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15) 국가에 반영된 공회 의견들 - 공회와 세상 (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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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작성일
2019.10.09
(주일 시험의 평일 전환)
주일 시험을 평일로 바꾸도록 국가인권위원회를 방문하고 전국의 교육 당국 대표와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교육부와 16개 시도교육청의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인 곳에서 나는 제안을 했다. 시험 중에 검정고시는 경제나 사회 형편이 가장 곤란한 사람들의 시험이니 일요 시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교육 당국의 입장이고 언론이 늘 기독교에 특혜적 조처라며 종교 비판을 곁들이고 있었다. 당시 검정고시는 4월에는 주일 시험이고 8월은 방학이라며 평일 시험이 원칙이었다.

나와 관련 된 교인들은 거의 다 검정고시다. 1년 2회의 기회라야 중고등학교를 1년에 마칠 수 있다. 김영삼 정권 때 교계가 장로님을 상대로 호소를 해서 일시 4월 시험을 평일로 전환했으나 좌파와 불신자들이 언론을 통해 기독교를 위해 가장 어려운 형편의 수험생들에게 고통을 가한다고 하여 다시 주일 시험이 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였지만 80% 이상이 일요 시험을 원한다는 교육 당국과 언론의 주장과 또 정권 초기에 기독교 중심의 정책 때문에 궁지에 몰리게 되자 일요 시험을 쉽게 바꾸지 못하고 있었다.

(교육 당국과 대화)
나는 좌파가 장악하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 담당자에게 교육부와 전국 16개 교육청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 문제를 의논하도록 요구를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검정고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정부가 제시한 기준에 의하면 정부가 의견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내가 지도하는 학생들의 현황을 약간 설명하자 인권위원회는 자리를 주선해 줬다. 나는 정부의 교육 당국자 전체에게 전수 조사를 제안했다. 나는 신앙인의 입장을 떠나서 '일요 시험'은 국민이 원치 않는 시대라고 했다. 검정고시에 관한 한 전권을 가진 전국 17명의 대표들은 일부 기독교인의 억지 때문에 정권에 따라 일시 일요 시험이 바뀐 적은 있지만 이제 국민의 편의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으니 일요 시험은 당연하다는 것이고 8월 시험까지 일요 시험을 생각하고 있다면서 자신감을 내 보였다. 실제로는 협박이었다. 이제 대통령이 뭐라 해도 공무원들이 여론을 이유로 버틸 수 있으니 할 테면 해 보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나는 기독교의 입장이 소수지만 봐 달라는 것이 아니라 전수조사를 통해 많은 쪽이 원하는 대로 하자고 했으니 교육 당국으로서는 자신 만만하여 화색이 돌았다. 기독교는 많이 잡아야 인구의 20%다. 그런데 일요 시험을 거부할 정도의 신앙인은 공회 교인 외에는 실제로 없다. 고신이나 재건 교단까지도 인생에 중요한 시험은 대개 보는 편이다. 검정고시를 치는 사람은 학교를 다니지 않는 불량 청소년이 일부 있고 대부분은 경제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한 성인들이다. 이들은 직업이나 생활 형편이 다 어렵다. 당시는 토요일이 휴무가 아니었다. 따라서 일요일만 공휴일이니 다른 시험과 달리 검정고시만은 일요일 시험이 당연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과제를 일단 하나 부탁한다. - 10월 9일 등재시)
중학교 고등학교를 어려워서 다니지 못한 사람이 사회 생활을 하는 과정에 학벌이 필요해서 검정고시를 친다. 이들의 가정이나 직업 환경은 웬만한 주일이나 8.15와 같은 일반 국가 공휴일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최저 수준이다. 그런데 나는 2000년경을 기준으로 당시에는 주인이 근로자를 마음대로 자를 수 있었고 또 먹고 살기에도 어려운 영세 자영업자들이 검정고시에 응하는데 그런 사람들만을 상대로 전체에게 직접 물어 보고 결과에 승복하자고 제안을 했다. 어떤 면을 계산하고 자신 있게 이렇게 제안을 했을까?

댓글에 답을 달아 주시면 좋겠다.

