야기 해도 교회 운영을 두고는 한국 교회의 모든 문제점을 거의 다 해결한다고 본다. 어느 교단 어느 개혁적 목사도 시도하지 못했다. 백영희는 1970년부터 이렇게 방향을 잡았다. 전영창은 미국의 선교부가 투자하는 사립 대학의 운영권을 손에 쥘 순간에 학교의 운영이 어려워 폐교 위기인 거창고교를 맡았고 시골의 평범한 학생을 가르쳐 전국 최고의 실적을 올렸다. 교육 분야에서 일반 학생을 이렇게 만들어 낸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입학 때 괜찮은 학생을 받아서 실적이 좋은 경우가 소위 명문학교다. 들어 가기가 어렵다. 거창고는 아무나 들어 가고, 아무나 이 나라 최고의 학교를 목표로 삼아 결과를 이루어 냈다. 백영희는 교회를 이제 막 출석하면서 술담배도 끊지 않은 교인을 몇 달이면 반사가 되고 학생을 수십 명 또는 1백명을 출석 시키는 명 반사를 만들었다. 한 교회에서 1천명의 반사를 이렇게 만들고 매주 주일 8시 30분에 평균 8천명을 앉혔다. 선물 하나 없이, 빵 하나 없이, 장년반 그대로 찬송과 설교를 하는데, 부산 시내의 1시간 차량 거리에서도 아이들이 쏟아 져 들어 왔다.

이런 실적 때문에 두 인물은 각각 교육계와 기독교계에서 독보적인 인물이다. 이 글은 그들의 '경영' 방법론만 살핀다. 그들에게는 방법론적으로 비슷한 점이 너무 많다. 속은 정반대로 갔다.



<목적을 위한 실학파적 방법>
전영창은 기본적으로 애국자며 철저한 신앙가였다. 이 두 가지를 합하면 그의 1차 목표가 나온다. 자기 민족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다. 그가 주력할 대상과 방법을 청소년의 학교 교육으로 잡았다. 머리가 굵어 지면 어렵기 때문에 한남대학교를 맡으라는 린튼 선교사의 부탁을 거절했다. 교회와 목회가 되면 대상이 많아진다. 청소년 교육에 목표를 둔 이상, 그는 목표를 위해서 가장 효과 있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큰 목표를 위해서 사소한 문제를 포기할 줄 알았다. 그는 해방 후 미국 비자 1호로 6년을 유학했다. 미국에서 보고 배운 것을 마음에 두고, 1956년부터 1976년까지 20여년을 매진한다. 그는 청소년 교육가였다. 청소년의 교육을 위해 가장 효력 있는 '실제' 방법론을 모두 동원했다.

