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18) 극단적 탈선과 가족의 고난, 백 목사님께 거역하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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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4
(비교가 어려운 인물)
인간의 비교란, 해 보면 할 만하다. 차이가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나. 그런데 백영희를 제대로 접해 본 이들은 아예 다른 인물과의 비교 자체를 거부한다. 너무 특별하기 때문이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봐도 아이에게 자기 어머니는 탁월하게 훌륭하다. 그런 식인가? 다른 유명한 지도자들과 비교를 해 봐도 확실히 그렇다. 나는 1994년부터 백영희 전기를 위해 자료 수집에 열중하면서 백영희를 확실히 반대한 이들이나 오래 전에 떠난 이들을 먼저 상대했다. 그들조차 백영희에 대한 인물평에 있어서는 일반 지도자들과 그냥 비교를 하지 않는다. 너무 특별했다. 그리고 그를 두려워 했다. 그의 인간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의 언행에 따라 하나님이 보여 주는 역사들 때문이다. 한 때 어두워 져서 반대를 했을지라도 자신들의 지난 날을 생각하며, 그리고 내가 면담을 할 때 그들의 자세는 한결 같았다. 하나님께서 실제 함께 하는 인물임을 직접 본 이야기들이다.



(백 목사님의 지도 한 마디)
1954년에 나환자 시설을 시작할 때 백 목사님은 설교 중에서 한 말씀 하고 지나 갔다. 아버지는 그 한 마디를 마음에 품고 바로 한센환자들의 치료와 생활과 신앙을 위해 양혜원이라는 시설을 시작했다. 아무리 거창군의 재력가라 해도 거창군은 역시 시골이고 또 개인의 경제로는 한계가 있었다. (17)번 앞 글에서 여러 과정을 통해 양혜원이 전국 시설로 등장하는 사연을 설명했다. 아버지의 사업은 잘 풀리고 있었다. 양혜원은 국가의 지원을 받아 거창에서 첫 손 꼽을 복지사업체가 되었다.

바로 이 순간에 백 목사님은 아버지에게 양혜원의 운영을 손 떼도록 지도를 했다. 이런 경우 백 목사님은 거의 한 번만 말을 한다. 개인에게 정말 중요한 사안은 결국은 그 사람이 혼자 안고 가야 하는 단계가 나오고 그 결과가 너무 중대하기 때문에 남이 대신해 주고 싶어도 해 줄 수가 없다. 그래서 백 목사님은 한 마디를 '짧게, 굵게, 명확하게' 던진다. 이런 내용이 전해 져 온다. 당시 표현법으로 재구성한다.

'운길 집사! 주님이 기뻐할 일이고 참 어려운 일을 했어. 그런데 이 집사의 실력으로 양혜원을 더 이상하게 되면 감당하지 못할 일이 생길 거야. 지금 정부에서 지원이 시작되니까 벌써 여러 말이 나오는데 앞으로 겉잡을 수 없을 거야. 이 정도에서 손을 떼면 환자들도 늘 운길 집사에 대해서는 감사한 마음만 가질 것이고 그들 신앙에도 도움이 되고 혹시 문제가 생겨도 그들끼리 문제가 되어 운길 집사나 교회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야.'

아버지는 무척 서운했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한맺히며 돈을 벌었기 때문에 평생에 남의 돈을 빌리지도 않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돈을 빌려 주는 것조차 하지 않는다. 빌려 주는 것도. 무조건 자기 돈을 쥐기만 한다. 아무리 독하다고 비판을 해도 아버지의 경제는 딱 여기까지다. 이 것이 그의 장점이며 그의 단점이었다.