일단 의견과 상관 없이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다. 이 글의 조회수가 100회를 넘으면 제목에 표시를 하고 이 부분을 보충하고 싶다. 이 것은 교육 전문가나 공직자가 아니라 그냥 공회처럼 초등학교 나온 사람이라도 잠깐 생각하면 알 수 있는 문제다. 공회는 '일반 보편성'의 신앙 노선을 그렇게 강조한다. 특별한 사람을 우리는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가장 일반적이며 누구든지 모두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과제를 다시 보충한다. - 10월 11일)
공회는 수준이 낮다. 그래서 낮은 수준을 잘 살핀다. 이 것이 공회의 구조적 단점이면서 장점이다.
검정고시가 필요한 수험생들은 젊거나 나이가 들었거나 평생의 생활이 대부분 저소득에 열악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배움의 기회를 놓치고도 나이 들어서 검정고시를 통해 졸업장을 챙길 여유는 1970년대부터 실제 시작을 한다. 이 때는 한 달에 2회 일요일은 휴일이고 2주 일요일은 출근을 했다. 시험을 치는 사람도 적었고 또 시험을 치기 위해 날자를 맞추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80년대가 되자 어떤 직장도 최소한 일요일은 모두 휴일이었다. 물론 눈치를 봐야 했고 더 좋은 일당을 포기해야 했지만 훨씬 나아 졌다. 평일의 결근은 생각하지 못했고 자영업은 생계를 위해 아는 사람을 대체해서 겨우 틈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1987년, 소위 민주화로 온 사회는 폭발을 하면서 노동환경은 급격하게 달라 졌다. 1990년대부터 노동자들은 일요일을 데모하는 날로 삼든지 아니면 가족이나 동창이나 각종 모임을 갖는 날로 만들었다. 시골 동네들도 단체 관광에 나섰다. 일요일은 온 나라의 모든 사람이 놀고 먹는 날이 되었다.

이 과정에 가족이나 동네나 직장이나 일요일은 모두에게 실제 공휴일이 되자 '함께 만나기로' 사전에 가족의 모임, 동창의 모임, 동네의 놀러 가는 날들이 사전에 예약 문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매달 첫 일요일에 만나자, 매달 마지막 일요일에 등산을 가자, 격월로 직장이 체육대회를 하자... 계모임이든 직장이든 심지어 근로자 격려를 위해 온갖 행사들이 사전에 예약을 할 때 일요일은 가장 쉽게 편하게 정할 수 있는 고정 휴일이었다. 과거 휴일은 일하다가 쉬는 '노는 날'이었으나 90년대부터는 평소 돈을 벌던 사람들이 '각종 행사'를 하는 여가일이 되었다.

그런데 검정고시는 해방 이후부터 있어 온 제도이고, 일요일에 시험을 친다는 고정 관념에, 70년대의 근무 환경을 거치면서 뒷늦게 학벌이 필요한 사회가 되면서도 검정고시생들은 몇 명이든 상관없이 전부가 개인별로 응시를 하다 보니 무슨 이권 단체로 목소리를 따로 내지 않는 구조인데다 공무원들은 과거 해 오던 사업계획서를 고치는 것을 극히 꺼리고 또 검정고시를 모르다 보니까 어려운 사람들이 일요일 외에 시간을 내겠느냐는 인식이 90년대에도 그리고 2000년대까지 계속 이어 지고 있었다. 공회는 60년대부터 골목을 다니며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을 많이 데려 왔다. 장년반의 구조도 그렇다. 그 과정에 이 나라 어느 곳에 있든 먹고 살기 어려운 가정들은 전부가 공회 주일학교의 매주 심방 대상이었고 매주 토요일과 주일 2차례를 아이들 때문에 각 가정의 안방까지 일일이 들어 가다 보니까 그들의 생활 환경, 특별히 일요일의 일정을 잘 안다. 70년대에 주일학교를 해 보면 부모들이 격주로 일을 나가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려 오기 쉬웠다. 격주로 쉬는 일요일에는 부모들이 늦잠을 자거나 목욕탕을 데리고 나가기 때문에 애를 먹었다. 90년대가 되자 일요일이 되면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 놀러 나가는 일들이 많아 지면서 아이들 전도와 교회 출석에 애를 먹었다.