그 첫째가 폭행이었다. 전영창과 거창고의 신화를 아는 이들은 시골 학생들을 기독교의 사랑으로 길러 그렇게 성공을 했다고 알려 져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시 일반 학교와 비교하면 확실히 더 심했다. 전영창에게 직접 배운 학생들 사이에 거창고의 폭행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는 다혈질이었다. 순식간에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다. 시골의 평범한 학생들을 3년간 맡은 다음에 서울대 연고대를 비롯한 최상급 대학에 진학을 시키는 것이 사랑으로 말로 인격으로 감화로 기다림으로 될 수 있는가? 다만 그의 폭행은 정말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의 매'였다. 그래서 졸업생 대부분은 평생 그를 교사나 선생이 아니라 스승 또는 아버지 정도로 생각한다. 친 자식을 때려도 품으로 들어 온다. 남의 자식을 때리면 울고 떠난다. 당장에 떠날 수 없으면 마음이 떠난다. 중요한 것은 '교육'에 폭행이라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전영창은 폭행을 적절하게 때로는 강력하게 사용했다. 그래서 교사들 대부분도 그러 했다. 기억해 보면 3분의 1은 폭행이 심했고, 3분의 1은 평범했고, 3분의 1은 정말 품성이 좋았다. 전영창은 심했다. 그런데 이 학교의 폭행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탁월하게 진학을 시키는 결과에 있었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를 갈 수 있기 때문에 공부를 꼭 하고 싶은 학생들은 맞더라고 자기를 단속 시키고 결과가 좋으니 몰리는 것이다. 그리고 때리는 이유가 타 학교와 달리 정말 학생들을 위한 것이어서 이 학교 출신의 애교심은 사이비 단체의 교주를 연상케 했다. 폭행의 도가 확실히 사랑이 아니고 선을 넘는 경우는 많았으나 이 전체의 분위기가 유지 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폭행이 전영창 교육의 첫째라면 그 폭행이 의미하는 것은 학교가 세운 목표를 향해 전교생을 강력하게 몰아 가는 돌격 정신이 있었다. 죽자고 공부를 해서 출세를 하라. 그래서 고생하는 고향의 부모를 실망 시키지 말자는 것이 늘 그의 입에 달고 다닌 이야기다. 나는 무주 촌놈이다. 너희 부모들의 고생과 소원을 안다. 그런데 부모가 무식해서 너희의 공부하는 방법도 또 현재 학교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모르니 내가 너희 부모를 대신하여 너희를 패서라도 성공을 시키겠다는 사명감이 펄펄 끓어 넘쳤다. 그리고 그가 3년을 가르치고 나면 학생들의 실력은 확연하게 좋아 졌다. 학생들의 시답지 않은 벌소리는 모두 묻혔다. 학생들의 자율이나 자발성은 어디 끼어 들 틈이 없었다. 그런데 봄에 가는 1박 2일의 단체 숙영과 3일의 축제는 당시 대학교의 축제나 야유회와 비교해도 확실하게 자유 분방했다. 말하자면 1년 내내 때려 잡아 공부를 시키다가 한 번씩 풀어 주는 완급의 조절이 있었다. 이를 나쁘게 평할 수도 있지만, 그는 모든 것이 선의였다. 첫 눈이 오면 전교생이 갑자기 뒷산에 토끼몰이에 나선다. 그 불쌍한 토끼를 어떻게 무참하게 때려 잡는가? 그리고 잡았다고 전교생이 환호하는가? 이렇게 비판을 하자면 박원순 서울시장이 돌고래를 제주도로 보내주며 흐느끼고 또 도룡뇽 한 마리 때문에 울고 불며 KTX 고속철 공사를 막은 어느 승려와 비교할 때 미국에서 미국의 인디언 사냥의 잔인성을 익혔다고 비판해도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실제 그렇게 했다. 이 학교 출신들이 훗날 사회 활동을 하는 거의 공통점은 인륜, 자연, 박애다. 이 나라 인권 민주화의 좌파 진보계에서 이 학교의 위상은 참으로 높다. 나는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또는 이 학교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을 접할 때마다 '그 학교? 나 군대 때보다 그 학교 시절에 더 많이 맞았고, 토끼 몰이 때는 전교생이 눈에 불을 켜고 그 불쌍한 생명을 잡아 족치는데 무슨 인권이고 무슨 자유고 무슨 사랑이 있느냐'고 되묻는다.

그런데, 이 학교의 입학 성적 대비 대학 진학의 결과를 놓고 보면 1980년대 국내 언론이 기적의 학교로 소개한 것처럼 실제 그렇다. 전영창은 그가 세운 목표를 위해 방법론을 참으로 적절하게 잘 사용했다. 미국에서 6년간 신학교 유학을 갔다 온 기독교의 사랑의 교육자가 성적 향상과 일류대 진학을 위해 폭행을 서슴치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실일까?