(양혜원의 갈등)
아버지 한 사람의 돈으로 시설이 운영될 때는 모두가 감사했다. 또 신앙에 열중할 뿐이었다. 그런데 정부의 지원금이 들어 오기 시작하자 바로 문제가 생겼다. 우선 아버지는 원장으로서 장애가 심각하고 사회 활동을 전혀 할 수 없으며 1950년대 당시로서는 생계의 방법이 없는 환자들을 위해 농지를 구입했다. 논과 밭을 구입하여 일반인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곡식을 양혜원이 받는 방법이다. 아버지는 어렵게 살아 본 자기의 경험과 자기 돈으로만 개설한 시설에 대한 진심을 담았다. 나는 어릴 때 양혜원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늘 되뇌이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진심과 그 방법론이 옳았다. 그런데 백 목사님께 직접 배우는 과정에서 나는 아버지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전국의 환자 시설에는 운영규칙이 따로 있다. 양혜원의 경우만 예를 들면, 음주나 폭행 또는 신앙 생활을 잘 하지 않으면 쫓아 낼 수 있다. 그리고 양혜원 내부에 가두는 곳도 있었다. 요즘이야 상상도 할 수 없으나 인권의 개념이 없던 그 때는 이런 규정이 당연했다. 나환자는 경찰도 접근을 꺼리기 때문에 일반 사회의 법 집행의 사각지대다. 그래서 자체 처벌 규정이 엄했다. 자체적으로 통제가 되지 않으면 국립병원인 소록도로 보낼 수 있다. 나환자들에게 이 곳으로 보낸다 하면 지금 북한의 강제 수용소 정도의 효과가 있다. 나환자로서 아버지에게 급할 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살아 가다 보면 별별 일이 있는데 어느 날 쫓겨 나면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국가가 주는 지원금을 두고 환자들 입장에서는 현금을 나누어 가지게 하든지 아니면 당장 각자가 사용할 물품을 원하게 된다.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원장 입장에서는 부동산의 규모를 늘려야 운영이 안정적이 된다. 자연히 충돌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입장 차이를 두고 아버지는 자신의 진심과 자신이 극히 어려운 시절에 생존했던 기억만 가지고 무조건 논밭을 사려 했고, 환자들 중에는 아버지의 결정을 분명히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겉은 환자였으나 그들은 환자가 되기 전에 아버지보다 잘 살았던 분들도 있고, 공부와 사회적 능력이 탁월한 분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큰 힘은 전국의 같은 시설들끼리 서로 정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법인이 무엇인지, 개인 시설의 의미가 무엇인지, 국가에서 지원하는 돈의 성격과 집행 과정에 지켜야 할 법을 알고 있다. 요즘과 달리 그 때는 아주 느슨했기 때문에 원장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가 있었다. 심지어 정부 지원금으로 양혜원을 위해 논밭을 구입하면서 소유권 표시를 아버지 이름으로 해도 문제가 없었다. 부동산 실명제 실시 이전이었기 때문에 명의자와 소유자를 따로 봤다. 그 땅을 실제 양혜원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 사실만 입증하면 된다.

문제는, 환자들 쪽에서는 민원 제기를 할 수 있다. 전국 연락망을 통해 이런 문제를 지도 받을 수 있다. 아버지가 국가 지원을 받고 모든 돈으로 논밭을 사들이며 양혜원의 미래는 환자들이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고 아이들을 공부 시킬 수 있는 지상낙원이 된다고 행복해 하며, 그리고 자기 스스로가 대견하던 바로 그 시점에, 환자들은 원장이 국가 지원금을 떼먹고 환자들을 굶긴다고 진정을 했다. 이로 인해 나중에는 서울의 보건사회부 중앙직 공무원들이 직접 현장 조사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경남도에서는 더 자주 나왔다는 뜻이 된다. 거창군청의 경우는 뻔히 알기 때문에 조사할 것도 없고 문제도 없다. 공무원들의 월급이 요즘 북한의 공무원들처럼 월급만 가지고는 살아 갈 수 없던 때, 이런 고발이 들어 오면 현장에 조사를 나오면서 공무원들은 비로소 돈도 받고 또 평소 먹지 못한 식사를 한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뇌물 주는 것을 '공무원에게 먹인다'고 말하는데 이 단어는 배고프던 시절에 실제 좋은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실제 요즘으로 말하면 뇌물이었다. 지방의 일반 공무원들이면 국수 한 그릇이지만, 경남도에서 나오면 식사의 수준이 올라 가야 하고 만일 서울에서 내려 왔다 하면 최고로 대접을 해야 한다.