그래서 2000년경에는 기독교를 위해서도 아니고, 또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조차 주일 성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온 나라는 전부 일요일을 놀고 먹고 돌아 다니는 날들이 되어 버렸고 이 일요일에 시험이 들어 가 버리면 사전에 계획된 약속 모임에도 손해가 되지만, 주5일 근무제가 시작되기 전에 근로자들이 국가시험 등의 뚜렷한 핑계거리가 있으면 사업주가 평일에 출근을 하지 않아도 불이익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근로자들은 평일에 치료나 불가피한 여러 사유를 제시하면서 오히려 놀 핑계를 댈 상황인데 검정고시라는 국가시험 중에서도 가장 필수적인 시험 때문에 빠지게 된다면 이를 막을 환경이 아니었다. 따라서 전수조사를 하게 되면 최소한 반반은 된다고 생각했고, 제대로 설명을 잘 하면 확실히 많을 것이나 전국 검정고시 원서 접수처에 모든 응시자를 상대로 조사를 하려면 나 혼자의 힘으로 홍보나 설명할 기회가 없다. 그래서 그냥 설문지만 간단히 제시하는 상황에서도 전수조사 자체에는 자신이 있었다.

검정고시는 5월에 3만명 정도 8월에는 5만명 정도가 응시한다. 8월로 기억 되는 시험을 앞두고 7월에 접수를 받는 전국의 시도 교육청 검정고시 응시창구는 몇만 명이 표시한 결과를 집계했다. 일요일 시험을 원치 않는 학생이 60%였다. 결과는 아주 달랐다. 다시 인권위원회에서 16개 시도교육청 대표와 교육부 대표가 모였다. 할 말이 있겠는가? 그래도 그들은 공무원이다. 직업 중에 구조적으로 참 불행한 이들이다. 이렇게 결과가 나왔지만 그들은 업무를 대개 1년 반 정도만 맡고 부서를 옮긴다.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알고 보니 서울시교육청이 내적으로 중심 역할을 했는데 고위 책임자가 반 기독교 정서였다. 이 인물이 언론에 일요 시험의 폐단을 흘렸다. 통계가 이렇게 나오고 약속이 이렇게 된 상태인데도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조금 더 미루면 정권 말기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자료를 확보한 다음 바로 통합 교단, 합동 교단, 고신 교단 등의 국내 최고 보수를 자처하고 또 교단적으로 일요 시험 폐지를 운동하던 교단 책임자들에게 자료를 넘겼다. 그들은 정치권과 청와대에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매번 국민 대다수를 거스릴 수 없다는 실무자 논리에 막혔던 이들이다. 나는 이들이 최소한 '진심'은 가졌지 않나 생각했다. 막상 일일이 연락을 해 보자 딴 마음들이었다. 이 반가운 자료를 환영한 교단은 하나도 없었다. 이 내용은 다른 글에서 다시 적고 싶다. 내가 다른 교단을 교회로 보지 않는 것은 시골에만 있다 보니 무식하고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핵심적인 문제로 한 번씩 전체의 내면을 접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타 교단은 교회의 이름으로 사회 활동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그들에게 이 자료를 넘기면 서로 좋을 줄로 생각했다 그런데 정반대였다. 나는 주일 시험 때문에 꼭 어려움을 겪는 나 주변의 몇 사람에게 이제 이 자료를 가지고 차분히 중앙정부는 물론 청와대 실무자들을 설득해 볼 수 있는 방법만 알려 주고 손을 뗐다. 그리고 얼마 후 청와대에서 '모든 시험은 원칙적으로 주일에 치지 않도록' 공문이 떨어 졌다. (10.11. 추가한 부분)



(일단)
교회의 사회적 활동에 대하여 잠깐 미리 적는다. 오해들이 많아서 그렇다.
공회는 교회와 국가는 별도라는 교리가 있다. 이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아예 없다고 단정하고 싶다. 지난 역사를 통해 그렇다. 고소금지원칙과도 직접 걸려 있다. 교회는 신앙 문제를 세상에게 판단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동시에 교회가 국가에 간섭하지 않아야 하고 국가 역시 교회 내부를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 고소금지다. 그런데 별 일이 없으면 모두가 고소금지원칙을 주창하다 일이 닥치면 모조리 고소금지원칙을 무시해 버린다. 공회들도 그렇다는 이런 통계와 현실 때문에 '교회와 국가는 분리'라는 공회 원칙을 아는 이들이 공회 내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공회 외부에서 찾는 것은 더욱 어려울 듯하다.