또 하나 더 있다. 다 말하자면 참으로 많으나 전영창은 정식 수업 시간에도 영어와 수학은 반편성 시험을 치고 A B C반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전교조를 비롯한 이 나라 좌파들은 1990년대에도 학생을 차별한다며 성적별 반평성을 반대했다. 심지어 월말고사 기말고사 시험까지 치지 말고 아이들을 자유롭게 풀어 놓고 놀게 해야 사람이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그 때마다 나오는 논리가 거창고와 샛별초등학교의 열린 교육이었다. 그 교육의 실체를 굳이 안 보려고 했고 또 포장을 바꾸어 사용했다. 맞다. 대문과 담은 없었다. 그러나 매가 너무 무서워 그 대문과 그 담이 없어도 학교는 질서가 잡혔다. 나는 샛별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며 내 졸업장은 졸업번호 1번이다. 1964년에 입학을 막 했던 따뜻한 봄날, 비가 살짝 온 직후였다. 친구 3명이 잔디밭 옆에서 졸졸 흐르는 빗물로 물놀이를 했다. 교장 선생님이 지나 가면서 그렇게 놀면 안 된다고 했다. 우리는 예사로 듣고 계속 했다. 건물에서 나오는데 여전히 물놀이를 하던 우리를 향해 너희들 다 이리 와! 진노한 얼굴이었다. 얼굴이 그렇게 되면 이제 죽었다 싶을 만큼 맞는다. 친구 하나가 겁이 나서 튀었다. 그 잔디밭은 막 만들었기 때문에 새끼로 줄을 치고 통로를 만들었다. 교장 선생님은 잡으러 가고 이 친구는 울면서 더 도망을 갔다. 잔디밭 새끼 줄을 사이에 두고 끝까지 잡으려는 전영창, 잡히면 죽는다고 죽을 힘을 다해 울면서 도망 간 친구, 그 친구 이름도 표정도 교장 선생님의 얼굴과 달리는 모습도 지금 선명하다. 이 것이 전영창이다. 집념, 돌파, 인내가 정말 남 달랐다. 초등학교 1학년을 상대로. 교장 선생님은 잔디를 사랑했다. 잔디 밭을 밟지 말라고 전교생에게 자주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그 분노 중에도 잔디 밭을 가로 질러 잡으러 가면 되는데 그 선을 지켰다. 도망 가던 친구는 운동에 타고났고 전영창에게 딱 하나 못하는 것이 있었는데 운동이었다.

거창고 23회 한 학년이 180명이었다. 당시 국고 지원이 적었기 때문에 시골의 사립학교는 경영난이 심했다. 1개반 60명의 3개반 정원을 가지고 1개반 45명으로 4개 반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들어 가는 돈은 결국 전영창 한 사람의 어깨에 올려 졌다. 영어 교육을 위해 원어민을 모셨다. 모두 돈이 들어 간다. 평생 후원금 모집까지 혼자 해결했다. 교육에 좋은 것은 전부 동원했다. 폭행까지. 혼자, 목숨을 바쳐, 세운 목표를 위해, 죽도록 뛰었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도 바로 그런 도중에 갔다. 그래서 그 학교에 관련 된 사람들은 친부모 장례처럼 그렇게 치렀다. 진학에 도움이 된다 하여 고3 올라 갈 때 학년 전체 성적 20등 이내 학생에게는 1년 내내 정규 수업 전체를 면제 시켜 줬다. 나를 포함하여 배짱 좋은 2-3명은 1년 내내 거의 수업에 들어 가지 않았다. 상상이 가는가? 고3 정규 수업 전부를 결석해도 출석부에 출석으로 표시했다. 과목별로 빠져도, 진도별로 빠져도, 다 빠져도 출석으로 매긴다. 고3에게 대입이 목표인데 대입을 위해 목표하는 대학의 본고사 과목이 다르고 출제 양식이 다르고 자기의 실력이 다른데 왜 붕어빵틀에 꼭 같이 1년을 잡아 두나? 목표에 방해 되는 방법론은 거침 없이 걷어 낼 줄 아는 결단과 실행이 정말 절묘했다. 11월에 대학 예비고사를 치른 뒤 무조건 합격이 보장 되는 20등 이내 학생들에게는 바로 서울 등 전국 어느 대학을 목표해도 그 곳에 있는 입시 준비 단기반으로 가서 공부하면 학교 출석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실적을 올렸다. 그 올린 실적 때문에 다음에는 더 좋은 학생들을 받을 수 있고 또 후배들에게 주는 희망과 예상 가능한 앞 날을 통해 계속해서 진학률을 높여 나갔다. 학생들 하고 싶은 대로 다 풀어 놓는 열린 교육? 개성 교육? 놀면서 공부하는 자율 교육? 그 것은 그 학교의 방법론이 아니다. 직업 10계명도 전영창 당시는 없었다. 물론 그런 사상의 흐름은 전영창의 본질이다. 한 마디로 전영창이라는 인물은 박정희와 비교하면 정확히 같다. 그래서 거창고 출신이라면 박정희를 욕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희안한 것은 거창고 출신은 박정희 욕을 하는 것이 마치 정체성처럼 되어 있다. 전영창은 박정희의 독재를 비판했다. 그러나 자신도 학교와 학생의 실적을 위해 독재를 했다. 남들이 무슨 말을 해도 실적을 위해서는 폭력도 독재도 독권도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 다 결과를 뚜렷하게 만들어 놓았다.