당시로서 이런 식사나 심지어 오가는 비용에다 인사라 하면서 돈을 주면 뇌물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정직했다. 조사 담당자가 불법으로 지적한 것이 없다. 나라 돈으로 양혜원의 식구들을 위해 논밭을 샀고 그 소출은 전부 그 식구들에게 갔다. 문제는 조사 오는 이들을 대접하다 보니 그들과 앉은 자리에 술이 들어 와야 한다. 신앙의 사람이니 처음에는 먹지 않았을 것이다. 반복 되면서 어려운 상대방 때문에 체면치레 인사치레를 했을 것이다. 날마다 양혜원 문제로 환자들에게 들볶이고 시달리고 공무원들을 대접하다 보니 어느 덧 신앙은 멀어 졌다. 백 목사님과 삼봉산 칼바위에 기도 가던 교인 중에 남자로서 제일 가까왔던 인물이 변판원 다음으로 아버지였는데 어느 덧 술에 빠졌다. 기생들이 앉았을 것 같다. 어느 날부터 아버지가 고정적으로 가는 기생집이 있다는 말이 들렸다.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아침 밥을 먹고 나면 밤중에 집에 들어 올 때 만취상태였다. 하루종일 그 술집에서 술만 마셨다 한다. 그 곳은 시장 어느 한 모퉁이, 그런데 모두가 보이는 길목에 있었다.



(거창 사회에 던져 진 오명)
아버지는 거창의 제일 북단인 고제면의 삼봉산 칼바위 바로 밑의 봉산 마을 출신이다. 그 곳에서 일본을 갔다 돈을 벌어 왔고, 해방 후 백 목사님의 초기 신앙이 불 붙을 때 아버지는 백 목사님에게 제일 가까운 남자 교인이 되었으며, 전쟁 후에는 거창의 한 중심인 거창읍에서 사업에 성공을 하고 주남선 목사님 사후의 거창읍교회에서 장로 1순위까지 올라 갔는데, 바로 이 순간이 백 목사님은 부산 서부교회에서 고신으로부터 제거를 당하던 시점이고, 거창 전체의 고신으로서는 아버지가 백 목사님의 직계로서 고신 한 중심의 교회에 장로 1순위가 되었는데 그 때 장로는 지금의 장로와 차원이 다르다. 실제 신앙도 대단했다. 그리고 국가 지원이 시작 되던 1959년에 아버지는 고신의 거창읍교회에서 백파라 하여 제명을 당했고 아버지는 오늘의 창동교회를 거창 제일 중심에 있던 가정 집 마당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훗날 공회의 거창 전체 교회의 중심이 되고, 거창군 전체에서 제일 큰 교회로 발전하는 창동교회의 기둥으로서 1960년대 초반에 완전히 술독에 빠지고 폐인이 되었다.

그냥 조용히 집에나 있으면 표시는 나지 않겠는데 온 거창 시내를 만취된 상태로 쓸고 다녔다. 거창군의 전체 고신 인물들은 '봐라, 백파 교인 꼴!'이라고 조롱이 되었고, 불신 사회도 모두 참담하게 된 상태를 다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위치, 활동, 신앙, 사회적 모든 면이 그러했다.

저녁이 되면 술에 만취한 상태로 소를 타고 시내를 다녔다.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은 70년대 거창 시내에서는 아직도 가끔 볼 수 있었다. 소를 타는 사람은 아예 없었다. 아버지는 만취한 상태에서 소를 타고 시내 전부를 밑으로 깔아 보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경찰서 앞에 가서 '네 이놈들! 6.25 때 보니까 다 도망 갔지? 그 때 보니 모두 공산당 앞잡이였지' 이런 저런 고성을 질렀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만일 신앙 생활을 철저하게 하지 않으면 내가 바로 저렇게 될 그림으로 봤다. 현재 나의 가족은 두 편으로 아주 갈라 졌다. 서로 상대방을 향해 '죽기 전에 아버지가 술에 취해 소를 타고 돌아 다녔다. 지금 네가 그런 모습이다!' 이렇게 그 때를 회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나를 반대하는 가족들에게서 그런 말을 직접 들었다. 집회를 마치고 모든 교인들이 차를 타려고 모인 집회 장소의 한 가운데에서 여러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직접. 나는 그 말을 모역이거나 비판으로 듣지 않았다. 입장이 달라 지니 서로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진짐일 것이다. 그러지 말기를. 중요한 것은 그런 진심과 우려가 아니다. 실제 언행이 둘 중에 하나는 지금 그럴 것이다. 나는 당연히 상대를 그렇게 본다. 그렇다면 상대는 분명히 나를 그렇게 봤을 것이다.