 

 

(백영희와 정부 정책)
공회는 역사적으로 백영희를 통해 국가나 사회에 대하여 행동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는 교회의 환경이기 때문에 공회는 국가와 사회를 늘 예리하게 통찰하고 평가했다. 설교록에는 정권과 세상 문제에 관계 된 내용이 무수히 많다. 목사님이 교회 재산을 운용하거나 교인의 재산을 지도해 주는 과정에 가등기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제도화에 직접 역할을 했다. 새마을 운동은 적극 예찬을 했으나 정작 목사를 새마을 지도자로 교육하겠다고 부를 때는 참여를 거부하여 미움을 샀고, 군대의 군목 제도는 참여도 거부했지만 경찰의 경목 제도는 신랄하게 문제점을 비판했다. 해방 후 1948년의 정부 수립 때는 국기배례를 목숨 걸고 교회적으로 거부하여 큰 위기를 겼었으나 정부가 이해를 하면서 공회의 의견에 따라 '국기 배례'를 '국기 주목'으로 제도까지 바꿨다. 그 대신 노인 정책은 목사님이 평생 극찬했고 정부는 가정의례준칙을 통해 서부교회의 결혼과 장례 제도를 적극 참고하고 정책에 반영했다. 이런 면을 보면서 백 목사님은 박정희 정권의 훌륭한 장점 몇 가지 중에 하나를 '정보 정치'로 들었다.

 

박정희 정권은 교회 내에 정보원을 보내어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이 것을 목사님은 박정권의 정보정치라고 했다. 서부교회 강단에서 국가나 사회에 대해 평가나 비판이나 의견이 나오면 바로 청와대에서 이를 반영하는 일들이 흔했고 이를 통해 목사님은 박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과는 달리 정보 파악과 수집에 주력한다고 봤다. 이를 정보정치라고 했고 목사님은 지혜 있다고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민심과 사회 전체에 대한 정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잘 활용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당시는 물론 요즘 이런 표현을 했다가는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다 할 것이나 바로 이런 점이 백영희 신앙 노선의 위대한 점이다.

6.25 전쟁을 막 끝낸 남한 사회 전체가 유엔군의 철수를 반대할 때 교계가 기독교 이름으로 유엔군 철수를 반대하자 일제 때 신사참배보다 더 큰 죄라며 반대 운동을 비판했다. 남한의 사회는 반대할 수 있고 믿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교회 이름으로 그런 반대는 죄라는 것이었다. 당시 고신 교파 내에 있었기 때문에 오해를 피했지 만일 지금처럼 별도 교단으로 있었다면 방첩대에 잡혀 가서 고문 받고 죽을 행동이었다.

(나와 검정고시의 경우)
검정고시 외에도 비슷한 사례는 많았다. 다만 외부의 오해 소지 때문에 밖으로 표시 낸 것은 거의 없다. 일단 검정고시를 살펴 본다. 지금은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몇 시험 외에는 거의 다 평일에 시험을 본다. 주일 시험을 폐지하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교계가 장로인 두 명의 대통령을 움직였다고 알고 있다. 일부는 그렇다. 그러나 평일로 움직이기 어려운 시험은 그렇지 않았다.

공회의 모든 목회자 중에서 중간쯤 겨우 가는 내가 했던 일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다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나는 이런 일을 통해 우리 공회의 귀한 점인, 가장 평범한 사람이 세상의 가장 어려운 것도 할 수 있는 하나의 사례로 제시한다. 내가 하는데 우리 공회에 누가 못하겠는가? 목회자는 자기 맡은 교인을 살핀다. 어디까지 살피는가? 백 목사님은 목회 처음에 약방도 했다. 그러나 곧 치워 버렸다. 전성수 어린 주일학생이 급사할 위기가 되자 부모 대신 그 아이를 업고 60리 길 병원으로 데려 갔다.

백 목사님은 70년대 초반에 서영준 목사님이 사법고시를 칠 수 있도록 주일에만 보던 시험을 한 번 평일로 옮기게 했다. 나는 국가 시험 중에 교인들에게 꼭 필요한 검정고시나 몇 가지 시험을 그렇게 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 교회가 할 수 있는 선이 있고 멈춰야 하는 단계를 소개한다. 목사님이 했다고 무한정 해야 한다는 것도 지나치고, 목사님이 그렇게 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하여 무조건 하지 말라 한다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쳤다고 본다.