학교의 주요 요직에는 모두 친인척을 앉혔고 친인척이 없으면 무조건 말을 듣는 이들을 뒀다. 철저하게 친인척 경영이며 측근 운영을 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측근인 군인들만 요직에 앉힌다고 비판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의 설교에 모두들 흥분하며 감동을 받는데 왜 눈 앞에 그 말을 하는 그 분의 친인척 측근 정치를 비판하는 학생은 없었는가? 이 것이 10대의 한계다. 물을 끓이면 끓어서 펄펄 넘친다. 여기까지다. 교사들 중에는 이런 문제점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교사는 바로 끊어 버린다. 반대파의 발언과 활동은 철저히 봉쇄한다. 당시 어느 학교든 교사가 학교를 떠날 때는 인사말을 하는 기회가 있다. 반대하다 찍혀서 나가는 이들에게는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이다. 반대파가 반대 발언을 하도록 그냥 둔다면 거창고는 시골의 그냥 시시한 그런 학교를 벗어 나지 못한다. 학교장 1인의 절대 수고와 목표를 향한 방법이 그 학교를 그렇게 발전을 시키고 있는데 무책임한 교사들의 무책임한 불평을 그냥 두면 되겠는가? 학교와 학생을 위해서라도 내보내야 했고, 그런 교사가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발언 하나 잘못 하면 학교에 미치는 파장이 크다. 그래서 작별사도 못하게 한 것이다. 나는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박정희에 대해서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끊어 내치고 독주하는 것을 비판하나? 결과가 좋으면 학교 운영을 생각하면서 잘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양심이며 공평이 아닐까? 박정희의 측근 독재 정보 정치는 마구 비판을 하면서, 거창고의 운영은 측근 독재 정보 정치를 하는가? 전영창의 목적이 옳고 그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의 목적은 그러면 이 나라를 망치기 위한 것일까? 그 건 박정희 속에 있는 마음이라 알기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그 방법론은 눈에 보인다. 그 방법론이 틀렸는가? 결과를 놓고 볼 때 60년대와 70년대에 모든 언론과 야당과 반대자들을 오늘처럼 다 보장했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모르겠다. 적어도 거창고는 매로 다스리고 교장이 헌신하며 학생과 교사를 독재적으로 끌고 갔을 때, 이 나라 저 시골의 일반 학교가 이 나라 최고 명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영창 사후 학교는 과거 전영창 생전처럼 운영할 때까지는 당연히 발전을 했으나 오늘의 전교조와 철학과 방법론을 같이 한 결과 진학률은 형편없이 떨어 져 버렸다. 예전에는 참새가 독수리 되었고, 지금은 독수리가 참새로 되돌아 간 정도이다.





백영희의 교회 운영론은 박정희와 전영창을 놓고 비교하면 불신자라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모두 60년대와 70년대에 기적적 발전을 이룬 인물들이다. 백영희는 전영창을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보았다. 신앙인으로 보지 않았다. 그의 신앙 자체를 의심한 것이 아니라 전영창의 추구하는 목표와 방법은 필연코 신앙에서 멀어 진다는 것이다. 전영창은 어릴 때 미국 남장로교라는 극보수주의 범위에서 선교를 받고 배웠다. 전북 무주군에서 자랐고 전주 신흥학교를 나왔다. 그 곳이 미국 남부 쪽의 엄하고 보수적이다. 그리고 해방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관련이 있는 베졸드나 한부선을 통해 유학을 갔다. 또 1951년에 귀국하고 부산에서 활동을 했는데 이 곳이 보수 신앙인 고려파가 중심이고 실제 고려파 내에서 활동을 했다. 그런데, 고려파에서 제거 되고 거창에서 학교를 운영하는 과정에 그의 신앙은 진보쪽으로 움직였다. 주일은 쉬는 날이지 교회에 매여서 안 된다는 논리로 6일을 열심히 공부하고 일요일은 편하게 쉬라는 주장이었다. 물론 주일의 예배 활동은 했으나 학생들에게는 공부를 하다 쉬는 날로 생각했다. 70년대가 되자 '예수님이 결혼을 했다는 말도 있다. 창세기가 실제인지 우화인지 그런 것은 우리가 생각할 것 없이 에덴동산의 교훈만 알면 된다'고 설교를 이어 갔다. 이 시기에 비록 총공회를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마치 주적처럼 공회의 기본 신앙들을 비판했다.