또 하나 기가 막힌 일화가 있다. 아직까지 거창에는 현대식 가게가 없고 5일마다 열리는 장이 한창일 때였다. 거창군의 모든 사람과 이웃 함양군 합천군은 물론 장수군에서도 장사꾼들이 몰려 온다. 거창읍 한복판은 5일마다 한번씩 거대한 행사가 치러진다. 요즘으로 말하면 엑스포나 스포츠 행사사에 입구 광장쯤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버지는 시장 한복판의 벌여 놓은 술 장사 평상 위에 앉아서 술을 앞에 놓고 기도를 하고 마셨다. 아버지의 이런 점 때문에 나는 아버지가 기본구원을 받고 천국에 갔다는 것은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술을 놓고 기도를 하면 간절히 기도를 한다. 한 번은 고신측인 거창읍교회 집사님이 지나 가다 보고 '이 집사님, 이 것이 무슨 일입니까?'라고 참담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성경 어디에 술 마시지 말라는 말이 있느냐, 술에 취하지 말라 했지! 마구 말을 쏟아 부으니 그 분이 할 말이 없어 그냥 자리를 떴다. 과거의 그 신앙까지 전부 자신의 죄를 짓는데 악용하고 있었다.

우리가 일단 노선과 소속이 한 번 잘못 되면 그 때는 지난 날에 줏어 들은 모든 진리의 지식까지 죄를 짓는데 사용이 된다. 그래서 공회 사람들은 자기의 소속과 노선을 얼마나 살펴야 하는지 모른다. 나는 최근에 수백 건의 고소를 당하면서도 정작 나를 직접 고소하는 이들보다 중간에서 발을 쏘옥 빼면서 소속과 노선을 애매하게 가지는 이들과 많은 대화를 했다. 이들의 논리가 더욱 무섭다. 교회 위에 연구소가 있으면 교회론 교리에 틀렸다고 한다. 이 주장의 잘못을 아시는 분이 계실까? 불가견의 무형 교회론의 논리를 살짝 끌어다가 가견교회라는 우리가 출석하는 교회에 갑옷을 입혔다. 이 죄가 어떤 죄인지 안다면 입에 담으라 해도 담지 않았을 것이다. 더해 지는 논리 중에 심지어 연구소와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는 연구소 자료를 보니 백 목사님 생전부터 설교록 출간권이 부산연구소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가 평생 설교한 것은 장물이니 그 장물을 되돌릴 수 있을까? 말을 하면 말인 줄 안다. 그리고 일단 땜방 하듯이 여기 저기 발라 붙인다. 1cm 구멍을 메우려고 멀쩡한 곳을 오려다 붙이니 1cm 구멍은 누더기가 되더라도 막기는 했으나 떼온 곳은 2cm 구멍이 되었다. 반복을 할수록 제곱비례로 누더기가 된다. 이렇게 옷 전체를 다 돌고 나니까 이제는 갖다 붙일 수가 없게 된 마지막에 나온 논리다.