결과는 교인 20%에 불신자가 80%인데 주일 시험을 거부한 사람이 60%였다. 이 자료가 뒷받침 된 후에 청와대는 정부 각 부처에 여전히 주일 시험으로 진행 되는 경우를 다시 살피도록 했다. 이후 속속 주일 시험에서 벗어 나게 되었다. 이 자료와 청와대의 지시사항까지 합하면 거의 모든 시험을 평일로 바꿀 수 있었으나 내가 한 일은 전수 조사까지만이었다.

(국가에 대한 공회의 과거)
말이 나온 김에 국가와 공회의 관계를 몇 가지 더 살펴 본다.

* 인물에 대한 평가
백영희는 이승만 박정희 두 인물에 대해 평생 극찬했다. 이 대통령에 대해서는 독재 마지막에 주변 사람에게 속은 것과 교회를 당선에 이용한 것만 비판한 정도고, 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이공계를 독려하다 인문 사회학을 등한히 한 것을 아쉬워 한 정도이다. 백영희는 이들을 국부라고 부른다. 배고파 죽을 나라를 훌륭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교계에서는 두 사람을 지지한다 쳐도 그들의 독재는 비판을 했으나 목사님은 그들의 독재까지 적극 지지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공회의 서부교회 교인 출신이다. 영부인은 서부교회 철야기도회도 함께 한 정도다. 그러나 목사님은 김영삼 김대중 두 인물에 대한 비판은 참으로 혹독하다.

* 공회 내의 좌익들
해방 후 개명교회 내 똑똑한 청년들이 좌익 핵심이었다. 또 1949년에 이동해 간 위천교회에도 좌익 핵심과 닿아 있는 이들이 있었다. 이런 이들 때문에 6.25 전쟁 전에 백영희라는 이름은 이미 좌익에 대해 점령 후 처단 1순위에 올라 가 있었다. 목사님은 우익이 아니다. 공회도 그렇다. 공회는 그 신앙의 성향 때문에 어떤 부분은 우익처럼 어떤 때는 좌익처럼 오해를 받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교인 중에 정치적 우파들은 교회와 설교 중에 그들 좋아 하는 것만 기억한다. 반대로 좌익 좌파들은 공회를 좌익으로 만드려고 아주 작정을 한다. 최소한 암약은 한다. 어느 쪽이든 오해를 한 것이다.

강남 좌파가 세력을 잡고 있는 공회 어느 보수 교회에서 설교록 출간에 고문을 맡았던 학자, 또 자칭 설교록 달통의 청년이 '백 목사님은 설교 중에 박정희에 대해 언급한 일이 없다'는 취지로 발언한 적이 있다. 공회의 '교회와 세상 분리'라는 단어를 묘하게 비틀며 백 목사님은 박정희에 대해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하자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게 억눌려 그런지 침묵을 해 버렸다. 좌익의 특색 중 하나는 자기들이 꿈에 그려 본 것은 실존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행동까지 그렇게 한다. 나중에 아니면? 아니면 그만이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상은 순수하지 않느냐고... 누구 말 장난에 죽어 나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그래서 철이 없다. 천하를 불 질러 보는 것이다. 네로의 로마 방화처럼. 덕분에 순교자가 많이 나지 않았는가? 그렇게 말하면 맞다. 그들은 가룟 유다를 예수님과 동급으로 놓을 이들이다. 가룟 유다가 없었다면 십자가도 없다. 우리의 구원도 없다. 말만 가지고 천하를 지상 낙원으로 만든다.

(정부 최우선 정책의 경우)
2002년 대통령이 된 노무현 정권, 당시 비서실장이 현 문재인 대통령이다. 가을이 되면 국회에 다음 해에 집행할 국가 예산을 제출한다. 정부가 지출할 모든 예산이란 그 큰 제목만 잡아도 엄청나게 많다. 그런데 해마다 청와대는 국회에 예산을 청구하면서 정부 예산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을 몇 개 뽑아서 발표를 한다. '아동복지'에 대한 예산이 늘 우선 순위에 들어 갔다. 아동복지 예산의 가장 중요한 대목에 나는 여러 번 정책의 근본을 바꾼 적이 있다.