고교 2학년 초로 기억 되는 어느 날 저녁에도 모두 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라면서 밤 예배조차 본 교회로 가지 못하게 했다. 방과 후인데 저녁 자습 시간에 참석하지 않으면 정규 수업 시간의 결석처럼 처벌하겠다고 위협을 했다. 나는 밤 예배를 창동교회에서 다 보고 갔다. 고려파 거창읍교회 친구들은 모두 학교로 갔다. 한 번은 예배를 마치고 늦었지만 혼자 학교를 갔다. 나만 빠졌다. 바늘 하나 떨어 져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한데 학교의 현관에 교장실이 있다. 측문으로 들어 가자 복도 끝까지 아무도 없는데 교장실 앞에 교장 선생님 한 분이 측문으로 들어 오는 나를 노려 보고 있었다. 두 손을 허리에 올린 상태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잘 아는 분이다. 그 표정 그 모습이면 주먹이고 발길이고 사정 없이 날라 온다. 오늘은 죽겠구나 라는 마음이었으나 원래 좋은 학생이 아니다 보니 교사들에게 맞고 사는 것은 일상사라 속으로 긴장하면서 그냥 걸어 갔다. 2층으로 올라 가는 순간 뒤통수에 뭐이 날아 올 듯 그렇게 서늘했으나 그냥 지나 쳤다. 예배 출석 때문에 주먹을 날리는 것만은 신학교 6년을 공부한 신학교수급으로 차마 자제를 했던 모양이다. 1973년, 전교생이 반지하 1층에 지상 3층의 전 건물을 청소하는 날 여학생 하나를 잡는다고 지하실 1층 2층 옥상까지 따라 가는 소동이 있었다. 나는 1964년 초등학교 1학년 때 잔디밭에서 본 그림이라 별로 놀라지 않았다. 여전히 펄펄 끓는 그 열정, 그 열정이 학교와 학생을 사랑하는 표시였다. 여학생들은 모두 기겁을 하고 피하고 괴성을 질렀고 남학생들은 구경거리로 보는 듯했다. 다음 날, 교장 선생님은 교장실로 나를 불렀다. '성경에 주일만 나온다. 밤예배는 없다.' 보통 이런 식으로 끝나지 않는데 참 이상했다. 그 분이 공회와 관계를 그 때는 잘 몰랐다.

백영희의 교회 운영, 교회와 교인에게 좋다면 전국의 모든 목회자들에게 2년마다 중학교 1학생 이상이면 지나 가는 손님이라도 투표권을 준다. 4분의 1이 반대하면 조건 없이 목회자를 퇴직 시킨다. 이로 인해 목회자들의 반발이 많았고 또 교인들 중에 목회자를 지지하는 4분의 3 교인들이 1표 차이로 지지하던 목회자가 떠나게 되면 교회는 큰 혼란에 빠진다. 목회자들은 거의 전부 이 제도를 반대했다. 그런데 백영희 세계에는 다수결이 없다. 아니, 다수결이 아니라 전원일치라고 해놓고 왜 전부가 반대하는데도 이 제도를 만들고 죽는 날까지 이 제도를 끌고 갔는가? 1989년 돌아 가실 것을 미리 말하던 백영희는 1988년 11월에 실시한 마지막 시무투표 제도는 그의 평생에 가장 엄하게 혹독하게 만들어 놓고 갔다. 목회자들뿐 아니라 장로 권사들까지 모두 시무투표를 받아야 하게 했다. 그리고 장로나 권사는 교회 내에서 원래 하는 일도 별로 없으니 별 문제도 아니지만 장로 권사들은 목회자만 투표하지 왜 자기들까지 시키느냐고 반발을 했고, 목회자들에게는 시무투표 제도가 지난 날에는 좀 느슨하게 적용이 되었으나 1988년에는 가능한 최고로 이 제도의 집행을 엄하게 하는 바람에 반발이 더욱 많았다. 그래서 백영희의 교회 지도는 독재라는 말을 평생 들었다. 그 독재를 통해 공회는 시무투표 제도가 지금까지 50년을 이어 오고 있다. 어떤 제도든지 장단점은 함께 있을 것이나 그래도 이 시무투표 때문에 교회마다 폭발 직전까지 가는 문제들을 사전에 해결하거나 또는 폭발을 순화 시킨 경우는 참으로 많다. 일부 부작용만 부풀려 알려 진 것은 백영희에 대한 오판이다.