(백 목사님에 대한 악한 말)
술에 취한 상태에서 만일 내가 교회를 갔다 늦게 왔거나, 주일 문제가 생기거나, 술을 사오라는데 죄가 된다면서 거부를 하는 등 신앙 문제만 나왔다 하면 온 가족을 향해 '백 목사!' 이름을 걸고 저주와 증오를 퍼부었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욕을 할 수 있을까, 저런 표현을 담을 수 있을까... 해도 해도 해도 너무 했다. 1966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봇물이 터졌다. 알고 보니 몇 년 전부터 시작이 되었고 그 때는 그래도 양심 때문에 표시를 덜 냈지만 이제는 만인에게 펼쳐 놓았다. 어머니에게 왜 그런지 물었다. 1970년대 때로 기억한다. '부산 목사님이 양혜원에 손을 떼라'고 했다며 저렇게 욕을 하는 것이다. '손을 떼라는 말 때문에 저렇게까지 하는지요?' '아니다, 아버지가 글도 모르고 양혜원의 운영을 전혀 할 줄 모르니 양혜원교회에 보내는 교역자를 양혜원 총무로 앉히고 목사님이 양혜원 원장을 좀 도와 주라'고 했는데 원장이 직접 운영하기 어려울 상황이 되자 손을 떼라 했고 말을 듣지 않으니 교역자에게 교회와 양혜원 운영을 전적 분리 시키게 했고 그 때부터 교역자들이 도와 주지 않으니 그렇게 욕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확실히 단절을 하던 때의 교역자가 이재순 목사님이다. 술에 만취가 된 상태로만 살다가 1978년에 아버지는 별세한다. 신앙의 탈선은 60년대 초반이고 완전히 폐인이 된 것은 66년이다. 66세에 별세할 때까지 10년 이상의 세월을 통해 아버지는 거창 지방의 총공회 신앙과 백 목사님의 이름에 오명을 씌웠다. 고신까지 모든 교회를 포함한 피해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1978년 2월에 입대했고 훈련소 시절에 아버지 장례가 있었으며 훈련소가 끝난 후에야 별세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관조차 제대로 운반되지 못하는 사태가 생겼다 한다. 거장읍의 한 중심에서 거행 된 장례식이라 대단히 큰 행사였다 한다. 별세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집에 남아 있던 가족들이 1년 365일을 겪었을 매일 밤을 생각하면 그 가족들에게 이제야 짐을 벗겨 주셨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머니의 고난이 끝 난 것이 먼저였지 아버지가 가게 된 사실을 안타까워 할 여지는 아예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장례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귀한 종을 그렇게 악평했으니 그 값을 피하지는 못했다면서 장례와 양혜원 관련 여러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나의 평생, 나의 밑바탕에 깔린 색깔)
나는 아버지 때문에, 내가 아무리 부족해도 하나님이 어떤 위치 어떤 사명 어떤 신앙을 주실지 모른다는 막연한 가능성은 늘 가지고 있었다. 나를 보면 참 보잘 것이 없으나 내가 아버지보다는 모든 면에서 좀 낫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글도 몰랐다. 부지런한 것 외에는 없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평생을 통해 그렇게 성공을 했고 그리고 그렇게 형편없이 된 것을 보면서 백 목사님의 말씀 한 마디를 순종한 결과와 거역한 결과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나는 백 목사님의 판단과 지도가 있을 때 내가 아는 대로는 반대도 하고 거부도 하고 또 다른 말씀도 드렸지만, 목사님의 결정이 단정적으로 나오면 나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나는 이런 나의 경험을 백 목사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이들에게서 많이 듣는다. 1989년 1월로 기억 되는 어느 날, 백 목사님의 큰 아들을 모실 기회가 많을 때인데 '이 선생! 자네는 나처럼 아버님 말씀이라 해도 무조건 들어서는 안 되네. 내가 50년대 하바드 법대 박사과정에 입학허가를 받았을 때 한국 법조계가 이제 큰 인물 난다고 들떴는데 아버님이 가면 안 된다고 한 마디 하는 바람에 못 갔네. 그 때는 아버님 말을 듣지 않으면 비행기가 태평양 상공에서 추락한다고 믿을 때네'

나는 그 회고를 들을 때 나의 아버지의 생애를 생각했다.
백 목사님과 정말 가깝게 접해 본 사람들에게서 흔히들 듣는 체험담이다.
백 목사님의 위대한 점은 '성경' '교리' '목회' '교인의 생활 지도' 등 참으로 많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를 붙들고 그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그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되 특히 그 분의 지도에 순종과 거역에 대한 결과는 정말 아찔하다.