그 당시의 그런 상황 때문에 지금도 나를 대신 해서 나 주변의 교인을 살피는 한 분이 개인적으로 복지부의 아동정책에 민간 대표단에 포함이 되어 있고 그 대표단 전체에서 이 분의 발언권이 가장 강하다고 듣고 있다. 외부적으로는 다른 전국 단위 유명 단체가 제1의 단체처럼 활동을 한다. 그러나 민간 단체만이 모이는 내부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이 곳에서 나오는 발언은 전국이 모두 모아 놓은 자료와 법적 검토를 한 순간에 다 뒤집기 때문이다. 수백 억짜리 예산이나 전국 최고의 복지 기금 집행조차 아이들 장난처럼 우습게 되어 버린 경우가 여러 번 계속 되다 보니 그렇다. 그냥 시골의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집 청년으로 평생을 살았지만 공회의 시각, 공회의 성격이라는 것이 어디든지 움직이면 이렇게 된다.

다음 기회에 2편의 글을 통해 좀 자세히 적고자 한다.
다 적을 수는 없지만 공개해도 될 만한 사안을 서너 가지 들어 보면 공회 신앙으로 사는 분들에게는 왜 공회가 공회인지 알 수 있을 듯하고, 백영희 신앙에 대한 저력이나 영향력이 그냥 기독교의 교리 범위에서 이론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고 공감할 듯하다. 나는 정부 최고 실무 담당자들과 이런 일을 많이 거쳤다. 오직 내가 살필 나의 교인의 절박한 문제가 있을 때 그리고 내가 꼭 도와야 할 일일 때만 그렇게 했다. 그 때마다 나는 백영희라는 이름을 기억한다. 내게 좀 괜찮은 것이 있으면 거의 다 그 분에게 듣고 배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백영희 이름을 늘 붙들고 있다. 그의 자녀들은 그 이름에 손도 대지 말라고 7년을 수백 건 고소하지만 이 세상이 강제로 떼놓으면 잡지 못할지라도 나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놓지 않는다. 그 것이 의리가 아닐까? 그 것이 최소한의 인격이 아닐까? 주변의 동지들은 뻔하니 얼른 줘 버리자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군담을 한다. 자기에게 10원짜리 손해 보는 일이 있을 때는 수천 번을 버티며 끝을 보더니... 당신에게 백영희 노선이란 10원짜리에 미치지 않았던가!
전체 4

  • 2019-10-10 09:06
    (개인적인 답)
    검정고시를 보는 다수인 불신자가 평일에는 바쁘게 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신앙을 버리고 주일날 시험을 치르고 있었던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주일 시험이 아니라, 평일 시험을 치르기를 원한다고 단정할 수 있었을까?

    제 생각으로는, 안 그래도 일요일 하루 밖에 쉴 수 없는데, 그날에 시험을 봐야 했으니, 시험 볼적마다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신앙이 있어서 주일 시험이 아니라 평일 시험을 원한 것이 아니고, 평일에 시험을 보면서 하루 더 쉬고 싶어하는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2019-10-10 18:23
    여러 이유 중에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연결 지어 더 찾으면 좋겠습니다. 공회는 하나를 가지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피다 역사적 교리들과 성경 난해절을 모두 해결했고 공회의 교회 운영도 그렇게 나왔습니다. 주5일 근무제라는 극단적 노동권이 확보 되기 이전, 그리고 주인이 무조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던 과도기에 우리 공회 교인들이 주로 해당 되었던 우리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시대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 2019-10-11 10:21
      주 5일이 도입되기 전 일요일 시험을 주장했던 것은, 일주일에 일요일 하루만 쉬는 날인데, 그 날에 교통 체증이나, 평일 일과에 지장을 주지 않으니까 국민의 편의를 위하여 시험을 보는 날로 정한다는 것인데,

      이것을 반대로 돌려서 생각하면, 단 하루밖에 쉬는 날이 없는데, 이 일요일을 국가가 개인의 삶에서 빼앗아감으로 헌법상 보장된 종교의 자유, 휴식권에 도리어 도리어 제제를 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관점이었을까요?