백영희의 친인척 등용은 전영창과 다르지 않다. 백영희 평생에 총공회의 서열은 신도범 백태영 백영익 백영침 이재순 정도였다. 친동생 2명, 고향 팔촌 동생 1명, 처조카 1명, 동생의 처남 1명. 전부 친인척이다. 김석준이라는 유력한 인물이 60년대에 공회 소속이었다. 그는 동생과 사돈이었다. 총공회의 인물도를 짚어 가다 보면 백영희와 친인척으로 어떻게 걸려도 걸린다. 공회의 주력 인물 중에 전혀 걸리지 않는 사람은 아마 나 한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더욱 백영희를 격찬할 수 있고 그 때마다 전혀 걸리는 것이 없어 좋다. 나는 목사님 사후 5명 제명을 당했고 목사님 자녀들에게 몇십 차례 또는 기준에 따라 몇백 차례 고소 고발을 당했다. 그래도 나는 목사님에 대해 더욱 감사하다. 자녀들이 그렇게까지 나오게 된 것이 바로 나를 자녀들보다 더 아꼈고 더 길렀기 때문에 자녀들이 인간적으로 화가 나지 않을까? 이해를 한다. 전영창도 친인척 측근 정치를 했다. 그 것이 그렇게 효율적이다. 전영창의 고뇌, 충정, 목표에 대한 절실, 이를 위해 자신들의 인생과 경제와 가족을 전부 내 던질 사람이 있을까? 없다. 친인척 가족들이라야 인연에 걸려서라도 돕고 또 속사정을 아니까 마지 못해서라도 전영창을 돕는다. 백영희의 경우도 전국과 온 고신이 이단이라고 생 난리들인데 그 죄목은 모두 조작 된 것이다. 그런데 친인척은 모함인 줄 안다. 그러니 그들은 친인척이라서 백영희가 죄인인데도 돕는 것이 아니라 친인척이기 때문에 백영희의 무죄와 충정이라는 내막을 알고 내막을 알기 때문에 백영희를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멋 모르는 일반인이 보면 친인척만 데리고 교회를 운영한다고 말한다. 이 것이 여론과 언론의 한계다. 여기에 백영희와 전영창은 흔들리지 않았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학생의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면 서슴치 않고 적용했다. 그리고 친인척이 똘똘 뭉쳐 보필을 했다. 그래서 이룰 수 없는 결과를 만들었다. 백영희의 경우도 친인척에게 특혜를 줘서가 아니라 친인척에게는 더 큰 십자가를 요구했다. 이들의 신앙으로는 따르기가 어려웠으나 친인척이라는 관계 때문에 남들보다 조금 더 묶였고 또 친인척이기 때문에 백영희의 교회 운영 방법이 효율적인데 남들은 오해를 해도 이들은 믿고 따랐다. 그래서 교회 운영에 도움이 되었다.