나는 이 글을 우리 모두를 위해 적는다.
나는 대부분의 공회 교인들처럼, 특히 대구공회 교인들 젊은층들의 입장처럼 백 목사님의 세로 성경을 사용하라거나 공회 찬송가를 사용하라거나 '총공회' 간판을 달라거나 남녀 분리 좌석 등등 수도 없는 조처가 갑갑했고 마음에 참으로 들지 않았다. 어떤 내용은 목사님께 수차 건의를 드렸고 어떤 내용은 입밖에 내지를 않았다. 그런데 그 때마다 목사님의 마음이 최종적으로 바뀌지 않을 것으로 판단이 되고 나면 돌아 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일단 '반대측'에 서지는 않는다. 그 어떤 뒷날의 결과를 보면 알겠지 하고 과제로 남겨 둔다. 그리고 1989년 백 목사님이 돌아 가셨고 나는 그 분 생전에 그 분이 조처한 것을 모두 다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런데 나는 갈수록 그 분의 말이 정말 구구절절이 지혜였고 옳았고 필수불가결한 지도였다고 판단을 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믿지는 못했지만 부활을 했다는 말을 들은 뒤에라도 부활을 믿었다면 얼마나 좋은가?
도마는 부활했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못하다가 손가락으로 손자국에 넣어 보고 팔뚝으로 옆구리를 넣어 보겠다고 설쳤다.
나는 도마류의 신앙일 듯하다. 백 목사님 가신 후에 세월을 통해 X인지 된장인지 일일이 찍어 보고 때로는 혀에 대고 맛을 봤다. 그리고 1994년경 백영희 전기를 위해 백 목사님과 그 가족의 내력과 그 분의 평생과 전부를 샅샅이 다 살피고 나서야 비로소 귀납적으로 체험적으로 실험 결과 입증적으로 나는 결론을 냈다. 백영희 신앙 노선은 진짜다. 내 생애를 다 바쳐 배우려고 노력해도 부족하다. 나의 여생을 다 바쳐 그 길에서 걸어 가는 것이 맞다. 바로 이런 판단 때문에 법원에서 막아 설 때까지 나는 그 분에 관련 된 자료는 내가 가진 대로 아는 대로 무제한 무조건 공개했다. 이제는 그런 의리도 그런 노력도 그런 수고도 넘치게 했으니 이제는 내가 따로 가야 할 오늘과 이후를 준비하라 하는 결정을 보고 있다. 이제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건방지니 어떻니 말을 해도 나는 속으로 그럴 것이다. '너는 고소를 당할까 봐 고소도 당하기 전에 미리 죽어 버렸지? 너는 미리 고소자에게 빌붙어서 그 쪽을 도왔지? 너는 고소조차 없을 때 백영희 자료를 혼자 가지기 위해 감췄지? 너는 전하는 노력을 한 적이 없지? 나는 혼자 30년을 필사적으로 했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미 전한 것으로 충분하니 전하고 배끼고 단순 반복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가라는 뜻을 확인했다. 인간이 볼 때 질 수가 없고 인간이 볼 때 이 이상으로 완벽한 조건을 다 갖춘 상태에서 저작권이 막혔다면 이 것은 고소인의 실력도 아니고 그 어떤 무슨 외부 요인으로 돌릴 일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가 나에게 방향을 주셨다. 그래서 이제 앞으로 기회를 주시는 대로 백 목사님이 1970년대부터 돌아 가실 때까지 그토록 절규했고 내게 목이 타도록 직접 부탁한 사명. 백영희 신앙의 다음을 살펴 나간다. 얼마나 성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총공회 200명 목회자 중에 내가 중간은 갈 터이니 50점짜리는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 50점을 내가 해낸다면 나머지는 50점은 주님이 채워서 100점으로 결말을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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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WCC 동성 ... 귀신의 복병전, 논점 돌리기
담당 | 2020.01.05 | 추천 0 | 조회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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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6
성탄행사를 폐지할 시점 - 1980년 8월의 주교 야외예배 폐지 (2)
담당 | 2019.12.25 | 추천 0 | 조회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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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1
감정이 가진 반발심, 북조 이스라엘부터 오늘까지 (1)
담당 | 2019.12.15 | 추천 0 | 조회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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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2
C. 사후 30년을 돌아 보며 - 연구소의 역사적 고찰
서기 | 2019.11.12 | 추천 0 | 조회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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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6