  • 2019-10-11 11:34
    조회 100회를 넘기는 시점이어서 상기 첫 글의 본문 중에 보류해 둔 '과제' 부분을 보충합니다.
    윗글에 대해서는 보충을 통해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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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국가에 반영된 공회 의견들 - 공회와 세상 (보충) (4)
서기 | 2019.10.09 | 추천 0 | 조회 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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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3
New (16) 전국 최고, 최초, 최대를 휩쓴 기록들
서기 | 2019.10.13 | 추천 0 | 조회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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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6
사후 30년을 돌아 보며 - 연구소의 역사적 고찰
서기 | 2019.09.07 | 추천 0 | 조회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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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7
(1) 이 노선을 위해 특별히 예비 된 우리
서기 | 2019.09.07 | 추천 0 | 조회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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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9
(2) 한 사람의 사례로, 각자 자기를 살펴 보셨으면
서기 | 2019.09.08 | 추천 0 | 조회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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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
(3) 백영희의 학습 세계, 나의 과거를 돌아 본다. (3)
서기 | 2019.09.11 | 추천 0 | 조회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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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6
(4) 백영희 설교의 자료화, 1948년의 의미 (1)
서기 | 2019.09.14 | 추천 0 | 조회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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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7
(5) 공회의 '선교관'
서기 | 2019.09.15 | 추천 0 | 조회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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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1
(6) 모이면 썩고 흩어지면 사는, 진리의 세계
서기 | 2019.09.17 | 추천 0 | 조회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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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
(7) 우리는 못났다. 그러나 자라 가면 된다. (1)
서기 | 2019.09.20 | 추천 0 | 조회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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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3
(8) 백영희 가정의 교육 - 이 노선 우리에게 주신 보석들
서기 | 2019.09.22 | 추천 0 | 조회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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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
(9) 공회의 결혼 이야기 - 20세에 결혼하고 30세에 아이 4명
서기 | 2019.09.22 | 추천 0 | 조회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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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10) 나의 총공회 1등 기록들 - 혼자 달리니 민망했다.
서기 | 2019.09.24 | 추천 0 | 조회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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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9
(11) 공회의 감탄할 기록들 – 모두가 가장 평범한 것에서
서기 | 2019.09.27 | 추천 0 | 조회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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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2
변치 않는 사명, 변하는 사명
담당 | 2019.09.07 | 추천 0 | 조회 94
담당 2019.09.07 0 94
1193
다윗의 전쟁, 그 모든 향방은 '성전' 건축
담당 | 2019.09.07 | 추천 0 | 조회 89
담당 2019.09.07 0 89
1147
다윗의 성전 준비로 본 연구소의 사명
담당 | 2019.08.30 | 추천 0 | 조회 173
담당 2019.08.30 0 173
1194
훌륭한 지도자의 당대와 후대
담당 | 2019.09.07 | 추천 0 | 조회 118
담당 2019.09.07 0 118
1146
압살롬과 시므이 (1)
담당 | 2019.08.30 | 추천 0 | 조회 168
담당 2019.08.30 0 168
1276
세상의 어느 장관, 공회의 어느 장관 (1)
담당 | 2019.09.18 | 추천 0 | 조회 181
담당 2019.09.18 0 181
1131
'시체를 도적질하여 갔다'고 퍼뜨리니 오늘까지..
담당 | 2019.08.24 | 추천 0 | 조회 168
담당 2019.08.24 0 168
1125
이론적 양심가들의 불장난과 시대의 균형추
담당 | 2019.08.21 | 추천 0 | 조회 232
담당 2019.08.21 0 232
1133
최악의 좌익이, 정상적 우익으로 - 안병직으로 본 공회 (1)
회원 | 2019.08.25 | 추천 0 | 조회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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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고정 생활의 농경식과 이동 생활의 목축식
담당 | 2019.08.21 | 추천 0 | 조회 122
담당 2019.08.21 0 122
1123
매년제와 집회
담당 | 2019.08.21 | 추천 0 | 조회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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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세상의 셈법, 신앙의 셈법 - 손익을 기준으로
담당 | 2019.08.21 | 추천 0 | 조회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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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
공회의 '실행'론, 이 노선의 희망
담당 | 2019.08.18 | 추천 0 | 조회 190
담당 2019.08.18 0 190
1111
'조국 후보' 논쟁 - 공회만이 아는 국가적 이야기들 (2)
담당 | 2019.08.17 | 추천 0 | 조회 415
담당 2019.08.17 0 415
1092
비밀글 부공1의 대구 기도원 철거와 집회 탈선 역사 (부공2측 공개 발언) (1)
부공2 | 2019.08.11 | 추천 0 | 조회 14
부공2 2019.08.11 0 14
1081
지명과 역사 - 백영희
담당 | 2019.08.03 | 추천 0 | 조회 278
담당 2019.08.03 0 278
1073
돌아 본 1992년 12월의 궤변
담당 | 2019.07.28 | 추천 0 | 조회 288
담당 2019.07.28 0 288