주일학교와 구역장 제도를 다른 교회들은 지역제나 선임제로 운영한다. 백영희는 누구라도 데려오면 데려온 반에 학생이 되게 했고 그 구역에 배정을 했다. A가 전도하고 B가 반사나 구역을 맡는 경우는 없다. 아이를 낳은 그 부모가 그 아이의 부모가 되어야 가장 좋다는 것이 자연의 원리며 성경의 원리다. 그런데 세월 속에 지역 배정이 생기면서 교회가 마치 공무원이나 사회 단체처럼 되었다. 주일학교와 구역제도의 편성을 근본적으로 바꾸니 서부교회의 부흥은 폭발적이었다. 한국의 교육계에 거창고 전영창의 신화가 유명하다면 한국교회의 주일학교와 장년반의 성장을 두고 가장 성경에 철저하면서도 가장 은혜롭게 진행 된 경우를 두고 서부교회와 같은 사례는 아예 없다. 문제는 교육계에서 전영창처럼 희생적이며 목표를 향한 효율적 방법을 끝까지 고수한 사례가 없는 듯하고, 교계에서는 백영희처럼 희생적이며 교회의 운영 목표를 바로 잡고 그 목표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면 자신부터 제단에 올려 놓은 경우가 없다. 목회자 중에는 목숨 바치는 헌신자들이 많다. 그런데 그 헌신자들이 방법론을 바르게 잡은 경우는 알지 못한다. 또 방법론이 좋아서 백영희보다 더 교회를 부흥 시킨 이들은 많으나 그들이 백영희와 헌신 면에서 비교할 때는 어떨까? 비교할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다. 자기 헌신과 바른 부흥의 방법을 한 사람이 함께 가진 경우는 백영희뿐일 듯하다. 그래서 전영창과 백영희를 나란히 놓고 비교를 해본다. 나란히 놓을 만큼 가치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공회 교인들의 자녀 교육은 공회 신앙을 모두 내버리는 배경인데, 자녀 교육을 두고 이 나라 최고의 이상적인 사례로 소개 되는 거창고의 전영창 사례를 분석하면서 우리 공회 교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교육이 아니었음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교육은 결국 오늘 이 나라 기준으로 봐도 아주 잘못 된 진보 좌파의 폭망적 사례로 종착점을 만들어 버렸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전영창의 생전에는 목표가 학생을 위했고, 방법이 그 목표를 위해 가장 좋았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박정희식 개발독재다. 그렇다면 박정희를 예찬했어야 하지 않을까? 둘이 꼭 같으니. 거창고는 개발독재를 하면서 박정희를 비판해 놓으니, 그 학교 출신들은 박정희식으로 공부해서 사회에 진출을 하고 나면 박정희식을 비판하는데 평생을 보는 식이다. 그 박정희식이 바로 전영창식인데. 보자기로 덮어 놓고 원수인 줄 알고 죽도록 쳤는데 알고 보니 자기 부모였다고 비유하면 될까?

백영희의 교회 운영론은 처음부터 박정희 전영창의 세상 개량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 모습은 비슷하다. 이 3명을 나란히 놓고 보면 어떻게 그렇게 비슷한지. 박정희는 먹고 살며 생존하는 이 나라만 알았고, 전영창은 기독교를 가지고 이 나라를 좋게 만드려고 했고, 백영희는 이 나라는 처음부터 전혀 관심에 없었다. 일본이든 미국이든 한국이든 원수든 친인척이든 이 땅 위의 관계는 전부 초월했다. 그냥 하나님이 인도하면 순종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인도가 교회의 운영이라면 교회의 운영이 어떻게 되어야 옳은지를 살폈고, 교회가 천주교처럼 시청처럼 사회 단체처럼 고위직 임원직이 자기 중심이 되어 자기 편리한 것을 추구하면 안 된다고 못을 박아 버리고 올라 갈수록 목자로서 부모로서 자기 책임이 많아 지니 당연히 자기가 먼저 헌신해야 했고 그 방법 때문에 시무투표를 적용했을 뿐이다. 또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자기가 맡아야 본능적으로 그를 위해 최선의 헌신과 사랑이 나오는 것이 성경이며 하나님이 만든 자연이기 때문에 구역과 주일학교를 책임자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만들고 제도를 위주하지 않았다.



이 주제는 할 말도 많고 또 백 목사님이 내게 준 두 번째 사명이어서 적어야 하겠다.
앞으로 살필 내용들은 대개 다음으로 예상한다.





<목적이 순수했고 최고였다>


<자기 헌신이 각각 초인적이었다.>


<모든 역사와 주변을 뿌리 치고 개혁했다.>


<주변의 어떤 도전과 방해도 모두 극복했다.>


<이 과정에 세상의 모든 비판은 다 받았다.>


<마지막에는 각자 자기 분야의 최고가 되었다.>


<경영적인 측면에서 이들은 최고의 능력자들이었다.>


<그들을 지켜 본 이들은 그들을 다른 이들과 비교 자체를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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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 생활의 농경식과 이동 생활의 목축식
담당 | 2019.08.21 | 추천 0 | 조회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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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제와 집회
담당 | 2019.08.21 | 추천 0 | 조회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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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셈법, 신앙의 셈법 - 손익을 기준으로
담당 | 2019.08.21 | 추천 0 | 조회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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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
공회의 '실행'론, 이 노선의 희망
담당 | 2019.08.18 | 추천 0 | 조회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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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후보' 논쟁 - 공회만이 아는 국가적 이야기들 (2)
담당 | 2019.08.17 | 추천 0 | 조회 505
담당 2019.08.17 0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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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부공1의 대구 기도원 철거와 집회 탈선 역사 (부공2측 공개 발언) (1)
부공2 | 2019.08.11 | 추천 0 | 조회 15
부공2 2019.08.11 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