(23) 교회 경영론으로 본 백영희 (거창고 전영창과 비교하며) - 2
서기 | 2019.11.14 | 추천 0 | 조회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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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6
(24) 사후 30년을 돌아 보며 - 연구소의 역사적 고찰
서기 | 2019.11.17 | 추천 0 | 조회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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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7
(25) 전교조가 그린 1964년의 꿈, 그 실패와 실체
서ㅣ | 2019.11.22 | 추천 0 | 조회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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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8
(26) 타 교단과 같았던 시절, 총공회의 성장 과정
서기 | 2019.11.27 | 추천 0 | 조회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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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3
(27) 전국의 공회가 한 가족으로
담당 | 2019.12.10 | 추천 0 | 조회 250
담당 2019.12.10 0 250
2677
(28) 교회를 방문하는 타 교회 목회자와 교인들
담당 | 2019.12.22 | 추천 0 | 조회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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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3
(29) 개별 교회의 사경회, 공회의 인재를 실제 길러 내던 기회 (계속2)
담당 | 2019.12.31 | 추천 0 | 조회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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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1
(30) 서부교회 4층, 강하기만 하다 실패
담당 | 2020.01.03 | 추천 0 | 조회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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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4
(31) 내게 각인 시킨 목회자의 고난
담당 | 2020.01.09 | 추천 0 | 조회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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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3
(32) 나는 적어도 의리는 있다. 나는 신앙의 의리를 본 적이 없다.
담당 | 2020.01.11 | 추천 0 | 조회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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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5
(33) 공회의 굉장한 인재들, 그 어릴 때와 훗날
담당 | 2020.01.12 | 추천 0 | 조회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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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7
대법원 최종 판결 (1)
이영인 | 2019.10.18 | 추천 0 | 조회 572
이영인 2019.10.18 0 572
2452
'이 말씀 전하다 이 말씀 때문에 죽는 것' - 종교인의 상식이 아닐까?
부공3 | 2019.10.27 | 추천 0 | 조회 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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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1
연구소 정체성에 대한 참담한 시비 (6)
담당 | 2019.11.02 | 추천 0 | 조회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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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
화산, 지진, 전쟁이라는 파란이 주는 선물
서기 | 2019.11.09 | 추천 0 | 조회 270
서기 2019.11.09 0 270
1355
B. 사후 30년을 돌아 보며 - 연구소의 역사적 고찰
서기 | 2019.09.29 | 추천 0 | 조회 330
서기 2019.09.29 0 330
1356
(12) 전원일치의 악용 - 탈선이란 제도로는 막지 못한다. (3)
서기 | 2019.09.29 | 추천 0 | 조회 506
서기 2019.09.29 0 506
1393
(13) 나의 요게벳 - 김명자 나인숙을 평생 그린다. (1)
서기 | 2019.10.01 | 추천 0 | 조회 491
서기 2019.10.01 0 491
1431
(14) 세상을 참 몰랐다. 지금은 세상을 안다. - 공회와 교인의 여러 현안을 중심으로 (1)
서기 | 2019.10.06 | 추천 0 | 조회 421
서기 2019.10.06 0 421
1470
(15) 국가에 반영된 공회 의견들 - 공회와 세상 (보충) (4)
서기 | 2019.10.09 | 추천 0 | 조회 1093
서기 2019.10.09 0 1093
1493
(16) 전국 최고, 최초, 최대를 휩쓴 기록들
서기 | 2019.10.13 | 추천 0 | 조회 355
서기 2019.10.13 0 355
2441
(17) 하늘에서 떨어 진 횡재, 백 목사님께 순종하면 그러했다.
서기 | 2019.10.20 | 추천 0 | 조회 534
서기 2019.10.20 0 534
2449
(18) 극단적 탈선과 가족의 고난, 백 목사님께 거역하면 그러했다.
서기 | 2019.10.24 | 추천 0 | 조회 396
서기 2019.10.24 0 396
2451
(19) 아버지께 배운 '경제 내핍'과 '백영희 자녀 교육'
서기 | 2019.10.26 | 추천 0 | 조회 363
서기 2019.10.26 0 363
2482
(20) 축소 시켜 허락하신 '호사스런 경험'
서기 | 2019.11.03 | 추천 0 | 조회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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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8
(21) 백영희를 소개한 분들, 보물을 소쿠리에 끌어 담다. - 보충
서기 | 2019.11.06 | 추천 0 | 조회 355
서기 2019.11.06 0 355
2512
(22) 교회 경영론으로 본 백영희 (거창고 전영창과 비교하며) - 1
서기 | 2019.11.10 | 추천 0 | 조회 265
서기 2019.11.10 0 265
1196
A. 사후 30년을 돌아 보며 - 연구소의 역사적 고찰
서기 | 2019.09.07 | 추천 0 | 조회 440
서기 2019.09.07 0 440
1197
(1) 이 노선을 위해 특별히 예비 된 우리
서기 | 2019.09.07 | 추천 0 | 조회 499
서기 2019.09.07 0 499
1199
(2) 한 사람의 사례로, 각자 자기를 살펴 보셨으면
서기 | 2019.09.08 | 추천 0 | 조회 533
서기 2019.09.08 0 533
1231
(3) 백영희의 학습 세계, 나의 과거를 돌아 본다. (3)
서기 | 2019.09.11 | 추천 0 | 조회 531
서기 2019.09.11 0 531
1236
(4) 백영희 설교의 자료화, 1948년의 의미 (1)
서기 | 2019.09.14 | 추천 0 | 조회 440
서기 2019.09.14 0 440
1237
(5) 공회의 '선교관'
서기 | 2019.09.15 | 추천 0 | 조회 416
서기 2019.09.15 0 416
1261
(6) 모이면 썩고 흩어지면 사는, 진리의 세계
서기 | 2019.09.17 | 추천 0 | 조회 362
서기 2019.09.17 0 362
1306
(7) 우리는 못났다. 그러나 자라 가면 된다. (1)
서기 | 2019.09.20 | 추천 0 | 조회 433
서기 2019.09.20 0 433
1313
(8) 백영희 가정의 교육 - 이 노선 우리에게 주신 보석들
서기 | 2019.09.22 | 추천 0 | 조회 322
서기 2019.09.22 0 322
1314
(9) 공회의 결혼 이야기 - 20세에 결혼하고 30세에 아이 4명
서기 | 2019.09.22 | 추천 0 | 조회 445
서기 2019.09.22 0 445
1344
(10) 나의 총공회 1등 기록들 - 혼자 달리니 민망했다.
서기 | 2019.09.24 | 추천 0 | 조회 400
서기 2019.09.24 0 400
1349
(11) 공회의 감탄할 기록들 – 모두가 가장 평범한 것에서
서기 | 2019.09.27 | 추천 0 | 조회 452
서기 2019.09.27 0 452
1192
변치 않는 사명, 변하는 사명
담당 | 2019.09.07 | 추천 0 | 조회 184
담당 2019.09.07 0 184
1193
다윗의 전쟁, 그 모든 향방은 '성전' 건축
담당 | 2019.09.07 | 추천 0 | 조회 188
담당 2019.09.07 0 188
1147
다윗의 성전 준비로 본 연구소의 사명
담당 | 2019.08.30 | 추천 0 | 조회 284
담당 2019.08.30 0 284
1194
훌륭한 지도자의 당대와 후대
담당 | 2019.09.07 | 추천 0 | 조회 231
담당 2019.09.07 0 231
1146
압살롬과 시므이 (1)
담당 | 2019.08.30 | 추천 0 | 조회 266
담당 2019.08.30 0 266
1276
세상의 어느 장관, 공회의 어느 장관 (1)
담당 | 2019.09.18 | 추천 0 | 조회 324
담당 2019.09.18 0 324
1131
'시체를 도적질하여 갔다'고 퍼뜨리니 오늘까지..
담당 | 2019.08.24 | 추천 0 | 조회 307
담당 2019.08.24 0 307
1125
이론적 양심가들의 불장난과 시대의 균형추
담당 | 2019.08.21 | 추천 0 | 조회 374
담당 2019.08.21 0 374
1133
최악의 좌익이, 정상적 우익으로 - 안병직으로 본 공회 (1)
회원 | 2019.08.25 | 추천 0 | 조회 381
회원 2019.08.25 0 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